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562화 (562/564)
  • 8. 훈련병의 편지

    배도빈‧나윤희와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말러 협주곡은 단순히 감동을 전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구스타프 말러라는 인물을 깊이 들여다보고 고달픈 인생에서 그가 무엇을 추구했는지 말해주는 듯했다.

    음악가로서 존재했던 그를.

    인간 구스타프 말러로 이해한 순간이었다.

    정신질환을 앓았던 부모.

    어렸을 적부터 반복되었던 학대.

    여덟 형제의 죽음.

    재능과 노력, 사랑이 있음에도 한평생 작곡가로서 인정받지 못함으로써 얻은 좌절감.

    딸의 죽음.

    아내의 외도.

    심장병을 얻어, 걸음걸이 수마저 헤아리며 살아야 했기에 생긴 강박증.

    유럽 어느 나라에서도 외면되었던 출신과 반유대주의 사상으로 빈 국립 오페라극장 감독직을 빼앗긴 경험.

    미국으로 넘어간 뒤에도 이탈리아의 위대한 지휘자에게 밀려 유럽으로 돌아와야 했다.5)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시련인가.

    신은 정말 그가 이겨낼 수 있는 만큼의 고통만 주는 것일까.

    넝마가 된 몸과 정신을 이끌고 끝끝내 음악을 놓지 않았던 구스타프 말러.

    배도빈과 엘리아후 인손은 그가 느낀 감정을 음악에 담아, 어떤 글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비로소 구스타프 말러를 이해한 관객들은 주먹을 쥔 채 그의 이름을 연호했다.

    [위대한 음악가 구스타프 말러]

    [배도빈과 엘리아후 인손이 전해준 안타까운 사연]

    [전 세계 3천만 명이 지켜본 말러 협주곡 초연 무대]

    [배도빈, “그들과 함께했기에 말러와 대화할 수 있었다.”]

    [엘리아후 인손, “B의 전개력은 마치 베토벤과 말러를 보는 듯하다. 그가 악보를 채워나가는 매 순간이 아찔했다.”]

    [사카모토 료이치, “말러 협주곡은 어떤 말러 평전보다 뛰어나다.”]

    [가우왕, “두 지휘자가 있었다.”]

    [찰스 브라움, “나윤희의 블러드 와인이 더욱 섬세해졌다. 말러의 독백을 들은 듯하다.”]

    말러 협주곡에 마음이 동한 클래식 음악 팬들이 구스타프 말러를 돌이켜 보는 한편.

    언론은 대교향곡 이후 배도빈이 또다시 불가능한 일을 해냈다며 극찬했다.

    뉴튜브와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디지털 콘서트홀의 동시 시청자는 합계 3천만 명을 기록.

    체코 필하모닉은 악단 역사상 가장 주목받는 상황에 놀라 후속 대응을 하기에 바빴다.

    사카모토 료이치, 가우왕, 찰스 브라움, 브루노 발터 등의 극찬이 이어지는 가운데 시기적절하게 올라온 차채은의 평론은 팬들이 말러 협주곡을 자세히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왔다.

    [말러 협주곡으로 본 구스타프 말러의 초상]

    지난 19일, 체코 프라하 루돌피눔에서 피아노 협주곡 말러가 초연되었다.

    제3회 배도빈 콩쿠르 이후 피아니스트로 나서기는 3년 만인 배도빈과 베를린이 자랑하는 비르투오소, 바이올리니스트 나윤희의 협연 소식은 시작부터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예매는 1분 만에 마감되었고 표를 구하지 못한 팬들이 체코 필하모닉을 방문하여 항의하거나, 암표가 고액으로 거래되는 등 흥행은 예고되어 있었다.

    필자도 표를 구하기 위해 스마트폰과 컴퓨터, 태블릿 PC에 더해 지인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구매에 실패하고 말았다.

    기자 자격과 출입증이 없는 것이 그토록 안타까웠던 적도 없었다.

    아쉬운 대로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가 전한 소리를 DSP 8000 스피커를 통해 들었음을 미리 밝힌다.

    그날의 연주는 두 연주자가 쌓아온 명성을 더욱 빛나게 했다.

    적극적이다 못해 격렬하기 그지없던 배도빈의 피아노는 더욱 다듬어졌다.

    놀라운 점은 그의 열정적인 타건이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피아니스트 최지훈은 ‘미세하게 뭉개졌던 첫 음이 정교해졌다’며 ‘이제 도빈이한테 단점은 없어’라는 말을 덧붙여 여전한 팬심을 과시했다.

    바이올리니스트 나윤희 테크닉은 어디까지 진화할지 알 수 없다.

    한 줄로는 변화무쌍한 멜로디를, 다른 한 줄로는 트레몰로를 이어가며 한 대의 바이올린으로 노래와 반주를 동시에 해냄은 물론.

    3악장에 들어서서는 저음역과 고음역을 수시로 번갈아 연주하여 말러의 좌절과 번민 그리고 강인한 의지를 노래했다.

    37분 동안 펼쳐낸 그녀의 연주는 신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배도빈과 엘리아후 인손에 의해 탄생한 피아노 협주곡 말러에 대해서도 살펴봐야 하겠다.

    이 곡은 두 가지 큰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A단조의 1악장을 지나 2악장부터는 조성이 없다는 점이다.

    오늘날에는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나, 무조성 음악의 시작이 구스타프 말러였다는 점을 미루어 보면 그 의미가 남다르다.

    A단조의 1악장을 지나 시련을 반복할수록 성숙해지는 구스타프 말러를 표현하기 위해 설치한 장치로 보인다.

    또한 피아노의 역할도 눈에 띈다.

    영상을 자세히 살피면 지휘를 맡은 엘리아후 인손이 관악부에 집중하는 한편, 이리나 네콜로바 악장과 현악부는 배도빈에게 시선을 두고 있다.

    피아노 협주곡 말러의 악보를 보더라도 독주 바이올린을 제외하고 현악부는 모두 피아노와 유사한 음형을 연주했다.

    피아노가 앞서고 현악부가 빈 곳을 채우거나 뒤따르며 악상을 풍부히 한 것.

    추측하기로 피아노와 현악부는 구스타프 말러를 상징하는 독주 바이올린과 반대되는 입장, 즉, 그에게 닥친 여러 시련을 표현한 것이다.

    배도빈의 격렬한 피아노가 효과적으로 부각된 것과 동시에, 그가 현악부를 이끌었다는 점은 피아니스트 가우왕의 인터뷰 내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가우왕, “두 지휘자가 있었다.”]

    -믈라다 프론타 드네스지 기사 발췌

    두 거장이 협력해 만든 피아노 협주곡 말러가 다시 두 지휘자에 의해 연주되었던 것.

    앞으로 이 곡이 연주되는 날은 셀 수 없이 많겠지만 그제 루돌피넘에서의 연주보다 완성도 있을지는 회의적이다.

    차채은이 개인 블로그에 게시된 글에 음악 팬들이 몰렸다.

    └다른 평론은 너무 어려워서 이해하기 힘든데, 여기는 쉽네요. 잘 읽었습니다.

    └ㅋㅋㅋㅋㅋㅋ표 못 구해서 빡쳤음ㅋㅋㅋㅋㅋ

    └얘는 왜 같은 글을 여러 번 올림? 밑에는 영어로 써놨고 위에는 또 독일어로 써 있네.

    └그래야 많이 보니까.

    └피아노 연주로 지휘했다는 말이구나ㅠ 배도빈 진짜 너무 멋있다.

    └와 미쳤다. 말러 협주곡 조회 수 올라가는 거 봐.

    └이틀 만에 1억ㅋㅋㅋㅋㅋ 체코 인구가 천만 명인뎈ㅋㅋㅋㅋㅋㅋ

    └체코 사람만 들었겠냐.

    └그래도 저 정도면 체코 국가 될 기세 아님?

    └도빈이 국가 제조기임. 대교향곡도 우리나라 애국가 5절이잖아. 베를린 환상곡은 베를린시에서 사용권 사서 행사 때마다 틀어.

    └나윤희 바이올린 진짜 소름 돋더라. 비브라토를 저렇게 많이 넣는데 어떻게 저렇게까지 깔끔하게 하지?

    └불새 협주곡 때 이미 사람이 아니었음.

    └배도빈 진짜 피아노 계속했으면 좋겠다. 몇 년에 한 번씩 이렇게 죽지 않을 정도로만 먹이 주는 게 너무 힘들어 ㅠㅠㅠ

    팬들의 열광적인 반응과 엘리아후 인손을 비롯한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요청에 배도빈과 나윤희도 손을 들었다.

    단 한 번 약속되었던 공연은 일주일간 두 번 더 열렸으며, 실연을 듣지 못해 아쉬워하던 사람들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었다.

    인간상을 돌아보게 하는 피아노 협주곡 말러에 누군가는 용기를 얻고, 누군가는 위로받았다.

    또한 그 누구보다도 감화받은 한 사람.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플루티스트이자 지휘를 지망하는 밀로스 발렌슈타인은 배도빈의 완전한 팬이 되어버렸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떠나는 배도빈과 나윤희를 배웅한 뒤 밀로스 발렌슈타인이 단원들을 향해 외쳤다.

    “정말, 정말 엄청난 사람이었죠?”

    그를 관찰한 한 달간 매일 감탄했던 그는 아직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언젠가 그와 같이 깊이 있는 음악을 하겠다고 다짐하듯, 선배들에게 동조를 구했다.

    “그래. 정말 엄청났지.”

    “어휴. 인물은 인물이야.”

    그러나 배도빈의 피아노를 따르느라 녹초가 된 현악부 주자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들 역시 훌륭한 연주를 해냄에 뿌듯하고 기뻤으나 누적된 피로를 무시할 순 없었다.

    음을 정교하게 내기 위해 수백, 수천 번 반복한 연습은 프로 연주자인 그들로서도 감당키 힘들었다.

    “베를린이 잘하는 이유가 있었어.”

    한 단원의 말에 밀로스 발렌슈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요! 우리도 그렇게 계속 연습해요! 해냈잖아요!”

    “…….”

    “……”

    배도빈과 함께했던 지난 사 주간의 강행을 앞으로도 유지하자는 밀로스 발렌슈타인의 의지 충만한 제안에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까짓것 해보지! 어? 다음 오케스트라 대전에서도 우승 못 하리란 법 있어?”

    “하핳학하! 오늘만 좀 쉬자고.”

    더 멋진 음악을 하기 위해 존재하는 그들에겐 잠시간의 휴식이 필요할 뿐.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 * *

    다음 행선지인 암스테르담으로 향하기 전, 베를린의 자택에 잠시 들르기로 한 두 사람이 자율 운행 중인 차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좋은 분들이었지.”

    나윤희의 질문에 배도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단원들도 저 정도로 유지하면 좋을 텐데.”

    배도빈은 쾌활한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활기찬 것을 넘어 광기를 보이는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들에게는 가끔 기가 빨리는 기분마저 들었기에 불평했다.

    나윤희가 작게 웃었다.

    “암스테르담은 어떨까?”

    “연주가 차분하니 비슷하지 않을까.”

    “흐흫. 세프 언짢아 보이셨는데.”

    “그 많고 많은 곳 중에 하필 암스테르담이냐!”

    배도빈이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말투를 따라 했다.

    배도빈의 유일한 개인기이자 악단 내에서 그보다 푸르트벵글러를 잘 흉내 내는 사람은 없었다.

    몇 번이나 들었지만 언제 들어도 웃겼다.

    나윤희와 배도빈이 웃으며 서로 희롱하던 차, 핸드폰이 진동했다.

    손을 뻗어 확인하니 최지훈이 보낸 메시지였다.

    “흠.”

    배도빈이 눈을 찡그리며 답장을 보냈다. 다시 자세를 잡은 뒤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소식을 전해주었다.

    “지훈이 다음 주에 한국으로 간다는데.”

    “군대?”

    배도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해결돼야 할 텐데.”

    “시험 못 봐서 탈락하고 대체 복무 한다고 했지?”

    “잘 될지 모르겠어. 지훈이 아버지가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니 믿어야지.”

    “훈련받을 때 손 다치면 큰일인데.”

    “자기 아버지가 마음만 먹으면 어떻게든 뺄 수 있을 텐데 그런 융통성이 없어. 거짓말하면 안 된대.”

    “지훈이답다.”

    가끔 답답할 때도 있지만 배도빈도 그런 최지훈이 좋았다.

    항상 올곧고 순수한 모습을 억지로 바꾸고 싶지 않았다.

    일전에 욕을 시켰더니 찢어 죽인다는 둥 입이 제법 험해진 것을 경계하게 된 탓이었다.

    “암스테르담 가기 전에 한 번 돌아가길 잘한 것 같아. 당분간 못 볼 수도 있으니까.”

    “그러게. 내일 불러서 점심 같이하고 싶은데.”

    “그러자. 채은이랑 소소, 달래, 료코도 불러서.”

    체코에서의 일을 자랑할 생각으로 가득한 나윤희의 뒤쪽으로 메도브닉과 마카롱 아이스크림이 담긴 아이스박스가 놓여 있었다.

    기뻐할 왕소소와 한 달간 만나지 못한 동료들을 떠올리니 돌아가는 길이 너무나 멀리 느껴졌다.

    * * *

    한 달 만에 돌아온 베를린.

    집으로 향하기 전 잠시 콘서트홀에 들렀는데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마누엘 노이어, 반들반들했던 두 사람의 머리에 머리카락이 있다.

    깜짝 놀라서 말문이 막혔다.

    “하하핳하핳핳!”

    마누엘 노이어가 평소보다 더 크고 호탕하게 웃는다.

    “고생했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가볍게 안고 등을 툭툭 쓸어내렸다. 못 보던 사이에 다소 순해진 느낌이다.

    “어떻게 된 거예요?”

    “도진이 덕분이지. 어때? 인물 좀 사냐?”

    “……젊어 보이긴 하네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노이어가 만족한다는 듯 크게 웃으며 손거울을 꺼내 아직은 듬성듬성 난 머리를 다듬었다.

    “어떻더냐.”

    “좋았어요. 체코는 꽤 자유롭더라고요. 인손 경도 마찬가지고. 1악장 종결부 들었죠? 그 사람 생각이었어요.”

    “흠. 젊었을 적부터 아이디어는 좋은 녀석이었지.”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엘리아후 인손을 이렇게 평가하는 사람은 푸르트벵글러 정도뿐이겠지만.

    한편으로 칭찬에 인색한 것치고는 상당한 호평이다.

    “프라하에서 그 정도였으니 암스테르담은 더 기대해 볼 만하죠.”

    “그래.”

    조금 놀려줄 생각으로 도발했다만 푸르트벵글러는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머리카락의 유무가 성격을 더 긍정적으로 만들어주는 것 같다.

    도진이가 정말 큰일을 해냈다.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단원들을 부르겠습니다.”

    방문 소식을 듣고 급하게 나온 죠엘이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 내일까진 일이 있어서 잠깐 들른 거니 신경 쓰지 마요.”

    단원들도 한창 연습 중일 테니 방해가 될 뿐이다. 푸르트벵글러가 건강한 걸 확인했으니 그걸로 되었다.

    적당히 마주치는 사람들하고만 인사를 나누곤 집으로 향했다.

    “형!”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도진이가 달려들어 일단 안아 들었다. 이젠 제법 몸무게가 나가서 버겁다.

    내려놓으니 윤희에게도 달라붙는다.

    “누나도!”

    “잘 지냈어?”

    “응! 봐 봐! 털도 더 길어졌어!”

    도진이가 바지를 걷어 올렸다.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던 윤희의 손이 멈칫했다. 그도 그럴 것이 녀석의 다리는 귀여운 얼굴과 행동과 너무나 괴리되어 있었다.

    마치 수풀.

    그것도 ‘비단’을 바른 한쪽만 무성하다.

    “너 그거 뽑아야겠다.”

    “어? 안 돼!”

    “보기 안 좋잖아.”

    “아프잖아!”

    예상한 반응이다.

    잠시 간격을 두고 제안했다.

    “이따 형이랑 돈가스 먹으러 갈래?”

    “돈가스? 카레 돈가스 말고 진짜 돈가스?”

    “그래. 진짜 돈가스.”

    “응!”

    천재라고는 하지만 이를 뽑으러 갈 때도 돈가스에 유혹당했고 이번에도 통하는 걸 보면 애는 애다.

    왁싱숍에 데려가 저 흉한 털을 몽땅 뽑으면 매장이 떠나갈 정도로 서럽게 울겠지만 돈가스 하나면 해결되리라.

