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he Boss-10화 (1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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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나와 나 원장은 밤이 늦도록 수다를 떨었다.

    그 대가로 나 원장과 가벼운 데이트를 강제로 해야 했지만 나쁘지만은 않았다.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도 나를 통해 무언가 위로를 받는 것 같았다. 우리는 악어와 악어새라고 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외출이 예상보다 길어져서 그런지 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이미 파김치가 됐다. 그것도 푹 쉰 파김치였다. 완전 묵은지 저리가라였다.

    대충 찬물로 샤워한 뒤 가벼운 차림새로 옷을 갈아입었다.

    "아! 진짜 옷을 뺏긴 게 아니네? 그냥 옷을 두고 가는 거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골 때려. 아니, 지금 잠들면 알 수 있겠지."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은 난리였다.

    잠들면 다시 몽마의 성체로 가는 건가?

    잠들면 다시 몽마와 강제로 싸우는 건가?

    잠들면 다시 이 세계로 돌아올 수 있는 건가?

    별의 별 억측과 우려가 가득했다.

    세상은 더 없이 시끄러웠지만 나는 무덤덤했다. 오히려 나는 기대됐다. 잠들어있는 엑스칼리버를 깨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몽마와 싸우는 것이라는 걸 나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밑져야 본전.

    지금 내 상황이 딱 그랬다.

    소풍가기 전날의 설렘 가득……. 아니지. 난 소풍 전날이 가장 싫었지.

    아무튼 설렘을 안고 난 침대로 뛰어 들었다. 대자로 침대에 누운 채 두 눈을 감았다. 이대로 잠들면 부디 몽마의 성체로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제 곧…….

    잠들면 곧…….

    "……아, 씨!"

    너무 설렜을까.

    잠이 안 왔다. 한시라도 빨리 잠들어야하는데, 정신은 더욱 또랑또랑해졌다. 이러다가 밤을 새는 불상사가 벌어질지도 몰랐다.

    안 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갑자기 걱정이 피어올랐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유일한 희망이 꺼지려고 했다.

    "수면제, 수면제. 아씨, 안 타왔네."

    수면제가 없었다.

    "하아……."

    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나는 다시 벌러덩 드러누웠다. 억지로 눈을 감지는 않았다. 그럴수록 잠이 더 안 온다는 걸 나는 알았다.

    그저 가만히 알고 있는 내용을 다시 복습하며 긴장을 풀기로 했다.

    "그러니까 수정쌤 말 대로면, 처음 시작은 피엠은 100씩. 공격력은 10, 방어력은 5. 나머지는 그냥 1이라고 했지? 체력은 하나 당 10씩 오른다고 했고. 그럼 내 피가 440이니까……오매."

    나 원장과 대화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을 다시 한 번 곱씹어 보니 지금 내 상태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물론 다시 몽마의 성체로 갔을 때 아프로디테의 입맞춤 효과가 유지되고 있을 때 이야기였다. 최악의 경우 강화 효과가 사라졌을 수도 있었다.

    "에이, 그건 아니지 싶은데."

    살짝 걱정이 들었지만 난 고개를 저었다. 그럴 가능성은 지극히 낮았다. 하루 종일 취합한 정보를 통해 몇 가지 사실을 추측할 수 있었다.

    "몽마의 성체를 하나의 게임으로 보면, 백문은 저장 후 플레이. 흑문은 저장 후 종료. 딱 그거지. 설명에 나와 있는 대로 튜토리얼이 끝날 때까지는 버프가 남아있을 거야. 그럼 그걸로 남들보다 앞서나가야겠지? 뭐든 초기 선점이 중요하니까."

    나는 반쯤 보스가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라 확신했다. 단지, 거대한 힘이 될 수 있을 지에 대해서는 약한 회의적이었다. 큰 변화가 없다면 하나의 유흥거리로써 자리 잡는 게 전부가 아닐까 싶었다.

    "이제 섹스가 프로스포츠로 발돋움하는 건가? 큭큭!"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졌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이들은 앞으로 섹스 배틀이 연예는 물론이고, 프로 스포츠 시장까지 점령할 것이라 추측했다. 한 마디로 연예계와 스포츠계를 석권하는 하나의 새로운 거대 문화로 자리 잡을 것이라 여겼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파급력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 질 게 분명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무의미하던 내 삶에도 작은 동기부여가 될 정도였다.

    "진짜 그렇게 된다면. 할리우드고 뭐고 그냥 섹스 배틀러가 월드 스타가 된다면? 진짜 골 때리겠는데?"

    혼자 망상을 하다 보니 긴장이 자연스레 풀렸다.

    긴장이 사라지고 얼마 후.

    나는 다시 몽마의 성체로 진입했다.

    ***

    흑표범.

