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563화 (563/564)
  • 9. 파우스트

    “자기가 널 왜 만나야 하냐고 하더라니까?”

    배도빈은 히무라가 전한 말에 크게 웃었다.

    음악을 한다던 홍승일의 손녀를 만나보고자 했으나 멋지게 거절당하고 말았다.

    ‘얘가 이렇게 웃을 줄 알았나?’

    히무라 쇼우는 오랜만에 만난 배도빈이 변했음을 느꼈다.

    감정을 표현하는 데 거리낌 없는 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지 어느 순간 웃음이 많아졌고.

    행복해 보였다.

    마음에 안 든다고 멜로디언 호스를 던진다든가, 어린이용 피아노를 보고 역정을 냈던 성질머리 더러운 만 세 살, 배도빈을 기억한 히무라가 씩 웃었다.

    “즐거워 보이네.”

    “네. 재밌는 친구네요.”

    히무라는 굳이 말의 본뜻을 언급하지 않았다. 배도빈이 행복하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아무튼 그래서 전에 말했던 시간에 나오라고 했어.”

    배도빈이 의아해하자 히무라가 설명을 덧붙였다.

    “너 후원해 주는 사람이니까 고맙단 인사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냐고 했지.”

    배도빈이 헛웃음 지었다.

    “뭐 하러 그랬어요.”

    “널 왜 만나야 하냐고 물어서 대답해 준 것뿐이야.”

    배도빈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홍주희가 거절한다면 굳이 강요하고 싶지 않았는데 히무라가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그래서 나온대요?”

    “어. 맞는 말 같대.”

    배도빈은 어이가 없었다.

    만날 이유가 없다며 거절했으면서 히무라가 설득하니 금방 생각을 돌린 듯했다.

    주관이 뚜렷한 건지 건방진 건지.

    그러면서도 남의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점 또한 홍승일을 연상케 했다.

    “그래요. 수요일에 봐요.”

    배도빈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선영 누난 잘 지내요?”

    “요즘엔 여유가 생겼지. 실무를 조금씩 놓고 있거든. 전에는 집에 돌아오면 쓰러지듯 자기 바빴어.”

    히무라가 목을 풀었다.

    “인수인계 끝나고 다음 달엔 조용한 곳에서 좀 지내보려고. 한 달쯤. 이데랑 제수씨도 같이.”

    “좋네요.”

    절친인 나카무라 부부와 함께라면 수년간 쉬지 않고 달려온 그들에게 좋은 시간이 될 터였다.

    “생각해 둔 곳 있어요?”

    “글쎄. 비에이에 한 번쯤 가보고 싶긴 한데.”

    “처음 들어보는데요.”

    “홋카이도에 있는 곳이야. 호수도 꽃도 아름답지. 설경도 좋고. 메이다 신조 작가 작품 배경이었어.”

    배도빈은 고개를 끄덕이기도, 때론 호응하며 히무라의 말에 귀 기울였다.

    “은퇴하면 한 번쯤 살고 싶다고 생각했지. 생각해 보니 그러기 전에 가보는 게 좋겠어.”

    조금씩 자신이 일선에 나설 필요가 없어지고 있음에 은퇴를 생각하고 있던 히무라가 마음을 정리하듯 말했다.

    그의 말이 그런 느낌 풍겼기에.

    배도빈이 슬쩍 입을 열었다.

    “조용한 곳이라니 쉬다 오기엔 좋겠네요. 살아볼 생각도 있으면 더 그렇고요.”

    “그렇지?”

    배도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이든 두 달이든. 다녀오고 일 하나 해볼 생각 있어요?”

    “일?”

    히무라가 눈을 위로 떴다.

    배도빈이 가져오는 일은 대부분 무리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또 무슨 폭탄이 날아올지 경계했다.

    배도빈이 웃으며 이야기를 꺼냈다.

    “프로듀서로 활동한 지 오래되었잖아요. 앨범 기획 하나 해볼래요?”

    엑스톤의 총괄 프로듀서였던 히무라 쇼우는 배도빈의 정규 앨범 1집 이후로 음악 활동을 중단했었다.

    대신 배도빈이 좀 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매니저 역할을 자처했는데, 배도빈은 그런 그에게 고마워하면서도 음악가 히무라 쇼우가 이대로 사라지는 것을 아쉬워했다.

    “지금 와서 뭘. 아니야.”

    “찰스 브라움이랑 가우왕을 동시에 부리는 기회가 많지 않을 거예요.”

    배도빈이 미끼를 던졌다.

    “윤희도 지훈이도.”

    이 시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두 사람과 가장 사랑받는 바이올리니스트 두 사람을 데리고 앨범을 제작하라니.

    그 제안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자세히 말해봐.”

    “웃고 떠드는 밴드 이름으로 앨범을 내려고 해요. 주기적으로. 곡은 프란츠가 쓸 텐데 프로듀싱할 사람이 필요해요. 히무라가 맡아준다면 걱정 없을 텐데.”

    히무라가 배도빈이 찻잔을 들어 입에 가져가기도 전에 대답했다.

    “언제부터?”

    배도빈이 속으로 기뻐하며 답했다.

    “파우스트 끝나고 바로 시작하면 좋겠어요.”

    “그럼 올해 연말이나 내년으로 넘어가자마자 해야겠네.”

    히무라가 머릿속으로 대충 일정을 정리했다.

    “오케이. 이거 좀 신나는데.”

    히무라가 의욕적으로 몸을 들썩였다.

    재단도, 샛별 엔터테인먼트 운영도 중요하지만 배도빈은 활동 기간 6년 만에 세계적인 인지도를 쌓았던 히무라 쇼우가 자기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길 바랐다.

    * * *

    수요일.

    배도빈이 도빈 재단 사무실을 찾았다. 히무라 쇼우의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자니 밖에서 대화 소리가 났다.

    “이사님, 배도빈 이사장님 와 계십니다.”

    “네. 안으로 차 부탁해요.”

    “네.”

    “전 콜라가 좋아요.”

    “……서현 씨, 콜라 있어요?”

    “아뇨. 지금 다녀오겠습니다.”

    “없으면 됐어요.”

    히무라, 비서 그리고 아마도 홍주희로 예상되는 아이의 대화에 배도빈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당돌하네.’

    히무라 쇼우가 문을 열었다.

    배도빈은 히무라 옆에 서 있는 키 작은 학생을 살폈다. 한국 고등학교 하계 교복을 입은 홍주희는 와이어리스 헤드폰을 목에 걸친 채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

    “대박. 진짜 배도빈이네.”

    홍주희가 배도빈과 시선을 맞추고 물었다.

    “아저씨, 저 영상 하나만 찍어도 돼요?”

    “……아저씨?”

    배도빈이 눈썹을 찌푸렸다.

    다시 태어난 뒤로 단 한 번도 듣지 못한 말이었다.

    배도빈은 꺼리는 것 하나 없는 18살 꼬마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지켜보았다.

    히무라가 홍주희를 나무랐다.

    “인사부터 해야지.”

    “아. 안녕하세요.”

    홍주희가 허리 숙여 인사했다.

    “제 채널에 올리게 영상 찍게 해주시면 안 돼요?”

    “도빈이 영상 올리면 네가 지금까지 뉴튜브로 번 돈 다 게워내야 할걸?”

    홍주희가 입을 내밀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자 한숨을 푹 내쉬곤 자리에 앉았다.

    “너도 앉아.”

    “서서 들을래요. 왜 부르셨어요?”

    히무라가 홍주희를 탓하려 했지만 배도빈이 말리고 나섰다.

    “뉴튜브 한다며? 이 곡 듣고 한번 보고 싶었어.”

    배도빈이 홍주희의 뉴튜브 채널에 접속해 그녀의 곡을 재생시켰다.

    잔불이라는 제목의 피아노곡이었다.

    배도빈과 히무라 쇼우가 음대 진학을 설득하고자 자신을 불렀다고 생각한 홍주희가 내심 놀랐다.

    “아저씨가 듣기에도 좋았어요?”

    “……아저씨?”

    “네. 23살이면 아저씨죠.”

    배도빈이 미간을 모았다.

    “주희야, 아저씨가 아니라 이사장님이라 하는 거야. 너 장학금 주는 여기 주인이라고 했잖아.”

    “어려운 말 몰라서 그랬어요. 죄송합니다, 이사장님.”

    “아니. 편한 대로 불러.”

    다시 태어난 뒤로 줄곧 꼬맹이 취급만 받았던 그는 아저씨라는 말이 몹시 신선하게 느껴졌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들이 갓난아기 취급하는 데 적응하기까지 힘든 나날을 보냈던 그로서는 썩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어땠어요?”

    “엉망이야.”

    잔뜩 기대하고 물었던 홍주희가 붕어처럼 뻐끔거리기만 했다.

    “라흐마니노프 좋아해?”

    “……그런데요.”

    라흐마니노프 소나타 2번의 강렬한 도입, ‘파미레시 파레시파미레시’로 이어지는 음형은 홍주희에게 큰 인상을 주었다.

    그녀는 그것을 모티브 삼아 곡을 만들었고 그것이 잔불이었다.

    “모티프를 따서 다르게 써보는 건 좋아. 원곡과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 보는 건 좋은 공부법이니까.”

    배도빈이 홍주희를 응시하며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그런데 이런 수준에 만족할 거라곤 생각 못 했어. 댓글에 칭찬이 많던데 너도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지 의문이었고.”

    손을 파르르 떠는 홍주희를 상대로 물었다.

    “어때. 잘 만든 것 같아?”

    히무라가 눈을 깜빡였다.

    홍주희의 곡을 듣고 제법이라고 했던 것이 불과 얼마 전의 일이었다.

    ‘무슨 생각이 있겠지.’

    히무라는 차를 마시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랬다면 실망이야. 어설프게 익힌 지식으로 적당히 생각나는 음 짜 맞췄는데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공부할 필요성을 못 느꼈겠지. 대회 나가는 것보다 댓글 읽는 게 더 좋고.”

    신랄한 분석에 홍주희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래서 어떤 앤지 보고 싶었어. 그런데.”

    배도빈이 홍주희의 치마 주머니를 보았다.

    “음악보단 뉴튜브 크리에이터를 하고 싶은 모양이네.”

    녹음기능을 켜두었던 홍주희가 당황했다.

    “나쁘지 않아. 영상 콘텐츠를 만들고 싶으면 해야지. 누가 뭐라 하든 귀담아듣지 말고 계속해. 하지만 그런 너를 도울 이유는 없어.”

    홍주희가 배도빈의 시선을 피했다.

    자신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는 듯한 눈을 계속 마주할 수 없었다.

    다만 분할 뿐이었다.

    자기가 최선을 다해 만든 곡이 저렇게 말할 정도로 별로였는지 묻고 싶었다.

    “뭐가 어떻게 나쁜데요.”

    홍주희가 중얼거리듯 물었다.

    배도빈은 내심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뭐가?”

    “잔불. 별로였다면서요. 어디가 별로였냐고요.”

    “박자는 밋밋하고 화음은 과했어.”

    배도빈이 자리에서 일어나 히무라의 키보드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홍주희의 잔불을 그만의 방식으로 연주했다.

    “이렇게 박자를 당기고 늘리는 것만으로도 훨씬 나아지잖아? 고민을 덜 했단 뜻이야.”

    “…….”

    홍주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말대로 자신이 연주했던 것보다 배도빈의 연주가 나았다.

    그의 말대로 잘 쓴 것 같아서 빨리 자랑하고 싶었다.

    다 옳은 말이라서, 아무 변명도 할 수 없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홍주희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떨어뜨렸다.

    “아저씨가 어떻게 알아. 내가 최선을 다했는지 안 했는지.”

    씩씩대며 따지는 그녀는 배도빈의 대답에 말문이 막혔다.

    “이건 제법 괜찮았으니까.”

    배도빈이 홍주희가 가장 처음 업로드했던 영상을 재생했다.

    할아버지의 피아노란 제목의 소나티네는 공백이 많았지만 섬세하게 배치된 음들이 아득한 그리움을 남겼다.

    기억에 없는 할아버지의 유품.

    그것을 연주하며 자란 홍주희가 할아버지를 보고 싶은 마음을 담은 곡이었다.

