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533화 (533/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533화

    115. March(5)

    경탄.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공연은 그야말로 감격이었다.

    해일처럼 파도치는 오케스트라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피아노.

    지휘자 아리엘 얀스에 의해 완벽히 조율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B플랫 단조는 그보다 조화로울 수 없었다.

    고개를 저으며 박수를 보내던 한이 슬이 감탄을 거듭했다.

    “진짜네. 진짜야. 어제 시카고 심포 니보다 반응이 더 좋은 거 같은데.”

    “아리엘이랑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은 그렇다 쳐도 툭타미셰바는 정 말 뭐라 해야 좋을지 모르겠네. 근 1〜2년 안에 사람이 저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나?”

    정세윤 기자도 공감했다.

    비록 완전하진 않았지만 그녀는 배도빈 콩쿠르 도중 ‘세 개의 손을 위 한 소나타’를 연주해냈었다.

    지금까지도 공식 무대에서 가우왕 외에는 연주하지 못할 정도로 고난 이도의 곡이었기에 많은 사람이 엘 리자베타 툭타미셰바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는데.

    오케스트라 대전 본선에서 더욱 정 교하고 풍부한 연주를 해내니 크리 스틴 지메르만, 가우왕, 최지훈, 막 심 에바로트, 최성신, 니나 케베리히 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넌 어떻게 봤어?”

    한이슬이 차채은에게 물었다.

    “아.”

    입술을 만지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차채은이 입을 열었다.

    “툭타미셰바가 잘하는 거야 알고 있었는데.”

    “ 있었는데?”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한테 좀 놀랐어. 아리엘 오빠 복귀하고 영상으로는 많이 들었는데 실연은 처음이 거든.”

    차채은은 어떻게 피아노를 전면에 내세워 그 기량을 최고조로 뽑으면서도 오케스트라의 매력을 부각시킬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솔직히 암스테르담이나 런던 심포 니보다 더 나은 거 같아. 지휘자의 역량도 그걸 소화하는 악단도……

    차채은은 실로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이 베를린 필하모닉을 위협할 수 있다 생각했다.

    아리엘은 본인의 조부이자 음악계 의 전설 마리 얀스에 근접해 있는 것 같았고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은 마치 토마스 필스 시절의 전성기를 보는 듯했다.

    차채은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우승은 도빈 오빠가 할 거야.’

    차채은은 기적을 일으켜 왔던 배도빈과 베를린 필하모닉 그리고 최지훈을 떠올리며 닫혀 있는 커튼을 지 켜보았다.

    이내.

    사회자의 안내와 함께 장막이 걷혔다.

    “빈! 빈! 빈! 빈!”

    콘서트홀이 요동쳤다.

    긴 시간 배도빈을 그리워했던 관객 들의 함성이 배도빈과 단원들의 가 슴에 확실히 닿았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모두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작년 한 해, 배도빈의 부재라는 위 기 속에서도 권좌를 지켜냈던 마왕 의 친위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날이 서 있었다.

    누구도 그들의 권위를 의심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세계 제일의 오케스트라였지만.

    다소의 부진이 그들의 고결한 자존 심에 상처를 냈던 것이다.

    흉흉한 분위기마저 흘리는 베를린 필하모닉은 앞선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화사함과 무척 대조되었다.

    ㄴ 박력 장난 아니네.

    ㄴ 이게 베를린 필하모닉이지. 카리스마로 다 찍어누르는 게 푸르트벵글러-배도빈의 베를린 필하모닉이었음.

    ㄴ 배도빈이다.  이게 얼마 만이야. 대체.

    ㄴ 단원들 한 명 한 명이 일단 최정 상급이니까. 저런 오케스트라 진짜 몇 없음.

    ㄴ 읭? 나비가 두 대임.

    ㄴ 가우왕한테도 만들어줬나?

    등장만으로 콘서트홀을 압도한 베를린 필하모닉은 엄숙히 공연을 준 비했다.

    상처 입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그들의 왕을 위해.

    최고의 연주를 하기 위해.

    완벽해야 할 이유는 차고 넘쳤다.

