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he Boss-8화 (8/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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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컥.

    등 뒤로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물론 실제로는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단지 내 착각이었을 뿐이었다.

    백문.

    나는 도전을 선택했다. 잠시 고민했지만 결정은 변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30년이나, 30년 1개월이나."

    한 번 진다고 세상이 무너지는 건 아니었다. 물론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사람이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아니었다. 업적 소멸이 살짝 마음에 걸렸지만 그보다는 호기심이 더 컸다.

    "절대 물건이 서는 걸 또 보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냐."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변명을 내뱉었다. 솔직히 그런 마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전투를 끝내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양을 소환해서 그 녀석을 깨워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 가련한 인생이여.

    결국 나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아냐. 아직 포기하긴 일러! 희망은, 마지막 희망이 있잖아?"

    긴장감이 피어오르며 몸이 살짝 굳었다. 억지로 희미해진 희망을 다시 그렸지만 긴장을 쉬이 풀리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어보기 위해 새롭게 변한 내 상태를 확인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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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격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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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력 : 10 + 20

    + 지력 : 0 + 10

    + 체력 : 0 + 10

    + 속도 : 0 + 10

    + 정확 : 0 + 10

    + 행운 : 0 + 10

    + 잔여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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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활력 : 440/440

    + 정력 : 44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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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격력 : 83

    + 마법력 :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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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어력 : 12

    + 항마력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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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중률 : 124

    + 회피율 :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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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치명도 : 8

    + 치명 증폭 : 200%

    + 치명 저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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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벨. 아니, 음격이 오르며 얻은 5개의 능력치는 모두 근력에 밀어 넣었다. 남자는 힘이 아니겠는가? 가뜩이나 힘이 없어 서러운 삶을 살아왔는데.

    덕분에 상태 지표가 많이 변했다. 정확하게 따지면 칭호와 업적 덕분이었지만. 어쨌든 이만하면 보통의 게임이라면 초보존의 학살자가 되고도 남을 것 같았다.

    화려한 숫자들의 나열을 끝까지 읽고 나니 나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 나왔다.

    "칭호 개사기. 아니, 디테의 버프가 개사긴가? 어쨌든 대충 시스템이 눈에 들어오네."

    디테가 부여해준 '여신의 입맞춤'은 일종의 버프였다.

    모든 능력 100% 증가.

    사기도 이런 개사기가 없었다. 여느 게임이라면 너프 하라고 난리칠……아니다. 어차피 튜토리얼에서만 적용되니 그 정도는 아닐지도?

    어쨌든 모든 능력을 100% 상승시켜 준 덕분에 내 능력도 대폭 상승할 수 있었다. 비록 곱셈으로 적용하는 지 기분 수치가 0일 경우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지만, 10으로 올린 근력은 100%의 추가 상승이 있었다. 덕분에 1레벨짜리가 근력이 30이나 됐다.

    "이만하면 무쌍 찍지 않을까?"

    활력과 정력은 물론이고 공격력, 방어력 등 모든 지표를 2배로 만들어 주다보니 자신감이 내 자신감이 하늘을 뚫고 올라갔다. 심지어 말할 수 없는 업적이 올려주는 명중률과 주요 능력까지 합쳐지니 도저히 1레벨로 볼 수 없었다. 이정도면 튜토리얼 안에서는 무적이지 싶었다.

    다시 잠을 자는 그 녀석을 각성시키기 위해서라도 멈출 수 없었다.

    "가자! 엑스칼리버!"

    호기롭게 소리치며 잠시 멈췄던 걸음을 옮겼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가다보면 몽마가 나올 게 분명했다.

    예상대로 얼마 걷지 않아 발바닥에 자갈이 느껴졌다.

    음, 이전 방이랑 비슷한 구조네.

    대충 감이 잡혔다.

    이내 불그스름한 빛이 보였다.

    아, 저기구나.

    내 걸음이 빨라졌다. 아무래도 다시 고개 숙인 녀석을 한시라도 빨리 일깨우고 싶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희망고문이라더니 딱 그 꼴이었다.

    어쩌겠는가. 포기할 수 없는 것을.

    "뽀뽀옹?"

    "왔구나!"

    어둠을 헤치며 기차……아니, 몽마가 나타났다.

    이전 방에서 싸웠던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아니, 쭉쭉 빵빵한 몸매며 헐벗은 모습이며 똑같았다. 그나마 다른 점이라면 피부가 조금 더 붉다는 것?

    "응? 이거 조금이 아니라 완전 뻘건데?"

    피칠까지는 아니었지만 확실히 분홍은 아니었다. 온몸에 붉은 물감을 칠한 것 같았다. 그것이 오히려 더 색정적이었다.

