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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550화 (550/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550화

    119. Fin(7)

    소멸의 시간이 다가온다.

    대를 이을 이가 필요하거늘 가능성을 가진 아이는 단 셋뿐.

    나를 갈구했던 아이.

    나를 닮은 아이.

    그리고.

    이상한 아이.

    첫 번째 아이는 세상에 감춰두었던 나의 목소리를 찾아다 정리하여 수 많은 아이에게 즐거움을 찾아주었으니 이보다 기특할 수 있을까.

    그러나 나의 충실한 대변인일 뿐.

    새로운 걸 기대하긴 어려울 듯싶다.

    그렇다면 두 번째 아이와 세 번째 아이 중 누구를 선택할까.

    어느 쪽이든 아직은 부족하다.

    두 사람 모두 주어진 생을 다하지 못한 탓에 경계의 지평선에 이르지 못했다.

    본래 수명대로 살았으면 어땠을까.

    내가 있는 이곳에 닿을 수 있을까.

    누구보다도 날 닮은 아이.

    그리고 자기 이야기만을 하는 아이.

    그래.

    둘 중 먼저 도착한 아이에게 물려 주도록 하자.

    두 번째 아이 아마데우스는 본래 15,870일을 더 살 수 있었고 세 번 째 아이 루트비히에게 남았던 시간 은 8,361일.

    이 정도로는 부족할지도 모르겠다.

    지침을 내려주면 조금 더 수월히 도착할 수 있겠지.

    부디 생이 다하기 전에 만날 수 있기를.

    기다리고 있단다. 사랑스러운 아이들아.

    * * *

    [조건을 만족하셨습니다.]

    [퀘스트 이행율: 0%]

    [보상 지급 내역: 없음]

    [관리자와의 연결이 시도됩니다.]

    [송신 중…….]

    [연결이 완료되었습니다.]

    * * *

    ‘ 뭐야.’

    박수와 함성은 어디 가고 헛소리만 들린다.

    내가 누리지 못했던 시간이 8,361일이라는 둥 대를 이을 사람이 필요하다는 둥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해댄다.

    “머리가 좋진 않구나.”

    생각했을 뿐인데 마치 내 속을 들 여다보는 듯 말한다.

    멋대로 남을 평가하는 게 꼭 건방 진 ‘신의 장난’과 유사하다.

    “유추는 가능하고.”

    “ 누구?”

    “글쎄. 이름을 잊은 지 오래구나.”

    점점 더 의심스러워진다.

    “굳이 나를 지칭할 말이 필요하다면 오래전에 테메스란 이름으로 불 리기도 했지. 그렇게 부르렴.”

    빌어먹을.

    나도 모르는 사이 정신을 잃고 어떤 미친놈에게 납치 당한 모양이다.

    “혼란스러워하고 있구나. 나는 너를 다시 태어나게 해주고 네가 장난 이라고 부르는 일을 행한 이란다.”

    지금 이 헛소리를 믿어야 하는가.

    아니,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돌아가야 한다.

    자신을 테메스로 주장하는 목소리가 토라진 느낌으로 말했다.

    “네가 내 배려를 무시했을 때는 조마조마했단다. 단 둘뿐인 가능성이 혹시나 지평선에 이르지 못하면 어 쩌나 걱정했거든. 그래도 혼자 힘으로 어떻게든 해내서 기쁘단다.”

    “여기는?”

    “지금의 너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개념이라 아쉽구나. 공간은 아니 란다. 궁금한 게 많은 것 같으니 무 엇이든 물어보렴.”

    그인지 그녀인지 모를 목소리는 자 신이 소리를 관장하고 있으며 본인을 대신할 사람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기 위해 나와 아마데가 누리지 못한 시간을 다시금 부여했고.

    그 기준에 내가 이르렀다고.

    미치광이가 틀림없다.

    그러나 이런 내 생각을 읽고 내가 무엇을 했는지 속속들이 언급해대니 점차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대화가 통하는구나.”

    “그래서. 내가 뭘 해야 하지?”

    “네게 남은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단다. 정말 아슬아슬했어. 돌아가면 네 주변을 정리하고 그다음은 이곳 에서 교육을 받아 내 뒤를 이어 관리자가 되는 거지.”

    “내가 곧 죽는다고?”

    “그래. 네게 주어진 시간이 다했으니까.”

    “……관리자라는 건?”

    “너와 몇몇 아이가 신이라고 부르는 존재란다. 실제로는 소리를 다룰 뿐이지만 어찌 되었든 네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단다.”

    다시금 의심스럽다.

    “의심이 많구나. 좋은 자세야.”

