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559화 (559/564)
  • 5. 불멸

    그날 저녁.

    가족들이 도란도란 식사하던 중 배도빈이 청천벽력 같은 발언을 꺼냈다.

    “올해 입대하려고요.”

    “픕.”

    “컥.”

    유진희 배영준 부부가 깜짝 놀라 하마터면 씹고 있던 음식물을 뱉을 뻔했다.

    배도진이 멍하니 엄마 아빠를 관찰했다.

    유진희가 수저를 내려놓고 다급히 물었다.

    “갑자기 군대는 왜? 면제받지 않았어?”

    “도빈아, 네가 무슨 마음인 줄은 알겠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면제받은 걸 왜 굳이 가려 하니.”

    “저도 그런 줄 알았는데.”

    배도빈이 예전 홍승일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안 나간다니까요?’

    ‘아니. 넌 나갈 수밖에 없다. 콩쿠르에서 우승하면 군대를 안 가거든.’

    그때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현대 사회에 충분히 적응한 지금, 군 복무가 한 사람의 커리어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체감할 수 있었다.

    당장 배도빈이 베를린 필하모닉을 2년간 비운다면 시력을 잃었을 당시보다 훨씬 큰 피해가 생길 터였다.

    또한 올해는 2027 제2회 오케스트라 대전 이후 비약적으로 성장한 베를린 필하모닉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시기.

    군 복무 이행을 늦춘다고 해도 미래에 어떤 상황에 놓일지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다.

    특히나 만약 푸르트벵글러가 은퇴라도 한다면.

    배도빈이 없는 베를린 필하모닉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까지 없으면 그야말로 최악일 터였다.

    때문에 배도빈은 베를린 필하모닉을 위해서라도 푸르트벵글러의 은퇴 시기를 늦추고 서둘러 이 문제를 처리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때문에 군 복무 문제를 자세히 알아보게 되었고.

    홍승일의 말이 반은 옳고 반은 틀렸음을 깨달았다.

    배도빈이 스마트폰을 펼쳐 보였다.

    병역법

    제33조의 8(예술‧체육요원의 의무복무기간 등)

    ① 예술‧체육요원의 의무복무기간은 2년 10개월로 하며, 그 기간을 마치면 사회복무요원의 복무를 마친 것으로 본다.

    ② 예술‧체육요원에 편입된 사람에 대하여는 제55조에 따른 군사교육소집을 하며, 그 군사교육소집 기간은 의무복무기간에 산입한다.

    ③ (중략)

    ④ 예술‧체육요원은 해당 분야의 특기계발 및 의무복무에 관하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지휘‧감독을 받아야 한다.

    “훈련소에서 4주 훈련을 받고 그 뒤에는 병무청장이 정한 곳에서 복무해야 한대요. 2년 10개월.”

    부부는 눈을 의심했다.

    아들의 말대로 병역법에 그리 적혀 있었기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배도빈은 태연히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다녀오려고요. 푸르트벵글러가 있을 때 가야 마음이 놓여요.”

    “그렇긴 해도.”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너무나 갑작스러운 탓에 아들의 입대를 당장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그럼 언제?”

    “가을 되기 전이요. 슬슬 주변에도 알리고 적당히 준비되면 공부하러 돌아다니다가 바로 들어가게요.”

    연수차 세계 각지를 돌아다닌다는 말은 몇 번 들었기에 유진희와 배영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당황스러웠지만 아들 말대로 적당한 시기였다.

    유진희가 울컥했다.

    아들이 여러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안도했던 그녀는 그 힘든 곳에 아들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졌다.

    그녀가 첫째의 손을 꼭 잡았다.

    “왜 우세요. 좋은 일인데.”

    “얘는.”

    엄마 마음도 모르고 달래려는 아들이 기특하기도, 그런 아들이 훈련소에 가야 한다는 사실이 안타깝기도 했다.

    “그래서 이럴 바에는 현역으로 가는 게 낫지 않나 싶어요. 복무요원은 2년 10개월인데 현역은 1년 6개월이니까.”

    슬픔으로 가득했던 유진희의 눈이 번쩍 뜨였다.

    “괜찮아요.”

    “도빈아!”

    “나라 지키는 일인데요. 뭘.”

    “여보, 당신이 뭐라 말 좀 해봐요.”

    유진희가 당황해서 남편을 재촉했다.

    그러나 남편은 이상한 일에 고집을 부렸다.

    “그래. 남자가 현역 다녀오는 것도 괜찮아. 잘 생각했다. 가야 한다면 현역도 괜찮지.”

    잔뜩 근엄한 척하는 남편의 모습에 유진희가 이성을 잃고 말았다.

    “지는 박사 과정으로 면제받았으면서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하고 있어!”

    배영준, 배도빈, 배도진 부자가 얼어붙고 말았다.

    아내, 엄마가 아주 가끔 화났을 때는 토를 단다든지 항명하는 행위는 절대로 용납되지 않았다.

    완전 면제가 아니라 연구원으로 대체 복무를 했던 배영준은 사실을 말하지도 못하고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유진희가 다시 목소리를 낮추고 달래듯 말했다.

    “도빈아, 가서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거기가 얼마나 힘든데 굳이 가려 해.”

    “다들 그런 걸 감수하고 지켜왔고 지키고 있잖아요. 저니까 더 가야 해요.”

    유진희는 아들이 어떤 생각인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사회적인 위치를 보더라도 배도빈의 행동은 큰 파장을 일으켰다.

    어렸을 적부터 배도빈이 쓰는 가방이나 입은 옷이 품절 현상을 겪는 건 다반사였고, 아들의 발언은 음악계를 넘어서 예술계 전체에 영향을 끼쳤다.

    대한민국은 물론 아시아, 유럽, 아메리카 심지어 도빈재단이 자선사업을 벌이는 아프리카에서도 마찬가지였으니.

    본이 되기 위해서라도 군 복무를 이행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너무나 바르고 의젓하며 기특했지만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대한민국에서 아들을 가진 모든 부모가 겪는 일이었다.

    유진희가 아들을 끌어안았다.

    배도빈이 어머니의 등을 쓸어내리며 위로하며 속삭였다.

    “걱정 말아요.”

    아들이 말버릇처럼 반복해 온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 오늘따라 왜 그렇게 서운한지 알 수 없었다.

    배영준도 아내를 위로했고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배도진도 일단 슬퍼하는 엄마를 위로했다.

    적당히 분위기가 진정되고 다시 식사를 이어가는데 배도빈이 또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윤희 누나가 서른이더라고요.”

    “윤희가 벌써?”

    “만으로요. 생일 지나면 서른한 살이고요.”

    유진희가 나윤희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며 새삼 시간이 빠르다는 걸 느꼈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이승희의 난폭운전에 멀미하던 어설픈 아이가 벌써 서른이 넘었다니 신기했다.

    “그러게. 벌써 육 년이나 됐네. 그런데?”

    “결혼하기 적당한 나이다 싶어서요.”

    “어머. 윤희 남자친구 있었니?”

    “얼마 전에 생겼어요.”

    “잘됐다. 누군데? 악단 사람이야?”

    “저예요.”

    “픕!”

    “컥!”

    이번에는 부부 모두 입속에 있던 음식물을 뱉고 말았다.

    밥을 뜨고 그 위에 멸치를 올리고 있던 배도진은 숟가락에 잔여물이 튀자 울먹이기 시작했다.

    “지금 윤희랑 결혼한다는, 그, 그 말이니?”

    부부가 첫째를 다그쳤다.

    “네.”

    아들의 태연한 모습에 부부의 가슴이 재가 되어버렸다.

    군대 이야기에 새까맣게 타들어 가던 것이 이제는 아예 폭발하고 말았다.

    “네가 몇 살인데 벌써 결혼이야. 너 아직 스물셋밖에 안 됐어!”

    “엄마 둘이 사귀는 거 너무너무 기뻐. 근데 아빠 말처럼 너무 이르잖아. 응?”

    “젊을 때 해야 결혼해서 더 오래 살죠.”

    어렸을 적부터 애늙은이 같긴 했지만 세상 통달한 듯한 발언에 부부는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아들이 당황해하는 부모를 안심시켰다.

    “어머니도 스물다섯에 결혼하셨잖아요. 지금 행복하시고요.”

    유진희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기나긴 고민 끝에 그때 아버지 유장혁에게 바랐던 마음을 떠올리고 이내 진정했다.

    중요한 건 두 사람이 서로를 얼마나 위하는지, 사랑하는지였다.

    “윤희 좋아하니?”

    “네.”

    아들은 단 한 번도 허튼소리를 한 적 없었다. 부모를 속이려고 든 적도 없었다.

    아들을 신뢰하기에 유진희가 다시 물었다.

    “윤희도 그렇대?”

    “네.”

    얼굴을 감싸고 잔뜩 달아오른 열을 진정시킨 유진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데려와. 얘기해 보자.”

    “내일 괜찮아요?”

    너무 이르다고 생각했지만 어차피 마음먹은 일, 유진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배도진이 입을 열었다.

    “윤희 이모랑 형 결혼해?”

    가족들의 시선이 막내에게 향했다.

    “어떻게?”

    * * *

    화요일 오전 전체 회의.

    가족들에게 입대 사실을 알린 배도빈은 베를린 필하모닉 직원들에게도 그가 곧 장기간 자리를 비워야 함을 전했다.

    “왜!”

    “왜?”

    가족들이 받은 충격만큼이나 직원들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멀쩡하게 지휘자로서, 작곡가로서, 음악가로서 최고의 위치에 서 있는 보스가 갑자기 입대한다는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특히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노발대발하고 나섰다.

    “5년씩이나 묶어두더니 이러려고 한 짓이냐!”

    “네.”

    “뭐, 뭐라!”

    푸르트벵글러의 관자놀이에 힘줄이 돋아났다. 그의 혈압이 높아질 것을 걱정한 카밀라와 단원들이 말리려는데 배도빈이 입을 열었다.

    “제가 없을 때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킬 사람은 푸르트벵글러뿐이니까요.”

    배도빈이 다소 누그러든 푸르트벵글러를 보며 말을 덧붙였다.

    “제가 달리 누굴 믿겠어요.”

    “크, 크흠.”

    푸르트벵글러가 헛기침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상황이 당혹스러운 건 여전했다.

    푸르트벵글러만큼이나 흥분한 찰스 브라움과 가우왕이 배도빈을 다그쳤다.

    “만들 곡이 얼마나 많은데 군대는 무슨 놈의 군대야!”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 갑자기 군인이 되겠다니, 말이 안 되잖아.”

    잔뜩 화가 난 탓에 따지듯 물어본 질문이었으나 두 사람의 의문은 베를린 필하모닉의 전 직원을 대표하고 있었다.

    배도빈이 찰스 브라움과 가우왕을 진정시키며 단원들을 둘러보았다.

    “한국에서는 군 복무가 의무예요.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어요.”

    마누엘 노이어와 피셔 디스카우도 나섰다.

    “그러니까 왜 네가 가야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쩌고!”

    “설명했잖아요. 의무라고요.”

    “빌어먹을! 무슨 놈의 의무가 네 자유까지 침해해?”

    자유의 가치가 그 무엇보다 우선시되는 유럽인들에게, 특히나 군에 대한 인식이 안 좋은 독일인들에게 한국과 배도빈의 상황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휴전 상황이니까요. 지훈이도 마찬가지예요.”

    배도빈이 고개를 돌리자 직원들도 그를 따라 최지훈을 보았다.

