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he Boss-24화 (2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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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과 선.

이 두 단어는 인류가 철학을 발견한 이후로 끊임없이 회자되는 물음표였다.

누구는 선한 존재로, 누구는 악한 존재로.

이 첨예한 두 방법으로 태어난다고 했다.

과연 그럴까?

살다보면 인간은 악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가장 무서운 게 사람이라는 말처럼 특히 현대 사회는 악한 인간들이 많았다. 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다른 인간들의 고혈을 빨아 먹었다.

그렇다면 인간은 정말 악한 존재일까?

여기에 대한 해답은 알 수 없었다. 단지 나는 인간이 하얀 존재라 생각했다. 작은 점 하나만 찍혀도 순식간에 더럽혀지는 그런 존재가 인간 같았다.

빛을 쬐면 밝아지고, 어둠에 묻히면 검어지는.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한다고 했지. 아빠가."

물론 이러한 생각은 내가 한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기 전에 입에 달고 사시던 말씀이었다. 당신께선 백지장 같은 인간은 항상 조심하고 경계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 가르침 덕분에 지금까지 나는 별 탈 없이 살 수 있었다. 물론 법이 없어도 잘 살 수 있을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단지 사회라는 하나의 체계 속에서 별 탈 없이 지낼 정도였다.

어제 하루 종일 내 머릿속을 맴돌았던 의문도 마찬가지였다.

"후암……. 디테가 말한 그 개발자가 범인이겠지. 꿈과 현실의 경계가 헷갈리지 않는 것도. 우리가 보스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도. 무의식의 영역인 꿈에 새로운 세상을 이식하는 존재가 하나의 방어 기재를 심는 건 식은 죽 먹기였을 테니까."

날 밤 꼬박 샌 내 눈 밑이 거무튀튀했다.

나도 나이를 먹었네. 소싯적에는 3박 4일 동안 밤새 게임을 해도 멀쩡했는데.

물론 나도 알고 있었다. 내 입에서 소식 적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늙어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변명할 수밖에 없는 내가 서글펐다.

두 눈을 뜬 채 밤을 보낸 게 오랜만이라 그런지 더 피곤했다. 조깅을 하고 샤워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이는 속일 수 없었다.

"……안 돼. 이제 고작 서른인데. 내 마음은 아직 스무 살이라고! 정신 차리자, 박고영! 젊게 살아야지!"

젊게 살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젊은이들과 함께 호흡하는 건데…….

아, 밤을 샜더니 내 머리가 이상해졌나?

스스로 위로하는 걸 방해하는 상념에 나는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잠에 빠져들고 싶었다. 물론 마음만 그랬을 뿐이었다.

"나 쌤한테 물어보기 전에는. 안되지. 그나저나 시간 참 안가네."

시간을 느리게 가도록하는 마법의 이름은 기다림이었다.

새벽 6시가 되기 전부터 시계를 바라보던 나에게 유독 강한 마법이 걸린 것 같았다.

다행히 마법은 시간을 멈출 정도로 강하지는 않았다.

꼬박 세 시간동안 시계를 바라보고 나서야 나는 집을 나설 수 있었다. 빠른 걸음으로 거의 달리다시피 뛰었다. 얼마나 급하게 걸었는지 나 원장의 병원 앞에 도착했을 때 내 숨은 턱밑까지 치고 올라온 상태였다.

잠시 표정 관리를 한 나는 옷매무새까지 가다듬은 채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부지런한 나 원장 때문인지 서 간호사가 벌써부터 데스크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손을 흔들며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

"어머? 요즘 자주……어머!"

살갑게 내 인사를 받던 서 간호사가 잠시 움찔했다. 아무래도 피부 관리를 받아야 할 듯 싶었다. 벌써부터 나이 들었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애써 태연한 얼굴로 미소 지으며 물었다.

"나 쌤은?"

"아, 네. 원장실에 계세요. 그런데……. 괜찮으시죠?"