    주변이 조용해지길 기다렸던 배도빈은 천천히 돌아섰다.

    ‘훌륭한 여흥이었다.’

    배도빈은 시카고 심포니와 대한국 립교향악단, 런던 심포니,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연주를 들으며 흡 족해했다.

    후배 음악가들의 성장에 기뻐했고.

    그들의 놀라운 기량에 기꺼이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왕은 왕, 백성은 백성일 뿐.

    권좌를 넘겨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 보아라.’

    마왕은.

    이 무대를 통해 그의 건재함을 다 시금 확실히 하고자 했다.

    그가 왼손을 들자 가우왕이 건반을 눌렀고 오른손을 뻗자 최지훈이 건반을 눌렀다.

    그 소리를 통해 중심을 잡은 배도빈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두 팔을 모았다가 힘차게 내렸다.

    배도빈 피아노 협주곡 1번, 베를린 환상곡.

    마왕의 친위대가 순행을 시작했다.

    찰스 브라움이 이끄는 제1바이올린 과 왕소소가 이끄는 첼로가 향수를 자극했다.

    코끝을 간질이는 부드러운 멜로디는 풍경을 묘사하지 않는다.

    어머니의 품과 같이.

    그리운 마음을 떠올리게 해 관객을 그때 그 시절,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이끈다.

    친위대의 행진을 따라.

    관객들은 각자 마음속에 소중히 보 관하고 있던 추억으로 여행을 떠났다.

    마누엘 노이어가 이끄는 바순이 따 뜻하게 울리고.

    플루트가 새싹처럼 돋아나며.

    나윤희의 제2바이올린과 나카무라 료코의 비올라가 서서히 목소리를 내자 어느덧 관객들의 머릿속에는 고향의 전경이 완성되어 갔다.

    사랑하는 어머니, 아버지.

    들판을 함께 뛰놀던 벗들.

    가슴 설레게 했던 그 아이.

    눈을 감은 관객들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다.

    그 순간.

    곡의 풍조가 바뀌었다.

    누군가 순행에 나선 마왕을 습격했다. 첼로와 베이스가 암운처럼 드리 우고 트럼펫의 외침 아래 친위대가 칼을 뽑아 든다.

    갑작스러운 공격에도 친위대는 용맹하게 맞선다.

    제1바이올린과 제2바이올린이.

    퍼스트 피아노와 세컨드 피아노가 서로 경쟁하듯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의 칼과 방패를 내민다.

    그러나 전황은 점점 불리해지고.

    마왕은 퇴각하고 만다.

    제1바이올린과 퍼스트 피아노의 맹렬한 질주에 제2바이올린과 세컨드 피아노의 목소리는 조금씩 잦아든다.

    1악장이 끝나고.

    곧장 이어진 2악장은 음울하게 시작한다.

    고향을 잃은 상실감과 그리움이 첼 로의 묵직한 화음으로 짙어지는데.

    그럴수록 상처 입은 마왕과 그 친 위대의 가슴이 끓어올랐다.

    후퇴라는 선택과 나라와 백성을 지 키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들을 채찍 질했다.

    지친 몸이 굶주려도 칼날 같은 추 위가 몸을 베어내도 분노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모든 악기가 노래를 멈춘 순간에도 이어지는 피아노처럼.

    가우왕의 피아노는 화를 주체하지 못했다. 타오르는 열정은 당장에라도 적군을 불사지를 듯 열기를 뿜어 댔다.

    그 강인한 의지를 응원하던 관객들 은 순간 이상함을 느꼈다.

    소리가 나는 장소가 왼쪽에서 오른 쪽으로 움직인 듯한 착각이 들었다.

    눈을 뜨자.

    분명 가우왕이 연주하고 있었을 터 인데, 어느새 그의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자 반대편에서 최지훈 이 지금껏 보여주지 않았던 야성을 폭발시키고 있었다.

    분명 가우왕의 연주였다.

    관객뿐만 아니라 음악에 조예가 있는 이들조차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카덴차를 시작한 피아노는 분명 한 대.

    가우왕이 평소 들려주던 그 소리였고 잠시 눈을 감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눈을 뜨니 어느새 피아니스트가 바뀌어 있었으니 상황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재밌네요.’

