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564화 (564/564)

10. 앞으로 더 앞으로

자랑스러운 나의 악기들.

이들은 또 한 번 해내고야 말았다.

한계를 부정하고 그랜드 심포니와는 또 다른 길을 걸어 마침내 이곳에 이르렀다.

이들 모두가 파우스트.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

오늘은 우리를 위한.

지금도 걷는 이를 위한.

잠시 지친 이를 위한 무대다.

‘가자.’

최지훈에게 신호를 주고, 찰스 브라움을 향해 지휘봉을 휘둘렀다.

* * *

객석은 차분한 가운데 설렘으로 가득했다.

작년 그랜드 심포니의 감동을 기억하는 관객들은 그와 같은 경험을 다시 하고자 베를린 필하모닉을 방문했다.

더군다나 다름 아닌 베토벤, 바그너가 염원했던 괴테의 <파우스트>.

지금까지도 수많은 해석을 남기고 있는 독일의 대문호가 쓴 고전이었다.

오늘 밤은 고요하지 못할 듯하다.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편안한 자세로 기다리던 관객은 배도빈 모습을 드러내자 열렬히 환호했다.

그의 음악은 듣기 좋았다.

때론 격렬하게 때론 달콤하게.

흥분하기도, 슬퍼하기도, 전율하기도 했다.

더 이상 그들에게 클래식 음악은 특별하지 않았다.

어느 때고 틀어놓는 듣기 편한 장르였다.

집중해서 듣다 보면 무심코 수십 분이 흘러가 있지만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일하면서, 놀면서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다.

가볍게 즐길 수 있으면서도 반복해 들을수록 새롭게 느껴지는 음악.

그들이 배도빈의 곡을 사랑하는 이유였다.

인사를 마친 배도빈이 돌아섰다.

열정적으로 그의 이니셜을 연호하던 관객들이 애써 가슴을 진정했다.

이제 곧.

그가 펼칠 세계에 함께할 터였다.

배도빈이 지휘봉을 휘두르자 피아노가 격렬한 옥타브로 파우스트를 짓눌렀다.

전면에 나선 찰스 브라움과 그를 따르는 제1바이올린이 힘없이 노래한다.

웅대한 꿈을 가진 필멸의 존재.

바짝 마른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팔을 들고 호소한다.

제게 시간을 주소서.

강인한 다리와 밝은 눈을 주소서.

찰스 브라움의 흐느낌이 애처롭게 울리고, 진리를 탐하고자 했던 파우스트는 낡은 몸에 좌절한다.

그를 비추던 조명이 꺼지고.

무대 오른쪽이 밝게 빛난다.

스포트라이트 아래 가우왕의 피아노가 경박하게 웃는다.

현명했던 남자가 맞이한 좌절과 절망이 그를 즐겁게 한다.

메피스토텔레스는 그가 죽음을 직감한 순간 지금껏 쌓아온 모든 지식과 지혜를 놓을 것을 기대한다.

또 하나의 악기.

유일한 악기.

진달래의 목소리가 처연히, 말하듯 노래한다.

가는 팔 어두운 눈

두려움 앞에 무너지리라

그 비웃음을 저지하듯 울려 퍼지는 콘트라바순.

일곱 바순과 함께한 마누엘 노이어의 콘트라바순이 지엄하게 꾸짖는다.

그러나 경박한 피아노는 굴하지 않는다.

바순과 피아노가 경쟁하듯 이루는 화음 속에 관객들은 혼란스럽다.

너를 막지 않으리라

네가 그를 욕되게 할 수 없으니

갈망에는 방황이 따르는 법

불빛은 이제 가우왕과 찰스 브라움을 향해 있다.

끄윽.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절망 뒤에 피아노가 화려한 아르페지오로 조롱하듯 따라붙는다.

찰스 브라움이 활을 길게 켰다.

힘없이 흐느끼던 바이올린은 가우왕을 탓하듯 날카롭게 외친다.

가우왕은 굴하지 않고 찰스 브라움을 희롱한다.

고혹적인 멜로디로 이런 걸 원했던 것 아니냐고 묻는다.

찰스 브라움과 제1바이올린이 현을 강하게 쓸어 부정하고.

가우왕이 또 다른 멜로디를 연주하길 반복한다.

끊임없이 지혜를 탐하던 파우스트는 점차 메피스토텔레스의 달콤한 속삭임에 귀 기울인다.

세상 모든 지식도, 어떠한 명예도 줄 수 있다고 속삭이는 악마의 목소리.

파우스트가 메피스토텔레스에게 확인하듯, 찰스 브라움과 가우왕은 같은 멜로디를 번갈아 연주했다.

