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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524화 (524/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524화

    113. 분투(2)

    악단주 배도빈이 여러 업무에서 손을 놓은 지 세 달째.

    베를린 필하모닉은 조금씩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를 비롯해 케 르바 슈타인, 니아 발그레이, 헨리 빈프스키, 가우왕, 찰스 브라움과 같은 인물이 분전하고 있었지만 조금 씩 힘에 부치는 게 사실이었다.

    “단원을 확충해도 이러니.”

    헨리 빈프스키 감독이 한숨을 내쉬었다.

    B팀을 구성할 때부터 지금까지 매 년 새 인력을 확충하여 각 단원이 느끼는 부담은 줄어들었으나, 악장 과 같이 고급 인력은 과거보다 더 아쉬웠다.

    레몽 도네크, 파울 리히터의 빈자 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졌으며 그나 마 새롭게 취임한 한스 이안마저 출 산 휴가가 예정되어 있으니 헨리 빈프스키 감독은 때때로 악장 역할까 지 도맡아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악장단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찰스 브라움은 대내외로 가장 많은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으며, 나윤희는 악단 내에서 찰스 브라움과 동일 한 스케줄을 소화하며 동시에 배도빈의 악보 작업을 도왔고.

    왕소소 역시 최근 대교향곡의 첼로 독주 파트를 준비하고 있었기에 방 치해 두었다간 또 다른 희생자가 나 올 수 있는 상황.

    이번 정기 회의에서는 어떻게든 해 결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악단주 배도빈이 입을 열었다.

    “누구라도 좋습니다. 우리 악단에 서 악장으로 활동할 수 있는 사람이 라면 악단 내외를 가리지 말고 말씀 해 보세요.”

    감독, 악장, 수석들의 고민이 길어 졌다.

    단원들은 누구 하나 빠짐없이 훌륭 한 바이올리니스트였지만 악장 역할을 맡길 수 있을 만큼 확고한 사람 은 찾기 힘들었다.

    외부 인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는데 대부분 악장으로서 오랜 경력을 보유한 사람은 쉽게 움직이지 않아 영입에 어려움이 예상되었다.

    침묵이 길어지자 배도빈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모집 공고를 해서 적합자가 없으면 일정을 줄여야 하겠네요.”

    그 말에 찰스 브라움이 반대하고 나섰다.

    “악단 수익이 줄고 있는 시점에 이 보다 더 줄이면 악화될 뿐이야.”

    “대안이 없잖아요.”

    “……테스트는 해봐야 하겠지만.”

    찰스 브라움이 뜸을 들이다 결국 입을 열었다.

    “스칼라를 추천한다.”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그들의 귀를 의심했다.

    스칼라의 하프 연주 실력은 누구나 인정하나 제1바이올린을 이끌며 동 시에 악단 전체를 조율해야 하는 악 장이란 직책을 그가 소화할 수 있을 지에 대해선 의문이었다.

    “흐음.”

    다시 한번 고민이 이어지던 중 케 르바 슈타인이 입을 열었다.

    “스칼라는 곤란해. 일단 에반스가 은퇴하면서 하프는 스칼라밖에 없으니까. 또 악장이라면 제1바이올린을 이끌어야 하는데 스칼라에게 그런 능력이 있을지는……

    케르바 슈타인의 지적은 적절했다.

    하프 수석이었던 에반스가 작년 조 용히 은퇴하고 남은 단원 중 하피스 트는 스칼라뿐이었다.

    더군다나 배도빈과 찰스 브라움을 제외하고 악단 인원 모두 스칼라의 바이올린을 들은 적 없었기에 악장 직은커녕 바이올린을 다룰 수 있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찰스 브라움이 입을 열었다.

    “바이올린 연주는 지금 평단원 중에선 가장 나아.”

    “문제는 악보를 다루고 단원들을 이끄는 능력이죠.”

    배도빈이 찰스 브라움의 말을 끊었다.

    어렸을 적부터 오케스트라를 다루기 위해 수많은 경험과 공부를 병행 했던 배도빈은 과연 스칼라가 그것을 해낼 수 있을지 의심되었다.

    세상과 단절된 작은 마을에서 악보 조차 없이 구전과 전수로만 음악을 익혔던 스칼라는 세상에 나온 지 이 제 고작 2년이었다.

    그의 바이올린이 수준급이라는 것을 차치하고 악장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소양이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모르는 게 너무 많아.”

