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561화 (561/564)
  • 7. 음악 여행

    “좀 더 쉬지.”

    배도빈이 일어나자 나윤희가 걱정스레 말을 꺼냈다.

    “모처럼 놀러 왔는데 시간이 아깝잖아요. 저런 건 사양하지만.”

    헐리포레스트 타워 호텔을 올려다보곤 고개 젓는 연인이 귀여웠다.

    반대로 배도빈은 웃음이 많아진 나윤희가 더욱 좋아졌다.

    “그럼.”

    나윤희가 비교적 얌전한 놀이기구를 찾으려고 디자인랜드 어플을 열었다.

    좀 더 과격한 것을 타보고 싶었지만 좋아하는 사람과 유원지에 오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기구를 타는 것보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소중했다.

    “이건 어때?”

    나윤희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그녀의 시야에 어느 곳을 응시하는 배도빈이 들어왔다.

    그를 따라 시선을 옮기자 소프트아이스크림 가게를 볼 수 있었다.

    “아이스크림 먹을래요?”

    “응.”

    두 사람이 다가가자 매장 주인이 반겼다.

    “맙소사! B잖아!”

    배도빈도 인사했다.

    “반가워요, 제프.”

    “오! 절 알아요? 제 아이스크림이 맛있기는 해도 독일까지 소문이 났을 거라곤 몰랐는데!”

    배도빈이 명찰을 가리키자 아이스크림 매장을 운영하는 제프가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어쨌든 이름을 불린 건 똑같으니 오늘은 올해 가장 행복한 날이에요.”

    배도빈이 야단스러운 팬에게 웃어주며 주문을 했다.

    “초콜릿과 딸기를 섞어 주세요.”

    “푸린 악장님께선?”

    “포도로 주세요.”

    “초콜릿과 딸기, 포도! 금방 준비하겠습니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나윤희가 귀여웠다.

    “팬들 사이에선 정말 푸린으로 불리나 봐요.”

    “…….”

    “푸린. 귀엽네요.”

    배도빈이 푸린을 검색하면서 놀리자 부끄러움을 참던 나윤희가 그를 툭 쳤다.

    나윤희는 자신이 그를 때렸음에 놀랐지만 배도빈은 그 모습이 더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왜 자꾸 놀려.”

    배도빈이 웃었다.

    그리고 예전 그녀가 최지훈이나 가우왕과의 관계를 부러워했던 것을 떠올렸다.

    “예전엔 막 대해 달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젠 알 것 같아요.”

    “어?”

    “좋다고요.”

    배도빈의 환한 미소를 본 나윤희가 소심하게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날 저녁.

    배도빈 일행은 오늘 내내 경험했던 놀라운 일들을 풀어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꼭! 이건 진짜 꼭 타야 해!”

    차채은과 진달래가 스마트폰을 들이밀며 나윤희를 압박했고.

    “이 공연 내일도 한다고 하니까 꼭 들어봐.”

    최지훈도 지지 않고 배도빈을 설득하고 나섰다.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신나서 재잘댔고 저녁 식사 시간은 좀처럼 진정할 줄 몰랐다.

    “이거 예약하면 훨씬 편해.”

    “이런 게 있었어?”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즐기기 위해 이런저런 정보를 나누던 최지훈, 차채은, 진달래, 죠엘이 나윤희를 찾았다.

    고개를 돌린 곳에 배도빈과 나윤희가 오늘 아침보다 더 가깝게 붙어 있었다.

    소파에 앉아 마주 본 채.

    배도빈은 왼팔을 소파 등받이에 걸치고 얼굴을 기대고 있었다.

    나윤희는 무릎을 모은 채 그의 사랑 가득한 눈빛을 애틋하게 마주하고 있었다.

    진달래가 소곤거렸다.

    “저렇게 죽고 못 살면서 그동안 어떻게 참았대?”

    “그러니까. 아주 꿀이 떨어져요. 꿀이.”

    차채은이 긍정하며 두 사람을 보다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방실방실 웃는 최지훈과 눈을 마주치자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하으으음.”

    마침 산타 웨인이 길게 하품을 했다.

    죠엘이 동생에게 다가갔다.

    “내일도 놀려면 일찍 자야지?”

    “네.”

    9시가 되면 항상 잠들었던 산타 웨인이 힘없이 대답했다.

    “저희 먼저 들어가 볼게요.”

    “푹 쉬세요.”

    웨인 남매가 방을 나서자 프란츠 페터도 동생을 일으켜 세웠다.

    “알, 우리도 자러 가자.”

    “조금만 더 놀면 안 돼?”

    “안 돼?”

    알베르트와 배도진이 눈망울을 그렁대며 물었지만 소용없었다.

    “안 자면 내일 못 놀 텐데?”

    프란츠가 제법 의젓하게 동생들을 달래고 배도빈에게 인사했다.

    “형, 저희 자러 갈게요.”

    “도진이도?”

    “응. 같이 잘래.”

    배도진이 알베르트의 옷자락을 쥐고 놓지 않았다.

    배도빈이 동생의 머리를 헝클이며 당부했다.

    “이 닦고 세수하고. 로션 바르고 자.”

    “응. 누나 바바.”

    “잘 자.”

    웨인 남매와 페터 형제 그리고 배도진까지 방을 나서자 차채은이 눈을 깜빡였다.

    자신과 같이 방을 쓰는 진달래를 제외하고 최지훈과 배도빈, 나윤희만 남았으니 방을 어떻게 나눈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최지훈이 양팔을 쭉 펴며 일어났다.

    “나도 들어갈게. 내일 봐.”

    “도빈 오빠랑 같이 안 자?”

    차채은의 질문에 최지훈이 웃었다.

    진달래가 차채은에게 눈치를 주었다.

    “쉿. 쉿.”

    “뭘?”

    “이럴 땐 모른 척 넘어가는 거야.”

    차채은은 진달래의 말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최지훈의 인사를 받았다.

    최지훈이 웃으며 배도빈과 나윤희에게 인사했다.

    “도빈아, 누나, 내일 봐요.”

    “들어가.”

    “내일 봐.”

    두 사람이 인사하자 진달래도 일어나 차채은을 재촉했다.

    “우리도 가자.”

    그제야 둔감한 차채은의 눈이 떠졌다.

    “둘이 같!”

    갑자기 난 큰소리에 배도빈과 나윤희가 고개를 돌렸다.

    진달래에게 입을 막힌 차채은이 흥분해 날뛰고 있었다.

    “우리 간다!”

    “읍으웁!”

    “가만히 좀 있어!”

    “우우웁웁!”

    두 사람이 결혼을 약속한 사이라는 건 알지만, 매우 보수적인 사고관을 가진 차채은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발버둥 치자 나윤희가 웃으며 다가가 두 사람을 배웅했다.

    차채은이 눈빛으로 정말 괜찮냐고 물었지만 나윤희는 그저 그 상황이 웃길 뿐이었다.

    모든 사람을 배웅하고 나윤희가 배도빈 곁에 앉았다.

    “채은이 귀엽다.”

    “어릴 때는 그랬죠.”

    “왜? 지금은?”

    “기자 다 됐어요.”

    나윤희가 이제는 제법 언론인 티를 내는 차채은을 떠올리며 웃다가 가까이 다가온 그의 숨결을 느끼곤 눈을 감았다.

    * * *

    2028년 5월 2일 화요일.

    개편된 연수 제도를 처음으로 경험할 단원들이 정기 회의를 통해 동료들에게 인사했다.

    이미 친하게 지내는 사람끼리는 누가 어디로 향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모든 단원이 공유하진 않았기에 마련된 자리였다.

    “꼭 필요한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쉬라니까.”

    가우왕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돌아올 땐 머리카락이랑 수전증 좀 고치고 오라고.”

    “학핳학학학!”

    “닥쳐!”

    마누엘 노이어와 피셔 디스카우, 진 마르코 등이 가우왕을 응원했다.

    비록 가우왕이 연수를 휴식처럼 말했으나 조금도 걱정되지 않았다.

    가우왕이 아내 예나왕만큼이나 피아노를 사랑한다는 걸 충분히 알고 있었기에 금단현상과 스트레스로 시작된 탈모나 고치길 바랄 뿐이었다.

    “저는 로테르담으로 가게 되었어요.”

    이어 제1바이올린 부수석 제이미 알렉산드라가 로테르담 필하모닉의 바이올리니스트 셀리 그린버그와 3개월간 업무교환이 예정됨을 알렸다.

    “왜?”

    단원들이 펄쩍 뛰었다.

    악명 높기로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배도빈과 함께 손꼽히는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로테르담이라니.

    그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연주해 보고 싶은 레퍼토리도 있고 또 힘들어 봤자 얼마나 힘들겠어.”

    제이미 알렉산드라의 말은 묘하게 설득력 있었다.

    어떤 상상을 해봐도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배도빈보다 상대하기 어려운 지휘자는 없을 듯했다.

    20여 년 전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신경질적인 쇳소리에 노이로제가 생겼던 단원도 있었지만 말을 삼켰다.

    이미 결정된 일.

    두 사람과는 또 다르게 단원을 괴롭히는 토스카니니의 포악함을 굳이 알려서 좋을 것 없다고 생각했다.

    단원들이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나윤희가 나섰다.

    “저는 체코랑 암스테르담, 서울에 다녀오려 해요. 좋은 경험을 먼저 얻었으니 열심히 배우고 올게요.”

    단원들이 앞선 제이미 알렉산드라를 응원했던 것처럼 박수를 보냈다.

    마지막으로 배도빈이 단상에 오르자 이자벨 멀핀이 악단주가 주문한 자료 사진을 스크린에 띄웠다.

    “첫 달은 엘리아후 인손과 함께할 예정입니다.”

    배도빈은 체코 필하모닉 지휘자 엘리아후 인손과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부터 암스테르담 로얄 콘세르트허바우의 지휘자 마리 얀스가 어떤 경험을 약속했는지, 대한국립교향악단과 무엇을 할지 상세히 설명했다.

    그런 말들이 단원들의 귀에 들어갈 리 없었다.

    그들은 흐뭇하게 웃으며 보스의 말을 흘려들었다.

    ‘좋을 때야.’

    ‘식 올리기 전에 신혼여행부터 가네. 얼마나 급했으면.’

    ‘체코에 근사한 식당 있는데. 이따 악장님께 알려드려야지.’

    ‘이맘때 암스테르담이 날씨가 변덕이 심할 텐데. 뭐, 사랑으로 극복하겠지.’

    유달리 따뜻한 시선에 배도빈이 인상을 썼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요.”

    “좋은 계획인 것 같습니다.”

    악단주가 의심의 눈초리를 풀지 않았지만 단원들은 그저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마땅히 집어낼 구석이 없었기에 석연치 않은 마음을 숨기고 다음 화제를 꺼냈다.

    “이미 전파되었지만 제가 없는 동안 전권은 세프에게 있습니다. 그와 여러분을 믿으니 안심하고 떠날 수 있고요. 돌아올 때는 파우스트와 함께할 테니 다들 기대해 주세요.”

    “오오.”

    “해마다 큼직한 거 하나씩 꺼내네. 기대할게요, 보스!”

    작년 그랜드 심포니를 준비하는 데에도 2년 가까이 공을 들였던 만큼 조금은 쉬고 싶을 법도 한데.

    의욕을 보이는 단원들이 믿음직스러웠다.

    * * *

    연수를 떠나기에 앞서.

    지난주부터 악단 내 모든 일을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카밀라 앤더슨에게 맡긴 배도빈은 한결 여유로웠다.

    찰스 브라움이 연주할 바이올린 소나타 13번과 나윤희에게 맡길 14번 소나타도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두 주인공을 세웠으니 이제는 <파우스트>의 대단원을 위한 3악장을 다듬는 일만 남기고 있었다.

    ‘올해 안에는 올릴 수 있겠어.’

    배도빈은 3개월간 <파우스트>를 완성하고 돌아와 부지런히 준비하고자 마음먹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초연이 멀지 않게 느껴져 괜히 설렜다.

    똑똑-

    “들어와.”

    최지훈의 발소리를 들은 배도빈이 그를 불렀다.

    발소리만으로 사람을 구분하는 신기에도 익숙해진 최지훈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소파에 누웠다.

    “아아아.”

    “왜 죽어가.”

    “이렇게 힘든 줄 몰랐어…….”

    배도빈이 피식 웃었다.

    어렸을 적부터 엄살을 많긴 했지만 이번만큼은 그도 최지훈이 큰일을 맡았음을 인정했다.

    “전집 내는 게 쉬울 리 없잖아.”

    “그러니까.”

    가우왕의 빈자리를 홀로 소화해내면서도 쇼팽 전집을 준비 중인 최지훈은 디자인랜드에 갔던 것마저 후회할 지경이었다.

    스승 크리스틴 지메르만의 추천으로 욕심을 냈지만 단기간에 해낼 일이 결코 아니었다.

    도리어 수년에 걸쳐 차근차근 해결해도 부족했다.

    “들을수록 잘 모르겠어.”

    최지훈이 소파에 얼굴을 파묻은 채 불평했다.