    “왔니?”

    어머니 목소리다.

    물감이 이곳저곳 묻어 있는 토시를 끼고 앞치마를 하고 계신 걸 보니 작업 중이셨던 모양.

    요즘엔 유화에 푹 빠지신 듯하다.

    “다녀왔습니다.”

    “다녀왔어요, 어머니.”

    윤희와 함께 인사하니 앞치마를 풀곤 다정히 안아주셨다.

    “그래. 그래. 우리 딸 오느라 고생했다. 재밌었어?”

    “네. 다들 정말 친절하셨어요. 도시도 너무 예쁘고요. 이거, 저번에 보여드린 꿀 케이크예요.”

    “차 준비해야겠네. 집사님.”

    집사가 차를 준비하는 동안 거실에서 어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몰랐는데 묵었던 호텔 옆에 브르트보브스카란 정원이 있더라고요. 조용히 지내기 좋고. 나중에 도진이랑 한 번 가요.”

    “알고 있었지.”

    어렸을 적부터 내 마음을 들여다보시긴 했어도 말씀드리지도 않은 프라하에서의 일을 알고 있으시다니 의아했는데, 윤희가 그간 자주 통화를 나눴던 모양이다.

    그간 구경한 것, 먹은 것을 사진으로 보냈던 듯.

    덕분에 할 말이 많지 않다.

    차와 꿀 케이크를 먹으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음.”

    메도브닉을 드신 어머니께서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셨다. 디저트 전반에 적대적이신 어머니께도 괜찮은 맛인 듯하다.

    “어떠세요?”

    윤희가 물었다.

    “괜찮다. 너무 안 달고.”

    “덜 단 걸로 사 왔어요. 종류가 많더라고요.”

    “이 정도가 좋아.”

    여행 선물로는 합격인 듯.

    도진이는 뭘 하는지 후다닥 방으로 올라가 내려오지 않는다.

    “도진이는요?”

    “요새 또 바빠. 너 눈 고쳐준다고.”

    믿음직한 동생이다.

    10년이 걸리든 100년이 걸리든 기다릴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고 싶다.

    “아. 저녁은 이따 나가서 먹고 올게요. 도진이랑.”

    “도진이랑?”

    “다리털 뽑게요.”

    “그래. 엄마도 볼 때마다 적응 안 되더라. 근데 순순히 뽑는다고 해?”

    “아뇨. 돈가스 사 준다고 했어요.”

    “계속 속이면 도진이가 미워할 텐데?”

    “콜라 주면 돼요.”

    못마땅해하셨지만 어쩔 수 없다는 눈치를 보이신다. 되도록 건강에 좋지 않은 음식을 먹이지 않으려 하시지만 이럴 때 도진이를 설득하고 달랠 방법은 단 것뿐이다.

    “그럼 지훈이는 내일 오고?”

    “네. 가기 전에 얼굴 한번 봐야죠.”

    “그래. 채은이도 오라고 해. 저번에 보니 많이 아쉬워하더라.”

    “그럴게요.”

    어머니께서 그리 말씀하실 정도면 풀이 많이 죽은 듯. 지훈이에게 의지하는 편이었으니 그럴 만하다.

    “올라가서 쉬어. 윤희도 집에 가서 쉬어야지. 피곤하겠다.”

    “네. 내일 올게요.”

    “데려다주고 올게요. 가자.”

    “응.”

    윤희와 함께 일어나는데 앞치마와 토시를 챙기시던 어머니께서 지긋하게 바라보신다.

    “왜요?”

    “둘이 말 놓은 거니?”

    “네.”

    “네……. 제가 불편해서.”

    윤희와 말이 겹쳤다.

    어머니께서 잠시 고민하시더니 어깨를 으쓱이셨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참으신 듯하다.

    “그래. 둘 사이 일이니까.”

    “편하게 말씀하세요.”

    “네. 말씀해 주세요.”

    “……그래. 아들하고 딸한테 못 할 말이 어딨겠니. 엄만 둘이 서로 존중해 주는 게 좋아 보이더라.”

    그렇게 생각하시는구나 하는 정도로 받아들이는데 어머니께서 한 번 더 선을 그으셨다.

    “엄마 마음은 그렇다는 거야. 너희 둘이 어떻게 지내든 행복하기만 하면 돼. 진심으로.”

    “네. 걱정 마세요.”

    “너무 행복해요.”

    어머니를 안심시키려 하자 윤희도 거들었다.

    가족은 이해해 준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한국인의 정서와 조금 다르다는 건 알고 있다.

    어머니께서도 그럴 정도고.

    평생을 프로이센인, 독일인으로 살다가 한국인으로는 고작 22년 살았을 뿐인 나도 인지하고 있다.

    어머니께서도 본인의 느낌보단 주변 시선에 나와 윤희가 부담을 느끼지 않을까 걱정하기에 말씀을 꺼내셨을 거다.

    그러나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고 살기에는 너무 멀리 돌아왔다.

    남은 생이 50년이 남았다면 서로만 봐도 부족할 시간.

    호칭을 포함한 그 어떤 일이든 윤희와 대화해서 정할 문제.

    윤희를 데려다주는 차 안에서 그런 생각을 꺼냈더니 빙그레 웃는다.

    “나도 좋아.”

    * * *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심각하다.

    “끄아앙악악악앙!”

    “아기야 사탕 먹을래? 응?”

    “돈가스! 사 준다! 했쟈나!”

    “도진아, 일단.”

    “끄아악악악앙아앙!”

    “많이 아파?”

    “안 아프아악! 다고! 했쟈나아앙!”

    “괜찮아. 괜찮아. 우리 도진이 다리 깨끗해진 거 봐.”

    “싫억! 미워!”

    왁싱숍이 떠나갈 듯 우는 녀석을 어떻게 달랠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결제를 위해 시계를 내보이며 사과하자 되레 점장이 난감하듯 사과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애기 많이 아팠지? 누나가 미안해.”

    “형이! 끕! 형이! 거짓말했어요! 돈가스 사 준다고오오끄윽. 끄아악앙.”

    “먹으러 가자. 지금 가자. 형이 미안하니까 일단.”

    “흐윽. 끄윽. 필요 없어.”

    째려보더니 고개를 팩 돌린다.

    단단히 화가 난 듯하다.

    일단 매장에 있으면 더 큰 민폐를 끼칠 것 같아 데리고 나와 달랬다.

    “많이 아팠어?”

    “…….”

    앞으로 이런 방식은 안 좋을 듯하다. 통증은 이제 거의 없을 텐데 단단히 삐진 걸 보니 아픈 것보다 내게 속았다는 게 더 큰 충격이었던 듯.

    저번에도 그렇고 이런 식의 육아 방법이 그리 좋지 못하다고 느꼈다.

    “도진아, 거짓말해서 미안해.”

    “…….”

    “다음부터는 도진이 생각 들어보고 같이 이야기해서 결정하자. 약속.”

    “……약속.”

    새끼손가락을 내미니 녀석이 뚱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걸었다.

    “그럼 콜라도 마실까?”

    “콜라?”

    아직 화나 있다는 걸 표현하고 싶은지 표정 관리를 하려고 하지만 소용없다.

    가장 마시고 싶지만 가장 먹기 힘든 음료를 말하니 입술이 씰룩거린다.

    “그래.”

    고개를 끄덕인다.

    녀석이 좋아하는 한국식 돈가스 전문점에 가서 음료부터 주문하니 쪼로록 마시곤 환하게 웃는다.

    “맛있어?”

    “응.”

    또 쪼로록.

    그 모습이 귀여워 웃으니 조잘조잘 알 수 없는 이야기를 꺼낸다.

    “근데 사람 눈은 정말 비효율적이야. 보는 건 빛이 들어오는 걸 감지해야 하는데 그게 안쪽에 있거든.”

    “안쪽에 있으면 안 돼?”

    “응. 그럼 안구 사이에 있는 게 다 보이잖아. 이렇게, 이렇게.”

    도진이가 핸드폰을 펼쳐놓곤 눈에 혈관 같은 걸 징그럽게 그렸다.

    “이렇게 안 보이잖아.”

    “응. 시야가 가려지니까 뇌가 안 보이게 인식하는 거야. 이런 건 안 움직이니까 안 움직이는 건 안 보이게.”

    점점 더 이해할 수 없다.

    “그럼 움직이지 않는 건 어떻게 봐?”

    “떨면 돼. 그래서 눈은 항상 83.68㎐ 정도로 떨어. 바깥 정보인지 안쪽 정보인지 확인하려고.”

    “불편하게 되어 있나?”

    “응! 그래서.”

    신이 나서 눈에 관해 또 장황한 설명을 시작했다.

    무슨 말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도, 이해하는 수준에서 질문을 던지면 또 열심히 설명한다.

    그것을 반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듯하다.

    녀석이 어떻게 관심을 유지하고 애정을 키울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이토록 잘 알고 있는데.

    정작 녀석의 감정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기능적인 것만을 추구했던 탓인지.

    정서적으로는 어떻게 유대를 쌓아야 하는지 몰랐다.

    윤희와의 한 달에서 느낀 바는 사소한 거라도 대화를 해야 한다는 것.

    “도진아.”

    “웅?”

    수프를 떠먹는 도진이를 부르자 입에 수프를 잔뜩 묻힌 녀석이 티끌 하나 없이 해맑게 웃었다.

    “사랑해.”

    “나도 사랑해.”

    수줍게 대답한 도진이가 다시 수프를 떠먹었다.

    * * *

    벌써 10년째 되는 일이지만 히무라가 정리한 명단은 볼수록 감탄이 나온다.

    1년에 두 번, 도빈 재단에서 후원하는 아이 중 성과를 보인 아이들이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얘가 벌써 대학 졸업한다고?’

    나미비아 출신의 자이 바트만이 베를린 음대를 무사히 졸업한 듯하다.

    호른과 트럼펫을 다루는 녀석인데 처음 이름을 들었던 것이 벌써 4~5년 전 일이니 세월이 빠르긴 하다.

    음악을 배울 수 있다면 독일에라도 유학 오고 싶다는 의지를 높이 샀던 기억이 난다.

    그간 그 마음을 잘 다독였는지, 2027년 졸업 연도에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금관 부문에서 우승했단 기록이 남아 있다.

    ‘여기 금관도 봤었나?’

    찾아보니 2019년에 금관과 목관 부문이 도입되었다고 나와 있다.

    역사가 오래되진 않아도 본디 가진 바 권위가 있으니 지원한 사람도 상당했을 터.

    경쟁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지망 진로를 적는 곳에 베를린 필하모닉을 써넣은 것을 보니 조만간 직접 만날 수 있으리라.

    ‘다음은.’

    18살 어린애다.

    히무라가 올해 가장 주목할 아이로 선정하는 이 명단에 미성년이 올라온 적은 처음이다.

    ‘홍주희?’

    경력을 보니 한국 초등학교‧중학교를 나와 한국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다.

    WH 재단에서 운영하는 한국 대학 부속 학교로 소위 있는 집 자식이 다니는 곳인데.

    도빈 재단의 후원을 받으니 그런 경우는 아닌 듯하다.

    특별한 상이라도 받았나 싶어 살폈지만 수상 이력도 없다.

    히무라가 개인 뉴튜브 채널이 좋은 추세를 보인다고 코멘트를 달았으니 아마 특기생인 듯.

    검색해 보니 구독자가 9만 명이나 있다.

    주로 자신이 만든 곡을 올리는 듯하다. 나머지는 신디로 처리하지만 피아노는 직접 연주한다.

    구성력은 제법.

    발상보다는 전개에 비중을 두는 스타일이다. 피아노는 나이를 감안하면 상당한 수준.

    ‘이런 애가 있었다고.’

    프란츠보다 어린 아이 중에 이만한 경우가 있을 거라곤 예상 못 했다.

    ‘강단도 있고.’

    히무라의 명단에 적힌 글이 마음에 든다.

    이름: 홍주희

    나이: 만 17세

    학교: 한국 고등학교 예술부 작곡과

    특기: 작곡(뉴에이지풍), 피아노 연주

    수상 이력: 없음

    장래: 2027년부터 운영한 뉴튜브 채널 구독자가 좋은 추세로 성장하고 있다.

    샛별 엔터테인먼트에서는 기량을 높이 평가하나, 담당 교사와 학우들 사이에서는 평이 좋지 못하다.

    콩쿠르, 음악제 참가 의지 없음.

    음대 진학 의지 없음.

    뉴튜브 채널 활동에 만족하고 콘텐츠 제작에 적극적임.

    한국 고등학교 교사의 진로 상담 결과 시시한 일이라며 거부해 왔다고 함.

    특이사항: 홍승일 피아니스트 손녀

    ‘홍승일?’

    손녀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벌써 18살이 되었다니 믿을 수 없었다.

    가끔 그가 아직 말도 못 하는 손녀의 동영상을 보여주며 자랑했으니 말이다.

    ‘벌써 그렇게 되었나.’

    시간을 헤아려보니 그가 죽고 15년이 흘렀다. 세월이 참으로 덧없으나 그와 함께했던 리사이틀은 참으로 멋진 경험이었다.

    ‘그나저나.’

    홍승일이 살아 있었더라면 손녀에게 좋은 할아버지는 못 되었을 듯하다.

    콩쿠르에 전혀 관심 없는 손녀를 얼마나 다그치고 회유하고 달래려 했을지 보지 않아도 훤하다.

    “히무라에게 전화해.”

    -히무라 쇼우 님께 발신합니다.

    몇 번의 통화음이 들린 뒤 히무라가 전화를 받았다.

    -어, 도빈아.

    “명단 잘 읽었어요. 고마워요.”

    -고맙긴. 홍주희 때문에 전화했지?

    귀신이다.

    “네. 기특해 보이는데 이야기나 한번 할 수 있을까 싶어서요.”

    -네가 보자고 하는데 누가 거절하겠니.

    “그럴 수도 있죠. 한 달 뒤에 한국으로 가니까 일정 잡아주세요. 싫다면 강요하지 마시고요.”

    -그래. 프라하는 어때?

    “어제 베를린으로 왔어요. 날씨는 좋더라고요.”

    -윤희랑 있으면 어디든 좋은 거 아니고?

    “맞아요. 어디든 좋죠.”

    -……너 누구야.

    “네?”

    -배도빈이 그런 말을 할 리 없잖아. 너 누군데 도빈이 전화 가지고 있어.

    “재미없어요.”

    -이제 배도빈이네. 그래, 그 일은 얘기해 둘 테니 걱정 말고. 한국 가기 전에 한번 보자. 다음 주부터는 암스테르담이지?

    “네. 표 준비해 둘게요. 연주회 맞춰서 와요.”

    -나야 좋지.

    히무라와 통화를 마치자마자 인터폰이 울렸다.

    -도련님, 손님 방문하셨습니다.

    “7층에서 보자고 해주세요.”

    -네. 7층으로 안내하겠습니다.

    계단으로 올라가자 정 셰프와 주방장들이 정성스럽게 준비한 음식들을 볼 수 있었다.

    비스킷 하나를 집어 코너를 돌자 가족과 단원들이 벌써 몇몇 와 있다.

    “도빈아!”

    “누나.”

    이승희와 한스 이안이 반갑게 웃으며 다가왔다. 출산 휴가 이후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인지라 반갑지 않을 수 없다.

    “메리는요?”

    “엄마 와서 봐주고 계셔. 어머, 세상에. 너 그새 남자다워졌다. 운동하니?”

    “푸르트벵글러 운동시키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한스도 잘 지내죠?”

    “그럼.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지.”

    좋게 말해도 상당히 지쳐 보이지만, 마음만은 정말 그럴 것이다.

    오랜만에 외출하였으니 오늘만이라도 파티를 즐겼으면 한다.

    “너 그런 건 또 언제 준비했어.”

    “뭘요?”

    “협주곡. 빨리 연주하고 싶더라.”

    무슨 말인가 싶었더니 메리 이안의 첫 생일에 헌정한 첼로 협주곡 ‘테레지아와 같이’를 말하는 것 같다.

    “돈만 보내기 아쉽잖아요. 누나 생각하며 조금씩 스케치했던 거 다듬었을 뿐이에요.”

    “진짜 너무 고마워.”

    “녹슬진 않았죠?”

    “얘는. 무슨 농담을. 앞으로 50년은 나보다 잘난 사람 없을걸?”

    말뿐만이 아니라 이승희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수석이란 직책이 안타까울 정도로 뛰어나다.

