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556화 (556/564)
  • 2. 프란츠 페터 넘어지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베를린 필하모닉과 5년 계약 체결!]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를 고용하기 위해 5년간 3,000만 달러를 지출한 베를린 필하모닉!]

    [폭군, 역대 최고 연봉 지휘자에 올라]

    [배도빈 악단주, “그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상징. 합당한 대우.”]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마이크 저리 치워!”]

    베를린 필하모닉이 푸르트벵글러와의 재계약 사실을 발표하자 음악계가 떠들썩해졌다.

    한화 75억 원에 달하는 금액을 연봉으로 지급한다는 내용도 충격이거니와 여든이 넘은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5년간 현역으로 활동한다는 데에도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배도빈 통 크네.

    └3,000만 달렄ㅋㅋㅋㅋ 연봉 미쳤는데?

    └푸벵옹이면 그 정도 인정이지. 한 악단에서 지휘자로만 반백 년 있었는데.

    └ㅋㅋㅋㅋㅋㅋ그건 그런데 진짜 5년이나 활동할 수 있나?

    └적어도 본인이랑 베를린 필하모닉은 그렇게 판단했다고 봐야지. 배도빈이 단원들 건강은 끔찍이 여기잖아. 큰 문제 없다는 거임.

    └나야 좋은데 푸르트벵글러 왤케 화났엌ㅋㅋㅋㅋㅋㅋㅋ

    └오, 푸르트벵글러 전집 낸대. 베필 공홈에 소식 뜸.

    └이런 거 가져오는 건 고마운데 해석도 좀 달아주라.

    └번역기 돌려.

    └올해 말부터 ‘DOBEAN’에 순차적으로 업로드 된대. 실물로도 내고.

    └아, 구독 해놨는데 이거 앨범 나오면 안 사고 못 버틸 것 같다.

    └베를린 필하모닉이 장사할 줄 알아. 이중 구매 유도 오지네.

    └안 사면 그만이짘ㅋㅋㅋㅋㅋ

    └저걸 어떻게 안 사죠?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지금까지 지휘했던 대표곡을 모아, 작곡가별로 전집 앨범을 준비한다는 소식도 적잖은 파장을 일으켰다.

    마치 은퇴를 준비하는 듯한 행보였기에 팬들은 아쉬워하는 한편, 살아 있는 전설의 마지막 앨범이 기다려지기도 했다.

    특히나 그와 절친한 사카모토 료이치에게는 너무나 기쁜 일이었다.

    “껄껄껄껄!”

    사카모토가 몹시 언짢은 푸르트벵글러를 보며 크게 웃었다.

    “그만 웃어!”

    “껄껄껄. 내 그럴 줄 알았네. 은퇴한다더니 아주 단단히 잡혔어.”

    푸르트벵글러가 있는 대로 인상을 쓰며 커피를 마셨다.

    “그래, 도빈 군이 대체 어떻게 자네 고집을 꺾었는지 말해보게.”

    “…….”

    “아, 어서.”

    사카모토의 재촉에 푸르트벵글러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전집 만들자고 아주 살살 꼬드기더만.”

    “오, 거기에 넘어간 거로군. 명석해. 과연.”

    “내가 그따위 얄팍한 수작에 넘어갈 줄 알고!”

    “넘어갔잖은가. 껄껄껄껄!”

    “허파에 바람 찼어? 그만 웃어!”

    “하하하하!”

    사카모토는 푸르트벵글러의 호통에도 개의치 않고 웃었다. 무릎을 치며 좋아하는 벗을 못마땅하게 보던 푸르트벵글러가 중얼거렸다.

    “요물이 따로 없어. 얼핏 괜찮은 말을 꺼냈다가, 안 먹히니까 사람 마음 약하게나 하고.”

    “음? 약하게 하다니.”

    “울먹이더라고.”

    “도빈 군이?”

    “그럼 누가?”

    “정말인가? 믿을 수 없는데.”

    “내가 거짓말이라도 한단 말이야!”

    푸르트벵글러가 잔을 내려놓았다.

    “당장이라도 눈물 뚝뚝 흘릴 것처럼 있는데 거기서 어떻게 매정하게 굴어. 빌어먹을.”

    사카모토가 푸르트벵글러를 빤히 바라보다 다시 웃었다.

    “하하하하! 내 생각엔 자네가 속은 듯하이. 도빈 군이 어디 우는 거 봤는가.”

    “……속아?”

    “뭐, 그 이야긴 뒤에 하고. 5년씩이나 있을 필요가 있는가?”

    “줄인 게 그거야! 그 망할 놈이 10년이나 불렀다니까! 이게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이야?”

    “음. 10년은 길지.”

    “아주 바득바득 한 마디도 지지 않아서 결국에 5년으로 하자고 달랬지.”

    푸르트벵글러가 그나마 자존심을 세웠다.

    그러나 사카모토는 울먹이던 배도빈이 당장 태도를 바꿔 5년 계약을 성공시켰다는 점에서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배도빈이 푸르트벵글러를 진심으로 위하여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한 점이나, 그 마음을 알고 있는 푸르트벵글러가 배도빈의 억지에 일부러 넘어가 준 것까지 안 봐도 훤했다.

    “부럽군. 부러워.”

    사카모토의 솔직한 감상에 푸르트벵글러가 경을 쳤다.

    “놀리려고 왔어? 부럽긴 뭐가 부러워!”

    “껄껄껄! 좋으면서 괜히 그러지 말게. 앨범 작업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주지 않았나.”

    “……끄응.”

    “솔직해지게. 우리 살날이 얼마나 남았겠나. 살아 있을 때 즐겁게 지내야지.”

    푸르트벵글러가 소파에 등을 기댔다. 사카모토의 말대로 음악인으로 살아왔던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다.

    앞만 보고 달렸고.

    누구보다도 높은 곳에 이른 그는 자신의 세계관을 정리하고 싶었다.

    벗의 말대로 그럴 때가 온 듯했다.

    * * *

    “여기! 여기!”

    시네스타 영화관 앞에 있던 페터 형제가 배도진을 발견하자 손을 흔들었다.

    배도진도 형제를 발견하곤 집사에게 허리를 꾸벅 숙였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변에 있을 테니 끝나면 전화하세요.”

    “네!”

    집사와 인사한 배도진이 페터 형제를 향해 후다닥 뛰었다.

    “포스터! 포스터는?”

    “여기! 팸플릿도 있어.”

    “시사회 티켓 가지고 가면 장난감도 준대.”

    “정말?”

    세 친구가 발을 구르며 좋아했다.

    그들이 신이 난 이유는 배영빈 감독, 나비계곡 원작의 극장용 애니메이션 <만 년 만에 귀환한 플레이어>의 시사회 날이기 때문.

    <매국노>로 기반을 쌓고 과 <지구방위대 가랜드>를 크게 성공시켜 일약 스타 감독이 된 배영빈의 신작 애니메이션은 아시아를 넘어서 유럽과 북미에서도 큰 기대를 받고 있었다.

    “근데 도빈이 형은?”

    프란츠 페터가 배도빈을 찾았다.

    “형 요즘 안 놀아줘.”

    배도진이 입을 내밀었다.

    “맨날 윤희 이모랑만 놀고. 미워.”

    “일하시는 거 아냐?”

    배도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막 둘이 방에서 피아노 치고 바이올린 켜고 그런단 말이야.”

    “일하시는 거 맞잖아.”

    “아니라구우.”

    “형, 빨리! 늦으면 어떡해.”

    “아, 응. 가자. 가자.”

    세 친구가 상영관 입구 앞에 설치된 간이 테이블로 향했다.

    이미 많은 사람이 줄을 서서 시사회 당첨 티켓을 보이고 피규어를 받고 있었다.

    곧 세 친구 차례가 왔다.

    “여기요.”

    페터 형제와 배도진이 핸드폰을 보여주자 안내원이 명단을 확인한 뒤 미소 지었다.

    “어떤 피규어로 드릴까요?”

    “이거요!”

    “저도요, 저도.”

    세 사람 모두 고민하지 않고 가장 많은 인기를 끄는 캐릭터인 사탄을 집어 들었다.

    그 기괴한 형체의 피규어를 받아 들자 미소가 절로 걸렸다.

    “근데~”

    “응.”

    “진짜 음악 형이 만들었어?”

    “응.”

    프란츠 페터가 예전 일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스트라 대전으로 한창 바빴던 탓에 배도빈은 배영빈의 신작 애니메이션 OST를 프란츠 페터에게 맡겼었다.

    록 밴드 풍의 곡은 처음이고.

    전자기타와 전자베이스 등 모두 처음 활용하는 악기였기에 제법 고생했었다.

    “형 멋있네?”

    알베르트가 프란츠를 올려다보았고 배도진도 그 행동을 따라 하자 프란츠가 쑥스러운 듯 고개를 돌렸다.

    “저기…….”

    그때 알베르트와 배도진과 비슷한 나이대의 남학생 둘이 말을 걸었다.

    “네?”

    “베, 베를린 필하모닉의 프란츠 페터 맞죠?”

    “아…… 네, 넵!”

    “진짜, 진짜 이 만화영화 음악 직접 만드셨어요?”

    “그렇긴 한데…….”

    처음 만든 애니메이션 OST에 자신이 없던 탓에 우물쭈물하는 프란츠를 대신해 배도진과 알베르트가 나섰다.

    “맞아요!”

    “우리 형이 만들었어요!”

    “와!”

    두 학생이 눈을 크게 떴다. 잔뜩 달아오른 듯 몸을 들썩였다.

    “알! 도진아!”

    당황한 프란츠 앞에 영화 포스터가 들이밀어졌다.

    “저, 저, 혹시 사인 부탁드려도 될까요.”

    “저도요!”

    생전 처음 받아보는 관심에 프란츠의 얼굴이 빨갛게 되었다. 동생 알베르트가 옆구리를 찔러 일단 펜과 포스터를 받긴 했지만 뭘 적어줘야 할지 몰랐다.

    “이, 이름이라도 괜찮으시면.”

    두 학생이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프란츠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이름을 적었고 망설이다가 그 아래 오늘 날짜를 적었다.

    “아, 제 이름은 벤이에요.”

    “네?”

    “벤에게, 라고 적어주시면 안 돼요?”

    “아, 네, 네. 그럴게요.”

    “전 루카스요.”

    두 사람은 프란츠에게 사인을 받고 포스터를 펼쳐 보았다. 벤이란 소년은 그것을 끌어안았고 루카스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두 소년이 손을 흔들며 상영관으로 달려갔다.

    마찬가지로 손을 흔들어 인사한 프란츠는 긴장이 풀린 탓에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형 완전 멋지다!”

    “도빈이 형 같아!”

    알베르트와 배도진이 눈을 빛내며 프란츠를 올려다보았다.

    동생들의 동경 어린 시선에 부끄러워진 프란츠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나, 나도 처음이란 말이야. 그렇게 보지 마.”

    “아니야! 얼마나 대단한데!”

    “아니라니까. 우연이야. 우연.”

    “그래도 기쁘지?”

    “뭐……. 아이, 빨리 들어가자. 알, 화장실 안 다녀와도 돼?”

    프란츠가 화제를 돌리기 위해 화장실 이야기를 꺼냈을 때, 이번에는 한 남성이 아이들과 함께 다가왔다.

    “실례해요. 프란츠 페터 씨 맞으시죠?”

    “네? 마, 맞는데요.”

    “저기서 보고 있었는데 사인해 주시더라고요. 혹시 우리도 받을 수 있을까 싶어서요.”

    남성의 양옆에 남매가 간절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해주세요.”

    “사인받고 싶어요.”

    어린 남매의 부탁에 프란츠가 난감해하자 아버지가 한 번 더 부탁했다.

    “갑자기 부탁해서 미안해요. 그래도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밴드를 워낙 좋아해서. 저번 달에는 공연 다녀왔거든요.”

    “아!”

    웃고 떠드는 밴드의 팬이라는 말에 프란츠가 연방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러고는 쑥스럽게 손을 내밀어 남매에게 사인해 주었다.

    “이, 이름이 뭐야?”

    “릴리요!”

    “막스입니다!”

    두 아이가 ‘감사합니다’라고 행복하게 인사했고 프란츠는 뿌듯함과 쑥스러움을 동시에 느꼈다.

    지독한 유년 시절을 겪었던 프란츠는 누군가에게 동경 어린 시선을 받는 일이 부담스러우면서도 기쁘기도 했다.

    ‘하길 잘했나 봐.’

    다루지 못한 장르와 악기로 곡을 써야 한다는 제안에 겁이 나기도 했었다.

    실명한 상태로 오케스트라 대전을 준비하던 배도빈을 조금이라도 돕고 싶었기에 무리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막상 팬들의 인사를 받으니 마냥 꺼릴 일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

    잠시 후.

    세 사람이 상영관 안에 들어섰다.

    지루하고 긴 광고 영상 끝에.

    프란츠 페터가 쓴 오프닝 테마곡이 흘러나왔다.

