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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527화 (527/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527화

    113. 분투(5)

    “그럼 잘해!”

    “스칼라! 이따가 내 방송에도 나와 주라!”

    “기대하고 있으마.”

    가족들과 인사를 마치고 대기실로 돌아온 스칼라는 여전히 얼떨떨해 있었다.

    그러나 가족들이 여전히 밝고 건강한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기에 나름대로 사실을 받아들이고자 노력했다.

    ‘오늘 연주할 곡은 처음 들을 테니까.’

    타마키 히로시란 음악가가 마지막에 남긴 작품이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로 칭송 받는 배도빈이 편곡했으며, 스칼라 본인이 조율한 피아노 협주곡.

    음악을 사랑하는 테메스인에게 그보다 즐겁고 놀라운 일도 없을 거라 생각했다.

    ‘타마키.’

    스칼라는 조용히 눈을 감고 그를 떠올렸다.

    생각해 보면 딱히 특별한 추억을 나눈 건 아니었다.

    그저 10평 남짓한 기숙사 방에 그와 프란츠 페터, 스칼라 셋이 모여 음악을 듣고 음악을 말하고 음악을 노래했을 뿐.

    때로 웃고. 때때로 감탄하며.

    대체로 진지했던 그 대화와 행동, 시간이 즐거웠다.

    그리고.

    혈관이 타들어가는 고통 속에서도 펜을 부여잡고 하루에도 몇 번씩 속을 게워내도 악보를 놓지 않았던 그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테메스의 성지에서.

    고개를 떨어뜨리고 주먹을 쥐고 있던 배도빈이 그 모습과 겹쳐 보였다.

    부모 없이 길거리의 음식물 쓰레기나 풀을 뜯어 먹고 살았던 프란츠 페터까지.

    음악이 즐거움이었던 스칼라와 달리 그들에게 음악은 투쟁의 수단이었다.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다.

    즐겁지 않은 게 아니다.

    타는 듯한 갈증으로 간절했을 뿐.

    아름다운 선율과 음색만을 지향했던 스칼라는 지난 1년간 듣기 좋은 소리만이 아름다움이 아님을 온몸으로 느꼈다.

    누군가의 절규. 비명.

    삶을 향한 처절한 싸움도 아름다울 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스칼라는 그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오늘 찾아온 관객들에게 그대로 전하고 싶었다.

    “스칼라 씨, 공연 시작 5분 전입니다.”

    “ 네.”

    직원의 안내를 받은 스칼라가 일어 섰다.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며 머 리를 질끈 묶고 침을 삼킨 뒤 힘차 게 밖으로 나섰다.

    무대에는 믿음직스러운 동료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부족한 자신을 도와 ‘타마키 히로 시 피아노 협주곡’을 완성한 자랑스러운 또 다른 가족들.

    “꺄아아!”

    “마에스트로!”

    “왕! 왕!”

    스칼라는 가족과 함께 그들의 지휘 자와 피아니스트를 맞이했다.

    배도빈이 포디움에 오르고 객석을 향해 허리를 숙이는 속도에 맞춰 베를린 필하모닉도 고개를 숙였다.

    긴 환호 끝에.

    배도빈이 돌아서서 두 팔을 벌렸다.

    스칼라와 가우왕이 배도빈의 손을 주시했고.

    배도빈은 충분히 간격을 두었다가 고요히 정적이 흐르는 루트비히홀을 베어냈다.

    타마키 히로시 피아노 협주곡 도단조.

    가우왕이 건반을 강렬히 때렸다.

    동시에 울려퍼지는 첼로와 베이스.

    타마키 히로시는 강인했다.

    어설프고 어렸던 자신을 탓하면서 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과오를 인정할 줄 아는 그 강인함이 그를 베를린으로 이끈 것이다.

    스칼라가 활을 쓸었다.

    제1바이올린이 그와 함께하여 평화 로운 베를린의 전경을 비춘다.

    타마키의 눈에 비쳤던 베를린.

    다부진 음색은 베를린 필하모닉의 고귀한 정신을, 정열적인 선율은 그 들의 음악을 그리는 둣했다.

    중음부에서 피아노가 치고 올라오 려 한다.