    그녀보다 열정적인 첼리스트와 그녀의 뒤포르보다 강렬한 첼로는 없다.

    “기대하고 있을게요. 한스도요.”

    “맡겨만 둬.”

    이승희‧한스 이안 부부와 인사를 마치고 돌아서자 다 죽어가는 프란츠가 시야에 들어왔다.

    날 발견하더니 두 팔을 뻗어 다가온다. 껴안으려는 것 같은데 위험해 보여 피하니 허우적거린다.

    “혀어엉.”

    “왜 그래?”

    크리스틴 노먼의 깐깐함에 지쳤나 싶더니 다른 말을 꺼낸다.

    “흐으읍. 가우왕 부감독님도, 지훈이 형도 가시면 피아노 제가 해도 되는 거죠?”

    “아.”

    그러고 보니 가우왕이 연수 중이고 지훈이의 군대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피아니스트 자리가 빈다.

    “그래야겠는데.”

    “찰스 악장님께서 그 정도로는 꿈도 꾸지 말라고 하셨어요.”

    눈물을 글썽거린다.

    힘들다고 징징대는 줄 알았는데 일하고 싶어서 안달 난 거란다.

    이렇게 기특할 때가.

    그러나 찰스 입장도 이해되는 것이 나와 가우왕, 최지훈에게 익숙해진 그가 프란츠에게 만족할 리 없다.

    “찰스가 이유 없이 그럴 리 없지.”

    “과제 내주셨는데 마음에 안 드셨나 봐요.”

    찰스의 기준에 부합하려면 보통 노력으로는 어려웠을 것이다.

    “영화는?”

    “저번 주에 끝났어요.”

    “흠.”

    아무리 늦어도 모레에는 암스테르담으로 출발해야 하니 시간이 많지 않다.

    “내일 하루 봐줄 테니 오늘은 게스트룸에서 자.”

    “정말요?”

    “그래. 과제가 뭐였는데?”

    “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요.”

    “포기해.”

    “네?”

    “올라올 때가 됐는데.”

    최지훈과 차채은이 안 보여서 주변을 둘러보니 프란츠가 옷자락을 잡고 늘어졌다.

    “포기하면 안 된다면서요!”

    “그래. 실수했네. 10년 정도 뒤에 생각해 보자.”

    “안 돼요! 그땐 기회가 없을 거라고요!”

    포기해선 아무것도 이룰 수 없지만 내일 하루 연습한다고 될 일도 아니다.

    노력은 항상 옳지만, 시련을 항상 이겨낼 수는 없는 법.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도 있는 거야.”

    “열심히 할게요오. 제발 한 번만 봐주세요.”

    애써 무시하고 단원들과 대화하는 와중에도 찰거머리처럼 붙어서 떨어질 줄 모른다.

    나도, 가우왕도, 최지훈도 몇 달간 매달려 가능했던 곡이다. 모르긴 몰라도 사카모토의 금발 제자는 그 이상 걸렸을 터.

    지금 프란츠 수준으로 가능할 리 없다.

    그러나 이렇게 애원하니 노력할 방향 정도는 가르쳐 주는 게 옳겠지.

    “알겠으니까 놔.”

    “혀어엉.”

    “내일 아침 7시. 작업실로 와.”

    “넵!”

    그간 어지간히 무대에 서고 싶었던 모양. 작곡과 편곡, 지휘만 반복했던 녀석에게도 연주자의 피가 흐르는 모양이다.

    기특하게 여기며 다시 주변을 둘러보는데, 진달래와 나카무라 료코가 시엔 얀 등 단원들과 깔깔대고 있다.

    진달래야 워낙 붙임성이 좋았다지만 료코가 저렇게 크게 웃는 모습은 처음 본다.

    반면 바로 옆 테이블에 케르바 슈타인이 잔뜩 풀이 죽은 채 있다. 건너편의 헨리 빈프스키와 니아 발그레이도 심각한 표정이다.

    “잘 지냈죠?”

    다가가 인사를 건네니 믿음직한 두 감독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도빈아.”

    케르바 슈타인이 갑자기 정색하여 걱정스레 의자를 빼고 앉았다.

    “무슨 일이에요. 자리 옮겨요?”

    “그 정도로 심각한 일이긴 해.”

    니아까지 그리 말하니 보통 일이 아니지 싶다.

    혹시 그간 무슨 문제가 생겼던 건 아닌지 걱정되어 재촉했다.

    “무슨 일인데 그래요.”

    “후.”

    케르바 슈타인이 한숨을 쉴 뿐이기에 헨리와 니아를 보자 고개를 젓는다.

    “이런 일은 직접 말해야지. 케르바, 솔직하게 다 말해.”

    “그렇지…….”

    헨리가 마치 응원하듯 새 맥주잔을 앞에 놓으니 케르바 슈타인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실은 네가 선물해 준 차 있잖아.”

    “……차?”

    순간 잊고 있던 일이 떠올랐다.

    이전에 케르바 슈타인에게 선물해 준 벤츠가 떠올랐다.

    “그런데요.”

    “실은. 하…….”

    “답답하게 하지 말고 빨리 말해요. 도박하다 날렸어요?”

    “도박은 무슨! 나 그런 거 안 해!”

    “그게 아니면 뭐가 문제예요. 망가졌으면 고치면 되고 심각하면 새로 사면 되지.”

    “……폐차했어.”

    연유를 알 수 없어 인상을 쓰고 헨리와 니아를 바라보자 헨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죽지 않아 다행이지. 뭔 짓을 하면 아우토반에서 사고를 내.”

    “네?”

    깜짝 놀라 케르바 슈타인의 얼굴을 붙잡고 돌렸다. 다친 곳은 보이지 않는다.

    “안 다쳤어요?”

    “응……. 정말 미안해. 네가 준 건데.”

    “지금 차가 문제예요? 어쩌다가 그랬어요. 술 마셨어요?”

    “아니. 피곤해서 잠깐 졸다가…….”

    “참나. 너 인마, 죽을 뻔한 거야. 정신 똑바로 차리고 다녀.”

    헨리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주었다.

    점잖은 니아도 한마디 거들었다.

    “어쩔 뻔했어. 그 와중에 차 걱정을 해? 도빈이가 얼마나 황당하겠어.”

    케르바 슈타인을 노려봤다.

    “정말 미안해. 다 내 불찰이야.”

    “미안하고 자시고. 자율주행 기능은 장식이에요? 졸리면 켜놓고 자면 되잖아요.”

    “그게. 기계한테 어떻게 운전을 맡겨.”

    이제 고작 쉰다섯밖에 안 먹은 인간이 쉰내 나는 말을 한다.

    니아와 헨리가 타박했다.

    “이런다니까? 대체 뭔 고집인지.”

    “못 믿는 걸 어떡해.”

    꽉 막혔다.

    “앞으로 운전 금지예요. 죠엘, 죠엘! 죠엘 왔어요?”

    “네! 보스! 여기예요!”

    “앞으로 이 사람한테 기사 한 명 붙여요. 케르바, 운전대 잡으면 그날로 해고예요.”

    “아니, 그렇게까진.”

    “해고예요.”

    “……응.”

    “정말 안 다쳤어요?”

    “어. ……차가 좋긴 좋더라.”

    “웃지 말아요. 화났으니까.”

    하마터면 소중한 사람을 잃을 뻔했다.

    “일정도 조율해요. B팀은 앞으로 정기 공연 위주로 하고 외부 활동 줄여요. 힘들면 힘들다고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왜 속상하게 그러고 있어요. 혼자 감내하다 다치기라도 했으면 나나 헨리, 니아, 세프는 어떻겠어요.”

    “그래. 정말 전부 다 내 잘못이야.”

    “선생님께도 크게 혼났어.”

    속상한 마음에 다그치고 있자니 또 케르바 슈타인을 탓하던 헨리와 니아가 두둔하고 나서준다.

    서로를 위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어 일단은 안심이다.

    “절대. 절대 그러지 마요. 헨리랑 니아도 꼭 말해줘요. 본인들도 단원 중에 무리하는 사람 있는지도.”

    “그래. 더 신경 써야지.”

    케르바 슈타인의 손등에 손을 포개어 위로하곤 자리를 옮겼다.

    놀란 가슴이 진정되기도 전에 최지훈과 차채은을 볼 수 있었는데.

    둘이 시체처럼 서 있다.

    제법 가까이 다가갔음에도 눈치를 못 챈 듯해 부르니 고장 난 인형처럼 삐걱거리며 고개를 튼다.

    “도빈이다.”

    “오빠다.”

    “…….”

    20년 가까이 봐 왔지만 이런 모습은 처음이라 다소 당황스럽다.

    한 번 반성한 뒤로는 아들을 끔찍이 여기는 최우철이 아들 군대 문제를 내버려 둘 리 없거늘.

    축 처진 어깨가 의아하다.

    “왜 그래? 잘 안 됐어?”

    “응…….”

    최지훈이 힘없이 답했다.

    “현역은 안 갈 수 있다며.”

    “시험 못 보면 되는데 어떻게 해도 훈련은 받아야 하고 또 3년이나 못 돌아오잖아.”

    확실히 대체 복무 요원이 되더라도 기초 군사 훈련을 4주간 이수해야 하는 것은 변함없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훈련 기간을 포함해 2년 10개월간 활동에 제약이 생기는 것.

    나로서도 베를린 필하모닉으로서도 또 팬에게도 손해가 막심하다.

    “아버지는 걱정하지 말란 말씀만 계속하시고. 난 몰라. 어떡해.”

    항상 올곧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뿌리 깊게 내린 바른 의지로 살아가던 녀석이 당황한 모습을 보니.

    안타까운 것과 별개로 조금 재밌다.

    “넌 또 왜 그래?”

    차채은이 입을 내밀고 있다. 가늘게 뜬 눈에서 당장에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다.

    “몰라.”

    녀석도 복잡한 듯하다.

    국방의 필요성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지만 그 때문에 더 혼란스러울 것이다.

    아마 국가적 책임과 개인의 희생 사이에서 무엇이 우선인지 고민하고 있겠지.

    평화와 안전 없이는 음악은 물론 일상도 영위할 수 없기에 입대를 당연하게 여길 수도 있고, 모병제 국가의 사례를 들어 반론을 펼칠 수도 있다.

    이 문제는 차채은도 최지훈도 나도 그리고 대한민국을 국적으로 한 모든 사람이 고민을 거듭해야 한다.

    다만 어쩔 수 없이 안타까울 뿐.

    아직 정해진 것이 없어 말하지 않았던 방안을 꺼냈다.

    “아직 진행되지 않아서 말 안 했는데.”

    망가졌던 최지훈과 차채은이 고쳐졌다. 죽은 생선보다 칙칙했던 눈빛이 초롱초롱 빛난다.

    “방법 있어?”

    “뭔데? 응?”

    “다음 달에 대한국향 가잖아.”

    눈썹을 모으고 고개를 갸웃하는 걸 보니 무슨 말인지 이해 못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차명운 선생하고 이야기해 보려고. 네가 거기서 활동하게 되면 업무협력차 이쪽에서 있을 수 있게.”

    “그렇게 돼?”

    최지훈과 차채은의 눈이 튀어나올 듯했다. 갑자기 테이블을 짚고 상체를 내민다.

    “모르니까 얘기해 봐야지. 루덴도르프도 데려갈 거야. 그쪽 담당자도 만나야 할 테고 병무청에도 문의해야 하니.”

    두 악단이 협력 관계가 되면 아마 베를린에 상주하는 것까진 무리더라도 일정 기간 임대 형식을 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게 법무실장 요하임 루덴도르프의 의견이었다.

    “얼마나? 얼마나 있을 수 있는데?”

    최지훈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차채은이 한차례 얼굴을 더 들이밀었다.

    겨우 진정시켰다.

    “모른다고 했잖아. 아직 정해진 것도 없고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지도 몰라.”

    “그래도 가능성은 있으니까 하려는 거 아니야?”

    “그래.”

    잔뜩 우울했던 녀석의 표정이 밝아졌다.

    당사자인 최지훈보다 좋아하는 걸 보니 어지간히 마음 졸인 듯한데, 이해 못 할 것도 없다.

    어려서부터 친하게 지내왔고.

    나와 지훈이를 따라 유럽으로 올 정도며, 몇 년 전 쓰레기들에게 공격받은 뒤로 줄곧 의지해 왔으니까.

    “언제쯤 정해져?”

    최지훈이 물었다.

    “도착하는 대로 처리할 거야. 너 입대가 언제라고 했지?”

    “시험 합격하면 7월 6일.”

    “떨어질 거잖아. 대체 복무 말이야.”

    “가고 싶을 때 가면 돼. 사유만 있으면 연기할 수 있으니까.”

    “그럼 차명운 선생하고 병무청이랑 이야기되고 정해. 최대한 빨리 알아볼 테니까.”

    “응!”

    최지훈이 물끄러미 쳐다보기에 슬쩍 몸을 뺏더니 아니나 다를까 테이블을 넘어와 달려들었다.

    “도빈아아아아~”

    “오빠!”

    “숨. 막혀.”

    힘이 어찌나 센지 푸르트벵글러를 운동시키며 나름 단련한 몸이 조금도 저항할 수 없다.

    대체 언제까지 클 생각인지 180㎝ 가까이 된 차채은도 만만치 않다.

    숨이 막혀 등을 때리자 그제야 놓아주고 싱글싱글 웃는다.

    “아무튼. 시험 잘 처리해.”

    “응. 꼭 떨어질게.”

    “번거롭게 꼭 거기까지 가야 해? 안 보면 그만인 걸 굳이 가서 떨어지려고.”

    “언론에 기사 다 나버렸는데 어떻게 그래.”

    하긴 직접 현역 입대 의사를 밝혔으니 시험장에 나타나지 않으면 그간 쌓아온 성실하고 순수한 이미지가 손상될 것이다.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최지훈에겐 선택지가 될 수 없다.

    “근데 실기 시험 있잖아. 생각해 보면 오빠가 못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

    차채은의 말대로다.

    “그것도 그렇네.”

    맞장구를 치니 최지훈이 사색이 되었다. 그러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여는데.

    “맞아. 나 엄청 잘하잖아.”

    “…….”

    맞는 말이라 잠자코 있는데 차채은이 입을 벌리고 어이없다는 듯 본다.

    “농담이야.”

    농담으로 생각하지 않지만, 농담할 정도면 괜찮은 듯하다.

    “어쩔 거야?”

    “괜찮아. 나도 다 계획이 있다구.”

    자신만만하니 녀석 말대로 생각해 둔 방법이 있는 모양.

    “그러니까 처음부터 잘 알아보면 좋았잖아.”

    “어쩔 수 없었는걸.”

    최지훈이 무엇인가 떠올랐는지 사선 방향으로 시선을 올렸다가 발끈했다.

    “따지고 보면 너 때문이잖아.”

    “…….”

    “그치?”

    “배토벤 먹이 줄 시간인 걸 깜빡했네. 이런 낭패가.”

    “토벤이 밥 이틀에 한 번 먹잖아!”

    “낭패랳. 누가 그런 말을 써.”

    달려드는 최지훈 뒤로 차채은이 웃었다.

    * * *

    최지훈이 배도빈에게 달려들면서 시작된 파티는 늦은 시간까지 계속되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한 달 만에 만난 그들의 보스, 악장과 회포를 풀기도, 당분간 베를린을 떠나 있을 피아니스트에게 격려와 응원을 전하기도 했다.

    다만 그 방식이 다소 과격했을 뿐이었다.

    오랜만에 취하도록 술을 마신 배도빈이 두통을 느끼며 일어났다.

    “으음.”

    그는 곤히 잠든 나윤희에게 이불을 고쳐 덮어주곤 정수기를 찾았다.

    찬물을 들이켰지만 숙취가 남아 있었다.

    어지러움을 느끼며 칫솔에 치약을 묻히고 나오니 나윤희가 뒤척였다.

    배도빈은 그녀를 바라보며 이를 닦다가 문득 시계를 확인했다.

    어제 프란츠 페터와 한 약속을 떠올리곤 세면대로 돌아갔다.

    대충 씻고 나오니, 물 흐르는 소리로 반쯤 깬 나윤희가 잠에 취한 채 배도빈이 누워 있던 자리를 더듬었다.

    “으응?”

    “더 자. 아직 새벽이야.”

    “흐으아?”

    “작업실. 프란츠 피아노 봐주기로 했어.”

    “허?”

    “찰스가 내준 시험에서 떨어졌대.”

    “으응.”