    2028년 3월에 개봉한 배영빈 감독의 신작 애니메이션은 크나큰 성과를 거두었다.

    각 나라 커뮤니티에서 원작 특유의 유머를 잘 살렸다는 평이 속속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특히 액션 신은 제작사 크레용 위즈가 제작진을 갈아 넣었단 농담마저 나돌 정도로 훌륭했다.

    또한 프란츠 페터가 처음으로 만든 애니메이션 오프닝 곡도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평론가 차채은은 프란츠 페터가 과감한 도전을 시도했다며, 베를린 필하모닉의 실내악 팀, ‘웃고 떠드는 밴드’가 앞으로 어떤 음악관을 보일지 기대된다고 평했다.

    배도빈 콩쿠르 이후 이렇다 할 활동이 없었던 프란츠 페터에 대한 관심에 다시금 불이 붙고 있었다.

    “히.”

    배도빈이 고개를 돌렸다.

    악보 교정을 맡겨둔 프란츠 페터가 펜을 든 채 멍청히 웃고 있었다.

    초점 없는 눈으로 무심코 웃음을 흘리는 동생을 보며 배도빈도 피식 웃고 말았다.

    스승으로서 다양한 일을 경험시켜 주고자 했는데, 프란츠가 예상외로 잘 해내니 기특할 뿐이었다.

    “프란츠.”

    “……히.”

    “프란츠.”

    “……네? 부르셨어요?”

    “뭐 하고 있어? 그거 오늘까지 할 수 있어?”

    “아, 넵!”

    프란츠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젓고 악보를 보기 시작하자 배도빈이 다시 한번 피식 웃었다.

    그간 열심히 한 만큼 상을 준비해 두었지만 정말 줘도 괜찮을까 한 번 더 고민하게 되었다.

    ‘괜찮겠지.’

    엄하게만 대해서는 좋은 선생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 배도빈은 프란츠에게 다가가 괜히 헛기침했다.

    프란츠가 입을 벌린 채 고개를 들자 시선을 피하고 봉투를 던져주었다.

    책상 위에 놓인 봉투와 배도빈을 번갈아 보던 프란츠가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이게 뭐예요?”

    “상.”

    “네?”

    “뭘 놀래.”

    “아, 아니에요. 이런 거 안 주셔도 돼요.”

    “받아. 앞으로 더 열심히 하라고 주는 거니까.”

    “……형.”

    프란츠는 감격했다.

    그간 아무리 노력해도 항상 부족한 점을 지적받았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상을 받으니 감동하고 말았다.

    또 평소 배도빈을 잘 알고 있었기에 지금 그의 태도가 너무나 다정하게 느껴졌다.

    “감사합니다!”

    프란츠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엇이든 상관없었지만 배도빈이 어떤 걸 상으로 주었을지 너무나 기대되었다.

    ‘상품권? 현금?’

    봉투에 담긴 것으로 보아 둘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했다.

    ‘알 신발 사 줄 수 있겠다. 저번에 보니까 다 떨어졌던데. 아니, 빨리 집 사야 하는데…….’

    봉투를 열어보기도 전에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아니야. 그래도 신발 하나 정도는 괜찮을 거야. 나도 이제 돈 버니까. 이번 달에는 크레용 위즈에서도 돈 들어오고. ……도진이랑 도빈이 형 신발도 살까. 아, 산타랑 스칼라 형도.’

    “히.”

    프란츠는 동생 알베르트와 친구 산타 웨인, 스칼라 그리고 배도빈, 배도진 형제에게 선물할 생각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솔잎을 따다 먹고 딱딱한 빵을 나눠 먹어야 했던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여유로운 지금이 꿈만 같았다.

    그렇게 두근거리며 봉투를 열자 서류 한 장이 담겨 있었다.

    프란츠가 눈을 깜빡거렸다.

    “저…… 이게 뭐예요?”

    “읽어 봐.”

    “……영어 몰라요.”

    “핸드폰 뒀다 뭐 하게.”

    “아.”

    프란츠가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자 곧 독일어로 번역되어 알아볼 수 있었다.

    계 약 서

    “월드 디자인 스튜디오”는 작곡가 _____에게 다음과 같은 안건을 의뢰하고, 작곡가 _____는 이를 수행함에 아래와 같이 합의하여 본 계약을 체결한다.

    ‘어?’

    프란츠 페터의 동공이 흔들렸다.

    제1조에 정의된 계약상의 단어들을 어휘력이 저조한 프란츠가 이해할 순 없었다.

    프란츠가 눈을 끔뻑이며 고개를 들자 배도빈이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곤 설명하기 시작했다.

    “노먼이 급하게 사람을 찾고 있어.”

    “네…….”

    프란츠 페터의 떨떠름한 반응에 배도빈이 눈썹을 좁혔다.

    “몰라?”

    “우리 악단 분은 아니시고…….”

    배도빈은 프란츠가 영화를 즐길 만한 환경에서 자라지 못했음을 상기했다.

    “영화감독이야. 유명해. 나랑도 같이 몇 번 일했고. 블랙 나이트 인크리즈랑 덩케르크 철수 작전. 폴 투 윈도.”

    “아!”

    영화는 몰라도 배도빈의 곡은 전부 기억하고 있던 프란츠가 그제야 반갑게 반응했다.

    “이번에 만들 영화 도와달라 하더라고. 너도 알다시피 난 바쁘고.”

    “네.”

    “그래서 널 추천했지. 노먼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더라.”

    “아.”

    “영화는 내년 말에 개봉이지만 1차 예고편에 맞춰 작업해 주면 좋겠대.”

    프란츠가 계약서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계약서에는 3월 마지막 주 금요일까지로 명시되어 있었다.

    “2주밖에 안 남았잖아요!”

    “3분짜리 한 곡이면 돼. 그렇게 무리한 일정은 아니야.”

    “저는 이거 해본 적 없는데.”

    아무리 3분짜리 짧은 곡이라고 해도 영화사에서 바라는 건 웅장한 분위기의 관현악곡이었다.

    배도빈처럼 뚝딱 만들어낼 자신이 없었다.

    “좋은 기회야. 나도 그런 식으로 활동 폭을 넓혔으니 배운다고 생각하고 해.”

    “……네.”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프란츠 페터는 곧 마음을 다잡았다.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지 베토벤 기념 콩쿠르를 통해 충분히 느꼈다.

    유명 영화감독과 함께하다니.

    수많은 음악가가 평생을 바쳐도 잡지 못할 기회를 유약한 마음으로 날리고 싶지 않았다.

    “저, 할게요.”

    “그래.”

    프란츠가 주먹을 쥐며 의지를 태웠고 배도빈도 만족한 듯 영화 대본과 크리스틴 노먼이 바라는 가이드라인을 넘겨주었다.

    “충분히 읽어 둬. 모레 미팅 가질 거니까.”

    “네!”

    꼭 멋진 곡을 만들어야지 다짐한 프란츠가 영화 대본을 읽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프란츠는 뭔가 잊은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선물은?’

    그 순간 프란츠 페터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배도빈이 이렇게 큰 기회를 선물로 주었는데, 돈이나 상품권을 바랐던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워졌다.

    ‘무슨 생각 하는 거야.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데.’

    프란츠는 이번 달 말에 받을 보수에서 일부를 떼 동생과 배도빈, 배도진, 산타 웨인과 스칼라에게 좋은 신발을 사 주자고 마음먹었다.

    두 뺨을 때리고 다시 집중해 악보를 보았다.

    배도빈은 작은 성공과 칭찬 일색의 반응에 잠시 취했던 프란츠가 마음을 다잡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금 <파우스트>를 작업하기 시작했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점점 길어지고 퇴근 시간이 다가올 즈음.

    죠엘 웨인이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요.”

    배도빈이 깃펜을 내려놓았다.

    곧 문이 열리고 죠엘 웨인이 작은 박스 두 개를 가지고 안으로 들어섰다.

    “주문하신 물건 도착했습니다.”

    “수고했어요.”

    배도빈이 죠엘에게 눈짓을 주자 그녀가 프란츠 페터에게 다가갔다.

    프란츠는 의문 가득한 눈빛으로 죠엘과 배도빈을 보았다.

    “보스께서 주시는 선물이에요. 부러운데요?”

    얼떨떨하게 상자를 받은 프란츠는 그것을 열어보고 눈과 입을 크게 벌렸다.

    새 신발이었다.

    하나는 프란츠에게 딱 맞는 크기의 유명 브랜드의 운동화였고 다른 하나는 그보다 조금 작았다.

    프란츠가 고개를 돌려 배도빈을 보았다.

    “저번에 보니 알베르트 신발이 떨어져 있더라. 돈 벌어서 어디다 쓰는 거야.”

    “형…….”

    “사는 김에 네 것도 샀으니까 갈아 신어. 누가 보면 돈도 안 주고 일 시키는지 알겠어.”

    “혀어엉.”

    프란츠가 배도빈에게 다가가 그를 끌어안으려 했다.

    배도빈이 질색하고 몸을 뺐지만 막무가내였다.

    * * *

    “가우왕 씨, 이리 와서 앉아 봐요.”

    “가우왕 씨?”

    “그래. 가우왕 씨.”

    늦은 밤.

    예나왕이 샤워를 하고 나온 가우왕을 불러다 앉혔다.

    평소 가가라고 살갑게 부르던 아내의 날카로운 태도에 가우왕은 의아해했다.

    “왜 그래?”

    “왜 그래?”

    “…….”

    가우왕은 예나가 단단히 화난 이유를 찾지 못하면 한동안 크게 괴로울 거라고 직감했다.

    “좋아. 무슨 일인지 알겠어.”

    가우왕이 두 손을 들고 예나를 진정시켰다.

    예나왕은 팔짱을 끼고 남편이 무슨 말을 꺼낼지 기다렸다.

    “오늘 아침 일일 거야.”

    아내가 눈썹을 좁혔고.

    “……어제 일일 수도 있고.”

    한숨을 내쉬었다.

    가우왕은 혼란스러웠다.

    당번으로 하는 빨래와 청소 모두 문제없었고, 출근 전에 입을 맞추는 걸 잊은 적도 없었다.

    그제 동료들과 축구장에 갔던 일도 미리 알렸고, 저녁 식사는 함께했었다.

    본인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 수 없었다.

    남편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모르는 것 같았기에 예나가 입을 열었다.

    “결혼 전부터 말했지만 난 아이 가질 거야. 당신도 동의했고.”

    가우왕이 슬쩍 웃으며 그녀를 안으려 하자 예나왕이 남편을 밀쳤다.

    “그래서. 대체 언제까지 피울 건데?”

    “아.”

    “담배 끊고 최소 3년은 지나야 아기한테 문제없다고 하잖아. 언제 끊을 셈이야? 우리 둘 다 늙고?”

    “그럴 리가 없잖아.”

    “지금 당장 끊어.”

    “당장?”

    “당장. 안 그러면 각방 써.”

    부부생활 중단 선언이었다.

    가우왕이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외투 주머니에 들어 있던 담배와 라이터를 가지고 나왔다.

    작업실에 두고 있던 담배 두 보루도 함께 가지고 나와 거실 쓰레기통에 넣었다.

    예나왕이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가우왕이 웃으며 아내에게 다가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오른손을 그녀의 무릎 뒤에 넣고 왼손으로는 등을 받쳤다.

    그대로 일어나자 예나왕이 슬며시 웃었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되었다.

    약속 따위 필요 없었다.

    금연이 쉽지 않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확신하는 예나는 남편이 담배를 끊을 거라고 믿었다.

    예나왕이 가우왕의 목을 감으며 유혹하듯 물었다.

    “뭐 하려고 들었어?”

    “뻔하잖아.”

    “모르겠는데?”

    예나왕의 딴청에 가우왕이 그녀를 든 채 안방으로 향했다.

    곧 예나왕이 가장 좋아하는 라 쿰파르시타가 흘러나왔다.

    얼마 뒤.

    몸을 포개어 누운 채 TV를 보던 중 가우왕이 몸을 일으켰다.

    씻으러 가는가 싶었던 예나는 그가 샤워실이 아니라 작업실로 향하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뭐 가지러 가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예나도 일어났다.

    “나 먼저 씻을게.”

    “어.”

    샤워하고 나온 예나는 비어 있는 침대를 확인하고 아이 크림을 들었다.

    머리를 말린 뒤에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아 작업실 문을 열었더니 곧 격렬한 피아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정교하기로는 세계 제일인 가우왕의 연주라고 믿기 어려웠다.

    가우왕은 무엇에 홀린 듯 땀을 뚝뚝 흘리면서도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

    “갑자기 왜 그래? 응?”

    아내의 질문에 가우왕이 연주를 멈추고 거친 숨을 골랐다.

    “먼저 자.”

    “당신은? 계속 치게?”

    “어. 이러면 생각 안 나.”

    “…….”

    담배 이야기라는 걸 안 순간 예나는 남편이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새삼 느꼈다.

    피아노로 금연하는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까.

    예나는 그의 뺨에 입을 맞추곤 작업실 문을 열어둔 채 안방으로 가 누웠다.

