소설리스트

The Boss-30화 (3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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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루.

    내 삶이 지루해지는 데까지 고작 하루밖에 걸리지 않았다.

    보스가 내 삶에서 잠시 이탈하며 의욕까지 함께 사라졌다. 그동안 즐겨했던 온갖 게임들도 시시했고, 매번 어리석어지는 군중들의 모습도 무덤덤하게 느껴졌다. 보스가 나타난 지 채 이레가 되지 않았을 때 나는 물론이고 우리들의 삶은 많이 변해 있었다.

    바닷가를 다녀온 뒤로 나는 나 원장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나와 비슷한 연소증후군을 겪는 사람들로 인해 그녀의 병원은 평일 주말 가리지 않고 바빴다.

    혹시나 하는 바람을 안고 병원에 들렀지만 한산했던 병원은 나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덕분에 서 간호사는 하루 종일 제대로 쉬지 못하고 일에 열중해야했다. 나 원장이 바쁜 건 당연했다.

    그나마 늦은 밤 퇴근할 때 짧게 몇 마디를 주고받았지만, 육체적으로 너무 지친 나 원장을 오래 붙잡을 수는 없었다.

    결국 안부 인사 몇 마디만 나누는 게 전부였다.

    병원을 조용히 나선 나는 털레털레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진짜 삼촌 말대로 인간관계를 늘릴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임이나 다른 여가 생활이면 충분하다는 지금까지 내 생각이 조금씩 변하는 것 같았다.

    "후……. 진짜 어디 동호회라도 나가 볼까?"

    "동호회는 무슨 동호회야. 젊은 놈이 일을 해야지."

    "어? 삼촌!"

    우리 집 대문에 머리를 콩콩 찍으며 혼자 사색에 잠겨 있을 때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황급히 몸을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깔끔한 양복차림의 중후한 중년 남성이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삼촌 앞으로 걸어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물어 보았다.

    "삼촌. 근데 웬일이에요?"

    안타깝게도 내 입에서는 낯간지러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애써 반가움을 숨기며 나는 삼촌에게 평소처럼 툴툴거렸다. 나름 애정의 표현이었다.

    삼촌은 피식 웃더니 이내 내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이 놈아. 오랜만에 삼촌 봤으면 어떻게 지냈냐고 물어봐야지."

    "에이, 무슨. 딱 보니 살도 안 빠졌고. 혈색도 좋은 게 앞으로 사오십년은 거뜬하겠구만!"

    "하여튼 말은……."

    내 너스레에 삼촌이 허허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삼촌의 시선에서 따스한 감정이 느껴졌다. 꼭 피가 섞여야 가족인 것은 아니라는 증거였다.

    "그나저나 진짜 무슨 일이에요? 주말인데 집에서 좀 쉬시지."

    "오랜만에 그 자식 보러 가려고. 네 녀석도 작년에 가고 안 갔을 거 아냐?"

    "……원래 아픔은 가슴에 묻는 거라고……악! 삼촌! 귀! 귀!"

    "마음에도 없는 소리 그만하고, 얼른 타라. 벌써 10시다."

    삼촌 앞에서 가식은 통하지 않았다. 나는 삼촌에게 귀를 잡힌 채 휘황찬란한 세단에 올라탔다. 확실히 잘나가는 로펌의 변호사라 그런지 돈을 잘 버는 것 같았다.

    푹신한 고급진 가죽을 느끼며 시트에 몸을 실자마자 삼촌이 페달을 밟았다.

    묵직한 엔진 소리와 함께 우리는 시외로 향했다.

    주말이라 차가 막힐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도로는 한산했다.

    처음에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지만, 교통의 개미지옥에 들어서도 체증이 심하지 않자 의아했다.

    "웬일이래? 용인이 이렇게 쾌적할 때가 다 있네?"

    "어이고. 몇 번이나 와봤다고."

    "에이, 매년 이맘때 삼촌이 날 끌고 갔잖아요? 건망증은 좀 있지만 기억력이 나쁜 건 아니에요."

    "흰소리는 그만하고. 이제 어디 직장에 들어가 일을 좀 하고 사는 게 어떠냐? 원하면 우리 로펌에 자리하나 마련해 주마."