    배도빈이 나윤희를 다독이곤 밖으로 나섰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아 갖은 인상을 다 쓰며 복도 끝으로 향하니 프란츠 페터가 기다리고 있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멀쩡해 보이네.”

    “네. 전 술 못 마시니까요.”

    “그래. 앞으로도 마시지 마.”

    배도빈이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프란츠 페터가 쪼르르 따라붙었다.

    “다음에 할까요? 너무 피곤해 보이시는데.”

    “괜찮아.”

    오늘을 넘기면 다음 기회는 두 달 뒤에나 있었다.

    그렇게 되면 연수 중인 가우왕이 복귀할 테니 프란츠 페터가 나설 기회가 없을 터.

    배도빈은 찰스 브라움이 내건 조건이 프란츠에게 버겁다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는 자세를 높이 평가했다.

    배도빈이 인터폰을 들었다.

    곧 집사가 응답했다.

    -네, 도련님.

    “작업실로 오렌지 주스 가져다주세요.”

    주문하던 중 배도빈이 잠시 멈췄다. 프란츠 페터를 보곤 다시 입을 열었다.

    “얼음 많이 넣어서 네 잔이요.”

    “저는 한 잔이면 되는데.”

    “그래. 네 거 한 잔.”

    -하하. 네, 바로 올라가겠습니다.

    집사가 주스를 가져다주기 전까지 프란츠에게 손을 풀도록 지시한 배도빈은 어제 일을 떠올렸다.

    기억이 듬성듬성했지만, 육아로 한동안 놀지 못했던 이승희와 한스 이안이 폭주하여 진달래와 함께 즉흥적으로 작은 밴드를 구성했고.

    자신도 거기에 동참했던 일이 생각나 고개를 저었다.

    ‘무슨 짓을 한 거야.’

    마침 집사가 주스를 내왔고 배도빈은 단숨에 한 잔을 비우고 피아노 옆에 섰다.

    “해봐.”

    “뭘요?”

    “뭐긴.”

    배도빈 세 개의 손을 위한 피아노 소나타, ‘가우왕’ 외에 달리 없었다.

    “갑자기요?”

    “시간 오늘뿐이라니까.”

    난데없이 최고 난도의 곡이라니.

    프란츠 페터는 당황했지만 이내 배도빈의 혹독한 교육에 익숙해진 만큼 마음을 굳게 먹었다.

    숨을 들이마시고.

    아홉 개의 손가락으로 내려친 양손 옥타브.

    포메라니안이 짖었다.

    “틀려.”

    배도빈이 고개를 젓고 건반에 손을 올렸다.

    “강아지가 아니야. 사자야.”

    허리부터 등, 어깨, 팔꿈치, 손목, 손가락에 상체 무게까지 실어 건반을 깊게 눌렀다.

    그의 말대로 사자가 포효하는 듯한 울림이었다.

    프란츠 페터가 입을 쩍 벌리고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저는 그런 힘이 없어요.”

    “힘으로 하는 게 아니야.”

    배도빈이 프란츠의 팔꿈치를 잡았다. 살짝 힘을 줘 프란츠를 이끌자 스승에게 몸을 맡기던 프란츠는 자연스레 어깨와 상체 전반이 들렸다.

    “팔꿈치로 드는 게 아니야. 허리 펴고 어깨 들어. 팔꿈치는 고정하고. 밀듯이 눌러 봐.”

    스승이 지시한 대로 해보니 전보다 훨씬 힘이 들어가는 듯했다.

    “어느 정도는 몸이 따라줘야 하지만 성인이면 충분해. 난 어렸을 때도 연주했어.”

    배도빈은 작은 몸으로 연주하는 데 익숙했다.

    어렸을 적 유독 체구가 작고 힘이 없었기에 과거, 빈에서의 연주를 재연하지 못했다.

    그러나 차마 다시 잡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건반을 누르면 소리가 나는 당연한 일이 그보다 벅찰 수 없었다.

    아주 어렸을 땐 어쩔 수 없었으나 10살 부근부터는 그런 단점을 감수하고 연주할 수 있도록 필사적으로 임했다.

    다행히 그에게는 한평생 쌓아온 경험이 있었다.

    어떻게 몸을 움직여야 체중을 실을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페달을 밟으며 다리를 뻗을 때 자연스레 힘이 빠졌지만 팔꿈치를 더 내리며 최대한 힘을 유지했다.

    “안 되는 이유만 찾아선 아무것도 못 해. 해야 한다면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러시아 금발 꼬맹이도 하잖아.”

    “넵.”

    스승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긴 프란츠가 멈칫했다.

    “러시아 금발 꼬맹이요?”

    “툭타미셰바.”

    작은 체구의 인형 같은 피아니스트가 떠올랐다.

    프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이 이상하다는 것쯤은 오래 전부터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자신보다 아홉 살이나 더 먹은 사람을 꼬맹이라고 하는 스승을 이상하게 여기기보다, 그가 예시로 든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의 연주를 떠올렸다.

    작은 몸으로, 여성의 몸으로 그녀는 공식 무대에서 가우왕 다음으로 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를 훌륭히 연주해냈었다.

    그녀의 연주에서 음량이 부족하단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프란츠가 마음을 다잡고 연주를 이어나갔다.

    “틀려.”

    이를 꽉 물고 집중했다.

    “틀려.”

    반복된 연주로 손이 완전히 풀려, 최고의 컨디션이었지만.

    “틀려.”

    두 마디 이상 연주가 이어지는 법이 없었고 굳은 결심도 조금씩 흩어졌다.

    “음이 흐트러지잖아.”

    스승의 지적은 좀처럼 줄어들 기미가 없었다.

    몸 쓰는 법을 익혀나가기 시작한 프란츠 페터의 타건은 몹시 흔들렸다.

    “기초가 부족해서 생기는 일이야. 가우왕은 지금도 타건 연습을 해. 지훈이도 마찬가지고. 어떤 상황에서든 정확하게 연주할 수 있게 노력해 봐.”

    “네.”

    “여기는 박자를 충분히 당겨야 해. 더. 더. 그래.”

    배도빈이 악보를 가리키며 지적했다.

    5년 전, 악보도 제대로 읽지 못하면서 단지 천재적인 감각으로 크리크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했던 프란츠 페터는 진실로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았다.

    배도빈을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훨씬 나아졌고, 작곡을 배우면서 여러 지식을 쌓기도 했지만.

    피아노 연주 실력은 제자리였다.

    “포인트가 없잖아. 이 곡 연주하면서 뭘 말하고 싶어?”

    “……모르겠어요.”

    하나의 곡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새롭게 창조하는 영역은 아직 무리라고 판단한 배도빈이 질문을 고쳤다.

    “그럼 내가 뭘 말하고 싶었던 것 같아?”

    프란츠 페터가 악보를 유심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용감한 사람이요. 여기 그리고 여기도 망설이지 않고 나아가는 것 같아요.”

    “그래. 그럼 어떻게 연주해야 하겠어?”

    “힘차게. 그리고…… 앞뒤로 간격을 두면 좋을 것 같아요. 대조되게.”

    “해봐.”

    프란츠가 자신이 답했던 대로 연주를 시도했다.

    본인이 느끼기에도 심상이 전보다 효과적으로 표현되었다.

    “그런 식으로 접근하는 거야. 작은 부분에서 시작하기도 하고, 전체적인 분위기를 이해하기도 하면서 완전히 이해했을 때 좋은 연주가 나와.”

    “네.”

    프란츠 페터가 다시 용기를 얻고 악보를 넘겼다.

    “아.”

    몇 번을 봐도 당황스러운 광경이 펼쳐졌다.

    빼곡하게 이어진 음표는 가혹할 정도로 변화가 심했다. 악보에 익숙한 프란츠 페터조차 자세히 들여다봐야 어떤 구조로 이뤄져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사자가 질주하는 듯한 전개부.

    3년 전에 발표되었던 이 곡을 여전히 역사상 가장 난해하고 복잡한 곡으로 남긴 대목이었다.

    “여긴 어떻게 연주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겠어요.”

    프란츠는 대체 손가락을 어떻게 운용해야 하는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배도빈이 가우왕을 골려줄 생각으로 두 악보를 합쳐놓은 것이기에, 현재 ‘가우왕 소나타’로 불리는 이 악보에는 건반을 몇 번 손가락으로 눌러야 한다는 지시가 없었다.

    작곡가 배도빈이 연주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운지법을 고려하지 않은 탓이었다.

    “직접 보는 게 빠르겠지.”

    기초부터 가르치기엔 너무나 긴 시간이 필요했다.

    배도빈은 프란츠 페터의 천재성을 믿고,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천천히 곡을 연주해 나갔다.

    점차.

    건반 위에 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의 비밀이 조금씩 드러났다.

    ‘말도 안 돼.’

    그 경악스러운 기교에 프란츠 페터의 얼이 빠졌다. 입을 벌린 채,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을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이거.”

    “그래.”

    배도빈이 연주를 멈추고 다시 반복했다.

    “왼손 엄지를 제외하고 네 손가락으로 반주. 오른손 엄지를 제외한 네 손가락으로 멜로디. 남은 두 엄지로 하나의 멜로디를 연주하는 거야.”

    말 그대로 세 개의 손.

    프란츠 페터는 믿을 수 없었다.

    다섯 손가락으로 연주할 것을 네 손가락으로 커버하는 것도 말이 안 되었다.

    구조적으로 완벽한 배도빈의 곡을, 손가락 하나 없이 연주하려면 대체 얼마나 민첩하게 연주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단순히 빠르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 배분을 치밀하게 해야 했다. 한순간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것을 한 손만이 아니라 양손으로 행하고.

    그런 와중에 두 엄지로 또 하나의 멜로디를 연주하다니.

    프란츠 페터는 왜 이 곡이 지금까지의 수많은 피아노곡 중에서도 가장 악독하다고 평가되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이걸 정말 사람이…….’

    연주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고.

    또 이러한 발상을 한 가우왕은 대체 어떤 세계에서 살고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이걸……. 아니, 이게 가능해요? 어떻게 이런 생각을. 부, 부감독님은 천재예요. 진짜, 진짜 천재요.”

    프란츠가 황당한 심정을 토로하자 배도빈이 건반에서 손을 뗐다.

    “그래. 천재지.”

    중국에서의 경합 이후로 가우왕을 높이 평가하던 그가, 가우왕을 전혀 달리 바라본 계기는 둘이었다.

    경합 이후 고작해야 몇 주 지났을 뿐인데,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앨범 작업을 훌륭히 해낸 점.

    사람이 이렇게까지 단기간에 변할 수 있나 싶었다.

    가우왕은 이후로도 안주하긴커녕 끝을 모르고 달렸다.

    특히 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를 준비할 때는 기본 생활조차 신경 쓰지 않고 열중했다.

    마치 피아노를 위해 사는 듯.

    두 달간 수없이 실패를 반복하면서도 집착, 아니, 광기에 휩싸여 건반을 내려쳤다.

    그 결과.

    지금은 만인이 인정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로 군림하고 있었다.

    “가우왕 실력이 언제 가장 늘었을 것 같아?”

    “어……. 그래도 처음 배울 때 아닐까요?”

    “아니. 삼십 대부터 지금까지. 10년 전 가우왕과 지금은 비교할 수 없어.”

    음악을 깊이 이해하는 사람일수록.

    소리를 넓게 받아들이는 사람일수록 가우왕이 얼마나 대단한 피아니스트인지 알 수 있었다.

    너무나 높은 곳에 있기에.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사람들은 알 수 없었다.

    프란츠 페터도 그중 한 사람이었고,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고서야 비로소 가우왕의 그림자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없던 개념은 아니야. 탈베르크라고 들어본 적 있어?”

    “아니요.”

    프란츠가 고개를 저었다.

    “쇼팽, 리스트와 같은 시대 사람이야. 루트비히 이후 피아노 하면 그 두 사람만 생각하지만 지기스문트 탈베르크가 없었으면 리스트도 쇼팽도 없었어.”

    프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지. 세 사람 다 루트비히 덕을 봤다고 정정.”

    “넵.”

    스승의 베토벤 사랑을 익히 아는 프란츠가 딴지 걸지 않고 넘어갔다.

    “아무튼 그 탈베르크가 정립한 방식이야. 모세 환상곡은 알지?”

    “……아니요.”

    프란츠가 민망해했지만 스승은 결코 모른다는 이유로 책망하지 않았다.

    “시간 있을 때 익혀 놔. 탈베르크의 세 손 효과가 제대로 적용된 곡이니까. 연습할 때 도움이 될 거야.”

    배도빈이 짤막하게 모세 환상곡을 들려주었다.

    정말 양손 각각 네 손가락, 엄지 둘로 연주하였다.

    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만큼 화려하고 복잡하진 않았지만, 결코 쉽게 익힐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예전에는 필수 교양이었어.”

    “네.”

    여전히 막막했지만 희망이 조금 보였다.

    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보다 좀 더 쉬운 모세 환상곡을 연습하면서 ‘세 손 효과’에 익숙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계속해서.”

    배도빈이 건반에 다시 손을 얹었다.

    그러고는 연주를 이어가는데, 어안이 벙벙하던 프란츠 페터가 또 한 번 경악하고 말았다.

    등줄기를 타고 올라온 전율이 등과 어깨로 퍼져나갔다.

    몸을 한차례 떨곤 다급히 물었다.

    “이건, 이건 뭐예요?”

    방금 설명 들었던 ‘세 손 효과’ 연주를 이어가던 중, 연주법이 달라졌다.

    네 손가락으로 멜로디를 연주하던 오른손이 다시 다섯 손가락을 모두 활용하는 한편.

    왼손이 바삐 움직였다.

    저음역과 그보다 낮은 음역을 오갔다. 흡사 하나의 곡을 한 손으로 연주하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두 사람이 연주하려고 만든 곡이었잖아.”

    “네.”

    “그러니 네 손가락으로 연주 못 하는 구간도 있어. 특히 이 부분.”

    배도빈이 조금 전 오른손으로 연주했던 멜로디를 다시금 들려주었다.

    확실히 은하수처럼 펼쳐진 아르페지오를 네 손가락으로 소화할 순 없을 것 같았다.

    “오른손이 묶이니까 왼손으로 남은 걸 연주해야지. 반주랑 멜로디도.”

    “그거예요! 그게 어떻게…….”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배도빈은 왼손으로 한 옥타브를 사이에 두고 두 음역을 연주해 나갔다.

    가히 도약이라 할 만했다.

    1초도 안 되는 시간에 여러 번 반복하는 도약.

    “이것도 없던 개념은 아니야. 파가니니 카프리스 6번 알지?”

    “네. 아!”

    파가니니의 카프리스를 떠올리자 뇌리에 스치는 것이 있었다.

    한 줄로는 멜로디를, 다른 한 줄로는 트레몰로를 하며 홀로 멜로디와 반주를 해버렸던 니콜로 파가니니.

    그는 반주자가 필요 없는 바이올리니스트였다.

    그리고.

    “리스트 편곡 말씀하시는 거죠?”

    “그래.”

    파가니니의 카프리스에 감명받은 프란츠 리스트가 피아노곡으로 편곡한 ‘파가니니에 의한 초절기교 연습곡’.

    멜로디와 반주를 홀로 소화하는 파가니니처럼, 리스트는 왼손만으로 멜로디와 반주를 소화했다.

    “이것부터 하려 들지 말고 리스트 연습곡으로 익숙해져. 기초가 잡혀 있지 않으면 못 해.”

    배도빈이 전개부를 처음부터 다시 연주하기 시작했다.

    프란츠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천천히 연주하는 것이 아닌, 그의 스타일을 한껏 살렸다.

    초원을 가로지르는 백수의 왕.

    바람에 휘날리는 갈기가 위엄 넘치고 도약을 반복할 때마다 거친 힘이 느껴졌다.

    ‘말도 안 돼.’

    ‘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의 비밀을 알게 된 프란츠 페터는 배도빈의 손을 눈으로 조금씩 따라갈 수 있었고.

    그가 ‘세 손 효과’와 ‘한 손 연주’를 복합적으로 이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나만 익히기에도 버거운 일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터질 듯했다.

    전개부를 마친 배도빈이 고개를 돌렸다.

    “이 뒤는 요령만 익히면 할 수 있을 거야.”

    “못 할 것 같아요.”

    처음에는 무슨 비법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아무리 연주하려고 해도 손이 꼬였고, 그 탓에 방법만 알면 어떻게든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당치도 않았다.

