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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525화 (525/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525화

    113. 분투(3)

    악장으로서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 해 이벤트 공연을 맡게 된 뒤로 스 칼라의 생활에 큰 변화는 없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습 시간을 제 외하면 본인이 몰랐던 곡을 찾아 몇 번이고 반복해 듣고 연주할 뿐이었다.

    다만 몇 가지 달라진 점도 있었는 데 첫 번째는 단원들을 관찰하기 시 작한 것이었다.

    ‘릴리는 비브라토가 좋네.’

    ‘숀은 오늘 컨디션이 안 좋은 것 같아.’

    악장은 제1바이올린은 물론 악단 전체를 컨트롤해야 한다는 찰스 브라움의 가르침이었다.

    ‘이랬구나.’

    단원들을 관찰하며 그들의 연주를 깊이 느낀 스칼라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하프 연주자가 그뿐이었고 주로 독 주 파트를 맡아왔기 때문에 악단의 구성원이라는 느낌보다 협력자에 가 가웠던 그가 조금씩 베를린 필하모닉을 이해하게 된 것이었다.

    두 번째 변화는 작곡가와 지휘자의 의도를 파악하려 노력한다는 점이었다.

    지금까지 스칼라는 배도빈이 주문 하는 내용을 그대로 적용했고 그것 만으로도 훌륭한 연주를 해냈지만, 그것이 어떤 과정을 거친 것인지에 대해선 알지 못했다.

    막연히 듣기 좋다는 느낌만이 아니

    라 작곡가가 어떤 의도로 음을 배치 했고 지휘자가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해석하는지 공부하게 되면서 의 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배도빈은 그러한 현상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이 부분은 도저히 이해가 안 돼. 이런 방식으로 연주하는 게 더 좋지 않나? 내가 아직 모르는 게 많은 건가.”

    “의문이 생기는 게 당연한 거야. 고민 없이 발전할 수 있을 리 없잖아. 다시 연주해 봐.”

    평소와 같이 기숙사와 베를린 필하모닉을 오갈 뿐이었지만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의문을 던지는 과정에서 스칼라는 조금씩 성장해 나갔다.

    오직 새롭고 멋진 음악을 위해 무 작정 나섰던 그가 지금까지 자신이 새로운 음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 했단 사실을 깨달은 것이었다.

    의미를 찾고.

    의문 속에서 다시 의문을 품는 과 정이 같은 연주라도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순박한 청년 스칼라는 실로 행복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했었구나.’

    스칼라는 타마키 히로시 피아노 협주곡을 살피며 당시 그가 어떤 마음으로 노트를 적었는지 비로소 이해 할 수 있었다.

    타오르는 열정과 그것을 억누르는 한계.

    타마키 히로시의 곡은 중음부에서 의 거칠고 사나운 화음을 이어가면 서도 일정 음계 이상을 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억눌린 감정을 고조시키다 클라이막스에 이르러 마침내 모든 것을 폭발시키는 전개.

    악보를 보는 것만으로도 타마키가 얼마나 슬퍼했는지, 희망을 갈구했는지 느껴졌다.

    ‘여기 트럼펫이랑 북은 그걸 더 잘 표현하기 위해서 넣은 거겠지.’

    타마키 히로시의 의도를 아니 배도빈의 편곡도 자연스레 이해할 수 있었다.

    어찌 가만 있을 수 있을까.

    스칼라는 한 층 더 높은 곳을 향 해 바이올린을 잡았다.

    연습을 이어가던 왕소소가 첼로를 내려놓았다.

    “후.”

    10살이 되기도 전부터 스승으로부 터 천재로 인정받았던 그녀는 처음으로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불가능이 없었던 그녀의 얼후는 대 교향곡이라는 거대한 산을 맞이해 있었고.

    현악기 전반을 다루던 빛나는 재능 역시 대교향곡 3악장의 첼로 독주 앞에서는 보잘 것 없었다.

    이승희로부터 첼로를 배우고 또 스 스로 노력하길 세 달.

    왕소소는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안 개 속을 걷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문득.

    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녀를 괴롭혔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마음을 약하게 했다.

    최근 들어 잦게 찾아오는 포기라는 단어를 잊기 위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리고 다시 현을 켜기 시작했다.

    현존하는 가장 뛰어난 첼리스트 이 승희의 연주를 떠올렸다. 그녀는 엄살을 부린 것과 달리 두 달 만에 대교향곡을 완벽히 소화했다.

    그 소리가 너무나 고혹적이라.

    왕소소는 또다시 자신과 이승희를 비교하게 되었고 끝끝내 한계를 맞이했다.

