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he Boss-27화 (27/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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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앗을 파종합니다.]

    [……까지 666시간이 남았습니다.]

    비몽사몽간에 보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씁쓸하게도 나는 그 순간 또 세상이 난리가 나겠구나 싶었다. 다른 생각은 없었다. 그나마 주식을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감정이 전부였다.

    "나 진짜 사이코패스는 아니겠지? 에이, 나 쌤이 그건 아니라고 했지. 공감 능력이 떨어지기는 해도 그 정도는 아니라고."

    물론 나도 감정이 있었다. 길을 가다 다친 개나 고양이를 보면 안쓰러웠다. 단지 사람에 대해서는 경계심이 더 커서 문제였다.

    짧게 한숨을 내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처럼 아침을 시작했다. 나에게 오늘은 지금까지 지냈던 하루와 이제부터 지낼 하루와 다름없는 하루일뿐이었다.

    씻고, 마시고, 갈아입고.

    병원이었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다른 점이라고는 환복이 환복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여분의 환자복을 찾기 귀찮았다.

    자리에 앉는 나는 TV 리모컨을 손에 쥐었다. 그것도 잠시 다시 리모컨을 내려놓으며 대신 스마트폰을 들었다. 뉴스를 틀어 봤자 제대로 된 소식을 듣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아무리 개방됐어도 우리나라는 좀 경직된 사회니까."

    꼭 유교적 사회라고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조금 변질된 것은 분명했다. 세월이 흐르며 어쩔 수 없이 확대해석 되거나 재해석된 것이 문제였다.

    골치 아픈 생각을 금세 지우며 나는 스마트 좀비가 됐다.

    열심히 손을 놀리는 와중 나도 모르게 손을 멈추며 혀를 찼다.

    "쯧쯧. 그냥 감당할 수 있는 놈만 잡았어야지. 괜히 들이대서는……."

    내 스마트폰 화면에는 몽마의 성체에서 무리하게 사냥을 시도했다가 불능이 되었다고 한탄하는 이들의 소식이 흘러나왔다.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간 그들은 현대 의학을 너무 믿었다. 안타깝게도 비아그라로는 그들의 죽은 남성을 부활시킬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축복받은 건가? 아무리 패배해도 상관이 없잖아?

    "축복은 개뿔. 그냥 잃을 게 없는 놈이지."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해도 쉽지 않았다. 내 엑스칼리버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과연 이 녀석이 고개를 드는 날을 보고 죽을 수 있을까 싶었다.

    똑똑.

    "들어오세요."

    우울함을 후딱 날려버리며 나는 고개를 들었다. 괜히 간호사 앞에서 쪽팔릴 필요는 없었다. 나름 표정 관리를 하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간호사가 아니었다.

    의사였다.

    나는 반갑게 의사를 맞이했다.

    "나 쌤! 어쩐 일이야? 아침부터."

    얼른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내려간 나는 쪼르르 나 원장을 향해 달려갔다. 그녀의 앞에 도착한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짐을 넘겨받았다. 은근히 묵직한 게 무언가 싶었다.

    당연하다는 듯 짐을 넘겨 준 나 원장이 병실 여기저기를 훑어보며 말했다.

    "병원을 그렇게 싫어하는데. 병원 밥이라고 좋아하겠어? 오랜만에 솜씨 좀 발휘했지. 얼른 펴. 나도 아침 안 먹고 왔어."

    "오! 이거 밥이야? 진짜?"

    "그럼 진짜지. 새벽같이 일어나서 만든 거니까, 남기지 말고 꼭꼭 씹어서 다 먹어."

    "땡큐! 역시 나 쌤뿐이야. 나 쌤 나랑 결혼할래? 내가 잘해 줄 게."

    "실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얼른 자리나 깔아."

    농을 농으로 받은 나 원장은 병원 냉장고에 있는 생수병과 컵을 꺼내서 탁자로 돌아왔다.

    그 사이 나는 나 원장이 만들어온 도시락을 오와 열을 맞춰 나열하기 시작했다.