    가장 순수했던 시절 만든 곡이.

    가장 어렸을 때 만든 곡이 가장 좋다니.

    홍주희는 혼란스러웠다.

    “음대 안 가도 돼.”

    그때 배도빈이 입을 열었다.

    “콩쿠르도 안 나가도 되고. 뉴튜브 계속해도 돼. 널 장학생으로 둔 이유는 네가 음악을 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함이었어. 네 채널 운영하면서 음악을 한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배도빈은 홍주희가 어떤 방식으로 활동하든 상관없었다. 이 어린 음악가가 음악을 하는 게 중요했다.

    자신을 성찰하고 타인을 관찰하여, 서로를 이해해 나갈 수 있다면. 그 대화가 원활해진다면 얼마든지 도와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 노력을 게을리하고 단지 조회 수에 만족하고 음을 가지고 노는 일만 한다면 그러고 싶지 않았다.

    홍승일의 손녀라도.

    또한 홍승일의 손녀이기에.

    “이번 달 말일까지 시간을 줄게. 네가 음악을 하고 있다는 걸 증명해. 곡을 쓰든 연주를 하든.”

    홍주희가 눈물을 훔치곤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홍주희가 떠나자 히무라가 한숨을 쉬었다.

    “저 녀석 성격에 대들고 나설 줄 알았는데 의외로 순순하네.”

    배도빈이 피식 웃었다.

    “자기도 아는 거예요. 그동안 음악보단 돈 벌려고 했던 걸.”

    배도빈은 히무라가 홍주희를 소개하며 전한 이야기에 안타까워했다.

    홍승일이 죽고.

    적지 않은 유산을 물려받은 장남 홍인호는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체를 설립했다.

    처음 반년은 지인들 덕에 어떻게든 꾸려나갔지만, 상황은 갈수록 나빠졌다.

    회사를 유지하기 위해 빚을 지게 되었고 그렇게 홍인호와 그 가족들의 생계는 어려워졌다.

    유장혁이 오랜 벗의 아들에게 기회를 주었기에 겨우 파산 위기를 넘겼지만, 홍인호의 회사는 좀처럼 나아지지 못했다.

    배도빈은 그런 상황에 놓인 홍주희가 집에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했다.

    도빈 재단이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었지만 한 달에 100만 원.

    적지 않은 금액이었지만 음악 대학을 다니기에는 부족했다.

    더욱이 한창 또래와 어울릴 나이에 용돈 받는 것조차 눈치 보였을 테니, 스스로 돈을 벌고 싶었을 것이다.

    배도빈은 어린 음악가가 자신이 처한 상황 때문에 자신을 속이는 걸 바라지 않았다.

    친구 홍승일을 생각해서라도.

    “당돌하니까 분해서라도 증명하려 할 거예요. 홍인호가 사업을 말아먹든 뭘 하든 관심 없지만 적어도 그 애가 꿈을 포기하게 두고 싶진 않아요.”

    뉴튜브를 통해서 음악을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다만 동영상 조회 수를 높이기 위해 스스로도 만족하지 못하는 곡을 급히 올리는 일은 없었으면 했다.

    히무라는 예전 홍승일과 배도빈의 관계를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콩쿠르에 나가야 한다고, 선의로 경쟁하여 더욱 음악에 힘써야 한다고 했던 그 마음이 어쩜 이렇게 똑같을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홍 선생님이랑 똑같네.”

    히무라의 말에 배도빈이 울컥했다.

    “제가 낫죠. 적어도 하고 싶지 않은 거 하라고 하진 않으니까.”

    “그런가?”

    “그럼요.”

    “그래. 네가 낫다.”

    히무라는 홍주희의 부모 계좌로 지급되고 있는 장학금을 홍주희 개인 계좌로 돌리고, 금액을 인상하라는 배도빈의 요청을 떠올리며 웃었다.

    도와주기로 이미 정해두었으면서.

    그녀를 몰아붙인 걸 보면 정말 많이 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사람 살살 굴리는 실력이 늘었던데?”

    “단원들 상대하다 보니 늘더라고요.”

    히무라가 크게 웃었다.

    홍주희는 자존심이 상했다.

    적어도 음악에 관해서는 또래는 물론 한두 살 많은 사람, 선생님도 그녀를 무시하지 못했다.

    그랬는데.

    배도빈에게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없었던 탓이었다.

    덜 완성되었단 건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주기적으로 영상을 올려야 뉴튜브 채널이 성장할 수 있었다.

    돈을 벌어야 했으니까.

    음악 이전에 살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니까.

    할아버지의 피아노 앞에서 고민하던 그녀가 기분을 전환하고자 침대에 누웠다.

    핸드폰을 열고 뉴튜브를 켰다.

    댓글과 조회 수를 확인하고 추천 영상을 내리니 배도빈과 나윤희가 대한국립교향악단과 콜라보 공연을 한다는 영상이 제법 올라와 있었다.

    뚱한 표정으로 그중에 하나를 눌렀다.

    영상은 배도빈의 공연을 들어볼 마지막 기회라는 식으로 과장되어 있었다.

    관심을 끌려는 얄팍한 수법이었지만 홍주희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어제 그런 말을 한 사람은 어떤 음악을 하는지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뭐가 이렇게 비싸?’

    홍주희는 8만 원에 판매되는 R석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S석이 6만 원, 가장 저렴한 C석은 1만 5천 원이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화면을 내리고 자신의 계좌를 확인했다.

    뉴튜브 채널에서 수익이 발생하고 5개월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은 돈 311만 9,031원이 고스란히 있었다.

    음악 작업을 하고, 좋은 영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컴퓨터가 필요했고 그것을 사기 위한 돈이었다.

    입술을 깨물며 한참을 고민하던 홍주희가 거실로 나갔다.

    “엄마.”

    “응?”

    “토요일에 놀러 갈래?”

    “놀러는 무슨. 너 갔다 와.”

    홍주희가 입을 내밀었다.

    거실에 앉아 마늘종을 다듬고 있는 엄마는 무릎 나온 바지에 목이 늘어난 낡은 셔츠를 입고 있었다.

    힘없이 웃으며 거절하는 엄마의 모습과 어렸을 때 놀러 가고 싶다면 재밌게 놀다 오라며 만 원을 쥐여주던 엄마가 겹쳐 보였다.

    “그게 아니라. 공짜 티켓 두 장 생겼는데 엄마랑 가고 싶어서.”

    “공짜 티켓?”

    “응. 대한국립교향악단. 배도빈 나오는 거.”

    홍주희의 모친 최지윤은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피식 웃었다.

    “오랜만에 듣네. 예전에 할아버지가 도빈이 이야기 많이 하셨어.”

    “또 그 얘기. 오백 번은 들었겠다.”

    최지윤이 씁쓸하게 웃곤 물었다.

    “도빈이 공연이면 표가 귀할 텐데 어디서 구했어?”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홍주희가 멋쩍게 웃었다.

    “으이구. ……표 얼마나 하는데?”

    “하나도 안 비싸. 만오천 원이면 갈 수 있어. 내가 살게.”

    “네가 돈이 어디 있다고 그래.”

    최지윤이 다듬던 마늘종을 내려놓았다.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고, 딸 대학을 보내기 위해 일하며 모았던 돈이 조금 있었다.

    딸에게 보고 싶은 공연 정도는 들려주고 싶었다.

    홍주희가 나섰다.

    “아니야. 나 돈 있어. 봐.”

    딸이 내민 구형 스마트폰에는 311만 9,031원이 표시되어 있었다.

    “이 돈이 어디서 났어?”

    “뉴튜브. 나 돈 많이 모았지.”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돈이었지만 18살 딸이 모았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공부는 안 하면서 그것만 하고 있었구나?”

    “히.”

    “그거 모아서 뭐 하려고?”

    “컴퓨터 사려고. 음악 작업하고 영상 화질 좋게 하려면 비싼 거 사야 해.”

    최지윤의 속이 타들어 갔다.

    기특하기도 하면서 컴퓨터 하나 사기 위해 저 돈을 얼마나 아끼고 있었을지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다른 것도 아니고 음악을 하고 싶다는데.

    전처럼 사 줄 수 있는 형편이 아니라 더욱 그러했다.

    “잘 챙겨둬. 허튼 데 쓰지 말고.”

    “허튼 데 안 써. 컴퓨터 살 거란 말이야. 그래도 삼만 원 정도는 공연 보는 데 쓸 수 있잖아. 삼백만 원이나 있어.”

    “엄마 젊었을 때 표가 칠만 원 정도 했는데 어떻게 삼만 원으로 두 장을 사니.”

    “아니야. 진짜야. 봐. C석 만오천 원이라잖아.”

    몇 년간 옷 한 벌 사 달라는 말도 안 했던 착한 딸, 속 깊은 딸이 스스로 보러 가자고 할 정도면 어지간히 가고 싶었을 터.

    그나마도 형편을 생각해서 무대가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곳을 말했다.

    최지윤은 목이 메어 침을 삼켰다.

    “엄마가 구해볼 테니까 가 있어.”

    “왜애.”

    “표 잘 구하시는 분 아니까 그리 알아. 그리고 그 돈 아빠한테는 말하지 말고.”

    홍주희는 괜히 엄마에게 부담을 준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했다.

    조금 더 참을걸.

    보고 싶은데.

    두 마음 모두 진실이었다.

    그러던 차 홍주희의 핸드폰이 울렸다. 잔뜩 풀 죽어 있던 홍주희가 메시지를 보곤 소리쳤다.

    “엄마! 히무라 아저씨가 표 줬어!”

    “이사님이?”

    “응! 재단에서 장학생들한테 다 주나 봐. 2인 티켓 두 장이야. 아빠도 가면 되겠다!”

    다 큰 아이가 엉덩이를 씰룩이며 좋아하는 걸 보며.

    최지윤은 유장혁과 배도빈, 히무라에게 받은 은혜를 다시 한번 가슴에 새겼다.

    * * *

    “헐. 사람 개많아.”

    “주희야, 말 이쁘게 해야지.”

    “어머. 만물의 영장분들이 정말 많아요.”

    홍주희의 말에 최지윤이 어이가 없어 헛웃음 지었다.

    신이 난 홍주희는 음악의 전당을 둘러보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러다 아빠의 표정이 좋지 못한 걸 보고 말을 걸었다.

    “아빠, 여기 와 봤어?”

    “예전에. ……아빤 음악 별로 안 좋아해.”

    홍인호의 말에 홍주희가 잠시 시무룩해졌다가 이내 밝게 말했다.

    “그래도 배도빈 나오잖아. 할아버지랑 친했다며.”

    “그랬지. 여기서부턴 걸어가야겠다.”

    차에서 내린 홍주희가 주차장을 가로질러 뛰었다.

    “애 앞에서 그러지 좀 마. 오랜만에 웃는 애 기분 상하게 무슨 짓이야?”

    최지윤이 남편을 쏘아붙였다.

    “그러니까 안 온다고 했잖아. 내가 지금 한가하게 공연이나 보러 다니게 생겼어?”

    “자기가 잘못해 놓고 왜 딸까지 힘들게 하냐고. 주희가 뭘 잘못해서 공연 한 번 보는 것도 당신 눈치를 봐야 하는데?”

    “엄마! 아빠! 빨리! 빨리!”

    딸이 재촉하자 두 사람이 말다툼을 멈췄다.

    “담배 하나 피우고 갈 테니 먼저 가.”

    최지윤이 끓어오르는 화를 한숨과 함께 내뱉곤 딸에게로 발을 옮겼다.

    홍인호는 씁쓸한 마음에 흡연 장소를 찾았다. 숨을 깊게 빨아들이며 담배에 불을 붙인 그는 음악의 전당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아버지 홍승일이 마지막 혼을 불살랐던 이곳을 의도적으로 찾지 않았다.

    아버지가 남겨준 재산을 몽땅 말아먹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고, 아버지와 관련된 것을 볼 때마다 죄스러웠다.

    ‘아버지.’

    그는 더 이상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이는 자꾸만 먹어서 어느덧 쉰둘.

    쉰두 살의 아버지는 인생에 통달한 듯했지만 막상 그 나이가 되어 보니 자신은 변한 게 없었다.