    한계, 아니, 상식의 범주를 넘어선 경지를 알게 되자 무력해질 뿐이었다.

    “그래. 무리지.”

    항상 할 수 있다고.

    노력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확신에 차 말하던 스승마저 부정하니 프란츠 페터는 의욕을 잃고 말았다.

    “네가 이걸 두 달 안에 해냈을 것 같으면 애초에 날 찾지도 않았어.”

    배도빈이 얼음이 거의 녹은 오렌지 주스를 들이켰다.

    잔인한 말이었다.

    그러나 프란츠는 스승의 말이 옳다고 여겼다.

    평생을 매달리더라도 가우왕 소나타를 연주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머리로 따라가기조차 힘든 음표들은 아스팔트 위로 쏟아지는 소나기 같았다.

    조성 변화가 너무 많았고, 당김음 활용이 된 구간이 곳곳에 포진해 있어 리듬감을 살리는 것도 버거웠다.

    운지법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 모든 것을 신경 쓰면서 몸까지 활용해야 하니 도무지 엄두가 안 났다.

    “피아노만 파고든 러시아 꼬맹이도 몇 년간 안간힘을 썼어. 지훈이도 반년은 걸렸고. 이걸 쓴 나도 마찬가지고.”

    “…….”

    “그래도 결국 해냈지.”

    배도빈이 인상을 쓰며 빈 잔을 보았다. 잔을 내려놓은 뒤 목 근육을 풀었다.

    “두 달 뒤엔 피아노 안 칠 것도 아니잖아. 계속 매달리면 언젠가 할 수 있을 거야.”

    그러나 해야 했다.

    그 어려운 조건과 이유는 단지 가우왕 소나타를 익히기 어려운 요소일 뿐.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싶은 마음을 접어야 할 이유는 아니었다.

    프란츠가 침을 꿀꺽 삼켰다.

    “네. 꼭 해낼 거예요.”

    얼음이 녹은 탓에 밍밍해진 오렌지 주스에 인상 쓰고 있던 배도빈이 슬며시 미소 지었다.

    * * *

    배도빈, 나윤희, 최지훈, 차채은이 베를린 테겔 국제 공항 개인 격납고에 모였다.

    배도빈이 최지훈에게 말했다.

    “한국 가면 전화할게.”

    “응.”

    베를린 필하모닉에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탓에 넋이 나갔던 최지훈이 밝게 답했다.

    대체 복무를 하더라도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에서 연주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덕이었다.

    확실한 일은 아니었지만, 배도빈과 친분이 있는 대한국립교향악단과 차명운이라면 긍정적으로 검토해 줄 터였다.

    나윤희도 최지훈을 격려했다.

    “한국 돌아간 김에 푹 쉬어. 어떻게든 잘 해결될 거야.”

    “도빈이만 믿고 있어요.”

    최지훈이 장난스레 배도빈에게 부담을 지웠다.

    나윤희의 말대로 이번 일이 법적인 문제로 어렵게 된다고 해도, 아버지가 어떻게든 방안을 마련해 주리라 믿기로 했다.

    그때 차채은이 나섰다.

    “나도 갈래.”

    갑작스러운 말에 최지훈이 의아히 물었다.

    “한국에?”

    “치, 친구. 친구 보고 싶단 말이야.”

    최지훈은 의문을 풀지 않았고 그것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났다.

    “이필호 편집장님도 만나고, 세윤 언니도 만나고.”

    “그런 이야기 없었잖아.”

    “생겼어! 내가 뭐 오빠한테 다 말하는 줄 알아?”

    차채은이 버럭 소리 질렀다.

    당황한 최지훈이 주춤했고 차채은을 이해하는 나윤희만 웃음을 참았다.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태워주기 싫으면 말아.”

    차채은이 스마트폰을 꺼내 표를 찾으려 하자 최지훈이 웃으며 물었다.

    “여권 가져왔어?”

    차채은이 눈도 마주치지 않고 가방에서 여권을 꺼내 보였다.

    “같이 가. 지금 표 구해서 어떻게 가게. 집사님.”

    최지훈이 그의 집사에게 차채은이 함께 입국할 수 있도록 조치해 주길 요청하자 차채은이 못 이기는 척 스마트폰을 집어넣었다.

    “우리 먼저 간다.”

    “응. 서울에서 봐.”

    배도빈과 최지훈이 다시 인사를 나누는 한편 나윤희도 차채은을 배웅했다.

    그녀의 표정이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미소 짓고 있었기에 차채은은 얼굴을 붉혔다.

    “조심히 가.”

    “응. 언니도 잘 지내.”

    나윤희가 귀를 빌려달라고 손짓했다. 차채은이 의아해하며 고개를 숙였다.

    “지훈이도 알고 있는 것 같아.”

    놀란 차채은의 눈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나윤희는 즐겁다는 듯 웃으며 그녀를 응원했다.

    “힘내.”

    배도빈과 나윤희가 떠나자 최지훈도 비행기에 올랐다.

    차채은은 나윤희의 말을 떠올리며 그를 빤히 보다가 발을 옮겼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1시간.

    차채은은 나윤희가 남긴 말을 잊을 수 없었다. 최지훈이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니 좀처럼 평소와 같을 수 없었다.

    “게임하자.”

    최지훈이 기분을 풀어주고자 해맑게 웃으며 게임 패드를 쥐여주었지만 웃을 수 없었다.

    “안 할 거야?”

    “…….”

    방실방실 웃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복잡했다.

    더 같이 있고 싶은데.

    더 많은 얘기하고 싶은데.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싱그럽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자기도 힘들면서.’

    차채은은 분위기를 풀기 위해 애쓰는 그를 생각해서라도 이대로 있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안 봐줄 거야.”

    패드를 쥐고 배도빈과 함께 세 사람이 어렸을 적부터 함께했던 격투 게임을 실행했다.

    “괜찮아. 연습했거든.”

    차채은이 코웃음 쳤다.

    무작정 달려드는 최약체 배도빈보다는 낫지만 최지훈도 만만치 않게 약했다.

    어떻게 행동할지 뻔히 보이는 패턴이라 무적의 차채은은 물론, 진달래와 배도진에게도 이기지 못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어?”

    “뻔하잖아.”

    “이래도?”

    “응. 뻔해.”

    차채은이 손쉽게 게임을 이끌어나가던 중 최지훈이 입을 열었다.

    “채은아.”

    “봐달라고 해도 안 봐줘.”

    “전화 자주 할게.”

    순간 차채은의 게임 캐릭터가 멈췄고, 그 틈을 노린 최지훈의 공격이 먹혔다.

    겨우 잡아낸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최지훈이 연속 공격을 이어갔다.

    그러나 이미 차채은의 머릿속에서 게임 상황은 온데간데없었다. 고개를 돌려 게임에 집중하고 있는 최지훈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겼다!”

    최지훈이 처음으로 차채은을 이긴 기쁨에 고개를 돌렸다. 눈물을 글썽이는 그녀를 보곤 패드에서 손을 뗐다.

    “왜 울어.”

    “안 울어.”

    최지훈이 차채은이 떨어뜨린 눈물을 닦았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의 손을 피하곤 스스로 눈물을 닦았다.

    “다시 해. 방심하게 해놓고 이기는 게 어딨어.”

    “이긴 건 이긴 거지.”

    “빨리 골라. 이번엔 진짜 안 봐줄 거니까.”

    “이겼으니까 그만할래.”

    최지훈이 한 번 이기고 빠지려고 하자 약이 오른 차채은이 항의하기 위해 시선을 옮겼다.

    “뭐 하고 놀지 코스 짜자.”

    “뭐래.”

    “훈련소 들어가기 전까지 많이 놀려면 생각해 둬야지.”

    최지훈이 스마트폰을 펼쳤다. 이것저것 검색해 보기 시작한 그를 보던 차채은이 괜히 딴지를 걸었다.

    “누가 오빠랑 논댔어? 나도 볼일 있어서 가는 거야. 바빠.”

    “바빠?”

    최지훈이 시무룩하게 되물었다.

    차채은이 신경 쓰지 않고 게임을 진행하자 한마디 덧붙였다.

    “난 데이트하고 싶은데.”

    모니터를 보고 있던 차채은의 눈이 동그랗게 되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눈썹을 들어 올리고 미소 짓는 그를 눈에 담자, 겨우 다독였던 가슴이 또다시 울컥하고 말았다.

    목 아랫부분이 묵직해진 탓에 차채은은 겨우 제 목소리를 냈다.

    “데이트?”

    “훈련소 들어가면 한 달이나 못 보잖아.”

    때론 장난스럽게.

    때론 상냥하게.

    때때로 진지하게.

    그러나 항상 따뜻하게.

    그는 이번에도 달콤한 말을 꺼냈다.

    차채은이 결국 참았던 눈물을 쏟고 말았다.

    큰 눈망울에서 닭똥처럼 떨어지는 눈물에 최지훈이 당황했다.

    “왜 울어. 응?”

    차채은이 소리 내 울고 싶은 걸 참고자 입을 꼭 닫았다.

    “데이트 싫어?”

    싫다니. 그럴 리가 없었다.

    차채은은 자기가 왜 울고 싶은지 조금도 모르는 최지훈이 원망스러웠다. 울기 싫어서 꼭 다물고 있던 입술 사이로 꺽꺽 울기 시작했다.

    “끅. 대체 끄으읍. 왜 그래? 끕.”

    “뭐가? 응?”

    최지훈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려 했지만, 그녀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최지훈의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친 차채은이 울먹이며 따졌다.

    “알면서. 왜 그러냐고.”

    그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녀를 들었다 놓았다.

    갑자기 손을 잡는다든지, 얼굴을 들이민다든지, 아무렇지도 않게 마시던 음료수를 가져가 마신다든지.

    이유도 없이 무엇을 선물하기도.

    원고에 파묻혀 있을 때 불쑥 나타나 어깨와 머리를 주물러 주기도 했다.

    마치 속마음을 들여다보고 있기라도 하듯.

    손을 잡고 싶을 때면 따뜻한 온기를 전해주었고, 멍하니 그를 보고 있을 때면 싱긋 웃으며 얼굴을 가까이 내밀었다.

    마주한 그 눈이 참 좋았다.

    보고 싶을 때마다 찾아와 전해주던 유치한 물건이, 뭉친 근육을 풀어주던 어설픈 손놀림이.

    번번이 그녀를 설레게 했다.

    자주 전화한다는 말도.

    데이트하자는 말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몰라서 그래. 내가 뭐 잘못했어?”

    최지훈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가 우는 것이 싫었다.

    무엇이든 고칠 수 있었다.

    함께 웃을 수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었다.

    “헷갈리게 왜 그러냐고! 왜 자꾸 잘해주는데! 왜 자꾸!”

    차채은이 간격을 두었다.

    친하니까. 친구니까. 동생이니까.

    그런 대답을 들을까 봐 겁먹어 묻지 못했던 말을 마침내 꺼냈다.

    “그렇게 놀리면 재밌어?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왜 사람 헷갈리게 하는데!”

    차채은의 외침에 쿠키를 가지고 오던 집사가 멈칫하더니 슬쩍 뒤돌아 왔던 길로 돌아갔다.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승무원들은 집사가 눈치를 주어 자리를 피했다.

    단둘이 남은 객실.

    차채은은 요동치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마침내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꺼낸 탓에 이젠 어쩔 도리가 없다고. 그리 생각하면서 손을 떨었다.

    최지훈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사라졌다.

    “내가 놀리는 것 같아?”

    그녀는 답하지 못했다.

    화를 내는 그는 처음 보았다.

    목소리도 그의 눈도 너무나 올곧아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그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차채은은 입을 뻐끔거릴 뿐, 이번에도 답하지 못했다.

    “그러면 너는? 나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왜 자꾸 웃어? 왜 그렇게 걱정스럽게 봐? 왜 항상 듣고 싶은 이야기 해주는데?”

    최지훈이 차채은의 양팔을 붙잡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시작은 피아노를 잘 치는 아이였다.

    수줍음이 많고 눈물도 많고 가끔 엉뚱한 말을 꺼내기도 했다.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조금씩 귀여운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아는 동생이었을 뿐.

    학교를 마치면 배도빈과 함께 음악을 말하면서, 게임을 하면서 성장했다.

    죽이 잘 맞은 탓일까.

    셋은 곧 서로에게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친구가 되었다.

    어렸을 적부터 음악가로 활동한 탓에 또래 친구가 없던 배도빈에게도, 모든 것에 완벽해야 했던 탓에 마음을 붙일 친구가 없었던 최지훈에게도, 수줍음이 많아 또래 사이에선 항상 조용했던 차채은에게도.

    셋이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도 즐겁고 편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최지훈은 자신을 보며 웃는 차채은에게 눈을 빼앗기고 말았다.

    걱정하며 건넨 말에 가슴이 뛰었다.

    주고받은 메시지를 몇 번이고 반복해 읽게 되었다.

    최지훈이 피아니스트로 자리 잡고.

    차채은이 칼럼을 쓰면서 함께하는 시간은 줄어들었다.

    그 무렵부터 최지훈은 오늘은 차채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했다.

    잠들기 전 보낸 메시지는 끊임없이 이어졌고,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도 힘들면 전화를 했다.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몇 시간씩 재잘대다가 통화가 이어진 핸드폰을 켜두고 잠든 날이 헤아릴 수 없었다.

    어느 순간 손을 잡고 싶었고.

    어느 순간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다 항상 턱선에 머물러 있던 그녀의 곱슬머리가 어깨에 닿고, 가슴을 덮었을 때야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좋아해.”

    차채은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가슴속에서 터진 감정이 온몸으로 번져나갔다.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기분이었으나 그것이 기쁨의 한 종류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안도와 다행.

    그것을 넘어서 전율과 환희에 벅차오른 마음이 그녀를 움직였다.

    차채은이 최지훈을 안았다.

    “나도.”

    자신의 등을 감싸는 그의 온기를 느끼며 말했다.

    “나도 좋아. 좋아해.”

    최지훈이 숨을 길게 내쉬고 눈을 감은 채 할 수 있는 한, 그녀를 소중히 안았다.

    몰래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집사가 눈물을 훔쳤다.

    태어났을 때부터 그를 지켜봐 왔던 그는 비록 고용된 입장이었으나 진실로 그를 대했다.

    자신을 친할아버지처럼 따르는 최지훈이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때론 안쓰러워하기도, 때론 자랑스레 여기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비로소 오랫동안 키워온 사랑을 확인하니 기쁘기 그지없었다.

    잠시 후.

    최지훈과 차채은은 슬며시 손을 풀었다. 벅차올랐던 감정이 조금 진정되자 쑥스러움과 함께 민망해졌다.

    괜히 가죽 시트에 실밥이 몇 개 있는지 세어본다든지 목이 마르지도 않으면서 물을 홀짝였다.

    “게, 게임 계속할까?”

    “어, 어.”

    두 사람은 부끄러움을 잊기 위해 멈췄던 게임을 다시 시작했다.

    집중할 수 없었다.

    게임은 하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슬쩍 시선을 옮겼고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황급히 모니터를 보게 되었다.

    “왜, 왜 자꾸 봐.”

    “자기도 봤으면서.”

    “오빠가 보니까 그렇지.”

    “내가 언제?”

    툭툭 던진 말과 쑥스러워하는 얼굴에 풋풋함이 묻어나왔다.

    그 광경을 조심히 훔쳐보던 승무원과 집사는 그저 흐뭇할 뿐이었다.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티격태격한 최지훈과 차채은은 한국에 도착한 뒤로도 어색하게나마 함께했다.

    아침 일찍 최지훈의 집에서 만나 차를 마시고, 게임을 했다.

    점심을 먹고 난 뒤에는 차를 몰고 서울을 벗어나 드라이브를 즐겼다.

    한적한 곳에서 내려 주변 경치를 감상하면서 걸었다.

    따스한 햇볕 아래 초목이 푸른 6월의 숲은 때때로 작은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이 바람과 재잘댔고.

    발을 내디딜 때마다 모래가 간지럽다며 웃었다.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마다 그 소리를 정겹게 즐겼다.

    한시도 쉬지 않고 떠들던 전과는 달랐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뒤로는 대화 사이에 조금씩 간격이 생겼다.

    싫지 않았다.

    그저 그를, 그녀를 곁에 두고 걷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하고 싶은 말을 했고.

    그러지 않을 땐 목소리가 아닌 눈으로, 냄새로, 촉감으로 그녀를, 그를 느꼈다.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의 손등이 스쳤다. 그럴 때마다 차채은의 가슴은 터질 것만 같았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즈음,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를 갈망한 최지훈이 손을 잡았다.

