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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541화 (541/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541화

    118. 와인과 불새(2)

    “알겠습니다.”

    임원진에게 최후 통보를 받고 나선 레몽 도네크는 곧장 그의 집무실로 향했다.

    책상에 앉아 고민을 거듭하길 얼마 간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피로를 느낀 그가 잠시 눈 근처를 주무르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아들이었다.

    —아빠!

    “그래, 아들.”

    -언제 들어오세요?

    “글쎄. 오늘은 좀 늦을 것 같은데.”

    - 저녁은요?

    아들의 목소리에 아버지를 걱정하는 마음이 묻어 나왔다.

    런던 심포니를 맡게 되면서 줄곧 무리하고 있는 레몽 도네크는 하루 가 다르게 야위었고 그것을 지켜보

    는 아들의 마음이 편할 수 없었다.

    “먹었지. 너는?”

    -저도 먹었어요.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그래. 아빠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통화를 마친 레몽 도네크는 핸드폰 배경화면으로 설정해 둔 아들 사진을 보며 슬며시 웃었다.

    뒤늦게 얻은 아들은 난치병을 앓고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대견하게도 힘든 투병 생활을 버텨내 지금은 다른 아이들과 같이 평범 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절대 희망을 버리지 말자고 약속했기에, 아들이 그 약속을 지켰기에.

    레몽 도네크는 마음을 다잡았다.

    런던 심포니의 재정은 큰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는데.

    재정 자립을 이루었던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떠나면서 런던 심포니의 수입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토스카니니의 명성을 좇았던 후원자 수도 큰 폭으로 줄었고 그나마 남아 있는 사람도 오케스트라 대전 에서 연이어 하위권에 머문 런던 심 포니를 후원하는 데 망설였다.

    이제는 임원진마저 최후 통보를 보냈으니 레몽 도네크가 느끼는 부담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또 음악가로서의 성공을 위해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앞에 오래된 악보가 놓여 있었다.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위기를 맞이한 그는 자신이 처음 악장으로 데뷔했을 때 연주했던 곡을 찾았다.

    음악가 레몽 도네크의 시작.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무대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한 선택이었다.

    오래된 악보에는 순수했던 시절 그 가 기록해 둔 여러 메모가 남아 있었다.

    그의 왕이 남긴 말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것이었다.

    사소한 지시 하나 놓치지 않은 덕분에 악보를 살피는 것만으로도 그 때의 기억이 선명했다.

    ‘작게. 더 작게.’

    ‘작게 연주하라 했지 누가 음을 흐리라 했어!’

    당시 젊은 폭군의 호통이 지금도 귓가에 선명했다.

    혈기가 넘쳤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단원들을 모질게 다뤘다.

    완벽할 때까지 연습을 반복했고 그 것이 늦은 밤까지 이어졌기에 당시 에는 푸르트벵글러의 완벽주의에 지 쳐 떠난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강행군 속에서 남은 사람들 은 짧게는 20년, 길게는 30년 이상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함께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켰다.

    모두 그가 옳다고.

    그의 음악이 완벽하다고 여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도 단 한 번의 공연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레몽 도네크는 그런 사람들 중에서도 유별났다.

    그에게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규율이자 이상향이었다.

    그에게 다가가는 것이 목표였고 그 의 세계를 탐구하는 것이 젊은 시절 레몽 도네크의 목적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선생님.’

    수많은 바리에이션을 들어왔지만.

    레몽 도네크는 지금껏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지휘하고 그가 악장으로 나섰던 1996년 발트뷔네에서의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보다 완벽한 연주를 들어본 적 없었다.

    ‘그걸 뭐 하러 가지고 있어. 다음 공연이나 준비할 것이지.’

    ‘그래도 언젠가 꼭 필요할 때가 있지 않겠습니까.’

    폭군은 공연을 마친 뒤에는 악보를 따로 관리하지 않았다.

    같은 곡이더라도 매번 다르게 표현 하고자 했고 레몽 도네크는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그가 남긴 악보를 창고에 처박아 둘 수 없었다.

    이미 과거가 되었다고 해도.

    그 연주가, 그 악보가 가진 가치마 저 없어지는 건 아니라 생각했다.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남긴 수많은 악보는 대부분 레몽 도네크가 소장하고 있었다.

    제국을 등진 배신자면서.

    동시에 폭군을 가장 따르는 추종자 이기도 한 그의 모순을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스스로도 그리 생각하기에 레몽 도 네크도 이해를 바라진 않았다.

    그저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남긴 악보를 통해 그에게 다가가고자 끝 내 그를 넘어서고자 할 뿐이었다.

    * * *

    한편.

    오케스트라 대전에 관한 이야기로 시끌벅적했던 클래식 음악 팬들 사이에 또 하나의 화제가 생겨났다.

    런던 시내에서 배도빈과 나윤희가 손을 잡고 걷는 사진이 여럿 게시되 면서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 추측하는 글들이 쏟아졌다.

