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549화 (549/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549화

    119. Fin(6)

    2027년 10월 27일 베를린.

    베를린 필하모닉 주변이 인파로 북 적였다.

    오늘의 혼잡함을 예상한 베를린시 의 노력에도 미테 전역이 교통마비를 앓을 정도로 베를린 그랑프리는 큰 기대를 받고 있었다.

    시 추산, 10월 20일부터 일주일간 베를린을 방문한 관광객 수는 710 만 명으로 베를린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 버리고 말았다.

    숙박업체는 물론 식당까지 예약이 가득 차버려 일부 팬들은 텐트와 침 낭까지 펼치는 의욕을 보였다.

    가장 큰 문제는 그랑프리를 감상할 공간 부족.

    베를린 필하모닉은 베를린시와 도 이체 오퍼와 같은 주변 악단, 방송 국과 연대하여, 루트비히홀과 빌헬름홀 외에 그랑프리를 감상할 수 있는 자리를 최대한 마련했지만 모든

    관광객을 실내 무대에 들일 수는 없었다.

    카밀라 앤더슨 전무는 급히〈투란 도트〉를 공연하면서 교류가 있었던 헤르타 BSC에게 연락.

    그들의 홈 경기장 올림피아슈타디 온 베를린을 사용할 수 있도록 계약을 체결했다.

    배도빈과 베를린 필하모닉의 노력으로 역대 가장 많은 인파가 몰린 베를린 그랑프리는 가장 많은 관객 이 설비가 갖춰진 공간에서 그랑프 리를 즐길 수 있는 대회가 될 수 있었다.

    관련된 이야기를 보고 받은 배도빈 도 고개를 끄덕이며 카밀라 앤더슨 과 이자벨 멀핀을 치하했다.

    “고생 많았어요.”

    “우리 할 일이잖아.”

    카밀라 앤더슨이 당연하다는 듯 답 했다.

    배도빈은 지난 몇 해간 문제가 생 길 때마다 의지가 되었던 그녀에게 고마울 뿐이었다.

    멀핀도 나섰다.

    “공연 시작 전까지 어떻게든 더 마 련해 보겠습니다. 그러니까.”

    배도빈이 씩 웃었다.

    “공연만 신경 쓰면 되겠네요.”

    “네.”

    배도빈의 말에 멀핀이 고개를 굳게 끄덕였다.

    모든 준비가 완벽했다.

    단원들조차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던 그랜드 심포니는 배도빈이 바랐던 이상적 형태로 완성되었고 그것을 발표할 장소는 그 어떤 무대보다 익숙한 루트비히홀.

    전 세계 음악 팬들이 지켜보고 있을 테니 과연 그랜드 심포니를 연주

    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

    다만 연주를 마쳤을 때 관객들의 표정을 볼 수 없다는 점이 그를 아 쉽게 할 뿐이었다.

    지금은 ‘합창’으로 불리는 아홉 번 째 교향곡을 초연했을 때가 떠오른다.

    생각해 보면 그때와 비슷한 점이 많다.

    그전까지의 곡과 달리 워낙 많은

    악기와 실력자를 필요로 했기에 따 로 오디션을 봐야 했던 그때와 마찬 가지로.

    그랜드 심포니는 총 244개 악기와 세계 최고 수준의 연주자로 구성해 야 했다.

    이만한 편성을 지휘하는 일이 그랜 드 심포니 이후 또 있을까 싶을 정 도로 욕심을 냈지만.

    또 못 할 이유는 무어랴.

    과거 빈에서와는 달리.

    지금 내게는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 이상 알고 지낸 최고 수준의 연주자들이 함께하고 있다.

    그들과 함께라면.

    오늘이 아니라, 그랜드 심포니가 아니라 그보다 더한 일도 분명 가능 하리라.

    그러고 보니 또 비슷한 점이 있다.

    당시에는 청력을 완전히 잃어서 어 쩔 수 없이 보조 지휘자를 둬야 했는데 지금은 눈이 말썽이다.

    그러나 포디움에 홀로 서는 게 어 딜까.

    눈이 보이지 않아도 단원들과 함께 라면 공연을 준비하고, 지휘할 수 있다.

    눈으로만 제대로 연주하는지 확인 해야 했던 때와 비교하면 이 건강하 고 예민한 귀는 또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가.

    비록 악보를 직접 교정할 순 없었지만 지난 20개월간 단원들과 함께 작업해 냈으니 이 또한 문제없다.

    ‘표정을 볼 수 없는 건 아쉽지만.’