"응? 나야 뭐. 쌩쌩하지. 그럼 수고해!"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했는데 썩 성공적이지 못한 것 같았다. 서 간호사의 눈빛이 애잔하게 변했다. 10년 전 그날 이후 나는 누가 나를 동정하는 건 귀신같이 알 수 있었다.

물론 결코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성격이 꼬여서 그런 게 아니었다. 나는 그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지멋대로 짐작하는 게 갖잖아 보였을 뿐이었다.

아무튼 서 간호사. 내가 이번만 봐준다.

서 간호사의 안쓰러운 눈빛을 뒤로한 나는 원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나 쌤! 빅뉴스!"

당연히 노크 따위는 없었다. 지금까지 그런 역사가 없었으니까. 나 원장과 나 사이에는 끈끈한 정이라고 할까? 그런 게 있었다.

내 방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처럼 자신만만하게 원장실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대로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했다.

어? 뭐지? 저건 스타킹이고. 저건 치마고. 그리고 저건……브라자?

의문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내 눈앞에 번개가 쳤다.

퍽!

"커억!"

"꺄악!"

검은 무언가가 내 눈두덩으로 날아와 충돌했다. 그것은 빅뱅이었다. 육중한 운동에너지는 내 뇌를 뒤흔들었고, 나는 그대로 넘어지며 바닥으로 넘어갔다.

쿵 소리와 함께 내 몸뚱이가 내동댕이쳐졌다. 아쉽게도 둔탁한 소리보다 뾰족한 소리가 더 사나웠다. 방안은 나 원장의 비명에 점령당했다.

나는 여전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나 원장의 비명소리에 달려온 서 간호사가 들이닥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순간 코마 상태에 빠졌다.

그렇게 내 의식이 꿈속으로…….

철썩! 철썩!

"박고영 씨! 박고영 씨!"

"지, 진영아……. 고영이는 괜찮아?"

"안 괜찮아요! 쌤! 어떡해요!"

"1, 119! 119 불러!"

귀에서 망가진 TV 소리가 울려서 제대로 들을 수는 없었다. 그나마 나 원장의 다급한 감정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조금 정신이 없기는 했지만, 물기어린 목소리를 느끼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놀란 두 여자를 다독이려고 했다.

"나으 개차나. 아무러치 아나."

"진영아! 빨리 불러! 얘 이상해!"

"네!"

어? 이게 아닌데. 왜 이러지…….

이상했다. 내 손발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나는 분명 일어나려고 했는데 세상은 여전이 빙글빙글 돌았다.

허공에 허우적거리는 내 팔을 마지막으로 나는 점차 의식이 흐려졌다.

지금 자면 안 되는데…….

간절한 내 생각과 달리 내 두 눈은 무심했다.

억 만 근의 무게가 느껴지는 눈꺼풀에 나는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

갑자기 눈이 부셨다.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밝은 빛에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당연히 그것만으로 따가운 빛을 피할 수 없었다. 나는 손을 들어 눈앞을 가렸다.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근데 몽마의 성체가 이렇게 밝았던가……어?

벌떡!

나도 모르게 상체를 일으켰다. 뒤늦게 이곳이 몽마의 성체가 아님을 깨달았다. 서서히 시야가 회복되며 내가 누워있는 곳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곳은 근처 대학 병원 응급실이었다.

"내가 왜……."

"이 멍충아!"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할 때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내 고막을 찔렀다. 나도 모르게 양손으로 귀를 막았을 정도로 성난 목소리였다. 슬쩍 고개를 돌려 성난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해 보았다.

"나 쌤?"

나 원장이 성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잔뜩 화가 난 그녀의 얼굴과 달리 눈빛은 걱정이 가득했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마음을 느끼며 가슴이 따듯해졌다.

안타깝게도 그 따스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 원장의 원망이 가득담긴 스매싱이…….

쫘아악!

"아악!"

날아왔다.