네가 만족할 때까지 세상 무엇이라도 주겠다며 다만 진실로 만족했을 때, 그 순간이 멈추고 영원하길 바랄 때 당신을 데려가겠다고 제안한다.

늙은 파우스트는 자신의 끝없는 지식욕을 언급하며 당당히 맞선다.

악기들의 대화가.

그들의 감정이 조금씩 객석에 전달되었다.

* * *

찰스 브라움의 파이어버드에 광기가 스며든다.

젊음을 얻은 파우스트.

꿈에 그리던 여성과 만나는 열망마저 실현되었다.

악마는 그의 눈을 멀게 했다.

파우스트의 눈에는 그레트헨이 그가 바라던 이상의 인물로 비친다.

젊은 날 나와 괴테가 한 실수처럼, 자신 안의 이상을 상대에게 투영한다.

관객들은 조금씩 찰스 브라움이 연주하는 멜로디에 이질감을 느낄 것이다.

고결한 음색은 온데간데없고 탐욕에 찌든 갈증만이 자리한다.

이야기는 점차 비극으로 치닫는다.

힘차게 나선 다니엘 홀랜드의 콘트라베이스가 찰스 브라움에게 가로막힌다.

거짓된 사랑에 눈이 먼 파우스트의 어긋난 행동과 그로 인해 어머니를 죽이게 된 그레트헨.

위태롭게 노래하던 블러드 와인이 고장 난 듯 멈추고 만다.

‘좋아.’

아직 기나긴 고난이 시작되었을 뿐이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최지훈과 진달래가 이야기를 잘 이끌어주는 덕에 각 악기가 효과적으로 나설 수 있었다.

마리 얀스의 조언을 받아 스포트라이트를 활용한 것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남은 것은 최지훈과 가우왕이 연주할 발푸르기스의 밤.

찰스 브라움과 윤희의 소나타.

걱정할 리 없다.

계획한 대로 모든 것이 원만히 흘러간다.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랜드 심포니가 그러했듯 이들이 함께하기에 가능했던 일.

자애롭게 스며드는 오보에와 유혹하는 플루트에 정신을 못 차리는 파이어버드.

과연 찰스 브라움이다.

즐겁다.

어쩌면 먼젓번 삶에서 이루지 못한 것이 득일지도 모른다.

당시 연주 수준과 열악한 상황에서 이런 공연이 가능할 리 없다.

‘듣고 있는가.’

비록 그 구차함에 실망했으나.

한때 실로 존경했던 괴테.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고통과 어려움이 따른다며, 그릇된 길이 아님을 설파한다.

욕망에 휩싸여 젊음과 지식, 사랑을 차지하고서도 만족하지 못했던 파우스트는 결국 그레트헨이 스스로 죽는 걸 막아내지 못했다.

절망한 그 앞에.

메피스토텔레스는 파우스트를 그가 바라던 영원한 여성이 살던 세계로 데려간다.

헬레네.

그녀와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았지만, 아내도 아이도 덧없이 죽는다.

지금까지 그에게 주어졌던 모든 부와 명예와 지식이 그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은 파우스트는.

모든 것을 잃은 뒤에야 움직이기 시작한 파우스트는 자신의 손으로 유토피아를 만들어나간다.

자유도 생명도

매일 싸워 얻는 자만이 누리리라

갈망할 뿐.

모든 것을 메피스토텔레스에게 기댔던 그는 점차 완성되어가는 유토피아를 바라보며 실로 간절히 바란다.

이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이들과 함께하리라.

그렇게만 된다면 말하리다.

멈추어라, 너는 너무도 아름답구나!

그것은 자유의 땅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함을 깨달은 남자의 각오.

비록 그 과정이 고통스러우나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열망을.

타는듯한 갈증을 이루기 위해 움직이는 우리를 위한 말이다.

알리고 싶다.

우리의 노력이 헛되지 않다고.

괴로우니까.

포기하고 싶으니까.

나와 당신의 노력이 어떤 가치를 가지는지 증명하고 싶다.

수십, 수백, 수천 번 마음을 고쳐잡으며 무엇인가를 해냈을 때.

누군가의 힘이 아닌, 자신의 힘으로 일군 자유의 땅 유토피아를 조우했을 때 비로소 안식을 맞이하리라.

방황이 우리의 발을 붙잡진 못할 터이니.

다만 그곳에 이르기까지 멈추지 않으리라.

* * *

관객들은 충격받았다.

<파우스트>는 불쾌하고 때론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이질감 속에서 찰스 브라움과 나윤희를 응원하게 되었다.

기이한 멜로디가 전하는 방황에 찰스 브라움이 흔들릴까 봐, 나윤희가 쓰러질까 봐 마음 졸였다.

쓰러질 듯. 쓰러질 듯.

