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he Boss-9화 (9/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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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제부터인가 더 이상 열심히 떠들고 있는 아나운서를 바라보지 않았다. 앵무새처럼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내뱉는 뉴스는 더 이상 새로운 소식이 아니었다. 오이 같은 뉴스를 보는 것 보다는 그냥 인터넷을 훑는 게 나았다.

    처음에는 손바닥만 한 핸드폰으로 검색하던 것을 렙탑으로 바꾼 뒤로 속도가 붙었다. 솔직히 스마트폰 좀비는 나와 어울리지 않았다. 나는 조금 다른 의미의 좀비였을 뿐.

    나름 열심히 뒤져본 덕분에 어느정도 상황 파악이 됐다. 요 근래 인터넷이 이렇게 뜨거운 적이 있나 싶었다. 아, 있긴 있었다.

    "브렉시트 때 아주 난리가 났지. 나야 큰 상관없지만."

    인터넷에 올라온 각종 경험담은 대동소이했다. 모두 몽마와 전투를 치렀고, 대부분의 승리를 거둔 것 같았다. 간혹, 뻘짓을 한 덕분에 패배한 사람의 저주 섞인 글이 있었지만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제는 발컨도 죄가 되는 세상이라……."

    처절한 심정으로 울부짖는 패배자의 마지막 한 마디를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내가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고작 한 달 가지고 징징거리긴."

    무심한 조소를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나는…….

    아침에 일어났을 때와 다름없이 엑스칼리버는 내 처연한 시선에도 겨울잠에서 깨지 않았다.

    얼른 고개를 저었다. 이런 자괴감에 빠져서 좋을 게 없었다. 그동안 내가 살면서 깨달은 것은 조금이라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낫다는 것뿐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괴한 현상에도 딱히 두렵지 않았다. 비단 나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정도 기술이 있으면 미국도 답 없지. 목적이 뭔지 모르겠지만 죽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지 싶은데. 아, 그건 조심해야겠다."

    죽음에 대한 걱정이 들지 않았다. 단순히 이성적인 결과를 도출해서 그런 것인지, 외부 요인에 의해 유도된 결과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무엇이 됐든 지금 인간이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을 없어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달랐다. 그동안 수많은 성찰 덕분인지 가슴이 뛰지 않았다. 그저 담담히 상황을, 변화를 받아 들였다.

    "아, 이래서 삼촌이 사람들이랑 좀 부대끼고 살라고 했구나."

    또 다시 삼촌의 조언이자 부탁이 떠올랐지만 딱히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는 지금 이대로가 좋았다. 한 가지를 제외하면 아무런 걱정 없이 편안한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

    오랜만의 외출을 반기며 시원한 봄바람이 내 얼굴을 때렸다.

    "충분하긴 개뿔."

    도저히 엑스칼리버를 포기할 수 없었다.

    오랜만의 외출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젯밤 있었던 일 때문인지 지나가는 사람들 마다 난리도 아니었다. 휴대폰에 영혼을 판 것 같은 사람도 있었고, 연신 침을 튀기며 떠들며 나와 부딪힐 뻔한 사람도 있었다.

    평소와 다른 소란스러움에 살짝 인상을 찡그린 나는 얼른 내 주치의가 있는 병원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병원은 그리 멀지 않았다. 5년 전 개원한 그곳은 사실 병원이라기보다는 쾌적한 카페 같았다.

    "어머? 오랜만에 오셨네요!"

    "안녕하세요. 지금 상담할 수 있나요?"

    "네, 물론이죠."

    접수를 하는 서글서글한 간호사는 무뚝뚝한 내 물음에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녀도 본지 벌써 5년이 넘었다. 나름 그녀가 결혼할 때 축의금을 냈을 정도였다.

    물론 직접 결혼식장에 가지는 않았지만.

    안내 데스크를 지나친 나는 성큼성큼 자신 있는 걸음으로 원장실로 향했다. 보통 따로 마련한 상담실에서 진료나 상담을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원래 단골은 반쯤 가족이라지 않은가.