    최지훈은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듯 그 누구보다도 놀라고 있었다.

    “나도? 면제 아니었어? 너도…….”

    “가야 해. 대체복무인가 뭔가로.”

    최지훈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연수 떠나고 바로 입대할 거예요. 그 기간까지 합치면 대략 2년 정도는 걸릴 테고.”

    “…….”

    “…….”

    회의장이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비록 설명을 듣긴 했어도 문화, 인식의 차이로 완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이 자랑하는 보스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가 군인이 된다니,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실은 대한민국을 제외한 많은 국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배도빈의 입대 예정 사실이 공표되자 각국 언론은 속보까지 내며 해당 내용을 알렸다.

    [The B, “올해 입대 예정.”]

    [마에스트로 B, 군인이 되다]

    [배도빈 현역 입대 파문]

    베를린 필하모닉의 악단주이자 도빈재단 이사장 배도빈 씨가 어제 오후 5시(베를린 현지 시각) 현역으로 입대할 것을 밝혔다.

    배도빈 씨는 2028년 현재 만 22세로 일반적으로는 입대할 시기다.

    그러나 제1회, 제2회 오케스트라 대전을 포함해 4개의 국제 콩쿠르에서 수상하고 그래미 본상, 아카데미 음악상, 그로마이어 작곡상, 에른스트 폰 지멘스 음악상 등 권위 있는 상을 휩쓴 그가 반드시 입대해야 하는지 의문이 생긴다.

    병역법에 따르면 배도빈 씨는 현역 복무 대신 예술‧체육요원으로서 2년 10개월간 대체 복무를 이행하게 된다.

    그러나 현역 복무 기간보다 훨씬 긴 기간이 그의 선택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올해 안에 현역으로 복무하여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권리와 책임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이와 같은 기사에 대한민국 각 포털 사이트의 상위 검색어가 모두 배도빈과 관련된 단어로 채워졌다.

    └왜?

    └왜???

    └아니 도빈이 정도면 진짜 면제해 줘야 하는 거 아냐?

    └와 배도빈 빽도 장난 아닐 텐데 현역으로 가려 하네. 인정한다 진짜.

    └배도빈이면 빽 안 써도 충분히 뺄 수 있을걸?

    └병무청 일 안 하냐!!!

    └어지간하면 빼지.

    └대체 복무 기간이 너무 길어서 차라리 현역으로 다녀오려는 듯. 1년 이상 차이 나니까.

    └아니 어지간한 사람도 아니고 배도빈이 현역 가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진짜 나라 알린 공으로 따지면 넘사벽인데.

    └타임지가 김정은보다 유명한 한국인은 배도빈뿐이라며.

    └김정은이 어떻게 한국인이야.

    └내 생각이냐? 걔들 입장에선 어쨌든 korea니까 그렇게 말했겠지.

    └아니~ 어떻게 사람이냐고. 돼지 새끼지.

    └어엌ㅋㅋㅋㅋ국산돼짘ㅋㅋㅋㅋ

    └국내 축산업 종사자로서 김정은 국산돼지 발언 듣기 거북하네요. 우리 저딴 돼지 안 키워요.

    └이건 솔직히 내가 봐도 말이 안 된다. 2년 10개월이든 1년 6개월이든 배도빈이 그동안 벌어들일 돈이 얼마고 나라 위해서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걸 막아?

    └배도빈이 세금을 독일에 내지, 대한민국에 내냐?

    └ㅇㅇ 어지간한 사람들보다 많이 냄.

    └뭔 소리야.

    └배도빈 한국에 매년 수십억 원씩 기부함. 님이 평생 벌 돈보다 훨씬 많이 매년 냄.

    └ㅈㅅ.

    └서울 올림픽 주제가도 만들고 있다며. 애국가 다시 만들어 달라는 사람도 있는 애를 꼭 군에 보내야 하나?

    └염병. 이래서 내가 군대가 싫어. 지들 해 처먹는 건 오지게 많으면서 국민은 사정 안 보고 무조건 강제 입대시키고. 공정하게 운영할 거면 방산비리나 없애 ㅅㅂㄴ들아

    └병무청이 문제네.

    └군대가 문제네.

    * * *

    배도빈 저택의 조리장 정 셰프는 집주인이 주문한 포테이토 피자를 조리하고 있었다.

    그의 취향을 정확히 알고 있기에 적당한 크기로 잘 익은 웨지감자와 두툼한 베이컨을 넉넉하게 준비했다.

    나폴리 스타일의 얇은 도우 위에 수제 토마토소스를 펴 바르고 그 위에 모차렐라 치즈를 적당량 뿌려 재료를 고정했다.

    그 위에 스위트콘과 슬라이스 양파, 웨지감자, 베이컨 그리고 단맛이 나는 피망을 충분히 토핑했다.

    그 위에 다시 다량의 모차렐라 치즈를 올리고 가운데에 카망베르 치즈를 얹었다.

    마지막으로 직접 만든 마요네즈를 그물처럼 뿌리니 칼로리는 맛에 비례한다는 법칙에 의거. 매우 바람직한 한국형 피자가 완성되었다.

    피자가 오븐에서 나오자 정 셰프가 숨을 들이마셨다.

    코를 통해 들어온 풍요로운 향기에 만족한 그는 직접 배도빈의 6층으로 올라갔다.

    피자를 받아 든 배도빈이 그에게 인사했다.

    “냄새 좋네요.”

    “이보다 맛있는 포테이토 피자는 없을 겁니다.”

    “잘 먹을게요.”

    배도빈이 6층 거실로 향하자 차채은이 달려들어 피자를 받았다.

    거실 냉장고에서 음료를 꺼낸 뒤 배도빈, 최지훈, 차채은이 피자를 한 조각씩 들었다.

    “맛있당~”

    차채은이 한 입 크게 물곤 행복해했다.

    최지훈도 차채은과 눈을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즐거운 저녁 식사가 어느 정도 이어지자 최지훈이 다소 진지하게 물었다.

    “정말 현역으로 갈 거야?”

    “켁. 켁켁. 콜록.”

    사레 걸린 차채은이 가슴을 치곤 다급히 물었다.

    “오빠 군대 가? 왜? 어째서?”

    긴 내용을 설명하기 귀찮았던 배도빈이 베를린 필하모닉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보여주었다.

    차채은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것을 읽는 도중 배도빈이 최지훈의 질문에 답했다.

    “그래야 시간 아끼지.”

    “찾아보니까 보통 우리나라 악단에서 활동하게 된다던데.”

    최지훈은 2년 10개월간 베를린 필하모닉을 떠나 있는 걸 상상했다.

    아쉽긴 해도 현역보단 대체복무가 나을 것 같았다.

    어찌 되었든 음악을 계속할 수 있고 대한민국 클래식 음악계도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으니 뭐라도 얻을 것 같았다.

    반면 현역 복무는 여러 면에서 제약이 있을 테고 특히나 연습 시간을 충분히 가질 수 없을 테니 한창 물오른 감을 잃을 것 같았다.

    “어떻게 하지.”

    배도빈의 성명문을 읽고 있던 차채은의 눈이 이젠 거의 튀어나올 듯했다.

    “오빠도 가?”

    “응. 완전 면제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안 돼! 가지 마!”

    “어떻게 안 가.”

    “안 돼! 어딜 가!”

    차채은이 최지훈을 흔들며 강력히 항의했지만 소용없었다.

    최지훈이 겨우 그녀를 달래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아.”

    배도빈이 고개를 들자 최지훈이 방금 떠올린 생각을 꺼냈다.

    “군악대도 있잖아.”

    “군악대?”

    “응. 현역이니까 시간도 짧고 음악도 계속할 수 있고.”

    “……흐음.”

    최지훈의 말대로 배도빈 입장에서는 대체복무와 일반 병사보단 훨씬 나은 조건이었다.

    배도빈이 소리 내어 TV를 켰다.

    “대한민국 군악대 검색해.”

    -대한민국 군악대를 검색하겠습니다.

    피자를 먹으며 군악대와 관련된 정보를 훑어본 배도빈과 최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은 취주악단을 이루지만 빅 밴드 형식의 오케스트라나 관현악단도 있었다.

    피아니스트도 간혹 있고 가수도 뽑는다고 하니 두 사람이 관심을 보였다.

    “가지 마아아~”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야.”

    최지훈이 웃으며 차채은을 달래곤 배도빈에게 말했다.

    “그럼 아예 같이 갈래?”

    “같이?”

    “응. 동반입대라고 있다고 들었어. 둘이 같이 가면 더 낫지 않을까?”

    최지훈이 자신 때문에 현역으로 가고자 했다면 말렸겠지만 군악병으로 함께 복무할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그러게.”

    “지원자가 많아서 신청 엄청 힘들대. 서둘러야 할걸?”

    배도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맛있는 포테이토 피자에 행복했던 차채은은 잔뜩 우울해져 있었다. 입을 내민 채 멍하니 피자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너무 걱정 마.”

    “둘 다 안 가면 안 돼? 괜히 갔다가…….”

    차채은이 입을 열었다가 말이 씨가 될지도 모른단 생각에 말끝을 얼버무렸다.

    배도빈의 시력도 걱정이었고 최지훈이 피아노를 못 치던 당시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알기에 쉽게 말할 수 없었다.

    “괜찮아.”

    “응. 괜찮을 거야.”

    “그래도…….”

    괜찮다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더욱이 가장 친한 친구 두 사람을 18개월이나 못 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리고.”

    그때 배도빈이 또 무심히 입을 열었다.

    “결혼하기로 했어.”

    최지훈과 차채은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너무나 뜬금없고 황당하여 어떤 반응도 할 수 없었다.

    “군 문제 해결되면 바로 식 올릴 거야.”

    차채은이 테이블을 치고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누구랑? 윤희 언니?”

    배도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차채은이 양쪽 볼을 감싸고 입을 크게 벌렸다.

    배도빈의 약혼 소식을 들은 최지훈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사귄다는 말 없었잖아.”

    “그랬지.”

    “그랬지?”

    “저번 주 일요일에 말했어.”

    “그제잖아! 사귀고 이틀 만에 결혼하기로 했어?”

    “아니. 어제.”

    최지훈과 차채은은 그날의 상황을 자세히 들을수록 배도빈과 나윤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렸을 적부터 가까이 지내며 배도빈이 이상하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고백과 동시에 결혼을 약속하다니.

    무슨 신경인지 알 수 없었다.

    결혼하자던 배도빈이나 결국 수락한 나윤희나 신기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에 앞서 기뻐할 일이었다.

    “결국엔 이렇게 될 거면서 그동안 뭘 그리 감췄어.”

    “감춘 거 없어.”

    두 사람은 지금 배도빈이 얼마나 행복한지 알 수 있었다.

    평소처럼 무뚝뚝한 척하지만 슬며시 올라간 입꼬리를 감출 순 없었다.

    ‘윤희 언니랑 도빈 오빠가…….’

    그런 생각을 하며 최지훈을 보던 차채은이 그와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황급히 피했다.

    최지훈이 빙그레 웃었다. 차채은의 반응을 모른 척하며 배도빈에게 말했다.

    “이제 주말마다 같이 못 놀겠다.”

    “왜.”

    “결혼하면 그럴 거 아니야.”

    최지훈이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내밀었다.

    “나 버리는 거야?”

    배도빈이 인상을 썼다.

    “버리긴 뭘 버려.”

