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558화 (558/564)
  • 4. 안 돼

    당황한 진달래가 어찌할 줄 모르는데 왕소소가 눈을 부릅떴다.

    그 시선이 얼른 받지 않고 뭐 하냐고 타박하는 듯했다.

    진달래가 고개를 돌려 아리엘과 시선을 마주했다.

    맑고 푸른 눈이 너무나 예뻤다.

    우아하게 떨어지는 저 코를 특히 좋아했다.

    은은하게 풍기는 장미 향을 맡으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가라앉았고 그가 입을 열면 두근거렸다.

    손목을 잡아준 그의 손은 따뜻했고 함께 식사할 때면 즐거워서 대화가 끊어지질 않았다.

    그릇을 닦을 때 곁에서 진지한 표정으로 설거지하는 그가 왜 그렇게 멋져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무대에 선 그를 바라보면 함께하고 싶었다.

    잠들기 전 오늘과 내일을 이야기했다. 오늘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고, 오늘 무슨 일을 했는지 말하고 싶었다.

    내일 그가 무엇을 할지.

    기분은 어떤지.

    사랑받고 있음을 알면서도, 행복하면서도 더, 더욱더 그를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었다.

    매일 커지는 마음을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진달래가 손을 뻗었다.

    어느새 가득 고인 눈물을 떨어뜨리며 그를 일으켜 세웠다.

    “응.”

    아리엘이 활짝 웃었다.

    티끌 하나 없는 맑은 미소로 그가 진달래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다.

    진달래가 결국 울먹이며 아리엘을 끌어안았다.

    “대감!”

    “부인.”

    “뭐야아! 진짜! 진짜…….”

    아리엘이 진달래의 등을 쓸어내려 그녀를 달래자 그것을 지켜보던 료코와 나윤희가 주먹을 휘두르는 것도 모자라 폴짝폴짝 뛰었다.

    * * *

    찰스 브라움과 관련된 검색어의 트래픽량이 유럽과 북미, 아시아 등지에서 급증함으로써 황제의 건재함이 과시된 한편.

    진달래의 첫 곡 ‘Origin’도 생중계를 시청한 이들 사이에 회자되었다.

    강렬한 전자음에 서정적 멜로디와 어울린 그녀의 노래에서 묘한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오리진에 빠진 이들은 음원이 아직 출시되지 않음을 아쉬워했다.

    [2028년 최고의 명연주]

    [파이어버드의 날갯짓이 베를린의 밤하늘을 밝히다]

    [건재한 황제]

    [찰스 브라움, “만족할 수 없다. 파이어버드는 더 우아하게 노래할 수 있다.”]

    [찰스 브라움, 악단주 배도빈에게 신곡 압박하나?]

    [요관결석마저 그를 막지 못했다]

    [베를린 필하모닉 소프라노 진, 첫 곡 발표]

    [충격적인 사운드. 웃고 떠드는 밴드의 행보는?]

    [진의 Origin은 아직 미출시]

    [오늘 공연에서 보이지 않은 최지훈]

    [베를린 필하모닉, “최는 현재 아주 근사한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진달래가 결국 터지네.

    └이런 애가 여태 뭐 하느라 안 알려졌지?

    └예전에 푸르트벵글러 곡 부른 적 있었는데 푸벵옹이 넘사벽이라 묻혔지.

    └의외로 종종 언급되었음. 베를린에 사는 사람들한테는 나름 인지도 쌓고 있었고.

    └웃고 떠드는 밴드 덕에 ㅇㅇ

    └노래 괜찮다. 신선한데.

    └시원시원하게 내뽑는 게 아닌데도 들을 만하더라. 흐느낀다? 운다? 뭐라 표현해야 하지?

    └애타게 불렀지. 하드록이랑 어울리니 퇴폐적인데 뭔가 안쓰럽고 그런 느낌이었음.

    └그래서 음원은 언제 나옴?

    └녹음할 시간이 없었을 테니 아마 좀 걸릴걸?

    └아, 찰스가 아팠지.

    └오늘 못 봤는데 찰스는 괜찮음?

    └ㅇㅇ 완전 멀쩡함.

    └찰스야 뭐 믿고 듣는 사람이자너.

    └난 그 사람 개그맨인 줄 알았는데.

    └ㅋㅋㅋㅋㅋ뉴비가 많아지긴 했나 봐. 찰스가 개그맨이랰ㅋㅋㅋ

    └바이올리니스트라 하면 찰스 브라움이 세계 원탑임. 그 전에 니아 발그레이가 유명했고 그보다 전에는 스노우 한이었는데 지금은 뭐, 그 사람들 전성기보다 낫다는 평도 있으니까.

    └바이올린계의 가우왕임?

    └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 채팅 캡처해서 찰스한테 보여주고 싶닼ㅋㅋ

    └우리 왕자님 충격받고 어디 또 아프면 어쩌게.

    └항문 수호 기사단이니 뭐니 해서 웃기게 보일 수도 있는데 팬덤 입장에선 진심임. 진짜 엄청난 사람이고 그만큼 소중한 거야.

    └맞아. 찰스 연주 한 번이라도 들어보면 그게 희화시키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돈 알 수 있지. 정말 어마어마한 바이올리니스트니까.

    └그러니까 B가 그 많은 돈 주고, 곡 써 주고 해서 데려왔고.

    └B?

    └배도빈.

    └볼드모트도 아니고 B가 뭐임?

    └도빈 > 빈 > The B

    └별명이 너무 많아서 젤 편한 쪽으로 적다 보니 B로 썼는데, 그냥 고착돼 버림ㅋㅋㅋㅋㅋ

    └아닌데. 오케스트라 대전 끝나고 너만 모름 배도빈 특집 제목이 ‘THE B’라서 그때부터 그렇게 불렀는데.

    └ㄴㄴ 그전부터 팬덤 사이에선 B라고 불렸음. 배도빈이 마왕이니 신이니 천재니 불리는 거 싫다고 해서. 너만 모름 제작진도 그거 보고 지었을걸?

    └누구 말이 맞아?

    └지훈이 뭐 준비하는 것 같네?

    └[링크] 이 기사?

    └ㅇㅇ

    └아, 그러네. 오늘 안 보인다 싶더니.

    └도빈이도 이번 달 잠잠한 거 보면 같이 뭐 준비하고 있지 않을까?

    └B는 지금 할 일 너무 많아서 다른 거 못 할걸? 파우스트만 해도 피델리오 이상의 대작이 될 거라고 했으니까.