    원장실 문을 열고 안에 들어서나 검은 스커트에 하얀 니트를 입고 있는 30대 초반의 여자가 보였다. 검은 망으로 긴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정리한 뿔테 안경이 참 잘 어울리는 여자였다. 가슴이 약간 빈약한 게 흠이었지만 그래도 매력적인 여자였다.

    내 얼굴을 확인하고 활짝 웃으며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모습이 좀 귀여웠다. 책상 위에 있는 작은 명패가 이 귀여운 여인의 정체를 대신 알려주었다.

    [원장 나수정]

    자연스레 원장실 안으로 들어선 나는 책상 앞에 있는 소파 하나를 차지해 앉으며 평소와 다름없이 인사를 건넸다.

    "수정쌤. 오랜만?"

    나 원장은 나무에 오르는 다람쥐처럼 재빠르게 책상을 돌아 내 옆으로 날아왔다.

    "야! 박고영!"

    "아무리 그래도 나 환잔데? 나 원장이 야자 까도 되는 거야?"

    "닥쳐! 너 내가 일주일에 한 번씩은 나오라고 했어, 안했어?"

    아, 참고로 나와 그녀는 개그 취향이 달랐다.

    내 정감어린 안부 인사를 무참히 찢어발긴 나 원장이 두 눈을 부라리며 노려보았다. 화내는 게 분명한데 전혀 화나 보이지 않았다. 워낙 강아지 상이었고, 동안이다 보니 그저 귀여워 보였다.

    5년 전보다 더 어려보이는 건 반칙 아냐?

    아직 세월을 과학으로 붙잡고 있는 나 원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했지."

    "그런데 오늘 며칠이야?"

    "오늘? 글쎄? 아직 밖에 눈이 있는걸 보니, 겨울이긴 한데……."

    괜한 능청을 부려보았지만 나 원장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장난하지 말고! 나 진짜 화났어!"

    "아, 왜 이래? 내가 개근상 받을 성격은 아니잖아? 아무튼 오랜만이야, 수정쌤."

    "아무튼 이번만 내가 봐주는 거야? 일주일에 한 번! 꼭 나와야 해! 알았지?"

    "알았어. 미안, 미안. 단골로서 의무를 다하겠나이다. 마마!"

    이왕 너스레를 떤 김에 조금 더 떨어 보았다. 그나마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사람 중 한 명인 나 원장에게 이정도 친한 척은 할 수 있었다. 내가 이정도로 달라진 것 보면 나 원장의 실력이 꽤 좋은 것 같았다.

    처음에는 정말 데면데면했는데. 뭐, 이런 친구 한 명 있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팔짱 낀 채 토라진 표정을 짓고 있는 나 원장의 모습이 귀엽게 느껴진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물론이고 나 원장도 동시에 놀라 움찔했지만 그뿐이었다. 나도 손을 거두지 않았고, 그녀도 손을 피하지 않았다. 확실히 단순한 환자와 의사 관계는 아니지 싶었다.

    조금 어색해진 분위기를 느꼈는지 나 원장이 슬쩍 화제를 돌렸다.

    "그래도 부조금 내야 할 줄 알았는데. 아니라서 다행이야."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긴. 우리 수정쌤 축의금 듬뿍 주기 전에는 안 죽어. 그러니까 너무 그러지 마. 잘못했다니까? 나 쌤도 나 잘 알잖아? 내 멘탈이 어떤 멘탈인지."

    "뭐……그건 그래. 연구 논문 주제로 잡고 싶을 정도니까."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다보니 살짝 어색해진 분위기는 금세 사라졌다. 그 사이 나 원장이 손수 차를 내왔다. 차라고 해봤자 믹스 커피지만.

    "잘 마실게. 역시 나 쌤 커피가 최고네."

    "흰소리 하지 마. 그나저나 아직도 다른 사람들이랑 대화하는 게 불편해?"

    "응? 아, 뭐. 그렇지. 아는 사람이 관심을 가져주는 건 이제 괜찮은데. 아직도 모르는 사람이 관심을 보이는 건 싫네."