    단지 나이만 먹었을 뿐.

    아버지가 남긴 재산과 아버지의 친구분이 도와주신 돈까지 잃을 위기에 처한 그는 답을 알 수 없었다.

    더 큰 문제는 딸 주희.

    아버지를 닮았는지 음악에 재능이 있었다. 장학금도 타오는 자랑스러운 딸 주희에게 좋은 악기는 사 주지 못하더라도 새 옷, 새 신발 정도는 마음껏 사 주고 싶었다.

    공연 같은 거 몇 번이고 보여주고 싶었다.

    수학여행 갈 때는 마음껏 놀라고 용돈도 두둑이 주고 싶었다.

    주희를 낳고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아내가 자기 몰래 청소 아르바이트를 하는 걸 보았을 땐 가슴이 무너졌다.

    아버지가 살아계셨더라면 조언이라도 구했을 텐데.

    홍인호는 요즘 그런 생각이 잦아졌다.

    한편.

    객석에 앉은 홍주희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렇게 큰 무대에 와 본 적은 처음이었다.

    더군다나 히무라 쇼우가 따로 준비해 준 특별 티켓 덕에 따로 안내를 받으니 괜히 우쭐해졌다.

    팸플릿을 펼쳐서 프로그램을 확인한 홍주희가 물었다.

    “엄마, 이거 무슨 곡인 줄 알아?”

    “어머. 세상에 이게 다 뭐람.”

    프로그램 리스트를 확인한 최지윤이 신기해하며 설명했다.

    “엄마 어렸을 때 했던 만화야. 그땐 정말 재밌게 봤는데.”

    “만화?”

    홍주희가 되묻기가 무섭게 차명운 지휘자와 배도빈, 나윤희가 무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빈! 빈! 빈! 빈!”

    콘서트홀을 가득 채운 박수 소리에 홍주희가 깜짝 놀랐다.

    그들의 설렘이 그대로 전달되었다.

    배도빈과 나윤희의 연주를 애타게 기다렸던 사람들은 때때로 큰 목소리로 두 사람을 불렀다.

    클래식 공연이라 다소 차분할 것 같다고 생각한 홍주희에게는 뜻밖의 일이었다.

    차명운이 관객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오늘은 특별한 분을 모셨습니다. 다들 잘 알고 계실 텐데, 피아니스트 배도빈 군과 바이올리니스트 나윤희 양입니다.”

    관객들이 다시 한번 크게 환호했다.

    “특별한 분을 모신 만큼 색다른 무대를 준비했습니다. 오늘은 자유롭게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굳이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분위기만으로도 관객들이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배도빈이 피아노 앞에 앉았고 그 옆에 나윤희가 섰다.

    바른 자세로 차분히 앉은 배도빈에게선 알 수 없는 품격이 느껴졌다.

    ‘달라.’

    홍주희는 무대 위의 그가 저번에 만난 불량하게 생긴 아저씨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순한 인상으로 기억하던 나윤희도 전혀 다르게 보였다.

    선홍빛 바이올린을 든 그녀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고혹적이었다.

    ‘프로는 다르구나.’

    두 사람이 차명운과 시선을 교환하고 준비를 마쳤다.

    오늘 처음 연주할 곡은 마법사 니라 Try의 오프닝 곡을 탱고풍으로 편곡한 협주곡.

    배도빈이 건반을 누르며 연주가 시작되었다.

    장렬히 시작한 피아노 뒤에 나윤희가 현을 뜯었다.

    블러드 와인이 애수 짙은 눈물을 떨어뜨리자 아이들과 함께 콘서트홀을 찾은 부모들이 깜짝 놀랐다.

    잊고 있던 멜로디를 듣는 순간.

    TV 앞에서 만화영화를 보던 그때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홍인호와 최지윤도 마찬가지였다.

    ‘좋잖아.’

    홍주희는 선명하고 그윽한 선율에 공연을 즐기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아빠와 엄마가 고개를 끄덕여가며 연주를 즐기고 있었다.

    부모님도 설레게 하는 연주라니.

    확실히 편하게 즐길 수 있으면서도 잘 조율된 무대였다.

    여러 만화영화 주제곡 사이에 안경 펭귄 주제가가 나왔을 땐 객석이 한 번 크게 웃고 말았다.

    상어 동요가 나왔을 땐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홍주희도 아는 곡이 나오자 웃으며 따라 불렀다.

    분위기가 한껏 달아올라, 홍주희는 정말 오랜만에 행복했다. 추억을 상기해준 공연과 딸이 좋아하는 모습을 본 덕에 최지윤도 덩달아 기분이 나아졌다.

    어렸을 적.

    아무 걱정도 없었던 시절로 돌아갔던 홍인호도 마찬가지였다.

    다 큰 애가 무슨 만화를 보냐며 타박하면서, 나중에는 나란히 앉아 주인공을 응원했던 아버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아버지.’

    행복했던 시절을 지켜주었던 아버지.

    사무치게 그리운 아버지를 떠올림으로써 그는 사업과 관련한 일로 무거웠던 마음을 잠시나마 내려놓을 수 있었다.

    건강하고 기운찼던 아버지.

    돌아가시기 몇 년간 어린 주희에게 과일과 과자를 주는 낙으로 사셨던 아버지.

    비록 재산을 잃었어도.

    그분이 남겨준 삶의 자세와 사랑만은 잃을 수 없었다.

    ‘어?’

    공연을 즐기던 홍주희가 문득 고개를 떨어뜨리고 울고 있는 아빠를 발견했다. 아버지가 우는 모습은 처음이라 당황했다.

    언제나 걱정하지 말라고.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딸은 아빠가 지켜준다던 그 강인한 아빠가 너무나 힘들어 보였다.

    두 시간에 걸친 공연이 성황리에 마무리되고, 음악의 전당에서 나온 홍주희 가족은 말없이 낡은 차에 올라탔다.

    홍인호가 애써 목을 풀곤 밝은 척 말했다.

    “공연도 봤으니까 오늘은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떡볶이!”

    홍주희가 앞쪽 좌석으로 몸을 쭉 내밀고 답했다.

    “떡볶이는 많이 먹었잖아. 스테이크 먹을래?”

    “아니~ 난 떡볶이가 좋은데? 떡볶이 먹자! 김말이도!”

    그 순간 홍인호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뚝 하고 떨어졌다.

    최지윤도 소리 죽여 흐느꼈다.

    깜짝 놀란 홍주희가 다급히 말을 바꿨다.

    “알겠어. 아빠 먹고 싶은 거 먹어. 스테이크 먹어. 왜 울고 그래.”

    “미안해액. 주희야아아. 엄마가 미안해.”

    부모님의 눈물에 홍주희도 서러움이 올라왔다.

    자기는 괜찮은데, 자기 때문에 엄마, 아빠가 더 힘든 것 같아서 죄송했다.

    “왜 울어! 괜찮다는데! 아무렇지도 않은데! ……씨잉.”

    가족은 한동안 차 안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쌓인 설움을 달랬다.

    * * *

    [음악의 전당에 울려 퍼진 추억]

    [차명운, “가족을 위한 무대였다.”]

    [배도빈, 희망을 안기다]

    지난 금요일, 음악의 전당에서 반가운 두 음악가를 만날 수 있었다.

    체코 프라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거쳐 서울에 이른 베를린 필하모닉 악단주 배도빈과 나윤희 악장이 대한국립교향악단과 함께한 것.

    오랜 기다림에 보답하듯, 두 사람은 지휘자 차명운과 함께 특별한 무대를 선보였다.

    이날 공연의 주제는 가족.

    배도빈 악단주와 차명운 지휘자는 부모 세대와 자녀들이 즐겼던 만화영화 주제곡을 편곡해 연주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대화가 단절되었던 가족들은 음악을 통해 이야기 나눌 수 있었다.

    두 거장이 편곡한 추억의 곡에 관심을 가진 아이들은 어떤 만화에 나온 곡인지 물었다.

    부모님과 어떤 대화를 해야 하는지 몰랐던 아이들이 질문을 던지자, 마찬가지로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몰랐던 부모들은 반색했다.

    [“아이와 그렇게 오래 대화한 건 정말 오랜만이었어요.”]

    [“아들 녀석이 커가면서 제대로 마주치지도 못했는데, 오늘 녀석이 노인탐정의 팬이라는 걸 처음 알았죠. 집에 가면 1권부터 모아두었던 만화책을 꺼내 보려고요.”]

    공연을 관람한 여러 가족이 밝혔듯, 배도빈‧나윤희, 대한국립교향악단은 음악을 매개체로 두 세대를 성공적으로 연결했다.

    지금껏 마땅한 해결책 없이 문제로 남았던 가족 구성원 사이의 대화 단절 문제가 이들의 공연으로 해소된 것.

    어쩌면 우리 가정의 문제는 단지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주제를 찾지 못했기에 생긴 것 아닐까.

    인류의 희망으로 불리는 배도빈이 또 한 번 우리에게 희망을 안긴 듯하다.

    -정세윤(관중석)

    └반가운데 왜 이렇게 슬프냐.

    └그러니까.

    └어제 야근하느라 공연은 못 가고 틀어놓고 일하는데 좀 울컥하더라. 그땐 그렇게 좋아했는데 어떻게 까맣게 잊고 있을 수 있는지.

    └사는 데 치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추억팔이라고 해도 가끔은 이런 것도 좋다.

    └신기한 게 그 만화영화 내용은 기억에 거의 없거든. 근데 그거 방송할 때 있었던 일은 생생하더라. 퍼스트 피스에서 너구리 동료로 들어오는 날에 우리 아버지 쓰러지셨거든. 난 그것도 모르고 만화 보고 있었어. 아버지 보고 싶다.

    └힘내. 아버지도 너 보고 싶을 거야.

    └내가 사이트를 잘못 찾아왔나? 평소에 미친 소리 하던 분들이 아닌데?

    └오늘 좀 센치해.

    정세윤 기자의 감상평처럼 배도빈‧나윤희와 대한국립교향악단의 공연은 큰 인기를 끌었다.

    특히 부모 세대를 위로하였다.

    열심히 살아가고 있지만 현실이 너무나 고되기에 가끔은 가장 행복했던 때로, 아무 걱정 없던 때로 돌아가고 싶기도 했다.

    물가는 오르는데 임금은 제자리고.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에게 밀려, 버티다 버티다 쫓기듯 나와 창업했지만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게 쉬울 리 없었다.

    하청받은 곳에서 또 하청을 내리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은 최소한의 임금으로 그저 버틸 뿐이었다.

    생산자보다 유통사에게 높이 배당된 수익 배분율.

    프랜차이즈 기업들은 점주의 상황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대규모 할인을 진행하고, 그 부담을 각 지점에 넘겼다.

    50퍼센트 이상 할인하면 매출은 오르는데 남는 돈은 오히려 적을 때가 수두룩했다.

    매출은 오르니 식자재를 파는 본사는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전체 매출에서 떼가는 로얄티도 마찬가지였다.

    해마다 수천 또는 억 단위 금액이 들어가는 인테리어를 강요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수익을 챙겼다.

    직장인도 자영업자도.

    택배 기사도, 경비원도 단지 가족을 지키고 싶을 뿐인데 그마저도 허락되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차명운이 준비한 공연은 그런 이들을,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었다.

    대한국립교향악단은 배도빈‧나윤희의 협조를 구해 해당 공연 영상을 무료로 풀었고.

    삼 일간 치른 공연 수입 전액을 어려운 이들에게 기부하였다.

    제아무리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다시 한번 힘내자고, 버티다 보면 분명 좋은 날이 올 거라고.

    함께 일어나자고 말해왔던 루트비히는, 배도빈은 자신과 같은 뜻을 가진 이들과 함께하여 흡족해했다.

    * * *

    한국에서의 일정을 마친 배도빈, 나윤희는 한가한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느지막이 일어나 산책을 했고 그러다 배가 고파지면 눈에 띄는 식당에서 아침과 점심을 겸했다.

    귀가한 뒤에는 씻은 뒤 찾아오는 나른함에 기대어 그간 못 봤던 영화를 보다가 잠들었다.

    노을이 질 즈음 일어나 저녁을 함께 준비했고 늦은 밤까지 악기를 연주하며 웃고 떠들었다.