    지금 내 눈앞에서 날카로운 눈빛을 뿌리는 몽마는 한 마리의 흑표범과 같았다.

    탄력 넘치는 검은 피부.

    길게 뻗은 유려한 몸매.

    가끔 꿈틀거리는 근육까지.

    건강미의 표본을 갖춘 몽마는 이전까지 겪었던 유순한 성격의 몽마와는 확실히 달랐다. 한눈에도 강력해 보였다. 쉽지 않은 전투가 예상됐다.

    악전고투를 앞두었지만 나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에 볼 수 없을 정도로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내가 웃을 수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엑스칼리버. 일어났구나."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왠지 기분이 묘했다. 분명 눈앞의 몽마는 말이 몽마였지 그냥 괴물이었다. 인간이 아닌 존재를 마주하고 나서야 깨어나는 녀석에 무작정 기뻐할 수많은 없었다.

    "아니지. 그래도 이게 어디냐. 괜찮아. 적응하면 될 거야. 몽마로 시작해서 인간까지. 가자, 엑스칼리버!"

    마지막 희망이다 시피한 상황이 나를 더 없이 긍정적으로 만들었다. 종말이니 징벌이니 사서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최소한 나는 아니었다. 나는 그 따위 걱정을 할 정도로 여유롭지 못했다.

    모든 사실을 외면한 나는 오직 한 가지 가능성에 집중했다.

    "쉬이, 쉬이."

    눈앞의 흑표범은 지금까지 몽마와 울음소리부터 달랐다. 심지어 빠르기까지 했다.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는 사이 흑표범이 허벅지 근육을 꿈틀거리며 바닥을 박찼다.

    "어어?"

    잠시 멍 때린 사이에 흑표범이 나를 덮쳤다. 자연스레 흑표범이 내 허리 위에 올라탄 자세가 만들어졌다. 강제 자세 조정도 없이 바로 전투 준비가 끝나 버렸다.

    눈매에 따라 성향이 달라지나?

    지금 당장 알 수 있는 게 없었기에 나는 변화를 순순히 받아 들였다. 애초에 중요한 건 엑스칼리버가 깨어났다는 사실뿐이었다. 전투 자세가 다르거나, 몽마의 능력이 다르거나 하는 사실은 일체 관심이 없었다.

    "오케이. 준비 됐으니까……어?"

    이상했다. 정말 이상했다. 원래 공격권은 플레이어가 선점하는 게 아니었나?

    내 의문에 화답하듯 흑표범이 씽긋 웃었다.

    왠지 불안하다. 저거.

    설마는 언제나 내 발등을 찍었다.

    "으으윽!"

    엑스칼리버에서 찌릿찌릿한 쾌감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강도와 차원이 달랐다. 진짜 뿌리가 빠질 뻔 했다.

    ['흑피 수귀'에게 18의 피해를 받았습니다.]

    헐.

    버프 없었으면 18%의 피가 날아갈 뻔 했네? 아, 렙업해서 그 정도는 아닌가? 아무튼.

    디테의 버프 덕분에 찔끔찔끔 받았던 지금까지의 데미지와는 확실히 달랐다. 애초에 2자릿수 피해를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강력한 일격에 엑스칼리버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 근데 나 점점 취향이 이상해지는 거 같아. 이거 완전 쳐 맞고 느끼는 거잖아? 이럼 안 되는데…….

    솔직히 조금 걱정이 들었다. 평생 고자로 살았지만 취향은 일반인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 경계가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공격 제한 시간까지 30초 남았습니다.]

    다행히 보스의 안내에 쓸데없는 걱정을 덜 수 있었다.

    잊지 말자, 고영아. 지금 중요한 건 칼을 가는 거다. 그까짓 취향. 뭐, 어때?

    마음을 다잡은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은 채 엉덩이에 힘을 빡 줬다. 가벼운 준비 자세를 마친 뒤 지체 없이 허리를 들어 올렸다. 처음 겪는 자세였지만 인간의. 아니, 남자의 본능은 위대했다.

    퍼억!

    "쉬이이익!"

    강력한 효과음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이번 공격은 치명타가 터졌음을. 실제로도 보스가 내 생각이 맞음을 알려주었다.

    [치명적인 일격에 성공합니다.]

    ['흑피 수귀'에게 233의 피해를 주었습니다.]

    ['흑피 수귀'가 절정에 올랐습니다.]

    ['경험 200'을 획득합니다.]

    [업적 '회심의 일격'을 달성합니다.]

    ['회심의 일격 증표'를 획득합니다.]

    [음격이 한 단계 상승합니다.]

    치명 공격 한 번에 흑피 수귀가 빛으로 화해 내 엑스칼리버에 흡수됐다.

    "어……. 음……."

    애매했다. 아무 생각 없이 웃을 수 없었다. 디테의 버프가 서서히 원망스러워졌다.