    └Origin 여기서밖에 못 들음?

    └ㅇㅇ

    └녹음되면 바로 올라올 듯.

    └아, 이래서 독점이 싫어. 좀 여러 곳에서 팔면 안 되나?

    └수수료 떼가니까 그렇지. 베를린이 돈 많이 벌려면 자기들이 직접 서비스해야 해.

    └수수료 얼마나 떼는데?

    └보통 40% 이상 떼지. 심하면 60%도 뗌.

    └ㅁㅊ 도둑놈들이네.

    └ㅇㅇ 생산자보다 유통자가 더 많이 범. 그니까 베를린 필하모닉 입장에선 을 만들 수밖에.

    └맞아. 그러니까 걍 이거 써. 어차피 배도빈 곡 들으려면 이거 써야 해. 월 6달러면 무손실 음질로 들을 수 있잖아.

    └10달러짜리 쓰면 실황이 8K 영상으로 나옴.

    └18달러 쓰면 해설본 받아볼 수 있음. 푸르트벵글러, 도빈이, 슈타인 등등 그 날 지휘한 사람이 적음.

    └아니 그러면 18달러 쓸 수밖에 없잖아;;

    └당연하지.

    └아……. 장사 잘하네.

    베를린 필하모닉 팬들은 의 채팅방에서 밤이 새도록 찰스 브라움을 찬양했고, 진달래에게 관심을 보였으며 최지훈이 무엇을 준비하는지 궁금해했다.

    그렇게 날이 지나고 다음 날.

    진달래는 그녀가 외박한 사실을 알게 된 왕소소, 나윤희, 나카무라 료코, 차채은에게 연행되었다.

    수사관 이승희가 딸 메리 이안을 안고선 흥분했다.

    “그래서?”

    “삼촌이 안 된대.”

    진달래가 잔뜩 심통이 나 입을 내밀었다.

    “자랑하려고 전화했더니 화부터 내는 거야. 어리다는 둥, 얼굴값 하게 생겼다는 둥 아아아악!”

    료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생기긴 했어.”

    “좋잖아! 잘생기면 좋지!”

    나윤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왕소소는 편들어주었다.

    “여자 문제는 걱정 안 해도 돼.”

    진달래가 고개를 돌렸다.

    소소에게 지지받을 줄은 생각지 못했기에 반가웠다.

    “그치! 우리 대감은 나밖에 몰라.”

    “얼굴 보고 관심 생겨도 대화해 보면 질색할걸?”

    소소의 말에 차채은과 나윤희가 웃음을 참고자 입을 막았다.

    “언니!”

    “근데 정말 그럴지도? 얀스 씨 누가 자기 만지는 거 엄청 싫어하잖아.”

    료코가 소소의 말에 동의했다.

    기자가 그를 붙잡았을 때 경멸 어린 시선을 보냈던 기억을 떠올렸다.

    심지어 가까이에서 대화하는 것조차 불편하게 여겨 마스크를 쓸 정도로 타인을 병균 취급했다.

    그의 결벽증 때문이라도 칠삼이 걱정하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아무튼! 나밖에 모른다니까?”

    진달래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좋다는데 삼촌은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모르겠어.”

    그녀의 불평에 이승희가 단호히 말했다.

    “야, 딸 시집보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래? 너도 막상 가라고 하면 서운해할걸?”

    “조카거든?”

    “조카든 뭐든 너도 아빠처럼 생각했잖아. 칠삼 씨도 그랬을 테고.”

    진달래가 잠시 고민했다.

    이승희의 말대로 삼촌이 아무렇지도 않게 허락했으면 서운할 것 같았다.

    나윤희가 입을 열었다.

    “당황스러우실 것 같아. 아리엘 씨하고 대화도 못 나눠보셨잖아. 지금은 반대하시는 게 당연하고 자주 뵈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그런가?”

    “응. 아리엘 씨 한국말도 잘하니까. 또 상냥하고. 그런 점들이 보이면 허락하실 거야.”

    이승희에게 안긴 메리 이안이 손을 번쩍 들며 하품했다.

    “얘 졸리나 봐. 한스.”

    이승희가 딸을 데리고 남편을 찾으러 일어섰다.

    왕소소와 나윤희가 나서서 부엌으로 향했고 료코와 진달래, 차채은이 잔뜩 어질러진 거실을 치우기 시작했다.

    딸을 남편에게 맡기고 돌아온 이승희가 깜짝 놀랐다.

    “뭐 해? 앉아 있어. 내가 할게.”

    “아냐. 언니 좀 누워.”

    “다 되면 깨울게. 조금이라도 자.”

    동생들의 배려에 이승희가 감격했다.

    시간 때별로 젖을 물려야 했고 시도 때도 없이 잠에서 깨는 탓에 언제 제대로 잠든 지 기억도 나질 않았다.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기에 24시간 내내 지켜봐야 했으니, 부부는 잔뜩 지쳐 있었다.

    그나마 유진희나 동료들과 수다를 떠는 게 낙이었다.

    너무 지친 탓에 그녀는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생들의 배려에 감사했다.

    “고마워.”

    “응. 빨리 자.”

    잠시 뒤.

    피로한 탓에 눕자마자 기절하듯 잠든 이승희가 딸의 울음소리를 듣고 퍼뜩 일어났다.

    놀라서 나와보니 차채은이 잔뜩 긴장한 채 메리를 안고 있었고 남편 한스가 젖병을 데우고 있었다.

    이승희가 차채은에게 다가가 딸을 안아 들었다.

    엄마 품에 안기자 메리의 울음이 다소 진정되었고, 이승희가 본인이 녹음한 앨범을 작게 틀자 언제 울었냐는 듯 꺄르르 웃었다.

    “어머.”

    왕소소, 나윤희, 진달래, 료코, 차채은이 깜짝 놀랐다.

    해맑게 웃는 메리를 보다가 고개를 들어 설명을 촉구했다.

    “첼로 좋아하더라고. 신기하지.”

    다섯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승희 것만 좋아해. 다른 연주자들 건 귀신같이 알고 울더라. 천재라고.”

    “으유. 온도나 잘 맞춰.”

    남편의 딸 자랑에 이승희가 괜히 말을 돌렸다.

    차채은이 호들갑을 떨었다.

    “천재 맞잖아요! 구분할 수 있단 거 아니에요?”

    “우연이겠지.”