    그렇게 사랑을 나누며 지친 몸을 달래다 보니 어느새 최지훈의 수료식 일자가 다가왔다.

    내일 아침 일찍 최지훈을 데리러 가기로 약속한 배도빈과 나윤희는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잠들 준비를 했다.

    배도빈의 스마트폰에서 잘 시간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활기찬 분위기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나윤희가 침대에 오르며 물었다.

    “무슨 곡이야?”

    “홍주희 신곡. 어때?”

    “좋다. 발랄한데?”

    배도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이었다.

    잔뜩 멋을 부린 최근 몇 곡보다 훨씬 솔직하고 선명하게 느껴졌다.

    어깨에 지고 있던 짐을 조금은 내려놓은 듯했다.

    배도빈이 프란츠 페터에게 홍주희의 신곡을 링크 걸어주곤 스마트폰을 덮었다.

    옆으로 돌아누우니 서로 웃음이 터졌다. 장난스럽게 입술을 맞추고 사랑스럽게 대화했다.

    “다들 놀랄 거야. 파우스트.”

    “그러지 않으면 서운하지.”

    배도빈은 대교향곡 이후 가장 큰 규모의 공연을 준비함에 꽤 많은 공을 들였다.

    세 곳의 오케스트라를 경험하면서 얻은 지식을 어떻게 적용할지도 고민했었다.

    나윤희의 말대로 놀라고 기뻐할 터였다.

    “곡이 좋아서도 그렇지만, 나쁜 쪽으로.”

    “나쁜 쪽으로?”

    나윤희는 각 등장인물을 상징하는 악기의 수석들을 진심으로 안쓰럽게 여겼다.

    불새에서의 본인과 찰스 브라움.

    대교향곡에서의 왕소소와 같았다.

    <파우스트>에서 각 악기에 할당된 파트는 절정의 기교를 보여야 하면서도 단순히 빠르고 복잡한 것만은 아니었다.

    느리고 단순한 곡일수록 훌륭히 연주하기 어려운 만큼 쉽게 익힐 수 없었다.

    파우스트의 찰스 브라움.

    메피스토펠레스의 가우왕.

    그레트헨의 나윤희.

    발로틴의 다니엘 홀랜드.

    호문쿨루스의 피콜로를 맡을 플루트 수석 앙드레아스 블라우.

    헬레네의 왕소소.

    메넬라오스의 스칼라.

    그 외에도 악기별 수석은 짧고 긴 개인 분량을 책임져야 했다.

    수많은 작곡가 중에서도 표현하기 어렵기로는 베토벤과 나란히 손꼽히는 배도빈의 곡이기에 더욱 부담스러울 터였다.

    “다들 좋으면서 솔직하지 못해.”

    배도빈이 그럴 리 없다고 단정 지었다.

    자부심 하나로 한평생을 살아온 그들이 어렵다는 이유로 원망할 리 없었다.

    단원들을 향한 배도빈의 신뢰는 흔들리지 않았다.

    “흫.”

    배도빈의 말에 나윤희가 웃고 말았다. 의아해하는 그에게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고민하던 중 좋은 예가 떠올랐다.

    “맛있는 음식 먹는 건 좋잖아.”

    배도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 보고 요리하고 설거지하는 건 싫어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나윤희의 질문에 배도빈이 고민했다. 재료를 고민하여 구매하고 조리하는 건 즐거웠으나 설거지는 귀찮았다.

    “다들 좋아서 하지만 그렇다고 힘들지 않은 건 아니니까.”

    나윤희의 말대로였다.

    음악을 너무나 사랑하고, 무대를 무덤으로 여기는 그들이지만 힘들지 않은 건 아니었다.

    되레 ‘음악이 힘들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고 말한 배도빈과 마찬가지로 매일 위기였다.

    도망치고 싶고.

    잠시 쉬고 싶기도 했다.

    가끔은 막막해서 도저히 해낼 수 없을 것 같기도 했다.

    배도빈이 어떻게 하면 단원들이 좀 더 즐겁게 <파우스트>를 준비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숙달하는 과정은 어쩔 수 없고.”

    나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곡에 익숙해지기까지의 고난은 모든 단원이 마땅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렇게 훌륭한 자세를 갖춘 그들마저도 버티기 어려운 강도의 문제였다.

    “연습 중간에 간식 시간을 넣는 건 어때?”

    배도빈의 제안에 나윤희가 눈을 크게 떴다.

    단 것을 좋아하는 그다운 발상이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당분은 스트레스를 감소해 주고 적당한 휴식으로 피로도 회복할 수 있으니 좋은 방법 같았다.

    “소소가 좋아하겠다.”

    두 사람은 다정하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배도빈은 나윤희의 얼굴을 소중히 쓰다듬었다.

    “파우스트 다음엔 뭐 할 거야?”

    “음. 올림픽 주제곡도 남아 있고, 노이어한테 줄 곡도 있고.”

    “응.”

    “그거 말곤……. 취미 하나 가지고 싶어.”

    “취미?”

    모든 시간을 곡을 쓰거나, 피아노를 치거나,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도 아니면 음악을 감상하는 데 썼던 그에게서 취미라는 단어가 나올 줄은 몰랐다.

    그의 손길을 느끼며 잠을 청하던 나윤희가 몸을 일으켰다.

    “김 사장님한테 카레 만드는 법을 배우려고. 그리고 카레집을 내는 거야. 미테 외각에. 이름은 도진 카레로.”

    예비 신랑의 큰 꿈에 나윤희가 다시 몸을 눕혔다.

    “엄청 노력해야겠네?”

    “즐겁겠지.”

    배도빈이 웃으며 또다시 나윤희의 얼굴에 손을 가져갔다.

    나윤희가 그의 정중한 손길을 느끼며 물었다.

    “뭐 하나 물어봐도 돼?”

    배도빈이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 만지는 거 좋아?”

    배도빈이 습관처럼 얼굴을 만졌기에 나윤희는 전보다 얼굴 피부에 훨씬 많은 공을 들이고 있었다.

    조금 민망하지만.

    나름 자신하는 피부가 좋아서 만진다든지, 아니면 예뻐서 만진다든지 하는 대답을 기대했다.

    배도빈이 그녀의 얼굴에서 손을 떼고 속삭였다.

    “예뻐서.”

    나윤희가 싱그럽게 웃곤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예뻐서.

    사랑스러워서.

    혹시라도 다시 시력을 잃는 날이 올까 봐. 다시는 그녀를 눈에 담지 못할까 봐.

    배도빈은 버릇처럼 그녀의 얼굴을 기억하고자 했다.

    소리를 잃어가던 시기.

    음감마저 잃지 않기 위해 피아노의 C음을 반복해 눌렀듯이.

    * * *

    “잠시만요. 퇴소하시는 건가요? 최지훈 씨 훈련소 생활은 어땠는지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혹시 최지훈 씨와 같은 생활관 쓰셨나요?”

    기자들이 훈련소를 나서는 사람들에게 최지훈에 관련한 질문을 쏟아내는 한편.

    기자들과 팬들로 가득한 주변을 경계한 배도빈과 나윤희는 차 안에서 최지훈을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온 차채은은 초조한 듯 망상에 빠져 버렸다.

    “왜 안 나와? 다 나오는데 왜? 다친 거 아니야? 군대에서 다치면 은폐한다던데!”

    “어제도 통화했잖아. 괜찮을 거야.”

    “정말? 그치? 괜찮겠지?”

    나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진정하는가 싶더니 그새를 못 참고 차 밖으로 나섰다.

    차채은이 위병소와 훈련소 안쪽을 살피길 얼마간.

    “오빠!”

    퇴소식을 마친 최지훈이 훈련소 밖으로 나오자 차채은이 후다닥 뛰어갔다.

    최지훈도 호응하여 서로를 격하게 끌어안았다.

    조용히 입소한 탓에 좋은 기삿거리를 놓쳤던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덕분에 두 사람의 포옹 장면은 수백 장의 사진으로 남았다.

    “얼굴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탔어.”

    차채은이 최지훈의 얼굴을 살피며 울먹였다. 최지훈은 그런 그녀가 그저 귀여웠다.

    “밖에 있었으니까. 살도 쪘어. 건강해진 거 같아.”

    “밥이 넘어갔냐! 아니, 밥은 잘 챙겨 먹어야지. 잘했어!”

    “무슨 말 하는 거얗. 좀 마른 거 같은데? 밥 잘 먹으라고 했잖아.”

    한편 기초 군사 훈련 수료를 축하하기 위해 나왔던 최지훈의 팬들은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최지훈과 차채은이 어렸을 적부터 친하게 지내온 사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지만, 도저히 소꿉친구로는 볼 수 없는 애틋함이 전해졌다.

    최지훈이 잠시 인터뷰에 응하자 질문이 쇄도했다.

    “훈련소 안에서는 어떻게 지내셨나요? 어떤 기분이셨나요?”

    “불편한 점은 없었습니까?”

    “복귀 시기는 언제로 계획하십니까? 베를린 필하모닉에서의 활동이 베를린에 국한된 건가요?”

    이미 그러한 질문은 팬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한 기자가 분위기를 읽어 질문했다.

    “퇴소 축하드립니다! 차채은 평론가와 뜨겁게 인사하셨는데, 무슨 의미였습니까?”

    차채은이 그제야 당황했다. 슬금슬금 최지훈과 떨어지려고 했다.

    최지훈이 차채은의 손을 낚아채곤 말했다.

    “제 여자친구예요.”

    “꺄아아아!”

    “아.”

    환호하는 팬도, 정신이 아득해져 쓰러지는 팬도 있었다.

    최지훈은 인터뷰를 짧게 마치고 찾아와 준 팬들과 한 명, 한 명 인사를 나눴다.

    그의 오랜 매니저이기도 했던 집사에게 부탁하여 준비한 파인애플사의 이어폰을 하나씩 나눠주었다.

    선물을 잔뜩 가지고 왔던 팬들은 최지훈의 역조공에 깜짝 놀랐다.

    “히~ 이거 왜 주세요?”

    “여기까지 와주셨잖아요. 뭐라도 보답해 드리고 싶었어요.”

    “이런 거 주지 말고 맛있는 거 드세요!”

    “저 돈 많아요.”

    “그럼 잘 받을게요. 너무너무너무 감사합니다.”

    한 팬의 솔직한 반응에 최지훈도 줄을 서고 있던 다른 팬들도 웃고 말았다.

    “아, 잉잉 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축하해요. 바로 활동하시죠?”

    “네. 모레 베를린으로 가요.”

    “한국에서 공연 한 번만, 아니, 여러 번 해주시면 안 돼요?”

    “꼭 그럴게요.”

    최지훈은 오랫동안 자신을 응원했던 팬들의 카페 닉네임을 기억하며 인사했고.

    그중에는 처음 보는 사람도 있었다.

    고등학생에서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앳된 여성이었다.

    “이름이 뭐예요?”

    “혜주요. 김혜주.”

    최지훈이 사인을 한 종이를 건네자 그녀가 간절한 얼굴로 물었다.

    “오빠, 진짜 아니죠? 사귀는 거 아니죠?”

    “맞아요. 많이 좋아해요.”

    최지훈이 울상이 된 그녀를 달랬다.

    “채은이랑. 또 도빈이랑 함께할 수 있어서 행복해요. 혜주 씨도 소중한 사람과 함께하길 바랄게요.”

    “오빠가 젤 좋아요. 사귀고 싶어요.”

    최지훈이 깜짝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여러 팬과 만났지만 이런 말을 들은 적은 처음이었다.

    단 한 번도 대화를 나눈 적 없는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사랑받을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고마워요.”

    그러나 최지훈에게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홀로 마음을 키워왔던 그녀는 최지훈을 만난 순간 너무나 기뻤다.

    설렜다.

    안 될 걸 알면서도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러나 고맙다고 말할 뿐인 그의 눈을 보니 사진을 통해, 영상을 통해 수천 번, 수만 번 봤던 그가 낯설게 보였다.

    오늘, 처음 만난 사이라는 걸 깨달았다.

    좋아하는 마음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좋아하는 마음을 전했을 뿐인데, 그마저도 안 되는 것 같았다.