    또 관객들의 얼굴은 볼 수 없어도 그들이 보낼 환호와 박수는 들을 수 있지 않은가.

    더욱이 케른트너토어 극장에 한정 되어 있던 그때와 달리 베를린을 넘 어서 온 세상에 우리 연주가 울릴 거라 생각하면 썩 좋은 환경이다.

    이제 보니.

    비슷한 상황이긴 하나 모든 것이 그때에 비해 모든 것이 나아졌다.

    단원들이 함께하고.

    카밀라, 이자벨, 죠엘과 같은 직원 들 덕분에 우리의 노래가 보다 널리 퍼질 수 있으니.

    이 이상 바랄 것은 없다.

    마음껏 노래할 뿐이다.

    “죠엘.”

    “ 네.”

    “문 열어주세요.”

    죠엘이 문을 열기 전에 푸르트벵글러와 사카모토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왔어요?”

    “누군지는 알고 왔냐고 묻느냐?”

    “푸르트벵글러랑 사카모토잖아요.”

    “껄껄. 어찌 발소리로 사람을 구분 하는지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구 만.”

    사카모토가 껄껄 웃었다.

    “사카모토는 조용한 편이라 쉽지 않은데 푸르트벵글러는 워낙 특이해 서 쉽게 알 수 있어요.”

    “내가?”

    “그렇게 신경질적인 발소리는 드물 어요.”

    “이 녀석이?”

    “껄껄껄껄.”

    나도 사카모토도 웃고 말았다.

    죠엘이 눈치껏 자리를 비켜주었고 덕분에 두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몸은 좀 어떤가.”

    “ 최고예요.”

    “••••••그래.”

    사카모토의 질문에 답하자 푸르트벵글러가 그답지 않게 힘없이 반응 했다.

    두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너무나 뻔해서 웃음이 나온다.

    먼저 말을 꺼냈다.

    “베를린 필하모닉이 없었다면 오늘 도 없었을 거예요.”

    진심이다.

    “사카모토를 만나지 않았으면. 푸르트벵글러와 발그레이, 슈타인, 빈 프스키, 리히터, 노이어, 승희 누나 그리고 모두가 없었다면 아마 완성 하지 못했을 거예요.”

    푸르트벵글러가 가만있다가 좋은 점을 지적했다.

    “레몽 녀석은 앞으로도 빼라.”

    “그럴 거예요. 아직 분이 풀리질 않아서요.”

    사과를 받고 밥 한번 먹었다고 풀렸다면 그렇게 고생하지도 않았을 거다.

    “끌끌끌.”

    실없이 웃고 다시금 이야기를 꺼냈다.

    “약속 기억해요?”

    이제껏 세상에 없던 음악을 들려주겠다는 약속을 두 사람이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푸르트벵글러가 콧김을 내쉬며 답 했다.

    “깜짝 놀랄 곡을 들려주겠단 말 말 이냐.”

    “네. 오늘이에요.”

    “자신감은 좋구나.”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 푸르트벵글러와 사카모토가 어 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이 왜 그랜드 심포니를 연주하기 전에 나를 찾았는지 알고 있다.

    “그러니까 기뻐하라고요.”

    “사카모토의 잘못도, 푸르트벵글러 의 잘못도. 내 잘못도 아니에요. 그 냥 사고였어요.”

    두 사람 모두 말을 하진 않았지만.

    사카모토는 내가 당신의 병문안 때 문에 그때의 사고가 났다고 자책해 왔다.

    푸르트벵글러는 내가 시력을 잃은 원인이 피로와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걸 안 뒤로 내게 너무 많은 짐을 넘겼다고 후회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이 내 게 죄책감을 가지는 게 얼마나 불편하고 답답한지 모르는 것이다.

    불구를 딛고 그랜드 심포니를 완성 한 나와 베를린 필하모닉을 생각한 다면 그렇게 여겨선 안 된다.

    “도빈아.”

    “시끄러워요.”

    푸르트벵글러의 말을 잘랐다.

    “얌전히 객석에서 박수나 보내세요. 당신의 베를린 필하모닉이 뭘 연주하는지 듣고 기뻐하면 돼요.”

    “……도빈아.”

    “사카모토도 푸르트벵글러도 원망 한 적 없어요. 두 사람이 없었다면 완성하지 못했을 거라니까요. 이런 상황에서도 잘 해내고 있는 걸 자랑 스럽게 여기진 못할망정 무슨 말을 하려는 거예요.”