    “다른 거 틀어봐도 돼?”

    이승희가 고개를 끄덕이자 소소가 오디오로 다가가 고민하다가 다른 첼리스트의 앨범을 재생했다.

    꺄르르 웃던 메리 이안이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린 채 가만있다가 울상을 지었다.

    “어머머.”

    “천재다!”

    왕소소가 신기해하며 이번에는 한스 이안의 앨범을 재생하니 메리가 크게 울었다.

    “끄아앙아아아아앙!”

    료코와 소소가 물끄러미 한스를 보았다.

    “뭐, 뭐?”

    “아니. 아무것도.”

    그들은 한스를 불쌍히 여기며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나윤희가 입을 열었다.

    “보기 좋다.”

    “왜. 부러워?”

    “응. 부러워.”

    이승희가 씩 웃었다.

    “그럼 너도 빨리 결혼해.”

    “상대가 있어야 하지.”

    “상대가 없긴 왜 없어? 도빈이 있잖아.”

    이승희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당황한 나윤희가 손바닥을 보이며 부정했다.

    “아니라니까. 왜 또 그래.”

    “아니긴. 너 요즘 도빈이랑 계속 붙어 다니잖아.”

    “맞아. 나도 저번에 봤어.”

    차채은이 두 사람이 함께 있던 것을 떠올리며 맞장구쳤다.

    왕소소도 거들었다.

    “저번에 같이 밥도 해 먹었다며.”

    먹이를 찾은 맹수들이 눈을 빛내며 관심을 보였다.

    “어디서?”

    “윤희 집에서?”

    “어쩜 세상에. 무슨 일이야?”

    “퇴근 후에 집에서 단둘이?”

    “응. 퇴근 후에 단둘이.”

    “나도! 나도 봤어! 저번엔 공연도 같이 보러 갔어! 데이비드 개릭!”

    “어머머머. 세상에. 정말요?”

    “그랬대요. 글쎄.”

    이승희, 왕소소, 진달래, 료코, 차채은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 나윤희를 노려봤다.

    “이래도 아니야?”

    진달래를 추궁하기 위해 모였던 모임은 어느새 피의자 나윤희를 심문하는 방향으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강도 높은 조사를 두 시간이나 받은 나윤희는 어쩔 수 없이 기지를 발휘, 화제를 차채은과 최지훈으로 돌림으로써 겨우 귀가할 수 있었다.

    “으으으.”

    운전할 힘도 없이 녹초가 된 그녀는 자율주행을 켜두고 의자를 뒤로 넘겨 누워버렸다.

    부웅-

    진동이 울렸다.

    핸드폰을 볼 힘도 없어 누운 채 뭉그적대던 나윤희의 얼굴이 밝아졌다.

    배도빈이었다.

    [두 사람 다 잘 지내요?]

    [메리 생일 때는 같이 가요] 14:17

    {응. 정말 좋아 보여}

    {아! 선물 아직 못 골랐는데}

    14:17 {뭐 할 거야?}

    [돈이요] 14:18

    14:18 {그게 뭐야ㅋㅋㅋ}

    [옷이나 기저귀 같은 거 살까 싶다가]

    [그런 건 꼼꼼히 확인해서 사니까 차라리 돈 주는 게 낫대요] 14:19

    {아}

    {그렇겠다. 뭐 쓰는지 보고 올걸}

    {난 뭐 하지……}

    14:20 {그냥 물어봐야겠다}

    [좋은 생각이에요]

    [내일 11시에 갈게요] 14:20

    {내일 언제 올 거야?}

    14:20 {아, 응!}

    자세를 고쳐 잡고 메시지를 주고받던 그녀는 문득 자신이 웃고 있음을 깨달았다.

    ‘거봐. 일할 때도 퇴근 후에도 매일 같이 있으면서 아니긴 뭐가 아니야.’

    ‘배도빈 언니 좋아한다니까?’

    ‘언니도 오빠 좋아하잖아.’

    ‘도빈이 이야기만 나오면 귀 쫑긋 세우면서.’

    ‘반대. 난 반대.’

    친구들이 했던 말을 떠올린 그녀는 고민에 빠졌다.

    배도빈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을 조금씩 인지하고 있었지만 여러 상황과 걱정이 그녀를 붙잡았다.

    나이가 아홉 살이나 차이 나고.

    더군다나 유진희와는 서로 언니, 동생 하며 지내고 있었다.

    도진이도 자신을 이모라고 부르니 나윤희는 지금의 행복한 관계가 무너지는 게 두려웠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만에 하나라도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베를린 필하모닉의 구성원으로서 남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심지어 첫 직장에서도 무시당하기 일쑤였던 그녀는 지금의 관계가 너무나도 소중했다.

    그래서 속였다.

    안 좋은 일만 상상하여 자신을 속이고 달래 왔다.

    그러나 그를 향한 마음은 자꾸만 부풀었고 나윤희는 그것을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를 만날 때마다, 그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를 생각할 때마다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마음에 당황했다.

    일요일에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기쁜데.

    내일은 무슨 옷을 입을지, 무엇을 함께할지, 어떤 곡을 연주할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뛰는데.

    지금 관계로도 행복하다는 거짓말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어떡해.’

    나윤희가 손을 꼼지락댔다.

    그를 부축하기 위해 잡았던 손을, 그 감촉을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다가온 온기를 잊을 수 없었다.

    다시 잡고 싶었다.

    아니, 이제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다.

    아무리 부정해도, 그 어떤 걱정과 상황을 가져와 변명해도 나윤희는 자신을 억누를 수 없었다.

    매일 매시간 애끓는 마음을 마지막 남은 변명으로 견딜 뿐이었다.

    직장에서도 퇴근 후에도 항상 함께해서 행복하지만, 혹시 그는 지금의 일상을 귀찮게 여기지 않을까. 그러지 않아도 바쁜 그를 내가 방해하는 건 아닐까.

    그런 불안을 애써 키우며 참을 뿐이었다.

    그러나 만약 그런 걱정마저 사라진다면. 만약. 정말 만약에 그도 즐겁다면.

    ‘도빈이도 날…….’

    나윤희는 이성을 억제할 여력이 없었다.

    집에 돌아온 뒤에도, 블러드 와인을 손질하면서도.

    저녁을 먹을 때도, 청소하면서도, 배도빈과 메시지를 주고받는 와중에도, 이불 안에서도 한 번 물꼬를 튼 생각은 계속되었다.