    팬들 사이에서 쏟아지는 눈총을 느낀 김혜주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고개를 숙인 채 자리를 떴고 최지훈은 다른 팬들을 상대하면서도 안타까워했다.

    * * *

    “웅덩이에 던지는데 물이 막 몇 미터씩 올라오고 엄청났어.”

    서울로 올라가는 차 안에서 최지훈이 수류탄을 던졌던 경험을 풀었다.

    “막 땅이 울리더라니까?”

    “정말?”

    최지훈이 무슨 이야기를 하든 차채은은 적극적으로 반응해 주었고 배도빈과 나윤희도 군대 관련한 이야기는 처음이었기에 그의 말에 귀 기울였다.

    손바닥보다 더 큰 나방을 봤다든지 는 다소 믿기지 않은 말도 했다.

    “나방이 어떻게 손바닥보다 커.”

    “정말이야. 팅커벨이라고 한다구! 그렇죠, 집사님?”

    “하하하. 있지요.”

    일행 중 유일하게 군대를 다녀온 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밤에 별이 그렇게 많은 건 처음 봤어. 공기가 깨끗해서 그런지 엄청 잘 보이더라.”

    생전 처음 해본 경험을 쏟아내는 최지훈을 보던 배도빈이 슬며시 웃으며 물었다.

    “힘들진 않았어? 몸은 괜찮고?”

    “응. 다들 친절했어. 아, 밥이 진짜 맛없었어. 배고프니까 다 먹었지만. 나 이제 설거지 잘해.”

    배도빈과 나윤희가 웃었다.

    한 마디 던지면 말이 줄줄이 이어졌다. 그간 얼마나 답답했으면 저럴까 싶었다.

    “의외네. 군기 잡는다고 힘들 줄 알았는데.”

    “응. 훈련은 힘들었는데 다들 열심히 하니까 같이 하게 되더라. 대대장 아저씨가 자꾸 부르는 건 귀찮아서 그만 좀 부르라고 했어.”

    “대대장이 뭐야?”

    “훈련소가 신병교육대대인데 대대의 장.”

    “그 사람이 널 왜 불러?”

    “심심한가 봐. 자꾸 먹고 싶은 거 없냐고 묻고 자기랑 테니스 치자고 하고 골프 치러 갈까 묻더라구. 친구도 없나 봐. 훈련 나가야 한다고 해도 자꾸 붙들어서 좀 그랬어.”

    집사는 할 말이 많았지만 하지 않았다.

    “할 일 없는 아저씨네.”

    “응. 좀 눈치 없어 보였어.”

    최지훈이 자기를 껴안고 있는 차채은에게 물었다.

    “저녁 같이 먹을래? 아버지하고.”

    차채은이 얼굴을 파묻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은 계속 이럴 것 같아 최지훈이 미소 지었다.

    “같이 먹자. 누나도요.”

    “오늘은 가족끼리 보내. 네 아버지가 티는 안 내도 신경 많이 쓰시는 거 알잖아.”

    “히.”

    배도빈이 종이봉투를 하나 꺼냈다.

    “메일로도 보내놨는데 일단 받아.”

    최지훈이 의아해하며 봉투를 받았다. 엉겨 붙은 차채은 때문에 열어보기 힘들었다.

    “채은아, 잠깐만.”

    차채은이 잠시 떨어졌다가 최지훈이 악보를 꺼내자 다시 달라붙었다. 그가 팔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이번에는 몸통을 감쌌다.

    그 모습에 최지훈은 기뻐서 웃고 배도빈은 어이가 없어 웃었다.

    “엄청 많은데? 총보야?”

    그러나 이내 악보를 살핀 최지훈은 웃을 수 없었다.

    “……이게 뭐야?”

    “파우스트 삽입곡.”

    삽입곡이라고 할 수준이 아니었다.

    악보를 집는 순간 총보라고 착각할 만큼 방대한 분량이었는데, 최지훈은 페이지를 빠르게 넘겨 그것이 전부 피아노 악보라는 걸 확인했다.

    “분위기 잡는 역할이야. 공연 내내 연주하는 사람은 너뿐이야.”

    배도빈이 자랑스레 말했다.

    그랜드 심포니와 파우스트는 그가 염원하다가 미처 이루지 못한 작품이었다.

    이제 파우스트만이 남은 상황에서 형제와 함께할 생각을 하니 뿌듯했는데, 최지훈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이걸 다 외우라고?”

    난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음악성의 문제가 아니었다.

    배도빈이 말하길 파우스트의 공연 시간은 100분. 대작 중의 대작으로 최지훈은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연주를 해야 했다.

    “나도 외우잖아. 할 수 있어.”

    배도빈이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실제로 피아니스트들은 여러 악기 연주자 중에서도 뛰어난 기억력을 요했다.

    짧게는 20분, 길게는 1시간 가까이 되는 곡도 많았다.

    최지훈이라면 무리 없이 해낼 거라고 판단했다.

    다만 이런 작업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최지훈으로서는 부담스러웠다.

    “……이러니까 악마라고 하지.”

    최지훈이 툴툴대며 악보를 좀 더 자세히 살폈다.

    배도빈이 그 열정을 쏟은 곡인 만큼 확실히 매력적이었다. 악보를 보는 것만으로도 <파우스트>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 것 같았다.

    욕심이 났다.

    훈련소 안에서 피아노를 연주하지 못해 안달이 났던 그를 충분히 만족시킬 것 같았다.

    “치사해.”

    최지훈이 봉투에 악보를 집어넣자 배도빈이 씩 웃었다.

    * * *

    [최지훈 퇴소. 활동 재개는 언제?]

    [배도빈, 나윤희, 최지훈 베를린 복귀]

    [배도빈, 대작 예고. 그랜드 심포니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

    [배도빈의 새로운 도전. 단 한 명이 노래하는 오페라.]

    얼마 전 베를린 필하모닉으로 복귀한 배도빈 악단주가 또 하나의 대작을 예고했다.

    <투란도트>, <그랜드 심포니>와 같은 걸작을 발표했던 그를 향한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그가 오랜 세월 준비한 오페라 <파우스트>를 언급한 것이다.

    배도빈 악단주는 각 악기가 등장인물을 상징하며, 가수는 해설로 소프라노 진달래(23)만 존재한다고 밝혔다.

    배도빈 악단주의 새로운 시도가 어떤 방식으로 관객들에게 다가갈지 아직은 의문이다.

    한 평론가는 지금껏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베를린 필하모닉도 서사성이 중요한 오페라를 가수와 가사 없이 표현하긴 쉽지 않을 거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악단주의 복귀를 반기는 베를린]

    [마누엘 노이어,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어떤 위인인지 잠시 잊고 있었다. 배도빈의 복귀를 환영한다.”]

    -09.03.2028

    [마누엘 노이어, “빌어먹을 악마가 돌아왔다. 세프와 보스 때문에 겨우 자란 내 머리가 몽땅 빠질 지경. 내 탈모는 산재다.”]

    -09.05.2028

    * * *

    Es irrt der Mensch, solang' er strebt.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니라.6)

    * * *

    배도빈, 나윤희, 최지훈이 복귀하고 베를린 필하모닉은 본격적으로 오페라 <파우스트>를 준비해 나갔다.

    연주자가 곡을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는 이유로 기술적인 연습에 들어가기 전, 단원들은 때아닌 교양 수업을 들어야 했다.

    “선생님! 질문 있습니다!”

    진 마르코가 손을 번쩍 들었다.

    배도빈이 질문을 반겼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라니.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

    파우스트를 읽지 않은 진 마르코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노력하지 말라는 말로 들렸다.

    배도빈이 작중 신의 대사가 나오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신과 메피스토텔레스의 내기에서 나온 말입니다. 메피스토텔레스는 갖은 향락을 다 안겨주면 파우스트가 반드시 타락할 거라고 말하죠.”

    진 마르코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업에 성실히 임했다.

    “반면 신은 노력하는 인간에게 방황은 당연히 따라붙는다며, 단지 흔들릴 뿐. 파우스트가 끝끝내 자신의 길을 걸어갈 거라고 합니다. 방금 이 문장처럼요. 즉 메피스토텔레스에게 파우스트를 타락시켜 볼 테면 해보라는 뜻이죠.”

    “신이 잘못했네.”

    피셔 디스카우의 발언에 단원들이 잠시 웃었다.

    배도빈이 강의를 이어나갔다.

    “이 대화는 파우스트를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노력하는 사람은 역경이 따르고 방황하지만 끝내 이겨낼 수 있다는 말이에요.”

    그것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정신과도 맞닿아 있었다.

    18세기 유럽에 퍼지기 시작한 계몽주의는 험난한 현실을 자각하면서 시작되었다.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쓰러진 채로는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는다며 스스로 일어나자고 다독였던 사상이었다.

    그 상냥한 사상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지탱하는 힘이었으며 곧 그 자신의 삶과 같았다.

    그리고.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일이었다.

    다시 태어난 그는 수많은 사람이 싸워 이겨온 지금이야말로 그가 바라던 신세계가 도래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대에 적응하며, 눈부시게 성장한 사회가 아직도 많은 부조리를 안고 있음을 깨달았다.

    달라진 것 같지만, 가진 자가 부를 독식하는 현상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노력해도 변하지 않는 삶에 조금씩 지쳐갔다.

    ‘쟤는 머리가 좋잖아.’

    ‘나도 수천만 원짜리 과외받으면 저 정도는 하겠다.’

    ‘흙수저로 태어나 봐. 실패 한 번이면 인생 끝이야. 노력은 몇 번을 실패해도 괜찮은 애들이나 하는 거지.’

    ‘물만 마셔도 살찌는데 어떡하라고.’

    남과 다른 상황에 기대어 자신의 삶을 바꾸기 포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배도빈은 진실로 그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보다 나은 방향으로 걸어가길 바랐다.

    결코 의미 없지 않다고.

    포기하는 순간 변하는 건 없다고.

    노력을 이어나가는 과정이 끝이 없고 험난해도 끝끝내 나아가면 분명 얻는 것이 있다고 다독여 주고 싶었다.

    그의 모든 곡이 항상 희망차게 끝나는 것도 모두 그 때문이고, 그가 파우스트를 오페라로 만들려고 했던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배도빈이 스크린에 다음 문장을 띄웠다.

    Das ist der Weisheit letzter Schluß:

    Nur der verdient sich Freiheit wie das Leben, Der täglich sie erobern muß.7)

    “파우스트는 자유도, 생명도 그것을 매일 갈구한 자만이 누릴 수 있다고 결론 지었습니다.”

    단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유는 누구도 부여할 수 없었다.

    본디 가지고 태어난 것을 스스로 지켜나가는 일이었다.

    평생을 음악에 빠져 살아온 그들은 파우스트를 통해 괴테가 말하는 이야기에 깊이 공감했다.

    배도빈의 파우스트 강연은 점점 무르익었고 적당한 시간을 두고 휴식과 간식이 주어졌다.

    단원들은 어렵지 않게 그들의 보스가 달라졌음을 눈치챘다.

    “연수 다녀오시더니 다른 악단은 휴식 시간을 갖는 걸 보셨나 봐.”

    “난 우리 보스가 무엇이든 배우는 게 가장 존경스러워. 솔직히 보스가 뭐가 부족해서 스스로 연수를 가겠어.”

    단원들은 체코 프라하에서 공수해 온 꿀 케이크의 달콤함에 취해 보스를 찬양했다.

    “다시 시작하죠.”

    15분간의 휴식 뒤 단원들은 마음을 다잡고 강의에 집중했다.

    파우스트의 주제를 비롯하여 등장인물과 대략적인 스토리를 이해한 그들은 각자 맡은 역할을 배정받았다.

    악보를 수령한 일부 단원의 눈이 튀어나올 듯했다.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으나 치밀하게 작성된 악보는 그의 독특한 필체에 익숙한 그들로서도 한눈에 알아보기 힘들었다.

    때때로 느슨하게 배치된 곳도 있었지만 지시문이 많아 어떻게 연주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단원들이 당황하던 중.

    “보스.”

    마누엘 노이어가 조용하고 묵직하게 배도빈을 불렀다.

    배도빈과 막역한 그가 직책으로 부른 만큼 단원들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었다.