    바디 페인팅도 묘한 매력이 있지.

    오오! 움직인다! 움직여!

    슬쩍 새로 나타난 몽마를 스캔하는 동안 다시 잠들었던 엑스칼리버가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확실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 명검은 몽마에게 반응하는 성검이었다.

    그래. 그랬던 거야. 그러니까 슬퍼하지 마.

    "후우……."

    몽마의 성체에 온 뒤로 내가 미쳐 돌아가는 것 같다. 나름 조용조용하고 올바른 가치관을 가진 평범한 남자였는데. 왜 이러지?

    자괴감이 살짝 들었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이미 엑스칼리버가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고 있었다. 얼마나 빳빳한지 뻐근할 정도였다.

    "뽀옹!"

    정신을 차리기 무섭게 몽마가 내게 달려들었다. 놀랍지 않았다. 이어진 전투 준비 자세도 담담히 받아 들였다.

    어차피 기습당하는 게 아니면 첫 공격권은 내가 가지니까.

    물론 내 통제에 벗어나 알아서 움직이는 육체에 대한 약간의 위화감이 없지는 않았다.

    전투 준비는 금세 끝났다. 자세는 이전 몽마와 다르지 않은 정상위였다. 나는 녀석의 가랑이 사이에 자세를 잡고 있었다.

    "오케이. 준비 끝. 시작하자고!"

    "뽀오옹!"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몽마가 색기 넘치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엑스칼리버의 위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허리를 뒤로 뺐다. 엉덩이가 정점에 다다랐을 때 나는 허리를 있는 힘껏 내려쳤다.

    파항!

    "뽀오오오오!"

    ['적피 수귀'에게 77의 피해를 주었습니다.]

    올? 데미지가 2배 넘게 늘었네? 나 좀 쩌는 듯.

    크게 늘어난 타격력에 기꺼워하고 있을 때 내 아래 깔려 있던 몽마가 앙칼지게 소리치며 반격을 시작했다.

    "뽀뽕!"

    "으음!"

    순간 몽마의 몸 속에 들어가 있던 엑스칼리버에서 찌릿찌릿한 전기가 피어올랐다. 마치 사방에서 푸딩으로 감싸는 것 같았다. 생각보다 강력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까 그 녀석이 더 강한 거 같은데?

    "아! 처음이라. 아니, 처음 기억. 에이, 어쨌든."

    인간이란 끝없는 욕심을 가진 학습의 동물이라 그런 것 같았다.

    ['적피 수귀'에게 6의 피해를 받았습니다.]

    느낌대로 피해가 그리 크지 않았다. 높아진 방어력을 생각하면 확실히 이전의 헐벗은 수귀보다는 강한 것 같았다. 단지, 도나 개나 거기서 거기였을 뿐.

    분석도 잠시 나는 지체하지 않았다. 몽마의 몸속을 파고 든 엑스칼리버가 재촉했다. 녀석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다시 힘차게 엉덩이를 뒤로 뺀 나는 두 번째 검격을 날렸다.

    퍼억!

    "뽀오오오옹!"

    ['적피 수귀'에게 85의 피해를 주었습니다.]

    ['적피 수귀'가 절정에 올랐습니다.]

    ['경험 25'를 획득합니다.]

    고작 두 번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몽마가 산화했다.

    붉은 광채가 몽마의 전신에서 폭사하더니 저번과 마찬가지로 엑스칼리버에 모여들었다. 손쉬운 승리에 나는 한껏 턱을 치켜세우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남자가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보람이 무엇인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응? 잠깐만. 왜 경험치가 25야? 뭐야? 이거 버그 아냐?"

    뿌듯함도 잠시 나는 게임 폐인으로 돌아갔다. 분명 더 강한 몽마인데 경험치가 더 적었다. 이건 기본적인 게임 시스템을 붕괴시키는 막대한 버그와 같았다.

    잠시 내 상식이 무너졌지만 금세 다시 복구할 수 있었다.

    "아……. 퀘스트가 아니라서 그런 거야? 퀘 보상 없이 사냥 경험치는 이거라고? 고작? 겨우? 에게?"

    실망한 내 심정을 대변하듯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던 엑스칼리버가 다시 잠들었다.

    또 다시 허탈감이 휘몰아쳤다.

    아, 나는 안 되는구나. 안 되는 놈은 그냥 안 되는구나. 조물주 위의 건물주라도 고자면 안 되는구나.

    "씨앙! 까짓것 될 때까지 하면 될 거 아냐!"

    엑스칼리버!

    형 믿지? 형이 널…….

    다시 세워줄게.

    반드시!

    ***

    "미안."

    나는 고개를 떨군 채 다시 잠든 엑스칼리버에게 사과해야했다.