    “그러고 보니 곱셈도 못 하더라. 더하기를 여러 번 하던데.”

    “그건 베토벤도 그랬으니 상관없지 않나.”

    가우왕의 말에 배도빈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분명 놀라울 정도로 바보지만.”

    때마침 찰스 브라움이 입을 열어 배도빈이 가우왕의 목소리를 쫓아가는 일은 없었다.

    “음악에 관해서라면 걱정하지 않아 도 돼. 밴드 활동 하면서 이것저것 물어봐서 가르쳐 줬는데 금방 이해 하더군.”

    찰스 브라움의 말에 배도빈이 신음 하며 고민했다.

    여러 의문이 있었지만 찰스 브라움 이 추천할 정도라면 분명 이유가 있을 테고 또 대안이 없었기에 결정을 내리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좋아요. 이 건은 스칼라를 검토해 보고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 고.”

    배도빈이 당부하듯 말을 덧붙였다.

    “힘든 때입니다. 어쩌면 좀 더 어 려운 상황이 올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 때문에 개인이 희생하는 일은 없어야 해요.”

    배도빈의 목소리에 애정이 가득 담 겨 있었다.

    “여러분이 지금 스스로를 희생하고 있다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제게 닥친 일을 얼마나 슬퍼해 주는지도 알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이라도 여 러분이 겪고 있는 그 감정을, 저와 다른 단원이 지도록 하지 말아주세요.”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배도빈의 말을 들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연, 조금 줄이면 됩니다. 수익, 줄면 어때요. 우리 목적이 돈을 많이 버는 것만은 아니잖아요.”

    배도빈이 단호히 말했다.

    “우리의 목적은 최고의 음악을 연주하는 겁니다. 불편 및 애로사항은 반드시 보고하세요. 만약 여러분에 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저는 제 자 신을 용서치 않을 겁니다.”

    배도빈이 말을 마치자 회의 참석자 모두 고개를 끄덕이거나 대답으로 그의 마음에 답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대견한 마음에 슬며시 미소 지었다.

    ‘정말 다 컸구나.’

    배도빈.

    작곡에 있어서는 만 3세 때 이미 완성되어 있던 기린아였다.

    억제되어 있는 듯했던 연주는 나이를 먹을수록 정교하고 노련해져, 베를린으로 돌아온 16세 때는 그 누구도 그를 부정할 수 없었다.

    지휘자로서는 첫 오케스트라 대전 당시 만 17세의 나이로 지금도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는 이들을,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본인을 제치고 당당히 우승했다.

    그리고 지금.

    다음 오케스트라 대전을 한 해 앞 둔 만 20세.

    한 악단의 주인으로서.

    244명의 단원과 120명의 직원을 둔 리더로서의 면모을 갖추고 있었다.

    무엇 하나에 빠지면 주변에서 무슨 일이 나든 신경 쓰지 않고 빠져드는 외골수 같은 점도.

    한번 정한 일은 조금도 타협하지 않는 고집스러운 점도.

    커피나 카레처럼 사소한 것에 집착 하는 점도.

    평소에는 초연한 듯하면서도 음악 과 동료에 관해서는 격정적인 점도 이제는 더 이상 걱정되지 않았다.

    배도빈이 자리를 비우자 하나같이 먼저 나서서 조금이라도 더 일하려는 단원들과 어떻게 해서든 더 나은 조건을 확보하려고 추가 근무를 마 다치 않는 직원들이 그것을 증명하 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단지 계약 관 계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동료로서, 친우로서 유대할 수 있는 건 푸르트벵글러 본인조차 해내지 못한 일.

    그는 자신이 일으킨 제국이 더욱 융성해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배도빈 체제의 베를린 필하모닉을 볼 수 있어 진실로 행복했다.

    “아, 그리고.”

    푸르트벵글러가 사색에 잠겨 있을 때 배도빈이 입을 열었다.

    “다들 따로 맡아줄 일이 있습니다.”

    배도빈의 목소리가 사뭇 진지했기에 다들 의아해하는 와중 그가 엄중 히 주문했다.

    “아마 세프에게 가는 부담이 가장 클 겁니다. 평소에는 은퇴하고 싶다 고 노래를 불러도 이럴 때는 이상하 게 고집을 부릴 테고요.”

