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535화
116. Legacy(2)
“무, 무슨 뚯이지?”
당황한 찰스 브라움이 말까지 더듬 으며 되묻자 배도빈이 고개를 살짝 틀었다.
“둘이 함께 연주하란 뜻이에요.”
그런 말도 이해 못 하냐는 듯 나무라는 말투에 찰스 브라움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나, 나, 찰스 악장님만큼 부드럽게 연주할 자신 어, 없는데.”
“할 수 있어요.”
나윤희도 배도빈의 단호한 어조에 순간 멍해졌다.
선이 굵고 힘찬 연주가 강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윤희가 부드럽고 서정적인 연주를 못 하는 건 결코 아니었다.
단지 스트라디바리우스 파이어 버 드를 연주하는 찰스 브라움을 따라 가야 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것은 찰스 브라움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윤희가 연주하는 블러드 와인은 배도빈의 캐논만큼이나 폭발력이 있었고.
자신의 소중한 파이어 버드에게 그 런 난폭한 노래를 강요할 순 없었다.
“두 사람이 함께 연주할 파트는 따 로 있으니 걱정 말고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하면 돼요. 이번 불새는 두 마리니까.”
두 사람을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고 있는 배도빈도 그 이상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았고.
찰스 브라움과 나윤희는 그제야 안 도했다.
“크루즈 공연은.”
배도빈이 잠시 고민하는 듯 말끝을 흐렸다.
회의에 참석한 사람 모두 앞선 네 사람의 경우를 보았기에 잔뜩 긴장 할 수밖에 없었다.
“프란츠 페터와 진달래가 맡겠습니다.”
회의실 테이블 끝에서 낙서를 하고 있던 프란츠 페터가 깜짝 놀랐고 진달래는 두 팔을 번쩍 들며 기뻐했다.
“이번 그랑프리는 저번 오케스트라 대전보다 일정이 빠듯하니 따로 준비할 시간은 없을 겁니다. 페터가 반주하고 달래가 무대 맡아.”
“넵!”
웃고 떠드는 밴드 스케줄 이외에는 활동하지 못했던 진달래가 다소 과장해 경례까지 했다.
“두 사람 모두 그간 노력해 왔으니 잘해내리라 믿을게.”
어쩌면 경험이 부족한 두 사람에게 공연을 모두 맡기는 일이 성급한 선택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배도빈은 그간 자신의 곁에 서 분발해 온 두 사람을 믿었다.
“그럼 총연습은 모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평소와 같이 갑니다.”
“예, 보스.”
* * *
“괜찮습니다.”
죠엘 웨인은 휴가 제안을 극구 거절했다.
이자벨 멀핀은 이미 배도빈의 개인 비서를 넘어서 베를린 필하모닉의 중심축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비서실에 그녀를 제외하고 네 명이 더 있었지만 좀처럼 마음 편히 휴가를 쓸 수 없었다.
곧 런던 그랑프리 일정이 시작되었기에 24시간 보좌할 사람이 필요한 탓이었다.
“걱정 말고 다녀와요.”
그러나 배도빈도 완고했다.
“작년에도 휴가 못 썼잖아요. 그동 안 고마웠고 충분히 쉬다 와요.”
배도빈이 시력을 잃은 뒤로 비서실 직원과 나윤희 등이 적극적으로 그 의 곁을 지켰으나 죠엘 웨인은 말 그대로 24시간 내내 그를 보좌하고 있었다.
산타와 관련한 일로 자발적으로 나 선 일이라 배도빈도 고마우면서도 마음이 쓰였다.
“하지만.”
“아뇨. 다녀와요. 런던 그랑프리는 지훈이랑 같은 방 쓸 거니 괜찮아요. 비서들도 다 데리고 갈 거고.”
배도빈의 고집을 잘 아는 죠엘 웨인은 어쩔 수 없이 그의 배려에 감사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필요하실 땐 꼭 연락 주세요.”