    “내가 왜 콘트라바순을 연주해야 하는지 물어도 될까?”

    바순 수석으로서 40년 가까이 재임한 마누엘 노이어는 분개했다.

    그에게는 콘트라바순 악보가 주어졌고, 이를 이상하게 여긴 마누엘 노이어는 부수석으로 20년을 재임한 루펜 자텔마이어의 악보를 확인했다.

    그가 바순 독주를 맡은 사실을 알게 된 노이어의 자존심은 크게 상처받았다.

    “노이어가 적임자니까요.”

    배도빈의 대답에 노이어가 눈을 꿈틀거렸다. 침을 삼킨 그는 배도빈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그렇군.”

    그러나 작곡가이자 지휘자의 판단.

    마누엘 노이어는 끓어오르는 화를 꾹 누르고 악보를 내려다보았다.

    ‘벌써 뒷방 늙은이 취급인가?’

    바순과 콘트라바순은 생김새는 유사하나 다른 악기였다.

    크기가 전체적으로 훨씬 컸고 관이 길어졌으니 호흡량도 그만큼 늘려야 했다.

    호흡량이 많이 필요하니 음정 유지하는 법도 큰일이며, 운지법은 관악기 중에서도 가장 높은 난도를 자랑했다.

    이름만 콘트라바순이고 전혀 다른 악기였다.

    만약 바순을 사용하지 않는 곡이라서 콘트라바순으로 첼로 등과 어울리라고 했다면 모를까.

    엄연히 바순 전담 파트가 있는 곡에서 다른 악기를 연주하라니.

    지금까지 쌓아온 그의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처사였다.

    “노이어.”

    배도빈이 그를 불렀다.

    노이어가 고개를 들자 배도빈이 평소와 같이 덤덤히 말을 전했다.

    “우리 악단에서 노이어보다 콘트라바순을 잘 연주하는 사람은 없어요.”

    “당연하지.”

    그러나 별개의 일이었다.

    “그리고 난 당신을 믿어요.”

    배도빈은 달리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저 믿는다고 말을 남겼을 뿐, 악보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럼 배경부터 갑니다. 지훈아.”

    “응.”

    “이미 말했지만 곡 전체의 분위기. 배경음을 맡아줘.”

    단원들이 이를 의아히 여겨 최지훈 부수석을 바라보았고 이내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가 들고 있는 악보는 두툼하다 못해 제대로 들기도 버거워 보였다.

    단원들은 이번 프로젝트의 최대 희생양이 최지훈임을 직감했다.

    “다음은 주인공. 찰스.”

    찰스 브라움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우스트역을 맡아줘야 해요. 2악장 후반에 따로 독주도 있고요. 지훈이 다음으로 많은 분량이에요. 할 수 있겠어요?”

    악장 역할은 물론.

    웃고 떠드는 밴드의 책임자이자 베를린 음악교육원 원장이며 베를린 음대 학과장 교수이기도 한 찰스 브라움은 악단 내에서 가장 많은 역할을 맡고 있었다.

    배도빈뿐만 아니라 다른 단원들도 개인 공연까지 하는 그가 이 이상 무리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찰스 브라움의 답은 정해져 있었다.

    “물론이지.”

    찰스 브라움은 배도빈 바이올린 소나타 13번, ‘영원한 여성’을 확인한 이상 포기할 수 없었다.

    바라던 곡을 쥐었으니 절대로 놓칠 리 없었다.

    “좋아요. 가우왕.”

    “여기.”

    “메피스토펠레스. 찰스만큼 활동해야 해요. 교활하고 끈질기게 잘 표현해 주리라 믿어요.”

    “교활한 건 뭐야.”

    가우왕이 눈썹을 좁히며 악보를 살폈다.

    멜로디만 봐서는 아주 달콤한 분위기가 될 듯한데 배도빈은 몇몇 곳에 교활하고 끈질기게 연주하라는 지시문을 남겼다.

    그는 이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고민에 잠겼다.

    “나윤희 악장.”

    “네.”

    “그레트헨 역과 삽입 소나타를 맡아주세요.”

    단원들은 배도빈과 나윤희의 대화에 의아해했다.

    ‘일부러 저러나?’

    ‘그러겠지. 둘이 아주 좋아 못 살더만.’

    “발로틴에 다니엘 홀랜드. 호문쿨루스에 앙드레아스. 헬레네에 왕소소. 메넬라오스의 스칼라. 모두 다음 주까지 맡은 역할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하세요.”

    “네.”

    배도빈은 이후로도 각 악기 수석들에게 각자의 배역을 맡겼다.

    단원들은 그들이 직접 ‘등장인물’로 나서는 무대가 처음이었기에 좀처럼 감을 잡지 못하면서도 이 새로운 시도가 어떻게 완성될지 기대했다.

    그러던 중 바순 차례가 왔다.

    “루펜.”

    바순 부수석 루펜 자텔마이어가 대답했다.

    “나중에 확인해 보면 알겠지만 바순은 모두 같은 악보가 지급되었습니다. 코러스를 넣는다고 생각하고 바순 주자를 이끌어주세요. 이번에는 바순이 일곱 명 배정됩니다.”

    바순 연주자들이 깜짝 놀랐다.

    보통 두 명에서 네 명 사이로 배치되던 바순이 그렇게까지 많이 배정될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신의 목소리와 함께하는 일곱 대천사를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그에 따라주세요.”

    배도빈이 고개를 돌려 마누엘 노이어를 보았다.

    ‘삐졌네.’

    속으로 피식 웃은 그가 고개를 숙이고 악보만 내려다보고 있는 그를 불렀다.

    “노이어.”

    악보에 신경이 팔린 마누엘 노이어가 배도빈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노이어.”

    “어?”

    한 번 더 부르자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 해야 하는지 이해한 것 같네요.”

    “잠깐.”

    “콘트라바순은 신 역할을 맡습니다. 자애롭고 근엄하게 표현해 주세요. 바순이 코러스를 넣으며 더 보완할 테니 서로 함께하는 일이 잦을 거예요.”

    “잠깐만. 이거.”

    “노이어를 믿어요.”

    악보를 자세히 살핀 노이어가 사색이 되었다.

    곡이 어려운 걸 떠나서 모호한 의미의 지시문이 너무도 많았다.

    음색을 자애롭게 하며 음은 단단하게 하라는 등, 기존 콘트라바순이 가진 묵직하고 부드럽게 퍼지는 음색과는 맞지 않는 지시도 있었다.

    게다가 크기만큼 둔한 탓에 호통치듯 나가는 부분에서는 과연 연주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잠깐만. 믿는 건 알겠는데. 이거 호흡량 달리면 큰일 나. 나보단 스벤이 어울릴 것 같은데.”

    마누엘 노이어의 말에 바순 주자 스벤 울라이히가 깜짝 놀랐다.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 중에 콘트라바순 다룰 수 있는 사람 저랑 수석뿐인데, 이런 중요한 역할은 당연히 수석이 맡아야죠!”

    “언제까지 어리광부릴 거야? 너도 이제 큰일 해봐야지!”

    “수석보다 잘했으면 제가 먼저 하고 싶다고 했어요!”

    “닥쳐! 신이잖아! 주목받을 거 아니야! 젊은 놈이 왜 이렇게 욕심이 없어?”

    “방금만 해도 삐져 있던 분이 그렇게 말씀하셔도 안 믿습니다!”

    노이어와 스벤이 옥신각신하던 것을 단원들이 뜯어말렸다.

    배도빈이 입을 열었다.

    “콘트라바순은 노이어가 맡습니다. 달라지는 건 없어요. 아까 소리치는 거 보니 폐활량은 여전하던데요. 뭘.”

    마누엘 노이어가 얼이 빠졌다.

    그렇게 모든 악기에 대한 주의사항을 전달한 배도빈이 질문을 받았다.

    단원들은 가수가 단 한 명 등장하는 배도빈의 <파우스트>가 정녕 오페라라고 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여러분 모두 각자의 역할을 맡을 거예요. 가수가 노래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죠.”

    “아무리 그래도 가사가 없으면 서사를 이어가기 힘들 것 같은데.”

    찰스 브라움이 턱을 쓸며 말했다.

    “최소한의 해설은 달래가 해줄 거예요. 저는 이 오페라가 단 하나의 뜻으로 해석되길 바라지 않아요.”

    배도빈은 괴테의 파우스트가 하나의 이미지로 접근되길 바라지 않았다.

    음악으로 전달한 감성을 관객 각자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받아들이길 바랐다.

    그들의 삶은 너무나 다양하고.

    <파우스트>가 말하는 바를 달리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럼 다음 달 둘째 주 화요일까지 파트별로 연습하고 모이겠습니다. 이상.”

    “감사합니다!”

    * * *

    OOTY 오케스트라 대전 영광의 더블 원.

    가장 빠르게 판매된 앨범, ‘그랜드 심포니–베를린 필하모닉에 의한 광시곡’.

    라이든샤프트 시대를 열어젖힌 선구자.

    배도빈과 베를린 필하모닉 앞에는 그 어떤 수식어가 붙어도 부족했다.

    클래식 음악 시장을 폭발적으로 성장시킨 주역이었으며, 2020년대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정상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배도빈뿐만이 아니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솔로 연주자로서도 충분히 활약할 단원으로 가득했다.

    니아 발그레이, 케르바 슈타인, 헨리 빈프스키, 이승희, 다니엘 홀랜드, 마누엘 노이어, 찰스 브라움, 가우왕, 나윤희, 왕소소, 최지훈, 스칼라, 진 마르코, 피셔 디스카우, 앙드레아스 블라우 등 각 악기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이들이 한 악단에 모여 있었다.

    오케스트라는 하나의 악기.

    정점에 선 연주자들이 자처하여 부속품이 된 것이었다.

    혹자는 그들이 오케스트라에 남아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솔로로 활동하면 더 큰 인기와 부가 보장된 이들이 왜 오케스트라 대전에 남아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때문에 단원들은 종종 그런 질문을 받곤 했다.

    이승희의 경우만 하더라도 그랬다.

    20대의 이승희는 이미 역사에 기록될 연주자로 호평받았다. 인기 또한 대단하여 당시 가우왕, 찰스 브라움은 한참 아래로 평가받았다.

    세계를 매료시킨 그녀는 장 피에르 뒤포르가 사용해 그의 이름이 붙은 스트라디바리우스 첼로 ‘뒤포르’를 영구대여 받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베를린 필하모닉에 입단한다고 했을 때 팬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이 최고의 오케스트라라고는 하지만 활동에 제약이 생기지 않을까요? 자유롭지 못한다든가.’

    한 기자가 던진 질문에 이승희는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 하고 싶은 음악은 마에스트로 푸르트벵글러가 지휘하는 베토벤이에요.’

    간단한 이유였다.

    하고 싶은 음악을 하는 것이 좋았다.

    단지 그 욕구를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배도빈이 채워줄 뿐이었다.

    그리고.

    가슴 속에 담아둔 웅대한 세계를 펼치고 싶었던 푸르트벵글러와 배도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지휘자에게도, 연주자에게도.

    세계 어디를 뒤져도 베를린 필하모닉만 한 곳은 없었다.

    * * *

    [파우스트, 그랜드 심포니의 아성을 넘을 것인가]

    [장담하는 배도빈. 배우로 등장하는 악기들]

    [브루노 발터, “배도빈의 파우스트는 실험정신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끊임없이 나아가려는 배도빈과 베를린을 응원한다.”]

    └솔직히 그랜드 심포니 기록 넘어서긴 힘들지.

    └아닌데! 우리 도빈이가 그랜드 심포니만큼 대작이라고 했음!

    └그거 얼마나 팔린 줄 알고 하는 말이야? 디지털 싱글 앨범 포함해서 6,000만 장 팔림.

    └우리 도빈이 대단해 ㅠㅠ

    └그래. 대단하지. 나온 지 1년도 안 된 앨범이 6천만 장 팔리는 게 말이 되냐?

    └그 말이 안 되는 걸 우리 도빈이가 했어 ㅠㅠ

    └그니까. 아 얘 왜 이렇게 산만하냐?