    과거 수많은 거장을 참고하는 것만으로도 수면 시간이 부족했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제르바 루빈스타인, 디누 리파티, 베노 모이세비치, 예브게니 키스, 크리스틴 지메르만, 미카엘 블레하츠, 가우왕까지 쇼팽은 무궁무진했다.

    “갔다 오면 연습곡 정도는 들려줄 거지?”

    “아으으우아으. 몰라아…….”

    확답은 듣지 못했지만 배도빈은 최지훈이 또 자신을 놀라게 해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군대도 가야 하잖아. 빨리빨리 해.”

    “너어!”

    최지훈이 발끈해 소리 질렀다.

    * * *

    유진희는 아들과 예비 며느리가 여행을 떠나기 전 손수 상을 차려주고자 했다.

    정 셰프를 비롯한 요리사들에게 하루 휴식을 주곤 직접 장을 본 그녀가 현관 앞에서 아들과 마주쳤다.

    배도빈과 나윤희도 각각 종이봉투를 들고 있었다.

    “도빈아. 윤희야.”

    “어머니.”

    고개를 돌린 배도빈이 짐을 내려놓고 유진희가 양손 가득 들고 있던 식재료를 넘겨받았다.

    “장 보셨어요?”

    “봤지. 너희도?”

    유진희가 배도빈이 내려놓은 종이봉투를 보곤 물었다.

    “저녁 차릴까 해서요.”

    나윤희가 웃으며 답하자 유진희가 웃었다.

    “세상에. 이걸 언제 다 먹는다니. 뭐 샀어?”

    “삼겹살이요. 맛있는 거 해드릴게요.”

    세 사람이 안으로 들어서며 대화를 나누었다.

    “뼈 없는 걸로 사야 좋은데.”

    유진희가 걱정스레 말하자 나윤희가 웃으며 사 온 고기를 보였다.

    오네 크녹켄 슈바이네바우흐(Ohne knochen schweinebauch: 뼈 없는 삼겹살)라고 적혀 있었다.

    “네. 이게 먹기 좋더라고요.”

    유진희가 내심 기특하게 여기며 물었다.

    “잘했네. 어디서?”

    “요 앞 레베에서요.”

    나윤희의 대답에 유진희가 안심했다. 정육점에서야 쉽게 구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삼겹살을 취급하는 마트는 많지 않았다.

    어떤 마트에서 무엇을 파는지 알고 있다는 뜻은 장을 보며 음식을 해왔다는 말이니.

    마트에 갔다 하면 매대를 쓸어 담아버리는 아들보단 살림을 잘할 것 같았다.

    배도빈이 큰 냄비와 카레 분말을 꺼냈다.

    수육 만들 때 잡냄새를 잡고자 간혹 소량을 넣기도 하지만 기세를 보니 한 봉지를 다 쏟아 넣을 심산이었다.

    유진희가 물었다.

    “카레도 하게?”

    “카레탕이요.”

    “카레 뭐?”

    유진희가 황당하여 되물었다.

    심지어 함께 장을 본 나윤희도 당황했다.

    “카레도 맛있고 갈비탕도 맛있잖아요. 고기도 많이 샀으니 푹 끓일 거예요.”

    배도빈이 냄비에 삼겹살 뭉치를 가득 담고 물을 받으려 하자 나윤희가 다급히 막아섰다.

    “왜요?”

    “이건 아니야.”

    나윤희가 고개를 저었다.

    배도빈은 그녀가 왜 자신을 말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도빈아, 엄마가 할 테니까 저리 가 있어.”

    “쉬세요. 오랜만에 직접.”

    “아니야. 나가 있어~”

    “…….”

    아들의 요리 실력을 익히 아는 유진희가 배도빈을 내쫓아 버렸다.

    풍미 있는 카레탕을 만들 생각으로 설렜던 배도빈은 황망히 주방을 바라보다가 1층 거실로 향했다.

    “너도 가서 쉬어.”

    “같이 해요.”

    나윤희가 웃으며 카레 봉지를 치웠다. 도마를 깔고 양파를 까기 시작하자 유진희가 거들었다.

    “쟤는 어쩜 음악 말고는 아는 게 없니.”

    “가끔 깜짝 놀라요.”

    나윤희가 웃으며 답했다.

    “어렸을 땐 어리니까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커서도 저러니 누가 데려갈까 싶더라.”

    유진희가 농담을 던지자 나윤희가 애써 웃음을 참곤 물었다.

    “어렸을 땐 더했어요?”

    “그럼. 도빈이가 과외 선생을 얼마나 울린 줄 알아?”

    유진희가 배도빈이 대학 진학을 위해 중학교,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준비할 때를 떠올리며 말했다.

    “울려요?”

    “왜 과학 시간에 대륙이 이동했다고 가르치잖아.”

    “네.”

    “그걸 가지고 땅이 어떻게 움직이냐고. 예전에도 똑같았다고 억지를 쓰는 거야. 교재를 보여줘도 확실한 증거를 가져오라고.”

    “흐.”

    “지질학 전공도 아닌데 아르바이트로 과외 하는 학생이 알면 어디까지 알겠어. 자기는 도빈이 가르칠 능력이 없다고 그만두더라.”

    “그때도 분명한 걸 좋아했나 봐요.”

    눈에 콩깍지가 씐 나윤희가 배도빈을 두둔했다.

    유진희는 나윤희가 아들을 챙기자 안심하고 계속 흉을 보았다.

    “또 커서는 혼자 다닌다고 해서 지하철 타고 다니라 했더니 그런 걸 어떻게 타고 다니냐고 하는 거야.”

    “어떻게요?”

    “땅에다가 그렇게 큰 구멍을 뚫었는데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것 아니냐고.”

    “흡.”

    나윤희가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야기하던 유진희도 고개를 저으며 함께 웃었다.

    잠시 그러고 난 뒤, 나윤희가 슬쩍 자신도 놀랐던 이야기를 꺼냈다.

    “저도 놀란 거 하나 있어요.”

    “뭔데?”

    “예전엔 공중목욕탕에 안 다닌 거요. 어렸을 적부터 유명했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더러워서 안 간다고?”

    “넿흐흐.”

    “정말 별꼴이야. 모르는 사람이 들어간 곳에 어떻게 들어가냐니. 애기 때는 여탕에 그냥 데리고 가잖아.”

    “네.”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녀석이 기겁을 하더라고. 눈 딱 감고 기겁을 하는데 어떡해. 돌아왔지. 나중에 커서 목욕탕 안 가려고 했던 거 기억나냐고 물으니 더러워서 싫대.”

    “지금은 또 잘 가지 않아요?”

    “그러니까 말이야.”

    나윤희가 웃으면서 냄비에 큼직하게 썬 양파를 깔았다. 그 위에 삼겹살을 올리고 뚜껑을 덮었다.

    “물 안 넣게?”

    “네. 양파에서 충분히 나오더라고요.”

    가스레인지 불을 아주 약하게 잡아두곤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유진희가 입을 열었다.

    “체코랑 암스테르담에 한 달씩 있는 거야?”

    “일정은 그렇게 잡았어요. 업무교환이 아니라서 꼭 지켜야 하는 건 아니지만.”

    유진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에 오래 있으면 좋겠다. 사돈께서도 정 붙이시려면 자주 인사드려야 할 테고. 너도 오래 못 가봤으니까.”

    이야기하던 유진희는 나윤희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것을 보고 의아해했다.

    “왜? 무슨 문제 있어?”

    그녀는 혹시나 예비 사돈이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하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나윤희가 컵을 두 손을 감싼 채 입술을 잘근거렸다.

    “혹시 아직 말씀 안 드렸니?”

    나윤희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숨을 들이마신 뒤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돌아가셨어요.”

    유진희의 얼굴에 놀람과 안타까움이 드러났다.

    어릴 적 어머니를 여읜 것은 알고 있었지만, 1년에 한 차례 정도는 아버지를 뵈러 한국에 간다고 했었다.

    대체 언제부터였을지.

    그간 소식을 모르고 지냈음에 마음이 편치 못했다.

    유진희가 나윤희의 손을 잡았다.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괜찮아요. 이미 오래되어서.”

    “언제?”

    “입단하고 얼마 안 돼서 돌아가셨어요. 그땐 말씀드리기 그래서…….”

    벌써 6년 전 일.

    유진희는 기가 막혔다.

    지금까지 새까맣게 몰랐던 것도 황당했고 자신이 그렇게 무심했나 돌아보게 되었다.

    유진희는 다른 일도 아니고 부친상을 알리지 않음을 탓하려다가 나윤희의 첫인상을 떠올렸다.

    남에게 말도 제대로 못 붙이던 나윤희가 더 안쓰러웠다.

    “도빈이는 알고 있고?”

    “네. ……저번 주에.”

    배도빈에게도 저번 주에 말했을 정도면 주변에 아는 사람이 없을 터였다.

    “미련하게 왜 그랬어. 응?”

    “그러게요.”

    나윤희가 실없이 지은 미소가 전혀 가벼워 보이지 않았다.

    “그럼 해마다 아버지 뵈러 간다는 건.”

    “제사는 아니지만 인사는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화장했거든요.”

    유진희의 애틋한 마음이 전해진 탓일까.

    지금껏 홀로 잘 버텨온 나윤희가 가슴에 담아두었던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한다고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고. 묘를 써도 관리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그랬는데.”

    나윤희의 목소리가 떨릴수록 유진희는 손을 꼭 잡아주었다.

    “정신이 없어서 뭐부터 해야 좋을지 모르는데. 화장하려면 사망진단서가 있어야 한대요. ……받고도 믿어지지 않았는데 멍청하게 있다 보니 장례도 제대로 못 하고.”

    “…….”

    “화장하기 전에 아버지 맞냐고 보여주는데. 너무……. 피부가 너무 파랗게 돼서.”

    목이 메어 마른침을 삼킬 때마다 겨우 뱉어낸 슬픔이 따라 들어왔다.

    “괜찮아. 울어도 돼.”

    유진희가 곁으로 가 등을 쓸었다.

    애써 참고 있던 슬픔이 봇물 터지듯 서럽게 흘러내렸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소식이었다.

    바로 그제만 해도 아무렇지 않게 통화를 나누던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랬던 것이.

    신원을 확인하고 아버지가 누워 있는 관이 화장터 모니터를 통해 타들어 가는 것을 보면서 현실로 다가왔다.

    유리창 너머로 하얀 재만 남고.

    그것을 담은 단지가 전한 열기를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래서헙.”

    “그래. 괜찮아. 다 토해내야 해.”

    나윤희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익히 알고 있었기에.

    유진희는 토닥이는 손에 사랑을 담아 그녀를 대했다.

    딸이 없지만. 딸로 여기자고.

    그렇게 사랑해 주자고 마음먹었다.

    * * *

    한편.

    주방에서 쫓겨난 배도빈은 할 일을 찾다가 배토벤의 어항이 지저분한 것을 발견했다.

    소매를 걷고 물을 갈아주던 그는 먹이도 주고 어항도 청소해 주겠다고 약속한 동생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빠끔-

    그 곁에서 늠름한 거북이 배토벤이 늘어지게 하품을 해댔다.

    어항을 씻고 새로 물을 채운 배도빈이 오랜만에 특식을 주기 위해 주방을 찾았다.

    절묘한 향이 그의 코를 자극했다.

    “수육 하는 거 아니었어?”

    “네. 동파육 하려고요.”

    나윤희가 고기에 칼집을 내곤 굴 소스와 조림 간장, 올리고당을 섞은 후 물을 조금 넣었다.

    유진희는 식탁에 앉아 딸이 무엇을 하는지 느긋하게 지켜보았다.

    나윤희는 칼집을 낸 수육을 팬에다 한 번 더 구운 뒤 얇게 썰어 만들어 놓은 소스와 함께 졸였다.

    “냄새 좋네요.”

    나윤희가 배도빈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치.”

    나윤희가 웃으며 물었다.

    배도빈도 따라 웃다가 그녀의 눈가가 붉어진 것을 보곤 표정을 굳혔다.

    “울었어요?”

    “으응. 아니.”

    “아니긴 뭐가 아니야. 부었는데.”

    배도빈이 나윤희의 눈 주변을 만졌다.

    “양파 때문에. 흐.”

    배도빈이 계속 의심스럽게 보자 나윤희가 괜히 고기를 괴롭히며 바쁜 척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진희가 아들에게 당부하듯 말했다.

    “우리 딸한테 잘해야 한다?”

    배도빈이 어머니와 피앙세를 번갈아 봤다. 나윤희는 영문을 몰라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유진희는 눈을 크게 뜨며 대답을 촉구했다.

    30~40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배도빈이 당연하다는 듯 약속했다.

    “그럼요.”

    * * *

    출발 당일.

    배도빈과 나윤희는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이번 여행을 위해 새로 장만한 차에 올라탔다.

    모델명 B2006의 대형 SUV는 배도빈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차로서 6톤에 이르는 무게와 640마력의 엔진을 자랑했다.

    의전용으로 상정되어 자동 소총 및 소형 폭탄에도 버텨내도록 제작된 외부는 마이바흐 특유의 진중한 풍모를 보였고.

