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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538화 (538/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538화

    116. Legacy(5)

    산타의 박자 감각과 기억력에 대해 선 익히 알고 있다.

    언젠가 몇 분이나 일정한 박자를 유지하며 북을 쳤던 모습이 기억 난다.

    작년 피셔와 함께 만났을 때도.

    오늘 잠깐의 허밍을 통해서도 녀석 이 연주를 통째로 외우고 있으며 항 상 같은 박자를 유지하는 걸 알 수 있었다.

    작년, 스칼라가 악장으로 데뷔했을 때의 그 연주 그대로였으니까.

    산타는 그때 연주를 반복해 들음으로써 ‘타마키 히로시 피아노 협주곡’을 기억하는 듯하다.

    그리고.

    아마 곡을 이해하는 수준은 아닐 것이다.

    추측일 뿐이지만 산타에게 ‘타마키 히로시 피아노 협주곡’은 작년 자선 콘서트 때의 연주뿐이고 그 외 변형 된 연주는 따라올 수 없을 것이다.

    말 그대로 ‘그 연주’를 기억할 뿐 이니까.

    “스칼라.”

    무대에 오르기 전 스칼라를 불렀다.

    “여기 있어.”

    “준비했던 공연과 조금 다르게 갈 거야. 박자 조정이 있을 테니 집중 해.”

    “산타 때문이지?”

    “그래.”

    잡다한 설명을 거치지 않아도 나름의 방식으로 상황을 이해하는 스칼 라가 악장으로 있어줘서 다행이다.

    “그래. 걱정 마.”

    손을 펴자 스칼라가 손뼉을 맞부딪 치곤 돌아갔다.

    “가우왕, 지훈아.”

    “왕! 보스가 부르시는데?”

    단원 중 한 명이 날 대신해 가우왕을 불러주었다.

    좁은 공간에 여러 사람이 있으면 이 발달된 귀로도 누가 어디에 있는 지 확인할 길이 없는데.

    내가 이 상태에 익숙해진 만큼 단원들도 적응한 듯하다.

    “불렀어?”

    “네. 지훈이는?”

    « O ”

    “〒

    “두 사람 모두 오늘 빠르기를 조금 조절해야 해요. 필요할 때 지시 줄 테니 손에 집중해 주세요.”

    두 사람 모두 어렵게 준비한 것을 갑자기 바꾸는 게 쉽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가우왕과 최지훈은 언제나 그랬듯 믿음직스럽게 답했다.

    “날 뭘로 보는 거야? 그런 말 안

    해도 다 따라갈 수 있어.”

    “걱정 마. 어떻게 지시해도 연주해 낼게.”

    고개를 끄덕이고 두 사람을 보냈다.

    자신만만하게 답했던 만큼 가우왕 과 최지훈이라면 내 지휘를 즉흥해 서 따라올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남은 문제는 나.

    ‘할 수 있을까.’

    작년에 했던 공연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을까.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해 듣는 산 타와 달리 나는 그 이후로 그때의 연주를 들어본 적 없다.

    매 공연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 했고 그 외에도 대교향곡을 포함해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았기에 그럴 여유도,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분명 산타는 그때의 연주와 같은 시간에 같은 지점에 같은 소리 로 북을 울릴 것이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도전조차 하지 않았을 일.

    쉽지 않다.

    아니, 어렵다.

    곡의 구성을 망치지 않기 위해서라 도 앞뒤로 박자를 조절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늦거나 빨라서도 안 된다.

    내가 중심을 잃으면 악단 전체가 길을 잃고 말 것이다.

    산타는 단원들의 연주나 내 지휘와는 상관없이 자기가 기억하고 있는 박자대로 북을 칠 것이고 그렇게 되 면 공연은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안 되지.’

    이번 오케스트라 대전을 위해 한계 까지 자신을 몰아붙였던 단원들에게 그런 경험을 하게 할 순 없다.

    오늘 공연을 기대하고 있을 팬들에 게 최고의 연주를 들려주진 못할망 정 그럴 순 없는 법이다.

    그리고.

    타마키의 곡을 연주할 수 있다는 행복으로 천진난만하게 북을 칠 산 타를 생각해서라도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굳이 언급하진 않았지만.

    죠엘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안다.

    오늘의 공연이 잘못된다면 비난의 화살은 산타에게 향할 것이다.

