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553화
120. 에필로그(3)
2027년 12월 25일.
토요일 오후 9시.
JH의 한 채널에 1,000만 명이 몰리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성탄절을 맞이해 배도빈이 출연한다고 알려진 너만 모름의 특집쇼,
실명 이후 외부 활동을 최소화한 데다 2027년 역시 오케스트라 대전 이외에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케 르바 슈타인, 헨리 빈프스키가 대신 했으니.
팬들은 오케스트라 대전 2회 연속 우승의 대업을 기록한 배도빈이 현 재 어떤 기분인지, 눈은 정말 다 나았는지, 나윤희와의 관계는 사실인 지 조금이라도 빨리 알고 싶었다.
다른 프로그램이었다면 그런 기대도 걸 수 없었을 테지만, 눈치 없고 뻔뻔하게 질문하기로 유명한 우진이 진행자로 있는 ‘너만 모름’이었기에
많은 의문을 풀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리고 마침내 ‘너만 모름’의 인트로 영상이 시작되었다.
“안녕하십니까, 너만 모름의 우진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이日를 통해서 도 생중계되고 있는데, 맙소사. 시청 자 수에 오류가 난 건 아닐까 싶네요.”
우진이 너스레를 떨었다.
채팅창에 헛소리하지 말고 배도빈이나 불러내라는 이야기가 솟구친 탓에 담당 유日가 신경질적으로 팔을 휘저었다.
우진은 어깨를 으쓱인 뒤 진행을 이어나갔다.
“오늘 모실 게스트는, 다들 잘 알고 계시겠죠? 정말 엄청난 분이 찾아와 주셨습니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악단주, 마에스트로 배입니다!”
우진을 잡고 있던 카메라가 이동했고 곧 배도빈이 스포트라이트를 받 으며 세트장에 나섰다.
당당히 걸어 나온 그는 우진과 악수를 나눈 뒤 소파에 앉았다.
카메라를 향해서도 인사했는데 그 무뚝뚝한 행동이 팬들에게는 얼마나 기쁘고 반가운지 그로서는 알 수 없었다.
우진이 배도빈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오케스트라 대전 1회 우승, 2회 우승. 최연소 그레미 어워드 본상 수상자. 누적 8회 수상. 최연소 그 로마이어 작곡상. 누적 4회 수상. 이 기록은 최초이자 유일하죠. 에른 스트 폰 지멘스 음악상 2회 수상. 북미 평론가 협회 올해의 음악가 9 회 선정. 타임즈 선정 21세기 최고 의 지휘자. 그래모폰 선정 4년 연속 최고의 피아니스트. 1878년 이후 가 장 많은 음반을 판매한 음악가, 유 네스코 모차르트 메달, 독일 대공로 십자성장과 특별대십자장,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 끝이냐고요? 아직 쇼팽 콩쿠르 우승조차 언급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겨우 4페이지 중에 한 페이지를 읽었을 뿐이에요. 정말, 믿을 수 없는, 이 시대, 아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 냈다 하면 밀리언 셀러는 기본! 누계 7억 장을 판매한 그 사람!”
우진이 잔뜩 흥분하여 과장되게 설명을 이어나가다가 고개를 홱 하고 돌렸다.
“반갑습니다, 마에스트로.”
잔뜩 과장된 어조와 행동에 배도빈이 슬쩍 거리를 두었지만 프로 진행 자 우진은 굴하지 않았다.
잔뜩 끌어올린 분위기를 잇고자 질문을 시작했다.
“우선 오케스트라 대전 우승을 축 하드립니다. 정말 대단한 페이스였죠?”
“대단했죠.”
배도빈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오케스트라 대전. 두 번 연속 우승하셨는데, 이번에는 규모가 훨씬 더 컸습니다. 몇몇 전문가는 오케스트라 대전으로 인한 경제 효과가 500억 달러에 이른다고 주장하는데, 이 정도면 우승한 베를린 필하모닉도 그 효과를 톡톡히 누렸겠네요. 실제로는 어떤가요?”
ㄴ 시작부터 돈 얘기 ㅋㅋㅋㅋ
ㄴ 도른자답다.
ㄴ 각도도 안 재고 얼마 벌었냐고 묻넼ㅋㅋㅋㅋㅋ
배도빈이 잠시 인상을 쓰더니 입을 열었다.
“다음 달에 올해 실적 발표가 있을 테니 참고하시죠.”
프로 진행자 우진이 처음으로 말문이 막혔다.
ㄴ 당황했죠? 당황했죠?