등짝을 제대로 처맞은 나는 원초적인 비명을 지르며 닿지도 않는 피격 지점을 문지르기 위해 노력했다.

그 와중에 나 원장은 화가 풀리지 않는지 연이어 스매싱을 날렸다.

쫙! 쫘악!

"악! 아악! 아퍼! 아프다고!"

아따, 그 소리 찰지네. 아니지. 무슨 손이…….

분노의 스매싱은 정말 아팠다. 쪽팔리고 나발이고 눈물이 찔끔 날 정도였다. 막 바다에서 건진 생선처럼 나는 팔딱거리며 고통을 호소했다.

내 몸짓이 효과가 있었는지 나 원장은 더 이상 스매싱을 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따스하게 내 머리를 감싸 품에 안았다.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에 나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이 멍청아! 운동 신경이 그렇게 없어서 어떡할래!"

"나 쌤. 은근히 볼륨이 있네? 몰랐네."

"이 바보가 이 와중에도……!"

나 원장이 내 농지거리에 눈을 흘겼지만 팔을 풀지 않았다. 나도 좋았다. 여자의 품은 언제나 따듯했다.

잠시 나 원장의 살 내음에 코를 박고 있었던 나는 문득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근데 나 쌤. 여기 어디야?"

"어디긴! 병원이지. 너 기절했어. 어떻게 넘어져도 그렇게 넘어져? 안되겠다. 앞으로 나랑 같이 운동하자."

"내가 넘어져? 왜?"

머릿속이 분필처럼 순백으로 변해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 물음이 뜻밖이었는지 나 원장이 품에서 내 얼굴을 떼어내며 눈빛을 맞췄다.

아, 아쉽네. 은근히 부드러웠는데.

걱정 가득한 나 원장의 눈빛을 보고 있자니 이상한 생각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잠시 나를 바라보던 나 원장이 짧은 한숨과 함께 말문을 열었다.

"후……. CT는 문제없었는데. 아무래도 며칠 입원해서 경과를 지켜보자. 너 진짜 큰일 날 뻔 했어. 기억 안나? 여기가 이렇게 부었는데?"

나 원장이 내 뒤통수를 살살 어루만지며 물었다.

그제야 나는 내 뒤통수가 볼록 튀어 올라 있음을 알았다. 벌에 쏘인 정도가 아니었다. 진짜 망치로 맞은 것처럼 제대로 부어 있었다.

그 순간 잠시 가출했던 기억이 돌아왔다.

"아! 맞어! 내가 나 쌤 방문을 열었는데, 나 쌤이……."

아직 흐릿한 기억을 억지로 더듬다보니 나도 모르게 고개를 아래로 떨구고 말았다.

내 시선이 자신의 가슴에 닿아 있음에도 나 원장은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 원장이 다행이라는 듯 말했다.

"다행이네. 그래도 기억이 나서. 그럼 큰 문제는 없겠다. 그러게 내가 노크하라고 했어, 안 했어?"

"했지."

"앞으로도 그렇게 문 벌컥벌컥 열거야? 안 열거야?"

"열거야."

"그래. 그래야……뭐?"

누나처럼 나를 혼내던 나 원장이 순간 벙쪘다.

나는 히죽 웃으며 나 원장의 토끼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좋은 구경하는데 그 정도 값은 치를 만 하지. 안 그래?"

"이게 진짜! 너 계속 그러면 고소한다?"

"나 돈 많아. 마음껏 해. 그나저나 나 쌤. 은근히 글래머였어?"

나는 나 원장의 옆구리를 툭 팔꿈치로 치며 너스레를 떨었다.

내 모습에 나 원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마 나를 치료한 걸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것이 아니면…….

쫘아악!

"아악! 나 쌤! 나 쌤 손 진짜 맵다니까!"

"그러게 누가 맞을 짓 하래? 흥!"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자뻑이었다. 착각도 자뻑의 한 종류였다. 나는 착각의 대가를 제대로 치러야했다.