    차채은은 입을 꼭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좋다. 이상했다.

    어색했다. 기뻤다.

    한동안 또 말없이 걷던 중 차채은이 입을 열었다.

    “내일 진짜 괜찮아?”

    대체 복무도 걱정되었지만 우선 코앞으로 다가온 군악대 선발시험에서 떨어져야 했다.

    “응. 연습했어.”

    최지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장담하니 차채은이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럼 어떡해. 못 쳐야 하잖아.”

    “응. 틀리는 연습.”

    “어?”

    “틀리려고 해봤는데 잘 안 되더라구. 지금까지 정확하게 연주하려고만 했으니까.”

    두 사람이 걸음을 멈췄다.

    “그래서 틀리게 고친 악보로 연습했어. 이제 그게 진짜인 거 같아.”

    “그게 뭐야.”

    차채은이 웃었다.

    군악병 피아노 부문의 과제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중 한 곡과 초견곡(악보를 처음 본 상태로 연습 없이 연주하는 곡) 하나였다.

    후자의 경우 어쩔 수 없었지만 과제곡 하나는 미리 준비할 수 있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의 경우 손에 익을 대로 익어 좀처럼 틀리게 연주하기 어려웠다.

    달리 연주하려 해도 자꾸만 몸이 먼저 반응했다.

    때문에 최지훈은 애초에 몇몇 부분을 어색하게 고쳤고, 그 악보로 다시금 손에 익혔다.

    틀리기 위해 연습해야 한다니.

    도대체 그전까지 얼마나 몸에 익혔기에 가능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같은 곡도 악보별로 연습했을 정도니까.’

    차채은은 다른 피아니스트가 조금 전 최지훈이 한 말을 들으면 크게 좌절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럼 내일은 시험만 보는 거야?”

    “성신 형이 차 마시자고 했어. 오후에는 끝날 것 같으니 잠깐 보고 오려고.”

    차채은은 고개를 끄덕일 뿐 말하지 않았다.

    최지훈이 빙그레 웃으며 맞잡은 손을 크게 휘둘렀다. 그 나름대로 기쁜 마음을 표현한 행동이었지만 차채은은 주변에 누가 보고 있진 않은지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자 최지훈이 하는 대로 몸을 맡겼다.

    “참. 아버지한테 자랑해도 돼?”

    “뭘?”

    “우리 사귀는 거.”

    차채은의 얼굴이 붉어졌다.

    잠시 고민하더니 퉁명스레 말했다.

    “……사귀자고 하지도 않았으면서.”

    최지훈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것으로 충분했지만 차채은은 좀 더 확실하길 바랐다.

    그의 미소와 온기, 다정한 말로도 충분히 사랑받고 있음을 알 수 있었지만 그를 향한 마음은 만족을 몰랐다.

    타오르는 불꽃처럼 더 많은 것을 양분으로 삼고 싶어 했다.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고.

    더 많이 같이 있고 싶었고.

    더 가까이 있고 싶었다.

    메시지를 나눌 때 하트도 넣고 싶었고 같이 찍은 사진을 방에 놓고 싶기도 했다.

    최지훈이 멈춰 섰다.

    손을 놓지 않은 탓에 차채은이 반쯤 돌아섰고 눈을 마주했다.

    “나 네 남자친구 하고 싶은데. 넌?”

    차채은이 입을 꾸물거렸다. 바보처럼 웃을 것 같아 필사적으로 표정을 관리했다.

    “글쎄?”

    차채은이 손을 좌우로 움직였다.

    그간 일을 생각하며 한 번 놀려줄 생각이었지만, 최지훈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본인의 마음을 확신하듯.

    그저 방실방실 웃을 뿐이었다.

    괜히 심술이 낫다.

    “훈련소 다녀오면 생각해 볼게.”

    “싫어.”

    차채은이 도도한 척했지만 소용없었다. 최지훈이 손을 놓고 그녀를 뒤에서 안았다.

    귓가에 그의 목소리가 깊고 아늑하게 울렸다.

    “내 여자친구 돼 줄 거지?”

    차채은의 완패였다.

    그녀가 다죽어 가는 목소리로 패배를 시인했다.

    “……응.”

    * * *

    군악병 선발시험 심사위원들은 병무청장과 장성급 인사, 국회의원들로부터 크게 압박받고 있었다.

    심사위원들에게는 그들만으로도 충분히 압박이었지만, 그 뒤에 누가 있는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탓에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최지훈의 경우 이름은 들었어도 잘 모르는 사람도 있는 반면.

    그의 부친 최우철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한때 WH전자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EI전자에 사원으로 입사.

    배경도 자본도 없이 재직 19년 만에 사장직에 오른 최우철은 현재 영국과 유럽 시장을 장악한 거물 중의 거물이었다.

    최우철이 어떻게 그 자리에 올랐는지,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를 아는 사람 모두 최우철을 위험한 사람으로 여기고 두려워했다.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 불만을 토로했다.

    “굳이 이걸 공개해야 합니까? 대체 왜요?”

    “쓰읍. 거, 말조심하게.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

    “제가 뭐 다른 마음 먹고 말씀드립니까? 비공개로 하면 쉽게 떨어뜨릴 수 있잖습니까. 공개했다가 더 난리 나요. 최지훈 피아노 잘 치는 거 어느 누가 모른다고. 안 그래요?”

    “그리하라고 하시는데 뭐 어쩔 거야. 자네도 말씀 못 드리니까 여기 와 있는 거 아니야.”

    불만을 꺼냈던 심사위원의 말문이 막혔다.

    그의 말대로 위에 건의하기 두려웠기에 그저 답답한 심정이나 풀고자 꺼낸 이야기였다.

    “그쪽도 생각이 있으면 적당히 하겠지. 불평할 시간 있으면 그럴싸한 이유나 생각해 둬.”

    심사위원들이 다들 공감했다.

    내부에서는 이미 최지훈의 탈락을 정해두었지만 적어도 외부에 그렇게 비쳐서는 안 되었다.

    그들은 그저 최지훈이 의심받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연주해 주길 바랐다.

    그런 뒤에 애석함을 내비치며 그럴듯한 이유로 탈락시킬 생각이었다.

    분명 그리 생각했는데.

    모든 일이 틀어지고 말았다.

    * * *

    “최지훈 씨, 첫 순서예요.”

    “네.”

    안내를 받아 발을 옮겼다.

    낡은 체육관에서 연주하는 건 처음인데 울림이 어떨지 모르겠다. 소리가 반사되는 게 심해서 음량을 적당히 조절해야 할 것 같다.

    ‘아, 이러면 안 되지.’

    오늘은 잘하는 거 금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은 몰라서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단상에 서자 가장 앞에 심사 보시는 분들이 앉아 계시고 그 뒤에 참가자들과 그 가족들이 함께 있다.

    ‘콩쿠르랑 똑같네.’

    장소가 생소할 뿐.

    다들 진지한 표정이라 콩쿠르에 참가하고 다닐 때가 생각났다.

    지금도 그때도 너무나 즐거웠다.

    오늘은 그런 시간을 위해서라도 못 쳐야 한다.

    “안녕하세요. 최지훈입니다.”

    심사위원분들께 인사하자 한 분이 마이크를 잡으셨다.

    “베토벤 소나타 1번?”

    “네.”

    “……들어보죠.”

    왜 선택했는지, 어떻게 해석했는지 이것저것 물어보실 줄 알았는데 바로 연주하는 모양이다.

    질문을 예상해 보고 답변을 준비했는데 아쉽다.

    오늘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번 F단조. 조금 틀린 것.

    이 상황이 조금 재밌어서 자꾸만 웃게 된다.

    ‘나비 말고 다른 피아노 연주하는 건 오랜만이네.’

    나비를 데려올 걸 그랬다.

    “흐음.”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뱉어 가슴을 다독이곤.

    건반을 눌렀다.

    지붕을 타고 떨어지는 빗방울.

    책상 앞에서 악보와 씨름하던 베토벤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창문을 두드리는 불규칙한 소리가 마치 누군가의 눈물처럼, 하소연처럼 울렸다.

    ‘얘는 좀 지친 것 같아.’

    피아노 소리가 탁하다.

    조율은 되어 있지만, 소리가 미세하게 흩어지는 것이 오랜 시간 무리하게 다뤄진 것 같다.

    조금 더 상냥하게 다뤄야지.

    손가락 끝에 힘을 주지만 손목과 팔꿈치는 풀었다.

    소리가 명확하게 나되 다치지 않도록.

    이제, 괜찮은 것 같다.

    오늘 처음 만난 피아노가 제법 베토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다.

    옷이 맞지 않아 불편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핀을 꽂는 정도로 충분히 멋진 태를 낸다.

    ‘베토벤은.’

    피아노 소나타 1번을 스승 하이든에게 헌정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아버지를 여읜 뒤에야 비로소 빈에서의 음악 생활을 할 수 있었고.

    당대 최고의 대가였던 요제프 하이든에게 음악을 배울 수 있었다.

    도빈이 말로는 두 사람이 그렇게 친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하이든은 베토벤이 만든 악보를 보려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에 불만을 가진 베토벤이 숙제를 똑같은 악보로 제출하니, 하이든이 크게 화를 냈다고.

    생각해 보면 인정받고 싶었던 제자와 너무나 아끼면서도 티 내고 싶지 않았던 스승 같다.

    도빈이는 하이든을 탓했지만 내가 보기엔 두 사람 모두 귀여운 구석이 있다.

    그렇게 티격태격하던 중.

    베토벤이 스승에게 헌정한 곡이 바로 이 1번 소나타.

    그의 삶을 모두 알 순 없어도.

    이 곡만으로도 당시의 그가 얼마나 슬퍼했는지, 실의에 빠져 있는지 알 수 있다.

    피아노와 침대, 책상뿐인 방에서 악보를 고치길 반복했던 그에게 빗소리가 어떻게 들렸는지 전해주는 곡이다.

    그에게 빗소리는 이렇게나 처량하고 안타깝다.

    1악장의 알레그로(allegro: 빠르고 경쾌한).

    이렇게 가슴 아픈 멜로디를 빠르고 경쾌하게 연주하라니.

    그만큼 그가 힘들었다거나.

    어쩌면 그 슬픔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최지훈은 흡족하게 연주를 마쳤다.

    너무 완벽하게 연주하면 탈락할 수 없고, 혹시나 떨어져도 참가자들이 이상하게 여길 터였다.

    반면 너무 못하면 되레 의심받을 것 같았다.

    그래서 네 개 악장에서 하나씩 엉뚱한 음표를 넣어두었다.

    연주하면서도 거슬렸지만 그래도 나름 타협점을 잘 찾은 것 같았다.

    병무청에서 제시한 초견곡도 적당히 어설프게 연주한 것 같았다.

    그런데.

    연주를 마친 최지훈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

    참가자 대기석에 앉아 있던 이들과 그 가족들이 박수를 보냈다.

    클래식 음악은 공연자를 존중하는 문화가 있기에 어느 정도의 호응은 당연하지만 몇몇은 눈물을 훔치기도, 참가자로 보이는 몇몇은 좌절한 듯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

    깊이 감동한 그들의 진심 어린 박수가 최지훈을 당황하게 했다.

    아니나 다를까.

    심사위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합격시키라고 했으면 안 보고도 해줄 텐데.’

    ‘쯥. 욕깨나 먹게 생겼어.’

    ‘생각 있으면 못 칠 거라며.’

    ‘이런 연주를 어떻게 떨어뜨리라는 건지. 거참.’

    ‘장군님 지시만 아니었으면 꼭 들이고 싶은데.’

    심사를 맡은 군악대 지휘자, 관악 지도자, 선별되어 지원 나온 대학교수들은 최지훈이 의도한 엉뚱한 음표를 크게 생각지 않았다.

    복귀 이후 단 한 번의 실수도 스스로 용납하지 않았던 최지훈에게는 큰일이었지만.

    본디 실연에서 타건 미스는 으레 있는 일이고 공연의 일부로 취급되었다.

    다만 뛰어난 연주자는 실수를 저질렀을 때 그것을 자연스레 승화시켰다.

    생각지 않은 곳에서 몇 번의 오류가 있었지만, 최지훈의 연주는 그 작은 실수로는 덮을 수 없이 훌륭했다.

    시험 장소를 고려해 소리가 겹쳐 울리지 않도록 했으며, 피아노 상태를 따져 음을 단단하게 잡았다.

    그뿐이랴.

    눈을 감고 있으면 소나기 내리는 날 창가에 앉아 깃펜을 놀리던 악성이 떠올랐다.

    창가에 떨어진 소리가.

    땅에 닿아 부서진 빗방울이 그가 속으로 흘린 눈물처럼 들렸다.

    피아노 특기병을 지원한 사람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최지훈이 나섰단 소식을 들었을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일단 한 자리는 비워두고.’

    ‘잘하긴 진짜 잘한다.’

    ‘최지훈이 미스를 냈으면 컨디션이 안 좋다는 건데, 그런데도…….’

    최지훈은 퀸 엘리자베스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중도 하차한 뒤로 재활에 힘썼다.

    1년 넘게 공백을 가지고 돌아온 그는 스승 크리스틴 지메르만의 이름을 계승하듯 완전무결한 연주를 해냈다.

    그 많은 공연을 하면서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었다.

    피아니스트 사이에서는 가우왕이나 최지훈이나 괴물이긴 마찬가지였다.

    그 누구도 가우왕, 막심 에바로트, 배도빈,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와 함께 현세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다섯 명 안에 꼽히는 최지훈을 경쟁 상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몇 번 미스를 냈으니, 참가자들 대부분은 바쁜 일정 중에 무리하게 참가한 탓으로 여길 뿐이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탈락 이유를 찾을 수 없어 낙심한 심사위원.

    처음부터 그를 경쟁 상대로 여기지 않아 감격한 응시자들.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최지훈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그날 저녁.

    심사를 마친 위원들의 고민은 깊어졌다.

    응시자 모두 학부생 또는 이미 프로 피아니스트로 활동 중이었기에 결코 기량이 떨어지지 않았다.

    되레 반드시 군악대에 들어가겠단 일념으로 평소 기량 이상을 뽐낸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최지훈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를 탈락시킬 이유를 만들어 보려고 머리를 모았으나 마땅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최고 점수와 최하 점수를 제외한 나머지 점수의 평균 점수로 순위를 매겼기에 한 사람이 독박을 쓰는 방법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최지훈의 연주를 폄훼하자니 군악대 지휘자와 교수들은 그들의 명예 때문에 꺼려졌다.

    방법은 하나뿐.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돌립시다.”

    “예?”

    “다 최고점 줘버려요. 모두 기준선 이상의 기량을 보여줬다고. 그래서 뺑뺑이 돌리면 그나마 덜 욕먹을 거 아닙니까.”

    “그게 무슨.”

    다들 그의 제안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분명 정해진 인원이 있었고 최고 득점자부터 선발하는 것이 원칙이고 관례였다.

    더군다나 모든 응시자에게 최고점을 주는 건 심사위원들의 자질에 문제가 있음을 보이는 일이었다.

    “다는 좀 그렇고. 7명 뽑으니까 딱 10명만 최고점 줍시다. 탈락할 3명 중에 최지훈을 넣고.”

    고민은 깊었으나 반론은 없었다.

    그보다 나은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합시다.”

    심사위원단이 추첨 조작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 * *

    선발 시험 결과 발표일.

    일주일간 불안에 떨던 최지훈이 차채은과 함께 병무청 홈페이지를 확인했다.

    잔뜩 긴장한 채 마우스를 누르자 최지훈이 받은 점수가 떠올랐다.

    그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어?”

    차채은이 모니터를 잡고 얼굴을 가까이 댔다.

    눈을 비비고 봐도 모든 심사위원에게서 만점을 받았단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왜 만점이야?”

    차채은이 소리쳤다.

    틀리게 고친 악보로 연습까지 했다던 남자친구가 현역으로 입대하게 생겼으니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도 맞은 듯했다.

    “틀렸다며. 어떻게 된 거야? 어?”

    최지훈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입꼬리가 한껏 내려간 그의 얼굴은 당장에라도 울 것 같았다.

    “틀렸단 말이야.”

    “그럼 왜 점수가 이런데? 대체 어떻게 한 거야? 제대로 틀렸어?”

    “응. 네 군데나.”

    “네 군데?”

    “응. 악장마다 음 하나씩 다르게 넣었단 말이야.”