    ‘언제부터였지?’

    나윤희는 언제부터 배도빈과 함께하는 데 익숙해졌는지 떠올렸다.

    ‘아. 카페.’

    배도빈이 시력을 잃었을 당시.

    답답해하는 그를 조금이라도 돕고 싶어 소소가 추천한 카페에 데려간 적 있었다.

    배도빈의 곡이 흘러나왔고 커피는 살짝 신맛이 났으며 초코 머핀은 혀가 녹을 듯이 달았다.

    디저트를 먹는 모습이 귀여워서, 마음이 쓰여서 그 이후로 줄곧 식사를 도왔다.

    ‘그랬어.’

    나윤희는 당시를 떠올리며 작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그보다 좀 더 먼 기억을 떠올렸다.

    가우왕과 최지훈의 자존심 싸움으로 시작된 배도빈 콩쿠르.

    배도빈은 단 한 번의 연주로 그간의 공백을 무색하게 했다.

    믿을 수 없는 감동을 전해주던 중, 그의 눈에 이상이 생겼고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철렁했다.

    너무 놀라서.

    그를 또 한 번 잃을 것 같아서 가만있을 수 없었다. 병간호를 자청했고 퇴근 후에는 항상 배도빈을 찾았다.

    둘 사이에 대화가 늘었고 나윤희는 그를 좀 더 알 수 있었다.

    당시 배도빈은 푸르트벵글러와 사카모토에게 대교향곡을 들려줘야 한다면서 조급함을 내비쳤다.

    외할아버지가 건강해 보이는지 묻는다든가 어머니와 아버지가 어떤 표정이었는지 물었다.

    도진이가 세수하고 로션은 바르는지.

    최지훈과 가우왕이 오늘은 어떻게 다퉜는지 궁금해했다.

    어떤 고민도 하지 않을 것처럼 완벽했던 배도빈이 걱정도 한다는 걸 안 순간 더 좋아졌다.

    당시 배도빈은 간혹 평소답지 않은 말과 행동을 했었다.

    ‘얼굴 만지고 싶어요.’

    ‘어?’

    늦은 밤. 배도빈은 귀가하려는 나윤희에게 이상한 부탁을 했다.

    부끄러웠지만 그러라고 하니 배도빈은 아주 조심스럽게 나윤희의 얼굴을 더듬었다.

    마치 피아노 건반을 가늠하듯 섬세하게. 무엇인가를 확인하듯 정성스레, 꼼꼼히 만졌다.

    왜 그러냐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질문을 던진 순간 그녀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많이 놀라고 당황했지만 그의 손길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도리어 묘한 분위기에 잠시 취했었다.

    그의 손이 떠날 땐 작은 아쉬움을 느끼기도 했다.

    이미 그 전부터 그를 마음에 두고 있던 것이다.

    그녀는 좀 더 과거를 떠올렸다.

    데이비드 개릭 티켓을 얻었을 때.

    그는 약속된 티켓 두 장 중 하나만 넘겼다. 나윤희가 뭐라 물어보기도 전에 약속을 잡아버렸다.

    당황했지만.

    내심 기뻤다.

    좋아하는 연주자의 공연을 함께 관람할 수 있어서 좋았다.

    무슨 옷을 입을지 일주일 내내 고민했다.

    일찌감치 만난 두 사람은 카페에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데이비드 개릭의 연주는 최고였고 밖으로 나선 두 사람은 오늘을 기념하며 열쇠고리를 샀다.

    바이올린 모양의 열쇠고리.

    흔하디흔한 공산품이지만 똑같은 물건을 나눠 가지는 것만으로도 알 수 없이 행복했다.

    그때도 이미 그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나윤희가 이불을 끌어당기며 작게 웃었다.

    그럼 언제부터였을까.

    ‘아.’

    나윤희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피곤해 보이는 배도빈에게 쉬는 게 어떠냐고 말하던 중 그가 빈혈을 일으켜 넘어진 적도 있었다.

    놀라서 구급차를 부르려고 했더니 배도빈이 손목을 잡고 이끌었다.

    덕분에 악보 무더기 사이로 넘어졌고 당황해서 일어서려는데, 그가 소리 내서 웃었다.

    잉크 냄새와 그가 쓰는 비누 냄새가 물씬 풍겼다.

    ‘가지 마요.’

    ‘어?’

    ‘쉬라면서요. 잠깐만 같이 있어요.’

    나윤희는 얼떨결에 그에게 무릎을 내주었고, 이내 곤히 잠든 그를 내려다보았다.

    혹시나 깰까 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얼마간.

    당황스러웠지만 그가 정말 돌아온 것 같아서, 그가 돌아오고 나서도 줄곧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그땐 정말 놀랐으니까.’

    나윤희가 가장 무서웠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가 탄 비행기가 추락했을 때.

    그로부터 전화가 왔을 때.

    핸드폰을 통해 전해지는 바람 소리가 매서웠다.

    당장에라도 꺼질 듯한 목소리는 그녀가 알고 있던 그의 것이 아니었다.

    무서웠다.

    매일 밤, 아니, 항상 그를 생각했다. 살아 있길 바라며, 반드시 살아 있을 거라 믿으며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지금 생각하면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가 돌아올 때까지 유진희와 배도진을 챙겨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무사히 돌아온다는 이야기에 너무 기쁜 나머지 카레를 끓일 때야 비로소 울 수 있었다.

    그때도 이미 그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면?’

    나윤희는 제1회 OOTY 오케스트라 대전 폐막일을 떠올렸다.

    ‘반드시 결승 무대에 데려갈 테니까.’

    그는 분명 약속을 지켰다.

    그 외에 아무도 나서지 못할 무대에서 그녀의 영상과 함께 듀엣을 이루었다.

    바쁜 일정 속에서 대체 언제 준비했는지 너무나 완벽한 듀엣이었다.

    결승에 오르고 싶은 마음을 애써 무시하고 있던 나윤희는 온 세상에 울려 퍼지는 그와 자신의 협주를 들으며 엉망이 된 손을 감쌌다.

    손이 그 지경이 되었을 때.

    불새를 연주했을 때.

    그녀는 비로소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찾은 듯했다.

    맞춤옷을 입은 듯 배도빈이 다시금 편곡한 불새는 연주하기 정말 편했다.

    그 어려움은 말할 것도 없지만 적어도 그녀는 불새를 연주함으로써 막연하게만 느꼈던 이상적인 연주를 해낼 수 있었다.