    └아무튼. 그랜드 심포니 나오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 6,800만 장 팔렸던 스릴러였음. 82년도에 나온 앨범이 6,800만 장이었다고. 디지털 싱글 앨범이 보편화 된 지금이랑 그때를 비교할 순 없지만 발표된 지 46년 된 앨범이랑 비비는 게 말이 되냐?

    └응응. 말이 안 돼. 우리 도빈이 어떡해 ㅠ 말도 안 되는 일 했어ㅠ

    └ㅋㅋㅋㅋㅋㅋㅋㅋㅋ엄청 긍정적인 애넼ㅋㅋㅋㅋ

    └설명하는 애 키보드 부수겠닼ㅋㅋㅋㅋㅋ

    └그러니까 다시 나오기 힘든 수치라고. 배도빈은 뭐 곡을 뚝딱 만들겠냐? 매번 사람들 취향에 맞추겠어?

    └응. 난 도빈이 곡 다 좋아.

    └사실 지금까지 실패한 적이 없긴 하지. 그나마 A108이 부진했는데 그것도 최지훈이 녹음한 건 200만 장 넘게 팔림.

    └맞아. 도빈이가 곡 못 쓸 리가 없잖아.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배도빈은 더 발전하겠지. 근데 그게 항상 호응받을 순 없다고. 라디오헤드가 Creep 넘어서려고 이 악물고 해도 안 됐던 것처럼 실력이랑 성적은 정비례가 아니야.

    └저게 맞지. 파우스트가 성공하기야 하겠지만 그랜드 심포니는 넘사벽임. 오케스트라 대전 특수도 누렸고.

    배도빈이 파우스트를 예고하고.

    언론은 그와 베를린 필하모닉이 그들 스스로 세웠던 그랜드 심포니의 대기록을 넘어설 수 있을지에 관심 가졌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인 배도빈이 또 한 번 신화를 이어갈지 궁금한 팬들의 마음을 읽은 것이었다.

    팬들은 기대하는 한편, 그랜드 심포니 때와 같을 순 없다는 데 생각을 모았다.

    배도빈은 <파우스트>가 오페라 형식을 취하고 있으면서도 가사를 최소화하여 악기가 곧 등장인물이라고 설명했다.

    브루노 발터를 비롯해 많은 음악가가 배도빈의 이러한 시도를 실험정신으로 받아들였다.

    배도빈의 곡이 전반적으로 서사성이 뛰어나다곤 하나, 언어로 전달할 수 있는 정보와 소리로 느끼는 감성에는 차이가 있었다.

    말은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없었고.

    악기는 명확히 표현할 수 없었다.

    오랜 세월 기악을 다뤘던 음악가들은 배도빈이 <파우스트>를 통해 음악이 이야기를 얼마나 정확히 전달할 수 있는지 시험한다고 생각했고.

    팬들도 그저 배도빈이 시도한다는 그 신기한 일을 기대할 뿐이었다.

    그러한 의견은 <파우스트>를 준비하는 배도빈과 베를린 필하모닉에게 좋은 자극제가 되었다.

    “기사 봤어?”

    “무슨 기사?”

    “발터 영감도 힘들다고 하던데?”

    “그분이야 말씀 좋게 하시는 편이지. 토스카니니 봐.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한다잖아.”

    “그 말 같지도 않은 일 해내면 얼마나 통쾌할까.”

    단원들도 알고 있었다.

    연습을 진행하고 배도빈이 소리를 조율해나갈수록 작년 오케스트라 대전이 <파우스트>를 위한 준비 단계처럼 느껴졌다.

    서라운드 효과를 주기 위해 모든 악기가 하나의 소리를 내고자 노력한 덕분에 베를린 필하모닉은 소리를 다루는 일에 타 오케스트라보다 한두 걸음 앞서 있었다.

    경쟁 악단인 빈 필하모닉,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암스테르담 로얄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도 베를린 필하모닉만큼 음을 섬세히 다루진 못했다.

    그리고 지금.

    배도빈은 그렇게 세공한 그들의 감각을 활용하고자 했다.

    각 등장인물을 심도 있게 분석해 그들이 느끼는 감정과 하고 싶은 말 그리고 본인의 사상을 어떤 방식으로 연주해야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각 악기 연주자들도 의견을 더하며 <파우스트>는 점차 완성되어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덜컥 한계를 느꼈다.

    아무리 잘 표현하려고 해도 명확한 정보를 전달할 순 없었다.

    그러나 배도빈은 그것으로 족하다고 했다.

    ‘우리의 목적은 파우스트를 전달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려면 소설을 권하는 쪽이 낫죠.’

    ‘그럼?’

    ‘파우스트를 통해 얻은 것을 표현하면 됩니다. 파우스트와 음악은 관객과 대화하는 수단일 뿐이죠.’

    그렇게 단원들도 조금씩 배도빈의 의도를 이해하게 되었다.

    “산타, 뭐 하고 있어?”

    일과를 마치고 퇴근 준비를 하던 피셔 디스카우가 연습실에 남은 산타 웨인을 발견했다.

    의자에 앉은 채 손으로 책상을 치고 있었다.

    ‘죠엘 기다리고 있나?’

    불러도 반응이 없기에 가까이 다가가자 산타가 파우스트의 큰북 악보를 보고 있었다.

    디스카우는 비록 악보를 제대로 읽을 순 없지만 이런 식으로 노력하는 산타가 기특했다.

    어린이 타악 교실에 다닐 때보다 상태가 많이 호전되긴 했지만.

    한 곡을 익히기까지 남들보다 오래 걸렸기에 무대에 자주 오르진 못했다.

    그래도 산타는 실망하는 법이 없었고 그에게 주어진 기회에 최선을 다했다.

    이번에 참여하게 된 파우스트도 마찬가지였다.

    “공부하는 거야? 좀 알려줄까?”

    산타가 고개를 저었다.

    악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책상을 쳤다.

    피셔 디스카우는 곧 산타가 박자를 익히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가르쳐 줬을 텐데.’

    악보 읽는 것에 미숙한 나머지, 산타는 피셔 디스카우의 연주를 그대로 따라 하는 방식으로 연습을 해왔었다.

    파우스트를 준비하는 과정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틀.”

    틀렸다고 지적하려던 피셔 디스카우가 입을 닫았다.

    틀린 박자를 더듬더듬 다시 찾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디스카우는 산타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떨어져 앉아, 턱을 괸 채 그를 지켜보았다.

    한 시간쯤 지나고 죠엘 웨인이 다급히 연습실을 찾았다.

    “미안. 누나가 많이 늦었지?”

    죠엘이 연습실에 앉아 있는 피셔 디스카우를 발견했다.

    그가 피식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산타는 누나가 와서야 주변을 살폈다.

    죠엘 웨인이 디스카우에게 인사했다.

    “산타 봐주고 계셨던 거예요?”

    “아니야. 그냥 뭐 하나 지켜보고 있었어. 자식, 기특한데?”

    “기특해.”

    디스카우가 주먹을 내밀자 산타가 웃으며 마찬가지로 손을 뻗었다.

    “녹음한 거 잃어버렸어? 새로 해줄까?”

    디스카우는 혹시나 산타가 녹음 파일을 잃어버려서 말도 못 하고 혼자 끙끙댔나 싶었다.

    “있어요.”

    그러나 산타가 핸드폰을 꺼냈다.

    파우스트 큰북이란 파일로 저장된 100분 14초짜리 파일이 그대로 있었다.

    피셔 디스카우가 의아히 물었다.

    “그럼 왜 악보 보면서 연습했어?”

    산타가 부끄러운 듯 힛 하고 웃었다. 몸을 배배 꼬며 누나 뒤에 숨었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알고 싶어서요.”

    디스카우는 순간 산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여태 타마키 히로시 협주곡을 제외하고 한 번도 악보를 보지 않았던 산타의 행적을 떠올리니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알 것 같아?”

    산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피셔 디스카우가 책상에 놓인 악보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까 여기 밀었지? 왜 그랬어?”

    “화 많이 나면. 어.”

    서툰 말솜씨로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기 시작한 산타는 어느새 누나에게서 떨어져 있었다.

    “말 잘 안 나오고. 응. 말이 잘 안 나오고. 어. 화 많이 나니까.”

    “그래. 여기가 화난 것 같았어?”

    죠엘 웨인은 고개를 끄덕이는 동생을 보며 기적이 따로 있지 않음을 느꼈다.

    무엇인가를 두드리는 걸 좋아해서.

    식당에 가서도 남에게 피해를 주어서 고민이었던 버릇이 지금은 그를 자랑스러운 베를린 필하모닉의 단원으로 만들어주었다.

    아주 간단한 의사 표현조차 하지 않으려 들었던 동생이 생각하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음에 그녀는 더는 바랄 것이 없었다.

    “맞아. 여긴 화가 났어.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는데 말이 잘 안 나와. 그럼 어떻게 해야 하겠어?”

    비상한 기억력과 완벽에 가까운 박자 감각.

    산타의 장점을 활용하여 교육했던 디스카우는 여태 곡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방향으로는 가르친 적 없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가지고 있던 색안경을 인정했다.

    ‘이 아이도 이해하고 있어.’

    “으우.”

    피셔 디스카우는 기다렸다.

    무슨 단어를 선택해야 하는지 몰라 답답해하며 머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는 산타가 대답할 때까지 기다렸다.

    “두, 두 번! 두 번! 세게 두 번!”

    “그래!”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녹음본이 왜 그런 방식으로 연주했는지 이해한 산타 웨인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싫어어.”

    산타 웨인이 디스카우의 격한 칭찬에 몸을 비틀었다.

    디스카우가 웃으며 죠엘 웨인에게 말했다.

    “이렇게 되면 내년 평가는 그냥 통과하겠는데?”

    다른 누구도 아니고 팀파니와 타악기 전체 수석 피셔 디스카우의 말이었기에 죠엘은 깜짝 놀랐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모든 단원은 입단 후 2년 뒤 단원들의 평가를 받아 잔류할 수 있는지가 정해지고.

    그래야만 정식 단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작년, 오케스트라 대전 중 입단한 예비 단원 산타 웨인이 동료 단원들의 평가를 통과할 수 있단 말에 너무나 기뻤다.

    죠엘이 동생을 끌어안았다.

    “산타 잘했어.”

    “힣. 나 잘해.”

    누나에게 칭찬받은 산타가 우쭐해졌다.

    강철 같던 베를린 필하모닉도 배도빈의 <파우스트> 앞에서는 좀처럼 힘을 쓰지 못했다.

    방대한 분량이 첫 번째 문제였다.

    해설을 맡은 진달래를 제외하고는 가사 하나 없는 100분 14초 분량의 파우스트.

    최선을 다했지만, 과연 관객들이 공연에 집중할 수 있을지에 대해선 확언할 수 없었다.

    두 번째 문제는 시도해 보지 않은 형식이라는 점이었다.

    2027 오케스트라 대전을 통해 정점에 이른 그들에게 곡의 난도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다양한 경험을 지속한 그들조차도 ‘대사’를 함에는 부담을 느꼈다.

    특히 베를린 음대를 졸업하고 2년간 예비 단원 신분으로 활동하다 올해 제2바이올린 주자가 된 박하은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문제였다.

    쉬는 시간.

    그녀가 <파우스트>에서 독주곡을 맡고 제2바이올린 지도를 맡은 나윤희 악장에게 다가갔다.

    “저…… 악장님.”

    “네. 하은 씨.”

    나윤희가 웃으며 대답했다.

    “오늘 너무 많이 틀려서 죄송합니다.”

    박하은이 고개를 꾸벅 숙이자 나윤희가 얼른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다들 어려워하고 있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열심히 하고 있잖아요.”

    나윤희는 박하은의 연주가 저번 주보다 확실히 나아졌음을 알고 있었다.

    미숙한 곳이 여럿 있었지만 지적받은 것을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높게 샀다.

    “그게.”

    박하은이 머뭇거리다가 용기를 냈다.

    겨우 정식 단원이 되었는데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 같아 망설여졌다. 그러나 답답한 채로 연습을 지속할 순 없었다.

    아는 척하며 적당히 맞추다간 악단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칠 거라고 판단했다.

    “사실 여기, 그레트헨이 정말 멘붕, 아니, 제정신이 아니게 되는 부분이잖아요.”