ㄴ 그래ㅋㅋㅋㅋ 어차피 공개될 거 뭐 하러 물어봨 ㅋㅋㅋㅋ
ㄴ 잘도 말해주겠닼ㅋㅋㅋ
시청자들이 채팅창을 웃음으로 도 배했고 우진의 당황한 표정을 본 배도빈이 소파에 등을 기댔다.
“올해 매출액은 대략 87억 유로 정도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배도빈의 말에 우진도 촬영진도 그리고 시청자들도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87억 유로. 한화 11조 4,000억 원 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이 음악교육원 설 립 등 여러 사업을 펼치고 있다고는 하지만 업종 특성상 순이익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모든 유통을 베를린 필하모닉의 자 회사에서 직접 관리하고 있으며, 녹 음 및 설비 역시 자체적으로 처리하는 베를린 필하모닉은 그중에서도 더욱 수익에 누수가 없었다.
콘서트홀과 크루즈 유지 비용, 인 건비와 기타 부대비용을 제외하고는 매출액 대부분이 수익으로 들어오는 구조였기에 87억 유로라는 액수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ㄴ 차를 파는 곳도 아니고 건설사도 아니고 그냥 음악 하는 곳이 어떻게 해야 매출액이 11조가 나오짘ㅋㅋ
ㄴ ㅋㅋㅋ
ㄴ 작년 대비 5배가 뛰네;;
ㄴ 오케스트라 대전 뭐냨 ㅋㅋㅋ
ㄴ 오케스트라 대전으로 진짜 뽕 오지게 뽑음. 더군다나 오케스트라 대전 도시 운행으로 크루즈도 알차게 뽑아먹었고.
ㄴ 저 정도면 얼마나 번 거냐 대체?
ㄴ 2026년에 베필 매출 대비 순이 익이 54퍼센트였음.
ㄴ ??????
ㄴ 경제 공부했으면 저게 개소리라는 건 누구나 다 안다. 어떻게 매출액의 54퍼센트가 순이익이 될 수 있어, 미친놈아.
ㄴ 가능할지도 모름. 경제 성장률 떨어지니까 독일이 2020년부터 법인세 인하하는 걸로 기업 살리기 시도했었음. 최고 세율을 25% 수준 까지 떨어뜨렸으니 개꿀이지.
ㄴ 그럼 법인세로 매출액의 25% 날아갔다 치고 나머지 21%만으로 사업을 했다고? 아무리 자체 생산, 공급이라고 하지만 베를린은 뭐 빚 도 없냐?
ㄴ ㅇㅇ. 1유로도 없음.
ㄴ 말이 되는 소릴 해 미친놈아 적 어도 부동산이라도 대출이 껴 있어 야지.
ㄴ 없음. 진짜임. 니가 찾아봐.
ㄴ 난 베를린 매출액보다 배도빈 자산이 더 궁금하다. 애초에 베를린 필하모닉이 배도빈 소유 아니야. 거기다 따로 저작권 수입도 들어올 테고 도빈 재단이랑 샛별 엔터테인먼 트도 있는데.
“와우.”
말을 잊었던 우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감탄사 외에 무엇을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
“정말 대단하네요. 놀랍습니다. 그 러니 직원들도 잘 챙겨주시겠죠. 이 틀 전에 오케스트라 대전 상금을 분 할해 주셨단 기사가 났었습니다. 총
상금이…… 4억 5,000만 달러. 정말 이 돈을 전부 분할 지급하신 건가요?”
“아뇨. 그중 2억 달러를 나누었습니다. 개인마다 조금의 차이도 있었고요.”
세금과 오케스트라 대전 참가를 위 한 비용 그리고 악단 자산으로 2억 5,000만 달러를 제외한 나머지 금액 은 배도빈의 지시로 모든 직원에게 분할 지급되었다.
직급과 직책에 따라 금액의 차이는 있었지만 개인당 최소 25만 달러가 지급되었으니 베를린 필하모닉은 그 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많은 음악인이 베를린 필하모닉에 입단하고 싶어 하는 이유를 알겠네요.”
“지금 연주진과 직원들은 최고 수 준으로 대우받을 자격이 있죠.”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오케스트라 대전 이야기를 계속해 보죠. 많은 일이 있었지만 가우왕 부감독과 최지훈 피아니스트 의 연주는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두 사람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그만한 기량을 지닌 피아니스트는 드무니까요.”
“네. 그런 이유도 있지만 사실 가장 큰 이유는 두 사람이 서로를 너 무나 잘 이해한 덕이죠.”
