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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530화 (530/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530화

    115. March(2)

    “안녕하십니까, 저는 지금 제2회 오케스트라 대전 전야제에 나와 있습니다. 미시간호는 이례적인 한파 로 얼어붙었으나 저기 보시는 대로 관광객들의 열기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워 보입니다.”

    2027년 1월 26일.

    오케스트라 대전의 첫 무대로 선정 된 시카고는 혹독한 한파에도 불구 하고 뜨겁게 달아올랐다.

    밤하늘은 폭죽으로 가득했으며 노 스 사이드 해변가는 전야제를 즐기 기 위한 수백만 명의 관광객으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노스 사이드 해변가에는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축하 무대를 들을 수 있는 무대가 여러 곳에 설 치되어 있습니다. 관광객들은 앞으로 나흘간 이곳에서 콘서트홀에 입 장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랠 예정 입니다.”

    소식을 전하는 리포터의 입에서 허 연 입김이 나왔지만 화면을 통해 비 쳐지는 관광객들의 얼굴에서 추위를 느낄 순 없었다.

    희망과 즐거움이 가득한 표정들을 잡은 카메라는 천천히 시카고의 도 심을 잡아나갔다.

    윌리스 타워와 같은 마천루들이 내는 불빛으로 어우러진 시카고의 야 경은 눈부셨다.

    “내일부터 다시 시작될 세계 최고 수준 오케스트라들의 경합이 어떻게 진행될지 함께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뉴스 화면이 전환되어 시카고 오케스트라 홀의 정면을 비추었다.

    전야제 축하 무대가 진행되고 있는 시카고 오케스트라 홀은 시카고 심포니 디지털 콘서트홀과 이日를 통해 전 세계에 생중계 되고 있었다.

    거장 제르바 루빈스타인이 지휘하는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는 오케스트라 대전 전야제를 장식하기에 충분했고.

    배도빈과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들 역시 그들의 무대를 즐길 수 있었다.

    “좋다.”

    공연이 끝나자 최지훈이 박수를 보 내며 감상을 남겼다.

    “4년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것 같아. 대단하다, 시카고 심포니.”

    “확실히.”

    배도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최지훈 의 말에 동조했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마리 얀스, 브루노 발터,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사카모토 료이치의 명성에는 미치지 못하나.

    수십 년간 거장 중의 거장으로 활동했던 제르바 루빈스타인과 북미를 대표하는 명가 시카고 심포니.

    그들은 이미 완벽했던 4년 전 이 상으로 원숙해져 있었다.

    “저들도 필사적이었겠지.”

    "음."

    최지훈은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에 입단한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지금껏 앞만 보고 달리느라 주변을 보지 못했지만 1년간의 휴식과 베토벤 기념 콩쿠르, 배도빈 콩쿠르를 통해 정말 많은 음악가가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만찬회 가자!”

    그때 진달래가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배도빈과 최지훈이 깜짝 놀랐다가 고개를 저었다.

    “ 피곤해.”

    “나도 오늘은 푹 쉴래.”

    “왜애. 가자아. 료코랑 윤희 언니, 소소 언니도 안 간다고 했단 말이 야.”

    “너나 가. 어차피 얀스 녀석 보러 가려는 거잖아.”

    “아닌데. 바빠서 끝나고 보기로 했는데.”

    “흐으으암. 죠엘, 방으로 안내해 줘요.”

    “네, 보스.”

    배도빈이 진달래가 뭐라 하든 신경 쓰지 않고 콘서트홀을 나섰고 진달 래는 입을 쭉 내밀었다.

    “오랜만에 사람들 만나고 하면 기 분 좀 좋아질 텐데.”

    본래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었지만 실명 이후로 그러한 경향이 심해졌기에 진달래는 이번이 좋은 기회라 여겼다.

    오랜만에 친분을 나누었던 여러 사람과 어울리면 조금이나마 기분이 좋아지지 않을까 하고 기대했는데 배도빈이 시큰둥하자 아쉬웠다.

    “쉬고 싶어서 그럴 거야. 비행기 오래 타고 왔잖아.”

    최지훈의 말에 진달래가 고개를 끄덕였다.

    “느어어어어.”

    “아아아아아아.”

    시카고 시내로 나온 한이슬이 사색 이 되어 옷깃을 여몄고 정세윤의 얼굴은 창백해져 있었다.

    “여기가 대체 어, 어디지?”

    온몸을 떨며 이를 딱딱 부딪치던 차채은이 말까지 더듬으며 탓했다.

    “아, 아아아까는 어, 언니만 믿으라 며.”

    “사람이 너무 마, 많아서 헷갈렸어. 부, 분명 이 근처였는데.”

    한이슬이 멋진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제안해 나선 일행은 벌써 30분째 주변을 헤매고 있었다.