    삼촌의 레퍼토리는 변함이 없었다. 매번 만날 때마다 나를 밖으로 끄집어내려고 했다. 아직 한창인 사내놈이 집구석에 처박혀 나갈 생각을 안 하는 게 마음에 걸린 것 같았다.

    물론 내 레퍼토리도 변하지 않았다.

    "에이, 삼촌. 내가 지금 직장 생활을 할 수 있겠어요? 그거 꼴값이에요. 갑은 되도, 꼴값은 떨지 말아야죠."

    "집구석에 처박혀서 혓바닥만 단련했나. 하여튼 말은 잘하네."

    "그리고 삼촌 로펌에 선영이가 있잖아요? 걔가 날 보면 어떻게 할 지 알면서 그래요?"

    "에효……. 그 녀석은 언제 그 괄괄한 성격을 좀 죽일지. 며칠 전에는 의뢰인에게 쌍욕을 날렸단다. 애비 망신은 다시키는 것 같으니라고."

    삼촌. 그건 괄괄한 성격이 아닌데요. 그냥 미친개에요, 걔는.

    차마 삼촌 앞에서 딸을 욕할 수는 없었다. 말은 저리해도 누구보다 정이 깊은 사람이 삼촌이었다. 삼촌은 전형적인 우리네 아버지와 같았다.

    내가 아픈 손가락인 것만 제외하면.

    나는 속에도 없는 말을 하기 위해 입술에 침을 바르며 대꾸했다.

    "걔도 내년이면 서른인데. 30대가 되면 좀 나아지겠죠. 애는 착하잖아요."

    "그래. 애가 마음은 착한데, 행동이 걸걸하니. 이제는 선 자리도 안 들어와서 큰일이야. 니 숙모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착하기는 개뿔. 지 아빠 뺏어간 놈이라고 나한테 이단 옆차기를 날린 년인데. 진짜 선호가 불쌍하다.

    "벌써부터 애 시집보내려고 하는 거예요?"

    "벌써라니? 네 말대로 이제 서른이야. 서른! 얼른 치워야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냐. 왜? 아쉬우냐?"

    "어, 삼촌.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마세요. 걔는 여자가 아니네요. 저한테는."

    "어릴 때부터 그렇게 치고 박고 같이 자랐으니……."

    여동생도 아니고, 그냥 웬수인데요. 내 동생은 선호뿐입니다요, 삼촌.

    "그렇죠. 근데 삼촌."

    "왜?"

    "이제는 그냥 제삿날을 알려주세요. 내가 애도 아니고 매년 이러는 것도 지겹지 않아요?"

    내 일격에 삼촌이 잠시 말문을 걸어 잠갔다. 이해는 갔다. 어릴 때 부모를 사고로 잃은 친구 아들을 위하는 마음은 충분히 느꼈다.

    다만 나도 이제 서른이었다. 20여 년 전 상처는 이미 딱지가 앉다 못해 새 살이 돋은 지 오래였다. 매년 비슷한 시기지만 다른 날짜에 성묘를 가는 건 더 이상 바라지 않았다.

    잠시 말이 없던 삼촌이 걸걸한 침음과 함께 말문을 다시 열었다.

    "됐다. 네가 색시 데리고 오면 알려주마."

    "그것도 색시한테?"

    "그럼. 네 놈한테 알려줬다가는 그 녀석 굶어죽지."

    "이미 죽은 사람이 어떻게 또 죽어요?"

    아차! 이건 실수다.

    성자처럼 나를 돌보는 삼촌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실수였다.

    결국 나는 오랜만에 삼촌에게 뒤통수를 헌납해야했다.

    퍽!

    "윽!"

    "이 놈이!"

    "아으……. 실수라니까요. 잘못했어요, 삼촌. 다신 안 그럴게요. 진짜 실수에요."

    "……망할 놈의 자식."

    누굴 지칭하는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그 말을 끝으로 삼촌은 말문을 걸어 잠갔다. 나보다 삼촌이 부모님의 죽음을 더욱 안타까워하는 것 같았다. 단순히 안타까워하는 정도가 아니라 마치 한이라도 맺힌 얼굴이었다.

    침중한 삼촌의 얼굴을 흘끗 본 나는 입 안이 썼다.

    "죄송해요."

    진심을 담아 용서를 구했지만 삼촌은 입을 열지 않았다.