    ‘……안 되나 봐.’

    하루 14시간.

    좋아하는 드라마 시청과 디저트 투 어까지 포기하고 연습에 매진했었다.

    대교향곡이라는 새로운 시대의 완 벽한 교향곡을 연주하고 싶은 욕심 과 배도빈에게 힘을 주고 싶다는 간 절함으로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지

    만, 아무리 노력해도 이승희의 연주를 따라갈 수 없음에 좌절하고 말았다.

    조금씩 가까워진다면 또 모를까.

    아무리 조언을 받고 연습해도 감을 잡지 못한 탓에 한 걸음 내딛기가 무서웠다.

    이승희로부터 물려받은 첼로 수석 이라는 직책을 내려놔야 할 것 같았다.

    왕소소가 절망에 고개를 숙였을 때 노크 소리가 났다.

    스칼라였다.

    “잠깐 괜찮아?”

    “••••••아니.”

    “그럼 다음에 찾아오지.”

    스칼라가 문을 닫으려 하자 왕소소 가 정신을 차리고 그를 붙잡았다.

    “무슨 일인데.”

    “공연 때문에 의논하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야.”

    스칼라의 의욕적인 표정을 본 왕소 소는 다시 고개를 떨어뜨리곤 고개를 저었다.

    “나한테 말해봤자 소용없어.”

    “그럴 리가. 첼로 수석의 의견을 듣지 않으면 곤란해.”

    “……빌이나 레논에게 물어봐.”

    “수석은 너잖아.”

    “임시직이야.”

    스칼라는 왕소소가 평소와 다름을 느끼고 있었지만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임시든 정식이든 이승희가 네게 자리를 맡겼으니 네가 수석이야. 그 리고 타마키 히로시를 연주할 때 첼 로가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으니 의 견을 듣고 싶고.”

    왕소소가 악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뜻 이었지만 스칼라는 포기하지 않고 악보를 보였다.

    “여기, 이 부분. 제1바이올린을 대두시키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싶은데 첼로 음량을 낮출 수 있을까?”

    왕소소가 슬쩍 악보를 보곤 퉁명스 럽게 말했다.

    “그럴 거면 2바이올린이 같이 하면 되잖아.”

    “그게 더 나은 이유는?”

    “다른 악기 소리를 낮춰서 강조한 다고 효과가 클 리 없잖아.”

    “아. 그렇군. 그렇다면 여기는?”

    스칼라의 거듭된 질문에 왕소소가 고개를 돌렸다.

    “도빈이한테 물어보면 되잖아. 찰스도 있는데 왜 자꾸 나한테 물어.”

    “네 생각을 듣고 싶으니까.”

    “••••••비켜.”

    잠시 말문이 막혔던 왕소소가 자리를 피하기 위해 나섰고 스칼라는 그 녀를 굳이 막지 않았다.

    대신 다시 한번 부탁했다.

    “도와줘.”

    스칼라의 목소리가 왜 그렇게 간절하게 들렸는지 왕소소는 알 수 없었다.

    실패를 경험하지 못하고 무엇이든 해냈던 천재는 거듭된 실패에 크게 낙심하고 있었고 도저히 다른 걸 생 각할 상태가 아니었다.

    자존감이 바닥을 드러내 지친 그녀 에게 도와달라는 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도와줘.”

    거듭된 말에 왕소소가 한숨을 내쉬 곤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금세 밝아진 스칼라의 얼굴을 애써 무시하고 악보를 받아 들었다.

    무엇을 고민하는지는 너무나 명확 했다.

    배도빈이 만든 바이올린 선율은 철 저히 피아노 솔로를 돕고 있었다.

    마치 한 몸처럼 엮여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하면 더 명확히 할 수 있는지를 고민했고 바이올린과 함께 중음부를 확장시키는 첼로를 어떻게 할지 의논하고 싶어 했다.

    “도빈이가 첼로를 넣은 건 중음이 확실해야 고음부가 대조되기 때문이 야. 음량을 조절할 필요는 없어.”

    “그러면?”

    왕소소가 잠시 고민하다 답을 내놓았다.

    “도빈이랑 이야기해봐야 하겠지만 전체적인 박자를 늦추는 것도 방법 일 거야. 그럼 더 정확히 전달될 테 니까.”

    “늘어지지 않을까 싶었는데.”

    “어차피 바로 뒤에 피아노 솔로가 나오니까. 분위기 이끄는 일은 오빠 특기니까.”