    “그렇게 즐겁게 놀았으면서……. 나 서운해.”

    “재미없어.”

    배도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피자를 먹으니 최지훈이 밝게 웃었다.

    놀릴 때마다 배도빈이 보이는 반응이 재밌었다.

    최지훈도 피자 조각을 하나 더 들며 물었다.

    “지금 누구누구 알아?”

    “천천히 알려야지. 지금은 너희 둘. 오늘 소소한테 말한다고 했으니 소소도 알고 있을 거야.”

    “고백은 어떻게 했는데?”

    “뭐?”

    “빨리. 궁금하잖아.”

    최지훈의 질문에 차채은도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배도빈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 * *

    “축하드립니다, 회장님.”

    긴 시간을 공들여 마침내 영국 의회를 장악한 최우철은 감회에 젖어 있었다.

    영국 상원 즉 귀족원(House of lords)을 매수한 최우철은 영국 국가사업의 대부분을 독점하게 되었다.

    과거 버만 가문의 사업체를 성공적으로 인수했으니.

    금융업을 시작으로 영국의 건설업‧방위산업‧항공우주산업이 모두 최우철의 손아귀에 들어왔고.

    귀족원의 지지로 얻어낸 국가사업을 기반 삼아 안정적으로 세를 불려나갈 수 있었다.

    유장혁 회장으로부터 투자받았던 JH와 달리 온전히 그만의 소유물을 얻은 최우철은 자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우철이 손짓하여 부하 직원들을 내보내고 술잔을 기울이는데 사랑하는 아들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버지?

    “그래. 잘 지내고 있지?”

    -잘 지내고 있어요. 아버지도 술 안 마시고 계시죠?

    “이런. 오늘 아빠 기분이 좋아서 한 잔 마시고 있지.”

    -딱 한 잔만이에요.

    “하하. 그래. 그래.”

    최지훈이 잠시 간격을 두고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

    “음?”

    -저 군대 가야 하는데, 도빈이랑 같이 가고 싶어요.

    그러지 않아도 기분이 좋았는데 아들의 전화까지 받아 한껏 인자했던 최우철의 얼굴이 굳었다.

    “군대?”

    -네. 콩쿠르 우승하면서 면제받은 줄 알았는데 대체복무를 해야 한대요.

    “그래.”

    그 사실은 최우철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기간이 너무 길더라고요. 그럴 바에는 군악대로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흠. 기간은 어떻게 되고?”

    -대체복무가 2년 10개월. 현역이 1년 6개월이에요.

    최우철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아들 말대로 시간은 그 무엇보다 가치 있었다.

    더군다나 짧은 기간도 아니고 현역과 대체복무는 16개월이나 차이 났다.

    최우철은 그 시간이라면 어떤 일이라도 가능하다고 여겼다.

    분명 합리적인 선택이지만, 아들을 사랑해 마지않는 그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최우철의 고민이 이어졌고.

    최지훈의 설득이 계속되었다.

    -군악대에서 감 잃지 않으면서 지내다가 돌아오고 싶어요. 한국에서 활동하는 것도 좋겠지만, 여기가 제일 좋은걸요.

    “그래.”

    최우철이 숨을 내쉬었다.

    “네 생각이 정 그러하다면 어쩔 수 없지.”

    -정말요? 그럼 입대 신청해도 돼요? 빨리 안 하면 놓친대요.

    “그래. 하지만 더 좋은 방법이 생기면 그쪽으로 알아보도록 하자.”

    -네!

    전화를 끊은 최우철이 턱을 쓸었다.

    아들의 뜻을 존중해 주고 싶어서 그러라고 했지만, 도저히 아들을 현역으로 보낼 수 없었다.

    현역으로 복무했던 최우철은 군대가 아무리 개혁을 거듭해도 부조리가 넘치는 곳임을 잘 알고 있었다.

    혹시라도 아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를 일이고 또한 아들이 부당한 일을 당해도 알아낼 방법이 많지 않았다.

    “어쩐다…….”

    최우철이 술을 홀짝였다.

    * * *

    “괜찮다고 하셨어!”

    아빠와 통화를 마친 최지훈이 두 손을 번쩍 들었다.

    “그렇게 신나?”

    차채은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최지훈이 고개를 끄덕이자 콧방귀를 뀌었다. 남의 속도 모르고 좋아하는 최지훈에게 단단히 삐졌다.

    최지훈은 차채은의 반응을 귀엽게 여기곤 컴퓨터를 켰다.

    “이렇게 서두를 필요 있나?”

    최지훈이 병무청 홈페이지로 접속하자 배도빈이 뒤에서 물었다.

    “무슨 말이야. 이거 신청하는 게 얼마나 힘든데. 군악대는 신청자가 많아서 가기 어렵대.”

    최지훈이 항목을 살펴보던 중 아 하고 감탄했다.

    “7월에 자리 있어.”

    최지훈의 말에 배도빈이 모니터를 유심히 살폈다. 그러지 않아도 연수 뒤에 곧장 입대하려고 했기에 적당해 보였다.

    “시간 많이 남았네.”

    “아니야. 7월에 가려면 지금 신청해야 해.”

    “그래?”

    “응. 입영 신청하고 3개월 뒤에나 입대한대.”

    최지훈이 마우스 포인터로 접수 기간이 안내된 문구를 강조했다.

    “뭐뭐 뽑는대?”

    “잠깐만.”

    최지훈이 모집 분야 항목을 찾았다.

    이내 목관과 금관, 타악기, 피아노, 전자악, 성악, 현악기를 분야를 모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시험도 봐?”

    “응. 지원자가 많으니까. 피아노 가면 되겠다. 같이 있을 수 있고.”

    “한 부대에 피아니스트를 둘이나 받나?”

    “아. 같이 있으려면 다른 거 선택하는 게 나으려나? 아니다. 어차피 동반입대면 같은 부대로 간다고 했어.”

    “바이올린 하지 뭐.”

    “왜?”

    “내가 들어가면 너 피아노 못 칠 거 아냐.”

    “뭐어?”

    배도빈 콩쿠르에서 못다 한 승부로 아웅다웅하기 시작한 형제가 곧 정신을 차리고 모집 요강을 확인했다.

    두 사람이 지원서를 작성하기 시작하자 차채은의 불안이 임계점에 이르렀다.

    “진짜 안 가면 안 돼? 대한국향 같은 곳에서 일하면 되잖아.”

    “그렇긴 한데 너무 길어.”

    “내 맘대로 못 하잖아.”

    “길긴 긴데, 그래도 오빠들 무시하진 않을 거고. 게다가 차명운 선생님하고도 친하고.”

    “친하니까 싫어.”

    “나도 아는 분하고 그런 관계 되면 불편해질 것 같아.”

    “으으으으. 몰라!”

    고집불통인 두 친구를 설득할 말이 더 이상 떠오르지 않은 차채은이 소리를 빽 지르고 밖으로 나섰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지원서를 작성한 최지훈이 지원 신청란을 눌렀다.

    그 뒤에 배도빈도 신청을 마쳤고 두 사람은 그간 고민했던 일이 명확해졌음에 되레 후련해졌다.

    “정말 가는 거네.”

    “가야지.”

    “군악대에 아는 사람 있을지도 모르겠다.”

    “싫은데.”

    “네 팬은 분명 있을 거야.”

    배도빈이 눈을 찡그렸다.

    “근데 군대 가면 샤워도 같이한다고 하던데 정말 그럴까?”

    “그게 뭐 어때서.”

    “신기하지 않아?”

    “뭐가 신기해. 그럼 공중목욕탕도 신기하냐?”

    “가본 적 있어?”

    최지훈의 천진난만한 질문에 배도빈이 당황했다.

    “……이래서 부잣집 애들은.”

    “자기도 마찬가지면서.”

    “넌 안 되겠다. 단체생활 못 하니까 그냥 대체복무 해.”

    “할 수 있어!”

    “못 해.”

    “할 수 있다니까?”

    형제가 또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 * *

    한편 박병무 병무청장은 출근 전 뉴스를 보다가 아내에게 때아닌 타박을 받았다.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그런 애를 꼭 입대시켜야 해?”

    “갑자기 무슨 말이야?”

    “배도빈 말이야. 그렇게 장한 애를 꼭 군인으로 데려가야 하냐고.”

    “맞아. 아빠 진짜 너무해.”

    직장 다니는 딸까지 나와서 가세하니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박병무 병무청장은 어이가 없어졌다.

    그러나 때마침 아침 뉴스에서 배도빈이 현역으로 입대한다는 보도가 흘러나왔다.

    -베를린 필하모닉 악단주 배도빈 씨가 2년 10개월의 대체복무 기간이 길다는 이유로 현역으로 입대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어제와 오늘 70만 명의 네티즌들이 배도빈의 군 면제를 검토해 달라는 청원 글에 동조하였습니다.

    -청원 글은 배도빈 씨가 오케스트라 대전 우승과 그래미 어워즈를 수상하는 등 대한민국의 위상을 한 단계 높였고 예술계와 취약계층에 매년 수십억 원을 기부하고 있다며, 그의 입대로 생기는 여러 문제를 시사하고 있습니다.

    -한편 배도빈 씨가 입대할 수밖에 없는 현 병역법에 관해서도 문제를 제시하고 있으며, SNS 등지에서는 병무청을 향한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NBC 김준용이었습니다.

    박병무 병무청장이 눈을 깜빡였다.

    잠시 뒤 그의 핸드폰이 무섭게 울리기 시작했다.

    확인해 보니 친인척과 주변 사람들에게서 하나 같이 배도빈이 정말 현역으로 가야 하는지, 대체복무 기간이 왜 그렇게 긴지 따지거나 묻고 있었다.

    ‘이게 뭔 날벼락이야.’

    박병무 병무청장이 주섬주섬 옷을 입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청사에 도착하자마자 긴급회의를 소집했고 아니나 다를까.

    직원 모두 아침부터 얼떨떨해하고 있었다.

    기자들이 청사 앞에 진을 치고 있었고 인터뷰를 요청하는 전화는 끊이질 않았다.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 봐.”

    한 사람이 나섰다.

    “그…… 배도빈은 2015년, 만 9세 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대체복무 자격을 획득했습니다.”

    “그런데.”

    “성명문을 보니 복무 기간 2년 10개월을 부담스럽게 여겨 현역으로 입대하겠다고 합니다.”

    “젊은 친구가 아주 바람직한 생각을 했는데 대체 뭐가 문제야? 이게 이 난리나 될 일이냐고.”

    박병무 병무청장이 회의실 TV를 틀었다.

    뉴스에선 여전히 배도빈의 입대 사실을 다루고 있었다.

    -세계 클래식 음악 협회장 미카엘 블레하츠는 인류 전체의 보물이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지 못하여 애석하다. 대한민국의 분단 상황이 안타깝다고 전했습니다.

    -한편 한 독일연방 하원의원은 대한민국은 배도빈과 같은 음악가에게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발언해 비난과 지지를 동시에 받고 있습니다.

    -한국 클래식 음악 협회장 한지석 교수는 국방부와 병무청이 유연하게 대처해 줄 거라 믿는다고 하였습니다.

    -어제 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배도빈 면제 재검토 글에 70만 명 이상이 동의하였습니다. 현재도 가파르게 오르는 동의자 수에 정부가 어떤 답을 내놓을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한편 조금 전 베를린 필하모닉 소속 피아니스트 최지훈도 배도빈과 동반입대 하겠다는 뜻을 내비쳐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차이코프스키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한 최지훈 피아니스트에 대한 우려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박병무 병무청장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 법대로 진행하고 있고 본인도 그러겠다는데 왜들 이리 난린지. 저 최지훈이란 놈은 또 뭐고.”