우진은 배도빈이 계속 이야기를 해 나갈 수 있도록 고개를 끄덕여 반응 했다.
“제가 가우왕이란 이름을 처음 들었던 것도 지훈이를 통해서였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우상으로 삼았던 사람이니 당연한 일이죠. 반대로 가우왕도 지훈이를 의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첫 번째 오케스트라 대 전이었을 거예요.”
“그때는 최가 베를린 필하모닉과 협연했죠.”
“네. 가우왕이 자기 안 불렀다고 삐졌던 모양이에요. 얼마나 잘하는 지 두고 보다가 지훈이 연주를 듣고 별말 않더라고요.”
“하하. 그런 일이 있었군요. 어릴 적 우상의 자리를 빼앗은 최와 빼앗 긴 입장의 왕. 어찌 보면 최고의 라 이벌이자 동료가 될 수밖에 없었네요.”
배도빈은 매일 점심마다 경합을 벌이는 두 사람의 전적이 벌써 400전을 넘겼다고 언급했다.
“확실히 400전이라면 출근하는 날은 경합을 가졌다고 보는 게 맞네요.”
배도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적이 궁금할 수밖에 없는데. 어떻습니까?”
채팅창에서 우진을 칭찬하는 글이 몇몇 올라왔다.
배도빈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가우왕이 220승 정도 했을 거예요. 정확하진 않지만.”
“생각보다 크게 차이 나지 않네요.”
“네. 추세를 보면 곧 따라잡힐 것 같아요.”
“하하. 가우왕 씨가 방송을 보고 있으면 가만있지 않을 것 같네요.”
“사실이니까요.”
이미 배도빈의 핸드폰으로 가우왕 의 전화와 메시지가 쏟아졌지만 소리를 꺼두었기에 배도빈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다음은 역시 빼놓을 수 없죠. 오케스트라 대전의 또 한 명의 주인 공. 산타 웨인에 대해 많은 분이 궁 금해하십니다. 그는 지금 어떻게 지 내고 있나요?”
“견습 단원으로 다른 견습 단원과 함께 생활하고 있습니다. 연습도 충실히 따라오고 있고 피셔 수석에게 개인적으로 지도도 받고 있죠.”
“타마키 히로시 피협의 감동이 잊 히질 않는데, 웨인 씨가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을까요?”
“네. 분명히.”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시나요?”
“산타의 박자 감각은 악단 내부에 서도 드물 정도로 정확합니다. 기억력도 훌륭하고 무엇보다 음악을 정말 사랑하죠.”
“음악을 사랑한다.”
“네. 산타에게는 여러 재능이 있지만 음악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게 가장 큰 무기죠. 피셔 수석에게도 산타가 흥미를 잃지 않고 즐겁게 지낼 수 있도록 주문했습니다.”
배도빈의 교수법은 항상 하나의 목 적을 우선시했다.
기교를 반복 숙달하는 것보다 음악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
음악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그 어 떤 재능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사실 자주 듣고 하는 말 같습니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 길 수 없다는 말도 있으니까요. 하
지만 정말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는데, 마에스트로는 왜 그렇게 생 각하십니까?”
배도빈이 슬며시 웃었다.
우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뇨. 오랜만에 질문다운 질문을 하신 것 같아서요.”
방청객과 시청자들이 민망해하는 우진을 보며 웃었다.
분위기가 진정되고 배도빈이 슬며시 운을 띄웠다.
“누구나 벽을 마주할 때가 옵니다. 그 어떤 사람이라도요.”
“마에스트로 같은 천재도요?”
“네. 예외는 없습니다. 재능을 갖춘 사람이라면 벽을 만나는 시간이 좀 늦을 뿐이죠. 없는 사람은 좀 더 자 주 맞이할 테고.”
“네.”
“그럴 때 그 벽을 넘어설 수 있는 원동력은 사랑뿐입니다. 재능과 노 력만으로 넘기에 벽은 너무 높고 두 덥거든요. 지금 생각하니 사랑이라는 단어만으로는 모호하네요. 흥미, 집착, 갈증 여러 말을 함께 써야 할 것 같습니다. 또는 그 비슷한 감정을 포함해서요.”
“아.”
“그래서 그 마음이 가장 중요합니다. 적어도 제 경험으로는 그런 인 간이 계속 달리더라고요.”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에스트로도 음악을 사랑하시니 시력을 잃었던 상황에서도 그랜드 심포니란 걸작을 완성할 수 있었던 거군요.”
