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548화 (548/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548화

    119. Fin(5)

    베를린 필하모닉 사업본부장 이자 벨 멀핀이 음악교육원 설립 진행 보 고서를 내려놓고 기지개를 켰다.

    “ 끄으으응.”

    긴장되어 있던 근육이 비명을 질러 댔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작년부터 준비한 음악교육원 사업 은 베를린과 파리 두 도시에서 시작 할 예정이었고.

    부지 매입, 건축 설계, 내부 인테 리어, 강사 초빙, 커리큘럼 제작, 홍 보, 후원 모집 등 기본적인 일만으로도 1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기존 업무에 더하여.

    각 부서에 할당한 업무를 확인하고 배도빈에게 보고해야 하는 이자벨 멀핀은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지경 이었다.

    ‘몇 시야?’

    창밖은 이미 어둑어둑했다.

    시계가 오후 8시를 가리키고 있음을 확인한 이자벨 멀핀은 시장함을 느꼈다.

    ‘뭐 좀 먹고 할까.’

    외투를 입고 집무실을 나선 그녀는 복도를 걷다가 희미하게 들리는 오케스트라 소리에 발을 멈추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소리를 따라 대연습실로 향했고.

    연주는 점점 더 선명해졌다.

    힘차고 경쾌한 선율이 마치 힘을 주는 듯 뻐근했던 몸이 개운해졌다.

    ‘좋다.’

    좀 더 듣고 싶은 묘한 이끌림에 이끌린 멀핀은 조심스레 대연습실 문을 열었다.

    ‘ 아.’

    배도빈의 지휘에 맞춰 베를린 필하모닉의 전 연주자가 각자의 악기를 다루고 있었다.

    베를린 그랑프리를 맞이해.

    그들의 오랜 염원이었던 그랜드 심 포니를 연주하고자 모든 단원이 땀 흘리고 있었다.

    ‘오전부터 계속한 거야?’

    이자벨 멀핀은 벌써 며칠째 반복되

    는 고강도 연습에 단원들, 특히 배도빈이 걱정되었다.

    그러나 땀을 거듭 닦으면서도 그들 입가에 은근히 어린 미소를 본 순간 말릴 수 없었다.

    저들이 얼마나 음악을 사랑하는지.

    표정과 연주로 고스란히 전해졌기 에 멀핀은 소리 내지 않고 조용히 그 자리에 서서 그랜드 심포니를 감 상했다.

    전과 달리 연주가 끊어지는 일은 없었다.

    한 마디가 끝나기 무섭게 여러 지 시를 내리고 수정하던 때와 다르게 배도빈은 지휘봉을 내리지 않았다. 연주가 잘 되고 있다는 뜻이었고. 음악을 잘 모르는 이자벨 멀핀이 듣기에도 그랜드 심포니는 가슴을 뜨겁게 하는 알 수 없는 힘을 전해 주는 것 같았다.

    ‘언제 들어도 좋다니까.’

    살짝 눈을 뜬 멀핀의 시야에 배도빈이 들어왔다.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지휘봉을 휘두르는 그는 이미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앉아서 해도 될 터인데.

    무슨 고집인지 그는 지휘할 때면 항상 지휘대에 올라섰다.

    긴 연습 시간을 고려하면 그것만으로도 체력에 부담이 될 텐데 그는 굳이 서서 지휘했다.

    그래야 실제 무대에 섰을 때와 같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했다.

    위치에 따라 소리에 변화가 있는 건 알고 있지만 단상에 섰을 때와 앉아 있을 때의 차이마저 느낄 수 있는 건가 하는 의문도 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보스가 고집을 꺾지 않기에 단원들은 더욱 집중해 조금 이라도 빨리, 완벽히 연습을 끝내고자 했다.

    멀핀은 그것은 분명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들 열심히네.’

    그녀는 천천히 다른 연주자들도 살 폈다.

    술자리에서는 그렇게 요란하게 구는 피셔 디스카우가 두 눈을 부릅뜨 고 팀파니를 내려쳤고.

    마누엘 노이어는 이제 완전히 벗겨 진 머리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웃음이 많은 진 마르코는 그 어떤 때보다 진지했다.

    처음 인사를 나눌 때만 해도 돈 많은 마피아처럼 껄렁대던 가우왕은 역사상 가장 뛰어난 피아니스트로 손꼽히면서도 단원 중 가장 충실히 연습에 임했다.

    항상 달콤한 미소를 짓고 있어 단 원들 사이에서 슈제슈(Süßes: 달콤한) 로 불리는 최지훈은 피아노 앞에 앉기만 하면 차갑고 냉철한 표정을 보였다.

    몸을 움직이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왕소소는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연주했고.