    내 옷.

    내 무대.

    내 바이올린.

    배도빈은 불새 협주곡으로 그녀가 누군지 알려주었다. 그녀의 바이올린이 아름답다고 했다. 다른 어떤 이유도 아닌, 그것을 연주하는 당신이 아름답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자신을.

    본인조차 믿지 못했던 자신을 먼저 알아보고 믿어주었다.

    손끝이 찢어지는 고통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지만 그에게 얻은 용기로 불새를 연주할 수 있었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달려온 그를, 그 얼굴을 잊을 수 없었다.

    좀처럼 볼 수 없었던 다급한 표정과 절절한 외침에 가슴이 뛰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직 그의 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을 때, 그가 처음 자신의 방에 들어왔을 때는 가슴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너무 긴장해서 데이비드 개릭을 왜 좋아하냐는 그의 질문에 잘생겨서 좋다는 헛소리를 꺼내기도 했다.

    사실이긴 하지만 그보단 강직한 스트로크와 과감한 연주를 좋아했다.

    과거를 떠올리던 나윤희는 그를 향한 마음이 생각보다 오래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아직 최지훈을 어색해하던 때, 조식을 언제 가지러 가야 할지 망설이던 그녀에게 음식이 어디 있는지 말해주었고.

    궁금한 게 있어도 묻지 못하고 있을 때 질문도 듣지 않고 대답해 주었다.

    슈퍼 슈바인에서는 항상 특제 카레를 양보했다. 좋아하지 않냐고 물으면 더 맛있으니 양보한다고 답했다.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자신을 속일 수 없었다.

    첫 만남 이후로 항상 그를 가슴에 두었고 그와 함께한 모든 순간이 행복했다.

    어느새 가슴 한가득 차오른 연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어떡해…….”

    그녀는 잠들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오늘은 아니야.’

    밤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가슴만 애태우던 그녀는 오늘 배도빈을 만나는 게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버섯이 좋겠어요. 새송이, 느타리] 23:58

    23:58 {맛있겠다 표고도 넣을까?}

    [표고도 사 갈게요] 23:58

    23:58 {아니야 다 있어. 그냥 와도 돼}

    [그래요. 출발하기 전에 연락할게요]

    [자야겠어요] 23:59

    23:59 {응. 좋은 꿈 꿔}

    ---------------어제----------------

    [잘 자ㅇ] 00:00

    [+] 나 오늘 좀 아파서 그런데… ◉ #

    대화방에 메시지를 적던 나윤희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프다고 하면 걱정할 것이 뻔했기에 썼던 문장을 지우고 쓰길 반복했다.

    그렇게 고민하길 얼마간.

    약속한 시각이 채 한 시간도 남지 않았음을 확인한 나윤희가 급히 메시지를 보냈다.

    {나 사실}

    {오늘 연습하기 싫은데……}

    {다음에 하면 안 돼?}

    10:01 {갑자기 미안해}

    최대한 머리를 굴려 메시지를 보낸 나윤희가 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전에 배도빈이 메시지를 읽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마조마하게 답장을 기다리던 그녀에게 그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래요] 10:02

    다행히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마땅한 이유가 생각나지 않아서 그냥 기분이 좋지 않다고 둘러댈 생각이었던 나윤희가 안도했다.

    [오늘은 바람 쐬러 가요] 10:03

    [+] 미안해 그럼 내일 보 ◉ #

    나윤희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연습하기 싫다는 핑계까지 대면서 만나지 않으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기고 말았다.

    ‘어쩌지?’

    머리를 쥐어짰지만 밤을 꼬박 새운 데다 당황한 탓에 평소처럼 총명하지 못했다.

    고민하는 도중에도 머리를 감고 화장하는 자신을 믿을 수 없었다.

    그렇게 고민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흘러 초인종이 울렸다.

    나윤희가 움찔했다.

    조심스레 나가서 문을 열었다.

    그러나 벌어진 문틈으로 배도빈을 본 순간 그녀가 손에 힘을 주었다.

    문이 열리다 말자 배도빈이 한발 물러서서 물었다.

    “어디 걸렸어요?”

    “오, 오늘은 안 될 것 같아.”

    “그래요. 오늘은 쉬어요.”

    “그게 아니라! ……오늘은 그, 그냥 혼자 있고 싶어.”

    “무슨 일 있어요?”

    배도빈이 걱정스레 물었다.

    원래 이상한 사람이긴 해도 오늘따라 더 이상한 행동을 하니 무슨 일인가 싶어 걱정되었다.

    “아니! 그냥! 그, 그냥 혼자 있고 싶어서…….”

    당황해서 커졌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갔다.

    배도빈은 아주 살짝 열린 문을 보며 고민했다. 슬쩍 그녀가 좋아하는 하늘색 카디건을 입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외출할 준비까지 해놓고 가기 싫다고 하니 뭔가 사정이 있으리라.

    그녀가 조용한 분위기를 좋아하고 가끔은 혼자 있어야만 한다는 걸 알고 있는지라 더 다가가지는 않았다.

    “알겠어요. 갈 테니까 이것만 받아요.”

    “어?”

    “샌드위치. 치킨이랑 토마토 넣었어요.”

    나윤희가 조심스레 손을 뻗어 바구니를 받았다.

    카레 향이 은은하게 났다.

    치킨에 카레 소스를 묻힌 듯했다.

    “밖에서는 카레 못 먹잖아요.”

    “만들었어……?”

    “그러려고 했는데 정 주방장님이 말리더라고요.”

    일요일 오전.

    꾀병을 부렸을 뿐인데 기분 전환을 해주고자 찾아온 배도빈을 이대로 보낼 수 없었다.

    그와 나란히 앉아서 여유롭게 피크닉을 즐기고 싶었다.

    문고리를 굳게 잡고 있던 나윤희의 손에 힘이 빠져나갔다.

    슬며시 문을 연 나윤희가 배도빈을 살폈다.

    최근 몇 년 사이 키가 부쩍 큰 그를 보려면 고개를 높이 들어야 했다.

    피로로 주변이 살짝 어두워진 깊고 가는 눈은 퇴폐미를 좋아하는 그녀의 취향 그대로였다.

    날카롭게 뻗은 콧대와 심술궂은 입술, 신경질적인 눈썹이 모이자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가, 갈까?”

    배도빈이 눈썹을 더욱 찌푸렸다.