    남편의 격렬한 연주는 점점 더 엉망이 되었고 덕분에 잠을 이룰 수 없었지만 나쁘지 않은 밤이었다.

    * * *

    크리스틴 노먼의 신작이자 블랙 나이트 시리즈의 프리퀄 영화 <블랙 나이트 이어 원>은 주인공이 블랙 나이트로 처음 활동한 시기를 그린 작품이었다.

    책을 읽을 기회가 많지 않았던 프란츠 페터는 대본 형식 원고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느꼈지만,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블랙 나이트의 서사에 서서히 몰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순간, 소년의 가슴은 알 수 없는 희열로 가득 차버렸다.

    재밌다. 벅차다. 전율에 휩싸였다.

    그 어떤 말을 가져다 붙여도 부족했다.

    상처받은 주인공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비록 시작은 어설펐으나 마침내 영웅으로 각성하는 서사는 소년의 가슴을 뛰게 했다.

    “왜 그래?”

    동생 알베르트가 어쩔 줄 몰라 하는 형에게 물었다.

    “알, 이거. 이거. 진짜 너무 대단해. 진짜 너무너무너무 재밌어.”

    “응…….”

    알베르트는 어깨를 으쓱이곤 다시 핸드폰 게임에 눈을 돌렸다.

    프란츠는 지금의 이 감동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블랙 나이트 이어 원>의 대단함을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이 너무나 답답했다.

    어떤 단어를 어떻게 배열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답답해하던 도중.

    문득 배도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괴테와 베트호펜의 관계는 그 이후로 좁혀지지 않았어.’

    괴테를 존경했던 베토벤이 어느 시점 이후로 그와의 교류를 끊었다는 이야기였다.

    프란츠는 그 이유를 물었었다.

    ‘왕족에게 굽신대는 것도 한심했지만 그보다 터무니없이 좁은 시야에 실망했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괴테는 음악이 문학보다 못하다고 했어. 스스로 음악을 즐기고 아마데를 찬송했으면서, 베트호펜과 슈베르트는 무시했지.’

    ‘너무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데의 곡을 좋아했던 것도 서사가 있는 오페라였기에 즐겼다고 봐야지.’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튼.’

    배도빈은 확신에 차 말했다.

    ‘문학이 전할 수 있는 감동과 음악이 전하는 감동은 서로 달라. 둘 모두 감정을 전달하지만, 문학은 음악으로는 명확히 할 수 없는 개념을 전달할 수 있고, 음악은 단어로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공유할 수 있지.’

    ‘네.’

    ‘그래서 영화나 애니메이션, 게임, 오페라, 연극 등에 음악이 쓰이는 거야. 말이 담을 수 없는 부분을 채워주니까.’

    ‘아.’

    ‘반대도 마찬가지. 분명 쉽지 않지만 네가 음악이 할 수 없는 부분을 채우려 노력한다면 관객들은 네 의도를 더 쉽게 잡아낼 거야.’

    배도빈과의 대화를 떠올린 프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막연하게 받아들였을 뿐인데, 막상 지금에 이르니 배도빈이 무슨 뜻으로 말했는지 알 것 같았다.

    <블랙 나이트 이어 원>을 읽고 난 벅찬 마음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면 적어도 그 감정이 전달될 수 있는 음악을 만들자.

    그렇게 생각한 프란츠는 곧장 악보를 펼쳤다.

    열정은 뜨거웠으나.

    펜은 무거웠다.

    악보로 쓸 종이조차 구하기 힘들었던 탓에 머릿속으로 반복해 계산하고 완벽한 답을 얻었을 때만 펜을 움직이던 버릇이었다.

    책상 앞에 앉은 프란츠 페터는 미동조차 없었지만 그의 작은 머리는 치열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 * *

    “노먼.”

    “빈!”

    오랜만에 만난 노먼의 얼굴에 주름이 많이 생겼다.

    하지만 특유의 밝은 미소와 올곧은 눈빛은 여전하여 안심했다.

    “너무 바쁜 거 아니니? 대체 얼마 만에 보는 거야.”

    “노먼도 마찬가지잖아요.”

    노먼이 싱긋 웃는다.

    21세기 최고의 영화감독으로 활동한 그녀에게는 매년 수천 편의 영화 시나리오가 날아든다.

    이미 예정된 작품만 두 자릿수니 만나기 어려운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인사해. 크리스틴 노먼 감독이야. 노먼, 저번에 말했던 프란츠 페터예요.”

    프란츠와 노먼에게 서로를 소개해 주었다.

    “아,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도빈이에게 말 많이 들었어요. 믿어도 된다고.”

    프란츠의 얼굴이 빨갛게 되었다.

    “여, 열심히 하겠습니다!”

    “좋은 결과물 기대할게요.”

    아쉽게도 첫인상을 좋게 주진 못한 듯하다. 무엇이든 완벽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녀가 열심히 하는 것으로 만족할 리 없다.

    오늘은 소개도 할 겸 자리를 함께했지만 앞으로 프란츠가 얼마나 고생할지 뻔하다.

    하지만 지금껏 곡을 자유롭게 만들었던 녀석에게는 큰 공부가 될 것이다.

    프로로서 하고 싶은 작품만 만들 수는 없으니, 돈을 벌려면 타인의 요구대로 만드는 법도 익혀야 한다.

    배영빈과의 작업을 통해 기반을 다졌으니, 노먼을 만족할 만한 결과를 만들 때면 한층 더 성장해 있으리라.

    “어떻게 할래요? 오늘은 쉬고 내일부터?”

    노먼에게 물으니 눈썹을 모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설마. 아까운 시간을 낭비할 수 없지.”

    “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이 워커홀릭은 시차로 인한 피곤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다.

    “페터 씨도 괜찮죠?”

    “네, 네! 그럼요! 저, 저 실은.”

    프란츠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대본이 너무 재밌어서 샘플 하나 만들어 봤어요. 신시사이저라서 느낌은 덜하겠지만 그래도 샘플이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대본과 가이드라인을 보고 참고할 곡을 만들어본 듯하다.

    녀석답게 성실하지만, 감독 입장에서 그리 달가운 일은 아니다.

    충분히 대화를 나눠야 텍스트로는 전달하기 어려운 점을 공유할 수 있고 일을 서두르는 건 좋지만 이런 식으로 돌아가면 더 늦어질 뿐이다.

    첫인상이 더욱 안 좋아질 듯하다.

    “그럼 일단 들어볼까요?”

    일단 들어보자고 나왔지만 만약 프란츠의 샘플이 마음에 안 들 경우, 노먼이 계약을 취소할지도 모르겠다.

    프란츠에게는 첫 실패가 될 테고 그 또한 경험이겠지.

    베를린 필하모닉의 작곡가로서, 독단적인 성실함이 협업에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음을 알게 될 테니까.

    ‘……내가 추천했으니 뒤처리는 해줘야지.’

    일정이 조금 빠듯하지만 이 또한 스승으로서 해야 할 일이리라.

    “작업실로 가죠. 죠엘, 이분들 안내 부탁할게요.”

    죠엘에게 노먼의 수행원들을 부탁했고 노먼, 프란츠와 함께 작업실에서 샘플 곡을 틀었다.

    실연이 아니라 신시사이저라는 걸 감안해도 개선해야 하는 부분이 많다.

    녀석답게 성실하고 선 굵은 진행은 합격점을 줄 만하나.

    전개부에서 긴장감을 형성하려는 의도는 보이나 효과적이지 못했고, 주제 활용이 미진한 점도 그렇다.

    “클래식하네요.”

    고민하던 노먼이 입을 열었다.

    “블랙 나이트의 TV 시리즈 같은 느낌이었어요. 92년도 작품이죠.”

    노먼이 핸드폰을 꺼내 92년도 TV 애니메이션 시리즈의 오프닝 곡을 틀었다.

    과연 그녀가 클래식하다고 느낄 만하다.

    주제가 유사한 구조를 보인다.

    주제부터 다시 따오라고 하려던 건 일단 보류해야 할 듯싶다.

    “블랙 나이트의 첫해를 그리는 작품이니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느낌은 좋네요. 의도한 건가요?”

    “네, 네. 아무래도 팬층이 두텁고 오랫동안 사랑받은 캐릭터니까 그쪽이 좋지 않을까 싶어서요.”

    노먼이 고개를 끄덕였다.

    “빈은 어떻게 들었어?”

    “엉망이죠.”

    조마조마하던 프란츠의 얼굴이 금방 울상이 되었다.

    “응. 기대가 너무 높았나 봐.”

    노먼이 맞장구를 치자 프란츠는 거의 울기 직전까지 갔다.

    이렇게 마음이 여려서야 큰일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가진 바 재능에 의지를 더했지만 자신감이 부족하다.

    노먼이 잠시 고민하더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의도는 좋아. 분위기도 마음에 들고. 개선의 여지가 있을까?”

    “음.”

    머릿속으로 페터의 샘플을 떠올렸다.

    “구간마다 끊어지는데, 내 흉내겠지?”

    “아.”

    “쓸데없는 짓이야.”

    여러 문제가 있지만 자연스럽지 못한 연결부가 가장 크게 느껴졌다.

    악기마다 음량을 조절한다든가, 박자를 조정하는 일은 편곡 단계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지만 구조 문제는 바로 잡아야만 한다.

    음 사이마다 단절된 느낌은 지금도 즐겨 쓰는데, 루트비히의 이름으로 기록된 곡들이 해석이 여럿인 이유도 그 때문이다.

    지휘자와 연주자에 따라 다양하게 연주되길 바란 탓인데, 어설프게 따라 하는 바람에 뚝뚝 끊기는 느낌이다.

    음계마다 그런 것은 고칠 수 있지만 곡의 전개마저 그러면 문제가 있다.

    “어설프게 흉내 내려 하지 마. 도입도 괜찮아. 네가 처음 생각했던 느낌을 효과적으로 표현할 것만 생각해.”

    “네.”

    “주제를 활용하려는 건 알겠지만 반복이 짙어. 변형이 확실해야 인식되기 쉬우니까.”

    “넵.”

    프란츠가 내 말을 받아 적었다.

    그 모습을 보던 노먼이 질문했다.

    “어떤 장면을 생각하고 쓴 거예요?”

    “아, 처음 범죄자를 상대했을 때요. 쓰러지고 집사의 도움으로 일어나서 가면을 쓰는 데까지 생각했어요.”

    “……같은 생각을 했네요.”

    노먼이 빙그레 웃더니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한 번 더 들어보죠.”

    프란츠가 곡을 다시 한번 틀었다.

    크리스틴 노먼은 프란츠의 곡에서 무엇인가를 찾은 듯하다.

    급히 만든 탓에 어설픈 감이 있는 샘플이 다행히 그녀에게 어필하는 구석이 있는 모양.

    적어도 시나리오에 적합한 분위기를 형성했다는 점에서 프란츠가 이 일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 것 같다.

    감독과 작곡가의 시선이 비슷하니, 예상보다 순조롭게 진행될 것 같다.

    “좋아.”

    노먼이 눈을 떴다.

    “함께 작업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잘 부탁해요, 프란츠 페터 씨.”

    “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뇨. 열심히 하는 거로는 부족해요.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어 주세요.”

    “아, 아……. 네. 넵!”

    시선은 비슷하지만 성향은 전혀 다른 두 사람이 어떤 시너지를 낼지 기대된다.

    * * *

    프란츠와 노먼이 작업할 수 있게 자리를 비워주었다.

    ‘슬슬 연수 이야기를 꺼내야 할 텐데.’

    <파우스트>의 스케치도 끝냈고 아무래도 가장 먼저 나서고 싶은데, 누구와 갈지 고민이다.

    결과적으로는 모든 단원을 보내고 싶지만 공연을 몇 달씩 쉴 수도 없는 노릇이니 순서를 두고 교대해야 한다.

    지휘자가 몇 없기에 푸르트벵글러나 케르바 슈타인과 함께할 순 없을 테고.

    ‘가우왕이랑 다닐까.’

    가장 먼저 생각난 사람은 비교적 일정이 겹치지 않는 가우왕.

    오케스트라 일정은 최지훈이 거의 도맡고 있고, 개인 일정과 밴드 스케줄이 대부분인 가우왕과 함께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시계를 보니 오후 3시.

    개인 연습실에 있을 시간이다.

    가우왕의 연습실 문을 열자, 건반 소리가 괴팍하게 울렸다.

    가우왕답지 않게 음이 고르지 않다.

    “아아아아아악!”

    원래 이상한 인간이지만 오늘따라 더 이상하다.

    “뭐 해요?”

    가우왕이 고개를 돌렸다.

    잔뜩 충혈된 눈에서 광기가 느껴진다. 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를 익힐 때보다 한층 더 미쳐 있다.

    위험해 보여 나도 모르게 주춤거렸다.

    “손이 떨려서 연주가 안 돼!”

    “무슨 말이에요? 손이 왜 떨려.”

    “빌어먹을! 빌어먹을!”

