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540화
118. 와인과 불새(1)
런던 그랑프리 2차전.
세 번째 날 마지막 순서로 배정된 베를린 필하모닉에게 잠시간의 휴식이 주어졌다.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이 1차전에서 준우승을 거두며 비록 단독 선두로 올라서진 못했지만 단원들은 사기충천해 있었다.
“크학학핳! 마시자고! 마셔!”
“다들 잔 올려!”
런던 시내의 프렌차이즈 펍, 웨더 스푼에 자리 잡은 베를린 필하모닉의 애주가들이 다 함께 맥주를 들이켰다.
바닥을 완전히 들어 올리고 나서야 만족한 그들은 심심한 입을 달래기 위해 감자튀김을 하나씩 집어 들었다.
“우엑. 이거 맛이 왜 이래?”
“어떻게 감자튀김이 맛없을 수 있지? 이 완두콩은 먹으라고 준 거야?”
“도빈이가 만든 카레보다 엉망인데.”
간단히 저녁을 해결하고 맥주도 마시려 했던 그들은 이내 음식을 치우 고 술만 들이켰다.
“그러고 보니 왕은?”
피셔 디스카우가 애주가 모임에 자주 함께했던 가우왕이 안 보이는 걸 언급했다.
다니엘 홀랜드가 잔을 내려놓으며 답했다.
“처가에 간다고 하던데.”
“오, 화해한 거야?”
“아마. 잘 됐지 뭐.”
“그러게. 그러고 보니 찰스도 안 보이는 게 가족 모임이었구만.”
“오오, 이것 좀 봐. 한스가 딸 사 진을 보냈어.”
마누엘 노이어가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요람에 누워 있는 이승희, 한스 이안 부부의 딸 메리 이안이 하품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귀엽네. 귀여워.”
“어우. 저 때가 제일 힘들어. 밤낮이 없거든.”
자식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반응이 갈렸지만 메리 이안이 귀엽 다는 의견만은 일치했다.
“그러고 보니 승희는 성을 그대로 쓰네.”
“요즘엔 뭐 특이할 것도 없지 않나. 왜, 발그레이도 따로 쓰잖아.”
“큭큭. 승희 이안이란 이름이 안 어울려서 그랬대. 승희답지.”
“그러고 보니 처음 승희 이름은 발 음이 너무 어려웠어.”
“맞아. 난 지금도 솔직히 어려워. 그래서 항상 이 수석, 이 수석 했잖아.”
“ 해봐.”
“성희.”
“아니. 그건 아니지. 잘 따라 해보 라고. 승희. 승. 희.”
“스엉희?”
“비슷했어.”
시시콜콜한 일상 이야기 뒤에는 자 연스레 런던 그랑프리 2차전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당연히 우승이지.”
마누엘 노이어가 맥주잔을 비우며 말했다.
지금까지 다들 언급하진 않았지만 런던 그랑프리 2차전은 베를린 필하모닉에게 있어 반드시 우승해야만 하는 대회였다.
개최 악단이 레몽 도네크가 지휘자 로 있는 런던 심포니였기 때문에 단 원들은 저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었다.
“그야 당연하지. 찰스랑 윤희가 나 서잖아. 무슨 걱정이야.”
더욱이 가우왕-최지훈과 함께 베를린 필하모닉이 자랑하는 프렌차이 즈 연주자 찰스 브라움과 나윤희를 전면에 내세운 무대.
최근 비록 베를린 필하모닉의 여러 사업을 책임지고 있어 활약 빈도가 줄어든 찰스 브라움이었지만, 그의 앨범은 여전히 가장 많이 판매되고 있었고.
첫 번째 오케스트라 대전을 통해 일약 스타가 된 나윤희의 잠자는 숲 속의 공주는 2025년과 2026년 2연 속 가장 긴 시간 재생된 곡으로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였다.
단원들은 이미 우승을 확신하고 있었다.
“말은 안 했지만 도빈이도 아마 노렸을걸?”
피셔 디스카우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장기 레이스인 오케스트라 대전에서는 페이스 조절이 필수였는데.
단원들의 건강을 끔찍이 여기는 배도빈이 굳이 찰스 브라움과 나윤희를 함께 내세웠단 것부터 레몽 도네 크를 의식했다는 증거였다.