    소심하고 명석한 나윤희는 블러드 와인으로 그 어떤 바이올린보다 크 고 우렁차게 노래했다.

    평소 느끼하고 다소 고지식하게 느껴졌던 찰스 브라움은 파이어버드만 쥐면 그보다 세련될 수 없었다.

    사나운 인상으로 많은 오해를 받았던 나카무라 료코는 본인이 저렇게 예쁜 미소를 지을 수 있는지 모를 거라 생각했다.

    ‘ 멋있다.’

    이자멜 멀핀은 단원들을 눈과 가슴에 담으며 이 모습을 촬영하지 못하는 걸 아쉽게 여겼다.

    그리고 문득 고개를 돌리자 한쪽 구석에서 앉아 있는 죠엘 웨인과 눈을 마주쳤다.

    죠엘이 싱긋 웃어 보였고 이자벨 멀핀은 그녀 역시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들을 서포트할 수 있어서 자랑스 럽 다고.

    함께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이들의 음악을 보다 많은 사람에게 들려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 *

    2027년 10월 25일.

    베를린 그랑프리를 이틀 앞둔 시점 에도 베를린 필하모닉은 연습에 매 진했다.

    일주일간 정기 연주회를 포함한 모든 일정을 비워두고 오직 그랜드 심 포니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에만 악 단의 전력을 기울였다.

    배도빈이 그간의 기량을 모두 쏟아 부어 작곡한 그랜드 심포니는 2026 년 3월부터 2027년 10월까지 약 20개월간 베를린 필하모닉에 의해 완성되었다.

    내로라하는 연주자들이 포진하고 있는 베를린 필하모닉으로서도 그 과정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앞을 볼 수 없는 배도빈이 지시할 수 있는 영역은 제한되었고.

    그의 지시를 이해하기 위해 단원들 은 개인 악보 대신 총보를 상대해야 했다.

    244개의 악기가 유기적으로 연결 되어 있는 대교향곡이었기에.

    단원들이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길 바랐던 배도빈은 동시에 연주되는 다른 악기와 비교하며 지시를 내렸다.

    덕분에 총보를 보는 데 익숙하지 않던 단원들은 배도빈의 주문을 좇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차했다.

    그러나 그렇게 겨우 악보를 수정하 고 이해하는 과정을 어찌 해결한 뒤 에도 큰 벽이 남아 있었다.

    기존의 구조에서 상당 부분이 변형 되어 있고 특히 몇몇 주요 악기는 연주하기 실로 난해했다.

    세계 정상급 연주자인 그들로서도 이것이 과연 실제로 연주가 가능한 지 의심했고.

    개인 연습 시간은 그 어떤 곡을 준비할 때보다도 오래 걸렸다.

    ‘할 수 있어요.’

    그러나 배도빈은 그들이 끝내 해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50년 뒤의 피아니스트를 위해 만 들었던 하머클라비어 소나타도.

    당시로서는 결코 제대로 연주할 수 없었던 아홉 번째 교향곡 ‘합창’도 그의 예상보다 훨씬 빠른 시간 안에 소화한 사람이 나타났었다.

    단원들과 함께하기를 몇 년.

    배도빈은 이들과 함께라면 분명 이 새로운 시대의 음악을 완성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여러분은 반드시 해낼 수 있습니다. 아니, 여러분이 아니면 해낼 수 없는 일이에요.’

    그의 굳은 의지와 신뢰가 단원들을 독려했다.

    배도빈을 향한 단원들의 믿음이 한 때나마 발표 시기를 미룰까 고민했던 배도빈에게 힘이 되어주었다.

    단 하나의 곡을 소화하기 위해 무 려 20개월이란 시간이 소요되었으나 그 결과.

    그들은 결국 성공하고야 말았다.

    그랜드 심포니의 마지막 음이 흩어 지고.

    “좋았어.”

    배도빈이 주먹을 꽉 쥐었다.

    “꺄아아아아!”

    “그렇지!”

    “흐헣헉헝헙. 꾸으윽.”

    244명의 단원들이 비명 같은 환호를 내질렀다.

    그들 모두 유치원 때부터 천재 소 리를 들어왔었다.

    초등교육과 중등교육 과정을 거칠 때에도 그들은 각 지역에서, 또래에 서 최고의 유망주였고 대학에서도, 국제무대에서도 우승 두어 번 해보

    지 않은 사람이 없는 베를린 필하모닉이었다.

    심지어 프로 연주자가 된 뒤에도 그들 각각은 최정상급의 인재로 인 정받고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배도빈의 엄격한 기준에 의해 입단할 수 있었다.

    고난과 시련은 말할 것도 없었지만 그 모든 과정에서 끝끝내 성공했던 그들에게도.