    “도, 돌아갈래.”

    “핸드폰으로 지도 좀 켜봐.”

    “소, 손가락이 잘려나갈 것 같아. 여기 왜 이렇게 추워?”

    “일단. 일단 아무 데나 좀 들어가 자. 제발.”

    정세윤의 제안에 한이슬과 차채은 이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발을 재촉 했다.

    낡은 건물에 데니스란 상호명을 내 건 음식점에 들어선 세 사람은 겨우 자리를 잡고 언 몸을 풀 수 있었다.

    동사 위기에서 벗어나자 핸드폰으로 레스토랑 위치를 확인한 한이슬 이 일행에게 사과했다.

    미안. 작년에 폐업했대.”

    차채은이 한이슬의 어깨와 등을 퍽 퍽 때렸고 정세윤은 왜 그걸 지금 확인하냐 타박했다.

    이곳에서의 식사를 책임지는 것으로 겨우 합의한 뒤 차채은과 정세윤 이 음식을 주문했다.

    “크레이지 스파이시 스킬멧이랑 그 릴드 치킨. 따뜻한 디카페인 커피 한 잔이요. 아, 오믈렛도.”

    “컨트리 프라이드 스테이크랑 슬램 버거 하나, 슈프림 스킬렛, 따뜻한 우유 주세요.”

    “자, 잠깐. 그렇게나 많이?”

    “뭐.”

    “……아니야.”

    정세윤과 차채은의 눈총에 한이슬이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식탁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빈 그릇을 치우면서 음식을 받 은 세 사람은 추위로 허기진 배를 채워나갔다.

    “우읍.”

    “더는 못 먹어.”

    “적당히 먹지..... 이따 소화제 줄 테니까 챙겨가.”

    설마 정말로 모든 음식을 먹을 줄은 몰랐던 한이슬이 두 사람을 걱정스레 보았다.

    “ 아.”

    그때 창밖을 보고 있던 차채은이 감탄사를 뱉었다. 불빛들로 눈부신 밤하늘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흩날리기 시작한 눈발이 함박눈이 되기까진 순식간이었다.

    “어쩌지.”

    “그칠 때까지 소화도 시킬 겸 이야기나 하자. 밥 먹고 추운 데 나가면 얹혀.”

    하는 수 없이 세 사람은 수다를 떨기 시작했고 화제는 자연스레 오케스트라 대전으로 이어졌다.

    “그러고 보면 시카고도 참 대담 해.”

    한이슬이 정세윤의 말에 동조했다.

    “하긴. 사실 피아노 협주곡이라면 베를린 필하모닉보다 유리한 곳은 없으니까.”

    “내 말이.”

    제2회 오케스트라 대전은 예선 상 위 12개 악단이 각 지역에서 본선을 치르는 것뿐만 아니라 주제도 선정 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순서를 배정받은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정한 주제는 피아노 협주곡.

    협연자에 대한 정보는 현장 공개가 원칙이었기에 시카고 심포니가 누구를 영입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세 사람은 그들이 상당한 승부수를 던 졌다고 받아들였다.

    현재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여겨지는 배도빈 콩쿠르 우승자 가우왕과 준우승자 최지훈이 모두 베를린 필하모닉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

    “설마 막심 에바로트라도 섭외한 거 아니야?”

    “글쎄. 근데 그 정도 카드는 가지고 있으니까 피아노 협주곡을 주제로 하지 않을까 싶은데. 채은이 넌 어떻게 생각해?”

    “나도. 에바로트가 클래식 쪽에서 활동을 안 하기는 해도 복수전 같은 느낌으로 준비하고 있었을지도 모르 고.”

    “그치 그치”

    “그럼 베를린은? 채은이 너 들은 거 없어?”

    “그런 거 안 물어본다니까.”

    “흐응. 역시 가우왕이려나.”

    “그러고 보니 최지훈도 여기 와 있다고 하지 않았어?”

    “응. 근데 가우왕 아저씨도 와 있다고 들었는데.”

    “뭐지?”

    “두 사람 중 누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긴 한데 그러면 확실한 건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뿐이네.”

    “그러네.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랑 아리엘 조합. 이것도 꽤 세 보인다.”

    정세윤이 메모지에 ‘베를린-가우왕 •최지훈, LA-툭타미셰바, 시카고-에바로트?’라고 적고는 펜을 놓았다.

    “그러면 빈이랑 암스테르담은?”

    “사카모토랑 마리 얀스라면 섭외력 이야 엄청나겠지. 문제는 남은 사람 인데 솔직히 지금 활동하는 사람 중에 가우왕, 최지훈에 근접해 있는 사람이 또 있나?”

    “에바로트랑 툭타미셰바 빼면…… 그야 니나 케베리히랑 최성신이지.”