“그런 일이 있으면 안 되죠.”
“그건 그렇네요.”
두 사람이 작게 웃었다.
“인사과에 말해두었으니 퇴근할 때 들렀다 가요.”
“네. 아, 보스.”
죠엘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 네.”
“저…… 그러니까.”
“편하게 말해요.”
망설이던 죠엘이 겨우 입을 열었다.
“시, 실은 가족 여행을 가고 싶었는데. 이번 런던 그랑프리 공연을..”
산타를 돌보고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던 가족은 여행 한 번 제대로 즐기지 못했었다.
대학 졸업 이후 곧장 취직해 일만 해왔던 27살 죠엘 웨인은 음악을 좋아하는 어머니와 동생을 위해 오케스트라 대전과 함께 여행을 즐기 고 싶었다.
어린 직원이 조심스레 언급한 속내 에 배도빈이 빙그레 웃었다.
“걱정 말고 가봐요.”
“감사합니다.”
죠엘이 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가 들리자 배도빈이 책상 위로 손을 뻗 어 내선 전화기를 더듬었다.
숫자 9번을 누르자 얼마 후 푸르트벵글러호를 담당하는 부서로 연결 되었다.
-네, 보스. 크루즈 경영팀 포트먼 입니다.
“푸르트벵글러호 예약 끝났겠죠?”
-일반실은 마감되었고 단원들을 위한 특실은 남아 있습니다.
“좋네요. 빈 방 하나 마련해 주세요. 예약자는 죠엘 웨인으로 하시고.”
잠시 뒤.
인사과를 찾은 죠엘 웨인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네? 잘못된 거 아니고요?”
“방금 크루즈 경영팀에서 연락 받았어요. 자, 여기.”
각 악단에게 할애된 그랑프리 관람 권만 얻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거늘.
푸르트벵글러호 왕복권은 상상도 못했었다.
이미 예약이 끝나기도 했고 티켓 값 자체도 산타의 치료비를 감당하는 죠엘 웨인으로선 부담스러운 수준이었다.
그래서 언젠가는 꼭 한 번 어머니 와 동생에게 푸르트벵글러호를 경험 시켜 주고 싶었던 것이 꿈이었는데.
이렇게 이뤄질 줄은 몰랐다.
‘보스•…”
죠엘이 티켓을 받아들고 감사함에 어쩔 줄 몰라 했다.
감격에 젖은 그녀는 티켓을 한참이 나 바라보다가 함께 받은 서류로 눈을 돌렸다.
10일간의 휴가와 함께 10,000유로 의 휴가비가 지급되었다는 확인서를 본 죠엘은 눈썹을 모으며 눈을 의심 했다.
연봉의 25퍼센트에 해당하는 거액 과 10일이라는 긴 휴가에 정신을 못 차리는 그•녀에게 인사과 직원이 미소를 보내주었다.
“휴가 즐겁게 보내세요.”
“아, 감사합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큰 행복에 죠엘은 아직도 얼떨떨했다.
며칠 뒤.
너무나 오랜만에 가족 여행에 나선 그레이 웨인과 산타 웨인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히 야아.”
“세상에. 너무 멋있다.”
금빛으로 빛나는 푸르트벵글러호의 휘황찬란한 모습에 죠엘 웨인도 가슴이 뛰었다.
“ 좋아?”
누나의 질문에 산타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정말 너무 감사해서 어쩌니.”
“그러니까. 이런 일 또 없을 거니 까 맘껏 즐기자, 엄마.”
그레이 웨인이 싱긋 웃곤 딸을 안았다.
“그래.”
남편이 죽은 후로 딸 죠엘은 집안 일을 거의 도맡아 하면서도 동생을 보살폈다.
그러면서도 학교 성적도 좋았다.
놀고 싶었을 텐데 너무 어렸을 적부터 철이 든 딸이 안쓰럽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했거늘.
