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543화 (543/564)

다시 태어난 베토벤 543화

118. 와인과 불새(4)

“브라보!”

런던 심포니가 공연을 마치자 관객들이 박수와 환호로 그들이 받은 감 동을 돌려주었다.

실로 과감한 편곡이었다.

오케스트라 대전을 통해 그들의 연주를 오랜만에 혹은 처음 들었던 이 들도 절로 고개가 끄덕일 정도였고.

런던 심포니의 연주에 익숙한 오랜 팬들에게는 특히나 신선한 공연이었다.

“레몽 도네크 감독이 이번에는 정 말 칼을 간 것 같은데.”

“그러니까. 무난하게 감상하기 좋았던 전과 다르게 오늘은 좀 뭔가 달랐어.”

관객들은 변화한 런던 심포니에 충분히 호감을 느꼈지만 레몽 도네크는 직감했다.

런던 심포니를 지휘하는 일은 이제 없을 거라고.

앞서 빈 필하모닉과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을 향했던 열렬한 환호에 비해 관객들의 반응은 심심했고.

바로 다음 그가 그토록 넘어서고 싶었던 배도빈과 함께하고 싶었던 베를린 필하모닉의 공연이 남아 있기 때문.

레몽 도네크는 자신의 한계를 담담 히 받아들이고자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이사진으로부터 통보받았을 때부터 어렴풋이 이 공연이 마지막이라는 걸 느꼈기에 도리어 후련한 마음도 있었다.

“수고했어.”

“멋지던데.”

그는 무대에서 내려오는 단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은 한때 최고의 오케스트라라 고 불렸던 만큼 훌륭한 기량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문제가 있다면 자신에게 있다고.

그리 생각했기에 적어도 그들이 자 신들의 기량을 충분히 펼칠 수 있도록 마지막 무대를 준비했다.

기존의 그의 방식과는 달랐지만.

이 또한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다행히 단원들도 그의 시도가 마음 에 들었던 모양.

밝은 얼굴로 인사했다.

“오늘 정말 최고였어요.”

“연습 때도 느꼈지만 정말 편했어요. 다음에도 이런 식으로 가면 안 될까요?”

마치 맞춤옷을 입은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 단원들은 다음 공연을 말 했다.

“그래.”

다음이 없음을 알면서.

레몽 도네크는 그들이 자신보다 뛰 어난 지휘자와 함께 희망을 이어나 가길 바랐다.

* * *

“8일간 진행되었던 런던 그랑프리 도 이제 마지막 순서를 앞두고 있습니다. 끝을 장식하기에 이보다 훌륭 한 오케스트라가 또 있을까요? 베를린 필하모닉입니다.”

사회자의 소개와 함께 커튼이 걷혔다.

“오오.”

베를린 필하모닉의 색다른 모습이 관객들과 시청자들의 기대감을 잔뜩 고양시켰다.

단원 모두 채도가 낮은 주홍색 정 장을 입고 있었고 그들 뒤의 대형 스크린에는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배도빈이 고개를 숙이자 잠시 놀라 가만있던 관객들이 힘차게 배도빈의 이름을 연호했다.

“빈! 빈! 빈! 빈!”

마왕이 왼손을 들자 찰스 브라움이 고개를 숙였고 오른손을 들자 나윤희가 인사했다.

2023년 첫 발표 이후 가장 정열적 이고 매력적인 곡으로 알려진 불새 바이올린 협주곡의 두 주인공은 눈 부셨다.

아름다운 황금빛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 찰스 브라움은 파이어버드의 고혹적인 자태와 어울렸고.

어깨를 드러낸 나윤희는 블러드와 인의 치명적인 색상과 함께 관객들을 도발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나윤희는 지난 오케스트라 대전을 떠올렸다.

찰스 브라움이 심각한 항문 질환으로 이탈하고 그를 대신하기 위해 무 리한 나머지 공연 중 실수가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그 모습에 감동을 받았지만 나윤희로서는 얼굴이 화끈 거리는 일이었다.

오늘이야말로 기필코 완성된 연주를 하고 싶었다.

그런 확신이 있었다.