    정말 미안해. 성검은 악마를 벨 때만 쓸 수 있나 봐.

    적피 수귀를 승천시킨 뒤로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백문을 열고, 몽마를 무찔렀다. 예상대로 나는 초보존의 무법자였다.

    홍피, 황피, 녹피, 청피, 남피, 자피.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 컬렉션을 완성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중간에 녹피 수귀를 승천시키며 레벨이 하나 더 올랐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지금 나는 실패자에 불과했다.

    "하아……."

    의욕이 사라졌다. 깊은 잠에 빠진 엑스칼리버도 불쌍했고, 어떻게든 엑스칼리버를 깨우겠다고 용쓰는 나도 불쌍했다. 그냥 내 삶이 불쌍했다.

    아, 이건 아니다. 이러다 정말 내가 미치겠다. 더 이상은…….

    의욕 상실의 여파로 인해 지금까지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곳을 바라보고 말았다. 내 눈앞에 검은 문이 보였다. 이 악몽에서 깰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걱정 마. 내일 또 올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혹시나 하는 생각에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흑문으로 향하는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이러다가 내가 미쳐버릴 것 같아서 그래. 미안하다."

    그 말은 끝으로 나는 흑문을 활짝 열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어둠 속으로 한 발짝 내딛는 순간.

    내 의식이 사라졌다.

    ***

    벌떡!

    "으악!"

    뜻 모를 비명과 함께 이불을 걷어 던졌다.

    식은땀에 젖은 이불이 눅눅했다. 아직 마르지 않은 땀이 내 얼굴에 가득했다. 꼭 가위에 눌린 사람 같았다.

    작은 기대를 안고 슬쩍 고개를 숙여보았지만 엑스칼리버는 여전히 고요했다.

    아, 씨. 남들은 아침마다 벌떡벌떡 한다는데…….

    범상치 않은 꿈 때문이었는지 오늘따라 유독 아쉬움이 컸다.

    하루 이틀 이러는 것도 아닌데. 나이가 드니 약해진 건가?

    침대에서 내려서며 나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쓸데없이 큰 킹사이즈 침대. 자기 전에 틀어 놓은 맞은편 TV. 쓴 기억이 없는 화장대까지.

    내 침실이 맞았다. 쓸 데 없이 큰 집으로 인해 더 쓸쓸하게 느껴지는 느낌이 들었다. 침실로 나와 거실에 들어서니 더 그런 느낌이 강했다.

    "아저씨 말대로 조그만 곳으로 옮겨야하나?"

    내 평생 은인이라 할 수 있는 아저씨. 아니, 삼촌은 매일 집구석에 처박혀 사는 나를 위해 이것저거서 시도하셨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부터 나를 돌봐주셨지만 그 당시 상처가 큰 나는 오히려 그것이 싫었고, 그때마다 참 못되게 굴었었다.

    만약 내 자식이 그랬다면 다리몽둥이를……. 아, 친자식은 아니지. 아무튼 친구의 유일한 혈육이라고 여러 가지로 챙겨준 아저씨가 없었더라면 지금 나는 건물주가 아니라 노숙자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삼촌에 대한 고마움을 되새김질하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비싼 돈을 주고 샀지만 안에 있는 거라고는 마트에서 사온 생수가 전부였다. 장보는 게 은근히 귀찮아서 차일피일 미룬 결과에 쓴웃음이 흘러 나왔다.

    혼자 사는 남자가 다 그렇지 뭐.

    상남자 스타일로 물병을 따서 단숨에 들이켠 나는 반쯤 비운 물병을 냉장고에 돌려놓고 문을 닫았다. 차가운 물을 좀 마시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털레털레 널찍한 거실 소파에 가서 앉은 나는 버릇처럼 리모컨을 찾았다.

    "어딨지? 여기 쯤 둔 거 같은데……아. 여깄네."

    검은 봉지에 숨어 있던 리모컨을 찾자마자 전원을 눌렀다.

    팟!

    검은 화면에 빛이 모여들며 익숙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매일 듣다보니 친한 옆집 사람 같네. 아, 나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지.

    푹신한 가죽 소파에 몸을 실으며 눈을 감고 뉴스로 아침을 시작하려고 했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아나운서의 엄청난 발언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야했다.

    [금일 기현상에 휩싸인 사람들의 경험담이 잇따르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성투난무. Battle of Sacred Sex라는 곳에 끌려가…….]

    아나운서가. 그것도 아리따운 여자 아나운서가. 내가 남몰라 친근감을 느끼던 그 아나운서가.

    섹스라고 그랬다.

    "……미친."

    역시 아니었다.

    내가 미친 게 아니었다.

    미친 건 이 빌어먹을 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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