나 원장은 불붙은 등짝을 끄기 위해 몸 개그를 하는 내 이마를 검지로 누르며 나를 침대로 눕혔다. 그러고 보니 응급실에서 무슨 짓을 한 지 모르겠다. 쪽은 제대로 판 것 같았다.

"자꾸 멍청이처럼 굴지 말고. 누워서 쉬어. 그리고 밥도 제대로 좀 먹고. 혈액 검사 결과가 왜 이래?"

"누구 맘대로 내 피를 뽑아! 내 소중한 피를!"

"내 맘이야. 내가 너 주치의잖아?"

"그건 그런데. 내가 뭐? 나 정상이거든?"

"정상 같은 소리 하네. 허우대만 멀쩡하면 뭐해? 맨날 대충 끼니를 때우니 그 꼴이지. 아무튼 몸 관리 잘 해. 벌써부터 그러면 어떡해?"

나 원장이 잔소리를 할 때마다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관심은 내가 이 세상에 혼자가 아니라는 증거였다. 그것만으로도 내 마음의 병이 치료될 것만 같았다.

물론 그럴 리가 없었다.

나는 괜히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감았다.

"……알았어. 잔소리 좀 그만해. 이럴 때 보면 주치의가 아니라 꼭 우리 엄마 같다."

"내가 잔소리 안하게 잘하면 돼. 자, 쉬워."

"어디 가게?"

"왜? 가지 말까?"

나 원장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내 눈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부끄러웠다. 속마음을 들킨 아이처럼.

이불을 뒤집어쓰고 싶었지만, 그보다 나 원장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예약 환자 없으면 그냥 오늘 쉬지? 내가 골든벨 울려 줄게."

나는 괜히 몸을 틀어 등을 보이며 말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찰싹!

"이게 어디서 돈지랄이야? 너 자꾸 그럴래?"

나 원장이 내 엉덩이를 일말의 망설임 없이 후려치며 또 다시 혼을 냈다.

"그게 아니라. 나 때문에. 그러니까……. 미안. 안 그럴게."

"됐어. 원래 평일에는 거의 없어. 아직도 사람들이 정신과를 꺼려하니까. 주말에나 좀 있지. 그것도 뜨문뜨문."

담담히 답하는 나 원장의 목소리가 왠지 쓸쓸하게 느껴졌다.

이런 애매한 분위기는 싫었다.

나는 도리어 더욱 장난스럽게 목소리를 끌어 올렸다.

"그래가지고 월세나 내겠어?"

"그래가지고 월세나 내고 있네요. 네 덕분에 서 간호사가 꽁차 얻었지."

"꽁차?"

"꽁자 월차."

"아아……. 킥! 아무튼 가지마. 나 병원에 혼자 있는 거 싫어하는 거 잘 알잖아?"

"걱정 말고 좀 쉬고 있어. 난 선배랑 이야기 좀 하고 올게."

"빨리 와."

자리에서 일어나는 나 원장을 향해 나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모기 소리를 들었는지 그녀가 내 엉덩이를 또 다시 툭 쳤다. 낮은 구두굽이 병원 바닥을 찍는 소리가 조금씩 멀어졌다.

나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작게 미소 지었다.

"가족이 별거야? 이런 게 가족이지."

혼자만의 착각일 수도 있었지만 나는 나 원장이 정말 가족 같았다. 이 세상 둘도 없는. 아니, 셋도 없는. 그것도 아닌가? 어쨌든 세 명뿐인 가족처럼 느껴졌다.

근데 기절하는 거랑 자는 거랑 다른 건가? 왜 몽마의 성체로 안 갔지? 아니, 그 전에 여기 나 쌤이 나온 병원이 아닌데?

도대체 그 선배는 누구지?

설마…….

남자는 아니겠지?

"에이 설마."

묘하게 선배라는 단어가 신경에 거슬렸다.

***

결국 나는 입원했다.

