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536화
116. LegacyO)
런던 그랑프리 1차전 개막일.
주제 ‘자유’를 두고 열두 악단이 펼칠 진검승부에 전 세계가 떠들썩 했다.
온라인 클래식 음악 포럼 중 가장 큰 ‘아마데우스’는 현재 각각 종합 8위와 10위에 랭크된 런던 심포니와 런던 필하모닉이 홈그라운드를 맞이해 상황을 반전할 수 있을지.
빈 필하모닉과 암스테르담 로얄 콘 세트르허바우가 1, 2위 경쟁에 참여 할 수 있을지.
또 베를린 필하모닉이 LA 필하모닉과 동수를 이룰지 아니면 로스앤 젤레스의 독주가 이어질지에 대한 추측 글로 가득했다.
ㄴ 아무래도 익숙한 장소니까 좀 더 메리트가 있지 않을까 싶은데.
ㄴ 맞아. 그것도 이유인데 다른 악 단들에게 적응할 시간이 부족한 것에 대한 반사이익도 있음.
ㄴ 그러고 보니 그러네. 미국에서 할 때는 유럽 오케스트라가 손해 보는 게 좀 있었지. 컨디션 조절이 힘 들 테니. 시차 적응이라든가.
ㄴ 그럼 베를린이랑 빈 필은?
ㄴ 걔들은 괴물이라 논외야.
ㄴ 근데 최상위권 보면 저 말에도 일리가 있긴 하다. 어찌 되었든 로 스앤젤레스가 현재 1위잖아. 베를린 이랑 빈이 선전하고 있다 해도 암스 테르담이나 런던 심포니, 런던 필하모닉이 죽 쑤는 거 보면 아예 틀린 말은 아닌 듯.
ㄴ 어차피 오케스트라 대전 본선 진출한 악단은 전부 괴물임. 그 정도 실력이면 그때마다의 컨디션 차이가 크지.
ㄴ 나도 동의. 게다가 각 악단 단원들이 고령인 것도 한몫 하는 듯. 나 이도 많은 사람들이 10시간 이상씩 이동해서 다음 날 바로 연주하면 평 소 실력이 나오기 어렵지.
ㄴ 그럼 이번에는 북미 쪽이 불리한거네?
팬들의 대화는 오케스트라 대전이 시작되는 오후 6시(런던 기준)가 되기 하루 전부터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러는 가운데 날이 밝았고.
각 오케스트라는 바비칸 센터에 모여 오후 4시에 있을 개막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 도빈 군.”
사카모토 료이치가 멀리서 배도빈을 발견하곤 반갑게 다가갔다.
사카모토의 목소리를 들은 배도빈도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카모토.”
배도빈이 항상 그랬듯이 팔을 벌렸고 사카모토는 오랜 친구를 꽉 끌어 안았다.
“지훈 군도 반갑네.”
“안녕하세요.”
최지훈과도 친근하게 인사를 나눈 사카모토가 두 사람과 나란히 걸었다.
“빈 필은 언제 해요?”
아직 타 악단이 언제 무엇을 연주 하는지 발표되지 않았기에 배도빈이 궁금증을 못 참고 물었다.
“세 번째 날이네. 베를린은 언젠가?”
“오늘 첫 무대요.”
“허허. 이번에도 처음이구만. 시작 부터 기대되네. 어떤가. 날을 바짝 세워 왔을 듯한데.”
“사카모토는 안 그런 것처럼 말하 네요.”
“껄껄. 기대해도 좋네. 아주 재밌는 곡을 준비했지.”
사카모토의 말투가 순위 경쟁보다 오케스트라 대전 자체를 즐기는 듯 했기에 배도빈은 슬며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입원했을 때 첫 번째 오케스트라 대전에 참전하지 않은 걸 후회 했던 기억이 떠올라, 지금 그와 함께하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새 삼 확인할 수 있었다.
“사카모토랑 빈은 항상 기대하고 있어요.”
“음음. 참, 오는 길에 얀스 군도 봤는데 인사했는가?”
“그 녀석이랑 왜 인사를 해요.”
“껄껄껄. 베토벤 콩쿠르 뒤로 사이가 좋아진 게 아닌 모양일세.”
“좋을 거 없어요.”
“두 번 져서 삐졌어요.”
“하하하하!”
최지훈이 방실방실 웃으며 끼어들자 배도빈이 인상을 썼다.
그러나 사카모토도 최지훈도 웃을 뿐이라 콧김을 내쉬며 언짢아할 뿐 이었다.
“그나저나 어디 보자. 지훈 군이 함께 온 걸 보면 피아노 협주곡이겠군. A108이라든가. 안 그렇나?”