    ㄴ 헐. 헐. 헐. 헐.

    ㄴ 둘이 사귀는 거야?

    ㄴ 그냥 도빈이가 앞 못 보니까 잡 아주는 거 아님?

    ㄴ 단 둘이 외출하는 거 봐선 빼박 데이트네.

    ㄴ 둘이 나이 차이가 꽤 있을 텐데.

    ㄴ 배도빈이 만 21살이고 나윤희가 만 30살임. 9살 차이네.

    ㄴ 히~ 말도 안 돼.

    ㄴ ㅋㅋㅋ 나이 차이 보니까 옛 날 인터뷰 생각난다.

    ㄴ 뭔데?

    ㄴ 예전에 어디 프로그램에서 배도빈한테 연상이 좋냐 연하가 좋냐고 물었는데 연하가 좋다고 했었음.

    ㄴ 앜ㅋㅋㅋㅋ 나도 생각 나 연하 라면 몇 살 정도냐고 물으니까 30 대 정도가 적당하지 않겠냐고 해서 다들 멘붕ㅋㅋㅋㅋ 그때 도빈이 막 20살 되었을 때였는데.

    ㄴ 20살 먹은 애가 연하가 좋다면 서 30대가 좋다는 건 뭔 경우야?

    ㄴ 그러니깤ㅋㅋㅋ

    ㄴ 아니 그건 그냥 인터뷰잖아. 지 금 나윤희랑 같이 다니는 건 뭔데.

    ㄴ 안 돼 ㅠㅠ 도빈이는 가우왕이랑 이어져야 한다고오 ㅠㅠ

    ㄴ 너 전에 가우왕은 찰스랑 이어져 야 한다고 했던 애 아님? ㅋㅋㅋㅋ

    ㄴ 어허. 가우왕 임자 있어. 유부남 하고는 엮지 말자.

    ㄴ 근데 도빈이 열애설 진짜 오랜만 이다.

    ㄴ 있긴 있었음? 난 한 번도 못 봤는데.

    ㄴ 예전에 지훈이랑 사귀는 거 아니냐는 말 나왔었음. 둘이 워낙 친하니까.

    ㄴ 그거 말곤 없음?

    ㄴ ㅇㅇ. 애가 워낙 어릴 때부터 활동하기도 했고 음악 말곤 관심도 없어서 유명세에 비하면 진짜 없었지. 지훈이랑 열애설도 다들 반쯤 농담 삼아 했던 말이고.

    ㄴ 나윤희 근데 평소엔 저렇게 입고 다니나 보네. 정장이랑 드레스 입은 모습만 봐서 의외다.

    ㄴ 외모로 봐선 나이 차이 있어 보이진 않지만 그래도 좀 의외다.

    ㄴ 도빈이 키 좀 큰 듯. 나윤희보다 머리 하나 더 큰데?

    ㄴ 나윤희도 작은 키는 아닐 텐데. 오히려 큰 편 아닌가?

    ㄴ 프로필상에는 167cm로 되어 있음.

    ㄴ 우리 꼬맹이 커버렸구나……. 몸도 마음도.

    ㄴ 반대하는 건 아닌데 그래도 좀 싱숭생숭하다.

    ㄴ 이해함. 나이 차이가 많으면 모르겠는데 팬활동이 음악만 좋아하는 형태는 아니니까. 또 배도빈 활동 기간도 길고 팬들과 소통도 잘해서 서운하다? 같은 느낌도 당연함.

    ㄴ 도빈이 곡 처음 들었을 때 대학 1학년이었는데 지금 내 아들이 초등학교 들어갔으니까 뭐. 시간 참 빠르다.

    ㄴ 근데 도빈이 이런 사생활 건드는 거 진짜 경멸하던데. 괜찮으려나.

    ㄴ 일단 사진 올린 파파라치는 인생은 실전인 거 알게 될 테고. 팬들한 테는 솔직하게 말하겠지. 배도빈 팬 들한테 거짓말한 적 없음.

    ㄴ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ㄴ 체르니? 저 아이디 차채은 아이디 아님?

    ㄴ 아, 글 삭제됐네.

    전 세계적으로 큰 사랑을 받는 두 사람이었기에 배도빈•나윤희 열애설 은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호텔에서 쉬고 있던 나카무라 료 코, 진달래, 왕소소는 영상통화까지 켜 이승희도 불러모은 채 나윤희를 소환.

    심문을 시작했다.

    -너 솔직히 말해.

    “딱 말해.”

    “아니죠? 언니, 아니죠?”

    “언제부터 만났어?”

    이승희, 왕소소, 료코, 진달래 순으로 질문을 시작했고 나윤희는 당황하여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냥 지쳐 보이길래 단 거 좋아하니까……

    그러나 취조를 시작한 형사들의 귀에 나윤희의 설명은 변명일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긴 했어. 왜, 예전에 도빈이가 카레도 양보했잖아.