    많은 사람이 산타의 겉모습만 보고

    착각하나 녀석도 주변이 어떤 분위 기인지, 자기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두 안다.

    그저 몸이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일 뿐이다.

    산타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을 지켜 주고 싶다. 녀석의 희망을 이어주고 싶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마지막으로.

    자기가 만든 곡이 최고의 형태로 연주될 것을 지켜보고 있을 타마키 의 소망을 위해서 반드시 해내야만 한다.

    ‘빌어먹을.’

    그러나 아무리 그때의 연주를 떠올 려 보아도 드문드문 모호한 부분이 있다.

    손에 땀이 차오른다.

    부담을 느끼는 건가.

    이 내가?

    ‘아니.’

    실수란 있을 수 없다.

    한 가지 다행인 건 적어도 단원들 이 내 지휘에 따라오지 못할 리는 없다는 점이다.

    나의 성채. 나의 사람.

    나를 믿고 따르기에 가시수풀이라 도 기꺼이 따라올 그들이 있는 한 이 문제는 나만 완벽하면 될 일이다.

    그래야 할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숨을 길게 내쉬고.

    입을 열었다.

    “올라가죠.”

    최지훈의 도움을 받아 무대로 나섰다.

    장막 밖에서 관객들이 내는 여러 소리가 전해진다.

    가슴이 뛴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2027 오케스트라 대전 런던 그랑프리 1차전! 첫 번째 무대는 베를린 필하모닉입 니다!”

    장막이 걷히는 소리와 함께 관객들 의 환호가 온몸을 때렸다.

    “빈! 빈! 빈! 빈!”

    “마에스트로!”

    “빈! 빈! 빈! 빈!”

    그 순간 요동치던 가슴이 차분해지 고 땀이 차올랐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등을 타고 서서히 올라오는 이 고 양감이야말로 최고의 안정제다.

    돌아서서 왼손을 들자 가우왕이 건 반을 눌렀다. 오른손을 드니 최지훈이 또 한 번.

    두 소리를 기준으로 중심을 잡고.

    지휘봉을 들었다.

    ‘아무 걱정 말고 지켜봐라, 타마키.’

    두 손을 힘차게 내리자.

    가우왕의 강렬한 타건이 바비칸 센터 콘서트홀을 울렸다.

    첼로와 베이스가 두터운 카페트를 깔았고 스칼라가 이끄는 제1바이올린이 다부진 목소리로 노래를 시작 한다.

    ‘좋아.’

    시작은 성공적이다.

    스칼라와 제1바이올린이 유도한 대로 잘 따라와 다른 악기들도 연습과는 조금 다른 박자를 무리 없이 따 라오고 있다.

    ‘가우왕.’

    왼손을 내리깔자 가우왕이 평소보다 조금 느리게 연주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지휘만으로는 모든 정보를 전달하기 어렵다.

    연주를 이어나가는 도중에 조금씩 조율해 산타가 북을 칠 지점에 정확 히 도착해야 한다.

    ‘너무 느렸나?’

    지휘봉을 들어 올려 첼로와 비올라, 베이스에게 신호를 주었다.

    연습 때와는 달리 조금 일렀지만 단원 모두 잘 반응해 주고 있다.

    현악기가 펼치는 선명하고 맑은 음 색이 타마키의 순수한 열정처럼 콘서트홀을 채워나간다.

    조금씩 잠잠해지는 가우왕과 최지훈의 피아노.

    소소가 이끄는 첼로가 그 위로 올 라섰다.

    두껍고 높은 성벽과 같은 단단한 연주와 선율이 마치 피아노를 억압 하는 듯하고.

    료코와 비올라들이 현실에 짓눌린 타마키를 애잔히 위로한다.

    ‘ 빨라.’

    이제 곧 타악기들이 나설 때.

    머릿속에서 펼쳐 둔 악보를 따라 현악기를 다독였다.

    조금 더.

    조금만 더.

    분위기가 조금씩 고조된다.

    현악기들의 노래가 안정을 찾아 가고 지금.

    지휘봉을 높이 들어 튕기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큰 북이 울렸다.

    ‘됐어.’

    나도 모르게 지휘봉을 잡은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심지어 북면에 손을 댄 듯 잔향마 저 잡혀 있다.

    처음부터 약속한 것처럼.

    최지훈과 가우왕의 피아노가 맹렬 히 질주하고.

    금관악기와 타악기들이 내는 소리 와 함께 처절한 사투가 시작된다.