배도빈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처 럼 흔들림 없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솔직해질 수 있었다. 사회적 시선에 따라 만들어진 모습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있을 수 있었다.

느린 행동 때문에 유치원에서도 학 교에서도 사회에서도 구박과 무시를 당했던 그녀는 자신을 숨기는 데 능 했고 타인의 눈치를 보는 데 익숙해 졌다.

그러다 그런 자신을 바꾸기 위해 나섰던 베를린 필하모닉 악장 오디션.

그곳에서 배도빈을 만났다.

처음에는 동경이었다.

어리고 작았지만 당당한 그를 그저 대단하게 여길 뿐이었다.

입단한 뒤에는 재능, 권력, 부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가 사실은 정말 치열하게 음악을 하 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용기를 얻었다.

단순한 동경이 아니라.

배도빈처럼 열심히, 당당히, 매순간 마다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그렇게 5년.

나윤희는 자신을 찾았다.

친구 한 명 사귀지 못했던 그녀에 게 왕소소, 이승희, 나카무라 료코, 진달래, 차채은과 같은 소중한 이가 생겼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게 무서워 떨었던 그녀가 감히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를 사임시키고 배도빈을 베를린 필하모닉 주인 자리에 앉혔다.

간혹 버릇처럼 나오긴 해도 심한 말더듬도 고쳤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그녀의 바이올린을 진실로 이해해 준 사람이 있었기에.

스스로도 믿지 못했던 자신을 믿어 주는 사람이 있었기에.

그녀는 강해질 수 있었다.

‘무슨 생각해?’

나윤희가 지휘봉을 든 배도빈에게 물었다.

바이올린 협주곡 불새는 나윤희가 자신의 기량을 한껏 뽐내기에 완벽 한 곡이었다.

연주자가 어떤 소리를 가장 잘 내고 좋아하고 어디까지 이를 수 있는 지를 정교하게 다룬 완전한 편곡이었다.

반대로.

나윤희는 배도빈이 바라는 연주가 어떤 것인지 알고자 끊임없이 물었다.

그가 자신을 완전하게 해주었듯.

그녀 역시 배도빈을, 베를린 필하모닉을 온전하게 하고 싶었다.

그렇게 지휘자와 연주자의 마음이 어울려 완성된 불새가.

지휘봉과 함께 비상했다.

배도빈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불새’.

창공을 향해 치솟은 불새가 해를 삼켰다.

블러드와인과 함께 질주하던 오케스트라가 순간 멈추었고 해를 잃은 세계는 어둠으로 뒤덮였다.

정적.

배도빈이 두 팔을 펼치자 폭음과 함께 연주가 재개되었다.

어둠을 밝히는 단 하나의 빛.

날개를 펼친 불새는 태양과도 같이 이글거리며 주변을 밝혔고.

그 열기로 초목이 타들어간다.

얼어붙은 대지와 북극의 냉기조차 불새의 위용에 녹아든다.

모든 악기가 블러드와인이 펼치는 거대한 흐름에 범접하지 못하고.

나윤희의 독주가 시작되었다.

블러드와인의 노래가 객석을 덮쳤다. 태양을 집어삼킨 불새처럼 저항할 수 없는 압도적인 힘으로 그들을 유린했다.

그녀의 정열이.

‘캐논’에 필적할 만큼 크고 곧은 선율로 그 외의 어떠한 것도 용납하 지 않았다.

그 순간만큼은 오직 그녀와 블러드 와인만이 노래하고 있었다.

‘훌륭하다.’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찰스 브라움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윤희의 맑고 올곧은 연주는 블러 드와인을 만나 더욱 선명해졌고 지 금에 이르러서는 폭력이라고밖에 설

명할 길이 없었다.

마치 배도빈처럼.

‘이해하고 있는 거겠지.’

배도빈이 그녀를 이해하듯이.

나윤희도 그를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그 둘이 함께하는 이 순간이 마치 세계의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오직 그들만 노래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감각을.

찰스 브라움은 익히 오래전부터 알 고 있었다.

바이올리니스트 찰스 브라움을 베를린 필하모닉으로 이끌었던 유일한 이유.

