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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546화 (546/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546화

    119. Fin(3)

    점심을 먹고 나선 배도빈은 죠엘의 안내를 받아 미팅실로 향했다.

    파울 리히터가 무슨 일로 찾아왔는 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점심을 함께하 며 이야기 나누는 편이 좋지 않았을 까 생각하는 도중 푸르트벵글러의 고함이 복도까지 울렸다.

    “닥치지 못해!”

    배도빈이 눈썹을 좁혔다.

    파울 리히터가 무슨 말을 했기에 푸르트벵글러의 분노를 샀는지 알 수 있었고 더군다나 그런 일이 무엇 인지 가늠도 되질 않았다.

    그러나 이내 배도빈은 푸르트벵글러의 노성이 누구를 향했는지 알 수 있었다.

    “욕심에 눈이 멀었습니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니아 발그레이가 은퇴하면서 베를린 필하모닉이 케르바 슈타인, 헨리

    빈프스키, 파울 리히터와 함께 가장 의지했던 사람이었고.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가장 아꼈 던 레몽 도네크였다.

    ‘파울이 데려온 건가.’

    배도빈은 파울 리히터가 오늘 만남 에 대해 자세히 말하지 않았던 이유를 납득하며 분을 삼켰다.

    푸르트벵글러가 배도빈과 베를린 필하모닉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용서를 구하는 레몽 도네크를 질타했다.

    “그래. 미치지 않고서야 네가 내게, 단원들에게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지. 더 할 말도 들을 말도 없다. 썩 꺼져!”

    “선생님.”

    파울 리히터가 푸르트벵글러를 붙잡았지만 소용없었다.

    “네놈도 이딴 일로 오려거든 연락 하지 마라.”

    푸르트벵글러는 완고했다. 고개를 돌려 배도빈을 보고선 겨우 언성을 낮추었다.

    “도빈이 너도 이런 일로 신경 쓸 필요 없어. 가서 일 봐라.”

    배도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푸르트벵글러처럼 드러내진 않았지 만 그 역시 큰 배신감을 느꼈던 탓 에 레몽 도네크와 대화할 생각은 추 호도 없었다.

    막 죠엘에게 돌아가자고 하려던 차.

    “도빈아.”

    레몽 도네크가 그를 붙잡았다.

    “……미안하다.”

    분명 상대하지 않으려 했거늘.

    그 한 마디가 애써 감추었던 상처를 건드렸다.

    “이제 와서?”

    배도빈이 돌아섰다.

    “뭘 잘못한지 알기나 해요? 내가, 단원들이, 푸르트벵글러가 어떤 심 정이었는지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해 봤어요?”

    “5년이나 지나서 갑자기 뭐라고요? 욕심에 눈이 멀어? 내가 언제 그러지 말라 했어!”

    “도빈아.”

    파울 리히터가 진정시키려 했으나 배도빈은 아랑곳하지 않고 5년간 참 아왔던 감췄던 마음을 쏟아냈다.

    “한 마디만!”

    그를 아끼고 사랑했던 만큼 상처가 깊었다.

    “단 한 마디만 했어도 이렇게 되지 않았어. 지휘하고 싶다고! 다른 방식으로 녹음해 보자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배도빈은 당시의 일을 두고 매일 밤 고뇌했다.

    그가 지휘봉을 잡고 싶어 했고 그만의 음악 스타일이 있다는 건 후에 알게 되었다.

    배도빈의 의문은 그가 왜 자신의 ‘욕심’을 감췄던 것에 있었다.

    견습이나 평단원도 아니었다.

    악장으로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제자로서.

    모든 단원에게 지지를 받으며 강력 한 발언권이 있던 그가 왜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는지.

    고민을 거듭할수록 답은 하나뿐이었다.

    “내가 당신 무시할까 봐? 내가! 내가 당신을? 당신한테 내가 그것밖에 안 되는 인간이었어? 그랬냐고!”

    “보스, 일단 진정하시고.”

    배도빈이 심한 신체적•정신적 스트 레스로 실명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었기에 죠엘은 안절부절못했다.

    어떻게든 일단 진정시켜야 한다 생 각해 그를 붙잡았지만 긴 시간 억눌 려 있던 분이 쉽게 가라앉을 리 없었다.