“네. 또 단원들이 도와줬죠.”
“20개월이나 준비했다고 들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아무리 신곡이라 해 도 베를린 필하모닉이 하나의 곡을 소화하는 데 20개월이나 걸렸다는
게 의아한데요. 그 과정은 어땠나요?”
“힘들었죠.”
배도빈의 대답에 우진과 시청자 모두 놀랐다.
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천재가 힘들었다고 말하는 게 그들로서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당시에는 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포기할까 몇 번이고 생각했습니다. 단원들도 저도 지칠 대로 지쳤으니 까요.”
“그럼••••••
“그래도 해야만 했습니다. 사명감도 아니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니죠. 그저 조금씩이라도 채워지는 그 감 정 때문에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금 전에 이야기했던 마음이었죠.”
배도빈은 20개월간 어떤 일이 있었는지 덤덤하게 풀어냈다.
피아노의 속주를 따라가기 위해 무 리하게 연습한 목관악기 연주자들이 안면 근육과 심한 피부염을 앓은 점.
첼로 독주를 위해 말 그대로 손끝 이 터지길 반복했던 왕소소.
2악장의 불규칙하게 변화하는 박자를 잡기 위해 깨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악보와 씨름했던 타악기 주자 들.
그리고 244개의 악기를 동시에 들 으면서 교정을 진행해야만 했던 고충.
우진과 시청자들은 배도빈과 베를린 필하모닉이 그랜드 심포니를 어떻게 준비했는지 들으면서 그들이 우승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힘들게 준비하신 그랜드 심포니. 발표된 지 2달이 되었는데 누적 조회 수가 벌써 120억 뷰를 기록했습니다.”
“기왕이면 전 세계 모든 사람이 들 어주시면 좋겠네요.”
“한 번 듣고 두 번 안 들을 수 없으니 그렇게 되면 200억 뷰는 문제 도 아니겠네요.”
배도빈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상당히 독특한 구조의 교향곡이었습니다. 베를린 필하모닉에 의한 광시곡이란 부제도 달렸는데 이건 어떤 뜻인가요?”
“말 그대로입니다. 기존의 형식에 구애받지 않으면서 각 악기의 매력을 최대한 살리고자 했습니다. 베를린 필하모닉을 생각하며 썼으니, 그 들에 의한 광시곡이죠.”
“기존의 형식이라. 사실 그동안 정 말 다양한 방식의 음악을 들려주셨는데, 혹시 새로운 걸 해야 한다는 압박감 같은 것도 느끼십니까?”
배도빈이 고개를 저었다.
“형식을 반드시 깨야 하는 법은 없습니다. 형식과 내용을 갖추었을 때 느낄 수 있는 감동도 분명하죠. 음악가가 지양해야 하는 건 매번 새로 운 음악을 해야 하는 게 아니라 감 동이 없는, 미학이 없는 연주입니다.”
“감동과 미학이 없는 음악이요.”
“네. 음악은 아름다워야 합니다. 그 것이 형식에서 찾아오든, 변주에서 오든 아니면 혼란 속에서 오든 중요 하지 않습니다. 그러기 위해 깨지 못할 규칙이란 없습니다.”
“마에스트로의 말씀대로라면 형식을 반드시 깨야 하는 것조차 규칙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아름다우 면 뭐든 좋다고 생각하면 될까요?”
“그렇습니다.”
배도빈이 깍지를 끼우며 답했다.
ㄴ 난 도빈이 저렇게 확고한 게 좋더라.
ㄴ 〈The Dobean〉에서 카레랑 주스만 먹는 거 보고 어디 뭐 하나 천재면 역시 똘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인터뷰 보니까 속이 깊네.
ㄴ 그거 각색이라니까 자꾸 사람들이 진짜로 믿네. 도빈이가 오해라고 했잖아.
“역시 이렇게 확고한 신념이 있으시니 음악에도 색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제 또 많은 분이 궁 금해하시는 이야기를 꺼내볼까 하는데요.”
우진이 드물게도 조심스럽게 물었다.
“시력을 되찾은 지 두 달 정도 홀렀습니다. 의료진은 재발 가능성에 대해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배도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 일이 겹치며 팬들에게 제대로 설명할 기회가 없었고 그들이 계속 걱정하고 있는 것도 알았기에 적당 한 때로 여겼다.
“여러 번 검사를 받았지만 시력을 잃기 전과 차이를 발견하진 못했습니다. 완전히 나았다고 확신할 순 없는 상황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다고.”