    “세상에. 세상에. 배도빈이, 그 카레 귀신이 카레를 양보했다고오? 그 것도 슈퍼 슈바인 김덕배 사장님이 8시간 이상 푹 익혀서 만든 특제 카레를?”

    “지금까지 속였던 거야?”

    이승희의 리시브를 진달래가 토스했고 기회를 포착한 왕소소가 사정 없이 스파이크를 때렸다.

    “속이긴 뭘. 진짜 그런 거 아니라니까.”

    “맞아. 윤희 언니가 배도빈이랑 사귈 리가 없잖아. 안 돼. 안 돼.”

    료코가 다급히 나윤희를 옹호하며 나섰다.

    직장 상사이자 음악가로서의 배도빈은 료코에게 너무나 큰 존재였지만 그 외 부분에 있어서는 의문이었다.

    커피나 카레, 오렌지 주스 등 여러 분야에 강박증이 심각한 수준이었고 심지어 성격도 그다지 좋지 못했다.

    걱정은 또 얼마나 끼치는지 세상 무모하고 무리한 일은 죄다 맡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외유내강한 나윤희를 믿고 따르는 료코로서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나윤희와 배도빈이 만나는 걸 납득 할 수 없었다.

    “진짜 아니야?”

    “응. 정말.”

    소소의 질문에 나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여러 정황이 퍼 즐처럼 맞춰졌기에 그들은 쉽게 납득할 수 없었다.

    진달래가 물었다.

    “왜? 도빈이 괜찮잖아. 잘 어울리는데?”

    “아니야. 안 어울려.”

    료코가 기다렸다는 듯이 부정했지만 왕소소에 의해 진압되었다.

    -도빈이 같은 애 몇 없다? 좀 이상한 구석이 있어도 생활 바르지, 예의 바르지.

    “예의? 허구한 날 다른 사람 엉덩이 걷어차고 다니는데?”

    -그럼 그건 빼고. 윤희 너 정말 도빈이한테 아무 생각 없어?

    “맞아. 어떻게 생각하는데?”

    나윤희는 그저 친구들이 질문을 쏟 아내는 이 상황이 웃길 뿐이라 고개를 저었다.

    “멋있지. 상냥하고. 근데 정말 아무 사이 아니야.”

    “생각도 없어?”

    “응. 지금이 좋아.”

    “왜? 같이 있다 보면 마음 생기고 그럼 만날 수도 있잖아.”

    “어……. 나 누구 사귀어본 적도 없고. 그냥. 그냥 이대로가 좋아.”

    나윤희의 말에 이승희와 진달래가 깜짝 놀랐다.

    - 진짜?

    “말도 안 돼. 서른 될 때까지 한 명도 안 사귀어봤다고?”

    진달래의 반응에 료코를 제압하고 있던 왕소소가 고개를 돌렸다.

    “ 언니도?”

    “뭐. 난 결혼 안 해.”

    진달래는 밴드 생활을 함께하는 스칼라를 떠올리며 그가 안됐다고 생각했다.

    -억지로 마음 닫고 있을 필요는 없잖아. 그냥 마음 생기면 자연스레 만나고 그러는 건 괜찮지 않아?

    나윤희도 이승희와 같은 생각이었지만 그렇다고 억지로 나서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배도빈을 생각하는 그녀의 마음은 하나로 정리할 수 없었다.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이게 좋아하는 건지. 근데 계속 함께 음악 하고 싶은 건 확실하니까.”

    그녀도 배도빈과 함께 있으면 다른 사람과 있는 것과 다르게 편안하고 때로 자신에게 솔직해질 수 있었다.

    그녀도 그를 향한 복잡한 마음 중 에 연정이 없다고 할 순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불명확한 감정보다 배도빈과 음악을 함께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가 만든 악보를 통해 그를 이해 하고 그것을 연주로 실현시키는 과정과 그 사이에서 나누는 대화들이 너무나 소중했다.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발견해 주고.

    완전하게 있을 수 있도록 도와준 배도빈에 대한 감정은 사랑이란 단어로 한정할 수 없었다.

    우정, 존경, 경의.

    모두 마찬가지였고.

    그 관계 역시 동료나 친구, 연인으로 규정할 수 없었다.

    “이대로가 좋아. 정말.”

    나윤희의 진솔한 고백이었다.

    그리고.

    ‘그게 좋아하는 거잖아.’

    ‘ 배고파.’

    ‘아, 답답해. 아, 진짜 답답해 미치겠네.’

    ‘다행이다. 그럼 그렇지. 윤희 언니는 무조건 능력 있고 가정적이고 현 명하고 윤희 언니만 좋아하는 사람 이랑 만나야 해.’

    이승희, 왕소소, 진달래, 나카무라 료코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상황을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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