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he Boss-23화 (23/200)
  • <-- Heartless -->

    ***

    논리를 잃은 사람은 결국 오기를 부리기 십상이었다.

    나 원장도 그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때 적당히 했어야했는데.

    당황한 나 원장을 놀리는 것에 너무 맛들인 나머지 내가 눈치를 잃어버린 게 화근이었다. 잘 익은 부사처럼 새빨갛게 변한 얼굴을 하고 있던 나 원장이 결국 내 놀림에 폭발하고 말았다. 나는 나 원장의 새로운 모습을 또 하나 볼 수 있었다.

    "나가! 꺼져버려! 이 멍청아!"

    기어코 나는 시원하게 욕 한 사발을 먹으며 나 원장의 매서운 손맛을 강제로 느끼며 병원에서 쫓겨났다. 나름 서 간호사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애매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말리는 시누이가 왜 얄미운지 알게 된 소중한 경험이었다.

    결국 나 원장에게 소박맞은 나는 뒤늦게 자책했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요, 쏟아진 말이었다.

    딱히 다른 곳에 갈 일이 없었기에 나는 털래털래 걸으며 오랜만에 장을 보기 위해 집으로 향했다.

    왜 장을 집에서 보냐고?

    요즘처럼 발전한 세상은 굳이 직접 장을 보지 않아도 되니까.

    중간에 편의점에 들러 군것질거리를 산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거실 소파에 드러누웠다. 이내 스마트폰을 꺼내서 장보기를 시작했다. 근처 대형 마트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이것저것 필요한 것을 누르기 시작했다.

    "뭐가 이렇게 비싸? 세상은 편해졌는데, 물가는 드럽게 불편하네."

    별로 산 것 같지도 않았는데 10만원이 훌쩍 넘었다. 비싼 감이 없지 않아. 아니, 많이 있었지만 직접 장을 보는 건 싫었다. 마지막으로 잘 익은 바나나 두 송이를 추가하는 것으로 장보기를 마친 나는 능숙하게 결제했다.

    검은 봉지에 들어 있는 쭈쭈바를 하나 꺼내 든 나는 예사롭지 않은 손놀림으로 꼭지를 따먹었다. 시간이 조금 흘러 살짝 녹았지만 문제될 게 없었다. 나는 프로 꼭딸러니까.

    쭈쭈바는 그냥 꼭다리로만 만들면 안 되나?

    가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수박 아이스크림은 파란 부분만 있으면 좋겠고, 상어 아이스크림은 퍼런 부분만 있으면 좋겠다. 어릴 적 좋아했던 회오리 아이스크림은 빨간 것만.

    시답잖은 생각을 하면서 나는 TV를 켰다.

    그러고 보니 참 오랜만에 테레비를 보는 거 같네.

    검은 화면에 형형색색의 빛이 모여드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최근 기현상으로 놀란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단순히 이상한 꿈이라 여겼던 기현상이 이제는 현실에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바로 불법 음란물 유통인데요. 자세한 이야기는 사이버 수사대의…….]

    "뭐냐, 이거."

    뉴스의 내용은 골 때렸다. 보스에서 치르는 전투를 녹화한 동영상을 판매하는 일이 불법이라는 게 전부였다. 심지어 해당 전투 동영상을 판매한 직장인이 입건된 상태였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실정법 위반 아냐? 실제 성행위라 할 수 없잖아? 말 그대로 꿈인데. 꿈을 녹화해서 판다고 문제가 되나?"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현행법과 관련된 질문을 했다.

    내 마음을 대변하는 앵커의 질문에도 불구하고 패널로 나온 경찰관은 당황하지 않았다.

    [실제 성행위를 하는 게 아니라 하더라도 음란물은 현행법상 문제가 됩니다. 특히 해당 음란물에 실제 삽입을 하는 장면이 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결국 우리나라 법이 문제라는 이야기였다. 실제 동영상만 보면 섹스 테이프와 차이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솔직히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앵커가 계속 그 문제를 잡고 놓지 않았다.

    [만일 기술이 발전하여 가상현실이 생겼을 때. 그때 가상현실에서 성행위를 하는 걸 동영상으로 유통하는 것도 불법입니까?]

    [그렇습니다. 물론 성행위 자체는 불법이 아니지만, 해당 성행위를 녹화한 걸 유통하는 건 불법입니다.]

    [그건 너무 구시대적 발상이 아닐까요? 직접적인 성행위가 아닌 가상일뿐이잖습니까? 말 그대로 게임인데, 혹시 그에 대한 법률 개정 움직임이 있습니까?]

    [제가 알기론 아직까지 그런 논의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결국 그냥 안 된다는 이야기였다. 그 뒤로 앵커는 현실적인 사항을 물었고, 패널은 현행법만 입에 올렸다. 결국 의미 없는 말 돌리기였다.

    패널과의 대화를 끝낸 앵커가 고개를 젓는 게 개그 포인트였다.