    “욕심에 눈이 멀어? 내가 언제 부 리지 말라 했어? 지휘 해보고 싶다 고, 공연 다르게 가보자고 한 마디만 했어도 다 해줬을 거야.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다 해줬을 거라고!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으니 까!”

    배도빈의 외침에.

    푸르트벵글러가 쓰러지듯 의자에 앉아 눈을 가렸다.

    “왜 사람을 병신으로 만들어! 내가 자리에 미쳐서 당신 내쫓았을 것 같아? 내가 당신에게 밀릴까 봐 견제 했을 것 같아? 웃기지 마!”

    푸르트벵글러와 파울 리히터, 죠엘 웨인 모두 배도빈이 그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한 배신감이 아니었다.

    어쩌면 배도빈은 자신의 평소 언행 이 레몽 도네크를 몰아붙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가 말도 없이 떠난 거라 자책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들의 예상대로.

    배도빈은 지난 5년간 그런 생각으로 자신을 자책하기도 부정하기도 했었다.

    “내가……. 내가 당신을 얼마나 의 지했는데.”

    배도빈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고 그저 침묵만이 자리하길 얼마간.

    레몽 도네크가 입을 뗐다.

    “……무서웠어.”

    그는 자신에게 솔직했다.

    “너무 대단하니까. 선생님이 널 선 택하셨으니까. 내가 틀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도망쳤던 거야. 그래서 보 지 않으려 했고 듣지 않으려 했어. 그러다.”

    레몽 도네크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단원들 덕분에 계속해 음악을 할 수 있었다는 말을 듣고 나 서야. 그러고 나서야…….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게 되었어. 미안 하다. 정말. 정말……. 고맙다.”

    배도빈의 인터뷰를 듣고.

    베를린 필하모닉에 있었던 30년 동안 단원들과 무엇을 했는지, 어떤 말을 나눴는지 떠올릴 수 있었다.

    실패한 자신을 보호하고자 런던 심 포니 단원들이 이사진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알 수 있었다.

    전통이든 변화든 무엇을 연주하든 함께하는 사람이 중요했음을 깨달았다.

    아집 때문에 잊고 있던 가치를 되 찾은 그는 진심으로 배도빈에게 감사했다.

    푸르트벵글러가 결국 눈물을 흘렸다.

    다른 말을 꺼냈다면 당장 내쫓을 터였으나 그들이 얼마나 서로를 소중히 했는지 깨달았다며 용서를 구 하고 있었다.

    아둔하기 짝이 없는 제자였지만 사 랑했기에 냉담하고 단호히 대하려던 마음이 녹기 시작했다.

    배도빈의 마음도 조금은 누그러들었다.

    배도빈은 믿고 의지했던 레몽 도네크가 실은 자신을 미워하고 시기하 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두려웠다.

    인터플레이에 동조하거나 자신의 음악이 옳다고 주장하는 등 그가 했던 여러 일들보다 그것이 가장 두려웠다.

    그것이 아니었다고.

    자신에게도 소중했다고 잠시 잊고 있었다고 말하는 레몽 도네크를 더 이상 책망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5년의 시간이 너무나 길 뿐이었다.

    “……죠엘, 가죠.”

    “아, 네.”

    파울 리히터가 나서서 배도빈을 잡 으려 했지만 레몽 도네크가 그를 붙잡았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이것으로 되었다고, 용서를 바란 일이 아니었다고

    전했고 파울 리히터는 안타까운 마 음으로 한 발 물러났다.

    죠엘 웨인이 문을 열자.

    배도빈이 입을 열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단원들에 게도 똑바로 전해요.”

    “그래야지.”

    레몽 도네크의 대답에 배도빈이 이를 앙다물었다.

    너무나 긴 시간 상처 입었기에 결코 쉽게 용서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전과 같이 힘들지는 않았다.

    “……다음에는 좀 더 일찍 와요. 밥이나 먹게.”

    놀란 레몽 도네크가 잠시 대답하지 못했고 이내 웃었다.

    “그럴게.”

    배도진의 졸업 파티장으로 향하던 중 죠엘 웨인은 배도빈의 눈치를 보았다.

    미디어를 통해 본 배도빈은 항상 인상을 쓰고 있어 시니컬해 보였지 만 베를린 필하모닉에 입사한 뒤 그가 생각보다 정이 많고 자주 웃는 걸 봐왔기에 조금 전과 같은 모습에 놀란 그녀였다.