    몇몇 단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냐고 물어봤자 거짓말 할 테니 여러분이 제 눈이 되어줘야 합니다. 세프를 항상 잘 감시해 주세요. 안색이 안 좋거나, 앓는 소리를 낸 다거나, 화장실을 자주 간다거나, 평 소 안 하던 일을 한다거나 하면 그 즉시 보고하세요. 이것은 전 직원 모두에게 해당되는 사항이니 이후 전파하도록 합니다.”

    “네.”

    몇몇 단원이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고 푸르트벵글러는 입술을 씰룩이다 호통쳤다.

    “네 걱정이나 해, 이 녀석아!”

    회의를 마치고.

    배도빈은 찰스 브라움과 함께 스칼라를 호출했다.

    테메스 마을에서 이미 그의 바이올린 수준을 알고 있던 터라 중요한 것은 그의 지식이었는데, 배도빈은 내심 놀랄 수밖에 없었다.

    몇 번의 질문과 찰스 브라움의 설 명을 통해 부족하긴 하나 그가 소양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에.

    단원들의 말대로 선거와 투표가 무 엇이고 세금을 왜 내야 하는지, 왜 공원에서 사냥을 하면 안 되는지조 차 모르는, 심지어 곱셈, 나눗셈조차 못하는 녀석이 현대 음악 지식을 갖 춘 것이 놀라웠다.

    배도빈이 중얼거렸다.

    “대체 어느 틈에.”

    “프란츠, 타마키랑 놀다 보니.”

    “ 놀아?”

    “대화하다 보면 내가 모르는 말을 많이 하더라. 이것저것 묻다 보니 답답했는지 알려줬어. 찰스도.”

    스칼라는 프란츠 페터가 배도빈에 게 배운 내용을 스칼라에게 설명하는 식으로 공부했고.

    타마키 히로시가 답답한 마음에 음 표부터 박자, 조성 같은 기초부터 가르쳐 주었음을 설명했다.

    또 실내악팀 팀장이었던 찰스 브라움이 악보를 읽지 못해 꼭 연주를 한 번 들려줘야 했던 스칼라의 심각 성을 깨달아 전반에 걸쳐 교수 노릇을 했단 사실도 들을 수 있었다.

    음악 바보끼리 모여 있었으니 음악 에 관한 이야기만 나눴을 테고.

    세 명 중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 지고 있으면서도 지식의 불균형이 심각한 스칼라를 그냥 두고 보지 못 했을 터였다.

    배도빈은 어처구니가 없어 허탈히 웃고 말았다.

    “그런데 그건 왜 묻지?”

    스칼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배도빈이 물었다.

    “여기 찰스나윤희 누나, 소소처럼 악장, 할 수 있겠어?”

    “난 하프를 연주하고 싶은데.”

    “같이 하란 뜻이야.”

    스칼라가 으음 하고 신음하며 고민 하더니 마음을 굳혔다.

    “새로운 경험은 언제나 즐겁지.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하고 싶어.”

    의지가 전해져 배도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은 시험을 해야겠지. 타마키가 남긴 소나타, 피아노 협주곡으로 연습할 예정이야.”

    "응."

    “페터 통해서 악보 전달해 줄 테니 한번 준비해 봐. 모르는 건 찰스가 봐줄 거야. 실 연습은 3주 뒤.”

    “3주.”

    “공연은 공식 무대가 아니라 자선 행사가 될 거야. 내가 인정할 만큼 성공한다면 정식으로 취임하게 될 테고.”

    “그래. 알겠어.”

    배도빈이 죠엘의 부축을 받고 일어 났고 스칼라는 두 손을 깍지 끼고 생각을 정리했다.

    그는 악장이란 직책이 얼마나 중요하고 무거운지 지난 2년 동안의 악단 활동으로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것을 접했을 때의 경이로움과 즐거움도 잘 알고 있었다.

    척박한 오지를 떠나 베를린에 도착 했을 때 그는 미처 상상도 하지 못 한 모습에 기함하고 말았다.

    몰랐기에 꿈에서조차 그리지 못했던 다양한 음악은 그의 순진한 가슴을 마음껏 헤집어놓았다.

    또 한 번 새로운 무대로 올라서기에 앞서.

    스칼라의 가슴은 마치 처음 비행기에 오를 때처럼 두근거렸다.

    ‘잘할게. 타마키.’

    스칼라가 그의 가슴에 품어둔 친우 에게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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