    박하은이 당황해서 말을 고치자 나윤희가 미소 지었다.

    “괜찮으니 편하게 말해요.”

    그녀는 단원을 안심시키고 악보를 확인했다.

    박하은의 말대로 그레트헨 이야기였다.

    그레트헨에게 반한 파우스트는 그녀에게 수면제를 주었다.

    어머니를 재우고 몰래 만나자는 그의 꼬임에 넘어간 그레트헨은 어머니에게 수면제를 먹였다.

    그러나 너무 많은 양을 넣게 되었고 그대로 어머니는 영영 깨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파우스트의 아이까지 가지게 된 그녀의 비극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박하은은 알 수 없었다.

    “하은 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이 대목.”

    나윤희가 고개를 끄덕여 박하은이 편히 말할 수 있도록 도왔다.

    “파우스트 어떤 이야기인 줄 몰랐는데 일단 얘는 맞아 죽어도 싸요. 오빠 죽였지, 어머니 죽이게 했지 게다가 임신까지 시켰잖아요. 그레트헨도 너무해요. 오빠 죽었을 때 마음 접었어야죠.”

    박하은은 그레트헨의 신경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오빠 발로틴이 파우스트 일행과의 시비로 명을 달리했을 때 그와의 관계를 모두 접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윤희가 웃었다.

    편하게 말하라고 해서 너무 편히 했나 싶어 걱정하던 박하은이 의아해했다.

    “아. 저도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책 읽을 때 좀 답답했어요.”

    나윤희의 말에 박하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좋은지 모르겠어요. 모르니까 자꾸 선배님들 연주 따라 하고. 이런 제가 정말 무대에 올라도 되나 싶고…….”

    지시대로 연습해도 될 터인데.

    희곡 파우스트를 깊이 이해하고,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배도빈의 의도를 파악하고자 하는 진지한 태도가 과연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이다 싶었다.

    나윤희는 그녀의 손을 잡아끌어 의자에 앉았다.

    “오페라라고 하니까 이야기를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런데, 굳이 정확히 표현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박하은은 나윤희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존경하는 그녀의 말을 끊지 않았다.

    “상황을 묘사하려는 음악은 즐길 수 없다는 게 보스의 생각이에요. 음악을 공부한 사람은 잘 알아들을 수 있지만, 그러지 않은 분들은 아니잖아요?”

    “아.”

    “베토벤이 말했죠. 묘사하기 위한 연주는 모두 실패할 것이라고. 들어본 적 있어요?”

    “네.”

    “묘사하는 음악이 불가능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렇게 해서는 대중에게서 멀어질 뿐이라고 해요. 보스 말로는요.”

    나윤희가 싱긋 웃었다.

    배도빈이 항상 강조하던 쉬운 음악.

    음악이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하면 지식이 없는 사람으로서는 그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음악은 대화의 수단.

    어려운 곡을 연주하는 것은 그저 자위일 뿐이라는 생각이 배도빈의 지론이었다.

    박하은에게는 의문이 아직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랜드 심포니도. 베를린 환상곡도. 불새 협주곡도 그랬잖아요.”

    그녀는 배도빈의 모든 곡이 마치 이야기를 보는 듯, 그 심상 속으로 빨려들게 했음을 떠올렸다.

    하나의 이야기를 보는 것처럼 완벽한 전달력.

    묘사가 중요하지 않다면 대체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궁금했다.

    “느끼게 해주는 거죠.”

    나윤희가 블러드 와인을 들었다.

    조금 전 연습했던 부근을 조금씩 연주하면서 설명을 덧붙였다.

    “예를 들어서 묘사를 하려고 했다면 그레트헨이 수면제를 탈 때 이렇게 연주하라고 했겠죠.”

    나윤희가 물방울이 떨어지듯 현을 뜯었다.

    “하지만 악보는 음 변화가 심해요. 비브라토를 격하게 주라는 지시도 있고요. 어머니의 음식에 수면제를 넣을 때 그레트헨이 어떤 감정이었는지 느끼게 해주려는 의도죠.”

    박하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우리 이렇게 연습했죠?”

    나윤희가 활을 켰다.

    단단한 목소리로 노래했던 블러드 와인이 다소 찢어진 목소리를 냈다.

    “그 때문이에요. 묘사하는 것보다, 느끼게 해주는 게 더 효과적인 일이고요. 성악이 할 수 없는, 기악만이 할 수 있는.”

    마침내 선배들이 무엇을 목표로 두고 연주하는지 이해한 박하은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졸지에 100분 14초짜리 연주를 하게 된 최지훈은 가우왕과 함께하며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고 있었다.

    가우왕은 최지훈의 연주에 피드백을 했고 최지훈은 가우왕이 맡은 독주 파트를 평했다.

    그러기를 얼마간.

    문득 고개를 돌리자 몸을 웅크리고 있는 프란츠 페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어?”

    “어…… 두 시간 전쯤이요.”

    “왔으면 말을 하지. 왜? 무슨 일 있어?”

    “아뇨. 그냥. 두 분은 공연 준비 어떻게 하시나 궁금해서요.”

    가우왕과 최지훈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다시 이야기를 진행하는데 프란츠 페터가 다가왔다.

    가우왕이 귀찮다는 듯 말했다.

    “뭐야? 할 말 있으면 해.”

    프란츠 페터가 양손 검지 끝을 서로 누르며 말했다.

    “저도 부감독님하고 지훈이 형처럼 피아노 잘 치고 싶어서 어떻게 준비하시나 보고 싶었어요.”

    그 말에 가우왕이 헛기침을 하곤 의자를 끌었다.

    “가까이서 봐. 서서 뭐 해.”

    가우왕의 반응에 최지훈이 살짝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어땠는데?”

    “음. 역시 두 분이구나 싶었어요. 제가 몰랐던 이야기를 하시니까요.”

    최지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해 주었다.

    “사실 전 아직도 도빈이 형이 왜 굳이 가사를 제외했는지 모르겠거든요.”

    “잘 봐.”

    기분이 좋아진 가우왕이 기특한 꼬맹이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파우스트 읽어 봤어?”

    “네.”

    “어떻더냐?”

    “뭔가 대단한 것 같은데 뭐랄까. 조금 이상한 부분도 있었어요.”

    “뭐였는데.”

    “그게. 음. 갑자기 생각하려니까 잘 모르겠는데. 아, 파우스트가 그레트헨한테 환심 사려고 몰래 방에 들어가서 목걸이 두잖아요.”

    “그렇지.”

    “범죄잖아요!”

    프란츠의 외침에 최지훈이 크게 웃었다.

    “또……. 그레트헨이 너무 불쌍했어요. 오빠랑 엄마도 죽으니까 제정신이 아니었잖아요. 아이도 가졌는데 살인죄 때문에 파우스트마저 도망가니까 그. 성할 리가 없죠.”

    프란츠가 그레트헨이 아이를 버렸다는 말을 의도적으로 삼갔다.

    “거기까지.”

    가우왕이 프란츠의 말을 멈췄다.

    “봐. 지금 우리가 보기에 희곡 파우스트는 이상한 내용이 있다고. 말 같지도 않은 이야기잖아.”

    위대한 대문호의 작품을 독설로 깎아내리는 듯했지만, 프란츠는 어느 정도 그의 말에 동의했다.

    “우리가 연주하고 싶은 파우스트는 선물 준답시고 여자 방에 몰래 들어가고, 냄새 맡고 그런 내용이 아니야.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면 구원의 날이 온다. 그거잖아. 안 그래?”

    “맞아요.”

    “지금 그걸 완전히 재연한다면 관객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아.”

    “그래. 몰입할 수가 없지. 어느 미친놈이 이걸 이해하겠어. 제정신인 사람이 장모 될 사람한테 수면제 먹이라고 시키겠냐?”

    가우왕이 고개를 저었다.

    “배도빈은 인식의 차이로 생기는 문제로 희곡 파우스트가 말하고자 했던 주제가 퇴색되는 게 싫은 거야. 어쩌고저쩌고 그럴듯한 핑계 대지만 자기 작품에 똥 묻히기 싫다는 거지.”

    가우왕의 단순하고 직관적인 표현에 프란츠 페터가 단번에 배도빈의 뜻을 이해했다.

    현대인이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를 제외하고, 주제만을 두고 노래하겠단 뜻이었다.

    그러니 상황 묘사가 중요할 리 없었다.

    단지 각 등장인물의 심경이 어떤지, 어떻게 변화하는지.

    그리고 번뇌하던 그들이 어떻게 구원받는가.

    그 감정선을 살리는 것이 최우선 목표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최지훈이 한몫 거들었다.

    “파우스트는 서사로 접근하면 안 돼. 서사보다는 괴테가 말하고자 했던 사상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볼 수 있어. 도빈이는 그걸 음악으로 경험하게 해주려는 거고.”

    “알 것 같아요.”

    프란츠 페터는 이 두 위대한 피아니스트의 말이 참으로 옳다고 여겼다.

    ‘멋있어.’

    그리고 결국 해내지 못했던 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를 언젠가 이 두 사람과 같이 연주할 수 있길 바랐다.

    * * *

    단원들이 차츰 <파우스트>에 익숙해져 갈 무렵.

    악단주의 지시를 받은 카밀라 앤더슨, 이자벨 멀핀을 비롯한 사무국은 쉴 틈 없이 움직였다.

    전 세계 동시 생중계.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배도빈은 <파우스트>를 기다리는 모든 팬을 위해 전무후무한 선택을 강행했다.

    “이견은 받지 않습니다. 가능한 모든 매체에서 볼 수 있도록 협력하세요.”

    당황한 이자벨 멀핀이 나섰다.

    “보스, OTT 플랫폼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각국 방송국까지 들이는 건 효율성이.”

    “지금도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이 보급되지 않은 나라가 있습니다.”

    배도빈의 단호한 말에 멀핀은 더 이상 반대할 수 없었다.

    2028년. TV 시청률은 급격히 저하되었고 국영 방송과 거대 방송국을 제외하면 문을 닫는 경우가 수두룩했다.

    중계권을 판매하는 것은 큰 문제 아니지만 그렇게 되면 주력 매체인 OTT 플랫폼 등에서 얻어낼 수 있는 게 줄어들었다.

    제아무리 베를린 필하모닉의 공연이라 해도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콘텐츠에 OTT 플랫폼이 크게 투자하길 바라는 건 무리였다.

    그러나 TV 매체에 의존하는 나라도, 연령대도 있기에 배도빈은 굴하지 않았다.

    “독점 프로모션 따위 신경 쓰지 마세요. 새로운 고객을 유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를 사랑하는 분들에게 최선의 콘텐츠를 제공하는 게 우선입니다.”

    “네, 보스.”

    보스의 확고한 의지를 이해한 이자벨 멀핀과 사무국 임원들은 그 즉시 각 플랫폼과 방송사에 <파우스트> 초연의 중계권을 두고 협상에 들어갔다.

    독점 송출을 유지했던 배도빈은 <파우스트>를 베를린 필하모닉의 디지털 콘서트홀 ‘DOBAEN’뿐만이 아니라.

    뉴튜브, 미시시피 프리미엄 비디오, 웹플릭스, JH시네마, 디자인 플러스 등 주요 OTT(Over the top) 플랫폼과 단기 계약을 체결하였다.

    사무국의 우려와 달리.

    OTT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기 위해 독점 콘텐츠 경쟁을 치열하게 했던 그들 모두 배도빈과 베를린 필하모닉의 <파우스트>만큼은 전면에 배치하길 약조했고.

    나라마다 하나의 방송국에 중계권을 팔려던 탓에 각국 유력 방송국들은 치열하게 다퉈야만 했다.

    배도빈과 베를린 필하모닉에 아무런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브루노 발터의 말마따나 실험적 요소가 있는 작품을 검증하지 않은 채 이렇게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싶었다.

    OTT 플랫폼과 방송국이 홍보를 돕고 있긴 하지만.

    전 세계를 상대하다 보니 <파우스트>의 초연 마케팅 금액이 악단 한 해 예산의 2할에 달할 정도로 무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배도빈은 확고히 직원들을 이끌었다.

    그렇게 연말이 다가오고.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

    전 세계에 베를린 필하모닉의 콘서트홀이 상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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