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he Boss-2화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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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늘이 높았다.

    바람은 시원했고, 햇볕은 따스했다.

    평화로운 초원의 중심에 있는 작은 탁자에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남자는 검은 누더기를 깊게 쓴 채 눈썹 하나 보여주지 않았고, 여자는 하늘하늘한 비단옷을 두른 채 아름다운 미모를 뽐냈다. 산들바람에 몸을 맡긴 풀잎들에 둘러싸여 있는 그들의 모습은 정말 대조적이었다.

    상반된 모습과 달리 두 사람은 여유롭게 찻잔을 들어 코에 가져갔다. 저마다 차향을 즐기는 두 사람의 모습은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겉모습과 달리 다도에 조예가 깊은 모양이었다.

    한동안 고풍스럽게 여유를 즐기던 그때였다. 조금은 음침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가 황금빛이 감도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붉은 천을 쓰고 있는 탁자 위에 잔을 놓은 그의 얇은 입술이 달싹거렸다.

    "그러니까, 지금 장난질을 좀 치고 싶다. 이 말인가?"

    "어머! 장난질이라니? 그거 실례야!"

    퉁명한 남자의 힐난에 막 찻잔을 무릎 위에 내려놓던 여자가 화들짝 놀라며 성을 냈다. 고운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고, 맑은 눈동자에는 억울함이 가득했다. 남자라면 누구라도 사과부터 할 정도로 그녀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남자는 달랐다.

    아름답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눈앞의 여자의 자태에도 남자의 얼굴은 시종일관 한결 같았다. 그저 서늘히 코웃음을 치는 게 전부였다. 냉랭한 그의 입에서 신랄한 조소가 흘러 나왔다.

    "그 혓바닥으로 네 요망한 입술이나 적시는 게 어때?"

    화가 날 법도 한데, 여자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그녀는 오히려 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붉은 혀를 날름거리며 제 입술을 야릇하게 핥기 시작했다.

    "이렇게? 요렇게?"

    "……도대체 넌 어떻게 격을 갖출 수 있었지? 아니, 격은 둘째 치고. 어떻게 시공간에 존재를 각인할 수 있었지?"

    남자의 의문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여전히 경박한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행동은 더욱 심해졌다. 새하얀 양팔로 가슴 아래를 감싸 올리며 고개를 살짝 모로 기울이기까지 했다.

    성스러운 분위기가 대번에 요사하게 변했다.

    분위기가 일변하지 여자의 행동이 더욱 대담스러워졌다. 그녀는 얇디얇은 분홍 비단을 뚫고 나오려는 가슴을 거칠게 그러쥐더니 입술을 살짝 벌렸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뜨거운 입김이 흘러나오며 남자의 얼굴을 향해 흘러 내려갔다.

    그 순간 남자의 눈빛이 더욱 싸늘해졌다.

    "감히!"

    노호성이 터지는 것과 동시에 남자가 손을 휘둘렀다. 여자 못지않게 곱고 하얀 남자의 손은 마치 파초선 같았다. 차가운 폭풍이 일어나더니 이내 남자를 향해 흘러오던 여자의 입김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불쾌한 남자의 표정만큼이나 여자의 표정도 일그러졌다. 그녀는 자신의 입김이 사라지는 순간 더 이상 미소를 짓지 않았다. 남자가 일으킨 폭풍보다 더 차가운 기운이 그녀의 얼굴에 가득했다.

    살 얼음장 같은 여자의 목소리가 요사한 분위기를 단숨에 날려버렸다.

    "까탈스럽긴. 언제까지 그렇게 뻣뻣하게 살 거야?"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하여튼. 그러니까 아직까지 반려를 만나지 못했지."

    오뉴월도 이런 오뉴월이 없었다.

    난데없는 서리 낀 여자의 핀잔에 남자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타부타 몸을 돌린 걸 보니 더 이상 여자의 얼굴을 마주보고 싶지 않은 듯 보였다. 그는 인사 대신 자신의 답을 던졌다.

    "약속은 지키겠다."

    "잊지 마. 약속의 증표를."

    여자의 목소리도 진지했다. 그녀의 강조에도 남자는 입을 열지 않았다. 여자도 딱히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닌 듯 보였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있던 여자의 모습이 흐릿하게 변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의 모습이 완전히 초원에서 사라졌다. 남자가 손님이 아니라 여자가 손님이었던 것 같았다.

    여자의 존재감이 완전히 사라지자 남자가 다시 몸을 돌려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때는 이미 여자가 앉았던 의자와 찻잔이 본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진 뒤였다. 그제야 그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무언가 이상했다.

    아무리 꼴 보기 싫은 여자가 사라졌다지만, 남자의 표정이 너무 밝았다. 단순이 미소가 감도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의 얼굴 전체에는 득의양양한 조소가 만연했다.

    "큭큭, 크크큭!"

    기어코 남자의 입에서 정체불명의 웃음소리까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남자의 웃음은 그 뒤로 한참동안 이어졌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조금씩 남자의 웃음이 잦아들었을 때였다.

    "멍청한 년! 넌 여전히 인간을 모르는구나.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남자는 속였고, 여자는 속았다.

    하늘은 여전히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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