    “괜찮아요?”

    “으, 응. 아마.”

    “정말 무슨 일 없어요?”

    “응…….”

    “이상한데.”

    “나, 나, 워, 원래 이상해.”

    나윤희가 서둘러 집을 나섰다.

    평소와 다른 태도를 의심하던 배도빈도 어깨를 으쓱이곤 차에 올라탔다.

    매일 새벽 푸르트벵글러와 함께 산책하는 티어가르텐은 배도빈에게도 나윤희에게도 특별한 장소가 아니었다.

    산책로를 걷다 보면 드문드문 작은 강줄기 옆에 벤치가 있었다.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적당한 곳에 자리했다.

    배도빈은 나윤희가 평소보다 더 많이 웃어서 내심 안도했다.

    나윤희는 그가 자신을 걱정해 주는 게 미안하면서도 기뻤다.

    바구니를 여니 배도빈 저택의 전속 주방장 정 셰프가 준비한 샌드위치와 디저트, 생과일주스가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맛있겠다.”

    나윤희가 샌드위치를 꺼내 배도빈에게 주었다.

    “맛있네요.”

    “응. 식감이 재밌어.”

    “빵을 구운 게 좋은 선택이었어요.”

    “다음에 여쭤봐야겠다.”

    두 사람은 정 셰프의 실력을 칭찬하며 작은 강을 바라보았다.

    때때로 악단 이야기, 좋아하는 음악가 이야기, 어제 봤던 뉴스 소식, 푸르트벵글러호의 다음 행선지, 메리 이안이 얼마나 귀여운지를 이야기했다.

    그러다 문득 대화가 끊겼다.

    불편하지 않았다.

    그저 그가, 그녀가 곁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이제 제법 따뜻해진 봄 햇살과 작은 파문 하나 없이 고요한 강, 때때로 귀를 즐겁게 하는 새들의 울음소리.

    선선한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갔다.

    “누나.”

    “응?”

    배도빈의 부름에 고개를 돌린 나윤희는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의 눈빛과 진지한 표정만으로도 그가 자신과 같음을 알 수 있었다.

    ‘어떡해. 말하려나 봐.’

    서로 시선을 마주한 찰나의 시간.

    나윤희의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들어섰다.

    유진희와 배영준에게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주변에는 뭐라고 말할지. 정말 이래도 되는지.

    그러나 이제 그 모든 게 상관없어졌다.

    그를 향한 마음이 부풀 대로 부풀어, 그보다 소중한 것은 없었다.

    나윤희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자고.

    나도 좋아한다고.

    그렇게 답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가 마음의 준비를 마치자 배도빈이 입을 열었다.

    “좋아해요.”

    이보다 다정할 수 있을까.

    애정 가득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윤희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나도.”

    목소리가 잔뜩 떨렸다.

    그러나 더는 참을 수 없었기에 오랜 시간 키워온 애정을 입에 담았다.

    “좋아해요.”

    두 사람이 조금씩 서로를 향해 다가갔다.

    그는. 그녀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다가 눈썹과 이마를 지나 코를 눈에 담고 그 아래, 뜨거운 열기를 내뱉는 입술을 돌아서 다시 눈을 마주한 순간.

    그동안 예열해 온 감정을 나누었다.

    그들을 막아서고 있던 경계가 허물어지자 더는 걷잡을 수 없었다. 사랑을 담았던 입을 통해 열망이 흘러넘쳤다.

    그녀는. 그는.

    서로의 열기를 느낄수록 더욱더 사랑을 탐했다.

    그것은 중독이었다.

    시작된 순간 갈망하게 되어 서로를 끝없이 위했다. 바랐다. 맞잡은 손과 흘러넘치는 사랑을 더욱 느끼고 싶었다.

    마침내.

    입을 뗀 두 사람이 애정 가득한 시선을 나누었다.

    나윤희가 미소 지었다.

    4월의 일요일.

    조용한 공원 아래 선선한 바람을 곁에 두고 나눈 사랑을 믿을 수 없었다.

    안타까울 뿐이었던 가슴이 벅차오르는 충족감으로 마침내 자신이 완전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로 인하여 완전한 내가 되고.

    그녀로 인하여 완전한 내가 되었다.

    “우리…….”

    나윤희가 용기를 냈다.

    사귀자는 말을 담으려 하는 순간, 배도빈이 미소 지으며 가슴 깊이 담아두었던 말을 꺼냈다.

    “결혼해요.”

    순간.

    세상이 멈춘 듯했다.

    머릿속으로 상정한 수십 개의 상황을 아득히 넘어선 배도빈의 발언에 나윤희의 사고가 멈추고 말았다.

    “…….”

    “…….”

    기나긴 침묵 끝에.

    나윤희가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안 돼!”

    * * *

    월요일 아침.

    배도진이 새벽부터 한 시간가량 카레를 젓고 있는 형을 의아하게 올려다보았다.

    “형, 오늘은 출근 안 해?”

    “해.”

    “근데 왜 카레만 저어?”

    “글쎄.”

    배도빈이 시큰둥하게 답했다.

    배도진이 뭔가 반응을 얻고자 옆구리를 간지럽혀 보기도 했지만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배도진이 눈을 깜빡거렸다.

    항상 어떤 행동이든 이유와 목적을 가졌던 형이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니 흥미로웠다.

    실험을 목적으로 배토벤을 데리고 온 배도진이 의자에 올라섰다.

    머리에 배토벤을 놓아도 형은 자세 한 번 흐트러지지 않고 카레만 저을 뿐이었다.

    어디 아픈 건가 싶어 자신과 형의 이마에 손을 대 열이 있는지 확인해 봤지만 특별한 이상은 없었다.

    “카레 먹고 싶어?”

    “아니.”

    “그럼 왜 만들어?”

    “글쎄.”

    배도진이 형과 주변을 한참이나 관찰하더니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 감탄했다.

    “아!”

    배도진이 안방으로 후다닥 뛰어갔다.

    “엄마! 엄마!”

    아직 잠에서 덜 깬 유진희가 갑자기 달려든 둘째를 안았다.

    “으음.”

    “엄마! 형이 고장 났어요!”

    “고장?”

    배도진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잠에 취한 유진희는 크게 반응하지 않고 금방 다시 잠들었다.

    배도진이 낑낑대며 어머니에게서 벗어나 이번에는 아버지에게 달려들었다.

    “아빠! 아빠!”

    “으어?”