    차채은이 기가 막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상하다.”

    최지훈이 페이지 새로고침 버튼을 반복해 눌렀다.

    “프로도 그보단 많이 틀리겠다! 어떡할 거야! 군대 가면 힘들다잖아! 막 훈련하고 그런다잖아!”

    차채은이 바둥바둥 댔다.

    최지훈을 못 보는 것도 싫었고 그가 고생하는 것도 싫었고 이 피아노 바보가 기껏 음표 네 개만 틀릴 줄은 상상도 못 한 자신이 싫었다.

    “지금 웃을 때야?”

    차채은이 금세 웃는 얼굴로 돌아본 최지훈에게 역정을 냈다.

    “봐봐.”

    최지훈이 손으로 모니터 한쪽을 가리켰다.

    [군악병 입대 선발 시험 관련 공지]

    피아노병 선발 시험에 응시한 장병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

    국군은 7월 6일 입대하는 장병 중 육군 5명, 해군 1명, 공군 1명 총 7명을 피아노 특기병으로 선발하고자 지원 인원을 모집, 6월 10일에 선발 시험을 치렀습니다.

    응시자 47명이 보여준 뜨거운 열정에 심사단은 숙고하였으나 기준에 훌륭히 부합한 상위 10명의 응시자 중 우열을 가릴 수는 없었습니다.

    10명 중 7명을 추첨하오니 익일 오전 중으로 발표될 합격자 명단을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차채은이 공지문을 보곤 눈썹을 좁혔다.

    “만점 받은 사람이 10명이나 되는 거야?”

    “그런가 봐. 아, 동점인 사람이 있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네. ……아니지. 그럼 오빠는 합격해야 하는 거 아니야? 만점이면 동점이라도 1등이잖아. 추첨하더라도 마지막 자리만 두고 해야 하지 않아?”

    상황을 보면 상위 10명이 점수가 같아야만 했다.

    “추첨도 이상한데. 왜 굳이 추첨으로 하지? 동점이 나오는 게 더 이상한데.”

    “다들 잘하긴 하더라. 기준이 생각보다 낮은가 봐.”

    입장상 어떻게든 좋게 생각하려는 최지훈이었다. 차채은도 마찬가지라 이내 의심을 접었다.

    반면 응시자 사이에서는 말이 나오고야 말았다.

    10명의 점수가 같은지, 어떻게 같을 수 있는지 항의성 질문이 병무청으로 쇄도했다.

    그러나 누구도 최지훈에게 비리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만약 비루한 실력의 피아니스트였다면 이러한 방식을 이용할 수 있다고 의심했겠지만, 6월 10일 시험장에 있었던 모든 응시자가 그의 연주를 들었던 탓에 조금도 의심하지 못했다.

    그렇게 실체 없는 의심은 금방 시들해졌고.

    최지훈이 떨어진 것이 확정되면서 추첨에서 떨어진 두 사람도 권력자의 아들 최지훈도 떨어질 정도로 공정했다며 스스로 위로했고.

    모든 참가자는 그들이 본래 받은 점수로 합격 여부가 정해진 사실을 알 수 없었다.

    “만세!”

    “만세!”

    이틀간 추첨에서 떨어지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던 어린 커플은 두 손을 번쩍 들고 기뻐했다.

    * * *

    한국에 잠시 방문한 최우철은 만나자마자 군악병 선발 시험을 준비하고 결과가 나오기까지 얼마나 긴장되었는지 역설하는 아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정말 운이 좋았어요.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니까요?”

    “그렇구나.”

    “정말이에요. 다른 참가자들이 잘해줘서 정말, 정말 다행이에요.”

    최우철이 웃음을 흘렸다.

    때마침 틀어둔 TV에서 뉴스가 전해졌다.

    -한편, 얼마 전 화두에 올랐던 배도빈 베를린 필하모닉 악단주, 최지훈 피아니스트와 관련하여 대체 복무 제도에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본인 이야기가 나오자 최지훈이 TV 화면에 시선을 두었다.

    -한 인권 단체는 과거 바른청년단이 군에 입대해야 했던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견해를 내놓고 있습니다.

    뉴스 보도에 집중한 최지훈이 젓가락질도 멈추었다.

    -또 한국 클래식 음악 협회에서는 과거 손흥진 선수가 기초 군사 훈련을 이수하고 팀 활동을 받을 수 있었다는 점을 예로 들며, 최지훈 피아니스트가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활동할 수 있게 조처해 달라고 진정을 넣었습니다.

    최지훈이 다시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마우신 분들이네요.”

    “그러게나 말이다.”

    최우철이 씩 웃으며 수저를 들었다.

    -일각에서는 최지훈 씨의 대체 복무 지역을 결정하는 것은 병무청장의 권한이며, 반드시 한국 내에서 복무해야 할 법적 근거가 미비하단 주장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최우철이 덤덤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이제 걱정은 접어두고 돌아갈 생각만 해. 대체 복무 이야기해 두었으니까.”

    “네?”

    “이 아빠가 아들 가만히 내버려 둘 줄 알았느냐. 훈련소 4주만 참아라. 무리하지 말고.”

    “아버지!”

    최지훈이 벌떡 일어나 최우철을 껴안았다. 다 큰 아들이 와락 안자 그의 기분이 썩 좋아졌다.

    잔뜩 신난 최지훈이 스마트폰을 펼쳐 배도빈과 차채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렇게 좋으냐?”

    “네! 계속 같이 있을 수 있잖아요. 팬들도 계속 볼 테고.”

    최우철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식사를 이어나갔다.

    비록 아직 순진하고 어설픈 구석이 있지만 적어도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에서 꾸준히 노력해 나가는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최지훈도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가 아버지의 기분이 좋은 걸 확인하곤 입을 뗐다.

    “저도 좋은 소식 하나 있는데요.”

    최우철이 말해보라는 뜻으로 눈을 껌뻑이자 최지훈이 쑥스러워했다.

    “채은이랑 사귀어요.”

    “그래?”

    최우철이 덤덤하게 되물었다.

    축하받을 것으로 생각했던 최지훈은 예상과 다른 반응에 다소 실망했다.

    “날짜를 잡아야 하겠구나.”

    “무슨 날짜요?”

    최지훈이 시무룩하게 국을 뜨며 물었다.

    “상견례는 해야 하지 않겠니. 차승현이 번호가 어디 있더라.”

    “큽!”

    최지훈이 잽싸게 손으로 입을 막아 식탁을 지켰다. 물을 마셔 사레들린 목을 달래고 소리쳤다.

    “무슨 말씀 하시는 거예요!”

    * * *

    [The B, 또다시 전율의 무대]

    [콘세르트허바우에서 노래하는 블러드 와인]

    [배도빈, 전설을 넘어서]

    6월 28일, 베를린 필하모닉의 배도빈, 나윤희가 로얄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와 합동 공연을 펼쳤다.

    2천만 명의 시청자를 기록한 이 음악회는 뛰어난 퍼포먼스로 팬들을 즐겁게 했다.

    배도빈은 베토벤 교향곡 9번 D단조(합창) 1악장을 피아노곡으로 편곡해 연주하였다.

    뒤이어 바이올리니스트 나윤희가 불새를 연주할 때는 피아노로 반주를 맡으며 사랑을 과시하기도 했다.

    지휘자 마리 얀스는 그가 피아노의 모든 가능성을 끄집어낸 듯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편 나윤희는 불새를 연주해 객석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았다가 뒤이어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연주함으로써 관객들을 또다시 재우고 말아, 그 명성을 이어나갔다.

    로얄 콘세르트허바우의 악장이자 정상급 바이올리니스트 리비우 프루나루는 나윤희의 불새가 더욱 과감해져 폐부를 관통당한 듯하다고 소감을 남겼다.

    한편 지난달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했던 배도빈, 나윤희는 다음 달 대한민국의 대한국립교향악단과 함께할 예정이다.

    -이시하라 린(아사히 신문)

    [마리 얀스 지휘 중 벨소리 울려]

    배도빈과 나윤희가 연주자로 참여, 마리 얀스가 지휘한 6월 28일 공연에서 전화가 울리는 일이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전화를 기다리는 설렘을 표현한 발랄한 프랑스풍 폴카, 에두아르두 스트라우스의 전화(Op.165)가 연주되던 중이었다.

    전화 소리가 나자 순간 연주가 멈추었고 관객들은 당황했다.

    이내 오케스트라는 연주를 다시 시작했지만 또다시 벨이 울리며 객석에서는 작은 동요가 있었다.

    이 곡을 마친 뒤 지휘자 마리 얀스는 그것이 의도된 상황이었으며 오늘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화를 건네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이 색다른 시도에 공연을 관람한 관객들은 즐거운 경험이었단 글을 커뮤니티 사이트에 올리기도 했다.

    한편 베를린 필하모닉 악단주 배도빈은 관객과 소통하고 그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마리 얀스와 로얄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가 사랑받는 이유라는 호평을 남겼다.

    [링크]배도빈 인터뷰 보러 가기

    -한스 레넌(그래모폰)

    [공연장에서 만난 반가운 얼굴, 니나 케베리히]

    [니나 케베리히, “그의 피아노는 언제나 영감을 불어넣어 준다.”]

    [가우왕, 예나왕 부부 화려한 패션 뽐내]

    [워스트 드레서 가우왕, 결혼 후 달라져]

    [가우왕, “배도빈의 음악성은 그 어떤 테크닉보다 앞선다.”]

    [가우왕, “내 옷이 뭐가 어때서.”]

    [나윤희, “암스테르담의 퍼포먼스가 인상적. 많이 배웠다.”]

    [격돌! 시카고와 로스앤젤레스]

    -07.01.2028

    오늘 오후 2시,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이 합동 공연을 하기로 발표했다.

    배도빈과 체코, 암스테르담의 협연이 큰 호응을 끌면서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풀이된다.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아리엘 얀스 감독과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를 위시한 LA 필하모닉을 상대로 북미 최고의 스타 니나 케베리히를 영입했다.

    이들의 공연은 8월 20일부터 3일간 관람할 수 있다.

    배도빈, 니나 케베리히,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가 왕성히 활동하는 한편 최지훈의 공백은 아쉬움을 사고 있다.

    4주 군사 훈련을 받은 뒤 활동을 정상적으로 재개할 수 있다고 알려진 최지훈은 7월 20일 훈련소 입소를 앞두고 있다.

    -사라 제인(리스텀)

    * * *

    7월 10일.

    암스테르담에서의 활동을 성공적으로 마친 배도빈과 나윤희가 대한민국으로 향했다.

    둘은 배도빈이 첫 정규 앨범 ‘Dobean Bae: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모음곡’의 수익으로 구매했던 예전 집에서 하루를 묵고 인사차 유장혁 회장을 찾았다.

    손자가 예비 손자며느리를 데려왔단 소식에 유장혁이 버선발로 마중 나왔다.

    “아가!”

    유장혁의 우렁찬 부름에 나윤희가 깜짝 놀라 고개를 푹 숙였다.

    “안녕하세요!”

    나윤희는 유장혁의 우람한 신체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초면은 아니었으나 90세가 넘은 나이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거늘.

    유장혁 회장의 탄탄한 근육은 삼베옷이 터질 듯 불끈거렸다.

    “갑자기 찾아 봬서 죄송합니다.”

    “아니다. 이제 가족인데 무얼 신경 쓰느냐. 어서. 어서 들어가자.”

    “이, 이거 몸에 좋다고 해서…….”

    나윤희가 조심스레 종이봉투를 들었다.

    어떻게 해서든 그의 환심을 사고 싶은 사람이 산을 이뤘지만, 유장혁은 마음의 빚을 지지 않기 위해 모든 선물을 일절 거절해 왔었다.

    그러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장손의 배우자가 될 아이만큼은 예외였다.

    “그래, 내 손자며느리가 주는 거니 받으마. 고맙다.”

    배도빈은 최대한 예의 바르게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연인과 입이 귀에 걸린 외할아버지를 만족스럽게 지켜보았다.

    “잘 지내셨죠?”

    “그래. 이 기특한 녀석아. 숙맥인 줄 알았더니 할 때는 하는구나.”

    유장혁이 배도빈의 엉덩이를 툭툭 다독였다. 워낙 힘이 좋은지라 배도빈이 앞으로 밀려 나왔다.

    “잘했다. 참 잘했어.”

    배도빈이 헛웃음 지으며 물었다.

    “대교향곡 만들었을 때도 이렇게 좋아하진 않았잖아요.”

    “암. 저 아이 데려온 게 네가 한 일 중에 제일 기특하지.”

    배도빈은 황당하기도 하고 또 그렇게 좋은가 싶어 웃었다.

    “그래, 식은 언제 올릴 테냐.”

    “아직 안 정했어요.”

    “그럼 쓰나. 서둘러야지.”

    “준비할 것도 있고 해야 하는 일도 있으니까요.”

    “그보다 중한 게 어디 있다고!”

    유장혁이 버럭 소리 질렀다.

    “이 할애비가 천년만년 사는 것도 아니고 죽기 전에 증손주는 봐야 할 거 아니냐.”

    배도빈이 유장혁의 팔뚝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돌덩어리도 이렇게 단단하진 않을 것 같았다.

    손자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팔뚝을 확인한 유장혁이 괜히 엄살을 부렸다.

    “이거 다 쓸데없다. 늙으면 아무리 관리해도 고장이 나요. 봐라. 허리가 예전 같지가 않잖느냐.”

    “누가 할아버질 92살로 봐요. 60대라 해도 못 믿겠구만.”

    쌀쌀맞은 손자에게 동정받기 어렵다고 판단한 유장혁이 예비 손자며느리를 압박했다.

    “아가, 하고 싶은 거 있으면 이 할아버지한테 다 말하거라. 뭐든 괜찮으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아들 하나, 딸 하나만 낳자꾸나.”

    “할아버지!”

    어쩔 줄 몰라 하는 나윤희를 대신해 배도빈 나섰다.

    “알았다. 알았어. 고놈 목청 한번 크네.”

    가족들이 집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비서가 유장혁 곁으로 다가갔다. 나윤희가 전한 선물을 대신 들려고 하니 유장혁이 손을 들어 보이곤 굳이 본인이 챙겼다.

    나윤희는 유장혁 회장의 자택에 어리둥절했다.

    영화에서처럼 광활한 정원을 보유한 대저택은 아니었으나 처음 보는 것들로 가득했다.

    깔끔하게 정돈된 내부에서는 알 수 없는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났다.

    정말 이곳에 있어도 되는지 부담스러웠지만, 그를 향한 마음이 굳건한 만큼 적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만 실수하지 말자고 스스로 경계할 뿐이었다.

    다행히 상차림은 평범하게 좋았다.

    여러 음식이 정성스레 준비되었지만 적어도 그녀가 모르는 음식은 없었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어서 들어라. 배고프지?”

    한편 유장혁은 나윤희가 입에 음식을 넣는 것만 봐도 흐뭇했다.

    배도빈이 입을 열었다.

    “해운 사업 확장할까 싶어요.”

    “음. 어떻게 말이냐.”

    베를린 필하모닉은 온전히 배도빈의 소유라 그가 바라는 대로 운영하고 있었지만.

    WH 해운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WH 해운의 지분은 WH 생명이 11%, 국민연금 공단이 10.7%를 차지하고 있었고 배도빈이 5.7%를 보유하고 있었다.

    최대 주주였으나 해운 사업에 지식이 충분치 못한 탓에 사업 전반은 전문 경영인을 두고 있었다.

    실질적으로 WH 해운은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WH 생명 소유자 유장혁의 지시를 받아, 전문 경영인이 꾸려나가고 있었다.

    “크루즈를 우리 악단만 운영하니까 기껏해야 적자 안 보기에 급급하잖아요. 요새 크루즈 여행 다니는 사람도 적고.”

    “흠.”

    배도빈의 말대로 해운 산업 자체가 오랜 침체기를 겪고 있었다.

    WH 해운의 실적이 매해 감소하는데 마땅한 타개책이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이번에 암스테르담에 갔더니 거기에서 묻더라고요. 크루즈 운용하는 데 어떤 어려움이 있냐고.”

    “관심이 있구나.”

    “네. 그 자리에서 이야기했어요. 크루즈 구입하기 부담스러우면 임대해 주겠다고. 암스테르담 말고도 원하는 곳이 있을 테니 그런 곳에 임대하면 좋을 것 같아요.”

    배도빈의 말대로 정박해 둔 크루즈를 임대 형식으로나마 가동할 수 있다면 적자 폭이 확실히 줄어들 수 있었다.