그 어떤 말로도 부족한 감각.

작곡가와 연주자가 완전히 서로를 이해해 연주하는, 그로 인해 관객들을 홀리는 그 순간의 환희가 그를 이곳에 있게 했다.

지독한 중독이었다.

한 번 맛본 쾌락은 어떠한 방법으로도 벗어날 수 없었다.

탐할수록 더욱 갈증을 느꼈고.

그렇기에 독점하고 싶었다.

나윤희의 연주가 절정으로 치달았을 때.

찰스 브라움이 파이어버드를 켜기 시작했다.

세상을 뒤덮었던 불새를 또 다른 불새가 가로막았다.

형제처럼 닮은 두 불새는 서로를 견제하며 날갯짓했다.

태양을 내놓아라.

파이어버드의 경고에 잠시 주춤했던 블러드와인이 코웃음을 쳤다.

나윤희의 연주가 속도를 냈다.

세상을 지배할 강력한 힘으로 날아 오른 블러드와인은 창공을 넘어 푸 르스름한 하늘을 아래에 두었다.

찰스 브라움도 지지 않았다.

그에 질세라 거대한 날개를 힘차게 쳐 블러드와인을 따랐다.

블러드와인이 선회하면 파이어버드가 반대 방향으로 돌아 그를 저지하 려 했고.

블러드와인은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불을 토해냈다.

두 바이올리니스트가 번갈아가며 펼치는 연주가 절정으로 치닫고.

두 새가 뱉어낸 화염이 지상으로 떨어졌다.

타악기가 우렁차게 울리며 위협을 알리자 현악기가 도망치는 산새처럼 퍼덕인다.

장대한 싸움이.

마왕을 웃게 했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무대를 지켜보 고 있던 아리엘 얀스의 표정은 심각 했다.

배도빈과 그들의 기량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오케스트라 대전을 기점으로 그들이 마치 어떤 선을 넘어선 듯한 기분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2026년 단 두 번의 공연만 가졌던 배도빈은 오케스트라 대전을 통해 그간 그가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는 지 증명하고 있었다.

가우왕과 최지훈.

찰스 브라움과 나윤희와 같이 절정 의 연주자들이 펼치는 연주도 그를 놀라게 했지만.

그들의 실력은 익히 알고 있었다.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들이 최고 수 준의 연주자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 만 이럴 수는 없었다.

단 하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조율된 소리.

각 악기들은 한 목소리로 노래했고 그들의 노래는 철저한 계산 속에서 다른 악기들과 유기적으로 결집해 있었다.

‘어떻게.’

아리엘은 이해할 수 없었다.

120개의 악기를 완벽히 이해하고 있는 배도빈도, 또 그 지시를 따라 완벽히 움직이는, 하나의 악기처럼 움직이는 베를린 필하모닉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단 한 명의 천재가 모든 단원을 이해하더라도.

모든 단원이 지휘자의 지휘대로 이 토록 완벽한 하모니를 이룰 수 있는 가.

만약 한 사람의 지휘자가 그런 것 이 가능하도록 유도했다면.

그는 아마 신일 것이다.

불가능한 일이고 불가해한 발상이었다.

아리엘 얀스는 ‘불새’를 들으면서도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사카모토 료이치, 마리 얀스, 브루노 발터,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제르 바 루빈스타인과 같은 거장들도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에는 감탄과 의문이 앞섰다.

음악의 신이 있다면 가능할까.

오케스트라의 완성도는 지휘자에게 있다지만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에는 한계가 있는 법.

‘정말. 정말 대단하네, 도빈 군.’

‘어떻게 준비를 했기에 이런 연주가 매번 가능하단 말이냐.’

그랜드 심포니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앞을 볼 수 없는 배도빈이 했던 노력과.

그를 위해 단원들이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없는 그들로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연주가 막바지에 이르러.

두 비르투오소를 앞세운 마왕이 자신의 군세를 일으켜 세우자.

치열하게 자웅을 겨루던 두 불새가 마침내 쓰러지고.

블러드와인이 해를 토해냈다.

마침내 찾아온 광명의 순간에 관객 들이 기립했다.

“브라보!”

“브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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