    밝은 색상의 목재로 구성된 탁 트인 실내공간은 두 사람이 편히 쉬기에 제약이 없었다.

    “마이바흐.”

    -예, 오너. 어디로 모실까요?

    “어디라고 했죠?”

    “음…….”

    -어디라고 했죠에 대한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나윤희가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미리 예약해 둔 호텔을 확인했다.

    “아리아 호텔.”

    “프라하 아리아 호텔로 다시 검색해.”

    -체코 프라하. 아리아 호텔까지 354㎞ 주행 시작합니다.

    차량이 베를린 시내를 벗어나기도 전에 배도빈과 나윤희는 찰싹 달라붙어서 달콤한 대화를 나누었다.

    “여기는 좀 힘들 것 같은데.”

    “할 수 있어요.”

    “믿어주는 건 기쁘지만…….”

    나윤희가 말끝을 흐렸다.

    그녀의 손에는 배도빈 바이올린 소나타 14번, 너는 참으로 아름답구나(Du bist so schön)가 들려 있었다.

    불새 협주곡과 같이 왼손 피치카토를 하는 동시에 활 연주를 해야 하는 기예는 아니었지만, 멀티플 스토핑(Multiple stopping: 여러 줄을 함께 연주하는 행위)이 쉼 없이 이어지는 발전부를 어떻게 소화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더군다나 음역대 전환이 너무나도 잦았다.

    바이올린을 들었다고 상정하며 어떻게 연주할지 떠올려 보았지만 막막할 뿐이었다.

    그녀가 배도빈도 아는 이야기를 투정하듯 풀었다.

    “화음 연주는 어떻게 해도 음역이 이렇게 자주 변하면 헷갈린단 말이야. 피아노면 몰라도.”

    배도빈은 피앙세의 투정이 그저 귀여울 뿐이었다.

    너무 어려운 곡이라 난이도 조절이 필요함을 호소하던 나윤희는 그의 사랑스러운 시선에 심술이 낫다.

    “정말이야. 알잖아.”

    “알죠. 결국 해낼 거잖아요.”

    나윤희는 자신도 장담하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확신하냐고 묻고 싶었지만 이내 그 마음을 접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기대와 신뢰 그리고 호의가 가득한 탓이었다.

    배도빈도 이 곡이 얼마나 연주하기 힘든지 익히 알고 있었다.

    나윤희의 말처럼 현악기는 음을 찾기 어려운 악기였다.

    피아노와 같이 명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현과 활의 장력, 연주 공간의 습도 심지어 그날 손가락의 상태에 따라서도 음정에 변화가 생겼다.

    프렛이 없으니 같은 연주를 하려 해도 항상 같은 음을 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더군다나 음역대가 내려갈수록 줄을 더 넓게 활용해야 했다.

    한 옥타브에 해당하는 건반 수가 항상 일정한 피아노와 달리, 바이올린은 음역에 따라 한 옥타브의 길이가 달라지기에 생기는 어려움이었다.

    누구보다도 정확한 음정을 내기 위해 노력하는 나윤희로서는 ‘너는 참으로 아름답구나’가 불새 협주곡 이상으로 어렵게 느껴졌다.

    배도빈이 정답게 웃었다.

    “저번 오케스트라 대전 겪으면서 느꼈어요.”

    “뭘?”

    “찰스 바이올린을 완벽히 소화했잖아요. 바이올린 섹션이 같은 소리 내는 데도 도와줬고.”

    “그건 네가 가이드를 잘 잡아줘서.”

    “그걸 직접 연주해냈잖아요. 또 한 번 아무도 이르지 못한 곳에 가는 거예요. 그때처럼.”

    배도빈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그녀를 이끌었다.

    “그때처럼…….”

    나윤희는 고개를 끄덕이는 배도빈을 보며 첫 번째 오케스트라 대전을 떠올렸다.

    생각해 보면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든 해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 무작정 달려들었지만 참으로 막막했다.

    마치 니콜로 파가니니가 200여 년 전 바이올린 협주곡 2번 ‘라 캄파넬라’에서 왼손 피치카토를 선보이며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것을 오마주라도 하듯.

    배도빈은 불새 협주곡에서 왼손 피치카토와 오른손 보잉을 함께 요구했었다.

    왼손으로 바이올린을 받칠 수 있는 오른손 피치카토와 달리.

    왼손 피치카토는 다른 손가락으로 바이올린을 지탱하면서 남은 손가락으로 현을 튕겨야 했기에 그 장력에 의해 손가락에 무리가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도중에 활로 남은 현을 쓸어 주 멜로디를 연주하자니 처음에는 배도빈과 찰스 브라움이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결국 해냈을 때의 벅참은.

    자신의 손으로 공연을 완성했을 때의 충만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저번처럼 급하게 준비할 필요 없어요. 여행 다니면서 천천히 익혀 봐요. 같이.”

    배도빈의 다정한 응원에 나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두 사람이 체코 프라하 페트르진 공원 아래 위치한 호텔 아리아에 도착했다.

    배도빈과 나윤희를 국경에서부터 경호해 준 경찰 사이로 한 사람이 나섰다.

    “마음이 바뀌시면 언제든 이용하시라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체코 정부에서 배도빈이 편히 지낼 수 있도록 관사를 내주었으나 배도빈은 조용히 지내고 싶다며 정중히 거절했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거절하면 체코의 호의를 무시하게 되니, 배도빈은 어쩔 수 없이 관사 주소가 적힌 메모지와 열쇠를 받아들었다.

    “그렇게 하죠.”

    “필요로 하시는 물품과 서비스가 있다면 언제든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고마워요.”

    “감사합니다.”

    배도빈과 나윤희가 그들을 배웅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예쁘다.”

    “그러게요. 짐 풀고 둘러보러 나올래요?”

    “응.”

    아리아 호텔로 들어선 후 체크인을 하던 배도빈이 유독 그림과 조각상이 많이 장식된 것을 확인했다.

    그를 맞이하기 위해 직접 내려온 지배인이 웃으며 설명했다.

    “저희 호텔의 테마는 음악가와의 만남입니다. 라운지에서는 매일 공연을 하고 클래식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음향실과 자료실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네. 구하기 힘든 음원도 있으니 만족하실 겁니다.”

    “나중에 들려보죠.”

    호텔 지배인이 키를 들고 나서서 그들이 가진 가장 조용하고 안락한 방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지배인이 문을 열고 정중히 인사했고 방에 들어선 나윤희는 감탄을 터뜨렸다.

    그들이 한 달간 머물 곳은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브르트보브스카 정원과 바로 이어져 있었다.

    큰 창문이 차례로 있어 정원이 한눈에 들어왔고 소파와 의자는 막 햇빛 아래서 걷어온 것처럼 푸근했다.

    여러 그림이 장식되어 있었다.

    어머니 유진희가 보여주었던 그림의 복제품도 몇 걸려 있었다.

    배도빈이 한 그림 앞에 서 있자 나윤희가 곁으로 다가왔다.

    “멋지다.”

    “마네예요.”

    “마네?”

    화가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는 나윤희가 되물었다.

    “네. 어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화가라서 몇 번 본 적 있어요. 튈르리 정원의 음악회란 이름일 거예요. 진품은 아니겠지만.”

    한동안 그림을 지켜보던 두 사람이 시선을 옮겼다.

    금색 커튼과 샹들리에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나 이런 데 처음이야.”

    나윤희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가구들을 만져보기도 하면서 거실과 세 개의 방 그리고 두 개의 욕실을 살펴보기 바빴다.

    나윤희와 오붓하게 지내기 위해 소박한 선택을 한 배도빈도 신이 난 피앙세와 어울렸다.

    “생각보다 좋네요.”

    “엄청! 어어엄청 좋아!”

    황홀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나윤희를 보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조금 쉬다가 공원에 올라가 봐요. 니아가 페트르진 전망대를 추천하더라고요.”

    “프라하 에펠탑!”

    미리 공부해 두었던 나윤희가 맞장구를 쳤다.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일도 기대되었지만, 아버지와의 유럽 여행 이후 이렇다 할 기회가 없었던 나윤희는 이번 여행에 무척 설렜다.

    그녀가 신을 내며 아는 내용을 전했다.

    “엘리베이터 타지 말고 걸어서 올라가야 제대로 볼 수 있대.”

    “…….”

    배도빈이 스마트폰을 펼쳐 페트르진 전망대를 검색하곤 나윤희를 물끄러미 보았다.

    60m나 되는 전망대를 걸어 올라갈 생각은 추호도 없는 눈빛에 나윤희가 간절해졌다.

    “올라가자. 응?”

    “엘리베이터 타도 볼 수 있대요.”

    “제대로 보려면 걸어야 한대.”

    “……비투스 대성당도 갈 거잖아요.”

    나윤희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성 비투스 대성당 탑에 오르고 싶어 어떤 티켓을 사야 하는지까지 알아본 그녀의 열정을 거부할 수 없었다.

    “가요.”

    무뚝뚝한 대답 뒤에 있는 다정함을 본 나윤희가 기쁘게 웃었다.

    두 사람은 아리아 호텔이 자랑하는 식당 코다에서 만족스러운 점심을 먹곤 밖으로 나섰다.

    제법 경사지고 거리도 있었지만 손을 잡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천천히 걸었다.

    “아이스크림 맛있었죠.”

    “응. 아이스크림 안에 마카롱 넣어서 주는 건 처음 봤어. 너무 달았지만.”

    “그래서 맛있잖아요.”

    “히. 아! 소소가 맛있는 거 먹으면 꼭 보내라고 했는데.”

    “어떻게요?”

    “으음. 안 되려나.”

    “돌아가면 물어봐요. 소소라면 와서라도 먹을 것 같긴 하지만.”

    “흐흫. 정말 그럴 것 같아.”

    그렇게 대화를 나누다가 문득 돌아보면 녹음이 짙은 페트르진 공원 아래로 펼쳐진 프라하 전경에 감탄했다.

    주홍 지붕이 오밀조밀 모여 있어 하나의 집처럼 보였다.

    프라하 성도 얼핏 볼 수 있었다.

    프라하는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 아래 수채화 같은 색감으로 두 사람을 유혹했다.

    이 꿈 같은 경험을 그와 함께할 수 있어서 얼마나 기쁜지.

    나윤희는 그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길 바랐다.

    “너무 멋있다.”

    “그러게요.”

    나윤희가 괜히 맞잡은 손을 앞뒤로 붕붕 흔들었다.

    평소 안 하던 행동을 보이자 배도빈이 의아해하는데 나윤희가 조금은 토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어, 언제까지 존댓말 쓸 거야?”

    “불편해요?”

    “그건 아닌데……. 거, 거리감 있어 보이고. 나이도 많아 보이고…….”

    “난 신경 안 써요.”

    “으으응.”

    나윤희가 나름대로 용기를 내 어깨를 살짝 흔들었다.

    생전 애교라고는 부린 적 없던 탓에 부끄러웠지만, 주책이라 생각했지만 배도빈에게는 그러고 싶었다.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변하는 마음에 당황하기만 하던 나윤희의 용기가 배도빈에게 정확히 꽂혔다.

    “한 번 더.”

    “으, 응?”

    “한 번 더 해봐.”

    나윤희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너무나 진지한 표정과 목소리로 나선 배도빈이 낯설기도 하면서 기쁘기도 하였고.

    또 믿음직스러웠다.

    “뭐, 뭘?”

    나윤희가 애써 모른 척해도 배도빈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게. 방금 뭐 한 거야?”

    “아, 아무것도……?”

    배도빈의 얼굴이 다가오자 나윤희가 고개를 돌려 딴청을 부렸다.

    그러나 한번 마음먹은 그를 거부할 순 없었다.

    연인이 더 이상 아홉 살이나 어리다는 걸 생각할 수 없었다.

    늦은 오전, 체코 필하모닉을 방문한 배도빈과 나윤희는 지휘자 엘리아후 인손과 면담을 하고 있었다.

    프랑크푸르트 라디오 심포니에서 16년,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에서 6년간 재직한 엘리아후 인손이 독일어에 능했기에 대화는 쉽게 이어졌다.

    “몇 번 마주친 적은 있지만 이렇게 대화하는 건 처음이군. 정말 반갑네. 배 그리고 나.”

    “안녕하세요.”

    “저도 반가워요.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좋아하거든요.”

    나윤희의 인사 뒤에 배도빈이 엘리아후 인손이 지휘한 곡 중에서도 빼어났던 바그너 오페라를 언급했다.

    “오오. 그런가.”

    “긴장감을 유지하는 방식이 인상적이더라고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으니 체코 필하모닉이 평소에 어떻게 연습하는지 궁금했죠.”

    “그대가 그리 말해주니 참으로 기쁘네. 차차 함께하며 알아보기로 합세. 실은 나도 베를린이 어떻게 음을 맞추는지 궁금했거든.”

    “힘들 거예요.”

    “하하하! 그렇지. 쉽지 않겠지.”

    엘리아후 인손이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지휘는 생각이 없다는 말을 들었네만.”

    “네.”

    “단원들에게도, 팬들에게도 특별한 경험이 될 수 있을 텐데 아쉽네. 이유라도 있는가?”