    이상한 보라색 밥.

    이상한 풀떼기 무침.

    이상한 해초때기 국물.

    이게 뭐지?

    전혀 먹음직스럽지 않았다. 육류가 없었다. 게다가 붉은 색이 실종됐다.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고 있을 때 나 원장이 내 손에 젓가락을 쥐어주었다.

    "얼른 먹어. 일부러 간을 심심하게 했어. 너 평소에 너무 짜게 먹어. 하긴, 사먹는 음식이 달고 짜고 하지."

    "……그래도 이거 너무한 거 아냐? 이게 절밥도 아니고. 아니, 절밥도 이 정도는 아니다."

    "나 그냥 갈까?"

    "알았어. 내가 나 쌤 정성을 봐서 먹기는 하는데. 내일은 딴 거. 아니, 점심은 나가서 먹자."

    "점심은 어차피 나가서 먹을 거야."

    나는 당기지 않는 밥을 당기지 않는 국에 말아 먹다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 원장이 정갈한 젓가락질 실력을 보여주며 무심히 답했다.

    "퇴원해도 될 것 같아. 그러니까 먹고 퇴원 준비 하자. 도와줄 테니까."

    "……나 쌤."

    나는 목 막힌 소리로 나 원장을 불렀다. 감격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럴 거면 왜 도시락을 싸온 거야? 그냥 나가서 먹으면 됐잖……아악!"

    "먹지 마! 굶어 죽어! 그냥 죽어버렷! 이 나쁜 놈아!"

    "아퍼! 악! 국 쏟아져! 나 쌤!"

    될 놈은 되고 안될 놈은 안되는 게 우리 인생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넌. 씨. 눈.

    이 세 글자가 왜 나를 위해 만들어진 말 같을까.

    나 원장의 스매싱은 음식의 부족한 매운맛 메우고도 남았다.

    ***

    하룻밤 병원 생활이 끝났다.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를 맡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상쾌했다.

    나는 살짝 들뜬 걸음으로 병원을 나서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큭! 에이, 씨. 진짜 시골로 이사 갈까?"

    마음과 달리 도심 한 복판의 공기는 상쾌하지 않았다.

    내 뻘짓에 뒤따라 걸어오던 나 원장이 킥킥 거리며 웃는 게 들렸다.

    "하여튼 엉뚱하기는. 거기 아냐. 이쪽이야. 차 가지고 왔어."

    "차? 나 쌤 차도 있었나?"

    "당연하지! 나 완전 운전 잘하거든?"

    저기요. 나 쌤. 운전 실력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요?

    갑자기 불안해졌다. 운전 잘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 실제로 운전 잘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애초에 잘하는 사람은 잘한다고 티내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미심적은 눈빛으로 나 원장을 빤히 바라보았지만, 나 원장은 없는 가슴을 활짝 펴며 대응했다.

    그래, 일단 믿어야지. 사람이 사람을 믿어야지.

    "근데 나 쌤. 오늘 이렇게 병원 비워도 돼?"

    "그러니까 잘 해. 내가 아니면 누가 널 데리러 오니?"

    나 원장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답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그녀가 아니라면 나를 데리러 올 사람은 없었다.

    아, 석철 삼촌이라면 오지 싶은데.

    혼자 내 인간 관계를 점검하는 사이 주차장에 도착했다.

    일단 차는 좋았다. 외제차였지만 비싼 고급 외제차는 아니었다. 요즘 자주 볼 수 있는 중저가 브랜드의 하얀 차는 깨끗했다.

    사고 난 적은 없나 보네.

    살짝 안심한 나는 얼른 조수석에 앉았다.

    그 순간 깨달았다.

    운전을 안 해서 사고가 안 났음을.

    차 안은 너무 깨끗했다. 내가 아는 나 원장은 이렇게 정리정돈에 유능한 사람이 아니었다. 서 간호사가 없었으면 병원도 돼지우리가 됐을 정도로 조금 유별난 사람이었다.