    평범한 대화를 나누는 건 어려워 보인다. 자세히 살피니 손을 심하게 떨고 땀도 흘린다.

    어디 아픈가 싶다.

    “뭐야.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금단현상인가 봐.”

    “금단?”

    “담배 끊었더니 이러잖아.”

    “…….”

    어떤 계기인지는 몰라도 담배를 끊었다니 다행이다.

    다행인데, 가까이하고 싶진 않다.

    “오늘은 집에 가서 쉬어요. 지금 피아노 쳐서 뭐 하게요.”

    “피아노를 안 치면 참을 수가 없는데 어떡하라고!”

    “……그럼 그래요.”

    다시금 괴팍하고 기괴한 연주를 하는 가우왕을 뒤로하고 연습실을 나섰다.

    연수는 다른 사람과 가야겠다.

    * * *

    “연수?”

    화요일.

    정기 회의 안건으로 알려진 단기 연수 계획에 단원들이 의아해했다.

    진 마르코가 손을 들었다.

    “지금 있는 제도랑 뭐가 다른가요?”

    단원들이 마르코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현재도 신청자에 한해 심사를 거쳐, 최대 석 달간 연수받을 수 있었다.

    이자벨 멀핀이 마이크를 잡았다.

    “기존 연수 제도는 이용하는 분이 상당히 적었습니다. 여러분이 보다 다양한 경험을 얻길 바라는 보스께서 입안하신 일입니다.”

    단원들이 돌아보자 배도빈이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멀핀이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연수 제도 이용률이 낮은 이유는 일전에 치렀던 설문 조사 결과, 다음과 같이 나타났습니다.”

    화면에 도표가 그려졌다.

    드드드드드드-

    “일정 문제가 26퍼센트로 가장 많았고 심사 과정이 불편하다는 이유가 17.7퍼센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함이 17.1퍼센트였습니다.”

    찰스 브라움이 턱을 쓸었다.

    “일정 문제라면 어느 정도 해결됐고. 심사 과정은 개선하면 된다지만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건 연수 자체가 필요 없다는 뜻인데.”

    “무리도 아니지. 악기별 수석, 부수석에게 배우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피셔 디스카우의 말에 대부분 공감했다.

    바이올린은 세계 최고의 연주자 찰스 브라움과 그에 못지않은 나윤희가 있었고 그 외에도 한스 이안, 스칼라와 같이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가 즐비했다.

    첼로도 마찬가지.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20년 가까이 근속한 최고의 첼리스트 이승희가 곧 육아휴직을 끝내고 복귀할 예정이었다.

    베이스의 다니엘 홀랜드와 팀파니 피셔 디스카우, 오보에 진 마르코, 바순 마누엘 노이어, 하프와 바이올린의 스칼라, 바이올린·첼로·얼후 등 두루 소화하는 왕소소까지.

    모든 악기의 수석, 부수석 하물며 평단원까지 세계 최고 수준으로 구성된 베를린 필하모닉은 자체적으로도 충분히 발전을 거듭할 수 있었다.

    푸르트벵글러와 함께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탱했던 기존 A팀이 한 명씩 은퇴하는 와중에도 아무런 문제 없이 세대교체가 이뤄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증명된 사안이었다.

    그러나 악단주 배도빈의 생각은 달랐다.

    “여러분이 최고라는 건 사실이지만 여기서 안주하길 바라지 않습니다.”

    모두 보스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드드드드드드-

    “작년 오케스트라 대전을 치르며 느꼈습니다. 토스카니니는 특유의 탄탄한 구조를 빠른 시간 안에 단원들에게 주입했습니다. 마리 얀스는 관객을 어떻게 즐겁게 하는지 알려주었죠.”

    배도빈이 단원 한 명, 한 명과 시선을 나누었다.

    “그들의 연주를 접하지 못했다면 생각지 못할 일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제게 아직 배울 게 있다는 뜻이죠. 여러분도 마찬가지고요.”

    단원들이 각자 느낀 바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압도적인 차이를 보이며 우승했다고 해도, 배도빈의 우승 소감처럼 타 오케스트라는 충분히 뛰어났다.

    베를린 필하모닉이 생각하지 못한 퍼포먼스를 보이기도 했고 때로는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아 세상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우물이 아무리 크다 해도 안주한 이상 더 이상의 발전은 없습니다.”

    배도빈이 이자벨 멀핀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녀가 새 연수 제도를 설명하기 위해 나섰다.

    “연수 기간은 총 3개월로 연수자는 사전에 협약된 오케스트라 중 한 곳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스크린에 베를린 필하모닉과 교류가 약속된 오케스트라가 나열되었다.

    빈 필하모닉

    체코 필하모닉

    대한국립교향악단

    로테르담 필하모닉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암스테르담 로얄 콘세트르허바우

    “장기간 자리를 비움으로써 일정 문제가 예상되는 단원은 이들 악단과 조율, 단원 교체가 가능하도록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다니엘 홀랜드 수석이 빈 필하모닉의 헐버트 마이어와 합의하에 서로의 역할을 바꿀 수 있다는 거죠.”

    “오. 교환학생 같은 거네.”

    이자벨 멀핀의 말에 따르면 석 달이라고는 하지만 다른 악단에서 활동할 수 있고, 또 다른 악단의 연주자와 함께할 수 있었다.

    전혀 없던 일은 아니었지만 이처럼 본격적인 시도는 보수적이었던 기존 클래식 음악계에서 드문 시도였다.

    배도빈의 지지를 받은 이자벨 멀핀이 적극적으로 나섰고, 두 번의 오케스트라 대전에서 모두 우승을 내어준 타 악단이 호응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 굳이 이 시스템을 이용하지 않아도 됩니다. 일정 문제가 없는 단원은 연수 기간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습니다.”

    드드드드드드-

    멀핀이 연수 결과를 보고하지 않아도 된다고 덧붙이자 단원들이 크게 기뻐했다.

    악단주 배도빈이 연수 기간을 그저 휴가로만 쓸 단원은 없다고 확신하는 덕이었다.

    “보고서 따위 읽을 시간 없습니다. 다녀와서 연주로 확인하겠습니다.”

    “예, 보스.”

    배도빈의 믿음처럼.

    단원들도 3개월을 그저 놀기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기본 급여부터 복지 제도까지 모든 것이 완벽한 베를린 필하모닉은 철저히 실력 위주로 평가되었기에, 조금이라도 뒤떨어지는 단원에게는 재계약의 기회가 없었다.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 베를린 필하모닉 소속 연주자로 자부심을 느끼는 그들은 그동안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인물 혹은 지역을 떠올렸다.

    ‘암스테르담이라면 마리 얀스가 그만두기 전에 한 번쯤 괜찮겠지.’

    ‘사카모토 교수가 있는 빈 필하모닉이라면 경험해 보고 싶긴 한데.’

    ‘세프랑 보스만으로도 벅찬데 토스카니니는 일단 빼고 생각해야…….’

    ‘대감이랑 같이 일할 수 있겠네?’

    단원들이 각자 생각을 정리하던 중 배도빈이 입을 열었다.

    “여러 명이 한 번에 나가면 악단 운영에 문제가 생길 테니 한 달에 네 명으로 제한하겠습니다. 오늘 이 시간 이후로 신청받을 테니 자세한 사항은 사무국으로 문의하세요.”

    “넵!”

    “마지막으로 이번 달 한 자리는 제 자리입니다.”

    “네?”

    단원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심장과 두뇌나 다름없는 배도빈이 자리를 비우는 건 다른 인물과 비교할 수 없었다.

    “잠깐, 네가 나가면 여긴 어쩌고.”

    찰스 브라움이 의문을 던졌다.

    “재작년에 보니 저 없어도 잘 돌아가더라고요. 덕분에 소원을 이루게 됐어요.”

    배도빈의 대답에 단원들의 머릿속에 벌써 5년 전 일이 스쳤다.

    첫 번째 오케스트라 대전 준결승을 앞두고 배도빈이 베를린 필하모닉을 떠날 거라고 했던 일이 떠오른 것이었다.

    그때는 나윤희의 계략으로 어찌어찌 무마되었지만, 결국 다양한 음악을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이번 오케스트라 대전으로 도진 듯했다.

    그러자 이 새로운 연수 제도의 파격적인 조건이 납득되었다.

    ‘자기가 가고 싶어서 만든 거잖아.’

    ‘이렇게 막 고쳐도 돼?’

    ‘도빈이 거잖아.’

    ‘……그러네.’

    드드드드드드-

    ‘근데 아까부터 무슨 소리야?’

    단원들이 소곤거리며 나름대로 납득했다.

    전처럼 악단을 떠난다는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더 나은 음악을 위한 일이었으니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드드드드드드-

    찰스 브라움이 책상을 내려쳤다.

    “시끄러워!”

    회의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온몸을 진동하던 가우왕 덕분에 찰스 브라움의 신경이 있는 대로 예민해졌다.

    “부감독이란 작자가 회의 중에 무슨 짓이야! 당장 그만두지 못해?”

    “가, 가, 가, 가만히, 이, 있잖, 아.”

    가우왕의 대답에 찰스 브라움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천장을 보았다가 한쪽 벽면으로 시선을 옮겼고 숨을 잔뜩 마신 뒤 푹 내쉬었다.

    “금연하고 있대요. 이해해 주세요.”

    최지훈이 재밌다는 듯 방실방실 웃으며 가우왕을 관찰했다.

    배도빈도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살펴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 상태로 연주할 수 있겠어요?”

    드드드드드드-

    “모, 모, 모, 못 할 게 뭐야. 나 가우왕이야.”

    “저번에 들어보니 엉망이던데.”

    “시끄러워!”

    배도빈이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가우왕도 이번 달부터 빠져요. 그런 상태로 무대 못 올라가니까 휴식 겸해서 공부도 하고.”

    가우왕이 눈을 뒤집고 항의하고자 했으나 최지훈이 뒤에서 붙잡고 입을 가린 탓에 어쩌지 못했다.

    “읍읍읍!”

    “그럼 세 달간 피아노는 나밖에 없겠네?”

    “그러게. 부탁할게.”

    “응. 걱정 마.”

    최지훈이 발광하는 가우왕을 제압한 채 방긋방긋 웃었다.

    * * *

    정기 회의가 끝나고 웃고 떠드는 밴드는 소연습실에 따로 모였다.

    “뭐 좋은 일 있어?”

    진달래가 조금 전부터 계속 웃고 있는 최지훈에게 물었다.

    평소에도 웃는 얼굴이지만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응. 가우왕 씨 몫까지 하게 됐으니까.”

    “……좋은 거야?”

    “그럼. 무대에 더 많이 오르잖아.”

    “그거야 좋지만.”

    진달래도 무대에 오르길 좋아하지만 이미 충분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최지훈이 가우왕의 몫까지 담당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든 할 테니 제발 낫기만 해달라고 생각했거든. 하루도 손해 보고 싶지 않아.”

    최지훈이 말을 덧붙였다.

    손을 다쳤을 때 이야기였다.

    자신 역시 같은 생각을 했던 진달래가 그를 이해한다는 듯, 최지훈의 등을 철썩 때렸다.

    “응. 맘껏 해!”

    “고마워.”

    “그런데 가우왕은?”

    진달래와 최지훈 사이에 스칼라가 불쑥 끼어들었다.

    “회의 끝나고 안 보여. 오늘 2악장 맞춰보기로 했는데.”

    “도빈이가 쫓아냈어. 오늘부터 쉬라고.”

    “시끄럽지 않고 좋아. 다신 안 왔으면 좋겠어.”

    스칼라가 아쉬운 눈치를 보이자 테이블에 앉아 치즈케이크를 먹고 있던 왕소소가 질색했다.

    다니엘 홀랜드가 껄껄 웃었다.

    “어쩔 수 없지. 그나저나 페터도 한 달은 빠질 텐데 당장 다음 주 공연은 어떻게 하지? 찰스, 좋은 생각 없나?”

    “기존 레퍼토리를 이어가는 수밖에. 편곡도 하면 좋겠지만 교육원 일 때문에 손대기 어렵겠어.”

    “그럼 나 악장은 어때?”

    “저요?”

    “남은 사람 중에 편곡 맡길 만한 사람은 나 악장뿐이니까.”

    밴드의 작곡, 편곡을 담당하던 프란츠 페터가 외부 일에 나섰고, 작곡과 편곡이 가능한 찰스 브라움마저 악장 업무와 음악교육원장으로서의 일 때문에 역할을 늘릴 수 없었다.

    가우왕마저 금단현상으로 내쫓겼으니 남은 사람은 나윤희뿐이었다.

    단순 편곡이야 스칼라, 왕소소, 다니엘 홀랜드, 최지훈 모두 가능했지만 각자 다루는 악기에 제한된 일이었다.

    “한두 곡은 하겠지만 전체는…….”

    “뭐, 어쩔 수 없지. 안 그래도 하는 일이 많으니까. 마음에 두지 말라고.”

    홀랜드가 괜한 말을 꺼냈다며 미안해했다.

    찰스 브라움이 나섰다.