    “그래. 나쁘지 않겠구나.”

    유장혁이 손자를 기특히 여기며 국을 떴다.

    “그러고 보니 아가 연주가 참으로 듣기 좋더구나. 덕분에 잘 자고 있다.”

    유장혁이 수면제 기능의 4할을 보이면서도 그 어떤 부작용도 없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칭찬하자 나윤희가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나윤희는 예의를 지키면서도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려 했지만 어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유장혁은 그 모습마저 풋풋하고 순진하게 여겼다.

    ‘적어도 남 해하며 살 아이는 아니야. 저 꽉 막힌 녀석이 좋아하기도 하고.’

    “괜찮으니 편히 먹고. 더 먹어라.”

    “네. 이거 너무 맛있어요.”

    “생선 좋아하니?”

    “네. 저…….”

    “할아버지라고 해라.”

    “아.”

    “어서.”

    “하, 할아버지는 어떤 거 좋아하세요?”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지진 못했다. 서로 아는 바가 많이 없으니 묻고 답하고, 그 이상 대화가 진전되질 않으니 자꾸 새로운 주제를 찾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식사를 마친 세 사람이 서재에서 차를 마시며 좀 더 친근해진 분위기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래. 내일 지훈이랑 채은이 만난다고?”

    유장혁이 최우철과 차승현을 떠올리며 물었다.

    “네. 훈련소 들어가기 전에 한번 보려고요. 아, 둘이 사귄대요.”

    배도빈이 툭 하고 던진 말에 유장혁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두 녀석이 말이냐?”

    “네.”

    “허. 최우철이 그놈 소원 하나 이뤘구나.”

    “네?”

    배도빈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곁에 앉은 나윤희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최우철이 EI전자의 정권을 틀어쥐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차승현을 영입하기 위해 재계 전체가 움직였던 건 그들만이 아는 일이었다.

    그중 유장혁과 최우철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차승현이 때문에 결혼시키는 건 아니겠지.’

    최우철의 음흉한 모습만 알고, 아들을 끔찍이 여기는 아버지 최우철은 모르는 유장혁으로서는 그가 또 뭔가 꾸미고 있는 건 아닌지 신경 쓰였다.

    “아니다. 신경 쓰지 마라. 참, 도진이 그 녀석은 왜 요즘 전화를 안 하더냐.”

    “제 눈 고쳐준다고 공부하고 있어요.”

    “그거 기특하구나. 그래도 할애비가 적적하니 전화 좀 자주 하라 해.”

    “그럴게요.”

    배도빈이 덤덤히 대답했다.

    유장혁은 고개를 돌려 나윤희를 안심시켰다.

    “아가는 아무 부담 말고 몸 건강하기만 해라. 이 녀석이 속상하게 하면 말하고. 아주 혼구녕을 내줄 테니.”

    “네. 전화 자주 드릴게요.”

    나윤희가 웃으며 냉큼 대답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식사한 배도빈과 나윤희가 밖으로 나섰다.

    “어디 들르려고?”

    나윤희가 차에 오르고 물었다.

    최지훈, 차채은과 만나기로 한 시간은 오후 1시.

    일찍 가서 기다린다고 하기엔 8시도 안 된 이른 시간이었다.

    “장인, 장모님께 인사드리려고.”

    “아.”

    배도빈이 예전 나윤희에게 들었던 봉안당 이름을 기억해 내비게이션에 입력했다.

    차가 천천히 주행하기 시작했고 나윤희는 손가락을 꼼지락댔다.

    “일부러 안 그래도 되는데.”

    “하나밖에 없는 딸 시집보내시는데 얼마나 걱정하시겠어. 가서 인사드리고 허락도 받아야지.”

    배도빈이 다정히 말했다.

    나윤희가 작게 미소 지었다.

    봉안당에 도착하기까지 두 사람은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두 달을 꼬박 함께 있었지만 무엇을 함께할지 대화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나윤희가 차명운이 제안한 아이들을 위한 음악회를 언급했다.

    “대한국향도 아이들 신경 많이 쓰나 봐. 동요랑 만화 주제가 하자고 하시는 거 보면.”

    “시장을 확보해야 하니까.”

    국립 오케스트라 대한 교향악단은 재단법인을 설립하면서 재정적 자립을 위해 부단히 애써왔다.

    나라에서 보조해 주고 여러 단체에서 후원을 받았지만 그 탓에 그들이 바라는 형태로 운영하기 어려웠다.

    차명운과 대한국립교향악단은 같은 돈을 얻더라도 온전히 그들이 하고 싶은 음악으로 자유롭게 활동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고객층을 넓혀야만 했고, 베를린 필하모닉의 웃고 떠드는 밴드를 밴치마킹하여 어린 팬을 유치하고 있었다.

    “응. 근데 선정 곡 보면 부모들이 더 좋아할 것 같아.”

    차명운과 대한국립교향악단이 제안한 곡은 지금 아이들이 알고 있는 만화영화가 아니었다.

    현재 어린아이를 둔 80년대, 90년대생이 어렸을 적 즐겼던 것들이었다.

    나윤희가 후보곡을 떠올렸다.

    “달빛 천사 정말 재밌었는데.”

    <달빛 천사>, <캐릭캐릭 체인지>, <작은 눈의 요정 슈가>, <다! 다! 다!>, <미소의 세상>, <세일러문>, <빨간 망토 차차>, <프리큐어>, <리리카 SOS> 등등 모두 친구가 없었던 그녀에겐 소중한 추억이었다.

    단지 배도빈이 모를 뿐이었다.

    그가 눈썹을 좁히자 나윤희가 깜짝 놀라 물었다.

    “달빛 천사 몰라?”

    배도빈이 고개를 저었다.

    배도빈이 아는 만화영화는 어렸을 적 한때 영혼을 빼앗겼던 안경 펭귄과 배영빈이 보던 매니악한 부류뿐이었다.

    그나마 가장 대중적인 것이 가랜드 시리즈였다.

    “말도 안 돼. 그 명작을 어떻게 안 볼 수 있어?”

    배도빈은 달빛 천사 이야기를 시작한 나윤희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녀가 음악 외에 이렇게까지 열정을 보인 적은 처음이라 조금도 관심 없는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흥분했던 그녀가 결국 마음을 먹었다.

    “안 되겠어. 돌아가면 달래하고 얘기해서 공연할 거야.”

    “걔가 알까?”

    배도빈은 자신보다 한 살 많은 진달래가 90년대에 방영했던 애니메이션을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 모를 수가 없어.”

    나윤희가 스마트폰을 꺼내 진달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베를린은 새벽 1시 정도로 밤이 깊었지만, 평소 늦게 자는 진달래가 곧장 답했다.

    {국향에서 만화 주제곡 하기로 했어}

    {돌아가면 우리도 할래?}

    08:17 {달빛 천사 하자}

    [그게 모야??]

    [나 대감 보고 싶엉ㅠㅠ] 08:19

    배도빈이 메시지를 확인한 순간 굳어버린 나윤희에게 물었다.

    “알고 있대?”

    나윤희가 입꼬리를 내리곤 고개를 저었다. 잔뜩 풀이 죽은 모습이 배도빈에게는 너무나 귀여웠다.

    “어차피 들어봐야 하니까. 뉴튜브에 있으려나?”

    “응. 있을 거야.”

    나윤희가 추억 속의 만화영화를 검색했고 각 주제가를 틀었다.

    “이건 모티프 잘 땄는데.”

    달빛 천사의 ‘Eternal Snow’를 들은 배도빈이 음악적 개념으로 접근했다.

    “그치! 막 눈이 내리는 것처럼.”

    “이미지가 선명하네. 가사가 없어도 충분히 전달되겠는데.”

    비록 서로 다른 시간대에서 성장했지만 두 사람은 음악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렇게 얼마간.

    두 사람을 태운 차가 입력된 주소에 이르렀다.

    차에서 내려 꽃이라도 살까 고민하던 나윤희가 배도빈이 뒷좌석 문을 열자 의아해했다.

    반대편으로 돌아간 그녀는 배도빈이 종이가방을 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뭐야?”

    “빈손으로 오기 뭐 해서.”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배도빈이 따로 무엇을 챙겼다고 하니 마음이 동했다.

    나윤희가 싱긋 웃으며 팔짱을 꼈다. 천천히 발을 옮긴 두 사람이 어느 한 곳에 이르렀다.

    나병욱, 조숙자.

    두 고인이 안식하고 있었다.

    배도빈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윤희는 배도빈이 속으로 부모님께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꽤 오래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를 지켜볼 뿐이었다.

    배도빈이 천천히 자세를 바로 하고 종이가방에서 조화를 꺼냈다.

    린덴 꽃의 새하얀 꽃잎과 노란 수술, 암술이 청아한 자태로 가득했다.

    “좋아하실까?”

    나윤희가 울컥 눈물이 나오려는 걸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배도빈이 유리창을 열어 조화를 두고 다시 종이가방에 손을 넣었다.

    액자였다.

    그와 나윤희가 프라하에서 함께 찍은 사진이 담겨 있었다.

    카를교 위에서 미소 짓는 두 사람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보였다.

    배도빈이 유리창을 닫고 나윤희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손을 떨었다. 벅차오른 눈물을 뚝뚝 흘릴 뿐이었다.

    그가 비록 행복하게 살겠다는, 잘 살겠다는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어쩐지 화가 난 듯한 표정을 짓고 무뚝뚝하게 말하는 그는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이토록 다정했다.

    자신을 대할 때만큼은 그 어떤 디저트보다 달콤하게 속삭였다.

    사랑받고 있음을 알 수 있었고.

    그를 향한 사랑이 걷잡을 수 없이 부풀었다.

    행복했다.

    이제는 말할 수 있었다.

    행복하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편히 쉬시라고.

    굼뜨고 바보 같던 딸 걱정은 그만하라는 말을 되뇌고 또 되뇌었다.

    “윤희는.”

    배도빈이 입을 열었다.

    “따님은 정말 멋진 사람입니다.”

    나윤희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차분히 그리고 분명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구박받으면서도 자신을 가꿔 왔습니다. 저는 그 용기가 좋습니다.”

    가장 오래된 기억에서도.

    그녀는 느린 행동과 어눌한 말투 때문에 무시 받았다. 유치원에서도, 초등학교에서도 또래들 사이에서 그녀는 그저 답답한 아이였다.

    선생들도 그녀를 그저 조용한 아이로 여겼다.

    그 어린 마음에 외롭지 않을 리 없었다. 무섭지 않을 리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바이올린을 켰다.

    “겁이 많으면서도 해야 할 일은 반드시 하는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배도빈은 김덕배가 전해 준 이야기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슈퍼 슈바인에서 일하던 진달래가 무례한 사람에게 위협받았을 때 몸을 벌벌 떨면서, 그 작은 몸으로 그녀를 감싼 나윤희를 기억했다.

    “말을 더듬어도 할 말은 하는 용기를 가졌습니다.”

    네이즈 엔터테인먼트에서 그녀를 회유하려 했을 때도, 세계적 규모의 매니지먼트에서 거액을 제안했을 때도 그녀는 자신을 분명히 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굴하지 않는 용기도 가졌습니다.”

    첫 오케스트라 대전.

    그녀에게 불새 협주곡의 어려움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공연을 포기해야 하는 이유는 차고 넘쳤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당당히 노래하고 싶었고.

    끝내 증명해냈다.

    “따님과 함께 있으면 그 용기에 힘을 얻습니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모든 직원이 따님을 따르고 존경합니다.”

    배도빈이 나윤희의 손을 좀 더 꼭 쥐었다.

    “강인하고 현명한 따님과 함께할 수 있어 기쁩니다. 사랑합니다.”

    배도빈이 시선을 옮겨 나윤희와 눈을 마주했다.

    “행복하게 사는 모습 많이 보여드리자.”

    나윤희가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그 무뚝뚝한 사람이.

    이렇게 민망한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이 상냥한 사람이.

    자신을 사랑해 줄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배도빈이 진심을 담아서 한 간지러운 말이 그녀에게는 세상에서 달콤하고 멋지게 들렸다.

    * * *

    “끄허어엉.”

    “울지 마. 왜 자꾸 울어.”

    “억억어억억꺼헉.”

    7월 20일.

    최지훈을 배웅하기 위해 훈련소에 이른 배도빈은 최지훈에게 달라붙어 오열하는 차채은을 신기하게 보았다.

    저렇게 곡을 해대는 것은 처음이었다.

    차채은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는 나윤희만이 같이 마음 아파해 줄 뿐이었다.

    최지훈이 웃으며 차채은을 달랬다.

    “괜찮아. 4주뿐인걸. 다녀올게.”

    “흐으으어으.”

    이제 곧 들어가야 했기에 떨어지지 않으려는 차채은을 밀쳐낼 수도 없는 최지훈이 난감해했다.

    나윤희가 차채은에게 다가가 위로하자 이번에는 나윤희에게 달라붙어 서럽게 울었다.

    배도빈이 머리를 바짝 민 최지훈에게 말했다.

    “보기 좋네. 짧은 게 낫다.”

    “너도 밀래?”

    “싫어.”

    의미 없는 농담을 주고받은 형제가 피식 웃었다.

    배도빈은 명예를 세우기 위해 입소하는 형제가 자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되었다.

    그 모순된 마음이 입 밖으로 나왔다.

    “다치지 마. 무리하지도 말고.”

    “응. 가볼게. 누나, 와줘서 고마워요. 공연 잘해요.”

    “응. 너도 조심해.”

    “끄으허응어헉.”

    차채은이 나윤희에게서 떨어져 최지훈을 꽉 안았다.

    “건강해야 해?”

    “응. 너무 걱정하지 마. 사람 사는 곳이니까.”

    “끄으으응. ……전화해야 해?”

    “응.”

    최우철이 그 모습을 아주 흡족하게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시간 되었다.”

    배도빈, 차채은, 나윤희는 아버지와 함께 천천히 오르막을 오르는 최지훈을 응원했다.

    저 멀리서 전투복을 입은 누군가가 허겁지겁 뛰어 내려와 최우철에게 깍듯이 인사하는 것도 볼 수 있었다.

    * * *

    입소 6일 차.

    최지훈은 생전 처음 경험하는 일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정말 식사라고 할 수 있나 싶었던 배식도 남김없이 먹게 되었고, 생활관 동기들의 코 고는 소리에도 어느 정도 적응해 나갔다.

    몸을 제대로 씻지 못하는 것과 잔뜩 더러워진 옷, 아무리 털어도 먼지가 나오는 모포는 불쾌했지만 애써 힘냈다.

    ‘군인은 이렇게 힘들게 나라를 지키는구나.’

    자신이 그동안 정말 좋은 환경에서 살았음을 깨달은 최지훈은 앞으로 받게 될 훈련이 기다려졌다.

    비록 현역 군인이 아니더라도 4주 훈련만큼은 성실히 최선을 다해 임하고 싶었다.

    때마침 조교가 생활관 안으로 들어왔다.

    “너.”

    “78번 훈련병! 김진우!”

    “미술했다며.”

    “예, 그렇습니다!”

    “복도에 서 있어.”

    최지훈을 비롯한 훈련병들이 몇몇 훈련병이 복도에 모이는 걸 의아하게 보았다.

    ‘무슨 일이야?’

    ‘그림 그리는 애들은 왜 부르지?’

    무슨 일인가 싶어 서로에게 눈짓으로 물었으나 아무도 답을 몰랐다.

    “가자.”

    김진우 훈련병 외 4명은 2열 종대로 발맞춰 조교를 따라가던 중 연병장에 이르렀다.

    조교가 중사 계급의 남자에게 경례했다.

    “충성.”

    “얘들이야?”

    “예. 그렇습니다.”

    “자, 지금부터 연병장에 라인을 그릴 거다. 저거 끌고 흐려진 곳 채워 넣어.”

    미대 출신 훈련병들이 중사가 가리킨 라인기를 보고 황당해했다.

    석회 가루가 가득 담긴 라인기로 트랙을 선명히 하는 일과 미술이 무슨 관련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생활관에서 연병장을 보던 최지훈과 훈련병들이 황당해했다.

    그리고 다음 날.

    삑- 삑- 삑- 삑-

    삑- 삑- 삑- 삑-

    최지훈은 음악을 한다는 이유로 호루라기를 불어야 했다.

    ‘여기 이상해.’

    훈련병들은 그의 정확한 박자에 따라 제식 훈련을 받았고 점차 군대가 어떤 곳인지 인지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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