    [무조건 선진국의 방식을 따르는 게 옳은 건 아닙니다. 하지만 변화한 세상을 인정하고 폐단을 막기 위해서라도 발 빠르게 움직여야 하지 않을까요? 혼란을 가라앉히기 위한 합리적 방식이 어떤 것인지 한 번 고민해 볼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음. 앵커는 그래도 괜찮네.

    뉴스가 끝났음에도 채널을 돌리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다음 프로그램 예고가 내 흥미를 끌었다.

    믿음이 가는 채널이니까. 한 번 들어나 보지, 뭐.

    토론은 내 예상보다 더 흥미로웠다. 패널들은 보스에 대해 첨예한 방식으로 대응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끝까지 그들은 자기 이야기만 하다가 끝이 났다.

    그들에게는 소득이 없는 시간이었지만, 나에게는 쏠쏠한 소득이 있었다.

    "그러니까 유럽 몇몇 국가에서는 아예 보스를 하나의 게임으로 인식한단 말이지? 자유롭게 저장한 동영상을 가지고 공략법까지 알려준다라……."

    보스에 관한 법률적 문제는 그 사람의 가치관에 다를 수 있었다. 나는 어느 정도 현실에 맞춰 개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TV에서 대놓고 전투라는 이름의 섹스 동영상을 틀고 설명하는 것까지는 아니었다.

    선진국인지, 성진국인지.

    참 어떤 의미로 대단한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들은 정보를 숨기지 않았고, 그렇게 드러난 정보는 사람들의 심리를 안정시키는데 큰 도움이 됐다.

    마냥 숨긴다고 되는 게 아니니까. 우리 현대 사회는.

    부정적인 면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긍정적인 면도 무시할 수 없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그들처럼 개방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다는 생각은 없었다. 아직 유교적 색채가 강한 이 나라에서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한 백 년이 지나면 몰라도. 아직은 아니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거니까. 그래도……."

    방송 매체를 통해 공개적으로 보스에 대해서 알리는 건 힘들다고는 해도, 비공개적인 시스템을 통해 국민들이 정보를 공유하는 건 괜찮을 것 같았다.

    예를 들면 국가에서 관리하는 통합 망이라면?

    "성인들에게만 공간된 공간이라 괜찮지 않을까? 실명제를 쓰면 또라이들도 많이 줄 것 같은데. 오히려 양지로 끌어내서 관이 관리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한 번 고민을 해볼 만한 문제였다. 고작 며칠 사이에 보스는 전 세계적으로 퍼진 상태였다. 딱딱한 관료주의로는 사람의 머릿속으로 전해지는 변화를 결코 막을 수 없었다.

    그것을 알기에 몇몇 나라에서는 시범적으로 나마 아예 공개적으로 보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오히려 게임이라는 인식을 심어줌으로써 국민들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것일 수도 있었다. 이 방식의 결과가 조금 궁금했다.

    "물론 언론이 정부를 잘 견제해준 다는 전제 하에서 가능하겠지만. 아아, 모르겠다. 머리 아프네."

    혼자 고민해봤자 해답은 없었다. 지근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나는 자리에 누웠다. 이미 내 손은 스마트폰을 쥔 채로 인터넷에 접속한 상태였다.

    잠시 인터넷을 하다 보니 의외의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역시 게임의 민족. 진짜 대응력하나는 쩌네."

    몇몇 커뮤니티에 보스 관련 카테고리가 따로 만들어진 게 보였다. 게임 커뮤니티는 아예 부족 페이지를 만들 정도였다. 그들은 괜한 법제에 걸리지 않도록 작은 안정장치까지 해 놓은 상태였다.

    "유저가 만들어가는 게임. 당신이 우리들의 보스입니다? 큭!"

    한 마디로 게임 공략 사이트가 아니라 게임 구축 사이트였다. 실제로 보스 관련 이야기가 가장 활발히 나오는 곳은 게임 개발 커뮤니티였다. 그들은 보스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게임을 만들자는 의제로 모인 상태였다.

    물론 거짓말이지만.

    어쨌든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게 의외로 괜찮은 방법처럼 보였다.

    나는 벌써 수만 개의 게시글이 있는 것들 중 눈길을 끄는 몇몇 글을 읽어 보았다. 경험담이 확실했다. 보스를 경험한 게 아니라면 몽마들의 특징을 이렇게 세세히 써 놓을 수가 없었다.

    처음 흥미도 잠시 나는 금세 심드렁해졌다.

    "다 아는 것들뿐이네. 쩝."

    괜히 입맛만 버린 것 같았다. 대부분의 글들은 1층에 관한 이야기였다. 간간히 2층 견족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지만, 빈도와 신뢰도가 너무 낮았다.

    그때 한 게시글이 내 눈에 들어왔다.

    [뛰어난 개발자를 모십니다.]

    "호오?"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이 사이트에서 개발자는 그냥 플레이어. 즉, 참가자였다. 이 글은 곧 고렙 스카우트를 하기위한 글이 분명했다.

    호기심이 동한 나는 해당 글을 읽어 보았다.

    --------------------

    + Team Rank에서 경력 개발자를 모십니다.