    “체코 필하모닉에는 인손 경이 있으니까요.”

    “묘한 곳에서 보수적이군.”

    배도빈은 차를 마실 뿐 부정하지 않았다.

    “한 번 정도는 도리어 좋지 않을까 싶네만. 다시 한번 부탁함세.”

    엘리아후 인손은 배도빈과 함께 일함으로써 체코 필하모닉이 더욱 견고해질 거로 생각했다.

    그의 작업 방식과 세계관을 접하고 일부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큰 공부였다.

    “천천히 생각해 보죠.”

    배도빈이 답을 미뤄 완곡히 거절하자 엘리아후 인손이 아쉽다는 듯 찻잔을 들었다.

    배도빈은 엘리아후 인손의 방대한 지식과 번뜩이는 발상을 경험하고 싶었다.

    말러, 브루크너, 쇼스타코비치, 바그너에 이르기까지 엘리아후 인손은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사카모토 료이치와는 또 다른 영역을 이루고 있었다.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악보를 분석하여 그간 조명받지 못한 점을 끄집어내곤 했다.

    그가 지휘한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와 <니벨룽의 반지>가 대표적이었다.

    하지만 배도빈은 그를 통해 얻은 지식을 다른 누구도 아닌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하고 싶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팬들도 그러길 바랄 것으로 여겼다.

    그 외 마땅한 이유가 없는.

    단지 그러고 싶은 고집이었다.

    “음. 다시 생각해도 아쉬운 일일세.”

    한동안 고민을 이어가던 엘리아후 인손이 슬쩍 제안했다.

    “그럼 피아노는 어떤가.”

    배도빈이 눈썹을 들어 보였다.

    “그대 팬들이 피아니스트 배도빈을 무척 사랑한다고 알고 있네. 우리와 함께 한 곡 준비하고 여기 나 악장이 바이올린 섹션을 맡아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 않겠나.”

    배도빈은 그의 제안이 나쁘지 않다고 여기며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

    “좋아.”

    나윤희가 냉큼 대답했다.

    무대에 함께 오른 적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정작 함께 연주해 본 적은 거의 없었기에 반가웠다.

    배도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엘리아후 인손이 호방하게 웃었다.

    “하하하! 오케스트라 대전 이후 잠시 무료하기도 했거늘. 오랜만에 의욕이 끓어오르는구만.”

    배도빈과 나윤희, 엘리아후 인손이 세부 일정을 논의하는 한편.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잔뜩 설렜다.

    최고의 음악가 배도빈과 함께 어떤 일을 하게 될지 궁금해 안달이 나 있었다.

    바이올린 연주자들은 오케스트라 대전마다 명연주를 펼친 나윤희에게 물어볼 말을 정리해 두기도 했다.

    “지금 벨리텔이 만나고 계시다며?”

    “그렇대. 크으. 듣고도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 일이 이렇게 돌아가네.”

    “어떨 것 같아? 배도빈.”

    “그 폭군에게 익숙해진 베를린이 악마라고 하잖아. 벨리텔하고는 전혀 다르지 않을까?”

    “빡빡하긴 하겠지만 해봤자 얼마나 그러겠어.”

    “그러게. 그럼 그런 말은 왜 나왔지?”

    “이미지 같은 거 아닐까? 왜 말이 전해지다 보면 과장되기도 하잖아.”

    “그럴지도 모르겠네.”

    “아, 너무 궁금하다.”

    “뭐가?”

    “배도빈. 공연 어떻게 준비하는지 안 궁금해?”

    “몇몇 악단 다녀봤지만 특별히 다른 점은 없던데.”

    “남들하고 똑같으면 그런 지휘를 할 수 있겠어?”

    “하긴 그러네. 궁금하긴 하다.”

    “두말하면 잔소리지.”

    “다들 오늘부터 긴장 바짝 하자고. 실망스러운 모습 보일 순 없지.”

    “하하하. 평소대로 하면 돼. 난 저 녀석이 제일 걱정이라고. 어이, 밀로스. 언제까지 떨고 있을 거야?”

    한 단원의 말에 구석에 쪼그려 안절부절못하던 밀로스 발렌슈타인이 고개를 들었다.

    “누가 떨었다고 그래요!”

    “누가 봐도 겁먹은 고양이잖아.”

    “하하하하!”

    동료들의 웃음에 밀로스 발렌슈타인이 발끈했다.

    “전혀요! 저도 그간 많이 늘었다고요! 단지!”

    “단지?”

    “……우리가 뭐가 부족해서 이렇게 겁을 내고 있어야 하는데요! 우리도 충분히 멋지다고요! 체코 최고의 오케스트라잖아요!”

    “이봐, 발렌슈타인. 여기서 겁먹고 있는 건 너밖에 없어.”

    “이익!”

    밀로스 발렌슈타인이 연습실을 벗어났다.

    첫 번째 오케스트라 대전을 통해 배도빈이 얼마나 대단한 음악가인지 익히 알았지만.

    밀로스 발렌슈타인이 걱정하는 건 다른 게 아니었다.

    그에게 무례를 저지른 과거의 자신이 창피했다.

    동시에 한 번 사과했음에도 미안함을 느끼고 있기에 좀처럼 그를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밀로스 발렌슈타인은 복도에 선 채 오늘은 그냥 휴가를 내는 게 좋지 않을까 고민했다.

    * * *

    “반갑습니다. 배도빈입니다.”

    “안녕하세요, 나윤희라고 합니다.”

    체코 필하모닉은 통역가가 배도빈과 나윤희의 인사를 전하기도 전에 열렬히 환영했다.

    “반가워요!”

    “잘 어울리네요!”

    체코를 넘어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는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도 배도빈과 나윤희는 특별했다.

    그랜드 심포니를 비롯하여 수많은 명곡을 쏟아낸 배도빈과 직접 대화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으며.

    불새 협주곡과 잠자는 숲속의 공주 같은 곡으로 뛰어난 연주력을 선보인 비르투오소 나윤희에게도 큰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기다릴 이유 있어요? 오늘부터 함께하죠!”

    안달이 난 한 단원의 목소리에 한차례 웃은 뒤 엘리아후 인손이 입을 열었다.

    “여기 두 분은 앞으로 각 연습 시간에 참여하실 겁니다. 배도빈 악단주는 저와 함께 악보를 구성하고 자문을 맡아줄 겁니다. 나윤희 악장께선 이리나 네콜로바 악장을 도와 제1바이올린 섹션을 지도해 줄 예정이고요.”

    나윤희가 이리나 네콜로바 악장과 인사했다.

    “공연은 예정에 없습니까?”

    누군가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가장 궁금해하는 질문을 꺼냈다.

    다들 너무나 간절해 보였기에 엘리아후 인손은 슬며시 웃으며 그의 협상 전과를 알렸다.

    “아주 멋진 공연을 약속했지요. 배도빈 악단주가 피아노를, 나윤희 악장이 바이올린을 맡아주기로 했습니다. 그렇지요?”

    인손의 말을 전해 들은 배도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러의 피아노 4중주를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네요.”

    “말러!”

    통역가가 입을 떼기도 전에 단원들이 두 팔을 높이 들며 기뻐했다.

    구스타프 말러란 이름과 피아노 콰르텟이란 영어를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체코 필하모닉이 가장 사랑하는 음악가 중 한 명인 말러와 그가 완성하지 못한 피아노 4중주를 연주하자니 마치 그것을 함께 완성해 보자는 말처럼 들렸다.

    그들의 예상은 배도빈과 엘리아후 인손의 의도와도 정확히 일치했다.

    “앞으로 한 달은 배와 함께 구스타프 말러가 남긴 피아노 4중주를 채우고자 합니다. 물론 무대에 올리는 게 목적이죠. 쉽지 않겠지만 분명 즐거울 겁니다.”

    말러가 남긴 피아노 4중주는 1악장만이 남아 있으며 2악장 또는 3악장으로 추정되는 스케치가 있을 뿐이었다.

    말러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어떤 감동을 전하고 싶었을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그가 남긴 단서를 추적함으로써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구스타프 말러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을 터였다.

    그것은 음악가와 관객이 음악으로 대화를 나누는 과정과 유사했다.

    구스타프 말러가 152년 전에 보낸 미완성의 편지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을 터.

    그를 대신해 편지를 완성하는 일이 가능할까.

    그러나 그 과정에서 서로를 이해할 수만 있다면 분명 말러와 이어질 수 있다고 믿었다.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먼 과거와 현재를 잇는 음악가로서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말러를…….’

    구스타프 말러를 가슴에 품었던 24살 청년 밀로스 발렌슈타인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 * *

    다음 날.

    나윤희가 이리나 네콜로바 악장과 함께 제1바이올린 미팅에 참가한 한편, 배도빈은 엘리아후 인손과 함께 말러 피아노 4중주 악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옆에는 알프레드 시닛케의 피아노 4중주 악보도 함께 있었다.

    말러의 곡을 듣고 감명하여 쓴 곡으로 기존과 유사하나, 보다 세련된 기법으로 표현된 곡이었다.

    말러의 곡을 재창조하려는 배도빈과 엘리아후 인손에게는 좋은 참고 자료였다.

    엘리아후 인손이 허탈하고 애석한 마음을 입에 담았다.

    “볼수록 안타까운 일일세.”

    악보를 보고 있던 배도빈이 고개를 들었다.

    “이 피치카토. 당시 풍조와 말러의 기법을 고려하면 마지막이 아닐 가능성이 있어.”

    현재 남아 있는 1악장도 완성된 형태가 아닐 수 있다는 말에 배도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죠.”

    구스타프 말러는 빈 콘서바토리 재학 시절 이미 교수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교수들은 말러의 피아노 5중주에 두 개의 상을 줄 정도로 그를 높이 평가했었다.

    그러나 말러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자신이 쓴 악보를 폐기하거나 발표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큰 호평을 받았다던 단악장의 피아노 5중주도 남아 있지 않으며, 빈 콘서바토리 재학 시절 만든 그의 초기 곡은 대부분 그렇게 소실되었다.

    “이걸 봐도 도저히 이어진다고 생각할 수 없으니까요.”

    배도빈이 말러가 남긴 24마디의 스케치를 집어 들었다.

    엘리아후 인손이 고개를 끄덕였다.

    피아노 4중주를 만든 시점과 24마디의 스케치를 쓴 시기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2악장에 쓰려던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지만.

    배도빈과 엘리아후 인손이 보기에는 두 개의 악보 사이의 연결성이 매우 적었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면 하나의 악장을 뛰어넘어 3악장에 쓰려고 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저…….”

    두 거장이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숨죽여 지켜보고 있던 밀로스 발렌슈타인이 입을 열었다.

    배도빈과 엘리아후 인손이 고개를 돌렸다.

    “알프레드 시닛케가 이 스케치로 완성했으니까 1악장만 가지고 이어보는 게 어떨까요? 벨리텔께서 말씀하신 대로 피치카토로 끝나는 게 마음에 걸리잖아요.”

    배도빈이 밀로스 발렌슈타인을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이 친구는 누구죠?”

    “하하하.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밀로스 발렌슈타인이라고 요즘 작곡 공부를 하고 있어 불렀네.”

    엘리아후 인손의 호방한 미소와 달리 밀로스 발렌슈타인의 얼굴은 충격에 휩싸였다.

    사과는 했다지만 배도빈에게 한 실수가 마음에 걸렸고 더군다나 그에게 두 번이나 걷어차였던 탓에 애써 용기 냈거늘.

    자신을 기억조차 못 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나 몰라?”

    발렌슈타인이 확인하듯 물었지만 배도빈은 눈썹을 찌푸릴 뿐, 기억하지 못했다.

    “두 번이나 걷어찼잖아.”

    “내가?”

    “연습 몰래 듣다가 한 번. 대축전극장에서 한 번.”

    “…….”

    “밀로스 발렌슈타인이라고! 너한테…… 나쁜 말 했던 밀로스 발렌슈타인!”

    배도빈이 턱을 쓸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눈앞의 애송이가 누군지 기억나질 않았다.

    밀로스 발렌슈타인이 악기 케이스에서 플루트를 꺼내 보이자 그제야 손뼉을 쳤다.

    “아, 그 애송이.”

    “애, 애송이?”

    “그때 연습실 앞에 있던 애가 너였구나. 몰랐네.”

    황당하여 얼이 빠진 발렌슈타인을 보며 배도빈이 피식 웃었다.

    “작년에 들어보니 저음이 제법 늘었더라.”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엘리아후 인손과 잠시 중단되었던 토론을 이어나갔다.

    첫 번째 오케스트라 대전 이후 저음 표현에 신경 썼던 밀로스 발렌슈타인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충격보다 자신이 사 년간 무엇을 노력했는지 알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작년 오케스트라 대전 시상식 때는 적당한 립서비스인 줄 알았거늘.

    열두 번의 그랑프리 중 단 한 번, 그것도 일 분도 채 되지 않는 독주를 기억한다는 게 놀라웠다.

    “그, 그걸 어떻게?”

    배도빈이 고개를 돌렸다.

    “뭘?”

    “기억도 못 하면서.”

    “5년 전에 봤던 얼굴을 어떻게 기억해?”

