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he Boss-29화 (29/200)
  • <-- Morning Calm -->

    ***

    아침은 아침일 뿐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변함없이 똑같이 하루를 시작했다. 몸을 씻었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나마 어제와 다른 점은 누군가를 위해 귀찮음을 무릅썼다는 점이었다.

    부엌에 들어간 나는 아침을 준비했다. 물론 멋진 셰프처럼 조리를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토스트를 버터에 굽고 피넛 버터와 블루베리 잼을 발랐다.

    식탁 위에 빵만 덩그러니 있으니 조금 심심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늦게 냉장고를 열어 바나나와 자몽을 꺼냈다. 하얀 접시 위에 두 과일의 과육만 골라내서 올려놓으니 그럴 듯한 아침 식사가 됐다.

    "아! 달걀……도 해야 하나? 슬슬 귀찮은데."

    벌써 귀찮아졌다. 그래도 이왕 시작한 김에 끝까지 마무리 할 필요가 있었다. 달걀의 노른자가 터지지 않도록 한쪽만 익힌 것을 접시에 올려 내 놓으니 나도 모르게 침이 고였다.

    역시 노동 후에 먹는 밥이 꿀맛이구나.

    어제 도시락의 대가로 준비한 아침 식사를 잠시 바라보던 나는 고개를 돌렸다. 아직도 나 원장이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나는 내 침실문을 두들겨야했다.

    탕탕.

    "나 쌤. 밥 먹어. 쪽은 이미 팔렸고. 속이라도 다스려야지. 그냥 나와."

    "싫어! 안 먹어!"

    일어나 있었네.

    화들짝 놀란 나 원장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발음이 또렷한 것을 보니 이미 일어나 있었던 것 같았다. 다만 쪽팔려서 나오지 못했을 뿐.

    나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더욱 담담한 소리로 말했다.

    "그냥 나오라니까. 안 나오면 열쇠 기사 부른다?"

    내 말이 끝나는 순간 나 원장의 조용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럼 그렇지.

    이내 잠겨있는 문이 풀리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살짝 열린 방문 사이로 나 원장의 울상이 보였다.

    나는 문틈 사이로 손을 넣어 나 원장의 손목을 잡아 당겼다. 그녀는 끈 떨어진 연처럼 손목을 내준 채 터덜터덜 걸었다. 그래도 배는 고픈 모양이었다.

    영혼 없는 얼굴의 나 원장을 식탁 의자에 앉히며 나는 맞은편으로 가서 앉았다.

    "얼른 먹어. 그래도 내가 열심히 차렸으니까. 귀한거야. 어디 가서 이런 거 못 먹는다?"

    "치. 속 쓰린 사람한테 빵을 먹으라고? 그냥 나가서 해장국이라도 좀 사오지."

    "투정은……. 싫음 말어. 어제 도시락 싸줘서 대접하려고 했더니."

    "아냐. 이왕 차렸으니 먹는 게 예의지. 잘 먹을게."

    토스트를 한 입 크게 베어 물며 나 원장의 눈치를 살펴보니 썩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그녀는 물 한잔을 시원하게 원샷 하는 걸 시작으로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잘 먹는 걸 보니 속이 그렇게 엉망은 아닌 듯 싶었다.

    하긴, 진짜 많이 마신 건 아니니까.

    그 뒤로 우리 둘은 아무런 대화 없이 배를 채웠다. 딱히 할 말이 없었던 것도 있었고, 배가 고픈 것도 있었다. 특히 나 원장은 어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우동 한 그릇 이후로 먹은 거라고는 소주밖에 없었다.

    아, 장식용 무채도 먹었지.

    어젯밤 있었던 일이 떠오르자 자연스레 내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조금만 더 회상을 이어갔다면 분명 폭소하고 말았을 게 분명했다. 다행히 가출한 눈치는 지난밤 사이 돌아온 상태였다.

    나는 간신히 웃음을 참은 채 아무렇지 않은 척 나 원장에게 물어 보았다.

    "나 쌤. 먹을만 해?"

    "쫍, 쭙, 음? 응. 맞있어. 요리 좀 한다?"

    "요리는 무슨. 그냥 빵 굽고 쨈 찍어 바른 게 단데. 그래도 맛있다니 좋네. 그나저나 술 좀 작작 마셔."

    "……나 원래 술 안 마셔. 악해서."

    "그런 사람이……. 아니다. 밥 먹을 때 뭐하는 짓이냐. 미안해. 마저 먹어."

    눈치가 돌아오기는 개뿔.

    다행히 최악까지 치닫지는 않았다. 나 원장은 이 와중에도 정말 맛있게 빵과 과일을 먹어치웠다. 그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를 뒤졌다. 과일 몇 개와 주스를 꺼내든 나는 얼른 그것을 다시 접시에 담았다. 과일 한 점이 접시에 올라오기 무섭게 그녀가 받아먹었다.

    대화는 없었지만 분위기는 썩 나쁘지 않은 아침이 이어졌다.