    “워낙에.”

    직원이 막 답변하려던 차 박병무 병무청장의 핸드폰이 울렸다.

    아침부터 끊임없이 연락이 오는 탓에 무음으로 설정해 둔 그의 핸드폰이 소리를 낸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그가 주변에 눈치를 주었다.

    회의실이 일순간 조용해졌고 박병무 병무청장이 전화를 받았다.

    “예, 장관님. 박병무입니다.”

    -그래요. 청장도 뉴스 보셨지요?

    “예. 현재 관련 사안에 대해 논의 중입니다.”

    -대처가 빠르네요. 좋아요.

    박병무 병무청장이 한시름 놓았다.

    -국민이 지켜보고 있는 사안입니다. 혹여나 문제가 생기면 안 될 거예요. 청장이 법대로 공정하게 처리할 거라 믿습니다.

    “예.”

    -쓰읍. 다만.

    국방부 장관이 숨을 들이마시자 박병무 병무청장이 다시 긴장했다.

    -그가 혹여나 복무 중에 다친다든가 혹시 모를 일을 우려하는 목소리를 무시할 순 없습니다. 또 나라에 기여한 바가 크다는 것도요.

    “예. 예.”

    -만약 아주 작은 문제라도 생기면 그 뒷감당, 청장의 권한을 넘어설 거란 말이에요. 내 말 이해하시지요?

    “예. 물론입니다.”

    -하하. 아침부터 여러모로 고생합니다. 그럼.

    “예. 예.”

    통화를 마친 박병무 병무청장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장관은 분명 법대로 공정하게 처리하라고 지시했으나, 만에 하나 아주 작은 문제라도 생길 시 크게 번질 거라 경고했다.

    박병무는 그 말을 합법적이고 공정한 방식으로 배도빈의 입대를 막으란 뜻으로 받아들였다.

    “흐으음.”

    박병무 병무청장이 숨을 길게 내쉬곤 직원들에게 일렀다.

    “정당한 절차로 해결하라 하시는데, 배도빈이랑 비슷한 사례가 있나?”

    한 사람이 답했다.

    “완전히 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아이돌 그룹이 입대하기 전에 해외 체류 가능 기간을 늘려준 사례가 있습니다.”

    박병무 병무청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에도 결국 법을 고치진 못하고 빼어난 활약을 보인 아이돌 그룹이 군에 입대한 전력이 있었다.

    해서 법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유연하게 대처했는데, 이번에도 같은 상황이었다.

    병무청의 고민이 깊어졌다.

    “청장님.”

    그때 한 사람이 나섰다.

    “제가 알기로 배도빈은 비행기 추락 사고 이후 후유증을 앓고 있습니다. 이걸로 완전 면제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제안자가 군 면제 사유 항목을 보였다.

    변형치유된 사람으로서 신경증상 및 기능장애가 있는 경우 또는 수술 후 후유증이 있는 경우 면제된다는 항목이 명시되어 있었다.

    박병무가 테이블을 치고 발언자를 가리켰다.

    “기자들 불러.”

    * * *

    “흥흐흥흐흐흥.”

    컴퓨터로 TV를 틀어놓은 채 침대에 누워 있던 최지훈은 나름대로 군 생활을 기대하고 있었다.

    배도빈이 결혼하면 전처럼 항상 붙어 있을 수 없을 테니 군 생활을 하며 추억을 많이 만들고 싶었다.

    현역 입대 정도는 충분히 감내할 수 있었다.

    그런 마음에 흥얼거리고 있는데 TV에서 이상한 말이 흘러나왔다.

    -배도빈 악단주의 현역 입대 의사 표현과 관련해 병무청이 공식 입장을 내놓았습니다.

    -오늘 오후 4시. 박병무 병무청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배도빈의 현역 입대 및 대체복무는 전문의의 소견서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라고 단정 지었습니다.

    -박병무 병무청장은 지난날 사고 후유증으로 실명한 전적을 언급하며, 배도빈이 현역 및 대체복무를 이행하려면 기간을 충분히 두고 완치 사실을 증명해야 함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안과 전문의 안경원 씨는 사고 후유증의 원인을 찾지 못했던 배도빈 씨가 완치 사실을 증명하기란 사실상 어려울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NBC 김준용이었습니다.

    TV를 보던 최지훈은 한동안 말이 없어졌다.

    “……어?”

    배도빈과 1년 6개월간 함께 지낸다는 생각에 잔뜩 부풀었던 그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 * *

    배도빈 저택에 도착한 나윤희가 차에서 내리기 전에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수천 번 무대에 오르고.

    수억 명이 지켜본 오케스트라 대전에서도 당당히 노래했으나 오늘만큼은 도무지 진정할 수 없었다.

    청심환을 꺼내 꼭꼭 씹은 그녀는 유진희, 배영준 부부에게 도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렸을 적부터 맹신하여 장기간 복용한 청심환조차 그녀를 안정시키지 못했다.

    똑똑-

    “힉!”

    그녀가 겨우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을 때 누군가 창문을 두드렸다.

    덕분에 깜짝 놀란 나윤희의 심박 수가 크게 올라갔다.

    배도빈이었다.

    나윤희가 너무 놀란 탓에 어쩌지 못하자 피앙세를 걱정한 배도빈이 차에 올라탔다.

    “안 들어오고 뭐 해요.”

    “…….”

    다시 생각해 보자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다.

    사회적인 시선과 마침내 이룬 따뜻한 인간관계가 깨질 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남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왔던 그녀에게도 양보하고 싶지 않은 게 생긴 것이었다.

    자신보단 타인을 위했던 나윤희는 자신 안에 생긴 욕심에 당황하면서도 그것을 놓고 싶지 않았다.

    그를 사랑함으로써.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괜찮아.”

    나윤희가 배도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윤희가 구강청결제를 뿌리고 청심환 냄새가 나는지 확인한 뒤 백미러를 통해 머리를 다듬었다.

    “예쁘니까 걱정 마요.”

    나윤희가 민망해서 작게 웃었다.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이 함께 저택 안으로 들어서 엘리베이터에 탔다.

    몇 번이고 다녔던 길이, 한때는 살기도 했던 건물이 오늘따라 낯설게 느껴졌다.

    7층 라운지에 도착하자 배도빈과 나윤희를 발견한 배도진이 달려들었다.

    “이모!”

    나윤희가 오랜만에 만난 배도진을 반갑게 안았다.

    “왜 요즘 놀러 안 와?”

    “이제 자주 볼 거야.”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고민하던 나윤희 대신 배도빈이 답했다.

    “진짜? 소소 이모도?”

    “도진아.”

    나윤희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진희의 싸늘한 목소리가 둘째를 불렀다.

    황급히 일어선 나윤희 앞에 유진희가 모습을 보였다.

    수수한 평소 차림과 달리 한껏 멋을 내고 있었다.

    “어, 언니.”

    “누가 네 언니야?”

    유진희의 쌀쌀맞은 태도에 나윤희의 가슴이 철렁했다.

    독일 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이승희와 유진희 덕분이라고 생각했던 나윤희는 그녀에게 큰 죄를 진 것 같아 고개를 숙였다.

    “여보, 왜 그래.”

    배영준이 멋쩍게 웃으며 나섰지만 소용없었다.

    “도진이 너도 이모라고 부르지 마.”

    엄마의 꾸중에 배도진이 금방 울상이 되었다. 평소 엄하기는 하지만 사랑을 느낄 수 있었던 반면, 오늘 엄마는 무섭기만 했다.

    배도진이 아빠에게 안겼다.

    상황을 지켜보던 배도빈이 말했다.

    “고개 들어요.”

    나윤희가 용기를 내 고개를 드니 유진희가 고개를 팩 돌리고 테이블로 향했다.

    “들어와.”

    배영준이 어색한 분위기를 풀고자 웃었으나 그다지 소용없었다.

    배도빈이 잔뜩 굳어버린 나윤희에게 말했다.

    “내가 누나 좋아하는 게 잘못이에요?”

    나윤희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럼 누나가 날 좋아하는 건요?”

    이번에는 잠시 망설이다가 마음을 굳힌 듯 입을 열었다.

    “아니야.”

    배도빈이 그녀의 손을 잡고 웃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걸어 모퉁이를 돌아섰다.

    호화롭게 장식된 테이블 맞은편에 배영준, 유진희 부부가 앉아 있었고 그 곁에 배도진이 입을 잔뜩 내밀고 토라져 있었다.

    “앉아.”

    유진희의 고압적인 태도에 배도빈이 입을 열려던 차 나윤희가 먼저 나섰다.

    “어, 언니, 형부.”

    그녀는 말을 더듬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많이 놀라고 당황스러운 거 알아요. 저 같아도. 저라도 화날 거예요.”

    죄송하단 말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배도빈의 말대로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사과하고 싶지 않았다.

    축복받고 싶었다.

    그러나 유진희의 싸늘한 시선에 어쩌면 이제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은인으로 여겼던 유진희를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윤희가 필사적으로 말을 쥐어짜 냈다.

    “도빈이 좋아해요. 많이 좋아해요.”

    턱을 살짝 들고 무심하게 나윤희를 보고 있던 유진희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크게 의지했던 사람이기에 그녀의 태도 변화가 더더욱 가슴 아팠다.

    그러나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배도빈과 결혼하고 싶다.

    단지 유진희의 태도가 너무 무서워서 결혼이란 단어를 입에 담기 두려웠다.

    다만 두려울 뿐.

    자신을 사랑하기 시작한 그녀를 막을 순 없었다.

    배도빈이 나서려 하자 나윤희가 그의 손을 붙잡고 외쳤다.

    “부, 부디 아드님을 제게 주세요! 손에 무, 물 안 묻히게 할게요! 행복하게 살게요!”

    “…….”

    “…….”

    피앙세의 선언에 배도빈이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연인의 필사적인 모습에 놀란 한편 왜 자기가 할 말을 가져가냐고 따지고 싶기도 했다.

    배도진은 깜짝 놀라서 두리번거렸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얼굴로 두 사람을 지켜보던 유진희가 결국 참지 못하고 웃어버렸다.

    유진희와 배영준이 크게 웃은 탓에 나윤희는 어리둥절했고 고개를 돌리니 배도빈마저 황당하다는 듯 피식 웃고 있었다.

    유진희가 겨우 진정하고 입을 열었다.

    “너희도 알다시피 결혼할 때 아버지랑 다퉜어. 반대만 하시는 게 미워서 화가 많이 났거든.”

    배도빈과 나윤희가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들었다.

    “목소리 높여가며 싸우다가 결국엔 안 보게 되었지. 무서웠거든. 설득할 자신도 없었고.”

    유진희와 배영준이 손을 잡았다.

    “그래도 지금 이렇게 행복하고. 그때 나보다 지금 윤희 네가 더 나은 것 같네. 네 성격에 이렇게 설득하려고 나올 줄은 몰랐거든.”

    유진희가 나윤희와 시선을 마주하며 말했다.

    “우리 도빈이 정말 사랑하는구나 싶네.”

    “언니…….”

    나윤희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쓰읍.”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눈물을 떨어뜨릴 수 없었다.

    “언제까지 언니라고 할 건데?”

    “……어, 어.”