    “5년 전이 아니라 작년! ……아. 미안해. 정말, 정말 그럴 의도가 아니었어.”

    밀로스 발렌슈타인이 그가 시력을 잃었단 사실을 뒤늦게 떠올리곤 급히 사과했다.

    배도빈에게는 정말 오 년 만에 본 것이었고 얼굴을 잊을 수 있을 듯했다.

    미안함이 앞서 이름도 기억 못 한 것은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배도빈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손을 저었다.

    다만 다시 악보 이야기를 꺼내려 하는데 인손의 눈치가 이상하여 고개를 돌렸다.

    그가 보기에도 밀로스 발렌슈타인은 여전히 할 말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뭔데?”

    “그럼 저음 연습한 건?”

    배도빈이 눈썹을 찡그렸다.

    “난 줄 몰랐다며. 저음 좋아진 건 어떻게 알았는데?”

    “체코의 풋내기 플루티스트가 괜찮은 소리를 냈으니까.”

    머릿속이 복잡해진 밀로스 발렌슈타인은 배도빈과 엘리아후 인손의 토론을 그저 들을 뿐이었다.

    한참이 흐른 후.

    배도빈이 돌아간 뒤에야 지휘자이자 스승에게 물었다.

    “벨리텔, 배도빈이 한 말 들으셨죠?”

    엘리아후 인손은 인자한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제 잘못도 제가 누군지도 몰랐는데 플루트를 기억하고 있었대요. 5년 전 소리를 기억하고 앞이 보이지도 않는데 제 플루트를 찾아냈대요.”

    “그래. 기뻐할 일이구나.”

    엘리아후 인손은 감격한 제자를 두고 배도빈의 청음 능력과 기억력에 감탄했다.

    발렌슈타인의 말마따나 자기 오케스트라 소속 단원도 아닌, 연주자의 음색을 기억해 사 년 뒤에 어떻게 변화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인간의 영역이 아니었다.

    ‘정말 끝을 알 수 없군.’

    * * *

    짙은 갈색을 띤 목제 턴테이블 위 음울한 음악과 함께 LP판이 돌아가고 있다.

    “음악 좋네요. 누구죠? 브람스?”

    “아니.”

    남자는 애처로운 손을 떠올린다.

    철조망을 잡은 채 추위와 절망에 힘없이 떠는 손.

    남자는 안타까움을 감추며 쓰게 읊조렸다.

    “말러.”1)

    * * *

    나란히 누워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2010년 작, 셔터 아일랜드를 본 배도빈과 나윤희는 영화가 남긴 여운에 잠겨 있었다.

    배도빈이 말러의 피아노 4중주를 틀곤 마침내 입을 열었다.

    “좋네.”

    나윤희가 추천했던 대로 영화는 구스타프 말러의 피아노 4중주 A단조와 잘 어울렸다.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선 다각적인 방향으로 접근해야 했고.

    배도빈은 영화 제작진이 왜 그들의 영화에 말러 피아노 4중주를 삽입했고, 굳이 말러란 이름을 언급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암운이 지듯 떨어지는 피아노를 시작으로.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가 불안을 싹틔웠다.

    바이올린의 비브라토가 두렵게 떨리자 중량을 더하는 피아노.

    십 대 소년이 만든 곡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오디오에서는 말러 피아노 4중주가 끝난 뒤, 그의 칸타타 ‘탄식의 노래(Das klagende lied)’가 흘러나왔다.

    나윤희가 입을 뗐다.

    “안타까워.”

    배도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년 시절 구스타프 말러는 형제들을 잃고 절망했다.

    홀로 살아남은 그가 어떠한 부담을 느꼈던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죽은 형제들의 몫까지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 어린 말러를 스스로 탓하도록 몰아세웠고.

    그로 인한 죄책감은 탄식의 노래, 피아노 4중주 A단조와 같이 말러 음악의 바탕을 이루었다.

    “어렸을 때 만든 곡은 대부분 이런 식이었어. 자기를 들여다보는 데 익숙하니까.”

    배도빈은 말러에게서 동질감을 느꼈다.

    번뇌에 빠져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끝내 차오르는 감정을 악보에 옮기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었던 그로서는 당시 말러가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작곡을 쉬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게.”

    나윤희가 말러의 곡이 얼마 남지 않음에 아쉬움을 내비쳤다.

    어릴 적에 쓴 악보를 본인이 파기하기도 했지만, 다작으로 유명한 말러의 곡은 남아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작곡보다는 지휘로 인정받은 탓이었다.

    어릴 적부터 수많은 곡을 외우고 쓸 정도로 작곡에 힘썼고 여러 상을 받으며 인정받았지만.

    심혈을 기울여 만든 탄식의 노래가 베토벤상을 받지 못하자 낙심하고 말았다. 거기에 경제적인 이유가 겹치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만일 그가 젊은 시절 베토벤상을 수상함으로써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면 작곡가로 왕성히 활동했을 테고, 얼마나 많은 명곡을 쏟아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역사는 역사일 뿐.

    어쩌면 그런 상황이 구스타프 말러의 창작욕을 더욱 자극했을지도 몰랐다.

    배도빈과 나윤희는 그저 그가 좀 더 나은 환경에 있지 못함을 아쉬워할 뿐이었다.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탄식의 노래를 들으며, 그 애틋하고 선명한 비극을 느끼며 더더욱.

    “이렇게 좋은 곡을 썼는데 너무했어. 얼마나 힘들었을까.”

    배도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을 받았다면 계속 곡을 썼을 거라고 말했으니 아마 가슴에 담아두고 살았을 거야.”

    “베토벤상. 정말 브람스 때문일까?”

    “아니라고는 할 수 없지.”

    말러는 베토벤과 바그너의 열렬한 팬이자 지지자였고 스승 브루크너와 함께 두 거장의 영향이 짙은 음악을 했었다.

    문제는 당시 베토벤상의 심사위원이 브람스였던 것인데.

    브람스는 바그너와 대척점에 있는 음악가였으며, 베토벤도 비판적인 입장에서 받아들였던 음악가였다.

    브람스가 추구했던 음악관과 젊은 말러가 지향했던 음악 세계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사이가 좋았잖아. 왜 그렇게 미워하게 됐을까?”

    “서툴러서.”

    “서툴러?”

    역사에 기록된 대음악가에게 서투르단 표현은 어울리지 않았지만 배도빈은 차분히 이야기를 풀었다.

    “자기 생각을 전달하는 방법을 모르는 거야. 바그너는 어린 브람스가 전통을 고집하는 게 안타까웠고, 브람스는 나이 많은 바그너가 바흐, 헨델, 아마데가 만들어 놓은 전통을 깨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

    “다를 뿐이잖아.”

    “맞아. 다를 뿐인데 방구석에 처박혀 악보만 들여다보니 자부심만큼 타인을 배척하게 된 거야.”

    스스로 노력한 만큼 자신에게 자부심을 느끼고, 인정받지 못할수록 자신을 지키기 위해 공격적이 되었다.

    “틀리다고 생각한 거야. 표현하는 방법도 적절하지 않았지. 같은 말을 해도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배도빈은 과거 자신도 그러했음을 상기하며 말을 이었다.

    “그런 것이 반복되고 서로 어긋나다 보니 점점 감정싸움으로 치닫고 결국 사생활까지 들먹이잖아. 둘 다 음악만 할 줄 알았지 어린애였어.”

    새로운 음악을 추구하는 기성 음악가 바그너.

    전통을 추구한 신진 음악가 브람스.

    배도빈의 말대로 서로를 높이 평가했던 두 사람의 관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악화되었다.

    그 결과 당시 음악계를 주름잡고 있던 바그너가 살아 있을 적에는 브람스는 제대로 된 활동을 하지 못했다. 너무도 가혹한 환경에서 음악을 해야 했다.

    그러나 바그너 사후 영향력을 갖춘 브람스와 그 세력은 그간 억눌렸던 마음을 터뜨리듯 바그너의 음악과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박해했고.

    그로 인해 바그너의 지지자 브루크너는 한평생 부당한 대우를 받게 되었다.

    브루크너의 제자였던 한스 로트와 구스타프 말러 역시 마찬가지.

    바그너와 브람스 두 음악가의 자존심 싸움에 수많은 음악가가 자신의 기량을 정당히 펼칠 수 없었던 것이었다.

    배도빈은 그들의 음악이 뛰어남과 별개로 혐오 속에 후학들을 좌절시킨 바그너와 브람스를 용서할 수 없었다.

    배도빈의 설명을 들은 나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네크 씨랑은 그렇게 안 돼서 다행이다.”

    변화를 추구했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전통을 지키고자 했던 레몽 도네크.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그때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배도빈이 꿍얼거렸다.

    “배은망덕한 놈이야.”

    “흫흐흐. 그래도 지금은 잘 지내잖아.”

    “사과받고 밥 몇 번 먹었다고 화가 다 풀리겠어?”

    나윤희는 솔직하지 못한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봤고 민망해진 배도빈은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그땐 푸르트벵글러가 잘 대응했어. 마음만 먹었으면 묻을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으니까.”

    클래식 음악계에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발언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푸르트벵글러는 분노를 억누르면서도 제자 레몽 도네크를 안타깝게 여겨 매장하지 않았다.

    바그너와 브람스의 관계로 이후 어떤 비극이 찾아왔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배도빈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대단한 사람이야. 우리 세프는.”

    “응. 정말.”

    * * *

    지휘자가 되기 위해 엘리아후 인손을 사사하던 밀로스 발렌슈타인은 스승과 배도빈의 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말러 피아노 4중주 A단조와 남은 스케치를 들여다보는 것은 하루뿐이었고 두 사람은 이후 말러가 어떤 말을 남겼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다른 사람들은 말러를 어떻게 보았는지 등에 집중했다.

    배도빈과 엘리아후 인손이 피아노 4중주 A단조가 사용된 영화를 어떻게 봤는지 대화할 때는 그 의문을 참을 수 없었다.

    “질문 하나 해도 돼요?”

    엘리아후 인손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러 피아노 4중주를 재구성하고 계시잖아요.”

    “그렇지.”

    “말러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보는 건 그렇다 쳐도. 영화 이야기가 굳이 필요한 거예요?”

    엘리아후 인손이 허허 웃으며 배도빈을 보았다.

    미숙한 제자에게 가르침을 주지 않겠냐는 의도를 읽은 배도빈이 설명을 시작했다.

    통역가를 통해야 했기에 대화는 다소 간격을 두었다.

    “말러를 어떻게 생각해?”

    “엄청, 어어엄청난 분이지.”

    “또.”

    “격정적이야. 어떤 감정을 표현하고 싶은지 망설이지 않아. 또 그러기 위해서 많이 고민했고. 난 그가 베토벤만큼이나 완벽한 구성력을 보였다고 생각해.”

    “또.”

    “음…… 많이 외로웠던 것 같아. 신중하고. 보통 자기를 그렇게 깊이 파고들어 사색하기 힘들지 않나?”

    “또.”

    “억울한 일을 많이 겪어서 그런지 고집도 있어. 자기한테 확신이 있는 느낌으로. 왜, 아직 나의 시대는 오지 않았다고 말했다잖아.”

    “또.”

    반복된 질문에 밀로스 발렌슈타인이 의문을 가졌다.

    “……이거 의미가 있는 질문이야?”

    “있어.”

    배도빈은 입을 모으고 의아해하는 어린 음악가에게 말했다.

    “난 그가 몹시 위태롭다고 느껴.”

    말러의 곡 전반에 펼쳐진 폭발적인 멜로디를 떠올린 밀로스 발렌슈타인은 배도빈의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짐작되는 특징을 떠올렸다.

    “너무 강렬해서?”

    “그래.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속에 담아둔 감정이 많은 사람일수록 목소리가 커지지. 말러가 그렇고.”

    밀로스 발렌슈타인은 베토벤, 브람스, 말러 등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네 말도 틀린 건 아니야. 외롭고 신중했던 만큼 자기 자신을 잘 들여다보고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전달할지 고민했지.”

    “덕분에 그토록 완벽한 교향곡을 쓸 수 있었을 테고.”

    엘리아후 인손이 배도빈을 거들었다.

    배도빈이 고개를 끄덕여 호응하곤 밀로스 발렌슈타인을 보았다.

    “하지만 이것 모두 우리가 추측한 이야기일 뿐이야. 본인이 아닌 이상 그가 어떠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어. 짐작할 뿐이지. 현재 구스타프 말러란 음악가는 본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그렇게 인식된 개념으로서의 구스타프 말러야.”

    밀로스 발렌슈타인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네가 생각하는 말러는 그의 일부일 수도 또는 그가 아닐 수도 있다고.”

    철학적인 개념에 혼란스러웠던 발렌슈타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더디긴 해도 그가 잘 따라오는 듯했다.

    배도빈이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러니 그를 바라보는 시각을 여럿 접해야 하지. 내가 생각하는 말러가 네겐 아닐 수 있고. 너의 말러가 내가 보지 못한 그일 수 있으니까.”

    “아.”

    밀로스 발렌슈타인은 비로소 스승과 배도빈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굳이 구스타프 말러가 남긴 악보와 스케치가 있음에도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취합하는 이유.