    "에휴……. 그럼 소용이 없잖아! 일단 만나야 아는 사람이 되지!"

    "어떻게 되지 않겠어? 이렇게 수정쌤이랑도 친해졌잖아?"

    내 심드렁한 대답에 나 원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환자와 의사사이라면 결코 보일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녀에게 나는 환자보다 친구에 더 가까운 존재였다.

    그래서 더 문제다. 지금 저 표정은 친구로서 잔소리를 하기 직전의 표정이 확실했다. 회피기가 필요했다.

    내가 선택한 회피기는 전 세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보스였다.

    "근데 수정쌤. 수정쌤도 어젯밤 몽마의 성체에 다녀왔어?"

    "그 야시꾸리한 곳? 나도 갔다 왔지. 나도 성인이니까."

    "오호! 그럼 수정쌤도……?"

    흥미진진했다. 여자는 어떻게 진행되는 지 궁금했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갔다.

    그 순간 내 귀에 따스한 손길이 느껴졌다. 아니, 정정한다. 따가운 손길이었다.

    "아악! 아퍼! 아퍼!"

    "요게 어디서 게슴츠레하게 눈을 떠?"

    "나 쌤! 이거 폭력이야! 폭력!"

    "그럼 고소하든지!"

    "아악!"

    나 원장의 손은 드럽게 매웠다. 살짝 홍조를 띤 걸 보니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도 여자였다.

    결국 고통에 굴복한 나는 남자답게 사과하며 사태를 정리해야했다.

    상황이 종료됐지만 내 귀는 여전히 뜨거웠다. 나는 손바닥으로 내 왼쪽 귀를 문지르며 입술을 쭉 내밀었다. 그 모습이 재미있는지 나 원장이 작게 소리 내며 웃었다.

    "아이고, 사람 패고 웃네. 웃어."

    "너 진짜 연구하고 싶다. 내가 널 얼마나 연구하고 싶어 하는지 모르지?"

    "됐네요. 그런 건 사절입니다요."

    내 심드렁한 대꾸에 나 원장이 팔꿈치로 내 팔뚝을 툭 쳤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헛소리 좀 그만하고. 나도 마찬가지였어. 웬 잘 생긴 남자한테 설명을 듣고, 다음 방으로 가서 잘생긴 남자와 전투를 치렀지. 이름이 참 웃기더라. 헐벗은 수귀가 뭐니?"

    "그래서? 어떻게 했어? 사람들 말대로 진짜, 진짜 그……."

    나 원장의 허심탄회한 말에 나도 모르게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일종의 관음증이 발현한 듯 싶었다. 나도 남자는 남자였다.

    차마 섹스라는 단어를 입으로 옮기지 못하는 나를 대신하여 나 원장이 나섰다.

    "뭐? 섹스 배틀? 그게 뭐라고 말을 못하니?"

    "큼!"

    "하여튼……."

    갑자기 나 원장의 눈빛이 아련하게 변했다. 아무래도 내가 불능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오해한 것 같았다. 그녀는 나에게 대리만족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는지 더욱 과감하게 말을 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누나도 섹스 배틀을 했단다."

    "이겼어?"

    "당연히 이겼지! 이 누나를 뭐로 보고!"

    "올! 수정 쌤. 여자네?"

    "킥! 그럼 여자지. 아, 그거 알아?"

    내 농담에 나 원장은 가슴을 활짝 펴고 답했다. 물론 그러지 않는 편이 좋았지만, 그 점을 말하지는 않았다. 굳이 매를 벌 필요는 없었다.

    나 원장은 내가 섹스 배틀에 큰 흥미를 느꼈다고 거의 확신한 듯 했다. 내 귓가로 입술을 붙이더니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의 입김에 나도 모르게 살짝 움찔했다.

    잠시 몸을 떤 나는 살짝 고개를 돌려 나 원장을 흘끔거리며 물었다.

    "뭐가?"

    "데스크에 있는 서 간호사도 섹스 배틀에서 이겼다?"

    "큼큼!"

    헛기침이 연달아 나왔다. 확실히 자극적이었다. 단지 문제는…….