    “당신은? 내가 관리자라는 게 되면 당신은 어떻게 되지?”

    “사라진단다.”

    “내가 하지 않는다면?”

    “마찬가지지.”

    왜 하필 나지.

    “너는 그럴 자격이 있단다. 이미 많은 아이가 너를 신으로 여기고 따랐잖니?”

    얼토당토않은 말이다.

    “그렇지 않단다. 네겐 그럴 힘이 있고 혼자 힘으로 이곳으로 왔잖니. 앞으로 관리자로서 마음껏 소리를 다룰 수 있단다. 네가 바라는 대로 무엇이든 완전히.”

    내가 바라는 음악을 마음껏 완전히.

    “그래. 지금의 너로서는 막연할 뿐 인 끝에 도달할 수 있단다. 너도 바 라던 일이잖니? 즐거울 거야.”

    “필요 없어.”

    알 수 없는 소리만 쫑알대던 목소 리가 처음으로 조용해졌다.

    “그래. 믿기지 않을 수 있어.”

    “아니. 믿어. 이 상황을 설명할 길 이 없고 도와준답시고 넣은 그 빌어 먹을 메시지도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분명 그리 생각하고 있구나.”

    나를 설득하려는 듯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완벽한 음악을 하고 싶었잖니? 자 격을 얻으면 가능하단다. 경계의 지평선을 넘어선 너라면 충분히 가능 할 거야.”

    맞는 말이다.

    완벽한 음악을 바랐다.

    “그래. 그렇게 간절히 바랐잖니.”

    “완벽한 음악 따위 없어.”

    완벽한 음악 따위 있을 리 없다.

    있어서도 안 되고 만약 있더라도 반드시 넘어설 테다.

    한 지점에 멈춘 순간 더 이상 음악을 할 이유가 없으니까.

    목소리는 말이 없었다.

    “방금 혼자 힘으로 자격을 갖췄다고 했지.”

    “그래.”

    “틀렸어.”

    어머니와 아버지, 할아버지 그리고 도진이.

    히무라와 나카무라, 사카모토, 필 스, 푸르트벵글러, 발그레이, 슈타 인, 파울, 헨리, 레몽, 이승희, 노이 어, 최지훈, 차채은, 한스 짐, 블레 하츠, 니나, 가우왕, 소소, 찰스, 윤 희, 료코, 타마키 그밖에 수많은 사람과 만나지 않았더라면.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하지 않았더라면 그랜드 심포니는 완성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하기에 언젠가 그 이상 의 곡을 만들고 연주할 수 있다.

    반드시 그럴 수 있다.

    설명 그것이 ‘목소리’가 말하는 ‘이 상’에 닿지 못하더라도.

    그렇기에 가치 있는 것이다.

    대화를 나눔으로써 서로를 이해하 고 보담아주고 힘을 불어넣는 그 과 정이야말로 내가 음악을 하는 이유.

    신이든 마왕이든.

    그런 호칭 따위가 나를 대변할 수 없듯, 그러한 자격이 배도빈으로서 의 삶보다 가치 있을 수 없다.

    배도빈으로 살았기에 희망을 볼 수 있었으니까.

    끝내 웃을 수 있었으니까.

    “……많이 변했구나.”

    목소리가 온화해졌다.

    “참 이상한 아이였지. 바흐도 아마 데우스도 날 찾으려 하거나 스스로 날 닮으려 했거늘. 너만은 네 이야 기만을 해왔어.”

    목소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네가 타인과 함께하다니. 정말 많이 변했구나.”

    그들을 사랑하니까.

    그들과 함께한 시간이 나를 충만히 했으니까.

    “……그래. 애석하게 되었구나.”

    테메스라 주장하는 목소리는 정말 아쉬운 듯 말끝을 흐렸다.

    “너는 이곳에 얼마나 있었지?”

    “글쎄. 잊었단다.”

    “외롭지 않았나?”

    “내가 만들어 놓은 것들을 너희가 어떻게 가지고 노는지 구경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란다.”

    목소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한번 물으마. 네게 남은 시 간은 426일이란다. 설령 돌아간다 해도 얼마 살지 못할 거야. 이상에 닿지 못할 테고.”

    “어쩔 수 없지.”

    고작 1년하고 몇 달밖에 남지 않았다니 아쉽지만 그렇게 정해진 일 이라니 별다른 수가 없다.

    어머니 아버지께 받은 사랑을 반의 반도 돌려드리지 못했거늘.

    도진이가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의지가 돼주고 싶었거늘.

    최지훈이 어디까지 향할지.

    가우왕과 함께 또 어떤 방식으로 날 놀라게 할지.