    결정적으로 시트가 비닐만 뜯었지, 그냥 새 거였다.

    "……저기 나 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혹시 최근에 운전해 본 게 언제야?"

    "말 걸지 마. 운전할 때 조심해야 해!"

    "어, 그래."

    나도 모르게 안전 벨트를 꽉 맺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보조석 위에 달린 손잡이까지 잡고 나서야 나는 조금 마음이 안정됐다.

    근데 왜 출발을 안 하지?

    한참이 지나도 출발할 생각을 안 하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 원장을 바라보니 얼굴에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그녀는 오로지 앞만 보고 있었다.

    의아한 생각에 슬쩍 고개를 내려다보니 차가 움직이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 진짜. 나 쌤. 이건 아니다.

    탈칵.

    "벨트 풀면 어떡해! 얼른 매!"

    "됐네요, 나 여사님. 그냥 내가 운전할 게. 도대체 무슨 깡으로 차를 몰고 온 거야?"

    "아냐! 나 운전 잘 해! 올 때도 내가 운전해 왔어!"

    "어이고. 운전 잘 하는 나 여사님께서 사이드도 올리고 악셀을 밟으세요?"

    "어? 어, 그, 그러니까. 그게……."

    나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나 원장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평소에 운전을 하지도 않던 사람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어찌됐건 지금 그녀에게 핸들을 맡기는 건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 위험했다.

    결국 나 원장은 나에게 핸들을 넘겼다. 조수석에 앉은 그녀의 얼굴이 시무룩했다. 창피했는지 양쪽 볼이 발갛게 익어 있었다.

    나는 사이드를 내리며 입을 열었다.

    어쩌겠는가. 팔은 안으로 굽는데.

    "괜찮아. 그래도 조심해서 운전해 왔을 거 아냐?"

    "응. 3시간 걸렸어."

    뭐라고? 몇 시간?

    순간 화를 낼 뻔 했지만 나는 순간 초인이 됐다. 인내심의 초인이 된 나는 되도록 밝은 표정을 지었다. 동시에 아무렇지 않다는 듯 가벼운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

    "어이구, 그랬어요? 우리 나 쌤 지금 빤스까지 다 젖었겠네. 그냥 택시 타고 오지, 왜 그랬어?"

    "씨이. 그 정도는 아냐! 그냥 오늘 퇴원 기념으로 바다라도 가려고 했는데. 다 망했어."

    바다? 지금 바다라고 하셨나이까? 그대가 운전하면 2박 3일은 걸리겠네요.

    불쑥 튀어 나오려하는 한숨을 힘겹게 틀어막은 나는 짐짓 태연한 척 말했다.

    "그래? 그럼 가자. 바다. 어디로 갈까? 동해? 서해?"

    "동해! 경포대!"

    "하여튼 나 쌤도 엉뚱하기는. 자, 그럼 경포대로 모시겠습니다."

    "나 낚싯대도 가져왔어! 가서 낚시 하자! 내가 회 떠줄게!"

    이 여자가 왜 이리 신났지?

    처음 분위기 봐서 한 소리 하려고 했는데 타이밍을 놓쳤다. 저렇게 아이처럼 좋아하는데 운전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나중을 기약해야 할 듯 싶었다.

    어쨌든 나쁘지 않았다. 나도 바다를 가본지 오래였다. 애초에 어디로 놀러가는 일 자체가 드물었다.

    평일이라 괜찮나 싶었지만 나는 금세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 원장은 일에 한해서는 프로패셔널 했다. 무턱대고 책임감 없이 예약된 환자와의 상담을 뒤로 미룰 여자가 아니었다.

    나는 걱정 없이 핸들을 꺾으며 동쪽으로. 아니, 일단 남쪽으로 향했다.

    그래. 가끔은 이런 일탈도 필요하지.

    ***

    "근데 나 쌤. 나야 뭐 원래 그런 놈이라지만. 나 쌤은 아무렇지 않아?"

    "응? 뭐가?"

    "보스 말이야. 지금 난리잖아."