    고개를 슬쩍 내린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나 원장도 마찬가지였다. 안타까움에 나와 그녀의 대화가 끊겼다.

    다행히 안타까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도 면역된 지 오래였고, 그것은 나 원장도 마찬가지였다. 내 엑스칼리버는 쭉쭉 빵빵한 서 간호사나, 늘씬한 나 원장이나, 둘 다 취향이 아니었을 뿐이었다.

    "됐어. 둘 다 내 취향 아냐. 내 취향이 좀 고상하거든."

    "하여튼 정신력만큼은 최고! 내가 인정!"

    "그래, 그래. 그럼 한 놈만 상대하고 나온 거야?"

    "응? 응. 그랬지. 이름부터 좀 그렇잖아? 몽마의 성체가 뭐야? 성체가?"

    나 원장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지만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성체가 뭐? 그냥 성이랑 울타리 아냐?

    내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난 의문을 읽은 나 원장이 가느다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작은 입술을 움직였다.

    "성체(成體)는 다 성장해서 생식 능력이 있는 몸을 의미하고, 성채(城砦)는 우리가 잘 아는 성과 성벽을 말하는 거야. 좀 그렇잖아? 꼭 몽마들의 자궁이라고 하는 거 같아서 싫었어."

    아, 그러세요. 네, 그러네요. 미안합니다, 잘 몰라서.

    차마 대놓고 불만을 표할 수 없었기에 나는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난 지금까지 몽마의 성체가 성과 울타리를 말하는 줄 알았다. 한자에 조금 약했지만 부끄럽거나 하지는 않았다.

    한자 모른다고 사는데 큰 지장이 있는 건 아니니까. 까짓것 뭐 어때? 게다가 난 초등학교만 나오고 검정고시라고!

    내 불행했던 유년시절의 결과물 중 하나일 뿐이었다.

    뒤늦게 심드렁한 내 표정을 확인한 나 원장이 흠칫 몸을 굳혔다. 그녀는 뒤늦게 내 심정을 읽은 듯 했다. 울 것 같은 표정을 보아하니 이대로 있을 수 없었다.

    "됐어. 난 의사보다 친구가 필요해. 괜히 의사처럼 하지 마. 지금 이대로가 더 좋으니까."

    나 원장은 내 위로에 감격한 얼굴로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어? 왜 저러지? 그냥 위로인데.

    격한 나 원장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 생각하며 무심코 넘겨 버렸다.

    손사래를 친 나는 나 원장의 부담스러운 눈빛을 뒤로하고 화제를 돌렸다.

    "그것보다 자세히 좀 얘기해 줘. 인터넷은 믿을 수가 있어야지."

    "응? 아, 벌 거 없었어. 그냥 게임이던데? 사냥하는 방식이 섹스라서 그렇지."

    나 때문에 나 원장도 한 게임하는 사람이었다. 덕분에 대화는 크게 어려움이 없었다. 다만 내가 궁금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결국 답답함에 나는 대놓고 물어 보기로 결정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싸움에서 지면 어떻게 되는 거야? 남자는 불능이 된다던데? 여자도 그래?"

    "아, 페널티? 여자도 그래. 아니다. 여자는 좀 덜 해. 오르가즘을 느낄 수 없고, 폐경기 여성처럼 되는데. 요즘은 뭐 러브 젤도 많으니까. 어차피 평생 오르가즘을 느끼지 못하고 죽는 여자도 많은데. 크게 상관있나?"

    순진한 얼굴로 엄청난 말을 내뱉는 나 원장의 모습에 나는 적잖이 놀라야했다.

    수정쌤이 이렇게 개방적이었나? 이거 놀라운데?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동안 수정쌤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애초에 남자는 여자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많은 것 같았다.

    그 뒤로도 나는 나 원장과 보스에 대해 시시콜콜한 것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생각 외로 그녀는 개방적이었다. 그녀와 섹스 배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은근히 쏠쏠한 재미를 주었다.

    단순히 재미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아주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나 원장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지금 난 개사기 캐릭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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