    “기존 레퍼토리에서 조금씩 수정하는 방향이 최선이겠어. 나와 윤희가 돌아가며 한두 곡 정도 맡으면 괜찮을 거야.”

    “음. 그러면 되겠군.”

    모두 어느 정도 합의점을 찾았을 때 진달래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저기.”

    이목이 집중되자 진달래가 긴장하고 말았다.

    스칼라가 의아하게 여겼다.

    “평소답지 않게 뭘 그리 조심해?”

    “시끄러워. 가만있어 봐.”

    진달래가 심호흡을 몇 번 하고 가방에서 종이 몇 장을 꺼냈다.

    밴드 멤버들이 관심을 보이며 모였고 깜짝 놀랐다.

    악보였다.

    “뭐야. 곡 쓴 거야?”

    “네가?”

    “히히. 응.”

    “진짜? 아리엘이 써 준 게 아니고?”

    “응. 내가 만들었어.”

    “아쉽네.”

    “히히힣. ……뭐라고?”

    “아니야. 잘못 들은 거야.”

    “잘못 듣긴 뭘 잘못 들어?”

    진달래가 스칼라에게 달려들어 머리를 뜯어먹는 와중 멤버들이 감탄사를 냈다.

    “이거 록이야?”

    “응! 드럼은 디스카우 아저씨한테 부탁하자! 윤희 언니 전자바이올린 연주할 줄 알지?”

    “흉내 내는 정도는…….”

    “나 전자기타 칠 줄 알아.”

    “역시 우리 소소쓰으. 사랑해애.”

    진달래가 스칼라에게서 떨어져 왕소소에게 달라붙었다.

    찰스 브라움이 눈썹을 잔뜩 좁혔다.

    “난 반대야.”

    “왜! 들어보지도 않고! 도빈이가 좋은 음악이면 장르 구애받지 말라고 했잖아!”

    “악보만 봐도 엉망이니까.”

    “…….”

    “처음부터 끝까지 코드투성이군. 작곡 공부를 게을리 한 거야. 편리하니까.”

    “아닌데에…….”

    “여기, 이 부분은 안 들어도 뻔해. 억지로 두 멜로디를 연결하려 했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방법이 안 떠오르는데 어떡해…….”

    “그러니까 완성한 뒤에 가져오란 말이야. 괜찮은 곡이면 어떤 곡이든 연주할 테니까.”

    “……네에.”

    장르 때문에 반대한 게 아니니 진달래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만든 첫 곡이 여지없이 무시당하자 위로받고자 나윤희를 찾았다.

    나윤희가 진달래의 등을 토닥토닥 다독이며 건의했다.

    “한 번 들어보는 건 어때요? 어렵지 않잖아요.”

    찰스 브라움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의자를 꺼내 앉았다.

    진달래가 언제 우울했냐는 듯 벌떡 일어나 핸드폰을 펼쳤다.

    곧 그녀가 만든 곡이 재생되었다.

    “어때? 어때? 막 달리고 싶지!”

    진달래가 기다리지 못하고 나서자 스칼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다운 곡이네.”

    “그치! 막 엄청 힘차고!”

    “요란하고.”

    “뭐!”

    진달래가 또 스칼라에게 달려들어 옥신각신했다.

    두 사람이 그러든 말든 밴드 멤버들은 각자의 감상을 내놓았다.

    “신기하다. 언제 이런 곡을.”

    “응.”

    나윤희의 말에 소소가 동조했다.

    두 사람 모두 진달래의 첫 곡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이 지금까지 했던 음악과는 전혀 달랐지만, 시원하게 달려 나가는 분위기가 퍽 마음에 들었다.

    또 어떤 의도로 만들었는지 알 수 있었으니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그녀가 얼마나 노력했을지 눈에 훤했다.

    다니엘 홀랜드가 입을 열었다.

    “기타는 실연인데?”

    신시로 처리한 다른 악기와 달리 전자기타는 실제 연주가 녹음된 것이었다.

    왕소소가 스칼라의 머리털을 쥐어뜯고 있는 진달래를 불렀다.

    “기타 쳤어?”

    “응! 많이 늘었지!”

    진달래가 오른손을 보이며 씩 하고 웃었다.

    날로 발전하는 기술 덕택에 첫 의수보다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다고는 하나, 딜레이가 없는 건 아니었다.

    밴드 멤버들이 듣기에도 상당한 수준의 연주를 하기까지, 그녀가 얼마나 긴 시간 노력했을지 쉬이 짐작할 수 없었다.

    “베이스로 할까 싶다가 빠른 연주도 할 수 있다고 들려주고 싶어서.”

    왕소소가 진달래의 양 볼을 감싸고 늘이며 칭찬해 주었다.

    다니엘 홀랜드와 최지훈, 나윤희, 스칼라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축하하지 않는 사람은 진달래의 악보를 보고 있는 찰스 브라움뿐이었다.

    다들 그가 어떤 말을 꺼낼지 긴장하고 있자니, 마침내 그가 악보를 내려놓았다.

    “엉망이야.”

    잔뜩 올라가 있던 진달래의 어깨가 축 처졌다.

    웃고 떠드는 밴드의 실질적 리더이자 음악가로서도 한 층 더 높은 곳에 있는 찰스 브라움이었다.

    그가 반대하고 나서면 밴드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찰스 브라움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표시해 뒀으니 내일까지 고쳐와.”

    “……어?”

    “다음 주에 무대 올리려면 내일부턴 연습 들어가야 할 거 아니야.”

    찰스의 말에 나윤희, 왕소소, 최지훈, 스칼라, 다니엘 홀랜드의 얼굴이 밝아졌다.

    스칼라가 어리둥절하여 아무 말도 못 하는 진달래를 밀쳤다.

    나윤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재촉하자 그제야 힘차게 대답했다.

    “응! 고쳐올게!”

    그날 오후 10시.

    찰스 브라움이 지적한 사항을 수정하던 진달래가 기지개를 켰다.

    몇 시간째 굳어 있던 몸이 비명을 질렀지만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못해 편히 쉴 수 없었다.

    “푸르르르르르.”

    책상에 엎드린 그녀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게 아닌데.’

    전과 달리 그녀는 고집을 세우는 대신 타인의 조언을 받아들일 정도로 성숙해 있었다.

    여러 해 뛰어난 음악가들과 함께하며 자신을 갈고닦았기에 찰스 브라움의 충고가 어떤 의미였는지 충분히 이해했다.

    찰스가 표시해 둔 부분은 마땅한 해결법이 생각나지 않아 타협을 봤던 곳으로, 극적인 연출을 주고자 두 멜로디 사이에 노이즈를 주었던 연결부는 특히나 반론의 여지가 없었다.

    진달래가 고개를 저었다.

    음악을 하는 사람이 반론으로 곡을 변호하려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

    그녀는 찰스 브라움이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연결부를 수정하는 것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부우우웅-

    핸드폰이 울렸다.

    점심시간을 가진 아리엘 얀스가 전화를 걸 시간이었다.

    진달래가 핸드폰을 톡톡 두드렸다.

    “대가아아암~”

    전화를 받자마자 앓는 소리를 내는 것마저 귀엽게 느낀 아리엘이 작게 웃었다.

    -반응이 좋지 못했나 봐.

    “응. 찰스 아저씨가 이대론 안 된대.”

    -브라움 악장 의견이라면 틀린 말은 아닐 테지만, 유쾌하진 않은데?

    “구러니까아. 맞는 말이라서 고치는 중인데 아무리 해도 모르겠어.”

    말을 마치려던 진달래가 다급히 외쳤다.

    “안 돼! 이건 혼자 만들 거니까! 안 도와줘도 돼.”

    아리엘이 다시 웃었다.

    고집스러운 연인은 이번 작업을 본인의 일이라며 선을 그었다.

    세계적인 작곡가이자 마왕 배도빈의 유일한 적수로 불리는 아리엘 얀스에게 곡 교정 정도는 일도 아니었지만, 진달래는 한사코 도움을 거절했다.

    아리엘 얀스에게 폐를 끼치는 것 이전에 음악가로서 자립하고 싶었다.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는 아리엘도 진달래의 의견을 받아들여 섣불리 조언을 건네지 않았다.

    다만 사랑스러운 연인이 어떤 곡을 만들었을지 궁금할 뿐이었다.

    -응. 그러기로 했잖아.

    “히.”

    진달래가 괜히 웃었다.

    -그래도 어떻게 만들었는지 궁금한데.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이번만큼은 아리엘 얀스도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독점하기는커녕 누구보다 존중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관심한 것도 아니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소중했고 그렇기에 무엇이든 함께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나 말할 수 없었다.

    두려웠다.

    유년 시절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홀로 지냈던 그는 서운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몰랐다.

    소중해서.

    잃고 싶지 않아서.

    잘못 말을 꺼냈다가 진달래와의 관계가 깨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아리엘은 입을 뗐다가 닫았다.

    타인에게 독설을 뱉고 도도했던 과거에는 겪지 못한 감정이 그를 잠식해 나가고 있었다.

    -그래. 어쩔 수 없지.

    아리엘이 잠시 간격을 두고 말을 덧붙였다.

    -너무 무리하진 마.

    “히히. 응.”

    * * *

    아리엘과 통화를 마친 진달래의 얼굴이 한결 나아졌다.

    ‘곧 볼 수 있겠지?’

    그녀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수 제도 개편을 누구보다도 반가워했다.

    웃고 떠드는 밴드 활동이 너무나 즐겁고 만족스러웠기에 베를린에 남아 있지만, 그렇다고 아리엘 얀스와 함께하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다.

    도리어 아리엘과의 관계가 더욱 깊어지면서 망설이게 되었다.

    다만 베를린 필하모닉과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어느 쪽으로는 무게추가 기울지 않은 이유는 LA로 감으로써 생길 일을 걱정했다.

    가수 진달래는 아직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과 같은 거대 악단에서 성악 파트를 추가해 받을 정도의 인지도와 실력을 쌓지 못했다.

    ‘지금 노래하는 건 도빈이 덕분이니까.’

    진달래는 현재 웃고 떠드는 밴드로 무대에 오르는 일이 배도빈과 멤버들의 배려 덕분이라는 걸 직시하고 있었다.

    그런 자신이 아리엘과의 관계 덕에 이적하게 된다면 그러지 않아도 적이 많았던 그에게 또 한 번 부담을 지운다고 생각했다.

    ‘증명할 거야.’

    한 사람의 음악가로서 지휘자 아리엘 핀 얀스와 함께하고 싶었다.

    “히.”

    진달래가 자신이 쓴 가사를 보며 히죽거렸다.

    방황했던 시절부터 아리엘을 만나기까지의 자전적인 가사를 다시 읽으니 쑥스러워 몸을 비틀었다.

    부족한 자신을, 나약한 자신을 감추기 위해 강한 척했던 자신과 아리엘이 들려주었던 청명하고 다정한 목소리.

    그 두 멜로디를 어떻게 연결할까.

    진달래는 곡을 헌정 받고 기뻐할 아리엘을 상상하며 기타를 들었다.

    * * *

    “오빠!”

    차채은이 배도빈의 연습실 문을 열었다.

    깜짝 놀란 나윤희가 하마터면 블러드 와인을 떨어뜨릴 뻔했고 배도빈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왜 그렇게 놀라?”

    차채은이 눈을 깜빡였다.

    배도빈의 연습실은 평소와 마찬가지였다. 책장을 가득 채우고도 부족해 바닥에 높이 쌓인 악보와 유일하게 정돈된 악기 진열장.

    그리고 서로 마주 보고 선 채 블러드 와인과 캐논을 들고 있는 두 사람뿐이었다.

    배도빈이 눈썹을 찌푸렸다.

    “놀라긴 뭘 놀라.”

    “아닌데? 엄청 놀랐는데?”

    차채은은 불륜 현장 급습당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배도빈과 나윤희를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를 찾은 목적을 떠올리곤 말을 돌렸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오빠, 프란츠 페터 인터뷰 언제 잡아줄 거야?”

    “인터뷰?”

    “헐. 까먹었어?”

    “…….”

    배도빈이 멈칫하더니 눈썹을 들어 올렸다.

    배영빈의 애니메이션에 넣었던 삽입곡이 큰 인기를 끌면서 차채은이 단독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졸랐고, 프란츠에게도 도움이 되겠다 싶어 그러자고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차채은이 머리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안 돼애애.”

    “작업 들어갔어. 당분간 바쁠걸.”

    배도빈의 설명에 차채은이 한 번 더 절망했다.

    “당분간? 언제까지?”

    “보름 정도.”

    “끄아아아악. 망했어. 망했어어어.”

    나윤희가 절망하는 차채은을 달래며 물었다.

    “기사 때문이야? 언제까지 써야 하는데?”

    “다음 주 목요일…….”

    팬들에게 프란츠 페터 특집 기사를 호언장담했던 차채은은 눈앞이 캄캄했다.

    틀은 마련해 두었지만 가장 중요한 인터뷰 내용을 빼고 작성하고 싶진 않았다.