    + 자격 요건 : 10년 이상 개발 경력.

    --------------------

    글 내용은 짧았다. 너무 짧아서 이상할 정도였지만, 그런 의문은 들지 않았다. 내 눈에는 오직 두 단어만 보였다.

    Rank와 10.

    한 마디로 10레벨 넘는 고렙 모집한다는 말이었다.

    따로 개발한 메신저까지 있는 걸 보니 장난은 아닌 듯 보였다. 애초에 이 커뮤니티의 관리자가 쓴 글이기에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근데 난 심상의 구슬이 없는데?

    랭커 클럽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전투 영상을 첨부할 필요가 있었다. 댓글을 보니 심상의 구슬을 통해 능력창이나 상태창을 찍을 수도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찍은 영상이 바로 서류 심사인 듯 했다.

    "아, 씨. 랭커라며? 쓸데없이 돈 막 써도 되는 거야? 아무리 1층 깨면 살 수 있다지만. 너무하네."

    그들 나름 고육지책이었겠지만, 나로서는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잠시 나는 혀를 찼다.

    "그래가지고 무슨 랭커라고. 하여튼 돈 무서운 줄 모른다니까?"

    방금 과소비를 한 사실은 이미 안드로메다 성운으로 날아간 뒤였다. 아니,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궁금했다. 나처럼 보스에 정열적으로 뛰어든 이들과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다.

    결국 못이기는 척 나는 혼잣말을 하며 샛길을 팠다.

    "뭐, 오늘 가서 한 번 둘러나 보자. 정 살 거 없으면 하나 사고. 하긴. 일단 사 놓으면 좋잖……어?"

    나는 변명을 채 끝내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지금까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사실이 떠올랐다. 다름 아닌 영상 저장 방법이었다.

    아니, 꿈에서 찍은 걸 어떻게 현실로 가져오는 거지? 그게 가능해? 그럼 심각한 거 아냐?

    별별 의문이 내 머릿속을 휘저었다. 당연했다. 꿈이 현실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준다고 느끼고 있었지만, 이정도로 큰 영향을 줄 것이라 생각지 못했다.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뒤늦게 든 의문에 나는 서둘러 관련 글이 있나 살펴보았다.

    "하."

    금세 난 허무에 빠졌다. 관련 글은 넘쳐흘렀다. 방법도 간단했다.

    나는 스마트폰에 나타난 글자를 입으로 옮겼다.

    "아이템 가지고 있으면 영상 저장할 거냐 묻고. 저장한 영상을 흑문을 열 때. 그러니까 꿈에서 깨기 직전에 전송할 것인지 물어 본다고? 무슨 블루투스냐?"

    블루투스가 맞았다. 실제로 전송한 영상은 참가자의 근처에 있는 기기들에 저장되었다. 다만 그것이 오래된 비디오테이프든, 최신 컴퓨터의 디스크든 상관이 없었다.

    나사에서 군침을 흘리겠네.

    순간 쓸데없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런 신기술이라면 무선 통신계의 혁명이라 할 수 있었다. 현재 인류가 따라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내가 이상한가? 왜 안 놀라지? 이정도면 엄청난 일 아닌가? 근데 나는. 아니, 우리들은 왜 이렇게 담담하게 받아들이지?"

    하나의 의문을 해소하기 무섭게 다른 의문이 들었다. 사람들이 너무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물론 여러 사람을 직접 만나본 게 아니라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나 원장의 경우만 봐도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겠다.

    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이런 생각을 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무섭지가 않아. 두렵지가 않아. 조금도."

    마치 꿈 같았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 이 세계가 꿈이라면 모든 것이 설명 가능했다. 안타깝게도 꿈은 아니었다. 헷갈릴 법도 했지만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 또한 의문이었다.

    "보스와 현실의 경계가 왜 이렇게 명확하지? 진짜 같은. 현실 같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만 같은 곳인 건 마찬가진데."

    현실과 꿈을 혼동하여 사고가 일어났다는 소식은 아직까지 들어보지 못했다. 그런 소식이 있었다면 나 원장이 벌써 말했어도 말했을 게 분명했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머리가 더욱 복잡해졌다.

    "에이, 복잡한 건 딱 질색이야. 그런 건 똑똑한 사람들이 알아서 하겠지."

    결국 이번에도 나는 도망쳤다.

    복잡한 현실을 외면하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힘든 길을 피해 편한 길을 취했다. 나 원장이 매번 외면하지 말라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는 여전히 내가 만든 안전한 세상 밖으로 나갈 준비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인간은 그런 거 아냐? 아무리 입에 발린 말을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었다.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였다. 뉴스에서 아무리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에 죽었다고 나와서 평소 생활을 이어나갔다. 겉으로 표출하는 슬픔이라는 감정과 실제 행동은 조금 달랐다.

    실제로 수많은 참사를 겪으며 인간들의 감정이 메마른 것일 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씁쓸한 생각이 드는 순간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안타까웠다. 부끄러웠다.

    시간이 흐를수록 인간들의 피는 차가워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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