    결국 냉장고의 모든 과일을 동내고 난 뒤에야 우리는 따듯한 믹스 커피를 한잔씩 나눠 마시며 거실 소파에 몸을 뉘였다.

    나는 커피의 달콤한 향기를 즐기다 말고 시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기, 나 쌤. 지금 10신데? 출근 안 해도 괜……."

    "꺅! 늦었다! 어떡해!"

    "……찮지 않네. 고생해, 나 쌤."

    나 원장은 뒤늦게 시간을 확인하고 폭풍처럼 내 침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어제와 같은 옷을 입은 그녀가 거실을 광속으로 가로질렀다. 이내 거칠게 닫히는 문소리가 내 평정을 깨트렸다.

    쾅!

    "문 깨지겠다. 하여튼, 저래가지고 시집이나 가겠나."

    심드렁한 말을 내뱉으면서도 두 눈은 나 원장이 채 마시지 못하고 두고 간 커피 잔에 쏠려 있었다.

    이왕 늦은 거 서두른다고 뭐가 달라지나. 그냥 좀 마시고 가지.

    괜히 조용한 아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때론 시끌벅적한 것도 좋았다. 오늘 같은 하루가 일상이 되면 꽤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후르릅 커피를 마시며 나는 평소로 돌아왔다. 리모컨을 찾아 TV를 켰고, 새로운 일이 있나 채널을 돌려 보았다. 세상은 어제와 달랐다.

    뉴스에서는 기현상에 대해 더욱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있었다. 마치 올림픽이나 월드컵 시즌 같았다. 그때처럼 모든 매체가 보스에 대해서 온갖 정보를 방출했다.

    대부분 쓸모없는 정보였지만 개중에는 솔깃한 이야기도 있었다.

    [천신이든, 악신이든. 결국 인류는 강제로 새로운 체계를 받아들여야합니다. 기로에 섰다? 기로는 없습니다. 강제로 이 기현상이 진행됐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대비를 한다? 핵무기를 만든다고 흔히 보스라 말하는 것을 없앨 수 있을까요? 개인의 가치관은 물리력을 통해서 강제할 수도 있다지만, 보스는 아닙니다. 이 기현상에게 우리는 물리력을 행사할 수 없으니 말입니다.]

    화면에서는 한 패널이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생각을 드러냈다. 다른 패널들도 쉽사리 첨언하거나 반론하지 못할 정도로 그 남자의 말투는 확신에 차 있었다. 나도 저 남자와 거의 비슷한 생각이었다.

    단지 한 가지 생각만 달랐다.

    "새로운 체계가 아니라, 그냥 문화가 될 것 같은데. 스포츠처럼. 물론 우리에게 물리적으로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있어서지만. 그건 좀 어렵나?"

    디테에게 들었던 경고가 문제였다. 몽마와 대결에서 패하면 생기는 페널티. 불능은 일종의 진입장벽 역할을 할 것 같았다.

    그것만 어떻게 해소할 수 있다면 꽤 재미있는 세상으로 변할 지도 몰랐다.

    "결국 시간이 되면 알겠지. 판도라의 상자처럼."

    보스라는 상자에서 희망이 나올지, 절망이 나올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단지 한 가지는 확실했다.

    무엇이 나오든 인류는 상자가 열리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결국 순응하는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적응하지 않을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며."

    해당 패널을 끝으로 내 관심을 끄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나는 흥미를 잃은 채 스마트폰을 들었다. 나도 정말 어쩔 수 없는 스마트폰 좀비인 것 같았다.

    에이, 눈 나빠지게. 그냥 렙탑으로 체인지!

    기껏 사 놓고 거의 쓰지 않는 렙탑이 오랜만에 제몫을 다했다.

    나는 소파에 편한 자세로 기댄 채 렙탑으로 여기 저기 사이트를 둘러보았다. 지난번 랭커 관련 글에도 혹시나 하고 들어가 보았다. 달라진 사항은 없었다.

    "쩝, 좀 궁금하기는 한데."

    궁금했지만 해소할 길이 없었다. 이미 튜토리얼인 몽마의 성체가 파괴된 상태였다. 그 덕분에 튜토리얼은 끝이 났다.

    이게 다 나 때문인가? 어디 가서 나불거리지 말아야겠다.

    어떤 일에 대해서 사람은 두 종류로 나뉘었다.

    좋아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

    몽마의 성체를 파괴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이 일에 대해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고, 싫어하는 사람이 있었다. 심지어 싫어하는 사람들 중에는 저주하는 이들도 존재할 정도였다.

    괜히 마른침을 삼킨 나는 계속 인터넷을 뒤져보았다. 어젯밤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거실에는 마우스를 클릭하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딸각.

    "음?"

    멍한 눈으로 웹 서핑을 하던 나는 재미있는. 아니, 조금은 섬뜩한 글 하나를 발견했다.

    [튜토리얼의 종료, 누구의 소행인가?]

    외국 포럼의 주장을 누군가 번역해 놓은 글이었다. 나도 모르게 가슴이 뜨끔거렸지만, 그와 반대로 손은 민첩하게 움직였다. 주르륵 올라오는 본문을 바라보던 나는 무심결에 한 구절을 입으로 옮겼다.