    한이슬과 정세윤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차채은이 슬며시 입을 열었다.

    “크리스틴 지메르만이라거나.”

    차채은이 무심코 흘린 말에 한이슬 과 정세윤이 잠시 말을 멈췄다가 웃 고 말았다.

    “농담도. 그분 이제 활동 안 하시잖아. 개인 리사이틀도 1년이나 안 하셨는데.”

    “맞아. 공식 발언만 없었지 사실상 은퇴 수순 밟고 계신 거지.”

    “그런가.”

    “응. 그렇지.”

    차채은이 언니들의 말에 고민을 더 하다 다시 의문을 던졌다.

    “도빈 오빠의 베를린 필하모닉에 가우왕 아저씨 또는 지훈 오빠를 상 대로 피아노 협주곡을? 홈그라운드 에서 주제 선정이라는 이점까지 둔 절호의 기회에서 굳이?”

    “난 솔직히 크리스틴 지메르만 정도 아니면 그런 자신감 못 낼 것 같은데. 나만 그래?”

    크리스틴 지메르만이라는 이름을 듣고 웃음으로 넘겼던 한이슬과 정 세윤도 표정이 심각해졌다.

    확실히 이번 오케스트라 대전은 홈 그라운드에서의 순위 확보가 필수적 이었다.

    열두 번 경합을 벌여 누적 점수로 최종 우승을 가리는 방식이었기에 연고지와 주제 선정의 이점을 가졌을 때 1위를 해야 우승 경쟁이 가능 했다.

    1위 25점, 2위 18점, 3위 15점, 4위 12점, 5위 10점, 6위 8점, 7위 6 점, 8위 4점, 9위 2점, 10위 1점, 11 위, 12위가 0점인 것을 감안하면 더 더욱 그러했다.

    그렇게 중요한 때에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괜한 모험을 할 리 없었다.

    “진짜 그럴지도……

    “채은아, 너 지금 빨리 그거 정리해 서 업로드해. 아니, 제목만이라도 선 점해. 빨리.”

    한이슬이 차채은을 재촉했다.

    “확실한 것도 아닌데?”

    “얘는. 사실인 것처럼 말하라는 게 아니라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쓰란 말이잖아. 어서. 기사는 시간 싸움이 야.”

    "응."

    한이슬의 단호함에 차채은이 핸드 폰을 펼쳤다.

    테이블에 곧 가상 키보드가 비쳤고 차채은은 관련 기사를 자신의 블로그에 게시, 잡지사 리드에도 발송했다.

    그 모습을 보던 정세윤이 입을 열었다.

    “그러네. 생각해 보니 은퇴했단 말을 꺼낸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닌데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지.”

    “활동이 없었으니까. 배도빈 콩쿠르 때 해설하는 거 들어봐도 이제 다음 세대에 자리를 넘겨준다는 뉘앙스를 풍겼고. 근데 생각해 보면 그 사람이 그렇게 쉽게 넘어갈 리 없지.”

    “쉽게 넘어갈 리 없어? 뭘?”

    “가우왕, 배도빈, 최지훈이 자신을 넘어섰다고 스스로 말했잖아. 그 자 존심 높은 사람이 순순히 그걸 받아 들였을까 싶어. 지금 든 생각이지 만.”

    “그동안 칼을 갈았다?”

    “응. 그리고 제르바 루빈스타인만 한 거물이 승부수를 던질 정도면 사 실 에바로트나 지메르만 정도는 되 어야 말이 되지.”

    “하긴. ……와. 진짜 그렇게만 되면 특종이잖아. 채은이 완전 대박 나겠네.”

    “ 설마.”

    짧은 기사를 올리고 편집장에게 문 자 메시지까지 보낸 차채은이 핸드 폰을 접으며 고개를 저었다.

    한이슬이 그녀를 보며 다시 한번 조언했다.

    “사실을 전달해야 하는 건 기자가 할 일이야. 우리가 거짓을 전달하면 안 된다는 뜻은 아니지만 이런 이야 기도 중요해. 이런 게 모여서 스토리 가 되고 그런 방식으로 즐기는 방법 도 있으니까.”

    “응.”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기사 거리 생각나면 일단 써. 늑장 부리다가 남 한테 뺏기는 일 수도 없이 많으니 까.”

    “네, 선생님.”

    차채은이 고개를 꾸벅 숙이자 한이 슬이 피식 웃었다.

    “근데 나 스무디 하나 먹어도 돼?”

    “아, 나두.”

    세 명이서 9인분을 먹고 난 지 고 작 두 시간 정도 흘렀을 뿐이었다.

    한이슬은 다시금 뭔가를 먹자고 하는 두 사람의 위장을 믿을 수 없었다.

    “그래. 시켜라. 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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