    “……허허. 도빈 군 말이 맞네. 빌, 그만하세.”

    푸르트벵글러가 숨을 길게 내쉬고 들이마신 뒤 내 양어깨를 붙들었다.

    “오냐. 얼마나 대단한 걸 만들었길 래 연습실에도 못 들어가게 했는지 들어보마.”

    “놀라서 쓰러지지나 말아요.”

    “이 녀석이 끝까지.”

    “기대하고 있겠네. 멋진 연주를 들려주게나.”

    사카모토와도 악수를 나누었다.

    “그러나 이건 알아주게.”

    사카모토가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새 시대의 음악은 이미 들려주었네. 그런 약속에 구애받지 말고 하 고 싶은 대로 마음껏 노래하게.”

    사카모토에게는 정말 못 당하겠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서자 죠엘이 안으로 들어섰다.

    “보스, 시간 되었습니다.”

    “ 가죠.”

    일어섰다.

    죠엘이 지휘봉을 쥐여주었고 그녀 의 안내를 받아 무대 뒤로 향했다.

    수백, 아니, 수천 번 다녔던 길이 오늘따라 묘하게 정겹다.

    단원들이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가 까워지고 죠엘이 묵중한 문을 열었다.

    수다를 떨던 단원들의 목소리가 잦 아들었다.

    이틀간 푹 쉬고 오늘 아침에 모여 점검을 마쳤기에 이보다 컨디션이 좋을 수 없다.

    준비는 완벽하다.

    “길었습니다.”

    단원들을 향해 말했다.

    “작년 3월부터 우리는 최선을 다했고 여러 한계를 넘어섰습니다. 아무 도 이르지 못한 곳에 도착한 지금. 남은 일은 관객들을 향해 깃발을 흔 드는 것뿐입니다.”

    정말 긴 기다림이었다.

    “오늘 여러분이 연주할 곡은 제가 만들었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배도빈이 10 년간 열과 성을 다해 만든 곡이다.

    “오늘 여러분을 지휘할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저 배도빈입니다.”

    다른 누구에게 넘기지 않고 이 내 가 지휘봉을 잡았다.

    “그리고 바로 여러분이 주인공이 죠. 사이먼, 카라얀, 푸르트벵글러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정상의 자리에서 단 한 번도 내려오지 않은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 베를린 필하모닉이 제가 만든 곡을 제 지휘에 따라 연주합니다.”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우리가 누굽니까.”

    “베를린 필하모닉!”

    마누엘 노이어의 힘찬 대답이 들렸다. 그를 향해 지휘봉을 가리켜 감사를 대신했다.

    “그렇습니다. 최고의 오케스트라 베를린 필하모닉입니다.”

    비록 볼 순 없지만.

    이들이 내뿜는 분위기만으로도 이 들이 얼마나 달아올라 있는지 느낄 수 있다.

    “최고의 연주를 하러 가죠.”

    “좋았어!”

    단원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의지를 다지며 무대로 향했다.

    모든 단원이 무대에 자리했고.

    설레는 가슴을 달래며 발을 옮겼지 만 관객들이 웅성이는 소리에 도저 히 진정할 수 없었다.

    이 고양감.

    공연 직전의 이 흥분에 비할 수 있는 감정은 오직 모든 연주를 마친 뒤의 환희뿐이다.

    두 손으로 옆머리를 쓸어넘기자.

    사회자가 안내를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신사숙녀 여러분. 2027 오케스트라 대전 11차전 베를린 그랑프리로 인사드립니다.”

    관객들의 박수 소리가 가슴을 자극한다.

    “이번 그랑프리 주제는 오리지널. 오늘부터 나홀간 각 악단은 고유의 곡으로 경합을 치르게 됩니다. 우리 에게 또 어떤 감동을 안겨줄지 기대 되는군요. 그러면 첫 번째 오케스트라를 모셔보도록 하죠. 베를린 필하모닉 입니다.”

    “빈! 빈! 빈! 빈!”

    “빈! 빈! 빈! 빈!”

    커튼이 걷히기도 전에 관객들의 함 성이 온몸을 때렸다. 그 자극이 몸을 깨우듯 활력이 샘솟는다.

    마에스트로, 희망, 마왕, 신, 선지자, 구도자.

    정말 많은 수식어가 있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굳어버린 ‘빈’이라는 호 칭이 나를 기쁘게 한다.

    그 어떠한 말도 감히 날 담을 수 없다.