    "충격 흡수를 위해 마련된 장치를 누군가 파괴한 것이 분명하다. 그 증거는 보스의 안내다. 시스템 이식은 바꿀 수 없는 운명이며, 이식 잔여 시간은 본래 정해졌던 수명이다."

    글쓴이는 현재 상황을 새롭게 분석했다. 그는 현재 잔여 시간이 바로 보스의 주인이 인류에게 남긴 시간이라 주장했다. 본래의 시간이 대폭 축소된 탓에 인류는 더욱 큰 충격을 받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글의 말미에는 인류는 앞으로 다가올 격변에 순응하고 빠르게 적응해야한다고 적혀 있었다. 그것을 위해 각국 정부는 발 빠르게 대응해야 한다고 했다. 기존 법률과 규제로는 새로운 세상에 기민하게 대응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모든 내용을 읽고 나서야 나는 참았던 숨을 쉴 수 있었다.

    "후우……. 이거 내가 실수한 건가?"

    아니다. 미안하지 않았다. 이게 왜 내 잘못이란 말인가.

    곰곰이 생각해본 나는 고개를 저었다. 튜토리얼을 빠르게 깰 수 있었던 것에는 분명 외적 요인이 작용했다. 다만 그 외적 요인은 내가 아니라 보스를 창조한 존재가 막아야했다.

    참가자.

    나는 그저 보스의 참가자였을 뿐이었다. 내 자의로 몽마의 성체로 날아가지도 않았고, 내 자의로 몽마들과 섹스 배틀을 치르지도 않았다. 나는, 우리들은 강제로 끌려간 힘없는 존재였다.

    피의자가 문제지, 피해자는 문제가 아니었다.

    내 본심을 확인한 이후로도 나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확실히 보스는 흥미로웠다. 지금까지 살면서 이렇게 내 관심을 끌었던 적이 없었다.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부르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읽었다.

    페널티로 불능이 된 사람들의 절규도 들렸고, 보스가 사라져 허탈감을 느끼는 이들의 한탄도 느꼈다.

    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심심한 내 삶에 보스는 재미있는 유희거리였다. 처음부터 의문이었지만 여전히 보스에 대한 걱정은 있을지라도, 두려움은 없었다.

    재미있는 장난감이 어떤 식으로 변할 지는 아직 꽤 많은 시간이 남았다.

    666시간.

    한 달에 조금 못 미치는 시간이 더욱 길게 느껴졌다.

    "그런데 정치하는 사람들은 미치고 팔짝 뛰겠네. 풀 수 없는 문제는 사람들이 풀라고 아우성치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물론 딱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무래도 우리나라 정치인들에 대한 이미지가 썩 좋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

    계속 서핑을 하다 보니 또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10레벨 찍은 사람들도 거의 없네? 하긴. 10레벨을 찍으려면, 황조 시랑까지였나? 스물네 번을 싸워 이겨야하니까. 총 쉰 마리니 거의 절반을 잡아야 10레벨이네?"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음격 10단계를 달성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몽마의 성체에는 총 쉰 마리의 몽마가 살고 있었고, 그들을 모두 사냥하면 음격 20단계에 들어설 수 있었다.

    다만 이해가 가지 않는 점도 있었다.

    "근데 버프가 없어도 할 만 하지 않나? 물약 좀 적절히 먹고. 게다가 나처럼 포로 상태를 밥 먹듯이 당하는 것도 아닐 텐데."

    작은 의문이 들었지만 이유는 금세 알 수 있었다.

    닷 새.

    마지막 몽마를 상대하는 하루를 제외하면 나는 4일에 49마리의 몽마를 사냥했다. 하루에. 즉, 한 번 몽마의 성체에 갔을 때 12마리 이상 사냥했다는 말이었다.

    하루에 열 번 이상 섹스를 할 수 있다면 그는 이시대의 변강쇠일 듯.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충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지 느낄 수 있었다.

    "빡쳐서 폭주해서 그랬구나."

    다른 이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정해진 상황 안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이었다. 그 영향이 어떤 식으로 나타나든 내 잘못은 아니라 생각했다.

    "근데 몽마의 성체가 하나였나? 따로따로 돌파하는 줄 알았는데. 괜히 동기화는 시켜 놔서. 원래 혼선이 무서운 법인데."

    솔직히 조금 아쉬움 감이 없지 않았다. 튜토리얼 종료 시간까지 몽마의 성체에 들락거릴 수 있었다면 엑스칼리버를 살리는데 도움이 됐을 것 같기도 했다. 그것을 못했다는 게 조금 아쉬웠다.

    "아무리 그래도 돈 주고 사는 건 좀 그런데……."

    내 속마음은 내뱉은 말과 달랐다. 솔직히 갈등하는 중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보스 체계가 사라지지 않은 이상, 성에 대한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쓸데없이 올곧은 도덕관념이 자꾸 내 용단을 방해했다.

    결국 나는 날이 저물 때까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아, 빌어먹을 결정 장애가 또 도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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