    "나 주식 안 해. 신경 안 써. 아, 좋다."

    뻥 뚫린 고속도로를 달리며 은근슬쩍 보스에 관해 물어봤지만 나 원장은 태연했다. 그녀는 정말 신경을 안 쓰는 것 같았다. 그저 창밖으로 보이는 대관령의 모습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나저나 옛날에는 99고개를 돌아가느라 죽을 뻔 했는데.

    "진짜 세상 좋아졌다. 나 어릴 때 여기서 몇 번이나 토했는데."

    "킥! 그래? 하긴, 어릴 때는 감각 기관이 약하니까. 멀미에 약하지."

    "진짜 힘들었어. 결국 경포대에 도착했을 때는 기절해서 차에서 내리지도 못했지."

    회상에 잠긴 내 말에 나 원장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느껴졌다. 그 이유를 알았기에 나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렇게 보지 말라니까. 나 괜찮아. 벌써 20년도 더 된 일이야. 사실 사진을 안 보면 두 분 얼굴도 기억이 안 나는데, 뭐."

    "……그래. 오래된 일이지."

    "봐봐. 내가 아직도 힘들어하면 어떻게 운전을 하겠어?"

    "응. 우리 고영이 대견하네?"

    나 원장이 진짜 대견한 얼굴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솔직히 기분이 묘했다. 자상한 그녀의 태도가 기분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왠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있었다.

    그것도 별개로 내 마음은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어릴 적 트라우마가 남긴 상처가 문제였지, 트라우마 자체는 이미 치료된 상태였다. 그 빌어먹을 후유증이 문제였다.

    "이 봐, 나수정 씨. 자꾸 애처럼 취급할래? 남자 무서운지 한 번 보여줘?"

    "풋! 응. 보여줘. 제발 보여주세요."

    "……나쁜 의사."

    "내가 좋은 의사는 아니지."

    나 원장에게 꾀는 통하지 않았다. 그냥 솔직한 게 나았다. 되도 않는 가식은 불쏘시개만도 못한 법이었다.

    괜히 뻘쭘해진 나는 병원 상황에 대해 물어 보며 화제를 돌렸다.

    "근데 요즘도 평일에는 널널한 거야?"

    "그렇지, 뭐. 어쩌겠어. 사람들 인식이 그런데."

    "보스가 나타나서 그래도 좀 늘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닌가 봐?"

    "1순위 인터넷, 2순위 TV, 3순위 친구. 그리고 등외로 정신과."

    나 원장의 표정이 조금은 서글퍼 보였다. 정신과 전문의다보니 그런 것 같았다. 아직까지 우리 사회는 정신질환에 대한 혐오가 컸다.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나 원장이 자조적인 얼굴로 말했다.

    "평일 낮에 정신과 올 사람은 꾀병이라고 할 정도니까."

    "그 정도 정신력이면 뭐. 강철 멘탈이겠네."

    "그렇지. 그게 현실이니까. 그래도 주말은 풀이야. 저녁도 간간히 있고. 내가 특진비로 먹고 산단다."

    "많이 버세요. 그래야 시집 갈 밑천 마련하지."

    "많이 벌고 있어요. 걱정 마세요. 근데 너 은근히 운전 잘 한다?"

    나 원장의 칭찬에 나도 모르게 어깨를 으쓱 거렸다. 그녀의 말대로 내 운전 실력은 나쁘지 않았다. 방구석 폐인과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 실력이었다.

    뭐, 어쩌겠는가. 그냥 타고나는 게 있는 것을.

    "나 쌤은……."

    "알아. 그래도 포기는 안 해. 운전 연습 계속 할 거야. 그리고 정말 조심스럽게 안전 운전하니까 걱정하지 마. 자주는 안하지만……."

    나 원장이 내 말을 끊고 선수를 쳤다. 당찼던 목소리가 마지막에는 모기 소리로 변했지만 그녀도 알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이정도면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 뒤로 우리는 도란도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푸른 바다가 나타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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