배도빈이 우진의 말을 끊었다.
“그렇다고 해서 또 시력을 잃는다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신경을 덜 쓰고 피로가 쌓이지 않게 하는 거죠.”
배도빈의 말에 우진과 시청자들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렇게 지내다 보면 도진이가 낫게 해줄 테니 걱정하지 않습니다.”
동생이 자신을 낫게 해줄 거라 말하는 배도빈의 표정은 무덤덤한 평소와 달리 도리어 좋아 보였다.
“우애가 좋네요. 도진 군이 형의 눈을 낫게 해주겠다고 약속한 건가요?”
“네. 분명 그렇게 해줄 겁니다.”
배도빈은 배도진이 얼마나 대단한 지 물어보지도 않은 말을 늘어놓았다.
생방송을 지켜보고 있던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들은 그 모습에서 배도빈 자랑을 하는 푸르트벵글러를 찾을 수 있었다.
“저 또한 꼭 그렇게 되길 바라겠습니다.”
대본 카드를 넘긴 우진이 눈을 반 짝였다.
“점점 마무리할 시간이 다가오는데요. 이것만은 정말 놓칠 수 없는 질 문이죠.”
“네.”
“여성과는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 죠. 열애설입니다.”
열애설이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도빈이 인상을 썼지만 우진은 물 러날 생각이 없었다.
“사생활인 만큼 강요할 순 없지만, 물어보지 않으면 제가 맞아 죽거든요. 얼마 전, 그리고 또 어제도 나윤희 악장과 함께 있는 사진이 올라 왔습니다. 너무나 잘 어울린다는 이 야기가 많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직접적인 질문이 아니었지만 의도는 노골적이었다.
ㄴ 잘한다! 잘한다!
ㄴ 안 돼애 ㅠㅠㅠㅠ
ㄴ 우리 도빈이 못 줘 ㅠ 안 돼 ㅠ
ㄴ 사겨라 사겨라!
ㄴ 사귀는 거 맞는 거 같은데.
채팅창이 배도빈과 나윤희의 만남을 반대하는 사람과 응원하는 사람으로 뒤섞여 혼란스러워졌다.
그러나 배도빈으로서는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본인한테도 말 안 했는데 방송에 다 대고 말하라고?’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배도빈이 카메라를 응시했다.
“저는 여러분의 관심을 받고 활동 하는 사람입니다. 제 행동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기에 항상 의식 하며 살고 있습니다.”
배도빈을 아는 사람은 모두 공감하는 이야기였다.
그는 자신의 신념에 철저했지만 한 편으로는 아주 사소한 일도 조심했다.
정말 많은 주류 업체에서 그에게 광고 요청을 했지만 사양했고, 그의 곡으로 선거 활동을 하고 싶다던 숱 한 정치가들의 요청을 거절했다.
작은 일이었지만 쓰레기 하나, 침 한 번 거리에 버리거나 뱉은 적도 없을 정도로 철저했다.
매해 조 단위의 돈을 벌어들이면서 도 음향기기와 악기를 모으는 데 쓸 뿐, 사치라고는 조금도 행하지 않았다.
그 주변에는 유능한 자산관리자가 넘쳐났지만 투기는커녕 그렇게 보일 수 있다는 이유로 이유 없는 부동산은 매입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관계는 달랐다.
그것은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 누구나 존중받아야 하는 영역이었다.
“음악인으로 살기 위해, 여러분께 음악가 배도빈으로 남기 위해서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몇몇 시청자는 뒤늦게 알려진 오케스트라 대전에 커튼이 생긴 이유를 떠올렸다.
진 마르코가 울먹이며 전했던 배도빈이 한 번의 무대를 위해 몇 번이 나 넘어졌던 일과 함께 그가 어떤 노력을 했는지 잘 알려져 있었다.
그는 관객이 다른 어떠한 조건도 없이, 오직 음악만을 편히 감상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많은 분이 제 음악보다 배도빈이란 사람 자체를 좋아한다는 것도 알 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저보다 제 음악을, 베를린 필하모닉을 좋아 해 주셨으면 합니다. 유명인 배도빈 이 아니라 작곡가, 지휘자 배도빈으
로 여겨주셨으면 합니다.”
배도빈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이 차분했다.
“음악을 통해 저와 교감하는 분들을 위해서라도 유명인사로 여러분 앞에 나서지는 않을 겁니다.”