    한편 배도빈이 심심하지 않도록 오늘은 어떤 뉴스가 보도되었는지, 악 단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시시콜 콜한 이야기를 들려주던 죠엘이 말 이 없자 배도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

    “놀랐죠.”

    “아, 아뇨. 네.”

    당황한 탓에 죠엘이 부정했다가 금세 말을 바꾸었다.

    배도빈이 피식 웃었다.

    그의 미소에 죠엘이 조심스레 용기를 내 물었다.

    “되게 친하셨던 모양이에요.”

    “보스가 그렇게까지 화내실 정도였으니까. 저는 그때 없어서 잘 모르지 만 보스가 그분을 얼마나 아끼셨는 지는 알 것 같았어요. 세프도.”

    배도빈은 굳이 답하지 않았다.

    “부, 분명 노력하면 전처럼 지낼 수 있을 거예요. 쉽진 않겠지만 시간이 약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죠엘의 어설픈 위로를 믿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은 확신할 수 없었다.

    “푸르트벵글러……

    배도빈이 말끝을 흐리다 이내 물었다.

    “ 어땠어요?”

    “얼굴을 가리고 계셔서 잘 모르겠어요. 조금 지쳐 보이셨어요.”

    배도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받았던 상처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아팠을 푸르트벵글러가 부 디 마음을 추스르길 바랄 뿐이었다.

    잠시 뒤.

    “도착했어요. 잠시만요.”

    파티장에 도착한 배도빈은 죠엘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섰다.

    졸업생과 그 가족들로 가득한 파티 장의 이목이 배도빈에게 쏠렸다.

    “와, 대박.”

    “배도빈이잖아.”

    “도진이 때문에 온 모양인데.”

    “언제 저렇게 컸지?”

    “인사할 수 있나?”

    대부분이 배도빈이 활동하면서 클래식을 즐기게 된 터라 그를 향한 관심은 당연했다.

    그러나 그가 시력을 잃고 갑작스럽 게 달려드는 팬들에게 행동을 지양 해 달라 하기도 했고.

    그에 대한 예의로 많은 이가 멀리 서 바라볼 뿐이었다.

    배영준 유진희 부부가 아들을 찾았다.

    “도빈아. 여기야.”

    “고마워요, 죠엘 씨.”

    “별말씀을요.”

    배도빈이 죠엘이 빼준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도진이는요?”

    “화장실. 어머, 도빈아. 울었어? 눈이 왜 이래? 부었잖아.”

    유진희가 아들의 양볼을 붙잡고 이리저리 살폈고 배도빈은 저항도 못 한 채 여기저기 살펴졌다.

    “아니라니까요. 물 좀 주세요.”

    유진희가 물잔을 쥐여주며 걱정스레 말했다.

    “도빈아, 힘든 일 있으면 엄마한테는 말해도 돼.”

    “힘든 일 없어요. 그리고 제 나이가 몇인데 그래요.”

    “네가 100살을 먹어도 엄마 아들이야.”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와의 대화에서 한 번도 이긴 적 없는 배도빈은 이번에도 어머니의 말에 납득하며 목을 축였다.

    “근데 도빈아, 윤희랑은 언제부터 만난 거야?”

    “ 컵.”

    당황한 배도빈이 사레가 들려 헛기 침을 해댔다.

    “뭘 그렇게 놀라. 솔직히 아빤 한시름 놓았다.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엄 마랑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거든.”

    간신히 진정한 배도빈이 입 주변을 닦으며 물었다.

    “ 뭘요?”

    유진희와 배영준은 사실 건장한 아 들이 한 번도 여자친구를 만난 적 없기에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마음 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매일 밤 최지훈과 두 시간씩 통화 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언젠가 두 사람이 사귀고 있다고 말할 때.

    남들은 모두 욕할지라도 적어도 부 모로서 힘이 되어줘야 한다고 생각 했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배영준 유진희 부부에게 아들의 열애설이 반갑지 않을 리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만났는데?”

    “그런 사이 아니에요.”

    “아니야? 정말? 왜?”

    “왜긴 뭐가 왜예요.”

    “그럼 지훈이랑 사귀니?”

    “거기서 왜 지훈이 이야기가 나와요!”

    배도빈이 펄쩍 뛰었다.

    죠엘 웨인은 오늘 보스의 새로운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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