“글쎄요.”
“하하하. 곧 알게 되겠지. 그럼 또 보세.”
사카모토가 배도빈의 손을 꽉 잡아 흔들곤 단원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언제 봬도 정말 멋진 분이신 것 같아."
최지훈이 점잖으면서도 유쾌한 사카모토 료이치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배도빈도 괴팍하거나 예민한 인간만 있는 음악계에서 유독 특별한 사람이라는 사족을 덧붙이며 공감했다.
“서둘러야 하지 않아?”
“아니야. 천천히 가면 돼. 딱 맞을 것 같아.”
집합 시간이 다 되어갔기에 두 사람도 발을 재촉해 단원들과 만나기로 한 장소로 향했다.
“어?”
최지훈이 로비에서 심각한 표정을 짓곤 안절부절못하는 단원들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 있나 봐.”
“왜?”
“모르겠어. 다들 표정이 안 좋은데.”
“아, 도빈이 왔네.”
최지훈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마누 엘 노이어가 달려왔다.
“도빈아.”
“무슨 일 있어요?”
“뮌데르크가 안 왔어.”
배도빈이 눈썹을 좁혔다.
순간 불길해지며 예전 그가 몸이 좋지 않아 올해를 마지막으로 은퇴 하고 싶다고 말했던 일이 떠올랐다.
“점심 먹고 체한 것 같다고 먼저 가라 했거든. 약속 시간까지 안 오 길래 전화했더니 전화도 안 받고.”
“뮌데르크 누구랑 방 썼어요?”
“피셔. 아까 호텔로 돌아갔어.”
노이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배도빈의 이어폰이 울렸다.
-피셔 디스카우 님께서 통화를 원하십니다.
배도빈이 오른쪽 귀에 끼고 있던 이어폰을 두 번 건드리자 피셔 디스 카우의 목소리가 다급히 전해졌다.
-도빈아.
“네. 뮌데르크는요?”
-쓰러져 있어서 지금 병원으로 가는 길이야.
불길한 기분이 현실로 이어짐에 배도빈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일단 가까운 크롬웰이란 곳으로 가는데 도착해서 다시 연락할게.
“알겠어요.”
통화를 마친 배도빈이 그의 비서에 게 주문했다.
“엠마, 크롬웰 종합 병원으로 사람 보내세요. 피셔는 이쪽으로 보내고 뮌데르크에게 필요한 조치는 모두 취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병원이라고?”
“큰일은 아니지?”
놀란 단원들이 어느새 주변을 감싸 고 질문을 쏟아냈다.
“쓰러져 있었대요. 피셔가 병원으로 데리고 가는 중이고.”
단원들의 표정이 더욱 심각해졌다.
뮌데르크의 나이가 적지 않고 더군다나 몸이 좋지 않은 것을 이유로 은퇴가 예정되어 있었기에 걱정이 더해졌다.
배도빈도 마찬가지였으나 애써 불안함을 달래며 냉정을 유지했다.
“지금 몇 시죠?”
“3시 50분.”
개막식이 10분밖에 남지 않은 상황.
뮌데르크가 걱정되긴 해도 개막식에 불참할 순 없었다.
“일단 입장합니다. 엠마는 밖에서 연락 대기하고요.”
단원, 직원들에게 지시하던 배도빈이 순간 멈칫했다.
“네빌.”
“네, 보스.”
배도빈의 부름에 네빌 타악기 부수석이 대답했다.
“타악기 예비 인원 없죠.”
“네.”
인원에 여유가 있는 현악, 금관, 목관 등에서는 혹시 모를 예비 단원을 데려왔으나 타악기에는 인원이 부족했다.
피셔 디스카우가 팀파니 수석과 타 악기 수석을 겸직하고 있을 정도였으니 정기 연주회를 위한 인원을 두고서 오는 것만으로도 빠듯한 실정 이었다.
공연까지 남은 시간은 두 시간.
당장 베를린에 연락해 런던으로 출 발한다 해도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뮌데르크의 안위와 2시간 뒤의 공 연에 대한 걱정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다른 악단에서 협조를. 아니, 연습 조차 안 되어 있는 사람을 구해봤자...'
급한 대로 다른 날짜로 예정된 오케스트라에서 타악기 연주자를 구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배도빈이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날짜 변경을 요청하는 게 나아. 아니면 시간이라도.’
그러나 그것이 가능할지에 대해선 회의적이었다.
‘……차라리.’
배도빈이 그의 비서를 다급히 불렀다.
“엠마, 지금 당장 미카엘 블레하츠 협회장에게 연락하세요. 급한 일이라고 하면 응할 겁니다.”