    베토벤 기념 콩쿠르를 통해 인기 블로거로 성장하면서 잡지사의 일정에서는 어느 정도 자유로워졌지만.

    차채은은 언론사보다 구독자들의 독촉이 더욱 두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료 수집과 정리, 초고 작성, 교정, 첨삭 요청만 해도 며칠이 훌쩍 지나갔다.

    이미 과부하가 걸린 상황에서 하루, 아니, 단 1분만 늦어도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독촉 댓글.

    차채은의 정신은 조금씩 피폐해져 갔다.

    “오빠…… 나 좀 살려줘. 응? 페터 인터뷰 1시간만. 아니, 30분이라도.”

    약속했던 일을 잊은 잘못이 있는지라 마냥 포기하라 할 수도 없었고, 그러자고 작업에 들어간 페터에게 시간을 내라고 할 수도 없었다.

    30분 정도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으면서도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항상 함께하며 의견을 조율하는 크리스틴 노먼의 업무 스타일이 마음에 걸렸다.

    배도빈이 입맛을 다셨다.

    “내가 해줄게.”

    “뭘?”

    “인터뷰.”

    차채은이 눈썹을 좁히며 고개를 살짝 틀었다.

    “오빠 인터뷰는 안 필요한데.”

    배도빈의 한쪽 입술이 씰룩였다.

    그것을 본 나윤희가 웃으며 중재에 나섰다.

    “페터 선생님이니까 더 좋을 수도 있지 않을까?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또 도빈이 말이니까.”

    “그런가?”

    나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차채은이 고민에 빠졌다.

    그녀가 쓴 글 대부분은 배도빈과 최지훈에 관련한 이야기였다.

    여전히 두 사람에 관한 소식은 가장 쉽게 반응을 얻을 수 있었고 동시에 어떤 글보다 높은 조회 수를 기록했다.

    그러나 평론가 차채은의 한계이기도 했는데, 레이라 사건을 제외하고 다른 것을 주제로 한 글에서는 주목도가 떨어졌다.

    구독자도 대부분 두 사람의 소식을 접하기 위해 접근했었다.

    차채은은 자신이 점점 다양성을 잃는 듯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그렇긴 한데…… 요새 올린 글 다 도빈 오빠나 지훈 오빠 글이란 말이야. 너무 두 사람한테만 쏠리니까 안 좋지 않나 싶기도 하고. 또 자꾸 오빠랑 지훈 오빠한테 빨대 꽂았단 댓글도 올라온단 말이야.”

    그런 일까지 겪을 줄 몰랐던 나윤희는 나름대로 노력하는 차채은의 손을 잡아주었다.

    배도빈이 입을 열었다.

    “독자들이 보고 싶은 이야기 써 주는 게 뭐가 어때서.”

    차채은이 고개를 들었다.

    “식상하다느니 기생한다느니 헛소리 신경 쓰지 마.”

    “…….”

    “그런 댓글 신경 쓰다 보면 쓰고 싶지 않은 글도 쓰게 되고, 그러면 있던 구독자도 잃어. 네 블로그 구독한 사람들이 지금까지 네가 썼던 글 보고 구독했지, 다른 거 바라고 했겠어?”

    “그건 그렇지만.”

    “그러니까 쓰고 싶은 거 써. 괜히 휘둘려서 네 방향 잃으면 죽도 밥도 안 돼.”

    “……그래도 불만이 있으니까 그런 댓글 달지 않았을까?”

    “취향을 어떻게 다 맞춰. 네 말대로면 지훈이 소식 보고 싶어서 구독한 사람들은 다른 주제 글 보고 싶겠어?”

    “아.”

    “뭘 하든 타깃을 정확히 해.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할 순 없어. 네가 쓰고 싶고 구독자들이 바라는 주제를 써.”

    배도빈이 다시 캐논을 들었다.

    “네가 선택한 게 아니야. 독자가 널 선택한 거지. 그 사람들이 네 글을 왜 좋아하는지 잘 생각해 봐.”

    차채은이 배도빈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으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 지금은 프란츠 페터 인터뷰 하고 싶어.”

    캐논의 목소리가 삐끗했다.

    “약속했자나아. 30분마안.”

    차채은이 배도빈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배도빈이 다리를 빼내려 해도 소용없었다.

    “안 그러면 푸르트벵글러 할아버지한테 오빠 연기한 거라고 다 이른다!”

    “뭐?”

    “그러니까 빨리이! 20분, 20분이라도오!”

    “너 이거 협박이야. 어디서 피도 안 마른 게 기자 놈들 흉내를 내?”

    “나이 차이 얼마 나지도 않으면서 또 할아버지처럼 말하네! 오빠랑 윤희 언니도 아홉 살이나 차이 나잖아!”

    나윤희의 동공이 크게 떨렸다.

    배도빈도 드물게 당황해서 언성이 높아졌다.

    “뭔 소리야?”

    “비밀 지켜줄 테니까 제발 조오오옴. 페터 요즘 인기 장난 아니란 말이야아.”

    “비밀은 무슨 비밀!”

    “채은아, 그게 무슨 말이야. 오해하고 있는 거 같은데.”

    “그러니까 말 안 한다고오오.”

    “안 하긴 뭘 안 해! 아니라니까!”

    “그럼 둘이 아까 뭐 했는데?”

    “뭐 하긴! 연습하고 있었잖아!”

    “응. 정말이야.”

    “연습을 매일? 같이? 왜? 그리고 왜 뭐 하고 있는 사람처럼 놀랐는데?”

    순수했던 평론가 차채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훌륭하고 능청스럽게 속세에 찌들어가고 있었다.

    배도빈은 그동안 어떤 이의 질문에도 일절 답하지 않았던 레몽 도네크와의 화해 과정을 알려주는 조건으로 차채은을 겨우 달랠 수 있었다.

    방실방실 웃으며 필기구를 들고 있는 차채은을 본 배도빈이 한숨을 내쉬었다.

    차채은은 그가 고개를 젓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녹음기를 틀었다.

    “노먼 감독과 페터가 어떻게 함께하게 되었는지부터 말해줘.”

    언제 칭얼거렸냐는 듯 뻔뻔한 태도에 배도빈은 기가 찼다.

    “너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능글맞아졌냐.”

    “슬이 언니한테 배웠나?”

    “지훈이가 아니고?”

    “아, 뭐래. 빨리 대답이나 해. 노먼 감독 완벽주의로 유명하잖아. 최근 20년간 한스 짐이나 오빠, 사카모토 할아버지 말곤 곡 의뢰한 적 없는데, 프란츠 페터와 함께할 수 있었던 이유가 궁금해.”

    잠시 나가 있던 나윤희가 과일을 가지고 들어왔다.

    “잠깐.”

    배도빈이 미간을 좁혔다.

    “프란츠가 노먼하고 일하는 건 어떻게 알았어?”

    크리스틴 노먼의 요청으로 프란츠 페터가 OST 작업에 참여했단 소식은 대외비에 부쳐져 있었다.

    “도진이랑 놀면서 들었지롱.”

    배도빈이 인상을 쓰자 차채은이 단호히 나섰다.

    “나 지금까지 한 번도 먼저 기사 낸 적 없잖아. 이번에도 오피셜 나오면 올릴 거야. 나 못 믿어?”

    배도빈은 차채은과 아사히 신문의 이시하라 린이 겹쳐 보였다.

    뻔뻔함과 능청스러움이 이제는 그녀 못지않았다.

    “자, 약속.”

    차채은이 새끼손가락을 보였고 배도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이야기를 풀어냈다.

    “처음엔 나한테 의뢰했어. 못 한다고 하면서 프란츠 이야기 꺼냈지.”

    “아, 추천이었구나.”

    “추천받았다고 결정할 사람은 아니야. 네 입으로 말했잖아. 완벽주의라고.”

    “그럼 노먼 감독도 페터가 마음에 들었다는 뜻이네?”

    배도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각사각. 나윤희가 과일을 깎는 소리가 잠깐의 간격을 채웠다.

    “베토벤 기념 콩쿠르 3위에 최근 애니메이션 주제곡으로 주목받는 것도 이유가 될 수 있을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노먼은 그런 걸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아. 인지도를 완전히 부정할 순 없지만 자기 성에 안 차는 곡을 수락할 리 없지.”

    “곡? 벌써 만든 거야?”

    “첫 미팅 때 샘플을 만들어 왔더라고. 듣더니 마음에 들었나 봐.”

    “미팅도 없이 만든 샘플을 노먼 감독이 좋다고 했어?”

    “그래.”

    차채은이 펜을 움직였다.

    “대단하네. 오빠가 괜히 신경 쓰는 게 아닌가 봐.”

    “네가 피아노 계속했으면 그보다 더 신경 썼을걸.”

    “아, 왜 자꾸 내 이야기로 넘어가. 그리고 나 엄청 늘었어. 지훈 오빠도 칭찬한다고.”

    “너 피아노 계속 치게 하려고 하는 말이겠지.”

    “아니거든!”

    오기를 부린 차채은이 나윤희가 웃자 배도빈을 쏘아본 뒤 질문을 이어나갔다.

    “다음 질문. 크리크 국제 피아노 콩쿠르 우승, 배도빈의 제자가 된 뒤 베토벤 기념 콩쿠르에서 준수한 활약을 펼쳤고, 애니메이션에 이어 거대 블록버스터 작업까지. 영화 이야기는 아직 안 알려졌지만, 아무튼. 오빠 어렸을 때랑 닮았다는 이야기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해?”

    나이 차이는 있었지만 배도빈과 프란츠 페터는 비슷한 성장 과정을 보였다.

    난데없이 음악계에 등장해 짧은 시간 안에 국제 콩쿠르에서 입상하고 영화, 애니메이션 등을 통해 음악계를 넘어서 인지도를 쌓아갔다.

    “어느 정도 의도했지.”

    나윤희와 차채은이 고개를 들었다.

    과일을 깎던 손과 필기하던 손이 멈췄다.

    “프란츠가 재능이 있다 해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어. 환경 때문에 여러 음악을 접할 기회가 없었으니까. 베트호펜 기념 콩쿠르 결승 과제였던 왈츠를 엉망으로 만들었던 것도 그 때문이고.”

    차채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지식을 쌓는 것보다 다양한 장르를 경험해야 한다고 생각했지. 더 넓은 세계를 경험하면 부족한 지식이야 알아서 채울 테니까.”

    나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하면 자연스레 알고 싶어진다는 말이네?”

    “맞아요.”

    배도빈이 나윤희와 시선을 교환하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차채은은 두 사람의 묘한 기류를 의심스럽게 지켜보았다.

    “어떤 방법이 좋을까 고민하다가 예전 일이 생각나더라. 사카모토랑 오리지널 스코어 작업했을 때만큼 즐거웠던 적도 없었으니까.”

    “아. 그래서 영빈 오빠 일도?”

    “그래.”

    차채은이 다시 질문하기 시작하자 나윤희가 작게 미소 지으며 과일을 깎기 시작했다.

    차채은은 막 떠오른 문장을 메모하며 질문을 이어나갔다.

    “그럼 한 가지 더. 사실 오빠는 좀 이상하잖아.”

    “뭐가 이상해.”

    “솔직히 4살 때 데뷔해서 한 번도 정상에서 내려오지 않는 게 말이 돼?”

    배도빈이 소파에 등을 기대자 그 모습을 본 나윤희가 웃고 말았다.

    스스로 뿌듯해하는 모습이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아서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배도빈이 눈썹을 모았고 차채은이 질문을 이어나갔다.

    “아무튼. 갑자기 여러 경험을 하게 되고 지금은 어마어마한 제작비가 투입된 영화를, 그것도 21세기 최고의 거장 감독과 함께하고 있어. 너무 빠르지 않아?”

    “빠르다고?”

    “응. 페터가 대단하긴 해도 오빠처럼 잘 해낼 수 있을까 싶어. 아직 어리니까 조금은 천천히 걷는 게 좋지 않나? 하는 거지.”

    차채은이 잠시 간격을 두었다.

    “조급하게 뛰다가 넘어지진 않을까 걱정돼서.”

    배도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자 프란츠 페터를 믿는 것과는 별개로 차채은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배도빈이 문화 콘텐츠 사업에 본격적으로 발을 내디딘 시기는 고작 만 4세.

    제아무리 배도빈이라 할지라도 영화 음악은 처음 작업했기에 작곡 외의 일에는 조력자였던 사카모토 료이치의 역할이 컸다.

    그와 함께하는 즐거움과 그를 통해 접한 여러 지식이 지금의 배도빈을 만들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몇 번의 작업을 함께한 후.

    AAA급 게임 <더 퍼스트 오브 미>에 이르러서야 녹음 방식, 삽입 등 작곡 외 분야를 음악 감독으로서 완벽히 조율할 수 있었다.

    프란츠 페터가 당시 배도빈보다 10살 정도 많다고 해도, 그는 음악 교육은커녕 정규교육조차 받지 못하고 프로에 막 입문한 기대주일 뿐.

    크리스틴 노먼 감독의 신작에 참여하기에 경험이 부족하지 않을까 하고 걱정할 수 있었다.