    “형이 고장 났어요!”

    아침부터 소리치는 둘째에 의해 부부가 조금씩 정신을 차렸다. 시계를 확인하니 7시도 되지 않았다.

    “무슨 말이야. 형이 고장 났다니.”

    유진희가 중얼거리듯 물었다.

    “이상해요!”

    둘째의 외침에도 여전히 누워 있던 부부가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혹시나 다시 사고 후유증이 온 건 아닌지 싶어 정신이 퍼뜩 들었다.

    놀란 부부가 침대에서 벗어나 밖으로 나섰다.

    “도빈아!”

    아들을 애타게 외친 두 사람이 부엌으로 향했고 냄비 앞에서 국자를 휘젓고 있는 첫째를 보고 나서야 겨우 안도했다.

    뒤따라온 배도진이 형에게 다가가 간지럼을 태웠다.

    “봐요! 이상하지!”

    부부가 한숨을 내쉬고 웃었다.

    “요리할 땐 장난치면 안 돼. 불 앞이니 위험하잖니.”

    유진희가 식탁 의자를 꺼내 앉았다.

    배도진이 아 하고 식탁에 따라 앉았고 배영준은 늘어지게 하품했다.

    “오늘은 냄새가 괜찮은데?”

    첫째의 실험 정신을 익히 알고 있던 가족은 오늘따라 정상적인 카레 냄새에 작은 의문을 품었다.

    그때 배도진이 조리대를 가리켰다.

    “봐요! 이상한 게 없잖아요!”

    그러고 보니 둘째의 말대로 오늘은 오렌지 주스라든가 분유, 돼지고기 육수, 커피콩, 파인애플, 초콜릿 같은 이상한 재료가 보이지 않았다.

    배도진이 자신의 가설을 증명해 보이기라도 하듯 배도빈이 젓고 있던 카레를 떠먹었다.

    “도진아!”

    둘째가 배탈이라도 나지 않을까 걱정한 부부가 놀라 외쳤다.

    그러나 배도빈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웃었다.

    “맛있어!”

    그럴 리가 없었다.

    첫째의 카레를 한 번 더 떠먹는 둘째를 두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유진희가 앞으로 나섰다.

    첫째의 처참한 요리 실력을 걱정하며 카레를 떴다. 아들의 카레를 입에 넣을 때는 큰 용기가 필요했고, 막상 넣고도 섣불리 혀를 움직일 수 없었다.

    “……맛있어.”

    카레 맛은 정상이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도빈아, 무슨 일 있니? 응?”

    유진희가 놀라서 첫째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지만 배도빈은 반응하지 않았다.

    * * *

    월요일 오전 베를린 필하모닉 A가 대연습실에 모여 악기를 손질하고 있었다.

    이윽고 배도빈이 모습을 드러냈다.

    단원들이 일어나 그를 맞이했고 배도빈은 가운데 놓인 의자에 앉았다.

    그 모습이 힘없어 보였다.

    ‘왜 저러지?’

    ‘기분 안 좋은 일 있나?’

    단원들이 내심 그를 걱정했다.

    잠시 멍하니 있던 배도빈이 곧 악보로 눈을 돌렸다.

    “3악장부터 가죠.”

    오늘 연습할 곡은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

    위대한 악성 베토벤의 향수가 물씬 풍기는 곡으로 기존의 절대음악과 이후 표제음악의 경계를 가르는 기념비적인 작품이었다.

    그중 3악장은 전원 풍경이란 제목이 붙어 있는데, 제목과는 달리 전원을 묘사하는 한면 관찰자의 심적 상황을 효과적으로 드러냈다.

    특히 오보에를 무대 밖에 배치함으로써 메아리처럼 들리게 하는 등 여러모로 색다른 방법이 시도되었다.

    무대를 가운데 두고 객석이 주변을 감싸는 루트비히홀에서는 그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로 2028년 상반기를 맞이해 베를린 필하모닉이 준비한 비장의 수였다.

    배도빈이 지휘봉을 들어 올리자 목동의 평화로운 피리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지적하긴 했지만 보스의 지휘봉이 멈추지 않았기에 연주는 계속되었다.

    “여리게. 더 여리게.”

    목관 악기 연주자들이 지휘자의 요구에 맞춰 음량을 낮춰나갔다.

    악기의 특성상 작은 소리를 정확히 유지하기 어려웠으나 노련한 베를린 필하모닉에게 문제 될 일은 없었다.

    배도빈이 양손을 들어 올리자 천천히 다른 악기들도 깨어나기 시작한다.

    기나긴 겨울을 지나 싹트는 새싹처럼 노래했다.

    첼로가 바람처럼 불어오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이어지던 중.

    배도빈이 지휘봉을 가로로 그었다.

    일순간 분위기가 바뀌어 현악부가 목동의 다부진 각오를 노래한다.

    배도빈이 지휘봉을 내렸다.

    “이 부분은 화자가 자연을 바라보며 각오를 다지는 느낌으로 갑니다. 비브라토를 끌면 안 되요. 다시.”

    연습실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힘없어 보이던 배도빈이 평소와 같이 연습을 진행하자 단원들은 다소 안심했다.

    그들의 지휘자는 여전히 예리하고 정확하게 문제를 판단, 지적했다.

    “끊어 갑니다. 좋아요. 그대로.”

    단원들은 배도빈의 지적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고 연주는 점점 틀을 갖추어 나갔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단원들은 그들의 걱정을 단지 기분 탓으로 돌렸고, 휴식조차 없이 4시간이나 연습이 이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뭔가 잘못됨을 느꼈다.

    ‘오늘 왜 이렇게 터프하지?’

    ‘배고파.’

    ‘문제가 남아 있는 건 알겠는데 당장 내일 공연에 올릴 것도 아니잖아.’

    단원들이 잔뜩 지쳐 가자 찰스 브라움이 나섰다.

    “벌써 4시간째야. 점심도 먹을 겸 쉬고 하지.”

    그의 목소리를 들은 배도빈이 눈을 몇 번 깜빡인 뒤 문득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2시가 지나 있었다.

    “아.”

    배도빈이 시계를 멍하니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보스의 말에 단원들이 그제야 숨을 길게 내쉬었다. 장시간 긴장했던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몇몇은 그대로 누워 버리기도 했다.

    * * *

    “…….”

    “…….”

    배도빈을 앞에 둔 최지훈과 진달래는 말문이 막혔다.