    크리스틴 지메르만이 두 피아니스트의 트릭을 눈치채곤 빙그레 웃었다.

    ‘ 괴물들.’

    엘리자베타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피아니스트가 두 사람인 이상 두 대의 피아노가 완벽히 똑같은 연주를 할 순 없었다. 최대한 유사히 연주하겠지만 한 사람이 연주하는 것 처럼 할 순 없는 노릇.

    그러나 가우왕과 최지훈은 달랐다.

    가우왕이 연주를 시작하고 최지훈이 그것을 이어서 연주했던 것이었다.

    당연히 있어야 할 어긋남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두 사람은 연주를 주고받고를 반복했다.

    그러면서도 연주는 단 한 대의 피아노와 한 사람의 완벽한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것처럼 이어졌다.

    대신.

    소리가 발생하는 지점이 좌측과 우측을 오가며 보다 입체적으로 콘서트홀을 채우고 있었다.

    그러한 일은 곧 찰스 브라움의 제 1바이올린과 나윤희의 제2바이올린 에 의해서 재현되었다.

    한 번 경악했던 세계가.

    ‘가우왕과 최지훈이니까’라는 이유로 겨우 납득했던 세계가 전율했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피아니스트로 손꼽히는 가우왕과 최지훈뿐만 아니라, 모든 악기가 하나처럼.

    베를린 필하모닉이라는 하나의 악 기처럼 다가왔다.

    마리 얀스, 사카모토 료이치, 브루 노 발터,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제르바 루빈스타인, 엘리아후 인손, 아리 엘 얀스, 프란츠 미스트, 차명운, 레 몽 도네크, 알렉산드르 헤신.

    오케스트라 대전 본선에 오른 모든 지휘자들이 동요했다.

    오케스트라가 하나의 악기처럼 작 용한다는 비유적 표현이 아니었다.

    대체 어떤 연습을 반복해 왔기에 이런 연주가 가능한 것인지 그들로 서도 알 수 없었다.

    아니, 노력한다고 가능한 일인지부 터 의심스러웠다.

    각 악기가 하나처럼 연주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빈 필하모닉으로서 도 그들이 추구했던 이상적인 연주를 목도하자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무슨 짓을 한 겐가, 도빈 군.’

    배도빈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오랫동안 지켜보았던 사카모토 료이치조차 두 귀를 의심했다.

    시력을 잃고 비약적으로 예민해진 배도빈의 청력에 부응하려고 지난 1년간 매일 같이 땀 흘렸던 베를린 필하모닉을 모르는 그로서는 지금 그들이 펼치는 연주를 이해할 수 없었다.

    상처 입은 줄로만 알았던 제국은.

    회복에 전념하고 있는 줄로만 알았던 마왕과 그 군세는 지난 오케스트라 대전 우승 당시보다 훨씬 예리하 고 강인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경악 속에.

    연주는 계속되었다.

    영토를 잃은 마왕은 반란군을 향해 천천히 행진했다.

    군량은 떨어지고 몸은 지쳤다.

    병력과 병장기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차이가 났다.

    그럼에도 마왕군에게 기습이란 없었다.

    압도적인 힘으로.

    당당히 왕도까지 행진했다.

    천천히. 위엄을 잃지 않고.

    앞을 가로막는 반란군을 베어내며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나아갔다.

    베이스와 바순이 비장히 울리고.

    피아노가 깃발을 우뚝 세운 채 마왕의 지휘 아래 성벽을 넘어서자 금관악기가 폭발하듯 마왕의 귀환을 알렸다.

    연주가 끝나고.

    금관악기가 남긴 소리가 공기 중에 스며들어 잔향이 흩어 없어질 때까지 콘서트홀은 고요했다.

    압도적인 심상.

    저항할 수 없는 힘.

    가슴과 영혼에 행해진 폭력 앞에 세계가 굴복한 순간이었다.

    배도빈이 뒤돌아 객석을 향해 고개를 숙이자 그제야 교화된 만백성이 신을 향해 엎드렸다.