“네, 보스.”
배도빈이 찰스 브라움을 불렀다.
“찰스, 개막식 부탁할게요.”
“걱정 마.”
찰스 브라움에게 감독 대행을 맡긴 배도빈은 곧 미카엘 블레하츠와 연 결되었단 보고를 받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미팅실로 향하기 전 단원들 에게 당부했다.
“모두 괜찮을 겁니다. 뒷일은 저와 사무국에 맡기세요.”
모두 알고 있었다.
너무나 걱정되었지만 지금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뮌데르크가 무사하 길 바라는 기도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었다.
당황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침착 함을 유지하고 일을 처리해 나가는 악단주의 모습에 단원 모두 고개를 굳게 끄덕였다.
“네, 보스.”
배도빈의 긴급 면담 요청에 미카엘 블레하츠 협회장이 다급히 미팅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선 곳에는 배도빈과 최지훈이 앉아 있었고 배도빈의 비 서 엠마가 그 옆을 지키고 있었다.
“도빈아.”
“블레하츠.”
블레하츠가 최지훈과 눈인사를 나 누고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이야. 이렇게 다급히.”
“단원 중에 한 사람이 쓰러졌어요.”
배도빈은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했고 블레하츠는 그도 익히 이름을 들었던 뮌데르크가 쓰러졌음에 탄식했다.
“어떤 상황인데?”
“아직 연락은 없지만 참가는 못할 거예요.”
설사 뮌데르크가 고집을 부려 나선다 해도 배도빈은 그를 무대에 올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지난 몇 번의 경험을 통해.
그리고 본인에게 찾아온 시련 때문 이라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단지 그가 무사하길 바랄 뿐이었다.
“그래서 몇 가지 규정 확인 좀 부탁드리려고요.”
“응. 얼마든지.”
“혹시 공연 순서를 바꿀 수 있어요?”
“그건…… 어려워. 다른 악단도 준비해 둔 게 있으니까. 당일만 아니었어도 어떻게 해봤을 텐데.”
배도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좋은 방법이었으나 여러모로 무리가 있는 요청이었다.
블레하츠의 말대로 전과 같이 시간을 두었다면 모를까.
현실적으로 이미 여러 악단이 스케줄을 마친 상태에서 그러한 요구를 할 수는 없었다.
“네. 그러면 사람을 새로 부르는 건 가능한가요?”
“괜찮아. 참가 신청이 지휘자 이름과 악단으로 되어 있으니까. 지휘자 가 바뀌는 건 안 되지만 단원이라면 상관없어. 하지만 지금 불러도 베를린에서 여기까지 오는 게……
“런던에 있어요.”
배도빈의 말에 블레하츠가 일단 안도했다.
“다행이네.”
“하지만 단원은 아니에요.”
미카엘 블레하츠가 입을 다물고 고 민했다.
배도빈과 베를린 필하모닉의 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들을 돕고 싶었지만 제아무리 협회장이라 해도 홀로 결정할 사항이 아니었다.
그때 최지훈이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 당장 계약을 하면 가능 할까요?”
“……편법이지만 가능하죠.”
블레하츠의 대답에 배도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블레하츠.”
“아니야.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으니 다행이네.”
배도빈이 일어나 주먹을 쥐어 보였다.
최지훈이 웃으며 주먹을 맞부딪쳤고 그렇게 미팅실에서 나왔다.
“좋은 생각이었어.”
“가우왕 씨 때 일이 생각나서. 그 런데 누굴 데려오려는 거야?”
“잠깐.”
배도빈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죠엘 웨인에게 전화해.”
-죠엘 웨인 님에게 전화를 걸겠습니다.
최지훈은 배도빈이 왜 휴가를 간 그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는지 이 해할 수 없었지만 잠자코 기다렸다.
곧 죠엘 웨인이 전화를 받았다.
-네, 보스. 죠엘입니다.
“지금 런던에 있죠?”
-네. 가족들이랑 호텔에 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는 내가 해야 할 것 같아요. 지금 산타 데리고 바비칸 센터로 올 수 있어요?”
-그럼요. 한데 왜…….
“만나서 이야기하죠. 웨인 부인도 모시고 와주세요. 어디 호텔이에요?”
-몽캄 로열 런던 하우스입니다. 가 까우니 걸어가도.
“아뇨. 차 보낼 테니 타고 와요.”
배도빈이 통화를 마치고 엠마에게 지시했다.
“몽캄 로열 런던 하우스 호텔로 차 량 보내서 죠엘 가족 데리고 오세요.”
“네, 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