가우왕의 피아노에 위태롭게 이어지는 두 바이올린.

마침내 파이어버드가 제 목소리를 내었을 때는 희열에 감싸였다.

짧은 노래와 무대 장치, 곡 배분에 따를 뿐이었지만 그 어떤 연극보다 가슴에 와닿았다.

의욕.

마음속에 피어난 용기를 느끼며.

두려움과 방황에 저항할 수 있는 강인함을 전해준 베를린 필하모닉과 배도빈에게.

관객들이 천천히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 * *

이틀 뒤.

<파우스트>를 향한 언론과 평단의 극찬이 쏟아지는 가운데, 일각에서는 <파우스트>의 성적이 <그랜드 심포니>가 올렸던 성적에 미치지 못함을 언급했다.

프란츠 페터는 평소와 같이 무심하게 <파우스트> 총보를 들여다보는 배도빈의 눈치를 보았다.

수백 번 수정하여 이미 너덜너덜해진 <파우스트>의 원본 총보를 또다시 수정하고 있었다.

‘속상하신가 봐.’

프란츠가 마음을 쓰고 있자 배도빈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물었다.

“왜.”

프란츠가 조심스레 물었다.

“속상하세요?”

“뭐가?”

“파우스트요. 그렇게 잘 완성했는데…….”

<파우스트>의 초연은 전 세계 3억 명이 함께 즐긴 곡이었다.

그를 통해 베를린 필하모닉의 ‘DOBEAN’을 구독하는 사람이 급증하기도 했다.

사카모토 료이치, 마리 얀스, 브루노 발터,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등 수많은 음악가가 <파우스트>가 기악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고 극찬하고.

경제적으로는 몇 달간 투어를 다녔던 <투란도트> 이상의 성과를 올렸지만.

그랜드 심포니와 같은 대작이 탄생했다고 장담했던 배도빈과 베를린 필하모닉은 만족할 수 없는 수치였다.

배도빈이 피식 웃었다.

“이번에 부족한 걸 알았으니 다음엔 좀 더 보강할 수 있잖아.”

프란츠 페터는 배도빈이 즐거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직 어려웠던 거야. 이 부분은 삭제하는 게 낫겠어.”

배도빈이 깃펜을 들었다.

“조금 쉬시는 건 어때요? 준비하시느라 고생하셨잖아요.”

“눈앞에 고칠 것이 보이는데 어떻게 쉬어.”

“그래도요. 안 힘드세요?”

배도빈이 고개를 돌렸다.

“힘들지.”

그러고는 작업에 집중하라는 듯 프란츠 페터의 악보를 가리키며 말했다.

“힘들지 않은 적은 없었어.”

그저 포기할 수 없었을 뿐이었다.

음악을 사랑하기에 그것을 이루지 않고서는 어쩔 도리가 없으니.

앞으로도.

또 그 앞으로도 나아갈 뿐이었다.

“그러니까 빨리 한 사람 몫 해서 좀 도와.”

“네, 네!”

변한 것이 있다면 그 주변에 함께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배도빈은 진동하는 스마트폰 액정을 확인하곤 슬며시 미소 지었다.

[UN과 협상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베를린에 도착해서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해마다 초청했던 UN에서 또다시 공연 요청을 해왔다.

UN Day concert.

배도빈은 참가 조건으로 그랜드 심포니를 연주할 수 있는 공간 확보를 요청했다.

다행히 일이 잘 풀린 듯.

예전처럼 비공개 공연도 아니었다.

유엔 데이 콘서트에서 가장 많이 연주된 곡이라던 자신의 9번 교향곡(합창)을 떠올린 그는 그 기록을 그랜드 심포니로 대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어쩐다.’

그랜드 심포니를 어떻게 편곡할지 상상하니 그의 입가에 행복이 묻어나왔다.

-다시 태어난 베토벤, 완결-

부록: 플라워위키 배도빈

부록: 인물 설정

부록: 1부에 등장한 곡 목록

부록: VARLOG THEME SONG

부록: Garland theme - Origin

부록: Black knight sample

1)영화 셔터 아일랜드(2010) 中

2)“나는 세 개의 이유로 고향이 없다.” 구스타프 말러

3) “언젠가 나의 시대가 올 것이다.” 구스타프 말러(1902)

4)말레리안(Mahlerian): 구스타프 말러의 열렬한 팬.

5)1908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을 지휘하게 된 구스타프 말러는 당시 최고의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에게 밀려나, 그를 배척했던 유럽으로 돌아가야 했다.

6)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1831. 신과 악마의 대화 中

7)지혜의 마지막 결론은 이것이다:

자유도 생명도 그것을 매일 싸워 얻는 자만이 누릴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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