    오직 배도빈이라는 이름만이 대표 할 수 있기에 기특한 백성들의 환호를 기쁘게 받아들인다.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자 익숙한 공기 와 냄새에 안정할 수 있었다.

    적막.

    대화나 부스럭대는 소리도 없다.

    숨 쉬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는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희미하게 빛을 느낄 뿐이다. 외딴곳에 떨어져 홀로 남은 듯한 기분이 이러할까.

    그러나 지휘봉을 보내면 여지없이 그들이 노래하기 시작할 것이다.

    나의 성채, 나의 방패, 나의 피난처.

    나를 완전히 해주었던 그들이 함께 하리라.

    아득한 빛을 아래에서.

    두 팔을 힘차게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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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시휴 써WfJt이— -RAapdodie WH ßeMte江 PAM=lAw

    관악기가 루트비히홀을 가득 채웠다.

    벼락처럼 내리치는 북소리와 함께 절망한다.

    어머니를 잃고.

    형제를 보내고.

    연인과 이별한 채.

    소리마저 상실하고도 포기하지 않았다.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울분을 악보 위로 토해내고 또 토해냈다.

    그러지 않고서는 미칠 것 같았다.

    수없이 실망하고 배신당하면서도 상냥한 로르헨과 정다운 베겔러 그

    리고 석양으로 빛나는 라인강을 그 리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기필코 광명의 시간이 오리라.

    그때가 되면 환희의 노래를 부르리 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러나 삶은 결코 길지 않았다.

    날로 쇠약해지는 비루한 몸뚱어리 마저 창작의 의지를 막아섰고 끝내 완성하지 못한 수많은 기록을 남긴 채.

    억울함을 토로할 수도 없이 눈을 감았다.

    격렬히 움직이는 현악기들이 그때 의 처절함을 그리고 타악기와 관악기가 더욱더 가열차게 억압한다.

    운명에 짓눌린 한 사람은.

    그렇게 끝내 희망을 포기했다.

    모든 것이 끝났다.

    주먹을 쥐자 모든 악기가 침묵했다.

    초.

    지휘봉을 흔드니 찰스 브라움의 파 이어버드가 가장 아름다운 소리로 속삭인다.

    ‘도빈아.’

    이토록 사랑스러운 소리가 또 있을까.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하게 울려 퍼지는 파이어버드 뒤로.

    대금이 신비로운 선율을 깐다.

    플루트와 함께 어울리는 한국의 소 리는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했던 묘 한 매력을 보였고.

    그 사이로 태평소가 돌출한다.

    한국이라는 곳은 이런 곳인가.

    작은 상자에서 알 수 없는 음악가 들의 명연주가 펼쳐지고, 좀 더 큰 상자에 작은 사람들이 들어가 알 수 없는 말을 떠든다.

    그 경이로움이.

    지금 오케스트라와 어울리는 대금

    과 태평소를 접하는 이들의 마음과 다르지 않으리라.

    ‘ 지금.’

    지휘봉을 들어 올리자 소소의 얼후 가 기다렸다는 듯이 치고 나선다.

    부드럽게 울리는 소소의 얼후는 부 모의 손길처럼 오케스트라를 포근히 감싼다.

    애처로운 그 음색이.

    비록 가난하나 상냥했던 어머니를, 다정했던 아버지를, 단칸방에서 행 복했던 우리 가족을 그렸다.

    대위법으로 구성한 대금과 얼후 그 리고 바이올린의 다성 구조가 이토

    록 아름다울 수 있을까.

    절망과 좌절로 시작했던 1악장은 사랑과 행복 속에 마무리되고.

    손을 뻗자 트럼펫이 강렬하게 치고 나선다.

    희망의 서막.

    히무라와 나카무라는 마르고 볼품 없는 사람처럼 보이는 외관과 달리 내가 접한 그 어떤 이보다 강인했다.

    보다 좋은 곡을 만들어 더 많은 사람에게 들려주기 위해.

    팀파니와 큰북의 엇박자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선명히 노래하는 트럼펫처럼 일했다.

    지휘봉을 튕기자.

    최지훈의 피아노가 청명하게 울린다.

    내게 처음 이 시대의 음악을 소개 해 주었던, 친구가 되어주었던 사카모토의 목소리처럼 맑다.

    빠르지도 격렬하지도 않은 선율은 그의 잔잔한 억양처럼 매력적이다.

    가우왕이 나선다.

    두 대의 피아노는 마치 대화하듯 멜로디를 주고받는다.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의 말을 대신하면서.