    접시 가득 양상추만 올려두고 그것만 씹기 시작한 배도빈은 어딜 보고 있는지 초점이 없었다.

    “얘 왜 이래?”

    “모르겠어.”

    최지훈이 상체를 앞으로 내밀고 걱정스레 물었다.

    “도빈아, 무슨 일 있어?”

    배도빈은 대답하지 않고 아삭아삭 양상추를 씹을 뿐이었다.

    “도빈아.”

    아삭아삭.

    “배도빈!”

    배도빈의 초점이 돌아왔다.

    “왜.”

    “무슨 일 있냐고. 아침부터 이상하잖아.”

    “아니.”

    “그럼 어디 아파?”

    “아니.”

    “그럼 왜 이러는 거야. 연습을 4시간이나 하질 않나 양상추만 먹질 않나.”

    진달래가 고개를 끄덕이며 최지훈의 말에 힘을 실었다.

    배도빈이 문득 고개를 내려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아.”

    형제가 드디어 이상한 점을 자각했구나 싶었던 최지훈의 생각이 무색하게 배도빈이 테이블 가운데에 놓인 드레싱 소스 통을 집었다.

    그것을 한 바퀴 돌려 짜낸 뒤 다시 양상추를 먹기 시작했다.

    최지훈과 진달래가 다시 황당하여 얼이 빠졌다.

    진달래는 배도빈이 무섭기까지 했다.

    “뭐야. 진짜 왜 그래, 너.”

    아삭아삭.

    배도빈이 고개를 돌리고 무신경하게 답했다.

    “양상추가 신선해.”

    “…….”

    “안 되겠어. 도빈아, 병원 가자.”

    최지훈이 일어서 배도빈을 끌어내자 배도빈이 힘없이 딸려 나왔다.

    최지훈에게 질질 끌려가는 보스를 두고 직원 식당에 있던 단원들이 동요했다.

    “보스 왜 저러셔?”

    “몰라. 어디 아프신가?”

    “무슨 일 있어?”

    “아까 최가 보스 데리고 어디 가던데 힘이 없어 보여서.”

    “아, 나도 봤어. 피곤하신가?”

    그렇게 배도빈을 끌고 가던 최지훈 앞에 왕소소와 나윤희가 나타났다.

    나윤희가 고개를 푹 숙이고 얼굴을 붉혔다.

    “도빈?”

    “아, 누나.”

    왕소소가 힘없이 축 처진 배도빈을 불렀고 최지훈이 두 사람을 반가워했다.

    “아침부터 이상해서 병원 데려가는 중이에요. 오후엔 자리 비울 것 같아요.”

    배도빈이 자세를 바로 했다.

    최지훈과 왕소소가 그를 의아히 여기는데, 배도빈이 나윤희를 보며 입을 열었다.

    “결.”

    최지훈과 왕소소는 나윤희가 그렇게 빠르게 움직이는 걸 처음 보았다.

    순식간에 앞으로 튀어나와 배도빈의 입을 막고 끌고 가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윤희와 배도빈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두 눈을 깜빡이며 지켜보던 소소가 입을 열었다.

    “윤희 오늘 이상해.”

    “도빈이도요.”

    한편.

    배도빈의 집무실로 향한 나윤희가 돌아서자마자 또 한 번 거절 의사를 밝혔다.

    “너무 이르잖아.”

    그녀 나름대로 잔뜩 화나 있었지만 배도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어제와 같은 눈으로.

    너무도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나 좋아하잖아요.”

    나윤희가 한발 물러섰다.

    “그, 그래도 갑자기. ……사귀지도 않았는데.”

    “난 좋아해요.”

    배도빈이 또다시 진지하게 나서자 나윤희가 시선을 피했다.

    배도빈이 앞으로 한 발 내디뎠다.

    “좋아해요.”

    목을 움츠리고 애써 버텼지만 다시 한번 다가오는 그를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나윤희가 눈을 꼭 감았다.

    “좋아해요.”

    이상했다.

    결혼이라니.

    상상도 해보지 않았다.

    단지 사귀는 것만으로도 생각할 게 너무나 많았는데, 그보다 한참 앞서간 일을 좀처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분명 그러한데.

    마음을 전하는 그의 목소리가 너무나 반갑고 기뻐서 그녀는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었다.

    “좋아해요.”

    “……조, 좋아해요.”

    배도빈이 나윤희의 손을 잡았다.

    양손을 맞잡고 얼마간.

    천천히 눈을 뜨고 고개를 든 나윤희는 여전히 당당하고 올곧은, 사랑이 가득한 눈을 보고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그가 자신을 요구하는 것처럼.

    나윤희 본인도 그를 바랐기에.

    어제의 황홀한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기에 입을 맞췄다.

    배도빈이 오른손을 빼 주머니로 가져가고 입술을 뗀 그녀 앞에 반지를 보였다.

    4캐럿의 투명한 다이아몬드 주변으로 작은 레드 다이아몬드가 핏방울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배도빈이 그녀의 왼손을 잡아 들었으나 그녀는 거부하지 않았다.

    한 번 거절했지만, 그를 향한 마음이 너무도 커서 더 이상 밀어낼 수 없었다.

    배도빈이 나윤희의 약지에 반지를 끼웠다.

    차가운 감촉과 함께 알 수 없는 희열이 그녀의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어쩌려고 정말.”

    나윤희가 괜한 말을 꺼냈다.

    그러나 이내 배도빈을 끌어안으며 자신도 그러길 바란다는 뜻을 내비쳤다.

    두 사람이 긴 포옹을 나누고 떨어진 뒤.

    배도빈이 입을 열었다.

    “당장은 아니에요.”

    “어?”

    “기다려줘요.”

    생각지 못한 말에 나윤희가 눈을 깜빡이며 머리를 굴렸다.

    “뭘?”

    아무리 고민해도 무엇을 기다려 달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배도빈이 별일 아니라는 듯 답했다.

    “군대 다녀올게요.”

    나윤희의 눈이 거의 튀어나왔다.

    이제 겨우 마음껏 사랑하기로 마음먹었거늘,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정도가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잔뜩 높아졌다.

    “며, 면제잖아! 왜?”

    “국민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의무니까요.”

    “…….”

    나윤희가 황당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으니 배도빈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조국과 가족을 지키는 일이에요. 그런 명예와 권리를 포기할 수 없죠.”

    나윤희가 입만 뻐끔거리다가 외쳤다.

    “아, 안 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