    구스타프 말러를 향한 여러 시각을 접하는 것이 곧 그를 가장 정확히 보는 방법이었다.

    구스타프 말러라는 퍼즐이 불완전하니.

    그 주변을 맞춰나감으로써 그의 형태를 가늠하자는 뜻이었다.

    그러나 모든 의문이 풀리진 않았다.

    한편으로는 위대한 지휘자 엘리아후 인손과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음악가로 칭송받는 배도빈이라면 굳이 그런 작업이 없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다른 사람이 아는 걸 이 두 사람이 모를 리 없다고 생각했다.

    혹은 그 둘만의 말러도 나름의 의의가 있다고 생각했다.

    밀로스 발렌슈타인이 아직 남아 있는 의문을 던졌다.

    “벨리텔은 충분히 이해하잖아요?”

    엘리아후 인손이 고개를 저었다.

    “너라면.”

    배도빈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졌지만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직접 대화할 수 있으면 모를까. 악보만으로는 알 수 없어.”

    악보에 충실했던, 그래야 한다고 믿고 있던 발렌슈타인에게 배도빈의 발언은 큰 충격이었다.

    “왜? 음표도 기호도 지시문도 있잖아. 너도 그렇게 치밀하게 써두고.”

    밀로스 발렌슈타인은 배도빈의 악보를 언급하며 되물었다.

    그의 악보는 거의 모든 곳에 지시문이 붙어 있었다.

    심지어 그는 음표를 쓰는 방식도 달리하여 피아니시모가 붙은 음표는 짧게 그린다든지, 포르테가 붙은 음표는 날카롭게 그리는 방식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렇게까지 상세하고 철저하게 악보를 적는 배도빈이 악보에 모든 것을 담을 수 없다고 말하니 이해할 수 없었다.

    “포르테는 어떻게 연주해야 하지?”

    “그야 세게 연주해야지.”

    밀로스 발렌슈타인이 마치 무시당한 것 같아 떨떠름하게 답했다.

    “포르티시모는 얼마나?”

    “포르테보다 세게.”

    “그럼 다시. 포르테는 얼마나 세게 연주해야 하고?”

    “아.”

    “악보만으로는 완벽할 수 없어. 최대한 많은 정보를 정확히 담으려고 하지만 한계가 있어. 그러니 사람마다 다르게 연주할 수밖에.”

    배도빈이 말러의 피아노 4중주 A단조 악보를 들었다.

    “악보주의라는 건 허상이야. 모든 악보는 대본일 뿐. 배우가 아니야. 대본을 표현할 배우가 필요하듯, 악보에도 그것을 표현할 사람이 필요해. 작곡가와 청중의 대화를 돕도록.”

    엘리아후 인손이 슬며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다시 만드는 행위는 말러가 우리에게 했던 말을, 이 편지를 복원하는 게 아니야. 그에게 받은 편지에 답장을 보내는 거지.”

    불완전한 편지라면 불완전한 대로.

    아쉬움을 담아 보내는 답장.

    밀로스 발렌슈타인은 피아노 4중주 A단조를 다시 만드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존경하는 그에게 보내는 편지라니.

    지금의 작업이 그에게서 받은 감동을 표현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자 막연했던 기대감이 명확해지며.

    의욕이 샘솟았다.

    * * *

    엘리아후 인손이 선물한 메도브닉(Medovnik: 꿀 케이크)을 맛본 배도빈과 나윤희가 눈을 크게 떴다.

    다디단 꿀 크림과 고소한 견과류로 이루어진 케이크는 입안에 들어서자마자 존재감을 펼쳤다.

    혀에 닿는 순간 전신으로 뻗어나간 희열에 두 사람은 어쩔 줄 몰랐다.

    턱을 움직이면 입안에 포근히 퍼지면서도 녹아내리지 않았다.

    폭신폭신하면서도 기개 있는 식감.

    입 한가득 들어온 그것은 조금도 저항하지 않으며 자신을 먹으려는 이와 혀를 감싸 안았다.

    이 얼마나 고상한 자세란 말인가.

    그뿐일까.

    풍요로운 식감과 곱게 간 견과류의 고소함을 느끼기가 무섭게 꿀로 만든 크림이 본색을 드러냈다.

    농후한 꿀의 풍미가 비강을 채워나갈 즘엔 절제된 단맛이 끝내 혀를 타락시키고 만다.

    이것은 악마가 만든 음식이다.

    배도빈의 머리에 영감이 스쳤다.

    나윤희는 스마트폰을 펼쳐 스케치를 남기는 배도빈을 관찰했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너무나 밝게 웃던 그는 눈을 감기도, 눈썹을 살짝 찡그리기도 했다.

    눈빛은 타오를 듯했다.

    사랑을 나눌 때와 같았다.

    그런 그를 보는 게 즐거워서 한참을 그러고 있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

    그의 눈짓과 과감한 필기, 이제는 익숙해진 암호 같은 악보와 알 수 없는 포근함까지 평소와 같았다.

    배도빈이 일어나 피아노 앞으로 향했다. 섬세한 손이 건반을 누르자 발랄한 멜로디가 탄탄히 울렸다.

    “어때?”

    “귀여워.”

    배도빈이 왼손을 거들어 반주를 넣었다. 통주저음처럼 묵직한 선율이 더해지자 발랄했던 멜로디가 달콤하면서도 가볍지 않은 꿀 케이크와 같이 포근해졌다.

    “지금은?”

    “또 먹은 것 같아.”

    배도빈은 메도브닉을 또 먹은 것 같다는 나윤희의 과장된 표현에 만족하며 스케치를 정리했다.

    나윤희는 그가 지금까지 어떻게 이 욕구를 참아왔는지 신기했다.

    프라하에서의 2주간.

    배도빈은 아침 이슬이 떨어지는 것으로도 곡을 썼다.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도, 즐거운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꿈을 꾸었을 때도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도 문득 펜을 들었다.

    악단주로서 너무나 많은 일을 책임지고 있던 탓에 그간 못 했던 것을 몰아서 하는 듯했다.

    “계속 이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전문경영인 두려고.”

    나윤희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마음은 그런데 믿을 만한 사람 찾는 게 쉽지 않아.”

    “카밀라 이사님은?”

    “이야기해 봤는데 푸르트벵글러랑 같이 퇴임하고 싶다고.”

    “아쉽다.”

    나윤희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카밀라 앤더슨과 더불어 베를린 필하모닉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을 언급했다.

    “이자벨 부장님은?”

    “자기는 아직 멀었다고 거절했어.”

    “이자벨 부장님보다 악단 잘 아는 사람도 없을 텐데.”

    배도빈도 나윤희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했다.

    지금까지의 역할과 책임으로 따졌을 때 카밀라 앤더슨과 이자벨 멀핀을 대체할 사람은 없었고.

    그렇다고 외부에서 사람을 찾자니 악단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졌다.

    더 고민해도 마땅히 답이 없었기에 배도빈은 화제를 돌렸다.

    “오늘은 어땠어?”

    “악기 손질했는데 네콜로바 씨 바이올린 특이하더라.”

    “특이해?”

    “지판이 볼록 올라와 있어.”

    바이올린 지판은 본래 오목한 구조로 되어 있었지만 나윤희가 특이하다고 했을 정도니 평범한 수준은 아닌 듯했다.

    “얼마나?”

    “줄이랑 지판이 거의 닿을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진동폭이 너무 좁아지면 안 좋을 텐데.”

    배도빈이 잡음이 생길 것을 지적하자 나윤희가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알고 보니 손이 조금 달라서 D랑 A현에 힘이 많이 들어간대. 그런데 지판까지 깊으면 방해가 되니까.”

    “아.”

    나윤희의 말대로 지판과 현 사이의 간격이 깊으면 중앙에 위치한 D현과 A현이 너무 깊이 들어가게 되고 다른 현을 연주할 때 오류가 생길 수 있었다.

    장애라고 할 순 없어도 손의 생김새와 뼈, 근육 구조가 평범하지 않아 D현과 A현에 힘을 주기 힘든 사람이라면 연주에 방해가 될 수 있었다.

    이리나 네콜로바 악장으로서는 자신의 신체에 맞게 악기를 관리했던 것이고 지판이 높음으로써 생기는 잡음을 줄일 정도로 깔끔한 보잉까지 익힌 것이었다.

    “그런 줄은 몰랐네.”

    “응. 정말 엄청 깔끔하게 연주하시니까.”

    이번에는 나윤희가 물었다.

    “인손 씨는?”

    “비상해.”

    배도빈은 지난 2주간 그에게서 그 어떤 음악가보다 멋진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1악장 코다를 어떻게 할지 결정 못 했었잖아.”

    “응.”

    나윤희는 배도빈과 엘리아후 인손이 말러 피아노 4중주 A단조의 1악장 끝의 피치카토가 붙은 음을 고민했던 것을 떠올렸다.

    두 사람은 그것이 1악장의 끝이 아닌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기에 결미부를 완성하고자 했었다.

    “처음에는 뒤를 어떻게 이을까 고민했는데, 차라리 피아노도 함께하는 게 어떠냐고 하더라고.”

    “어떻게?”

    배도빈이 피아노 앞으로 가 화음을 끊어쳤다.

    스타카토로 연주하여 현악기들이 현을 뜯는 효과와 비슷하게 연주하니 전보다 완결성을 띄었다.

    “여러 관점에서 볼 줄 아는 사람이야. 그 나이 먹으면 시야가 좁아지게 마련인데.”

    “흐흫. 어떻게 알아요?”

    “……그런 것 같더라고요.”

    두 사람이 키득거렸다.

    * * *

    한편 밀로스 발렌슈타인은 피아노 협주곡의 형태로 재구성된 말러 피아노 4중주에 감탄을 거듭했다.

    “벨리텔, 이건 정말. 정말 너무 대단해요.”

    순수하게 기뻐하는 발렌슈타인과 마찬가지로 엘리아후 인손도 흡족했다.

    “마음에 드는구나.”

    “빨리 연주하고 싶어요. 팬들도 좋아하겠죠? 아니, 그 정도가 아닐 거예요.”

    인손은 흥분하여 재잘대는 제자를 바라보았다.

    미숙한 점도 있으나 음악을 향한 사랑만큼은 티끌 하나 없이 순수하여 안심할 수 있었다.

    “그야 당연하겠죠? 벨리텔과 배도빈이 함께 만드셨으니까.”

    “밀로스.”

    “네?”

    밀로스 발렌슈타인이 눈을 깜빡이며 인손의 말을 기다렸다.

    “그간 어떤 생각을 했는지 들려주겠느냐.”

    “역시 벨리텔이라고 생각했죠! 2악장 주제도 너무 멋지고 1악장 코다는 상상도 해본 적 없어요. 또.”

    인손이 허허 웃었다.

    “도빈 군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았느냐.”

    스승의 질문에 흥분했던 밀로스 발렌슈타인이 다소 차분해졌다.

    입술을 꼭 깨물며 고민하더니 이내 솔직한 심경을 꺼냈다.

    “너무 대단해요. 저는 그의 머릿속에 음악의 신이 악상을 전해준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니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겠구나 하고. 아니, 그런 생각도 못 했죠. 그냥 저랑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엘리아후 인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일 뿐 밀로스 발렌슈타인이 말을 마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그게 아니었어요. 처음에는 제가 알던 그 배도빈이 맞나 싶었어요. 한 번에 엄청난 멜로디를 적을 줄 알았거든요.”

    밀로스 발렌슈타인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악보를 고쳐나가는 배도빈의 작업 과정을 지켜보며 충격받았다.

    대중이 알기로.

    또 수많은 음악가와 마찬가지로 발렌슈타인은 배도빈을 평범한 사람과 다른 존재로 인식했다.

    문득 떠오른 악상을 일필휘지할 거란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경쟁자라든가, 본받아야 할 존재가 아니라 그저 다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런 예상과 달리 배도빈은 엘리아후 인손이 잡아둔 모티프를 끊임없이 변화시켰다.

    그 과정은 집착이란 말 외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늘리고 좁히고.

    뒤집고 누르고 키우고.

    주제를 변형시키는 과정에서의 배도빈은 마치 강박증이 있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단 한 구절도 반복하지 않았으면서도 단 한 마디의 연결성도 놓치지 않았다.

    모든 노트와 지시문이 주제로 향하면서도 서로 다른 방식과 구조를 이루었다.

    금방 끝나지 않았다.

    하루는 단 한 마디를 가지고 씨름했고 어떤 날에는 수십 장을 쓰고 다음 날 모두 폐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완성된 피아노 협주곡 A단조, ‘구스타프 말러’는 마치 베토벤의 C단조 교향곡(운명)처럼 강렬한 몰입력을 갖추었다.

    밀로스 발렌슈타인은 다른 작곡가가 그와 같은 방식으로 일한다면 하나의 곡을 만들기까지 1년은 걸릴 것으로 생각했다.

    그가 곡을 빠르게 완성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의 집중력 덕분이었다.

    아침부터 점심까지. 다시 점심부터 저녁까지 배도빈은 불량한 자세로 조금도 미동하지 않았다.