“망할 자식.”
마누엘 노이어가 새로 주문한 맥주 마저 비워버리곤 이를 갈았다.
그에 대한 서운함은 5년 동안 차 츰 변해 오고 있었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그래. 녀석도 지휘자가 되고 싶었으니까.’
의문에서 이해로.
‘하지만 꼭 그랬어야 했나?’
‘말도 없이 하필 인터플레이에게 돈을 받아가면서까지?’
다시 의문에서 분노로 이어지며 이후 사과는커녕 연락조차 받지 않는 그에게 단원들은 분명 화를 내고 있었다.
“오.”
그때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린 단원들은 파울 리히터를 보곤 두 눈을 크게 뜨고 반겼다.
“뭐야. 와 있으면서 왜 연락을 안 해?”
다니엘 홀랜드가 일어나 파울 리히 터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랑프리 도중이라 바쁜 줄 알았지. 이러고 있는 줄 알았으면 한잔 하자 안 했겠어?”
“하하하하!”
“마누엘은 왜 또 저러고 있어?”
“레몽 이야기 나와서 그래.”
파울 리히터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이며 마누엘 노이어 곁에 자리 했다.
“머리는 더 빠졌구만?”
“시끄러워.”
마누엘 노이어가 툴툴대면서 파울 리히터에게 맥주와 포크를 챙겨주었다.
그의 오랜 친구이자 경쟁자였던 헨 리 빈프스키 감독이 잔을 들이밀었고 파울과 마누엘 그리고 다른 사람 들도 어울리며 건배했다.
“챔버 오케스트라 한다더니 여긴 어쩐 일이야?”
빈프스키가 물었다.
“구경 왔지. 찰스랑 윤희가 듀엣으로 나서는데 놓칠 수 있나. 1차전도 인상적이었고. 최는 이제 정말 가우왕한테도 뒤지지 않던데?”
“학학핳학. 왕이 들었다면 또 발작 하겠는데?”
진 마르코가 가우왕 흉내를 냈고 다들 그 모습이 너무 똑같아 웃고 말았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엠마가 걱정스레 물었다.
“네. 혼자 가는 것도 아니니까.”
“그럼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해봤자 듣질 않으니 어쩔 수 없다.
카밀라와 멀핀이 비서실에 단단히 일러둔 탓에 죠엘이고 엠마고 모두 꽉 막혀 있다.
오랜만에 나서는 외출도 마음껏 못 하니 답답하다.
나윤희의 발소리다.
똑똑—
“네.”
엠마가 대답하곤 멀어진다.
곧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다소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엠마.”
“좋은 아침입니다. 멋진데요?”
“아, 가, 감사합니다.”
“그럼.”
엠마가 밖으로 나섰고 나윤희가 다가왔다. 평소와 같은 향이 나는데 어떻게 입고 있길래 엠마가 멋지다 고 했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 갈까?”
“네.”
런던 그랑프리 2차전 개막일 오전.
빈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하다 그간 외출을 못해 답답했던 기분을 달래고자 했다.
그러나 무엇을 구경할 수 있는 입 장은 아니라 조용한 카페에서 브런 치나 먹으며 수다를 떠는 정도로 만족해야 할 듯하다.
나윤희의 손을 잡고 호텔 밖으로 나섰다.
“ 차를.”
“걸어요. 날씨 좋은 런던은 드물잖아요.”
“……응.”
나윤희가 간격을 두고 망설이듯 답 했다.
드물게 따뜻한 햇살을 느낄 수 있고 또 바람이 살에 닿는 느낌이 좋다.
평소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던 햇살과 바람 그리고 런던의 거지 같은 냄새마저 상당히 신선하게 다가 온다.
천천히 걷고 있자니 주변에서 수군 대는 이야기가 귀에 들어온다.
“배도빈 아니야?”
“맞아. 옆에는 나윤희지?”
“응. 어디 가는 거지?”
“데이트?”
그녀가 왜 망설이듯 답했는지 알 것 같다. 안 그래도 이목이 쏠리는 데 단둘이 손까지 잡고 걸으니 그런 오해가 생길 만하다.
손을 놓으려 하자 그녀가 힘을 꽉 주었다.
“안 돼. 놓으면.”