    스칼라가 가우왕의 속주를 떠올리 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왕소소의 말대로 피아노 솔 로 전에는 박자를 조절하는 편이 그 뒤의 절정을 위하는 것 같았다.

    “역시 물어보길 잘했어. 난 아무리 고민해도 답을 낼 수 없었는데.”

    항상 듣던 칭찬이었다.

    그러나 당연하게 여겼던 이야기가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공부한 지 얼마 안 됐잖아.”

    "응."

    “왜 그렇게 열심히야?”

    갑작스레 질문 받은 스칼라가 눈썹을 좁혔다. 생각해 본 적 없던 터라 고민이 길어졌고 기다리다 지친 왕소소가 일어서려 할 때 생각을 정리 할 수 있었다.

    “가족들을 초대할 거야.”

    스칼라는 악장으로 처음 나서는 무 대에 테메스 부족인들을, 그의 가족을 초대하고 싶었다.

    “그리고 타마키가 남긴 곡이니까.”

    그리고 자신이 사귀었던 친구가 얼 마나 멋진 곡을 남겼는지 가족과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최선의 형태로 완벽히.

    “도빈이가 다른 일에 신경 쓰지 않고 대교향곡에 집중하려면 더 열심히 해야 하고.”

    또 배도빈이 그랜드 심포니 이외의 일로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하고 싶었다.

    테메스의 성지에서 한 번 좌절했던 그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또 음악 좋아하니까.”

    스칼라가 순박하게 웃었다.

    “이유는 많은 거 같아. 아직 모르는 게 많고 부담을 느끼지 않는 건 아니지만 해야 하니까. 최선을 다하 고 싶으니까.”

    스칼라의 미소를 본 왕소소는 그를 멀뚱멀뚱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러네.”

    해야 할 이유는 차고 넘쳤다.

    그만 둘 이유도 여럿이었다.

    지쳐서. 능력이 부족해서. 답답해서.

    당장에라도 다른 유능한 사람을 찾으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래서는 의 미가 없었다.

    음악을 사랑하니까.

    베를린 필하모닉을 사랑하니까.

    왕소소가 첼로 케이스를 열었다.

    “가려던 거 아니었어?”

    “힘이 났어.”

    왕소소는 첼로를 연주하기 시작했고 스칼라는 그 선명한 선율에 매료 되어 단 하나의 음조차 놓치지 않으려 했다.

    ***

    이번 자선 콘서트에서는 오랜만에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피아노 협주곡 ‘타마키 히로시’를 발표하는 자리이자 악장 스칼라의 시험장이기도 했는데 그 무게감 때문인지 다들 바짝 긴장하고 있다. 음이 선명하고 박자는 날카롭다. 좋은 느낌이다.

    한 차례 연주를 마치니 첫 관객도 마음에 드는지 박수를 보낸다.

    “잠시 쉬죠. 20분 뒤에 모이겠습니다.”

    “네, 보스.”

    죠엘을 기다려 그녀에게 의지해 산 타 옆으로 향했다. 산타는 계속해서 손뼉을 쳤다.

    박수 소리가 가까이 들리자 곧 녀 석이 해맑게 웃었다.

    “ 허희헤.”

    “좋았어?”

    “네. 히헷

    타마키가 남긴 소나타를 매일 반복해 들었다고 하니, 협주곡이 익숙할 터.

    목소리만 들어도 얼마나 기뻐하는지 느껴져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부, 북이 좋아요. 헿.”

    “맞아. 타마키도 좋아했어.”

    어린이 타악 교실에서 교사로 활동 하며 타마키는 여러 아이에게 타악 기를 가르쳤는데.

    친하게 지내던 산타가 유독 큰북과 작은북을 좋아해 자신도 좋아하게 되었다고 한 적 있었다.

    그 때문에 곳곳에 북을 삽입해 두었는데 용케 알아들은 모양이다.

    그나저나 정말 말이 많이 늘었다.

    대화가 거의 불가능했던 전과 달리 지금은 제법 대화가 이어진다.

    사르륵. 사르륵.

    아마 죠엘이 산타의 머리를 쓸어내 리는 소리인 것 같다.

    “연습에 방해되진 않았을까요?”

    죠엘이 걱정스레 물었다.

    “아뇨. 전혀요. 소리도 내지 않고.”

    “으, 음악 들을 땐 조, 조용히잇. 헷."

    산타와 함께 있으면 나도 모르게 웃고 만다.

    “연주회도 괜찮겠네요.”

    “……감사합니다.”

    죠엘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동생 사랑이 끔찍한 죠엘이 얼마나 기특해할까 생각하니 가슴이 따뜻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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