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542화 (542/564)

다시 태어난 베토벤 542화

118. 와인과 불새(3)

“음악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다루는 너만 모름의 우진입니다.”

우진이 카메라를 향해 고개를 숙이 며 ‘너만 모름’이 시작되었다.

“오늘은 런던 그랑프리 2차전 마지 막 날을 앞두고 오케스트라 대전이 어떻게 흘러갈지 이야기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대단한 분이죠? 히무라 쇼우 샛별 엔터테인먼트 대 표를 모셨습니다. 반갑습니다, 히무라 씨.”

“반갑습니다.”

두 사람이 가볍게 목례했다.

“혹시 모르시는 분을 위해 히무라 대표에 대해 간략히 설명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진의 말과 함께 히무라 쇼우의 이력이 화면에 잡혔다.

“16살에 도쿄 예술대 수석 입학. 졸업과 동시에 일본 최대 음반 레이 블 엑스톤에 입사하여 5년 만에 총괄 프로듀서로서 일본을 포함, 유럽 과 아메리카 등지에서 활동해 그 실 력을 널리 인정 받았습니다.”

히무라 쇼우가 민망한 듯 웃었다.

“이후 배도빈을 발굴하시면서 프로 듀서로서의 활동보다는 매니저, 사 업가로 활동하기 시작하셨죠.”

“그렇습니다.”

“현재 많은 아티스트들이 가장 함께하고 싶어 하는 샛별 엔터테인먼트를 창설, 현재는 도빈 재단 이사장 이자 세계 클래식 음악 협회 자문위 원 등으로 활동하고 계신데, 특이사 항으로는 음악 외로 여러 언어를 구

사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어떠신가요?”

“일본어,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중국어, 한국어, 폴란드어, 스페인 어, 러시아어, 이탈리아어 정도는 무리 없이 가능합니다.”

우진이 조금 질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히무라 쇼우 대표가 가진 언어 자격증들을 살폈다.

“……솔직히 믿기지가 않네요. 도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요?”

“하하. 필요할 때마다 공부하다 보 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겸손한 발언이시네요. 좋습니다. 클래식 음악 부흥의 선두에 계신 입 장에서 현재까지의 상황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현재 공동 1위인 베를린 필하모닉 과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그리고 빈 필하모닉의 3강 구도가 유지될 거라 보고 있습니다.”

“히무라 씨도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하면 첫 번째 대전에서 좋은 성 적을 보였던 악단들이 힘을 쓰지 못 하는 이유는 무엇으로 보십니까?”

“역시 소비자의 욕구가 변한 탓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욕구가 변했다. 구체적으로 들려 주시죠.”

“기존의 곡을 연주하고 소비했던 과거와 다르게 현재 클래식 음악 팬 들은 새로운 곡을 원하고 또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 런 점에서 자체적으로 곡을 생산하는 베를린과 로스앤젤레스, 빈은 강 점을 보이고 있죠.”

“확실히 그렇군요. 세 악단의 지휘자인 배도빈, 아리엘 얀스, 사카모토 료이치 모두 뛰어난 작곡가이기도 하니까요.”

“그렇습니다. 이건 제 말이 아니라 사카모토 선생님께서 하신 말인데.”

“네.”

“시대가 빠르게 변하는 만큼 음악을 소비하는 사람들의 패턴이 다양 화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콘서트홀에 가서 오직 음악을 감상하는데 시간을 쓰는 사람도 있지만 그럴 수 없는 사람도 있죠.”

“확실히 그러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겠군요.”

“네. 다들 바쁘고 지쳐 있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현장이 아닌 온라인을 통해 집에서 편하게 들을 수 있는 방식을 선호하게 됩니다. 또 퇴근 후 시간을 조금이라도 알차게 쓰기 위해 여러 일을 함께하곤 하죠. 그 럴 때 음악 특히 클래식이 아주 좋은 요소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독서나 게임을 할 때도 음악을 듣는 게 가능하죠.”

“확실히 깊이 있게 감상하진 못하 지만 그럴 수 있죠.”

“네. 그게 중요합니다. 도빈이가 이렇게까지 큰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이유에는 그것이 큰 지분을 차지하 고 있을 겁니다.”

“조금 더 풀어서 말씀 부탁드립니다.”

“사카모토 선생님과 도빈이는 이걸 쉬운 음악이라 하는데. 저나 업계 사람들은 선이 굵은 음악이라고 합니다. 다른 행동에 집중하고 있어도 단순하고 강렬한 주제 덕에 인식이 잘 되는 곡이 현재 소비자들에게 어 필이 되는 거죠.”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배도빈 씨의 음악은 기억에 정말 잘 남습니다.”