“오해하잖아요.”
“괘, 괜찮아. 그러다 부딪치면 어떡 해.”
확실히 다치고 싶진 않지만 나윤희가 난감해하는 것도 마음에 걸린다.
아무래도 욕심이었던 모양.
이만 돌아가자고 말하려던 차에 그녀가 손을 이끌었다.
“조, 조금만 더 가면 돼.”
내키지 않으면서도 함께하고 싶은 모순된 마음을 애써 무시하고 그녀를 따라 발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음.."
“어디 가는 거예요?”
“흐. 맞혀 봐.”
생각해 봤자 맞힐 수 있을 리 없다. 런던에 몇 번 오긴 했지만 공연 장과 호텔에서만 지냈으니 알 턱이 없다.
“어딘데요?”
“다 왔어.”
놀라게 해주고 싶은 것 같아 더 이상 묻지 않고 걷는데 상당히 오래 걸린다.
“멀었어요?”
“거의 다 왔어.”
너무 걸어서 길을 잃은 건 아닌지 걱정하고 있을 때 나윤희가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문이야. 조심.”
나윤희가 문을 열자 진한 커피향과 빵 냄새가 훅 하고 풍겼다. 꽤 오래 걸었던 탓인지 아니면 정말 좋은 냄새인지 식욕이 올랐다.
“안녕하세요. 카페모카 한 잔이랑 블루마운틴 한 잔 주세요. 초콜릿 크루아상이랑 수제 퍼지도 두 개씩 이요.”
초콜릿과 초콜릿이라니.
아침으로 아주 흡족한 식단이다.
자리를 잡고 앉았다.
“냄새가 좋은데요.”
“응. 파카페라는 곳인데 소소가 추천해 줬어.”
“ 소소가요?”
퇴근 후와 주말은 침대에서 지낼 뿐인 소소가 이런 곳을 알고 있다니 상당히 의외다.
“예나 씨랑 왔었나 봐.”
“ 아.”
거추장스러운 오빠를 데려간 데다 디저트라면 사족을 못 쓰는 소소에 게 이런 곳을 알려줬으니.
예나와 소소 두 사람 사이가 가까운 것도 이해가 된다.
곧 커피향이 더 진하게 났고.
조심스레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니 확실히 괜찮은 느낌이다. 신맛이 적은 대신 부드럽게 혀를 감는 질감이 썩 괜찮은 커피다.
나윤희가 포크를 쥐여주었다.
“수제로 만든 퍼지래.”
커피가 합격점이었기에 망설이지 않고 입에 넣자 과연 소소가 추천할 만한 곳임을 알 수 있었다.
버터와 설탕 그리고 초콜릿이 이루는 하모니는 매우 절묘하다.
독주로 나선 초콜릿을 더욱 부각시 키는 설탕의 단맛과 버터의 묵직함 에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맛있네요.”
“그치.”
카페 내부의 질이 그다지 좋지 않은 스피커에서 블랙 나이트 삽입곡이 흘러나왔다.
“이거 인크리즈 맞지?”
“네.”
내 곡을 틀다니.
주인이 제법 센스가 있는 카페다.
***
런던 그랑프리 2차전 두 번째 날.
사카모토 료이치와 빈 필하모닉이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를 연주하며 5,008만 2,344표를 얻음으로써 첫 번째 날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이 얻은 4,119만 7,990표를 큰 차이로 따돌렸다.
네 번 연속 3위를 기록했던 빈 필하모닉으로서는 통합 우승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었다.
그러나 베를린 필하모닉이 아직 무 대에 오르지 않았기에 안심할 수 없는 상황.
지금껏 우승과 준우승을 내준 적 없던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도 위기 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한편.
오케스트라 대전 개최 이후 줄곧 중하위권을 전전하던 런던 심포니에 게는 홈에서의 고득점이 너무나 간절한 상황이었다.
당연히.
악단 이사진은 아르투로 토스카니 니 시절과 너무나 대조되는 실적에 후원자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도네크 감독, 더 이상 이러면 곤 란하오.”
런던 심포니의 소유주 폴 퍼즈가 레몽 도네크에게 경고했다.
“이번 그랑프리에서 3위 안에 들지 못하면 우리도 다른 지휘자를 찾을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