    “정말 노력하는구나. 저렇게까지 하니까 그런 곡을 만들 수 있구나 싶었어요.”

    “제대로 봤구나.”

    엘리아후 인손이 슬며시 미소 지었다.

    “도빈 군이 대단한 점은 집념이지. 나도 음악을 사랑하고 그와 함께한 시간이 너무나 즐거웠지만 버겁기도 했단다.”

    발렌슈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밥을 먹을 때도 산책할 때도 침대 위에서도 음악만을 생각하지.”

    “……영감을 받는다거나 하는 천재성보다 그게 더 대단해 보여요.”

    실로 그러했다.

    발렌슈타인은 배도빈의 천재성보다 집착에 가까운 태도가 더 대단히 느껴졌다.

    엘리아후 인손이 빙그레 웃으며 격려했다.

    “너도 그럴 수 있단다.”

    “네?”

    “좋아하지 않느냐.”

    스승의 격려가 지금 당장은 가슴에 와닿지 않았다. 배도빈처럼 음악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엘리아후 인손도 제자가 자신의 말을 한 번에 믿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아 다음 말을 꺼냈다.

    “하지만 확실히 대단하긴 하더구나. 노력가인 건 알았지만 그의 청음은 정말 설명할 길이 없지.”

    “아. 맞아요. 악기도 없이 곡을 쓰잖아요.”

    청음은 소리의 말.

    소리가 가진 의미를 정확히 인식하는 능력이고 악보는 소리를 기호로 적은 문장이었다.

    소리로 대화하는 음악가들에게 청음은 의사소통 능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배도빈은 특별했다.

    그는 마치 모든 음을 머릿속에 넣어둔 것처럼 행동했다.

    그가 머리에 넣어둔 음은 마치 튜너기처럼 완전했다.

    머리로 상상한 음을 악보에 옮겨 적으려면 어떤 음계인지 확인해 보는 과정이 필요하고 뛰어난 음악가일수록 뛰어난 청음 능력으로 그 과정을 생략할 수 있지만.

    배도빈은 그럴 필요가 없어 보였다.

    청력을 잃어가던 그가 필사적으로 건반과 현을 켜며 음을 기억하려 했던 사실을 모르는 엘리아후 인손과 밀로스 발렌슈타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역시 천재 맞잖아요.”

    “껄껄껄. 그렇구나. 나는 이제 늙어 귀가 안 좋지만 혹시 또 모를 일이지. 너는 노력하면 그와 비슷하게는 될 수 있을지.”

    “무리예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밀로스 발렌슈타인은 어렸을 적부터 반복해 온 청음 수업을 떠올려 보았다.

    제자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는 엘리아후 인손은 작게 미소 지으며 일주일 뒤에 예정된 배도빈‧나윤희와의 협연을 손꼽았다.

    * * *

    음악과 평화의 도시 프라하.

    블타바강을 중심으로 번영한 체코의 수도는 유럽 중세와 근대 역사의 총집합체였다.

    성 비투스 성당과 하라드차니 성, 카를 다리와 맞닿은 구시가지는 광기의 전쟁 속에서도 아름다운 모습을 예전 그대로 유지해 왔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유럽 최고의 관광지로 사랑받는 체코의 수도.

    프라하를 찾은 관광객들에게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콘서트홀 루돌피눔(Rudolfinum)은 반드시 찾아야 하는 명소 중 하나였다.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는 네 명의 위대한 지휘자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엘리아후 인손이 총감독으로 있었고.

    유럽 전역에서 선별된 음악가들이 열정으로 가꾼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두 번의 OOTY 오케스트라 대전에서 모두 본선에 진출한 이력이 있었다.

    프라하의 관광객들이 체코를 넘어서 전 유럽으로부터 사랑받는 그들을 직접 볼 수 있길 바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만큼 간절했을까.

    배도빈‧나윤희와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협연 소식에 관광객들은 물론 체코 전역이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이럴 때는 표 좀 더 팔아도 되잖아! 아, 거참 말이 안 통하시네.”

    “입석이라도 좋다고! 들어가게만 해달라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려워요!”

    일찌감치 판매된 온라인 예매를 포기한 사람들이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사무국에 들이닥쳤다.

    직원들도 그들의 간절함을 익히 이해했지만 1,104석의 드보르자크홀 좌석이 모두 판매된 탓에 도와줄 방도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안전과 정숙을 위해서 입석은 판매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건 나도 알아요. 안다고. 내가 여기를 몇 년이나 다녔는데 모를까 봐. 그러니 이번 한 번만 부탁하는 거 아닙니까.”

    “죄송합니다.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라면 도와드릴 수.”

    “아! 그게 오케스트라 직원이 할 말이야! 스피커로 듣는 거랑 직접 듣는 게 같아요?”

    표를 구하지 못한 팬들의 성화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직접 방문하여 부탁을 가장한 협박을 한다든가 정중하고 신사답게 요청하는 사람도, 티켓팅 방식의 불합리함을 항의하는 사람도 있었다.

    최고 400유로로 판매된 배도빈‧나윤희와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협연 티켓은 온라인에서 1,800유로에 거래되기도 하였고.

    이와 같은 현상은 언론을 통해 전 세계에 시시각각 알려졌다.

    [THE B와 체코 필하모닉 협연 티켓 2,200유로에 거래]

    베를린 필하모닉 악단주 배도빈, 나윤희 악장과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협연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온라인 예매 시작과 동시에 1,104석이 매진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음악계는 암표를 잡아내지 못했다.

    하루 전 클래식 음악 포럼 게시판을 통해 경매된 해당 공연 티켓은 영국인으로 추정되는 아이디 ‘프린스’가 1,800유로에 구매하였다.

    또한 불과 24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2,200유로에 또 하나의 표가 판매되면서 최고 거래가가 갱신되었고 이와 같은 현상에 소위 되팔이들에 관한 문제가 제시되었다.

    판매자와 표를 구매한 중국계 독일인으로 추정되는 재력가에게 인터뷰 요청을 했지만 두 사람 모두 묵묵부답으로 그쳤다.

    └되팔이들 진짜 잡아 족쳐야 함.

    └공연 한 번에 240만 원을 태우려 하넼ㅋㅋㅋㅋㅋ

    └근데 진짜 여유 있는 사람은 그 정도는 지불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2,200유로에 팔렸다는 기사도 있음. 어차피 난 저기까지 갈 돈도 시간도 없으니 상관없지만.

    └나도 그냥 스트리밍으로 들으려고. 너무 비쌈.

    └베를린 필하모닉 시즌권 사면 한 번에 6~10만 원꼴이면 되는데 뭐 하러 몇백만 원씩 주고 봐야 하냐.

    └님 베를린에서 살고 있음?

    └도빈이랑 나윤희가 언제 누구랑 또 협연하겠어. 그만큼 가치가 있는 공연이니까 저러지.

    * * *

    공연 전.

    손을 풀고 있자니 누군가 문 앞으로 다가왔다. 두 사람인데 한쪽은 가우왕의 발소리다.

    ‘그럴 리 없지.’

    연수 중인 그가 프라하에 와 있을 리 없으니 잘못 들은 것이 분명하다.

    “들어간다.”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선글라스를 낀 폭주족 둘이 대기실 안으로 들어섰다.

    가우왕과 예나왕이다.

    “표정이 왜 그래?”

    “오랜만이지.”

    저 불량한 차림과 사나운 얼굴, 틱틱대는 말투 모두 확인했지만 이 둘이 왜 여기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예나왕이 반갑게 내민 손을 얼떨결에 잡아 흔들었다.

    “어떻게 왔어요?”

    “어떻게 오긴. 구경하려고 왔지.”

    “신혼여행도 못 했잖아. 연수 같이 다니기로 했어. 프라하 너무 예쁘다. 윤희랑 잘 지내고 있어?”

    “네.”

    아직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데 가우왕은 허락도 없이 악보를 집어 들었고 예나왕은 윤희를 찾았다.

    “복도 끝이에요.”

    “그래? 나 그럼 윤희한테 갈게. 연주 기대할게.”

    예나왕이 밖으로 나서자 정신이 좀 드는 것 같다.

    “일부러 찾아왔어요?”

    “찾아오긴. 그냥 다니다 보니 우연으로 겹친 거지.”

    “그런 것치곤 운이 좋네요. 티켓도 구하고.”

    “어. 별로 안 어려웠어. 야, 이거 말러냐?”

    “4중주 기반으로 만들었어요.”

    “……재밌겠는데.”

    가우왕이 흥미롭게 악보를 살폈다.

    엘리아후 인손과 함께 만든 ‘말러 협주곡’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피아노 악보와 총보를 번갈아 보는 걸 보니 인손이 고집을 부려 넣은 요소를 발견한 듯하다.

    “이제 손 안 떠네요?”

    “어. 이삼 주 지나니까 괜찮아지더라. 물을 많이 마셔야 해.”

    할 말이 없이 소파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으니 가우왕이 떼를 썼다.

    “이런 거 하나 더 만들어 봐.”

    “싫어요.”

    “왜.”

    “아이디어는 인손이 냈어요. 그한테 부탁해 봐요.”

    “싫은데.”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공연 전에 격해지기 싫고 그의 억지에 어울려주기도 귀찮아서 무시했다.

    가우왕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두 악보를 번갈아 보았는데 피아노가 이끄는 관현악곡이 퍽 마음에 든 모양이다.

    피아노로 지휘하는 느낌이 어떤지 상상하는 듯하다.

    조명받길 좋아하는 사람이니 그럴만하다.

    턱을 괸 채 장난감을 선물받은 아이처럼 말러 협주곡을 살핀다.

    그런 가우왕을 관찰하고 있는데 또 익숙한 발소리가 났다.

    문을 두드리길래 설마 하며 답했다.

    “찰스?”

    밝은 푸른색 계통의 정장 차림으로, 머리를 단정히 넘긴 찰스 브라움이 문을 열었다.

    혹시나 싶었지만 정말 그가 들어올 줄은 몰랐다.

    악단과 음악교육원 일로 한창 바쁜 사람이 대체 여기는 왜 왔는지 모를 일이다.

    “있었네. ……넌 왜 여기 있어?”

    “오, 브라더.”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지!”

    “네가 뭐라 해도 사실은 달라지지 않아. 우린 가족이잖아.”

    차마 서로 죽이지 못했던 전과 달리 지금은 찰스 혼자 더 열 받는 입장인 듯하다.

    한 가족이 되었으니 어지간한 일은 모두 웃어넘기는 가우왕과 아직 그를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찰스.

    가우왕이 그를 친근하게 여기는 만큼, 찰스 브라움은 전보다 그를 더 꺼린다.

    “네가 예나랑 결혼했지 나랑 했어? 난 나고, 예나는 예나야.”

    “결혼 축하 공연도 해줬으면서 뭘 그렇게 열을 내? 가족끼리 친하게 지내야지.”

    “널 위했던 게 아니다! 예나를 위해서야!”

    “이해해. 나도 여동생이 있어서 그 마음 다 안다고. 브라더.”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다.”

    “알았다니까. 브라더.”

    찰스는 가우왕의 멱살을 잡고 눈을 부라렸고 가우왕은 마음 넓은 형처럼 찰스를 다독인다.

    보고 있으면 조금 재밌다.

    “안 바빠요? 어떻게 왔어요?”

    “잠깐 시간 냈지. 안 들을 수가 없잖아. 말러라 했나?”

    사카모토처럼 미리 말해줬으면 내빈용 표를 준비해 두었을 텐데 두 사람 모두 표 예매에 일가견이 있는 모양이다.

    “혼자 왔어요?”

    “아니.”

    부정만 하고 누구랑 왔다는 말을 꺼내지 않는다.

    멀핀과 함께 왔냐고 물어보려던 차 가우왕이 대신 나섰다.

    “누구랑 왔는데?”

    “……이자벨 멀핀 본부장.”

    “평소처럼 이지라고 불러도 돼요.”

    찰스가 멋쩍은 듯 입을 샐쭉거리니 가우왕이 그의 어깨를 둘러 어깨동무했다.

    “좋네. 연주회 끝나고 저녁이나 같이 먹으면 되잖아.”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가족이니까.”

    처음에는 가우왕이 찰스를 완전히 가족으로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일부러 놀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찰스가 기겁하는 걸 즐기는 게 아닐까 싶다.

    “수고해라.”

    두 사람을 내보내고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연주 시간이 다가와 복도로 나서자 윤희도 나와 있었다.

    “가우왕이랑 찰스도 왔던데.”

    “응. 예나 씨랑 멀핀 부장님 만났어.”

    생기 있게 웃는 모습이 퍽 맑다.

    “어, 어때?”

    나윤희가 고개를 숙여 옷차림을 확인하며 물었다.

    얼굴을 보느라 자세히 보지 않았던 탓에 그녀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머리 한쪽을 뒤로 넘겨서 뒷머리와 묶었고 다른 한쪽은 자연스레 내려두었다.

    어두운 녹색의 원 톤 드레스가 퍽 잘 어울린다. 옷깃 앞에 같은 색의 리본도 과하지 않다. 어깨와 소매는 자수로 반투명했고 아래로는 주름이 잡혔다.