    나윤희가 눈을 질끈 감았다. 고였던 눈물이 흐르며 그녀의 목소리가 힘겹게 울렸다.

    “어, 어, 어머님.”

    그제야 유진희가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둘째에게 당부했다.

    “도진이도 이제 윤희한테 이모라고 부르면 안 돼.”

    “왜요?”

    “형수님 해야지.”

    “형수님……?”

    “응.”

    “어려워요.”

    “하하. 누나라고 하면 되지. 이제 가족인데.”

    배영준이 둘째의 머리를 쓸어 넘기며 웃었다.

    “도빈이 너도.”

    “네.”

    “방금 대들었으면 엄마 너 안 봤어. 내가 널 얼마나 위했는데 이 정도 확인도 못 하니? 윤희, 그래 안 그래.”

    “그래요.”

    나윤희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배도빈이 어머니와 연인을 번갈아 보곤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희가 만족스럽게 웃고는 입을 열었다.

    “밥 먹자.”

    * * *

    화목하게 식사한 배도빈 일가가 1층 거실로 내려와 차와 과일을 즐기며 대화했다.

    “그럼 식은 군대 다녀오고 하려고?”

    “네.”

    “윤희 기다리다 목 빠지겠다.”

    나윤희가 미소 지었고 배도빈이 대신 대답했다.

    “괜찮아요.”

    “얘는. 너만 괜찮다고 되니? 윤희도 괜찮아야지.”

    “좋아하니까 괜찮아요.”

    유진희는 1년 6개월 정도야 아무 문제 없다는 듯 장담하는 아들을 어떻게 여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많은 사람이 헤어지게 되는 시기인데 저렇게 장담하니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괜찮아요. 보고 싶겠지만.”

    나윤희도 웃으며 괜찮다고 하니 유진희는 두 사람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때 틀어놓은 TV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오늘 오후 4시. 박병무 병무청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배도빈 씨의 현역 입대 및 대체복무는 전문의의 소견서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라고 단정 지었습니다.

    -안과 전문의 안경원 씨는 사고 후유증의 원인을 찾지 못했던 배도빈 씨가 완치 사실을 증명하기란 사실상 어려울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NBC 김준용이었습니다.

    멍하니 뉴스 보도를 듣고 있던 가족이 모든 행동을 멈추었다.

    “핸드폰이.”

    배도빈이 눈을 깜빡이다가 전속 의료진에게 연락하고자 스마트폰을 찾자 유진희와 배영준, 나윤희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래! 도빈아! 너 거기 가서 다시 앞 못 보면 어쩌려고!”

    “네가 거길 안 가봐서 그래. 어? 거기가 얼마나 힘든데 간다고. 몸도 약한 녀석이!”

    “어디다 전화하게? 응?”

    유진희, 배영준, 나윤희 순으로 배도빈을 설득하려 나섰다.

    “로베르토한테요.”

    배도빈의 전속 의료진 팀장 로베르토의 이름이 나오자 세 사람이 동시에 물었다.

    “왜!”

    배도빈이 멈칫했다.

    “완치 진단서 준비해야죠.”

    “왜!”

    세 사람이 또 한 번 화를 내니 배도빈도 놀라서 몸을 뒤로 젖혔다.

    “입대하고 싶으면 가져오라고 하잖아요.”

    “왜!”

    다짜고짜 왜 그러냐고 외치는 탓에 배도빈이 드물게 당황했고.

    “왜!”

    배도진마저 엄마, 아빠, 누나가 하는 말을 따라 하며 웃었다.

    나윤희가 배도빈의 손을 꼭 쥐고 간절히 말했다.

    “굳이 왜 가려 해. 완치 아니잖아.”

    “정확하겐 이유를 모르는 거잖아요. 완치일 수도 있죠.”

    “도빈아!”

    배영준도 드물게 엄히 질책했다.

    “이유를 모르니까 조심해야지! 대체 언제까지 무모하게 살 거야! 이제 윤희랑 결혼하면 한 가정도 꾸릴 녀석이!”

    “…….”

    배도빈이 아버지, 어머니, 나윤희를 살폈다.

    걱정이 묻어나오는 그 얼굴에 더는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눈도 같이 고쳐줄 것이지.’

    배도빈은 생명을 주는 김에 눈도 같이 고쳐주지 않은 테메스의 쪼잔함을 탓하며 가족들을 진정시켰다.

    “알았어요. 일단 검사만 다시 받을게요. 거짓말할 순 없으니까.”

    가족들이 그제야 흥분을 가라앉혔고 배도빈은 눈썹을 좁히며 그의 형제를 떠올렸다.

    ‘잘못되면 지훈이 혼자 가겠는데.’

    * * *

    하루가 지난 깊은 밤.

    배도빈과 최지훈은 놀이터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 둘 다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아무도 없는 놀이터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최지훈이 입을 열었다.

    “같이 입대하기로 했잖아!”

    “하려 했어!”

    “그럼 왜 잘 알아보지 않은 거야!”

    “다 나았으니 상관없는 줄 알았지! 빌어먹을. 홈페이지는 왜 그따위로 만들었어? 알아보기 힘들게.”

    “아아아! 나 어떡해! 이미 입대 신청했잖아!”

    “가지 마.”

    “기사 다 났는데 어떻게 안 가!”

    “……거지 같은 놈들. 가면 가고 아니면 아니지 왜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어 놔?”

    “거, 거지 같은 놈들.”

    “그래. 머리에 똥만 든 놈들.”

    한참 흥분했던 두 사람이 겨우 진정했다.

    “너 만나기 전에 로베르토랑 전화해 봤는데 완치 진단서는 써 주기 힘들대.”

    “아아아악. 망했어어.”

    “망했지.”

    멘탈이 붕괴된 최지훈이 배도빈을 흔들어댔다.

    형제에게 이끌려 고개를 앞으로 숙였다가 뒤로 젖히던 배도빈이 번뜩 자세를 고쳐잡았다.

    “시험 본다며.”

    “어?”

    “일부러 못 치는 거야. 떨어지고 대체복무 하면 되잖아.”

    “……그걸로 될까?”

    “지들이 어쩌겠어.”

    두 사람이 아는 정보 안에서는 딱히 다른 방도가 없었기에 최지훈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어려워.”

    “그래. 쓸데없이 복잡하게 만들어놨어. 튀기다 만 두꺼비 같은 놈들.”

    “두꺼비 같은 놈들.”

    “잘하네. 더 해봐.”

    “찢어 죽일 놈들.”

    욕을 시키긴 했지만 배도빈은 설마 최지훈이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놀라서 그를 쳐다보자 최지훈이 잔뜩 심통 난 얼굴로 물었다.

    “뭐?”

    “아니야.”

    * * *

    “그래서 실기를 못 보면 되지 않을까요?”

    최지훈의 설명을 듣던 최우철은 아들이 아직 순진하단 생각에 슬며시 미소 지었다.

    부하 직원의 무능과 안일함은 용납할 수 없었지만, 음악밖에 모르는 아들의 순진무구함은 그저 귀여웠다.

    최우철이 물었다.

    “누가 심사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들 실력 모르는 사람은 드물 텐데.”

    “아.”

    아주 작은 희망을 쥐고 있던 최지훈이 굳어버렸다.

    “또 쇼팽 콩쿠르 우승자가 군악병 입대 실기에 탈락했단 기사를 대중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생각해 봐야겠구나.”

    혼자 입대해야 하는 상황에 당황한 나머지 정상적인 판단을 하지 못했던 최지훈이 눈을 떴다.

    아무리 못난 연주를 한다 해도 어떤 심사위원이 자신을 떨어뜨리겠으며, 가령 떨어진다 해도 대중이 어찌 생각할지 너무나 명확했다.

    분명 뭔가 부정이 있을 거라 예상할 터였다.

    최지훈이 고민에 빠지자 최우철이 넌지시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 방법을 쓰려면 적어도 네가 실기를 어떻게 망쳤는지 알려야겠지.”

    최지훈이 고개를 들었다.

    확실히 아버지의 말대로 실기 시험 과정이 공개되면 참가자들의 눈치를 봐서라도 이름값만으로 합격시키지는 못할 터였다.

    불합격한다 해도 비판 여론에 변명할 거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그게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잖아요.”

    아들이 이성을 되찾자 최우철이 흡족하게 웃었다.

    “그건 걱정하지 말고.”

    아버지의 말에 최지훈이 깜짝 놀랐다.

    아버지가 했던 모든 일을 알진 못했지만 어떤 방식으로 일을 처리해 왔는지 대강 짐작하고 있었기에 혹시나 나쁜 일을 하진 않을까 걱정되었다.

    “시험을 공정하게 처리해 달라고 말할 뿐이야. 그게 잘못된 일은 아니잖니.”

    “…….”

    최우철이 아들의 등을 툭툭 다독였다.

    “걱정 말고 가서 쉬어. 아무 문제 없을 테니.”

    “나쁜 일 하시면 안 돼요.”

    “그래. 그래.”

    최우철이 아들을 방으로 올려보낸 뒤 빙그레 웃었다.

    교육차 의견을 나누긴 했지만 아들이 음악 외의 문제로 스트레스받길 바라진 않았다.

    적당히 안심시킨 뒤 찾아올 문제를 해결해 줄 요량이었다.

    ‘실기 시험에서 떨어진다 해도 대체복무를 한국에서 할 순 없지.’

    대한민국의 클래식 시장이 아무리 커졌다 해도 주류 문화로 정착한 유럽 시장에 비할 순 없었다.

    인구, 인프라 그리고 무엇보다 세계 정상급 음악가들이 상주하는 베를린 필하모닉이란 환경은 대체할 수 없었다.

    ‘진단서를 위조하는 게 가장 빠르지만.’

    최우철이 고개를 저었다.

    입단속과 증거 인멸 따위 일도 아니었으나 아들이 받아들이지 못할 일이었다.

    이미 완치 판정을 받고 몇 년이나 문제없이 지냈기에 배도빈과 같은 방법으로 처리하기엔 아들의 양심이 허락지 않을 터였다.

    “흐음.”

    최우철이 시가를 꺼내 문지르며 생각을 정리하다가 문득 병무청장의 이름이 낯설지 않음을 떠올렸다.

    ‘박명무. 박명무. ……그렇지.’

    최우철이 핸드폰을 꺼냈다.

    잠시 후 탁한 목소리가 최우철을 반겼다.

    -오오, 최 회장.

    “하하. 그간 격조했습니다, 대표님. 건강하시지요?”

    -아무렴. 최 회장 연락이 뜸해서 서운한 거 말곤 건강하지.

    최우철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욕심 많은 늙은이.’

    오랜만에 연락한 노수전 당 대표는 최우철이 가장 신뢰하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원하는 것만 손에 쥐여 주면 무엇이든 하는 욕심 많은 인간. 욕망에 솔직한 쓰레기.

    이용해 먹고 버리기에 적당했다.

    ‘선거철이니 돈 욕심이 나겠지.’

    최우철이 너스레를 떨었다.

    “그래서 이렇게 연락 드리지 않았습니까.”

    -오오. 그거 기쁜 일일세.

    “하하. 그럼요. 열심히 응원해 드려야지요.”

    최우철이 덕담과 근황 등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이어나가자 노수전 대표의 목소리가 점점 생기를 잃어갔다.

    돈 이야기가 없으니 실망한 것이 역력했다.

    ‘이 늙은이도 오래는 못 가겠어.’