“네. 다른 부분에서는 큰 차이를 보이지만 적어도 선율이 명확하다는 점은 사카모토 선생님과 아리엘 얀 스의 곡에서도 공통된 사항이죠.”

“이제 좀 정리가 되네요. 현재 사람들의 음악 소비 패턴과 또 새로운 곡을 듣고 싶은 니즈를 충족하는 베를린, 로스앤젤레스, 빈이 강세일 수 밖에 없고. 반대로 생각하면 부진하는 다른 악단은 그걸 충족시키지 못 하고 있다 볼 수 있겠네요.”

“그렇습니다. 시대가 변한 거죠. 라 이든샤프트라 하지 않습니까.”

히무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나 하나 주의할 점이 적어도 흔히 빈 고전파라 불리는 음악가들의 곡도 여전히 수요가 있습니다.

그것을 무시해서는 오랜 시간 확보 해 두었던 기존 음악 팬들을 스스로 떠나보내게 되겠죠. 베를린, 로스앤 젤레스, 빈 모두 기존 팬과 유입 팬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고 있기에 성 공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렇군요. 전통을 지키려는 것 역 시 가치 있다는 말씀도 해주셨습니다. 클래식 음악 중에서도 클래식한 느낌이라면 빠질 수 없는 곳이 있죠. 현재 그랑프리를 개최하고 있는 런던 심포니인데요.”

히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그랑프리를 개최하고 있는 런던 심포니의 경우 종합 11위에 머물고 있습니다. 아르투로 토스카 니니 시절과 그 이전을 고려하면 정말 처참한데, 내일 공연에서 반등할 수 있을까요?”

히무라는 잠시 고민하다 신중히 입을 열었다.

“답변하기 전에 명확히 짚고 넘어갈 일이 있습니다.”

“짚고 넘어갈 일이요.”

“네. 사실 오케스트라 대전은 본선에 진출하는 것만으로도 실력과 지지도를 증명했다 볼 수 있습니다. 전 세계 탑 12에 든 것이니까요.”

우진이 고개를 끄덕여 히무라의 말에 동조했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시절에 비하 면 상대적 우위를 잃은 건 사실이나 지금도 많은 팬을 보유한 오케스트라임에는 변함이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선을 그은 뒤 히무라는 단호히 런던 심포니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분명 상위권 악단에 비해 지지를 덜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죠. 저는 이것이 런던 심포니의 문 제라곤 생각지 않습니다. 기존 단원 이 이탈하거나 추가된 경우는 없으니까요.”

“그럼••••••

“네. 런던 심포니의 문제는 레몽 도네크 감독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런던 그랑프리 2차전 마지막 날.

공연을 앞두고 레몽 도네크가 단원 들에게 당부했다.

“여러 매체에서 우리의 부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레몽 도네크는 4〜5년간 함께한 단원들을 둘러보며 단호히 말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만 여러분이 얼마나 뛰어난지는 그 누구 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최고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단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흔들렸을 뿐, 최선을 다하기 위해 의지를 다졌다.

“최고의 연주를 하러 갑시다. 우리가 최고입니다.”

레몽 도네크의 격려가 다소 침체되 어 있던 런던 심포니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공연 전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의 식을 그대로 모방한 일이었지만 그 것으로 충분했다.

‘너희가 최고다.’

거장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확신 에 찬 말은 단원 시절 레몽 도네크 에게 너무나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존경하는 인물로부터 인정 받았을 때의 안도감과 자신감은 레몽 도네 크와 당시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들을 정말 세계 최고의 연주자로 거듭 나게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가장 완벽한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를 본받기 위한 노력으로.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는 레몽 도네 크를 후계자로 인정했고 단원들도 그를 자신들의 리더로 받아들였다.

무대에 오르고.

준비를 마친 레몽 도네크는 마지막 이 될 수도 있다는 각오로 관객들을 맞이했다.

연주가 시작되고.

객석에 있던 파울 리히터는 런던 심포니의 연주에 감탄하면서도 안타 까움을 감출 수 없었다.

‘러몽.’

그와 함께 30년을 보냈던 그였기에 모를 수 없었다.

런던 심포니가 연주하는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의 바탕은 그 들의 스승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에게 있었다.

강약 조절로 인한 충만한 감정 표현과 그것을 더욱 극적으로 하기 위 한 당김음 사용은 스승을 꼭 빼닮았다.