    같은 색의 낮은 구두까지.

    봄 느낌을 물씬 풍긴다.

    그렇게 생각하며 감상을 전했다.

    “예뻐.”

    “리본 푸는 게 나을까?”

    “아니. 예뻐.”

    “단이 너무 짧지.”

    “예뻐.”

    “그렇게만 말하지 말고.”

    느낀 그대로 말했을 뿐이지만 뭔가 더 의견을 구하는 것 같다.

    “머리 묶은 게 자연스러워 보이고 연주에도 방해되지 않을 것 같아서 좋아 보여. 드레스 색상이 약간 어두운데 오늘 피부 톤이 밝아서 보기 좋아. 치마 주름도 활발해 보여서 좋고. 구두도 어울리네.”

    “…….”

    반응이 없으니 더 필요한 것 같다.

    “입술이.”

    “이, 이제 괜찮아. ……감사합니다.”

    여러 이야기를 꺼내느라 어떤 말에 만족했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해결된 듯하다.

    “의외로 컴퓨터를 잘 다루나 봐. 두 사람 다 티켓팅을 성공한 걸 보면.”

    “어? 예나 씨가 2,200유로에 샀다고. 멀핀 부장님도 1,800유로에 사셨대.”

    “돈이 남아도네. 정 듣고 싶으면 차라리 말을 하지.”

    어떻게든 공연을 보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암표나 파는 놈들이 부당이득을 취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흐. 엄청 오고 싶으셨나 봐.”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무대 반입구 앞에 도착하자 엘리아후 인손이 미소로 반겨주었다.

    “오오, 정말 멋진 커플일세.”

    희미하게 관객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분위기가 잔뜩 부풀어 있다.

    지난 삼 주간 느꼈지만 이곳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찾는 사람들은 감정 표현에 솔직한 듯하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하면 더 즐거운 법.

    설렌다.

    “준비되었으면 올라가세.”

    윤희를 보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손과 함께 계단을 올라 무대로 향하자 곧 관객들의 열렬한 환호가 가슴을 때렸다.

    * * *

    그 어떤 콘서트홀보다 밝고 온화하게 빛나는 이곳 루돌피눔(Rudolfinum)은 1896년 4월, 안토닌 드보르자크가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서 첫 지휘를 맡은 곳이며.

    1908년 구스타프 말러가 7번째 교향곡을 발표한 장소이기도 하다.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콘서트홀 중 하나라는 명성에 비하면 내부가 상당히 좁으나 이곳을 다녀간 이들에게는 그리 중요한 기억은 아니리라.

    고개를 들면 거대한 원형 돔과 그 아래 연결된 샹들리에가 눈에 띈다.

    눈부신 그 주변으로 천장에 장식된 문양이 언뜻언뜻 들어온다.

    이토록 화려하면서도 절제된 느낌을 주는 것은 이곳이 왕세자를 위해 만들어진 탓이리라.

    황금빛으로 가득한 이곳은 그야말로 우아하다.

    무대 뒤에 설치된 오르간.

    두 개의 작은 샹들리에가 비춘 무대가 고상하기 짝이 없다.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바흐와 헨델, 못된 영감, 글룩, 아마데, 베버, 슈베르트, 멘델스존 그리고 나 루트비히의 석상을 세워두었단 점이다.

    건물 밖에서 이곳을 지켜보는 안토닌 드보르자크의 존경심이 전해지지 않는가.

    이토록 훌륭한 무대와.

    “B! B! B! B!”

    열정적인 관객까지 함께하니 엘리아후 인손과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참으로 행복한 환경에서 음악을 하고 있다.

    오늘은 이들과 함께 구스타프 말러를 이야기해 보려 한다.

    고개를 돌리자 윤희가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인다. 포디움에 서 있는 인손과 시선을 교환하고 숨을 골랐다.

    피아노 협주곡 A단조, 말러.

    천천히 화음을 풀어내어 먹구름을 불러온다.

    인손의 손짓에 따라 현악부가 차차 공간을 채우며 따라나선다.

    후두둑 떨어지는 빗방울 같은 옥타브. 아르페지오. 다시 옥타브.

    무심하게 누른 건반이 대지를 적신다. 한 방울, 두 방울. 이내 셀 수 없이 대지를 물들인다.

    그곳에 어린 음악가가 떨고 있다.

    블러드 와인의 애처로운 선율이 그녀에 의해 떨린다. 섬세한 비브라토로 전해지는 죄책감.

    빗방울이 떨어지는 폐허 속.

    말러가 울고 있다.

    * * *

    암운이 지듯 떨어진 피아노와 현악부가 펼친 황폐한 땅 위에 흐드러진 바이올린.

    배도빈과 나윤희는 각각의 주제를 이끌어 나갔다.

    조성 변화로 대조적 분위기를 주었던 그전까지의 소나타 형식과 달리 하나의 조성으로 소개되는 두 주제.

    비를 형상화한 피아노는 말러에게 닥친 시련을, 작게 떠는 바이올린은 겁먹은 소년을 말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은 서로의 심상을 점층시켜 나갔다.

    무너진 벽과 사라진 지붕.

    젖어가는 몸.

    자식 잃은 부모의 비명이 이어지고 그 가운데 침묵을 지키던 소년은 추위를 느끼는 자신이 미웠다.

    배고픈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형제의 죽음 앞에서도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잠든 자신이 두려웠다.

    뻔뻔하게도 평소와 다름없는 자신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그런 소년을 위로하는 사람은 없었다.

    누구도 괜찮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가르쳐 주지 않았다.

    도리어 그의 부모는 아들을 말러를 학대했다.

    블러드 와인이 자아낸 선율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방황한다.

    시간이 흘러 슬픔이 조금씩 무뎌갈수록 구스타프 말러는 자신을 저주했다.

    누군가의 사랑이 간절했던 소년은 결핍을 당연히 여겨야만 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보헤미아인으로.

    독일에서는 오스트리아인으로.

    세상에서는 유대인으로.2)

    평생을 이방인으로 살았던 말러는 목이 타들어 가는 갈증으로 목놓아 울었다.

    형제를 잃었기에 사랑을 갈망했고.

    고향이 없었기에 근원을 찾아 헤맸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남았는가.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기에, 물어볼 사람이 없었기에 그는 어렸을 적부터 스스로 질문을 던졌다.

    그 번뇌와 절망, 먹구름 진 밤 어두운 숲속 같은 막막함이 그를 잠식했다.

    바이올린이 사무치게 울고.

    피아노는 잔인하게 울린다.

    오케스트라는 종잡을 수 없는 변주를 이어가는 피아노를 따라잡는 것조차 버겁다.

    휘몰아치는 폭풍 속에서 독주 바이올린의 작은 목소리만이 희망의 불씨를 태운다.

    종결부에 이르러 시작된 카덴차.

    미간을 좁힌 채 연주에 집중한 나윤희는 어린 말러와 동화되어 있었다.

    다시 일어나지 않고선 도저히 버틸 수 없었기에.

    자신에게 던진 질문의 답을 구하지 않고선 살아갈 수 없었기에 찢어져 넝마가 된 몸을 다독인다.

    하나의 줄로 애타게 부르짖으며.

    또 다른 한 줄로 트레몰로.

    하나의 바이올린이 마치 두 악기처럼 노래하자 소년의 목소리 사이마다 천둥이 치는 듯했다.

    천둥소리에 자꾸만 묻히는 소년의 목소리.

    “…….”

    사카모토 료이치가 조심스레 숨을 내쉬었다.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에서도,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에서도, 대지의 노래에서도 느꼈던 말러의 번민과 성찰 그리고 안타까움이 그대로 전해졌다.

    배도빈과 엘리아후 인손이 재구성한 피아노 협주곡은 그야말로 구스타프 말러 본인이 편곡한 듯했다.

    타는 갈증 속에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 답을 구하려는 강인한 의지.

    넝마가 된 위태로운 영혼.

    그것은 스승 안톤 브루크너와 존경하는 리하르트 바그너.

    나아가 그들의 지침이었던 루트비히 판 베토벤과 같았다.

    절로 고개를 끄덕인 사카모토 료이치는 대망의 2악장을 기대하며 눈을 감았다가.

    배도빈이 벼락처럼 내려친 양손 옥타브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렸을 적부터 천재로 알려진 어린 작곡가에게 찾아온 또 다른 시련.

    그 누구도 그가 베토벤상을 수상하리라 의심치 않았지만 세상은 이번에도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경제적 자립을 위해서라도 상을 타야 했던 그에게 단 한 번의 실패는 용납되지 않았다.

    하늘이 무너지듯.

    1악장이 끝났다.

    ‘역시.’

    찰스 브라움은 의견이 분분했던 말러 피아노 4중주의 마지막을 효과적으로 처리한 배도빈과 엘리아후 인손에게 새삼 감탄했다.

    ‘이대로도 훌륭한 구성이다. 완결성을 주면서도 전개할 여지를 남겼어. 이러면 뒤가 궁금해질 수밖에. 아마 다음은.’

    찰스 브라움의 예상대로 반전된 분위기 속에서 2악장이 시작되었다.

    벼락이 꽂히고 폭풍이 멎은 폐허는 고요하기 짝이 없다.

    간혹 비올라가 새처럼 지저귀고 첼로가 바람에 이는 수풀처럼 사락사락댈 뿐.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 하늘은 고요하다.

    필사적으로 다시 세운 소년의 집만이 사라졌을 뿐이다.

    포기할 법한데.

    엇나갈 법도 한데 말러는 오열하면서, 비틀거리면서도 앞으로 나아갔다.

    다섯 살 난 딸의 죽음에도.

    아내가 떠나갔음에도.

    또다시 잔인하게 내리친 양손 옥타브의 향연 속에서도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눈물로 앞이 보이지 않아도, 다리가 끊어질 듯해도 기어이 발을 옮겼다.

    세상은 그의 노래를 들어주지 않았지만 말러 본인만은 자신이 노래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

    당장 돈을 벌어 생계를 유지해야 했기에 지휘봉을 들었으나, 그는 언제나 곡을 썼다.

    지휘를 준비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솟아나는 악상을 효과적으로 배치할지 고민했다.

    어쩌다 휴가를 받으면 온종일 방에 처박혀 악보와 씨름했다.

    의문투성이의 자신에게 답을 내려주는 건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음악을 향한 열정뿐.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오스트리아인으로서도.

    독일인으로서도.

    보헤미아인으로서도 인정받지 못했기에 이방인 말러는 스스로 자신이 누구인지 규정해야 했다.

    타는 갈증으로.

    입과 목이 바짝 마른 이가 물을 갈구하듯 간절한 마음으로 찾아낸 답은 하나.

    형제도 고향도 가족도 없지만 노래하는 자신만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했다.

    그 탓일까.

    음악가로서의 구스타프 말러 외에는 그를 구속하는 것이 전혀 없던 덕분에.

    그의 음악에는 경계가 없다.

    절제된 바흐.

    섬세한 쇼팽.

    극적인 바그너.

    그러나 구스타프 말러는 규정할 수 없다. 강인하다가도 바스러질 듯하고 통속적이면서도 과감히 변화한다.

    조성으로 이루어진 음악들은 그에 의해 해체되었다.

    끊임없이 반복해 던진 질문으로 관념에 구속되지 않고 끝없이 사고를 확장해 나간다.

    때문에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과 닮았다고 한다.

    어느 하나로 규정하기엔 너무나 복잡한 세계.

    그러나 베토벤과 말러 두 사람 모두 자신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위대한 악성이 낭만의 불꽃을 피웠듯.

    구스타프 말러의 의지는 현대 음악의 도화선이 되었다.

    ‘언젠가 나의 시대가 올 것이다.’3)

    상처투성이에.

    비틀거려서 당장에라도 고꾸라질 듯해도 그 연약한 발걸음이 가진 무게를 그 누가 이해했을까.

    더딘 걸음을 이어나갈 수 있었던 그 강인한 의지를 그 누가 알고 있었을까.

    그가 죽고 난 다음에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그들이 틀렸음을 깨닫고 만다.

    어디에서도 정착하지 못했던 이방인 구스타프 말러가, 지휘자 구스타프 말러가, 형제와 딸과 아내를 잃은 구스타프 말러의 위대함을.

    152년이 지난 지금.

    배도빈, 나윤희 그리고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의해 목도하고 있다.

    사정없이 쏟아지는 폭풍 속에서 칼날 같은 바람을 맞아가면서도 끝끝내 자신의 목소리를 잃지 않는 고결한 바이올린처럼.

    위대한 음악가가 말했다.

    ‘나의 시대가 올 것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답한다.

    이제는 그를 독일인이라고, 오스트리아인이라고, 체코인이라고, 위대한 음악가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한목소리로 말한다.

    당신의 시대라고.

    배도빈과 나윤희,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노래에 맞춰 경의를 담는다.

    루돌피눔에서 보낸 답장이.

    그에게 닿을 수 있을까.

    엘리아후 인손이 두 팔을 높이 들어 올림과 동시에 벅차오른 마음이 터졌다.

    “브라보!”

    “브라보!”

    그 순간 세계는 말레리안으로 가득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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