    최우철은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

    직접적인 이야기를 바라는 듯했지만 최우철은 결코 빈틈을 줄 사람이 아니었다.

    현재 노수전이 누구와 함께 있는지도 모를뿐더러 이 통화가 녹음되고 있는지도 확인할 방도가 없었다.

    혹시라도 돈 이야기를 직접 꺼냈다가 그것에 발목을 잡힐 수 있었기에 최우철은 선심 쓰듯 넌지시 말했다.

    “실은 저도 요즘 사정이 그리 좋지 못합니다.”

    -최 회장이?

    “하하. 뭐, 저라고 항상 좋을 수 있나요. 얼마 전에 C&B란 업체가 유망해 보여 주식을 좀 샀습니다만.”

    -C&B?

    “예. 아시다시피 영국에 벌려둔 일이 많아 5월 되기 전에 팔아야 할 듯해 아쉽습니다.”

    -호오. 그거 참으로 안 된 일일세. C&B라고?

    노수전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C&B 주식을 권유하지도 않았거늘 거듭 확인했다.

    에둘러 흘린 작전주를 기가 막히게 알아들은 것이었다.

    ‘늙은이가 코는 여전하군.’

    최우철은 다른 감각은 잃었으면서 돈 냄새는 잘 맡는 노수전이 우스웠다.

    버려질 줄도 모르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꼴이 충직한 개처럼 보였다.

    그간 여러 차례 거래하며 노수전을 다뤄온 최우철은 그가 먹이를 주면 다시 받아먹기 위해서라도 보답할 줄 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참. 혹시 박명무란 사람 알고 계십니까.”

    -박병무? 박병무……. 글쎄. 뭐 하는 사람인가?

    “지금 병무청장직에 있는 친구인데, 나라를 위해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더군요.”

    -껄껄. 그런가?

    “예. 어떠십니까. 한번 잘 키워보심이.”

    -최 회장이 그리 말할 정도면 미끼를 물었단 뜻인데. 공직에 앉은 관료가 성향을 드러내는 걸 보니 인물은 아니겠네그려. 껄껄껄.

    최우철이 슬며시 웃었다.

    ‘아무렴 당신보다 못할까.’

    최우철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문지르던 시가 끝을 잘라냈다.

    “행실이야 고치면 되지요. 증명할 기회 정도는 주심이 어떻습니까.”

    -기회?

    치지지직-

    최우철이 성냥에 불을 붙여 잘라낸 시가 단면에 가져다 댔다.

    “예. 기회.”

    * * *

    박병무 병무청장은 자리에 앉자마자 대학 선배이자 재선 의원인 이공탁을 탓했다.

    “출마한 사람이 선거철에 이렇게 다녀도 되겠어?”

    “아는 동생이랑 술 한잔하겠다는데 누가 뭐라 해?”

    “어이구. 말이나 못 하면. 나 바빠. 특별히 할 말 없으면 다음에 봐.”

    “이 자식이 말본새하곤. 어련히 이유가 있으니 불렀을 거 아냐.”

    이공탁 의원이 주변에 눈치를 주자 보좌관들이 방을 나섰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박병무가 이공탁의 눈치를 살폈다.

    “뭔데 그래?”

    이공탁 의원이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너, 내년쯤 옷 벗어야겠다.”

    “그게 무슨 말이야?”

    박병무가 당황하자 이공탁이 거들먹거렸다.

    “새 옷 입으려면 입고 있는 거 벗어야 할 거 아냐.”

    이공탁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인상을 쓰던 박명무의 눈이 곧 화등잔만 해졌다.

    “될 거 같아?”

    “이 형님이 누구냐. 내 말만 잘 들으면 네 인생 아~무 문제없을 거라고.”

    이공탁이 괜히 생색을 냈다.

    “노 의원께 네 이야기 잘해뒀어. 이번 선거만 괜찮게 지나가면 다음엔 문제없을 거야.”

    “쯧. 난 또 뭐라고.”

    박병무 병무청장이 고개를 돌렸다.

    “형이 그걸 어떻게 장담해? 그때도 노 의원이 대표일지 어떻게 알아?”

    “쯧쯧쯧. 넌 그래서 안 되는 거야, 인마. 공천이 뭐 쉬운 줄 알아? 당 대표라도 함부로 못 해.”

    “그럼?”

    “분위기를 잡아가는 거지. 그러니 앞으로 대표님께 잘 보이고. 선거 뒤에 자리 몇 번 만들 테니. 노 대표 라인 타면 뭐, 이 당에서 안 되는 게 있는 줄 알아?”

    “아이 알지.”

    “대표님 반응 보면 안전선도 받을 수 있을 것 같으니 실수하지 말고. ……너 눈빛이 묘하다?”

    “아니 순번을 벌써 정한다니까.”

    “이 자식이. 아까부터 빈정 상하게 하네. 정해진 게 아니라 그 정돈 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이잖아.”

    “확실하지가 않으니까 그렇지.”

    “인마, 내가 그간 작업을 얼마나 쳐두었는데. 오늘 노 의원께서 네 이야기 꺼내서 알려주러 왔더니만 이건 뭐. 넌 안 되겠다.”

    “에헤이.”

    박병무가 일어서려는 이공탁을 붙잡았다.

    “이 형님이 왜 이렇게 예민하실까? 아아, 선거철이지. 내 실수. 실수.”

    이공탁이 박병무의 손을 뿌리치며 다시 자리했다.

    “다음 달에 한번 보자고 하시니 그리 알아.”

    “아무렴. 내 정신 좀 봐. 우리 형님 잔이 비었었네.”

    박병무가 술병을 들자 이공탁이 거들먹거리며 잔을 내밀었다.

    “참. 그리고 너 병무청 일 신경 좀 써야겠더라.”

    “신경? 무슨 신경?”

    “뭐 별건 아니고. 그 피아노 치는 친구 입대한다고 난리잖아.”

    “누구? 배도빈?”

    “최지훈 말이야. 최지훈. 뉴스 좀 봐라. 시도 때도 없이 골프나 치러 다니지 말고.”

    “아아. 어어. 알지. 왜 몰라.”

    “큼. 의회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지 망치지 말고 적당히 잘 처리해. 현역으로 보냈다가 무슨 말을 들으려고.”

    “본인이 가겠다는데 뭐가 문제야.”

    “쓰읍. 이래 눈치가 없어서 뭘 하려고.”

    이공탁이 술잔을 비웠다.

    “넌 무식해서 모르겠지만 배도빈이나 최지훈은 그냥 내버려 둬. 건드려서 좋을 거 하나 없어. 그 실기인지 뭔지에서 떨어뜨리고 대체복무도 원래 소속에서 할 수 있게 해.”

    생각에 잠겼던 박병무가 조심스레 물었다.

    “이거 청탁 아냐?”

    “청탁은 무슨. 당 입장에서도 문제 있는 놈 공천하면 손해니까 하는 말 아니야. 이번 문제 잘 처리 못 하면 국물도 없을 줄 알아.”

    금배지를 다는 게 소원이었던 박병무 병무청장은 이공탁이 내민 술잔에 술을 채우며 물었다.

    “현역 빼는 거야 큰 문제 아니지만 대체복무는 좀 빡센데?”

    “뭐가 또?”

    “대한민국 안에서는 다 가능하지. 근데 물 건너 나라에서 근무하는 게 말이 안 되지.”

    “쯧. 없던 일로 하자.”

    이공탁이 신경질적으로 손짓하자 박병무가 깜짝 놀라서 그를 잡았다.

    “허허~ 거참. 형, 나 못 믿어? 나 박병무야. 박명무. 알아서 할게.”

    “확실히 해. 네가 일 잘못하면 너 추천한 내 입장도 이상해져, 인마. 알아들어?”

    “알지. 알지. 그러니까 좀 앉아.”

    이공탁 의원을 간신히 달랜 박병무는 최지훈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며 술을 들이켰다.

    병무청이 배도빈에게 진단서를 요구하면서 언론은 그의 눈이 완치되었는가에 집중했다.

    대한민국을 포함한 세계 각 언론사 기자들은 배도빈의 자택과 직장 앞에 진을 치고 일거수일투족을 추적했다.

    그 끝에 그가 전담 의료진 외에도 각기 다른 안과를 여섯 차례 방문.

    세 번 이상의 정밀검사를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매일 수백 건의 기사가 게시되었고 팬들은 초조하고 복잡한 마음으로 사건을 접했다.

    └완치라서 다시 받는 거야 아니면 뭐가 잘못되어서 받는 거야. 불안해 미치겠네.

    └공연은 계속하니까 문제 있는 건 아닌 듯.

    └피곤할 때 안 좋아진다잖아. 지금은 괜찮아도 언제 다시 그럴지 모르는 거지.

    └이젠 뭐가 뭔지 모르겠다.

    └나두. 다 나은 거면 좋겠는데 그러면 군대 가잖아.

    └실명하는 것보단 군대 다녀오는 게 백배 낫지.

    └군대 가는 것도 싫어 ㅠㅠ

    └최지훈은 어떻게 됨?

    └그러게. 배도빈이랑 동반입대 신청했단 기사 봤는데.

    └알아서 하겠지. 최지훈 아빠가 최우철이잖아. 전 EI전자 사장.

    “후.”

    인터넷 반응을 살피던 나윤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도 팬들과 같았다.

    예비 신랑의 눈에 아무런 이상이 없길 기도하면서 군대는 가지 않길 바랐다.

    “다들 같은 생각인가 봐.”

    나윤희가 의자를 돌렸다.

    “어쩔 수 없죠.”

    심각한 표정으로 악보를 들여다보던 배도빈이 펜을 놓고 검사 결과지를 찾았다.

    저명한 안과 의사들에게 여러 차례 진료받았지만, 그들 모두 배도빈의 시신경과 안구에서 아무런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다.

    피로를 느끼면 시력이 일시적으로 저하되는 현상도 설명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한국 안과의에게서 받은 병무용 진단서도 재발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었다.

    “못 갈 것 같아요.”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해?”

    “진단서 제출해야죠. 어차피 재검 과정 필요하니 한국 갈 때 내면 돼요.”

    일이 해결된 건 아니지만 병무청의 입장 발표도 있었고 진단서만 제출하면 배도빈의 병역은 문제없이 해결될 듯했다.

    그러나 눈이 완전히 나은 게 아님이 다시 한번 증명된 터라 한편으로는 걱정되었다.

    피앙세의 얼굴에 근심이 드리우니 배도빈이 평소와 같이 무덤덤한 어투로 안심시켰다.

    “걱정 마요. 도진이가 고쳐준다고 했으니까.”

    “그러면 좋겠다.”

    나윤희가 웃었다.

    어린 동생을 굳게 신뢰하는 모습이 좋아 보이기도 했지만.

    분자생물학을 전공한 뒤 연구원으로서 탈모 치료에 성과를 보이는 배도진이 어쩌면 그렇게 해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도 있었다.

    “그리고.”

    “응.”

    “팬들에게도 알려야 할 것 같아요.”

    “아. 약속했었지.”

    나윤희가 배도빈이 ‘너만 모름’에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

    열애설이 불거졌던 당시 팬들에게는 감추지 않겠다고 약속한 바 있었다.

    “그, 그럼 어떻게 할까?”

    나윤희가 용기를 냈다.

    유진희, 배영준 부부에게 허락을 받았고 이승희, 왕소소, 나카무라 료코 등 주변에도 알리긴 했지만 대중을 상대하는 것은 또 다른 부담이었다.