배도빈은 사실 자신의 인간관계에 집착하는 이들의 마음이 어떤지 이 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이 자신이 누구를 만나는지에 따라 실망하고 기뻐 하고 혹은 그 누구도 만나지 않길 바란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괴로웠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속일 수도 없었다.
사랑뿐만이 아니라 음악에도 적용 되는 일이었다.
만약 록을 했다면.
가요를 만든다면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이 나올 터.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관 심과 사랑을 받기 때문이라 선을 그을 필요가 있었다.
감사함을 잊지 않고 적어도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경계선을 그을 필요가 있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제게 소중한 사람이 생기고 그 사람도 저 와 같을 때. 그리고 함께하기로 했을 때는 숨기지 않겠다는 것뿐입니다. 아직은 아무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ㄴ 애가 진짜 어른스럽긴 하다.
ㄴ ㅇㅇ. 자기 프라이버시는 지키고 싶다는 말이잖아. 그러면서도 팬들 한테 모질게 대할 수 없으니까 적어도 때가 되면 말하겠다는 거고.
ㄴ 사실 어느 정도 연애 감정으로 대하는 팬도 있어서 누구 만나면 떨어져 나가기도 할 거임. 제정신 아 닌 애들이 어디 한둘이냐. 사진 찢 고 협박 편지 보내고 악플 달고.
ㄴ 그래서 저런 사람들한테는 괴롭 지. 근데 어떡해. 사람 좋아하는 마음까지 감출 순 없잖아.
ㄴ 난 무조건 우리 도빈이 편이야n TT 도빈이 하고 싶은 거 다 해. 범죄 빼고 ㅠㅠ
ㄴ 아 어렵다, 어려워.
“배도빈 악단주의 진솔한 답변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이런 거 물어보라고 하지 말라고!”
우진이 분위기를 풀기 위해 제작진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저는 저얼대 하기 싫었던 질문은 이쯤 마무리하고. 특별한 무대를 준비하고 계시다 들었습니다. 베토벤 서거 200주년을 기념한 송 년 음악회라고요.”
“베트호펜.”
“아, 네. 베트호펜.”
1827년에 죽은 뒤 벌써 200년이 흐르고 말았다.
자신의 사망일을 기념하는 기분이 묘했으나 단원들과 직원들이 성화를 부린 탓에 어쩔 수 없이 진행하기로 결정된 일이었다.
“3일간 테마를 가지고 진행할 예정 입니다. 첫 번째는 가우왕, 최지훈과 함께 피아노 소나타 연주회를 가질 예정이고.”
“마에스트로도 함께하시는 건가요?”
“네.”
“이거 배도빈 콩쿠르 때의 아쉬움을 달랠 수 있겠는데요.”
배도빈이 씩 하고 웃었다.
“두 번째 날과 세 번째 날은 관현 악곡으로 채웠습니다.”
“세 번째 날은 역시 합창이겠죠?”
“잘 아시네요.”
우진이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다음 주 수요일부터죠. 12월 29, 30, 31일 3일간 진행되는 2027 베를린 필하모닉 송년 음악회에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표는 이미 없겠죠?”
배도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디지털 콘서트홀의 객석은 여러분 의 집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늘 함께해 주신 배도빈 악단 주와 시청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
촬영을 마치고 나선 배도빈에게 죠 엘 웨인이 다가갔다.
“고생하셨어요, 보스.”
“죠엘도요. 산타가 기다릴 텐데 늦었네요.”
“크리스마스 선물 받아서 제 생각 못 하고 있을걸요?”
“무슨 선물 했어요?”
“북 치는 게임인데 이름이……. 아 침에 설치해 주니까 밥도 안 먹고 하려고 해서 혼났다니까요.”
배도빈이 싱긋 웃었다.
차량에 탑승한 배도빈은 핸드폰을 꺼내 펼쳤고 가우왕에게서 온 11통 의 부재중 통화 건과 5개의 항의 메시지를 무시했다.
[사진]
[맛있겠지? 슈퍼 슈바인 사장님이 많이 만들어주셨어.]
그리고 그녀가 보내온 슈퍼 슈바인 의 특제 카레 사진을 보곤 슬며시
먹음직스러운 카레와 나윤희의 얼 굴 뒤로 진달래와 차채은이 게임을 하고 있었고 최지훈과 아리엘이 트 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배도진은 프란츠 페터, 알베르트 페터와 함께 보드 게임을 하고 있었고 뒤통수만 나온 소소와 료코는 분 명 디저트를 먹고 있으리라.
“서두르죠.”
배도빈은 등을 기대며 만족스럽게 숨을 내뱉었다.
〈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