    힘차게 울리는 큰북 소리가 마치 타마키 히로시를 웅원하는 듯하다.

    죠엘은 두 손을 모은 채 가슴 졸였다.

    한 번도 연습에 참가하지 않았던 동생이 혹시라도 실수할까, 그로 인 해 베를린 필하모닉과 관객들에게 피해가 생길까.

    또 산타가 상처받진 않을까.

    여러 걱정으로 죠엘 웨인의 가슴은 터질 듯 뛰었다.

    ‘산타.’

    그녀는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고 그레이 웨인은 그런 딸을 위로했다.

    상냥한 손길에 고개를 돌린 죠엘은 어머니의 미소를 볼 수 있었고 곧 그녀를 따라 무대 위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

    동생 산타가 가장 동경하는 사람들 과 함께 있었다.

    누나 마음은 모르고 천진하게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 보스.’

    죠엘은 배도빈의 등에 대고 기도했다.

    제발 산타에게 힘을 달라고.

    오늘의 공연을 무사히 마쳐달라고 간절히 바랐다.

    그러다.

    그가 지휘봉을 높이 튕겼을 때.

    그저 웃고 있었을 뿐인 산타가 그녀가 기억하는 표정 중 가장 행복한 얼굴로 북채를 힘차게 휘둘렀다.

    보호해야만 했던 동생이.

    몇 년 전만 해도 대화조차 어려웠던 동생이 내는 북소리가 바비칸 센터 콘서트홀을 넘어서 전 세계에 울리고 있었다.

    ‘ 아아.’

    참아왔던 불안과 우려가.

    환희로 바뀌는 순간.

    죠엘 웨인은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가까스로 입을 막아 흐느끼는 그녀 옆에 어머니도 조용히 눈물을 훔쳤고 연주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

    “브라보!”

    “브라보!”

    배도빈이 두 팔을 번쩍 들어 끝을 고하자 관객들이 박수를 보냈고.

    그 함성 사이로 객석에 있던 베를린 필하모닉의 직원들이 모두 일어나 일제히 외쳤다.

    “산타! 산타!”

    “산타! 산타!”

    “흐햫!”

    그 환호 뒤에서 모녀는 서로를 끌 어안았고.

    배도빈은 신경을 극도로 집중한 탓 에 땀을 비 오듯 쏟으면서도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

    런던 그랑프리 1차전, 첫 번째 공 연이 끝나고 객석의 반응은 금세 화제가 되었다.

    관중석 한쪽에서 일제히 일어나 무 대로 달려 나간 베를린 필하모닉 직원들이 산타라는 이름을 연호했고.

    연주를 마친 단원들이 생전 처음 보는 드러머와 배도빈을 헹가래 올렸기 때문이었다.

    온라인을 통해 런던 그랑프리를 관 람하던 사람들은 산타가 누군지 알기 위해 영상을 돌려보았고.

    연주 도중 카메라에 순간적으로 잡 힌 산타 웨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ㄴ 처음 보는 사람인데?

    ㄴ 베를린 필하모닉에 저런 애도 있었나?

    ㄴ 시선 처리도 이상하고 표정도 그렇고 이런 말 좀 조심스럽지만 어디 안 좋은 사람 아니야?

    ㄴ 그래 보임. 뭐지?

    ㄴ 뭔지 모르겠는데 눈물 나.

    ㄴ 나도 괜히 짠하네.

    ㄴ 결과도 안 나왔는데 엄청 좋아하네.

    ㄴ 연주가 좋았잖아. 성공적으로 연주해서 그런 거 아닐까?

    ㄴ 당연히 좋았지. 근데 베를린 필하모닉이 연주 잘했다고 저렇게 반 응한다고?

    ㄴ 그건 그러네.

    ㄴ[링크] 이유 나왔다. 방금 올라온 기사인데 가서 봐봐.

    ㄴ[속보] 베를린 필하모닉 타악기 주자 슐링 뮌데르크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이게 뭔 소리야;;

    슐링 뮌데르크의 소식이 전해지면서 팬들은 산타라는 사람이 어떻게 무대에 서게 되었는지 추측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과거 베를린 필하모닉 어린이 타악 교실에 재직했던 사람이 그가 자폐증을 가지고 있었단 사실을 언급하였고.

    팬들은 베를린 필하모닉이 왜 그렇게 환호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예상은 배도빈의 인터뷰를 통해 확실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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