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545화
119. Fin(2)
한편.
배도빈의 인터뷰를 지켜보던 레몽 도네크는 씁쓸히 웃었다.
‘그랬던 거였어.’
하늘이 내려준 재능.
배도빈을 설명할 수 있는 다른 말은 없었다.
만 3세부터 곡을 쓰고 20년 가까 이 활동하면서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었던 배도빈의 재능을, 함께했던 레몽 도네크가 모를 리 없었다.
도리어 그 특출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하길 포기했었다.
그것은 마치 스승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를 대할 때의 기분과 같았다.
독선적이고 독보적인 천재.
레몽 도네크는 그를 설득할 자신도 넘어설 자신도 없었다.
배도빈과 스승이 변화에 매몰되어 전통의 가치를 가볍게 여긴다고 생 각하면서도 당당히 나서지 못했다.
상임 지휘자 자리를 두고 경쟁하거 나 배도빈을 설득하는 대신 베를린 필하모닉을 떠나기로 했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이룬 위대 한 세계관을 이어나가겠다고 스스로를 포장했지만.
레몽 도네크는 자신이 그저 두려웠 던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말로.
믿고 있었던 모든 불화의 원인이 자신의 편협한 사고 때문이라는 걸 절감했다.
너무나 뛰어났기에 상대가 될 수 없다고, 무시당할 거라고 생각했던 레몽 도네크는 단원들로 인해 자신 이 완전해질 수 있었다고 말하는 배도빈을 보며 탄식했다.
자신이 살아온 날의 절반도 살지 않은 아이가 스스로의 재능을 앞세 우기 전에 단원들과의 호흡이 중요 했다고 밝혔다.
그들과 함께함으로써 그렇게 뛰어 난 곡을 쓸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것은 레몽 도네크에게는 큰 충격 이었다.
지난 오케스트라 대전에서의 설전, 파울 리히터의 훈계와 더불어 깨달 음과 죄책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어쩌면.’
레몽 도네크는 생각했다.
‘……아니. 아마도.’
생각을 거듭하여 애써 부정했던 혹 은 직시하지 않으려 했던 사실을 마주했다.
스승과 배도빈의 초기 음악은 빈 고전파의 느낌이 강했다.
당대에 그 두 사람보다 바흐와 모 차르트, 하이든, 베토벤을 깊이 이해하는 음악가는 없었고 레몽 도네크 도 그때의 두 사람에게 매료되었다.
그런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배도빈이 전통의 가치를 경시할 리 없었다.
수많은 천재가 오랜 시간에 걸쳐 남긴 위대한 유산을 그토록 잘 이해 하면서 그 가치를 모를 리 없었다.
단지.
배도빈은 음악이, 공연이 타인과 함께하기에 매번 변화를 주었던 것이었다.
연주하는 사람.
듣는 사람.
단원들을 언급하며 배도빈은 분명 히 말하고 있었다.
음악은 함께하는 거라고.
음악은 독보적인 천재가 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와 대화 속에서 진정한 음악이 나오는 거라고 말하 고 있었다.
때문에 연주자의 기량을 최고로 끌어낼 수 있는 곡을 쓰고 관객들이 듣고 싶은 악상을 펼치고 그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한 번의 공연이 하나의 곡이 가진 가치는 그 무엇과도 비교 할 수 없고.
그것이 변화를 추구해야 하는 이유였다.
‘내가. 어리석었다.’
쉬운 음악이라고 싫었다.
점잖지 못한 음악이라고 싫었다.
그것이 독선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쉬운 음악은 소통이 원활하단 뜻이었고 점잖지 못한 음악은 형식적이 지 않다는 뜻이었다.
레몽 도네크는 비로소 스승과 배도빈을 이해했다.
그러나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더욱이 음악가로서의 자신도 잃고 말았다.
그랑프리 5위.
충분히 높은 성적이었지만 이번 그 랑프리에서 3위 안에 들어야 하는 이사진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이 상 지휘봉을 내려놓아야 했다.
‘멍청한 녀석.’
스승과 동료들을 배신하면서까지 얻었던 자리를 끝내 지키지 못했고, 끝내 자신이 틀렸음을 자각한 레몽 도네크는 자신을 비웃었다.
그때 대기실 문이 열렸다.
“감독님, 왜 여기 계세요. 다들 기 다리고 있어요.”
레몽 도네크를 찾은 런던 심포니의 단원이 밝은 표정으로 다가왔다.
클리블랜드 그랑프리를 제외하고 줄곧 하위권에 머물렀던 런던 심포 니에게 이번 순위는 무척 고무적이었다.
레몽 도네크의 상황을 모르는 단원은 굳이 그를 단원들이 모인 곳으로 끌고 갔다.
“감독님 오셨어요!”
“하하! 표정이 안 좋으신데? 5위라 고요. 5위!”
“맞아. 아직 늦지 않았어요. 다음 그랑프리 잘 준비하면 종합 6위 안 에 드는 것도 꿈은 아닐 거예요.”