    차채은이 또 어떤 기특한 글을 쓸지.

    푸르트벵글러보다 먼저 죽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참.

    할아버지께 드린 안마권 아직 쓰지도 못하셨는데 빨리 쓰라고 해야겠다.

    그리고.

    이젠 마음을 전하는 일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어차피 죽는 건 똑같은데 왜 거부 하는 거니?”

    “지금 삶이 소중하니까.”

    “이상한 고집이구나.”

    “이름과 시간조차 잊을 정도로 오 래 살면 작은 일쯤이야 신경도 안 쓰겠지?”

    “그래.”

    “지금의 소중했던 기억과 경험이 내게서 아무런 가치가 없어지게 되는 게 싫다. 배도빈이란 이름으로 행복했고 충실했으니까.”

    “인간으로서의 삶을 마친 뒤의 일 이잖니.”

    “사랑하고 미워하고 다투고 화해하 면서 끝내 함께했기에 좋았지. 감정 표현이 서툴렀던 내게 음악은 교류 의 수단이었을 뿐. 그럴 대상이 없는 세상에서는 의미가 없어.”

    “이상을 모른 채 끝나도?”

    “내가 못 하면 프란츠가 이어가겠지.”

    프란츠 페터라면 할 수 있으리라.

    언젠가는 분명 이 나를 뛰어넘을 것이다.

    푸르트벵글러와 사카모토가 내게 기대했듯이 나 역시 녀석이 언젠가 나를 놀라게 해주리라 믿는다.

    “……그래. 그 아이도 아주 작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 하지만 너만 큼은 아니야.”

    “프란츠가 못하면 또 다른 사람이 나서서 이어가겠지. 음악은 그렇게 발전해 왔어.”

    “내가 바흐와 헨델, 아마데와 하이 든을 통해 음악을 접했듯이. 슈베르 트와 리스트가 날 동경했듯이. 또 이후에 수많은 사람이 끝없이 변화 하고 발전시켜 나갔지. 그들로 인해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고.”

    “내가 떠나면 또 그 뒤를 잇는 사람이 나올 거다. 내가 남긴 곡이 그 바탕이 되는 것으로 충분해.”

    음악은 대화.

    악보는 먼 과거와 현재를 잇는 편지다.

    그러한 음악에 끝이 있을 리 없다.

    사람이 살아가는 한, 인류가 계속해 존재하는 한 끊임없이 발전해 나갈 터.

    정말 만에 하나라도 테메스의 말대로 끝이 있다면 정답을 알고 있는 채 그것을 관찰하는 게 정말 즐거울 까.

    그보다 지루할 수도 없으리라.

    완전하고 싶지 않다.

    그 순간 음악이 내게 가치가 없어지는 걸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런 생각을 하자 테메스가 웃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어쩌면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구나.”

    맞을지도가 아니라 맞다.

    “……내 답이 틀렸다고 증명할 수 있겠니?”

    증명이고 자시고 내 말이 옳다.

    “그 자신감도 좋구나.”

    테메스가 웃었다.

    “그래. 강요할 수는 없지.”

    빛이 더욱 밝아진다.

    “부디 후회하지 않길 바라마.”

    적어도 음악에 있어서는 항상 최선 이었기에 후회할 일은 없다.

    테메스가 웃었다.

    조금씩 의식이 희미해진다.

    테메스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린다.

    “내가 틀렸다는 걸, 그 앞이 있다는 걸 보여주길 기대하마. 이상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야.”

    * * *

    배도빈을 떠나보낸 테메스는 자신 에게 남은 36,741일의 시간 중 절반을 떼 배도빈에게 불어넣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인간에게는 제법 긴 시간일 터.

    그녀는 부쩍 앞당겨진 소멸을 의식하 며 이상 밖이 과연 있을지 고민했다.

    상상.

    그것은 완벽한 존재가 된 후로 잊었던 행위였다.

    ‘글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도 .

    혼자 힘으로 기적을 일으킨 아이에게 괜히 기대를 걸어보고 싶었다.

    * * *

    신은 있었다.

    미칠 듯한 고통에서도 도와주지 않았던, 그래서 원망했던 신이 정말 있었다.

    ‘……일을 나눠줄게.’

    의식을 잃기 전 그녀가 남긴 말을 떠올려 본다.

    아무래도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 듯하다.

    이래서는 나락에서 구원해 주지 않았다고 원망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러다 문뜩.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도빈아!”

    다급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려 버릇 처럼 눈을 뜨자.

    그리운 얼굴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보다 사랑스러울 수 있을까.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거늘.

    그것은 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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