    배도빈이 입을 열었다.

    “넘어지는 것도 괜찮지.”

    “어?”

    차채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배도빈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실패하면 거기서 배우는 게 있을 테고 성공하면 또 그 나름대로 원동력이 될 테니까.”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 아니야? 크리스틴 노먼이잖아. 엄청, 어어엄청 기대받는 일인데?”

    “그러니까 괜찮다고.”

    나윤희가 배도빈과 차채은에게 과일을 집어 주었다.

    “고마워요.”

    배도빈이 사과를 한 입 베어 먹었다.

    “작업 도중에 문제가 생기면 노먼이 먼저 내칠 거야.”

    배도빈의 답을 들은 차채은이 눈을 껌뻑거렸다.

    배도빈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만 오늘따라 그 무신경함이 더 대단히 보였다.

    “그렇게 되면 페터가 실망할 거 아냐. 엄청 소심하지 않나? 폐 끼쳤다고 생각하면…….”

    “유약한 면은 있어도 고작 그런 일로 포기할 놈은 아니야. 그 어린 나이에 시장바닥 구르며 살았어. 혼자도 아니고 동생 지키면서.”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래서 혹시나 노먼 감독 신작에 문제가 생기면?”

    “내가 해결해야지.”

    “어?”

    “좀 바빠지겠지만 노먼이 피해받을 일은 없어.”

    차채은의 말문이 막혔다.

    생각을 빠르게 정리하려 해도 시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어?”

    “뭘?”

    “페터가 만약 노먼 감독 마음에 드는 곡을 못 만들거나, 시간에 쫓긴다든가 뭐 그런 이유로 일이 잘못되면 오빠가 나설 생각이었냐고.”

    “뭘 당연한 걸 물어. 학생이 저지른 사고는 선생이 수습해야지.”

    배도빈이 사과 조각을 하나 더 집어 먹었다.

    “경험이야. 뭘 좋아할지 모르니까, 어떤 음악에 관심을 보일지 모르고 무슨 일에 적합한지 모르니까 이것저것 해봐야 해. 그래서 밴드도 맡겼고.”

    “응.”

    “그러다 보면 내겐 없는 걸 찾을 수도 있고 그게 녀석에게 맞는 음악일 수도 있지. 그 과정을 반복하면서 자연스레 음악이 더 좋아질 거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음악도 생기지. 거기서부터 진짜 시작이야.”

    차채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기까지 몇 번을 넘어져도 상관없어. 스스로 일어설 때까지 지켜줄 거니까. 그게 내 역할이고.”

    배도빈이 과도를 들어 사과를 깎기 시작했다.

    “선생님이라기보다는 부모 같네.”

    차채은의 말에 배도빈은 반응하지 않았다.

    조카 카를과 나누지 못한 감정 교류와 유대감.

    부모로서 미숙했던 과거를 반복하지 않으려던 노력이 들킨 듯해 배도빈은 입을 닫았다.

    대신 손을 부지런히 놀려 사과를 깎았고 나윤희에게 주었다.

    “페터가 지금 오빠 말 들었으면 무지 감동했겠다.”

    “마지막 말은 빼.”

    “쑥스러워?”

    차채은의 질문에 배도빈이 인상을 썼다.

    “가. 글 쓰더니 애가 이상해졌어.”

    “히힛. 고마워, 오빠. 데이트 방해해서 미안. 언니, 나 갈게!”

    두 사람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차채은이 후다닥 방을 나섰다.

    배도빈과 나윤희는 말없이 사과만 먹을 뿐이었다.

    * * *

    [30억 달러 흥행의 블랙 나이트 트릴로지! 신작 제작 돌입!]

    [크리스틴 노먼, “이어 원은 가장 처절하고 고귀한 서사를 담을 것.”]

    [2억 달러가 투입된 블록버스터]

    [전설과 전설이 다시 만나다]

    [블랙 나이트 트릴로지 제작진 완전 재결합!]

    <블랙 나이트 이어 원>의 소식은 전멸하다시피 했던 BC 팬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고 말았다.

    BC 히어로를 기반으로 한 여러 영화에 실망했던 그들은 21세기 슈퍼 히어로 영화의 한 획을 그은 크리스틴 노먼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단 소식에 환호했다.

    └야잌ㅋㅋㅋㅋㅋㅋ개미쳤닼ㅋ

    └내가 죽기 전에 노먼의 블랙 나이트 시작을 다시 보게 되다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

    └보지도 않고 뭘 여한이 없엌ㅋㅋ

    └와 진짜 도랐다. 내일 1차 예고편 나온다는데 기저귀부터 사야 할 듯.

    └음악은 누구랑 하지?

    └당연히 한스 짐이지.

    └당연히 배도빈이지.

    └블랙 나이트 안 봤냐? 블랙 나이트는 당연히 한스 짐이 해야지.

    └개소리? 인크리즈 안 봄? 무조건 배도빈이지.

    └ㅉㅉ 잉여들 또 거지 같은 걸로 싸우네. 한스 짐이든 배도빈이든 대박이잖아.

    └맞다 맞어. 어차피 같은 시리즈로 나온다니까 노먼 성격에 예전에 했던 사람들이랑 할 테니까.

    └기사에도 나왔네. 제작진 재결성했다고.

    └아 현기증 나. 시간아 제발 좀 서둘러ㅠㅠㅠ

    크리스틴 노먼이 감독을 맡았다는 사실만으로도 팬들은 시나리오와 연출, 영화의 완성도를 의심하지 않았다.

    또한 블랙 나이트 비긴즈(1부), 블랙 나이트(2부)에서 여러 명곡을 남긴 한스 짐과 블랙 나이트 인크리즈(3부)의 대성공을 함께한 배도빈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않았다.

    약속된 대작.

    기대감이 부풀 대로 부푼 상황에서 크리스틴 노먼 감독이 신작 발표 인터뷰를 가졌다.

    “안녕하십니까, 너만 모름의 우진입니다. 바로 이번 주에 어마어마한 소식이 전해졌죠. 크리스틴 노먼 감독이 블랙 나이트 시리즈의 신작을 제작한다고 합니다.”

    베를린 기준 오후 8시.

    너만 모름이 크리스틴 노먼 감독을 초청.

    미시시피 프라임 비디오, 뉴튜브, JH시네마를 통해 전 세계 동시 생중계에 나섰다.

    “21세기 최고의 감독, 크리스틴 노먼 감독과 인사 나누겠습니다. 반갑습니다, 노먼.”

    “반갑습니다.”

    “암네시아, 블랙 나이트 트릴로지, 익스트렉터, 스텔라, 덩케르크 철수 작전, 테넷, 폴 투 윈까지. 정말 어마어마한 흥행 기록을 세우셨습니다. 이번 작품은 어떤 이야기인가요?”

    “블랙 나이트가 처음 활동할 시기를 그린 이야기입니다.”

    “블랙 나이트의 팬으로서 동명의 그래픽 노블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데요.”

    “네. 기틀은 기존에 나와 있는 원작과 유사합니다. 하지만 블랙 나이트 이어 원은 그보다 심층적이고 처절하죠.”

    “말씀만으로도 기대가 되는데요. 기존 블랙 나이트 시리즈 제작진이 다시 모였다고요.”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이 모인 건 아니지만 대부분 함께한 이들로 구성했죠.”

    “기사에선 완전체라 하던데, 그러지 않은 경우도 있나 봅니다.”

    “네. 현재 진행 중인 일이 있는 경우나 혹은 신의 품으로 돌아간 경우도 있으니까요.”

    “아.”

    사회자 우진이 과하게 놀라지도, 그렇다고 덤덤하지도 않은 반응을 보였다.

    입을 살짝 벌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예를 다했다.

    “확실히 1편인 비긴즈가 벌써 22년 전에 나온 영화니 그런 안타까운 일도 있군요.”

    “네. 그들도 아쉬워할 거예요. 실망시키지 않도록 완벽히 만들어야죠.”

    “좋습니다.”

    우진이 크리스틴 노먼 감독 특유의 사실주의적 연출 방법을 언급하며 본격적인 인터뷰에 들어섰다.

    문답을 나누는 과정에서 너만 모름의 시청자가 백만 명에 이르는 지경에 이르렀고.

    대화는 영화 음악으로 이어졌다.

    “감독의 영화에 음악이 빠질 수 없죠. 정말 내로라하는 분들과 함께하셨는데, 일각에선 블랙 나이트 시리즈를 맡았던 한스 짐과 배도빈 두 사람 중 한 명이 참가하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하하. 정말 일각인가요?”

    노먼의 역질문에 우진도 웃고 말았다.

    “정확히 말하면 확신하고 있죠.”

    “네. 처음에는 저도 두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시리즈를 이어가는 상징성도 있고 무엇보다 그 두 사람 이외에 다른 사람을 상상할 수 없었거든요.”

    노먼이 말을 이어감에 따라 우진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그 말씀은 이어 원의 OST 작업을 맡은 사람이 한스 짐과 배도빈이 아니라는 뜻인가요?”

    “네. 아주 귀여운 친구와 함께하게 됐죠.”

    “그게 누구입니까? 두 사람을 대체할 만한 사람이라면 혹시 로스앤젤레스의…….”

    크리스틴 노먼이 고개를 저었다.

    슬며시 웃으며 어디 한번 맞혀보라는 표정을 지었고 우진은 고심 끝에 입을 열었다.

    “사카모토 료이치?”

    “요즘 정말 바쁘시더라고요.”

    “데스플로?”

    “그분도 모시고 싶었죠.”

    “설마 알프레드 올드먼?”

    크리스틴 노먼이 고개를 젓고 입을 열었다.

    “프란츠 페터, 아주 멋진 작곡가죠.”

    그녀의 발언과 동시에 채팅창이 터져 나갔다.

    └ㅁㅊ

    └아니 이건 진짜 예상 밖인데;;

    └제정신인가?

    └프란츠 페터가 누구야?

    └배도빈 내놔라 빼애애액!!

    └배도빈이 가르친다는 애 있잖아. 베토벤 기념 콩쿠르에도 나왔고.

    └배영빈 신작 애니메이션 OST 작업했던 앤데.

    └베토벤 기념 콩쿠르는 뭐고 배영빈은 또 누군데? 블랙 나이트 음악이면 당연히 한스 짐이나 배도빈이 맡아야지.

    └프란츠 페터 유명한데.

    └ㅇㅇ 유명하지. 요즘 인지도도 쌓고 있고.

    └의외긴 한데 아주 안 될 것도 없지 않나? 곡만 좋으면.

    └아님. 이건 노먼이 오판한 거임. 시리즈를 이어온 한스 짐이나 배도빈이 맡는 게 옳음.

    └그래야 할 이유라도 있나?

    └있지. <이어 원>은 블랙 나이트 시리즈의 팬들을 위한 영화임. 애당초 타깃이 그쪽이라고. 노먼이 뭐 하러 예전 제작진을 모았겠어.

    └아.

    └음악도 큰 영향을 미쳤던 만큼 한스 짐이나 배도빈이 맡는 게 옳음. 아무리 실력 있는 사람이라도 그 둘을 대체할 순 없음.

    └나도 쟤랑 같은 생각인데, 프란츠 페터가 클래식 음악 듣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인지도를 가졌는지 난 모름. 베토벤 기념 콩쿠르도 모르고 최근 만들었단 애니메이션도 모르고.

    └아, 좀 불안한데.

    └나이도 너무 어리잖아.

    └나이야 인크리즈 작업할 때 배도빈이 훨씬 어렸지.

    └배도빈이 다른 사람이랑 같냐? 아, 예고편 나오기도 전에 사람 불안하게 하네.

    └다들 왜 이렇게 불안해하지? 뜬금없는 섭외긴 해도 아직 발표된 것도 없는데 벌써부터 걱정할 필요 있나?

    └BC 원작 영화들이 다 ㅂㅅ처럼 나온 탓이지.

    블랙 나이트를 사랑하는 이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세이버즈 시리즈를 연달아 흥행시킨 맥스 스튜디오와 달리, BC 스튜디오는 무려 20년간 매번 팬들을 실망시켰다.

    희망이라도 없으면 포기할 텐데.

    너무나도 매력적인 BC의 세계관과 인물 그리고 서사를 잊을 수 없었고 새 영화가 나올 때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영화관을 찾았었다.

    결과는 모두 실패.

    아무리 BC를 좋아하더라도 이젠 지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에 <이어 원>이 발표된 것이었다.

    더군다나 슈퍼 히어로 영화의 역사를 다시 쓴 크리스틴 노먼 감독이 BC 최고의 캐릭터 블랙 나이트를 다룬다고 하니 그 기대가 클 수밖에.

    최근 들어 인지도를 쌓기 시작한 프란츠 페터가 눈에 찰 리 없었다.

    진행자 우진이 채팅창을 확인하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하하. 의외네요. 프란츠 페터라면 마에스트로 배도빈의 제자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정확해요.”