    이제 시작인데 뭐하는 거임?

    엑스칼리버가 나에게 따지는 듯 껄떡거렸다.

    ***

    보상으로 받은 능력치 5개는 모두 근력에 투자했다.

    섹스 배틀을 오래 지속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만큼 더 강해지고 싶은 마음도 함께였다. 논리와 비논리가 함께하는 나는 나약한 인간일 뿐이었다. 아니, 그냥 평범한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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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활력 : 520/520

    + 정력 : 52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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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격력 : 129

    + 마법력 :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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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어력 : 16

    + 항마력 :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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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중률 : 128

    + 회피율 :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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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치명도 : 28

    + 치명 증폭 : 200%

    + 치명 저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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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행히 더 풍성해진 상태창이 나를 위로해줬다. 근력 10일 때 83이었던 타격치가 근력 15에서는 105로 늘어나더니, 근력 20이 되자 129로 늘어났다. 거기에 예상치 못한 업적을 통해 치명도까지 10이 늘어나니 버프 효과로 20이 늘어나 버렸다.

    점점 사기캐가 되는 듯. 근데 이거 진짜 버그 아닌가? 설마 버그라고 백섭하면…….

    "에이, 그건 좀 아니다."

    물론 평생 이런 호사를 누릴 수는 없었다. 몽마의 성체. 즉, 튜토리얼이 끝나면 디테의 버프는 사라질 테니까. 그 불건전한 칭호의 설명처럼 그냥 합의금이라 생각하자.

    나름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을 틀었을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근데 이게 튜토리얼이면. 그러면 정식 오픈은 어떻게 되는 거지? 설마 현실 세계에 발정 난 악마들이 막 나타나고 그러나?"

    잠시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살이 생각이었다. 망상은 오래가지 않아 현실에 막혔다.

    "몽마라 칭하는데 이유가 있겠지. 꿈에서만 싸우니까 몽마 아냐? 그럼 초보존을 벗어나면 막 대륙 같은 데로 갈 수 있나? 아, 마계 같은 데로 가면 좋겠다."

    혼자 상상하다보니 은근히 재밌었다. 비록 꿈속이라지만 새로운 세상을 경험할 수 있다는 건 분명히 매력적이었다. 아니, 오히려 위험이 적은 꿈이라 더 좋았다.

    은근한 기대를 가지고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당연히 백문을 향했다. 오늘은 정말 갈 때까지 가볼 생각이었다.

    이정도 스펙으로 초보존을 쓸지도 못하면 나가 죽어야하지 않을까? 진짜 발컨이라도 이전도면 무쌍을 찍고도 남을 것 같았다. 그만큼 지금 내 능력치는 오버 밸런스였다.

    이윽고 백문을 열고 안으로 한발자국 내딛었다.

    그 순간 시계가 또 다시 전환됐다.

    "여기는……?"

    나름 익숙한 공간이 나를 반겼다.

    비록 기억은 나지 않지만, 동정을 빼앗긴 그곳.

    디테와 작별을 고했던 바로 그 침실이었다.

    또각, 또각.

    반가움에 잠시 넋을 놓고 있을 때 구두굽이 바닥을 찧는 소리가 들렸다. 자연스레 내 고개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향했다. 침대 저편에서 단정한 차림의 미녀가 걸어오고 있었다.

    비서 코스프래. 아니, 완벽한 비서 그 자체였다. 온몸에 낙지처럼 착 달라붙어 있는 정장차림은 전혀 노출이 없음에도 야릇했다. 심지어 낮은 굽의 구두까지 야해 보였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여유로운 걸음으로 내 앞까지 걸어온 몽마가 걸음을 멈췄다. 나를 한 걸음 정도 놔두고 멈춰선 그녀가 나를 위아래로 스캔했다. 이윽고 내 눈을 마주보며 그녀의 유달리 붉은 입술이 움직였다.

    "반가워요, 박고영 씨."

    고혹적인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엑스칼리버가 벌떡 일어설 정도였다. 정말 끈적끈적한 목소리였다.

    놀람도 잠시 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말을 해?"

    "무슨 문제라도 되나요?"

    "허……."

    내 혼잣말에 도발적으로 받아치는 몽마의 모습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고작 몇 마디 나누지 않았는데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성격이 어떤지를.

    다시 정신을 수습했을 때 눈앞의 몽마는 팔짱을 낀 채 나를 흘겨보고 있었다. 그 모습조차 요염했다. 완전 타고난 요녀였다.

    아니지. 몽마잖아? 그냥 태생부터 색기 발랄한 존재 아냐?

    나름의 지식이 더해지자 놀람이 차츰 가라앉았다. 더구나 이곳은 꿈속이었다. 꿈은, 꿈은…….

    "무한하니까."

    나는 오늘도 꿈을 꾸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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