정체불명의 선배와 금세 대화를 나누고 돌아온 나 원장의 결정에 나는 반박할 수 없었다. 덕분에 하루 종일 검사를 받아야했고, 나 원장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나서야 퇴원할 수 있었다. 검사 결과를 이렇게 빨리 알 수 있는 건 당연히 그녀의 인맥 덕분이었다.

다행히 나 원장은 내 몸에 큰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 퇴원을 허락해…….

"퇴원도 내 마음대로 못해? 이거 독재야! 독재라고!"

나 원장은 철두철미했다. 그녀는 뇌진탕 증세를 보인 이상 며칠 동안 경과 관찰을 해야 한다고 했다. 나를 진찰한 의사는 그냥 퇴원하고 문제가 생기면 다시 오라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나는 예정에 없던 지출을 해야 했다.

"이게 병실이야? 호텔이지."

쓸데없이 넓은 1인실은 호화로웠다. 덕분에 더 휑해 보였다. 찾아올 사람도 없는데 불필요하게 쾌적하니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지. 나 쌤이 매일 오잖아?

병문안이 아니라 감시가 목적이었지만, 어쨌든 나 원장은 앞으로 3일간 찾아오기로 했다.

덕분에 팔자에도 없는 맛없는 병원 밥을 먹어야했다.

뭐, 대충 때우는 것……아!

"나 장봤는데. 문자 해 놔야겠다. 나 쌤보고 대신 받아 달라고. 아니지. 잠깐 외출을?"

이 와중에도 주문한 물건을 어떻게 받을지 걱정하는 내 신세가 괜히 처량해 보였다.

안 돼. 난 화려한 싱글이야. 반드시 화려해야 해.

괜히 우울한 생각을 하면 더욱 우울해 질뿐이었다. 나는 나 원장의 말을 잘 들었다. 그녀는 되도록 밝게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라고 조언해 주었다.

"그나저나……. 벌써 자야하나? 온갖 검사란 검사는 다하다보니 잠은 다 깼는데."

매일 똑같은 이야기만하는 TV도 슬슬 지겨웠다. 다른 걸 하려고 해도 병실에서 할 거라곤 인터넷 서핑이 전부였다. 그것도 지겹기는 매한가지였다.

결국 할 게 없으면 할 수 있는 건 하나 뿐이었다.

나는 병실 불을 끈 채 억지로 잠을 청했다.

침대 하나는 끝내주네. 어디 꺼야? 이거 괜찮네.

찰랑거리는 호수 물을 느끼며 나는 눈을 떴다.

나름 오랜만에 온 몽마의 성체는 그대로였다. 매연하나 없는 맑은 공기는 상쾌했고, 진짜 세상처럼 싱그러운 바람은 시원했다. 지겹게 열었던 백문도 흑문과 나란히 서 있었다.

나는 물가에서 나와 백문을 향해 걸어갔다.

백문을 향해 걸어가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걸 계속해야하면. 그러면 이제 인류에게 잠은 사라진 건가?"

잠을 잘 때 휴식은 고사하고 전투. 그것도 섹스 배틀을 해야 한다면 과연 인간이 살 수 있을까 궁금했다.

여러 욕구 중 가장 강한 게 수면욕이라는 데.

"사서 고민은……. 그냥 해보면 알겠지. 하여튼 이게 나타나고 부터 내가 더 이상해진 건 확실하네. 아차! 나 쌤한테 물어봐야하는데……."

걱정대신 이 빌어먹을 건망증이나 좀 없애주면 얼마나 좋아?

살짝 미간을 찌푸린 나는 망설임 없이 백문을 열었다.

그 순간 백문에서 새하얀 빛이 튀어나와 나를 집어 삼켰다.

========== 작품 후기 ==========

살짝 떡밥을 깔고...

아, 참고로 25화가 1권입니다.

그리고 예전처럼 3화씩 올리는 건 쉽지가...-_-;

아무래도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글쓰기다보니 평소와 달리 시간이 더 걸리네요.

대충 가늠해보니 하루에 2편이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저는 내일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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