    타마키 히로시의 소망처럼 나도 저 곳에 이르고 싶다고. 오케스트라의 반주와 함께하고 싶음을 드러냈다.

    그러나 첼로, 비올라, 베이스의 선 명한 음색이 피아노를 덮는다.

    관객들은 바순과 오보에의 밀도 높은 노래에 홀려 조금씩 잦아드는 피아노 건반에서 관심을 잃는다.

    그러나 어찌 멈출 수 있을까.

    루트비히홀을 가득 채웠던 현악기 가 뒤로 물러나고 바순과 오보에가 날아오른 뒤에도 피아노는 자신의 목소리를 분명히 하고 있었다.

    스칼라는 벗의 손을 맞잡듯.

    바이올린을 켰다.

    할 수 있다고. 반드시 해낼 거라고 힘을 북돋아주었다.

    그렇게 시작된 콩쿠르.

    왕소소의 첼로는 단단하다.

    견고한 성벽과 같이, 해자를 깊이 둔 난공불락의 성벽같이 오를 엄두조차 허용치 않는다.

    나카무라 료코의 비올라가 아름답 게 춤춘다.

    이를 수 없는 아름다움이.

    피아노로서는 표현할 길이 없는 선 이 관객들을 매료시키고.

    다니엘 홀랜드의 베이스가 테너처 럼 진중함으로 가슴을 울렸다.

    타마키 히로시는 차마 그들과 같을 수 없음에 좌절하고 또 한 번 일어 선다.

    천천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 한 피아노.

    현악기에 취해 있던 이들이 이제 막 고개를 돌리려 할 때 타악기가 벼락처럼 내리친다.

    피아노가 멈추었다.

    절망을 선고하듯 울리는 북소리에 짓눌렸다. 충격 받은 심장은 터질 듯이 요동치고 그가 쓰러진 자리에 첼로와 베이스가 내려앉는다.

    피아노가 흐느낀다.

    비탄의 신음.

    발끝부터 차오르는 슬픔이 관객들을 타마키 히로시로 이끈다.

    그가 겪었던 슬픔으로 설움으로.

    피아노 독주를 들으며.

    스칼라는 배도빈을 바라보았다.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 채 지휘봉을 움직이는 그는 울고 있었다. 눈 물을 속으로 삼킨 채 너무도 일찍 세상을 떠난 음악가를 추모하고 있었다.

    지난 몇 달간의 연습을 통해.

    지금 그의 모습을 통해 스칼라는 배도빈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마음이 자신과 다르지 않음을 알았기에 그의 지휘에 맞춰 악단을 이끌 수 있었다.

    그를 대변해 오케스트라를 하나의 악기로 규합할 수 있었다.

    스칼라가 다시 바이올린을 잡았다.

    콘서트마스터를 따라 제1바이올린 이 연주를 준비했다.

    피아노는 신음 뒤에 절규했다.

    피를 토해냈다. 울부짖었다.

    가우왕의 손이 격렬해질수록 그때 의 타마키 히로시를 보는 듯한 착각 마저 들었다.

    병실에서 가슴을 쥐어뜯으며 악을 질렀던 그를 위로하고자 제1바이올린이 가담했다.

    비틀대며 질주하는 피아노와 그를 달래기 위한 바이올린.

    마주하는 불협화음이 가슴을 후벼 판다.

    ‘타마키. 타마키.’

    배도빈이 두 팔을 모아 가로 긋자.

    트럼펫이 어둠을 몰아냈다.

    이대로 굴복할 수 없다고.

    절망 속에 피어난 강인한 정신이 길게 이어졌다.

    배도빈의 지휘 아래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음색이 달라졌다. 처절했지만 울지 않았다. 피를 토하며 외쳤으나 목소리는 갈라지기는커녕 선명히 울렸다.

    억눌려 있던 마음이 비로소 터져 나오며 몸을 일으켰다. 희망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재능도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던 남 자는 비로소 곡을 완성한 뒤에야 자 신이 도착 지점에 이르렀음을 자각 할 수 있었다.

    고통뿐이었던 지난 길들이 헛되지 않았다고.

    단지 남들보다 좀 더 오래 걸었을 뿐이라고.

    이렇게 멋지게 도착하지 않았냐고.

    배도빈과 스칼라, 가우왕 그리고 베를린 필하모닉이 그를 추도했다.