스승이 남겼던 연주를 더욱 발전시킨 모습에 파울 리히터는 레몽 도네 크가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를 얼마나 존경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가 결코 회복 될 수 없음을 인지한 순간이기도 했다.

‘이 어리석은 친구야.’

파울은 그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레몽 도네크는 뛰어났다.

지금의 연주로 그가 1990년대 초 이미 거장 중의 거장으로 불리던 당 시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에게 근접 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실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스승에 대한 과한 존경이 음악가 레몽 도네크의 개성을 죽이고 말았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2세가 되고 싶었던 레몽 도네크의 진심이 그에게 한계를 만든 것이었다.

‘선생님께선 그분의 후계자를 만들 고 싶었던 게 아닐세. 왜 그것을 모르는가.’

놀랍도록 완성도 있는 연주가.

레몽 도네크와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일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슬플 수 없었다.

전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2000 년대에 들어 조금씩 쇠퇴하는 베를린 필하모닉에 새로운 변화가 필요 하다고 판단했다.

연주, 무대, 구조.

부족한 것은 없었다.

단지 달라진 시대와 맞지 않는 것 일 뿐.

완벽했던 관행들을, 그때까지 그를 최고로 해주었던 모든 것에 변화를 주는 데 푸르트벵글러는 망설이지 않았다.

후계자를 찾을 때도.

자신의 음악 성향을 잇는 이를 찾기보단 베를린 필하모닉을 새 시대 의 오케스트라로 이끌 수 있는 사람을 바랐다.

배도빈.

레몽 도네크로서는 참을 수 없었다.

누구보다도 존경했기에 닮으려 했지만 그의 음악을 이으려 했지만 스 승은 자신보다 사제를 더 총애했다.

지나간 세월의 노력이 허망해지는 순간이었다.

왕이 이루었던 수많은 업적은 역사 로 남을 뿐이었고 그들이 함께 쌓아 온 성벽이 허물어지는 것을 보면서 레몽 도네크는 좌절했다.

배신감을 느꼈다.

“미련한 놈".”

TV를 통해 오케스트라 대전을 시 청하고 있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탄식했다.

첫 번째 제자의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는 그가 악장으로서 처음 공연했던 그때와 같았다.

아니, 그보다 훌륭했다.

그렇기에 안타까웠다.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재능을 지 녔으면서도, 부단한 노력을 더해 그 기량이 하늘에 닿았음에도 자신의 그늘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 제자.

‘그렇게 나가서 하려던 게 고작 그 것이냐.’

레몽 도네크의 지휘가 스승을 향한 존경심과 존중의 표현이라면.

푸르트벵글러는 차라리 그가 자신을 증오하길 바랐다.

저 뛰어난 음악가가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라는 음악가를 좇고 있음이 애석할 따름 이었다.

‘네 한계가 고작 나란 말이더냐.’

레몽 도네크는 스승을 완벽하고 무결한 이상(理想)으로 여겼지만.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여든이 된 지금도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려 들 지 않았다.

만족한 순간 걸음은 멈추게 되어 있다.

자신을 갖고 자부심으로 끝없이 나아가길 바랐던 스승은 그의 제자가 자신을 좇는 것이 아니라 넘어서길 바랐다.

그래서 언젠가는 동등한 입장에서 함께할 수 있길 바랐다.

관계를 돌이킬 수 없는 지금.

적어도 먼 곳에서나마 자신의 음악을 하길 바랐거늘.

30년 가까이 가장 믿음직했던 제 자가 맹목적인 감정에 휘둘려 끝내 실망을 주었다.

푸르트벵글러는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이 안타까운 일을 보고 들을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리모컨을 쥔 순간.

곡풍이 달라졌다.

섬세하게 노래하던 독주 바이올린이 뒤에 오케스트라가 주제를 반복 하는데 지금껏 들을 수 없었던 힘으로 치고 나왔다.

독주 바이올린은 한 번 더 자신의 목소리를 분명히 했고.

오케스트라가 그에 다시 대응하듯 힘차게 나서며 바이올린과 다투듯 언쟁을 시작했다.

실로 과감한 편곡.

3악장에 들어선 런던 심포니의 연주는 지금까지 그들의 연주와는 사 뭇 달랐다.

보다 치열했고.

보다 절실했다.

그 연주가.

푸르트벵글러가 만들어놓은 악보를 답습하는 것보다 더욱 푸르트벵글러 스럽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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