    그랜드 심포니는 생전 처음 겪어보는 한계였다.

    연습을 거듭할수록 나아질 수 없다는 생각만 가득해지고 겨우 하나를 체득하면 그보다 어려운 구절이 찾아왔다.

    포기하고 싶었지만.

    그만둬야 할 이유는 그뿐이었다.

    해내야 하는 이유는 태산처럼 많았기에 지금 이렇게 해내고야 말았다.

    함성을 지르는 사람도.

    그간의 마음고생에 우는 사람도.

    기뻐서 동료와 어깨동무를 하고 몸을 들썩이는 사람도 있었다.

    배도빈이 손뼉을 쳤다.

    “모두 수고했습니다.”

    저마다의 기쁨을 표현하던 단원 모 두 그들의 지휘자가 하는 말에 집중 했다.

    “내일은 개인 정비 시간을 가지도 록 하겠습니다. 그간 쌓였던 피로를 덜고 모레 다시 보죠.”

    “예, 보스!”

    단원들이 한목소리로 힘차게 답했다.

    배도빈이 씩 하고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죠엘.”

    “ 네.”

    배도빈의 부름에 죠엘이 앞으로 나서자 단원들은 무슨 일인지 아냐고 묻는 듯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죠엘 웨인이 안내를 시작했다.

    “보스께서 여러분이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일정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퇴근 준비를 마치시고 로비 로 향하시면 기사들이 여러분을 각 차량으로 안내해 드릴 겁니다. 베를린 시내 다섯 곳의 레스토랑 중 원 하시는 곳에서 식사를 하시고 이후 아들론 호텔로 이동하셔서 오늘과 내일 2박을 지내시게 됩니다.”

    죠엘이 호텔 내부에서 스파와 마사 지를 받을 수 있음을 덧붙였다.

    “원치 않으신 분은 언제든지 귀가 가능하니 부담 없이 즐기라고 하셨습니다. 추가적인 안내는 2박 3일간 각 기사에게 문의하실 수 있습니다. 이상입니다.”

    죠엘 웨인이 설명을 마쳤음에도 단 원들은 눈만 끔뻑거릴 뿐 별다른 반 응이 없었다.

    “무슨 말이야?”

    “아들론이면 운터덴린덴에 있는 호텔 말하는 거야?”

    “왜?”

    다들 의아해하고 있을 때 가우왕이 먼저 나섰다.

    “모레 보자.”

    “그래요.”

    배도빈과 인사를 나눈 가우왕이 기 지개를 켜며 나서자 단원들도 일단 악기를 챙기고 그를 따라나섰다.

    그리고 퇴근 준비를 마치고 로비에 이르렀을 때, 영화에서나 보던 광경을 접하곤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턱시도 차림을 한 수십 명의 남성 이 줄지어 단원들의 짐을 들어 차량으로 이동했다.

    어리둥절하며 기사를 따라간 단원 들은 베를린 필하모닉 주차장을 가 득 메운 리무진을 보곤 깜짝 놀랐다.

    “뭐야 이거?”

    “히야. 여기 위스키도 있는데? 이 거 마셔도 되나요?”

    “무엇이든 사용 가능하십니다.”

    차량 안에 들어선 단원들은 가로로 길게 이어진 소파에 앉아 냉장고를 뒤지거나 준비된 과일을 먹거나 TV를 틀거나 차량 내부를 구경하기 바 빴다.

    “어디로 모실까요?”

    기사의 질문에 어느 곳에 예약이 되어 있냐고 되물은 단원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곳도 있었지만 독일의 스타 셰프 토마스 뷰너가 운 영하는 레스토랑에 갈 수 있단 말에 너도나도 그곳으로 향했다.

    가격이 가려진 메뉴판을 받은 그들 은 원 없이 주문해 식사를 즐겼고 포만감 속에 유럽에서도 저명한 아 들론 호텔로 향했다.

    “이게 대체 뭔 호사냐.”

    “난 우리 보스가 좋아. 이래서 좋은 게 아니라 원래 좋았어.”

    “난 더 좋아졌어.”

    로비에 들어선 단원들은 코끼리 여 럿이 조각되어 있는 기둥을 신기해했지만 애써 관심 없는 척 구경했고.

    특실에 들어서는 옅은 베이지색과 짙은 고동색의 투톤으로 인테리어 된 고풍스러운 내관에 입을 떡 벌렸다.

    “……내일 스파랑 마사지 받을 수 있다고 했지.”

    "응."

    “나 열심히 할 거야.”

    “ 나도.”

    생전 처음 경험하는 것에 사진을 찍고 주변인들에게 자랑하기 바빴던 단원들은 모두 10시도 되기 전에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청결한 침구의 녹아들 것만 같은 감촉에 지친 몸이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