    연주가 끝나자.

    루트비히홀은 잠시 적막이 찾아왔다.

    간혹 훌쩍이는 소리가 날 뿐 어느 누구도 환호와 박수를 보내지 못했다.

    그들 가슴 속에 깊게 새겨진 무엇 인가를 느끼며 묵직하게 조여오는 목 언저리를 감쌌다.

    객석 한쪽에 어머니와 함께 앉아 있던 산타 웨인의 눈에 천천히 눈물 이 맺히고 허무히 떨어졌다.

    베를린 필하모닉이 연주한 타마키 히로시 피아노 협주곡은 그렇게 애 도 속에 분명히 기억되었다.

    자선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스칼라는 할아버지 칼과 함께 배도빈의 대기실을 찾았다.

    칼은 배도빈을 보고 속으로 탄식하며 그의 손을 맞잡았고 배도빈은 그 따뜻함을 반갑게 맞이했다.

    “잘 왔어요. 오는데 불편하진 않았죠?”

    “아무렴. 자네 부친과 직원들이 너 무나 잘 대해줘서 편히 왔네.”

    배도빈이 싱긋 웃었다.

    칼은 그를 보다 포개었던 손을 쓸었다.

    “정말 고맙네.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어.”

    “아뇨. 저야말로 덕분에 살았잖아요. 아버지도 좋아하시니까 부담 갖 지 말아요.”

    “그야 항상 감사하네만. 타마키 히 로시라고 했던가. 나는 지금껏 그런 연주를 들은 적도 상상해 본 적도 없었네.”

    칼이 고개를 돌려 스칼라를 살폈다.

    어렸을 적부터 마을 밖 세상을 동 경했던 어린 손자가 루트비히홀과 같이 큰 무대에 함께하는 게 대견하고 또 대견했다.

    “산에서 내려온 뒤로 정말 많은 걸 접했지만 오늘보다 더 놀라진 않았네. 모두 자네와 이곳 덕이겠지.”

    “스칼라가 노력한 결과예요.”

    칼은 배도빈의 대답에 굳이 사족을 달지 않았다.

    전혀 다른 음악을, 새로운 음악을 공부하는 게 쉬울 리 없었다.

    그것을 습득하기 위해 손자가 얼마 나 많이 노력했을지는 현대 문명에 적응하고자 했던 경험으로 쉬이 짐 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꿈과 노력이 현실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배도빈과 베를린 필하모닉에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고맙네. 정말 고마워.”

    “자랑스러운 손자를 둔 거죠. 기왕 베를린에 온 김에 며칠 묵도록 해요. 스칼라도 최근 고생했으니 휴가 가 필요할 테니.”

    “아닐세. 방금 공연으로 아주 조금 있던 걱정마저 사라졌네. 잘 지내고 있는 걸 봤으니 이제 또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야지.”

    자신과 마을 사람들 때문에 스칼라 가 본인 역할에 소홀할 순 없는 법.

    베를린 필하모닉이 인력난을 겪고 있단 소식을 접했던 칼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배도빈의 손을 쓸며 기도했다.

    “테메스 신께서 보살펴 주실걸세.”

    배도빈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칼 의 손을 맞잡아 가볍게 흔들었다.

    인사를 나누고 지휘자 대기실을 나 선 스칼라와 칼은 나란히 걸으며 대화를 나눴다.

    “좀 더 계셨다 가셔도 돼요. 퇴근 후에는 같이 있을 수 있으니까.”

    “마음에도 없는 이야기를 하는구 나.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지 않느냐.”

    칼의 말대로 스칼라는 이미 여러 단원들에게 피로가 쌓여 있었기에 스칼라는 조금이라도 더 손을 보태 고 싶었다.

    그 마음이 들킨 것 같아 멋쩍게 웃고 말았다.

    “네. 여유가 생기면 놀러 갈게요.”

    “그래. 할아버지와 마을 사람들은

    항상 그곳에 있을 테니 걱정 말고. 오늘 연주는 정말 대단했단다.”

    “타마키가 만들고 도빈이가 편곡했으니까요.”

    “음. 다음에 보면 그 타마키란 친 구에 대해서 자세히 말해주려무나.”

    “그럴게요.”

    스칼라가 환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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