    나윤희는 배도빈이 얼마나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지 알고 있었기에 혹시나 자신 때문에 그가 피해받진 않을까 걱정했다.

    또 그의 팬 중 일부에게 좋지 않은 시선을 받으리란 것도 예상하고 있었다.

    배도빈에게 말하지 않았을 뿐 그런 각오를 가슴에 새겨두고 있었다.

    “팬카페는 어때? 제일 많이 접속하니까.”

    연애 사실을 어떻게 알릴지 이런저런 생각을 꺼내는 나윤희를 보며.

    배도빈은 그녀가 불안해하면서도 용기 내고 있음을 눈치챘다.

    “이리 와요.”

    배도빈이 나윤희의 손목을 잡고 끌어 뒤에서 감싸 안았다.

    나윤희가 눈을 크게 떴다.

    며칠 사이 급속도로 가까워진 거리감에 익숙지 않았다.

    그녀의 가슴이 야단스럽게 뛰는데 배도빈이 귓가에 입을 댔다.

    “걱정 마요.”

    나윤희는 걱정을 접을 수 없었다.

    심지가 굳은 배도빈처럼 의연하고 싶었지만 예상되는 일이 너무도 많아 무서웠다.

    그저 그런 것에 흔들리지 않게 마음의 준비를 하고 또 다질 뿐이었다.

    나윤희가 그런 속내를 감추고 고개를 끄덕이자 배도빈이 속삭였다.

    “나 때문에 팬을 잃으면 어쩌나 고민했어요.”

    나윤희가 고개를 돌렸다.

    그가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배도빈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나윤희와 같은 심경을 풀어냈다.

    “좋아하는 감정은 여럿이니까. 우리 사이가 알려지면 실망하고 떠날 사람도 있을 거예요. 욕하는 사람도 해코지하려는 사람도 있겠죠.”

    “……응.”

    나윤희가 고개를 숙이고 다리를 끌어안았다.

    “걱정했어.”

    “알아요.”

    “혹시 나 때문에 팬을 잃는 건 아닐까 싶어서…….”

    “나도 그래요.”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작게 웃었다.

    나윤희는 그녀의 고민이 혼자만의 것이 아님에 조금은 안심했다.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해결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히 힘낼 수 있었다.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안도하길 얼마간. 나윤희가 슬며시 입을 열었다.

    “걱정 같은 거 안 할 줄 알았어.”

    “왜요?”

    “언론에서 뭐라고 해도 괜찮았으니까. 인터플레이 때도. 그때도.”

    나윤희는 모함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개 짖는 소리로 취급하던 배도빈을 떠올리며 작게 웃었다.

    배도빈과 베를린 필하모닉의 음악이 클래식을 무너뜨리려 한다는 말에도.

    시력을 잃어 배도빈도 이젠 끝이라는 말에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 그를.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음악에 집중하는 배도빈을 동경했다.

    배도빈이 숨을 내쉬며 다리를 끌어안고 있는 나윤희의 무릎에 손을 얹었다.

    “그런 말을 신경 쓰지 않는 건 날 믿기 때문이에요.”

    “응.”

    “난 옳으니까.”

    그를 오랫동안 지켜봐 온 그녀는 배도빈의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수없이 반복해 완성한 자신을 자부했다.

    타협할 줄 모르는 집요함으로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그렇게 만든 곡이 틀릴 리 없다고 여겼다.

    그녀는 배도빈의 자부심이 노력에 기반해 있음을 알고 있었다.

    “안 좋은 소리를 하는 인간도 있지만 팬들은 알아줄 테니까. 그들이 하는 헛소리보다 제 음악을 더 믿을 테니까 걱정 안 해요.”

    나윤희가 웃었다.

    수입이 일정하지 않은 예술가들은 아주 짧은 악플에도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표현의 자유라는 미명 뒤에 숨어 거짓을 말하는.

    취향의 차이를 마치 잘못이라는 듯 폄훼하는 그들은 분명 악의를 띠고 있다.

    굳이 악플을 달지 않는 사람도 그런 글들이 음악 하는 사람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모든 것을 쏟아부어 만들어낸 것이 악의적이고 부당한 평가를 받은 적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배도빈은 그런 행위로 상처받지 않는다고 했다.

    그들의 조잡하고 질 낮은 음해보다 자신의 음악이 더 설득력 있을 거라고 자부했다.

    나윤희는 그가 어째서 그렇게까지 강할 수 있는지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배도빈이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 일은 그러지 않아요.”

    배도빈의 고백에 나윤희가 고개를 돌렸다.

    “날 좋아한답시고 누나한테 욕을 한다든가 안 좋은 소문을 퍼트린다거나. ……상처 내려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까.”

    “왜 그런 걱정을 해.”

    나윤희가 웃으며 배도빈을 안심시키려 하자 배도빈이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소중하니까.”

    “……흐.”

    “걱정하지만 불안하진 않아요.”

    나윤희가 이유를 묻는 대신 고개를 돌렸다.

    “그런 일이 생길 때도, 아닐 때도 항상 곁에 있을 테니까.”

    덤덤한 목소리로 그의 진심이 전해졌다.

    “내게 그런 일이 생길 땐 누나가 지켜줄 테고.”

    ‘아.’

    나윤희는 마침내 그가 자신과 같은 걱정을 하면서도 의연할 수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함께 있을 거라는 말만으로 그녀의 불안은 모두 가셨다.

    분명 어렵고 슬프고 화나는 일이 생기겠지만 그와 함께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서로를 지켜주자는 말이 왜 그렇게 기쁜지.

    나윤희가 몸을 틀어 배도빈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의 눈은 항상 그랬던 것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응. 같이 있을 거야.”

    배도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괜찮아.”

    나윤희가 배도빈의 목을 감아 안음으로써 약속했다.

    항상 그와 함께하고 그를 지지하겠다고 스스로에게, 그에게 약속했다.

    배도빈도 호응하듯 그녀를 안았다.

    행복했다.

    자신을 안은 그의 힘과 온기가 너무나 포근하고 사랑스러워서, 안고 있음에도 더욱 안고 싶었다.

    그가 자신을 특별하게 여기는 걸 알면서도 몇 번이고 확인하고 싶었다.

    그 달콤한 기분을, 벅찬 기분을 더 느끼고 싶었다.

    쾅쾅쾅!

    “배도빈! 배도빈!”

    그때 문이 부서질 듯한 노크 소리와 함께 진달래가 배도빈을 불렀다.

    “너 내가 양말 뒤집어 놓지 말라고 몇 번을!”

    양말을 뒤집어 놓은 것을 참다못한 진달래가 빨래통을 들고 안으로 들어섰고.

    소파에서 껴안고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하고 말았다.

    순간 세 사람이 굳어버렸다.

    “……히.”

    쾅!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린 진달래가 알 수 없는 웃음을 남기고 도망치듯 문을 닫았다.

    배도빈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거 내쫓든가 해야지.”

    나윤희가 웃으며 말렸다.

    “너무 그러지 마. 그러지 않아도 같이 있을 시간 얼마 안 남았는데.”

    배도빈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리모컨을 들었다.

    “기어이 갚겠다고 하더라고요.”

    “아.”

    지난 몇 년간 진달래의 빚은 줄어들긴커녕 더 늘고 말았다.

    생활비와 교육비는 진달래가 입단하면서 스스로 충당했지만, 그간 세 차례 교체했던 의수는 그녀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진달래가 그간 갚았던 1억 1,000만 원을 제하고도 그렇게 쌓인 금액이 17억 3,000여만 원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곡이 제법 팔린 것 같던데.”

    “오리진?”

    “네.”

    배도빈이 최근 제법 인기를 끌고 있는 진달래의 ‘Origin’의 판매량을 기대하며 스마트폰을 꺼냈다.

    진달래가 조금이라도 빚을 빨리 갚고 LA로 가길 바라며 베를린 필하모닉 정산페이지에 접속했다.

    2주 동안 집계된 ‘Origin’의 판매실적은 약 5,000유로.

    잠시나마 기대했던 배도빈이 고민에 빠졌다.

    제법 순조롭게 상향곡선을 이루고 있었지만 17억 3,000만 원을 갚기엔 상당히 오랜 시간이 필요할 듯했다.

    “내쫓는 게 맞아요.”

    “너무해.”

    나윤희가 웃으며 스마트폰을 넘겨받아 판매지표를 확인했다.

    배도빈의 기준에는 못 미치지만 당연한 일. 그녀가 보기엔 너무나 멋진 성과였다.

    “달래 멋지다. 이러면 다음 곡도 기대되지 않아?”

    “애썼죠.”

    퉁명스럽게 대답했지만 배도빈은 자기가 부를 노래를 직접 만들고자 노력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그가 작업하고 있던 악보를 끌어와 다시 펜을 들었다.

    진달래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낸 나윤희가 고개를 들었다.

    “파우스트?”

    배도빈이 어떤 곡을 작업하는지 구경하고자 다가갔던 나윤희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악보 가득 빼곡하게 배열된 기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바이올린 독주도 있나 봐.”

    “네. 2악장 마지막에 삽입할 거예요.”

    배도빈이 무심히 첫 페이지를 찾아 넘겨주었다.

    Bae Dobean Violinsonate Nr.13

    Das ewig weibliche

    “Das ewig weibliche?”

    나윤희가 고개를 갸웃했다.

    “파우스트 2막 끝머리에 나오는 단어예요.”

    “아, 불멸의 연인.”

    “그렇게 번역했더라고요.”

    배도빈이 목 근육을 풀며 말했다.

    “여신 헬레네를 지칭하는 말이에요.”

    배도빈의 설명에 나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단어 그대로 해석하면 영원한 여성이란 뜻이니 신적인 존재를 말하는 것 같았다.

    “왜 굳이 불멸의 연인이라고 번역했을까?”

    나윤희의 의문에 배도빈이 공감했다.

    “내 말이요.”

    궁금함을 참지 못한 나윤희가 스마트폰을 펼쳐 검색하더니 이내 검색 결과를 읊기 시작했다.

    “베토벤이 남긴 편지 중에 세 통이 Das ewig weibliche에게 보냈던 거래. 그때 사귀던 사람을 그렇게 불렀나 봐.”

    나윤희가 베토벤이 파우스트를 좋아했다는 것을 떠올리며 납득하는 한편 배도빈은 안면근육을 꿈틀거렸다.

    “베토벤도 로맨틱한 면이 있었네. 그치?”

    “……글쎄요.”

    배도빈의 심기가 몹시 불편해졌다.

    * * *

    파우스트와 베토벤, 불멸의 연인 그리고 동명의 바이올린 소나타.

    오페라 <파우스트>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고 싶기도 했고 무엇보다 불멸의 연인이란 제목이 로맨틱해 보였다.

    나윤희가 슬며시 물었다.

    “이거 누가 연주해?”

    “찰스요.”

    “아. ……좋아하시겠다.”

    내심 그가 자신에게 연주를 맡기지 않을까 기대했던 나윤희는 실망한 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배도빈이 고개를 돌려 나윤희를 살피곤 피식 웃었다.

    “웃지 마.”

    나윤희가 말끝을 늘이며 무안함을 감췄다. 그에게 마음을 읽힌 듯해 부끄러웠다.

    배도빈이 리프팅 테이블의 윗면을 들어 안쪽 수납공간에서 악보 한 부를 꺼냈다.