    “빈! 빈! 빈! 빈!”

    그는 웃고 있었다.

    * * *

    시카고 그랑프리 두 번째 날의 공 연이 마무리되었다.

    투표가 진행되는 도중 팬들은 도대 체 베를린 필하모닉과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이 몇 표를 획득할지를 두고 설전을 벌였다.

    ㄴ 일단 베를린 필하모닉이 무조건 1등임. 진짜 악단 전체가 돌았음. 걍 미쳤어.

    ㄴ 난 진짜 질리더라. 배도빈이나 몇몇 사람이야 이해 간다만 저런 연주를 할 수 있을 때까지 얼마나 괴 로웠겠어. 베를린에 비할 바는 아니 지만 지역 시향에서 일하는 입장에 서 저건 진짜 말이 안 돼.

    ㄴ 난 la에 투표했음. 솔직히 엘리 자베타 피아노 개쩔었다.

    ㄴ 아 미치겠다 진짜 -rr-rr 나 지금도 가슴이 쿵쾅대. 상트 페테르부르 크 연주 기억도 안 남 ㅠㅠ

    ㄴ 어제 시카고보다 많이 나오려나? 반응 진짜 장난 아니다.

    ㄴ 지금 각 악단 지휘자들 상대로 인터뷰하는 중인데 다들 한결같이 경이로웠다고 하더라.

    ㄴ 베를린이 1등 확정이네.

    ㄴ 솔직히 난 음악 잘 모르고 누구 실력이 나은지도 모르는데 배도빈이랑 베를린 음악은 그냥 쩔어. 그냥 좋아.

    ㄴ 몰라도 감동 받는 게 진짜 대단한 거지.

    ㄴ 아리엘 얀스랑 la 필하모닉 작년에 왜 기록을 갈아치웠는지 알겠더라. 악기들이 유기적으로 호응하는 건 베를린 못지않았음. 또 피아노랑 경쟁하는 듯한 표현도 좋았고.

    팬들이 열정적으로 그들이 받은 감동을 표현하고 있을 때 각 지휘자들도 베를린과 로스앤젤레스에 감탄하 고 있었다.

    취재를 나선 여러 기자들의 질문에 칭찬 일색이었고 깐깐하기로 유명한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마저 두 악단을 인정하고 말았다.

    그렇게 분위기가 무르익고.

    사회자가 나섰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2027 오케스트라 대전 시카고 그랑프리 2일 차가 모두 마무리되었습니다. 정말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 대단한 무대를 펼쳐 준 세 오케스트라에 큰 박 수 부탁드립니다.”

    관객들이 환호와 함께 박수를 보냈다.

    스크린에 팔짱을 끼고 있는 배도빈과 곧은 자세로 앉아 있는 아리엘 얀스 그리고 알렉산드르 헤신의 모습이 차례로 비쳐지자 함성은 더욱 커졌다.

    “그럼, 투표 결과 발표하겠습니다. 시카고 그랑프리 2일 차! 결과! 보여주세요!”

    중앙 대형 스크린에 베를린 필하모닉,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상트 페 테르부르크 필하모닉의 로고가 번갈 아 나타났고.

    이내 투표 결과에 따라 각 로고가 재배치되었다.

    [2027 오케스트라 대전 시카고 그 랑프리 2일 차 투표 결과]

    베를린 필하모닉

    (배도빈 피아노 협주곡 1번 C단조 ‘베를린 환상곡’. 가우왕•최지훈. 배도빈)

    59,112,185표 (1st)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B플랫 단조.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 아리엘 얀스)

    24,099,749표 (2nd)

    상트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E플랫 장조, ‘황제’. 루리얼 부르상, 알렉산드르 헤신)

    3,245,135표(6th)

    “우와아아아아!”

    “우워어어어!”

    베를린 필하모닉이 받은 압도적인 표 수에 전 세계가 경악했고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들조차 깜짝 놀라고 말았다.

    “보스, 59,112,185표로 현재까지 1 위입니다.”

    귀청이 떠나갈 것 같은 함성에 인상을 쓰고 있던 배도빈이 죠엘 웨인 의 설명에 미소 지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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