단원들의 해맑은 표정을 본 레몽 도네크는 이제 함께할 수 없음을 말 할 수 없었다.
항상 친근하고 부드러웠던 레몽 도네크의 반응에 단원들이 잠시 서로 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다 한 사람이 나섰다.
“오늘 공연 준비하는 거 정말 재밌었어요.”
레몽 도네크가 고개를 들자 단원들 이 그를 보며 웃었다.
“연주하기 얼마나 편했는데요. 연 습할 때부터 느꼈지만 감독님이 우 릴 얼마나 생각하며 편곡을 했을까 싶었어요. 다음에는 꼭 더 잘될 거 예요.”
“레이첼 말이 맞습니다. 이제 겨우 합이 맞아가는 것 같은데 그랑프리 우승도 시간문제 아니겠습니까?”
“그래. 저기 베를린의 괴물이 말한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이해하고 있잖아요. 다음엔 지지 않도록 하죠. 그럼 되잖아요.”
그저.
마지막 공연이 될 수 있었기에.
런던 심포니의 단원들이 얼마나 뛰 어난 연주자인지 알리기 위한 편곡 이었을 뿐이었다.
그들이 자신의 기량을 뽐낼 수 있도록 한 단순한 변덕일 뿐이었다.
그러나 단원들이 그것을 알아준 순 간 그것이 배도빈과 다르지 않았음을 깨달았고.
이 순간에도 자신을 믿고 따라주는 단원들에게 또 한 번 과거와 같은 실수를, 떠난다는 말조차 하지 않는 실수를 반복할 수 없었다.
“……미안하다.”
레몽 도네크가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홀륭한 연주자들을 두고 성 적을 내지 못한 자신의 부족함과 그 들의 마음이 저버릴 뻔한 일에 대한 후회였다.
그리고.
비로소 그는 영문도 모른 채 자신을 떠나보내야만 했던 베를린 필하모닉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레몽 도네크는 엎드려 흐느꼈다.
런던 그랑프리가 종료되고 사흘 뒤.
베를린 필하모닉은 이틀간 휴가를 가지며 긴장했던 몸과 마음을 충분 히 쉬게 했다.
배도빈과 그의 비서 죠엘 웨인도 마찬가지였다.
“보스!”
배도빈이 저택을 나서자 마중을 나 온 죠엘 웨인이 그를 힘차게 불렀다.
평소보다 한껏 높고 발랄한 목소리
에 배도빈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목소리가 좋네요. 좋은 일 있어요?”
“ 네.”
죠엘이 웃으며 대답했다.
런던에서의 꿈 같은 일이 그녀의 삶을 완전히 바꾸었음을 모르는 배도빈으로서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 롭지 않게 여겼다.
“형, 잊으면 안 돼.”
잠옷 차림으로 베개를 끌어안고 배 웅 나온 배도진이 눈을 비비며 말했다.
“그래. 이따 봐.”
“웅.”
리무진에 탑승한 배도빈이 죠엘에 게 스케줄 추가를 지시했다.
“오늘 오후 3시에 1시간 정도 자 리를 비울 거예요. 다른 예정 없죠?”
“점심 뒤에 하나 있었던 걸로 기억 하는데, 확인해 보겠습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죠엘이 스케줄러를 꺼내며 물었다.
“도진이 졸업 파티하는데 와달라 해서요.”
“어머.”
죠엘이 깜짝 놀랐다.
배도진이 천재라고 불린다지만 이 제 겨우 만 10세였다.
더군다나 분자생물학과로 전과한 지 겨우 3년이 흘렀을 뿐인데 졸업 파티를 한다고 하니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 벌써요?”
“그러니까요. 대단하죠?”
자신보다 1년 늦게 입학한 동생이 이례적인 속도로 졸업하니 배도빈은 그저 자랑스러울 뿐이었다.
“그럼요. 평균으로 따져도 5년은
걸릴 텐데 정말 대단한 거예요.”
“뭔지는 몰라도 특례가 있었대요.”
“특례라면?”
“들어도 잘 모르겠던데.”
배도빈이 배도진이 쫑알쫑알 했던 말을 떠올렸다.
“피나스테리드라고 기존 탈모 치료 제에 사용되던 게 말이 많았나 봐요. 그거 말고 다른 걸 발견한 모양 인데 그냥 머리 나게 해주는 약이에요.”
“네?”
죠엘의 큰소리에 배도빈이 움찔했다.
“저, 정말이세요?”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배도빈은 별 감홍 없이 말했지만 죠엘은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 지 알고 있었다.
만약 배도진이 정말 탈모에 특효를 보이는 치료제를 만들었다면 형 배도빈 못지않은 일을 해낸 것이었다.
“임상 시험은요? 부작용은요?”
배도빈이 모른다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형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 동생은 탈모 치료제를 발명한 학자
라니 믿을 수 없었다.
“죠엘, 스케줄.”