    Bae Dobean Violinsonate Nr.14

    Du bist so schön

    너는 참으로 아름답구나(Du bist so schön)라는 제목의 또 다른 바이올린 소나타였다.

    악보를 받아든 나윤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멍하니 악보를 보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정말?”

    배도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나윤희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 솔직한 반응에 배도빈도 기분이 좋아졌다. 꼼꼼히 악보를 살피는 그녀에게 무심히 고백했다.

    “루트비히는 언젠가 영원한 사랑을 만날 수 있을 거라 믿었어요.”

    나윤희가 악보에서 시선을 떼 배도빈을 보았다.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더는 잃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사람에게 집착하게 되고 그 감정이 영원하리라 믿었죠.”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아.”

    나윤희가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무시당하기 일쑤였던 과거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기에 이승희, 유진희, 왕소소, 나카무라 료코, 베를린 필하모닉 그리고 배도빈이 소중했다.

    “그러다 신분 차이 때문에 혹은 아주 사소한 다툼으로 연인을 떠나보내며 생각했죠. 저 사람은 내 사랑이 아니었던 거라고. 매번.”

    배도빈이 펜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우습더라고요. 그들이 떠났다고 금세 바뀌는 마음이요.”

    배도빈은 말 사이에 잠시 간격을 두었다.

    나윤희는 그가 이야기를 마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주었다.

    “결국 그들과 다르지 않았던 거예요.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고 바랐으면서 루트비히 본인도 그런 사랑을 주지도 갖지도 않았죠.”

    나윤희는 배도빈이 갑자기 왜 이런 말을 꺼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었다.

    “후회했던 걸까?”

    배도빈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당시에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했으니까 그러진 않았을 거예요. 다만 계속 찾았겠죠.”

    “어떤?”

    “남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법을요.”

    배도빈이 나윤희와 손을 포개었다.

    “영원한 사랑을 바라기 전에, 누군가를 진심으로 위할 수 있게 될 날을 기다렸던 거예요.”

    배도빈은 타인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자신을 바라왔다.

    모든 것은 거기서부터 시작이라고.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배움으로써 조급하고 편협했던 과거와 멀어질 수 있었다.

    나윤희가 그를 보다가 싱긋 웃었다.

    “베토벤을 그렇게까지 생각할 줄은 몰랐어. 듣고 보니 정말 그런 거 같은데.”

    “많이 생각했죠.”

    배도빈도 피식 웃었다.

    “그럼 베토벤이 아니라 배도빈은?”

    피앙세의 질문에 배도빈이 눈을 깜빡였다.

    “뭘요?”

    “영원한 사랑이 있다고 생각해?”

    “있어요.”

    배도빈은 확신에 차 답했다.

    나윤희는 영원한 사랑이 있다고 말해주길 바랐으면서도 그의 대답을 의외라고 생각했다.

    루트비히 반 베토벤을 말하던 배도빈이 마치 그에 동조하듯 설명한 탓이었다.

    “어떻게 알아?”

    “받고 있으니까.”

    나윤희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배도빈이 눈치없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어렸을 적부터 사랑받았어요. 부모님의 말 한 마디, 눈짓 한 번에도 묻어나왔으니까요.”

    “아. 응. 언, 아니, 어머님이랑 아버님 정말 다정하시니까.”

    배도빈이 나윤희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빨개졌어요?”

    “아무것도 아니야.”

    나윤희가 고개를 숙였다.

    배도빈이 그녀를 살피다가 배도빈이 불멸의 연인(Das ewig weibliche) 소나타 악보를 들어 보였다.

    “이건 그런 사랑을 생각하며 쓴 곡이에요.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 부모를 향한 자식의 사랑. 그런 맹목적 사랑. 헬레네란 좋은 소재로 표현할 수 있겠더라고요.”

    배도빈이 눈을 가늘게 뜨고 악보를 살핀 뒤 입을 열었다.

    “교회 음악 같은 느낌을 냈는데, 찰스가 잘 표현할 것 같아요.”

    나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품 있고 웅장한.

    그러면서도 자애로운 소나타에 찰스 브라움보다 어울리는 바이올리니스트는 없었다.

    “그리고 그건.”

    배도빈이 그의 피앙세가 들고 있는 14번째 바이올린 소나타를 보며 말했다.

    “내가 보는 누나예요. 잘 어울릴 거라 생각해요.”

    배도빈은 과거의 ‘그녀’를 지칭했던 말로 나윤희를 부를 수 없었다.

    나윤희에게도 그녀에게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비록 서로를 진정 사랑하지 않았단 걸 깨달은 지금, 예의만을 갖출 뿐이었다.

    더욱이 사랑해 마지않는.

    영원한 사랑을 받음으로써 타인을 진정 사랑할 수 있게 된 그의 마음을 모조리 앗아간 나윤희에게 타인을 지칭했던 말을, 그런 제목의 소나타를 주고 싶지 않았다.

    해서 <파우스트> 2악장의 마지막을 장식할, 헬레네의 자애로움을 표현할 곡과 연주자는 처음부터 찰스 브라움으로 생각해 두고 있었다.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넘쳐흐르고 샘솟는 사랑을 가득 담아 새 소나타를 만들었다.

    그것이 <파우스트>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대사.

    ‘멈춰라! 너는 정말로 아름답구나!(Verweile doch! du bist so schön!)’에서 제목을 따온 14번 소나타였다.

    고뇌 끝에 진실을 깨달은 하인리히 파우스트의 외침이, 그가 바라던 이상향이 그녀를 연상시킨 탓이었다.

    난데없이 고백받은 나윤희가 또 행복에 겨워 몸을 비틀었다.

    “왜 그래요?”

    “……어디서 그런 말을 자꾸 배워오는 거야.”

    배도빈이 미소 지으며 나윤희에게 다가갔다.

    진달래의 방해로 이어지지 못했던 일이 다시금 분위기를 잡았다.

    “형! 형!”

    벌컥-

    때마침 배도진이 인정사정없이 문을 열어젖혔고 배도빈과 나윤희는 황급히 떨어졌다.

    배도진이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뭐 하고 있었어?”

    “……왜.”

    배도빈이 화를 억누르며 물었다.

    “봐봐! 나 다리에 털 났어!”

    배도진이 바지를 걷어 올려 다리를 보였다. 배도빈과 나윤희는 황당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허탈하게 웃어 버렸다.

    “그래. 다 컸네.”

    “이제 푸르트벵글러 할아버지 머리도 낫게 할 수 있어! 노이어 할아버지도! 디스카우 아저씨도!”

    배도진의 외침에 배도빈과 나윤희가 잠시 굳어버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이거!”

    배도진이 작은 플라스틱 통을 자랑스레 꺼냈다.

    잠시 상황을 파악하던 배도빈이 눈을 크게 뜨고 소리쳤다.

    “그걸 다리에 발랐어?”

    “응!”

    배도빈이 눈을 깜빡이다가 동생의 바지를 더 걷었다.

    귀여운 수준이었던 종아리와 달리, 무릎에는 털이 비정상적으로 수북했다.

    배도빈도 나윤희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멋지지!”

    “부작용이라도 있으면 어쩌려고! 임상 중이라며!”

    배도빈이 드물게 화를 냈다.

    형에게 자랑하고 싶어 달려왔던 배도진이 놀라서 울먹이기 시작했다.

    “끕. 끕.”

    “뭘 잘했다고 울어! 이리 와. 병원부터 가자.”

    “끄아아아아앙!”

    배도빈이 배도진을 데리고 나섰고 나윤희가 배도진을 달랬다.

    “도진아, 괜찮아. 형이 도진이 걱정해서 그러는 거야.”

    “끄아우으아앙.”

    “달래지 말아요. 잘못한 건 알아야 해요.”

    “끄아아앙!”

    “안 그쳐!”

    “아아아앙!”

    형에게 혼난 적은 처음이라 배도진은 진정할 수 없었다. 잔뜩 칭찬받을 것을 기대했던 탓에 서러움이 폭발하고 말았다.

    배도진이 주저앉아 통곡하자 배도빈이 아예 동생을 들어버렸다.

    “형이 분명히 말했지! 실험은 해도 네 몸에 하면 안 된다고! 겁도 없이 무슨 짓이야!”

    “아아악아악각악!”

    다그칠수록 배도진은 더 크게 울었다. 배도빈 저택이 떠나갈 듯한 목청에 깜짝 놀란 진달래, 유진희, 집사가 밖으로 나왔다.

    “무슨 일이니? 응?”

    “이 녀석이 지 다리에 약을 발랐다잖아요.”

    배도빈이 배도진의 다리를 걷어 털이 난 걸 보였다.

    진달래와 집사가 깜짝 놀랐다.

    그때 배도진이 소리쳤다.

    “허락받았단 말이야! 연구실 아저씨들이 이제 써도 된다고 했단 말이야아아아아앙!”

    “어디서 거짓말을 해! 형이 그렇게 가르쳤어!”

    “끄어억. 엄마아아.”

    “흐흫흐흐. 도진아, 엄마한테 와. 도빈아, 도진이 괜찮아.”

    유진희가 팔을 벌리자 배도진이 몸부림을 쳐 배도빈에게서 탈출, 엄마에게 달려가 안겼다.

    엄마의 품속에서 서럽게도 울었다.

    “그러니까 그걸 왜 다리에 발라. 많이도 발랐네.”

    “끄으으윽. 나도 아빠랑 형처럼 끄응.”

    “그래. 그래.”

    잔뜩 흥분했던 배도빈이 어머니와 동생을 보며 혼란스러워하던 중 유진희가 웃으며 말했다.

    “식약청에서 승인되었다고 연락 왔어. 너한테 자랑하고 싶었나 봐. 그치, 도진아?”

    “끄아아아아앙! 형 미워!”

    배도진이 크게 소리친 뒤 엄마의 품속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

    고도로 발달한 현대 사회가 정복해내지 못한 미지의 영역.

    전 세계 3억 7,320만 명의 탈모인들의 염원을 이뤄냈다니.

    배도빈은 쉽게 믿을 수 없었다.

    “정말이에요?”

    “응. 하반기부터 판매한대. 시판 후에도 임상은 이어지는데, 일단은 괜찮은 것 같아.”

    배도빈이 천천히 엄마 품에 안긴 동생에게 다가갔다.

    손을 뿌리치는 게 단단히 삐진 듯했다.

    “도진아.”

    배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도진아. 형이 몰랐어. 미안해.”

    “미워!”

    “내일 형이랑 놀러 갈래? 놀이공원 가자.”

    “……진짜?”

    배도진이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진짜.”

    “……디자인랜드.”

    가까운 유원지를 생각했던 배도빈이 잠시 망설였다.

    가장 가까운 디자인랜드라고 해도 국경을 넘어 파리까지 가야 했다.

    “끄우으.”

    그러나 이내 배도진이 다시 울려 했고 더는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그래. 가자. 디자인랜드.”

    “……햄버거랑 콜라도.”

    이 기회에 1년에 한 번 먹을까 말까 한 햄버거랑 콜라를 요구했지만 배도진의 협상은 거기까지였다.

    “안 돼. 디자인랜드로 끝.”

    가족 중 가장 무서운 엄마가 안 된다고 하자 일찌감치 포기한 배도진이 눈물을 닦았다.

    배도빈이 동생의 머리를 흩트리며 칭찬했다.

    “잘했어.”

    “나 멋있어?”

    “그래. 멋있어.”

    형의 칭찬에 배도진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가득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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