    “시청자 의견란에 프란츠 페터가 누구냐는 질문이 올라오고 있어 잠시 설명해 드려야 할 듯싶네요.”

    우진이 자세를 고쳐잡았다.

    “현재 베를린 필하모닉 소속 작곡가로 얼마 전에 배영빈 감독의 신작 애니메이션 OST를 작업했죠. 또 방금 말씀드렸듯이 배도빈의 제자로 유명한데, 어떻게 함께하게 되었나요?”

    “처음에는 빈에게 의뢰했어요. 그가 거절하면서 페터를 소개해 주었고요.”

    “아무리 그의 추천이라도 감독의 마음에 들었으니 가능한 일이었겠죠?”

    크리스틴 노먼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놀랍네요. 그러면 혹시 오늘 00시에 발표될 예고편에서 프란츠 페터의 곡을 들을 수 있을까요?”

    크리스틴 노먼이 고개를 내밀어 우진의 모니터를 보았다.

    잘 알아볼 순 없었지만 빠른 속도로 올라오는 것만으로도 팬들이 얼마나 당황하는지 알 수 있었다.

    “아주 근사한 경험을 하실 거예요.”

    크리스틴 노먼의 자신감이 넘치는 대답에 팬들은 혼란스러워졌다.

    * * *

    우려 속에서 마침내 <이어 원>의 1차 예고편이 공개되었다.

    뉴튜브, 미시시피, JH, 웹플릭스, 디자인 플러스에 동시 업로드된 <이어 원>의 예고편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특유의 감각적 연출과 묵직한 사운드로 무장한 영상은 비장함마저 감돌았다.

    더욱이 그간 철저히 감추었던 주연 배우의 목소리에 팬들이 깜짝 놀랐다.

    └뭐야?

    └많이 듣던 목소린데;;;;

    └설마~

    └이 가래 끓는 목소리가 흔치 않은데. 설마 진짜 진짜?

    익숙한 목소리에 팬들의 기대감이 잔뜩 고조되었고, 영상은 숨 막힐 듯 긴장감을 더했다.

    도시를 훑은 카메라는 천천히 거대한 건물 외벽을 따라 올라갔고 화면은 건물 안으로 전환된다.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외관.

    한 남자가 등을 보인 채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영상은 그대로 멈추어 팬들을 한 번 더 안달 나게 한 뒤, 주연 배우의 얼굴을 잡았다.

    수천만 팬들은 전율하고 말았다.

    블랙 나이트 트릴로지의 주인공이었던 크리스찬 에일이 젊었을 적 모습 그대로 나선 것이다.

    └와앀ㅋㅋㅋㅋㅋㅋㅋ

    └크리스찬 에일이라니ㅠㅠㅠ

    └주모오오오오오오!

    └저 후두염 걸린 듯한 목소리가 이렇게 반가울 줄은 진짜 상상도 못 했다.

    └왤케 젊엌ㅋㅋㅋㅋㅋㅋ

    └분장이겠지. 와 근데 진짜 감쪽같다. 헐리우드 기술 실화냐.

    웨인 엔터프라이즈 타워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는 그의 등 뒤로 블랙 나이트의 가면이 드러나고.

    천천히 울리기 시작한 프란츠 페터의 오리지널 스코어.

    그 강렬하고 비장한 주제는 단 10초 연주되었을 뿐이지만 1992년 TV 시리즈로 방영했던 블랙 나이트 TAS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모든 영상이 끝나고.

    검은 화면만 남은 상태로 기괴한 웃음소리가 선명히 울려 퍼졌다.

    블랙 나이트의 숙적, 조커를 암시하는 연출에 팬들은 울부짖었다.

    └내 돈 가져가! 다 가져가!

    └미쳤다 미쳤다 미쳤다 미쳤다고!!!!!

    └내 팬티는 신경 쓰지 말고 이렇게만 내주세요ㅜㅠㅠㅠㅠ

    └니 팬티 아무도 신경 안 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조커조커조커조커조커조커조커

    └노래 들었음? 진짜 개멋진뎈ㅋㅋ

    └진짜 딱 오리지널 느낌ㅋㅋㅋㅋ

    └와 장난 아니네? 소오름

    └역시 크리스틴 노먼이다. 팬들이 뭘 기대하는지 정확히 알아. 미친 1년을 어떻게 기다려?

    └아니 근데 곡 진짜 괜찮은데?

    └ㅇㅇ 시리즈 처음으로 넘어간 느낌이랑 너무 잘 어울린다. 배도빈이 추천할 만하네.

    음악 감독 프란츠 페터는 <이어 원>의 1차 예고편을 통해 자신을 향한 우려의 목소리를 모두 불식시키고 말았다.

    노먼 감독의 발언 이후 프란츠 페터가 감당하기엔 벅찬 일이라고 떠들어대던 몇몇 언론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1차 예고편만으로도 블랙 나이트의 팬들은 크리스틴 노먼 감독과 프란츠 페터를 포함한 제작진, 배우들을 무한히 신뢰할 수 있었다.

    예고편이 공개된 이후 24시간 동안 전 세계는 <이어 원>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그러한 상황은 아이러니하게도 지금껏 작업에만 몰두하고 있던 프란츠 페터에게 크나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으으으으.”

    관련 기사를 확인한 페터가 앓는 소리를 냈다.

    극장에서 어린아이들에게 사인해 줄 때만 해도 내심 기뻤지만, 언론과 포럼,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언급되니 좀처럼 진정할 수 없었다.

    페터가 슬쩍 고개를 들어 배도빈을 보았다.

    그는 다리를 책상에 걸쳐놓고 고개를 살짝 든 채 악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런 자세로 악보와 펜을 쥐고 있으니, 페터는 스승의 악보를 알아보기 힘든 이유가 자세 때문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큰 부담을 느끼는 지금 배도빈의 저런 여유가 너무나 부러웠다.

    문득 시선을 느낀 배도빈이 고개를 돌렸다.

    “왜?”

    “아, 아뇨.”

    프란츠 페터가 고개를 저었고 배도빈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소년은 <파우스트>라는 대작을 준비하면서도 동시에 여러 일을 진행 중인 스승에게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속으로 끙끙 앓던 중 배도빈이 악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좋아하시더라.”

    “네?”

    “예고편.”

    “아.”

    프란츠 페터가 양 검지 끝을 꾹꾹 눌렀다.

    “몇 년을 기다렸던 사람들이 마음에 든다는 거잖아. 못 했다는 말도 아니고 칭찬하는데 뭘 부담스러워해?”

    “…….”

    “잘못하면 욕깨나 먹겠지만.”

    “끄우우우웁.”

    프란츠 페터가 금방 울먹이기 시작했다.

    배도빈의 말대로 지금 당장은 좋아해 주지만, 너무나도 큰 일을 맡고 있기에 혹시라도 잘못될 것이 걱정되었다.

    크리스틴 노먼과 대화를 나누고 블랙 나이트 시리즈를 공부할수록 머릿속은 명확해졌지만.

    불안이 기어오르기도 했다.

    수천만 명이 기대하는 작품.

    자신도 좋아하게 된 <블랙 나이트 시리즈>를 정말 온전히 표현할 수 있을지 두려웠다.

    “그럴 일 없으니 걱정 마.”

    “전 자신이 없어요…….”

    “절대로 없을 테니 걱정 말라고.”

    “그걸 형이 어떻게 알아요.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요.”

    “왜 몰라.”

    “가, 갑자기 너무 큰 일을 맡게 된 것 같아요. 제가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저도 저를 못 믿는데 어떻게…….”

    “마음에 안 드는 곡을 노먼이 쓸 것 같아?”

    “아.”

    “엉망진창인 곡이 발표돼서 욕먹을 일 없으니 마음 편히 먹으라고.”

    “그건 그렇지만 그렇게 되면 일정이…….”

    “세상에 곡 쓰는 사람이 너뿐이야? 네 실패로 피해받을 사람 없으니까 네 할 일만 해. 지금은 내일 노먼에게 들려줄 곡만 걱정해도 충분해.”

    배도빈이 고개를 들고 프란츠 페터 앞에 놓인 악보를 가리켰다.

    페터가 고개를 끄덕이곤 핸드폰을 치웠다. 정신을 차리고자 본인의 통통한 뺨을 친 소년은 이내 다시 악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배도빈은 씩 하고 웃으며 자신의 악보로 눈을 돌렸다.

    <블랙 나이트 이어 원>의 테마곡 중 하나로 프란츠 페터가 어제 완성한 곡이었다.

    ‘넘어질 리 없지.’

    혹시 몰라 준비한 스케치는 필요 없을 듯싶었다.

    ‘그래도 괜찮고.’

    배도빈은 실로 그리 생각했다.

    아직 미숙한 제자가 성공이든 실패든 가능한 많은 경험을 할 수 있길, 그래서 자신이 생각지 못한 음을 들려주길 바랐다.

    사카모토 료이치와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그에게 걸었던 기대와 같은 마음이었다.

    똑똑-

    “실례하겠습니다.”

    얼마나 흘렀을까.

    비서실의 엠마가 프란츠 페터를 찾았다. 생방송으로 중계될 제작 발표회 때문이었다.

    “페터 군, 준비하세요.”

    “헉. 벌써 시간 됐어요?”

    “네. 10분 뒤에 로비에서 봬요.”

    엠마가 배도빈에게 인사한 뒤 방을 나서자 프란츠가 허둥지둥 짐을 챙겼다. 거울을 보고 나비넥타이를 만졌고 아무리 다듬어도 소용없는 곱슬머리를 괜히 쥐었다가 펴며 정리했다.

    “형, 저 가볼게요.”

    “그래. 중계로 볼게.”

    “으아아으으.”

    민망해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뛰어나간 프란츠 때문에 배도빈이 피식 웃었다.

    “페터 어디 가나 봐. 서두르던데.”

    마침 나윤희가 집무실로 들어섰다.

    “제작 발표회요.”

    “아.”

    나윤희가 청심환을 챙겨주지 못함을 아쉬워했다.

    “생방송이라서 엄청 긴장될 텐데. 괜찮을까?”

    “별일 없을 거예요.”

    “반응이 너무 좋아서 그러지 않아도 부담스러울 텐데.”

    나윤희가 마치 옆에서 프란츠 페터를 본 것처럼 말했다. 본인의 경험으로 한 추측이지만 너무나 정확했다.

    “인터뷰는 거의 노먼이나 에일한테 갈 거예요. 페터야 자리만 채울 텐데요. 뭘.”

    “그래두.”

    대화를 나누던 나윤희가 손뼉을 쳤다.

    “갈 때 마트 들리자.”

    * * *

    나윤희가 거실 테이블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배도빈이 카레가 잔뜩 든 냄비를 가지고 왔고 TV에서는 블랙 나이트 이어 원의 제작 발표회가 방송되고 있었다.

    -시리즈의 첫 번째 영화였던 비긴즈와는 어떤 점이 다른가요?

    -비긴즈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아직 이른 듯하네요.

    나윤희가 수저를 놓으며 말했다.

    “채은이가 올린 글 봤는데 다들 페터한테 거는 기대가 크더라구.”

    “BC 스튜디오에서는 오랜만에 나오는 대작이니까요.”

    “응. 페터가 부담 가지지 않으면 좋겠는데. 맛은 어때?”

    “훌륭해요. 양파를 오래 볶으니 단맛이 사네요.”

    배도빈이 카레를 음미하곤 다시 입을 열었다.

    “걱정 말아요. 전에도 말했지만 할 건 하는 애니까.”

    “주변의 기대가 크면 서두르게 되지 않을까?”

    “그럴 수도 있죠. 그러다 넘어져도 쓰러져 있을 애 아니니까. 아, 잘 튀겨졌다.”

    나윤희가 미소 짓곤 수저를 들었다.

    -음악도 큰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예고편에서 잠깐 소개된 곡은 92년 TV 애니메이션 오프닝을 리메이크한 건가요?

    -아뇨. 주제를 유사한 구조로 따오긴 했지만 전혀 다른 곡이에요. 게다가 가슴을 뛰게 하죠.

    -정말 궁금하네요.

    -자세한 이야기는 음악 감독에게 직접 물어보시는 게 빠를 듯하네요.

    “아, 페터 나오나 봐.”

    나윤희의 말에 배도빈이 고개를 들었다.

    사회자가 프란츠 페터를 불렀고 이내 세트장에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잔뜩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배도빈은 언젠가 어떤 무대에서든 당당할 제자를 떠올리며 응원했다.

    ‘괜찮아. 걸음이 느리든 넘어지든.’

    목표를 잃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러다.

    -안녕하세요. 안녕하꾸압!

    인사하며 계단을 내려오던 프란츠 페터가 발이 꼬이며 넘어지고 말았다.

    배도빈과 나윤희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어엇?

    -괘, 괜찮으십니까! 페터 군! 페터 군!

    -네, 네! 괘, 괜찮아요! 죄, 죄송합니다!

    -정말 괜찮으신 거예요?

    -네! 네!

    얼굴이 새빨개진 채 고개를 숙인 제자를 보며 배도빈의 말문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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