“아, 죄송합니다. 정오에 파울 리히 터 씨께서 미팅 요청을 하셨어요. 세프도 함께요.”
“파울이? 무슨 일로요?”
파울 리히터라면 언제든 환영이었지만 연락도 없이 찾아오는 경우는 없었기에 되물었다.
“중요한 일이라고만 하셔서.”
배도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한 이유는 없었지만 파울이라 면 이유가 없더라도 반갑게 맞이할
생각이었다.
잠시 후.
베를린 필하모닉에 도착한 배도빈 은 죠엘의 부축을 받아 집무실로 향 했다.
“오, 좋은 아침.”
“감기 나은 거 같네요.”
“덕분에.”
복도를 지나치며 단원들과 인사를 나눈 배도빈은 프란츠 페터와 산타 웨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럼 이것도 할 수 있어?”
“응!”
배도빈이 슬쩍 웃으며 입을 열었다.
“벌써 친해진 모양이네요.”
“네. 또래 친구를 사귄 전 처음이 라서 주말 내내 페터 군 보고 싶다 고 했어요.”
프란츠 페터와 산타 웨인 모두 2009년생으로 만 18세였고, 산타에 게 페터가 첫 친구인 것처럼 학교를 다닌 적 없는 페터에게도 산타 웨인 은 첫 동갑내기 친구였다.
죠엘이 그를 대신해 문을 열었고 프란츠와 산타가 고개를 들었다.
“형!”
“뉴나! 뽀스!”
“••••••보스?”
배도빈이 고개를 갸웃하자 죠엘이 웃었다.
“이제 베를린 필하모닉 사람이니까 호칭은 정확히 해야죠.”
배도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 에게 말했다.
“그럼 일을 줘야겠지. 페터, 이번 주까지 런던 그랑프리에서 있었던 공연 청음해서 가져오고 산타는 금 요일 녹음에 참여해야 하니까 오후 부터 연습에 참가해.”
“네에?”
“햫!”
프란츠 페터의 눈이 튀어나왔고 산타 웨인은 그저 연습한다는 말에 기 뻐 웃었다.
“오늘 수요일인데 어떻게 이번 주 까지 다 해요. 전부 합치면 24개 곡 이고 게다가 오케스트라잖아요.”
“나 때는 다 했어.”
배도빈이 베를린 필하모닉 입단 전에 푸르트벵글러와 베를린 필하모닉 의 연주를 듣고 청음했던 기억을 떠 올리며 말했지만.
프란츠 페터에게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이었다.
“지휘하려면 지금부터 훈련해야 해. 언제까지 악보만 붙들고 있을 거야.”
배도빈은 프란츠 페터가 자신의 곡을 직접 무대에 올릴 수 있길 바랐다.
밴드와 해상 오케스트라 공연은 그 연습 단계.
언젠가는 나이 든 현 감독 대행, 부 감독, 악장단이 은퇴할 테고 그 자리는 프란츠 페터가 맡아줘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의 베를린 필하모닉을 유지하 기 위해서라도 프란츠 페터에게 많은 걸 가르치고 싶었다.
프란츠 페터도 자신의 곡을 무대에 올려야 하지 않겠냐고 다그치는 말 에 고개를 끄덕였다.
“ 해볼게요.”
“좋아. 산타는 글로켄슈필이라는 악기 배울 거야. 피셔한테 말해두었으니 열심히 배워야 한다?”
“녜!”
너무나 힘찬 대답이었으나 배도빈 은 산타 웨인이 가벼운 마음으로 답 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지금은 한정적으로밖에 활동할 수 없지만 산타의 장점은 같은 일을 반 복함을 즐기는 데 있었다.
그 뛰어난 박자 감각과 기억력이 더해진다면 연주할 수 있는 곡도 늘 거라 믿었다.
쉽지 않겠지만 그가 음악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느긋하게 지켜볼 생각이었다.
두 사람을 내보내고 오전 내내 업 무를 처리한 배도빈은 집무실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음식을 흘리는 모습을 직원과 단원 들에게 보일 수 없었기에 그의 점심은 항상 집무실에서 이뤄졌으나 최지훈과 나윤희, 왕소소, 진달래, 료코가 함께하는 탓에 심심하긴커녕 요란스러웠다.
“왜, 왜 그렇게 봐?”
나윤희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동 료들에게 물었다.
참다못한 진달래가 나서서 물었다.
“언니, 왜 맨날 언니가 도빈이 먹 여줘?”
“ 맞아.”
“도빈이도 바라는 거 같은데.”
“아니지? 진짜 아니지?”
소소가 동조했고 최지훈이 싱글싱 글 웃으며 배도빈을 놀렸고 료코가 애써 상황을 부정했다.
“나, 나는 천천히 먹어도 되니까. 너희 먼저 먹으라고.”
“돌아가면서 해도 되잖아.”
“ 되잖아.”
지난 열애설 이후 매일 이런 식이었기에 배도빈과 나윤희는 난감할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