    건반을 번갈아 누름으로써 하나의 멜로디로 합쳐진다.

    이 부분을 완벽히 수행하기 위해 가우왕과 최지훈이 얼마나 애먹었는 지 떠올리니 나도 모르게 입술이 올 라간다.

    ‘완벽해.’

    비올라와 베이스 그리고 클래식 기 타가 주변을 감싸며 두 피아니스트는 절정으로 향하고.

    곧장 3악장으로 이어진다.

    두 팔을 힘차게 내리자.

    호른과 튜바 유포니움이 다시 한번 힘차게 울린다.

    타악기가 성벽을 쌓아 올리고.

    모든 현악기가 일제히 사열해 화음을 이룬다.

    ‘ 소소.’

    본래라면 이승희가 맡아줘야 했던 첼로 솔로.

    얼후와 함께 준비하느라 그녀의 손 끝이 남아나질 않았기에 다른 악기 로 대체하려 했던 부분이 그녀에 의 해 힘차게 나섰다.

    이승희의 뒤포르는 임시 주인을 만 나 그간 노래하지 못해 참아왔던 갈 증을 폭발시켰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위엄처럼 묵직하고 웅장한 목소리로 다른 악기를 이끌었다.

    첼로 독주 뒤에.

    베를린 필하모닉이 함께 나선다.

    ‘베트호펜을 계승한 자라니.’

    웃음이 나오는 별명이지만 그는 정 말 나와 많은 부분에서 닮았다.

    그 정력적인 열정도.

    광기 어린 집착도.

    고집불통인 성격도.

    무엇보다 감정을 뒤흔들기 위해서는 그 어떤 규칙과 관습도 내다 버릴 수 있는 과감함까지.

    그래서.

    그에게 빠져들었다.

    그와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하며 내가 비로소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확신할 수 있었다.

    푸르트벵글러가 지휘하듯 위엄을 보인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멈추었다.

    이별은 잠시뿐.

    최지훈의 피아노가 나선다.

    솔직하고 티끌 하나의 꾸밈도 없이 진솔한 타건이 마치 건반 위를 뛰노는 천사 같다.

    나의 태양, 나의 빛이 유성우가 되 어 내린다.

    수없이 많은 별이 떨어지면서.

    그 희망의 조각들로 가슴이 따뜻해 진다.

    이번에는 가우왕이 나선다.

    절제라고는 조금도 모르는 폭력적 인 연주가 이어진다. 일말의 망설임 도 없는 거만함은 기어이 한계를 넘 어서고 말았다.

    그의 손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볼 수 없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리라.

    가공할 속도로 건반을 때리는 그의 연주는 타악기라고는 생각할 수 없이 음이 이어진다.

    그러나 기교라면 아주 좋은 호적수 가 있다.

    찰스 브라움이 기세 좋게 치고 나 와 가우왕과 다투기 시작한다.

    같은 멜로디를 번갈아 연주하며.

    누가 더 빠른지, 누가 더 과감한 변형을 시도하는지 겨루듯 앞으로, 앞으로 나선다.

    이 완벽한 하모니를 두고만 볼 순 없다.

    지휘봉을 그어 신호를 보내자.

    모든 악기가 일제히 두 사람을 부 추겼다.

    찰스의 선율에 맞춰 북을 울리고 가우왕의 멜로디에 맞추기 위해 노 이어와 마르코를 비롯한 목관악기 주자들이 안간힘을 쓰고 나선다.

    ‘ 아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순간인가.

    고개를 들자 희미하게 느껴지는 조 명이 마침내 찾아온 광명처럼 나와 나의 사람, 나의 악기, 나의 소리, 나의 선율을 감싼다.

    나는.

    이 순간을 위해 살아왔다고.

    이 순간을 위해 다시 태어났다고.

    이 순간을 이어가기 위해 살겠노라 고 외쳤다.

    상실과 고난의 고통 속에서도 꿋꿋 이 걸어 나가니 이처럼 환희의 순간 이 오지 않았냐고.

    지금 이 순간 나와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를 듣는 사람들에게 말해 주고 싶다.

    포기하지 말라고.

    해낼 수 있다고.

    수없이 반복했던 그다짐의 말이 베를린 필하모닉을 통해, 내 사람들을 통해 분명 전해졌으리라.

    두 팔을 힘차게 들어 올리자.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희열에 몸 이 떨렸다.

    띠링- 띠링-

    ‘시끄럽다.’

    오랜만에 ‘신의 장난’이 이 감격의 순간을 방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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