직장에서 이런 대접을 받을 정도로 성장했다 생각하니 악단주 배도빈에게 감사하면서도 그런 딸이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그때 산타가 누나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죠엘이 고개를 돌리자 산타가 런던 그랑프리 팸플릿을 들어 베를린 필하모닉이 타마키 히로시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한다는 곳을 가리켰다.
런던으로 여행을 오고 싶었던 이유는 산타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듣는 타마키 히로시 피아노 협주곡의 실연을 들려주기 위함.
전 세계 최고 수준의 오케스트라를 상대로 베를린 필하모닉이 전력을 다한 타마키 히로시 피아노 협주곡 은 분명 녹음된 것과 다른 즐거움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봐 봐. 여기 4월 21일에 한다고 되어 있지?”
"응."
“오늘 며칠?”
산타가 당황해서 손가락을 접으며 날짜를 헤아리자 죠엘이 웃으며 산 타의 뺨을 쓰다듬었다.
“오늘 19일. 이틀 더 기다려야 해.”
산타가 고개를 끄덕이고 웃었다.
“이, 잊으면 안 돼.”
혹시나 베를린 필하모닉 공연을 못 볼까 봐 누나가 잘 기억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행동이었고.
그레이와 죠엘이 그 모습에 웃고 말았다.
한편.
오늘 공연을 맡게 된 프란츠 페터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공연 전반을 담당하게 된 것은 처 음인 그는 병적으로 악보를 확인했고 그 행동은 리허설까지 이어졌다.
배도빈을 지켜보며 만들었던 체크 리스트를 반복해 확인하는 행동이 장시간 이어지자 스태프들도 조금씩 지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진달래가 프란츠에게 다가갔다.
“프란츠.”
“네, 네?”
“괜찮아. 다 확인했잖아.”
“그래도……
진달래가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는 페터의 어깨를 힘주어 잡았다.
“다들 엄청 기대하고 있을 거야. 신나게 해줘야지 이러고 있으면 어떡해.”
“……네.”
페터가 힘없이 대답했다.
진달래가 씩 웃으며 말했다.
“아티스트가 불안하면 관객도 불안해진대. 즐겁게 연주하면 덩달아 즐 거워하고. 배도빈이 한 말이야.”
“형이…… 그런 말을 했어요?”
"응."
진달래가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을 주었다.
‘그런 말 한 적 없지만.’
그러나 적어도 공연을 앞두고 불안해했던 페터는 그 말에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네. 히, 힘낼게요.”
“좋아.”
두 사람이 고개를 굳게 끄덕였다.
그렇게 무대에 나선 두 사람은 푸르트벵글러호의 무대를 성공적으로 꾸몄다.
프란츠 페터는 더욱 발전한 연주를 선보였고 그의 피아노를 반주 삼아 노래한 진달래는 이미 전성기를 맞이해 있었다.
두 사람의 성장을 확인한 배도빈도 흡족해하며 박수를 보냈다.
최지훈도 곁에서 감탄했다.
“달래 진짜 잘한다.”
“저 정도는 해야지.”
“프란츠도 그새 많이 늘었고.”
“작년 콩쿠르 이후로 혼 좀 났으니까.”
“작년? 아.”
최지훈이 작년 배도빈 콩쿠르가 진행되던 무렵을 떠올렸다.
프란츠의 피아노가 조금도 늘지 않았다며 불쾌해했던 배도빈이 그려졌고 자연스레 페터가 얼마나 혼나며 연습했을지 연상되었다.
“가자. 배고프다.”
“응. 손 잡을게.”
“일일이 안 잡아도 된다니까.”
“넘어지면 안 되잖아.”
“안 넘어져.”
“거짓말.”
“내가 거짓말하는 거 봤어?”
“그럼 종아리에 멍이 안 생기면 믿어줄게.”
곁에 있던 배도빈의 비서는 그의 보스를 다룰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 함께해 주어서 고맙기 그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