    무거운 공기가 차안을 가득 메웠다.

    언제나 입이 문제였다.

    빌어먹을 주둥이.

    ***

    나란히 자리한 봉분이 깔끔해졌다.

    내가 한 시간 동안 열심히 손으로 잡초를 뽑은 덕분이었다. 요즘 제초기를 쓰기도 한다는데 삼촌은 은근히 보수적이었다. 날붙이도 쓰면 안 된다며 낫도 쓰지 않을 정도였다.

    덕분에 오랜만에 제대로 운동 겸 노동을 한 것 같았다.

    슬슬 허리가 쑤실 쯤 마지막 잡초를 뽑아낼 수 있었다.

    나는 덩그러니 모아 놓은 잡초를 한 곳에 모아 묘지 아래 비탈로 던져 버렸다.

    그 사이 삼촌은 제사상을 차렸다.

    "근데 삼촌. 원래 제사상이 이래요? 무슨 조율이시니, 홍동백서니. 그러지 않나?"

    "니 애비는 과일을 딱히 즐기지 않았다. 네 엄마도 마찬가지고. 둘 다 고기를 좋아했지. 그러니 좋아하는 걸 준비해야지."

    "그래도요. 무슨 제사상에 막걸리에 파전. 그리고 치킨, 족발이에요?"

    "어허! 얼른 와서 술잔이나 올려!"

    "눼, 눼."

    요상한 제사상이었지만 삼촌은 제례를 중요시했다. 성묘라지만 집에서 따로 제사를 지내지 않기에 그럴 것 같기도 했다. 이유야 어찌됐든 나는 삼촌의 지도를 받으며 부모님께 차례로 술잔과 절을 올렸다.

    "마음껏 흠향하거라. 뭐 그리 급하다고……. 망할 놈."

    역시 망할 놈은 아버지였나 보다. 제례를 끝낸 뒤 삼촌은 아버지의 봉분 앞에 앉아 술잔을 나눴다. 마치 오랜 친우가 앞에 있는 것처럼.

    나는 아쉽게도 술을 마실 수 없었다. 매년 이랬다. 올 때는 삼촌이 운전했고, 갈 때는 내가 운전했다.

    "삼촌. 적당히 마셔요. 이제 나이를 생각해야지. 그러다가 선영이 시집가는 거 못 볼 수도 있어요?"

    "아직 나 젊다. 술이나 따라 봐. 오랜만에 친구랑 한 잔하는데 방해하지 말고."

    슬쩍 안주를 하라고 족발과 치킨을 건네 봤지만 삼촌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역시 운명은 어쩔 수 없나보다.

    나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삼촌의 잔에 탁주를 채워드렸다. 물론 아버지의 잔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잔을 채우기 무섭게 삼촌은 아버지의 잔을 자신의 잔으로 퉁 치며 탁주를 들이켰다.

    그 뒤로 나는 치킨을 뜯으며 두 분의 잔을 채워드렸다.

    닭 뼈가 상자에 가득 쌓였을 무렵.

    기어코 삼촌이 술에 취해 쓰러졌다.

    "하여튼……. 아빠. 아빠도 좀 너무한 거 아냐? 이런 친구가 있는데 뭐가 그리 급했어? 엄마도 그래. 둘 다 좀 너무했어."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럴 리가 없었다.

    봉분 위에 쓰러진 삼촌의 등이 오늘따라 유난히 작아 보였다. 그 모습에 가슴이 시렸고, 눈가가 뜨거웠다. 강산이 두 번 변해도 아픔은 쉬이 아물지 않았다.

    일 년 만에 속마음을 토해낸 나는 후련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 나 갈게. 삼촌이 너무 취했다. 내년에 또 올 테니까, 두 분 싸우지 말고 잘들 지내시고."

    주변을 정리하며 나는 부모님께 인사를 했다.

    다음을 기약한 나는 술에 취한 삼촌을 등에 업고 비탈길을 조심스레 내려갔다.

    "삼촌, 살이 좀 빠신 거 같네. 이번 복날에 보양식 좀 챙겨드려야겠어."

    어느덧 나는 나이 먹는 게 서글프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나이가 되어 버렸다.

    그것이 내 나이든, 아니든.

    가벼운 삼촌의 머리카락이 희끗한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

    취한 삼촌을 댁에 모셔다 드렸을 때 나는 뜻밖의 실랑이를 벌여야했다.

    "아, 작은 엄마. 나도 이제 서른이다. 무슨 용돈이야?"

    "얘는! 그냥 어른이 주면 감사합니다. 하고 받는 거야. 너 지금 돈 많다고 유세떠니?"

    "갑자기 또 그런 식으로 빠져? 작은 엄마 옛날에는 안 그랬는데. 이제는 진짜 아줌마다."

    "좀 있으면 할머니지. 그러니 그냥 받어. 얼른!"

    "아, 진짜……."

    결국 나는 숙모가 쥐어주는 누런 종이를 주머니에 넣어야했다. 뭐, 반쯤 숙모가 억지로 쑤셔 넣은 거지만. 어쨌든 나이 서른에 용돈을 받자 기분이 묘해졌다.

    억지로 내 주머니에 용돈을 넣는데 성공한 숙모가 승자의 미소를 짓다말고 불만스런 표정을 드러냈다.

    "너는 젊은 애가 뭐가 그렇게 바쁘다고. 저녁 먹고 가라니까."

    "언제는 젊은 놈은 바쁘게 살아야 된다며?"

    "내가 언제? 그거 선영이 아빠가 한 말이야. 난 아냐."

    "부부는 일심동체라며?"

    내가 조목조목 따지고 들자 숙모가 얼굴을 붉혔다.

    그 순간 아차 싶었다.

    짝!

    "이게 어디서 엄마를 놀려? 너 자꾸 이럴래?"

    "아으……. 무슨 내 주위에 여자들은 다 이렇게 손이 매워?"

    "뭐? 너 여자 있니? 있어? 있구나!"

    "아냐. 내 주치의. 그 여자도 손이 좀 맵거든."

    숙모가 오해를 할까 싶어 서둘러 설명했지만 소용이 없어 보였다. 숙모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흘겨보았다. 마치 얼른 진실을 토해내라는 것 같았다.

    순간 이대로 있다가는 좋은 꼴을 못 볼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재빨리 판단을 내린 나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다짜고짜 인사를 했다.

    "작은 엄마! 나 간다! 다음에 봐! 그리고 삼촌 몸보신 좀 시켜 줘. 너무 말랐더라."

    "얘! 고영아! 고영아!"

    "빠이!"

    나는 승자의 미소를 지은 채 도망치는데 성공했다. 깔끔한 성격의 숙모가 슬리퍼를 신은 채 쫓아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역시 사람은 지피지기였다.

    숙모의 마수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아파트 현관을 나섰다.

    "어? 고영이 형!"

    "너……."

    삼촌의 아들이자 내 동생과 같은 선호였다.

    선호는 막 아파트를 나서는 나를 발견하고 허겁지겁 달려와 덥석 안겨들었다.

    "어이, 김선호. 이거 놓지? 어디서 앵겨?"

    "에이, 왜 이래. 형, 진짜 오랜만이다. 어떻게 연락을 해도 씹냐? 씹어! 내가 껌이냐?"

    "씹기는? 읽었잖아? 그럼 된 거지."

    "되기는 무슨! 답장이 없었잖아!"

    더 이상 이 주제로 이야기를 하면 내가 손해였다. 메시지를 받고 답장을 보내지 않은 건 맞으니까. 나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됐고. 선생이라는 놈이 꼴이 그게 뭐냐? 그래가지고 애들이 뭘 배우겠어?"

    "왜 이래? 나만한 국어 쌤이 또 어딨다고. 나 학교에서 인기 많아?"

    "남고에서 인기 많아서 뭐한다고? 아니다. 여고에서 인기 많은 것 보다는 낫겠네."

    "어이, 형님. 지금 그거 위험한 발언인거 알지?"

    선호와 나는 자연스레 나란히 걸었다. 녀석의 누나인 선영이와는 달리 나와 선호는 어릴 때부터 친형제보다 더 우애가 좋았다. 아니, 선영이만 아니었다면 지금도 같이 살고 있었을 지도 몰랐다.

    어쩌겠어. 애가 질투의 화신인데. 그리고 걔 말도 맞았지.

    잠시 후 우리는 아파트 근처에 있는 호프집으로 들어갔다.

    결국 나는 그날 삼촌 코스프레를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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