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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520화 (520/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520화

    112. 배도빈(4)

    “ 퇴근할까?”

    “네.”

    나윤희가 다가오자 포근한 냄새가 났다. 쓸데없이 예민해져서 조금 당황하는데, 아무렇지 않게 날 안는다.

    “손 잡는 걸로 충분해요.”

    “안 돼. 위험해.”

    전혀 그렇지 않아 보이지만 완고할 때는 도저히 설득할 수 없기에 잠자 코 부축을 받아 걸음을 옮겼다.

    “계단이야.”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계단은 중 앙까지 14개씩. 천천히 발을 디뎌 내려가는데 아무래도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다.

    “하나 남았어.”

    “네.”

    계단을 내려온 것만으로도 조금 지쳤다.

    평소대로 기자와 파파라치를 피해 주차장으로 향하려는데 갑자기 우렁 찬 목소리가 귓등을 때렸다.

    할아버지다.

    “도빈아!”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마자 요란한 구두 소리와 함께 할아 버지의 억센 손이 덮쳤다.

    “내 새끼. 내 새끼! 아이고 내 새끼!”

    “자, 잠깐.”

    “이 녀석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어? 정말 안 보이는 게냐? 응?”

    할아버지가 얼굴을 붙들고 이리저리 살피시는데 얼마나 놀라셨는지 그 마음이 전해졌다.

    “ 괜찮아요.”

    “괜찮기는! 이 녀석아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해야 할 거 아니냐, 이놈 아! 이놈아. 이놈아아.”

    우렁찬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어 떨렸다.

    90대라고는 믿을 수 없는 근육질 팔이 날 끌어안은 채 들썩인다. 뺨 에 뜨거운 액체가 닿는다.

    팔을 뻗어 함께 안았다.

    “바쁘실 텐데 뭐 하러 오셨어요.”

    “이 녀석이 한다는 말이! 진희가 그렇게 가르치든!”

    한 차례 꾸중을 듣고 나서야 간신 히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건장하신 건 기쁘지만 어릴 때나 지금이나 조금 버겁다.

    “자, 일단 집으로 가자.”

    “네. 누나.”

    할아버지에게 답하고 나윤희를 부르며 손을 뻗었는데 아무런 감촉을 느낄 수 없었다.

    의아하여 거듭 부르자 나윤희의 발소리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처자는?”

    “아, 안녕하세요. 나, 나, 나나윤희라고 합니다.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아, 악장을 하고 있어요.”

    놀랐는지 많이 고쳤던 버릇이 전보다 더 심해졌다.

    하기사 나도 놀랐으니 오죽했을까.

    “음. 낯이 익어 어디서 봤나 싶었는데 그랬구만.”

    “같이 가요.”

    손을 다시 내밀었다.

    “아, 아니야. 나, 나는 따로 갈게.”

    “왜요?”

    대답이 들리지 않는다.

    앞을 볼 수 있었다면 그녀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어떤 상 태인지 알 수 있을 텐데 답답하다.

    “평소에는 같이 퇴근하느냐?”

    할아버지가 물었다.

    “네. 병원에 있을 때도 챙겨줬어요.”

    “그래?”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좀 달라졌다.

    “고맙네.”

    “아, 아뇨. 전혀. 하,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아니지. 내 사례는 톡톡히 함세. 김 실장.”

    “네, 회장님.”

    “이 아가씨 잘 모셔다 드리게.”

    “네. 윤희 씨, 가시죠.”

    “호, 혼자 가도 괜찮……. 부, 부탁 드립니다.”

    김재식 실장의 박력에 거절할 수 없었던 모양. 내일 보자는 인사를 나누자 나윤희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당황한 듯 불규칙적이다.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차에 타니 일단의 긴장이 풀려 고개를 젖히고 등을 파묻었다.

    할아버지의 한숨 소리가 들린다.

    “괜찮다니까요.”

    “시끄럽다.”

    작년 전 세계 복지 수준을 향상시 키기 위해 WH라이프를 설립하여 바쁜 가운데 괜한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는데 결국 이렇게 되었다.

    “그건 그렇고. 나윤희란 처자 나이는 어떻게 되느냐.”

    “스물아홉이요.”

    “보기보단 많구나.”

    “어려 보이긴 해도 능력 있는 사람이에요. 잠자는 숲속의 공주도 그 사람이 연주한 거예요.”

    “그래?”

    WH라이프의 여러 사업은 도진이가 공부하는 분자생물학 외에도 건강을 위한 여러 분야로 나뉘는데, 요양원이나 심리안정 사업에서 ‘잠 자는 숲속의 공주’는 큰 도움이 되 고 있다고 들었다.

    여러 이유로 불면증을 겪는 이들에게 효과가 입증되어 WH라이프에 사용권을 넘겨줌으로써 도움이 된 건 할아버지도 잘 알고 있는 사실.

    역시 나다.

    “흠……. 그래도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구나.”

    이해 못 할 말을 꺼내셔서 눈썹을 찌푸리는데 이제 보니 오해를 하신 모양이다.

    “그래도 네가 좋다면 어쩔 수 없지. 만난 지는 얼마나 되었고?”

    “뭘 만나요. 그런 사이 아니에요.”

    “이 녀석이 속일 사람을 속여.”

    “아니라니까요.”

    “걱정 마라. 네 부모 일이 반복되는 일은 없을 게다. 이 할애비가 그렇게 무정하지 않다.”

    “아니라니까 왜 자꾸 몰아가요.”

    “뭘 부끄러워 하느냐. 네 나이에 연애하는 게 뭐 어때서. 어차피 결 혼도 해야 할 거 아니냐.”

    “그런 거 할 시간 없어요.”

    “정말 아니냐?”

    “그렇다니까요.”

    할아버지가 삐진 듯 아무 말도 안 하시다가 서운한 듯 탓하셨다.

    “못난 놈. 할애비 때는 그 전쟁통에도 다 연애하고 가정 꾸리고 했어.”

    빨리 도착했으면 좋겠다.

    “형, 아

    “괜찮아. 먹을 수 있어.”

    “ 아〜”

    “……아.”

    밥 정도는 조심해서 먹을 텐데, 퇴원한 뒤로 계속 이런 상황이다.

    형 생각해 주는 건 고맙지만 매 식사 시간 때마다 이렇게 밥을 먹여 주려 하니, 게다가 혼자 먹는 것보 다 흘리는 게 많으니 난감하다.

    그래도 어머니, 아버지, 할아버지 눈에는 우애 좋은 모습으로 보이는 지 아무도 말리질 않는다.

    “너 먹어.”

    “형부터.”

    “……그럼 소시지만 주지 말고 나 물을 줘. 네가 좋아하는 것만 주냐.”

    “나물은 맛없는데?”

    “형은 아프니까 골고루 먹어야 해. 형한테 나물 주고 도진이도 같이 먹어.”

    어머니께서 사랑을 담아 말씀하셨는데 도진이가 으응 하는 소리를 냈다.

    “난 건강하니까 괜찮아. 아

    고분고분하던 녀석이 머리가 크기 시작하더니 말대답을 한다.

    아무튼 된장으로 무친 미나리가 입 에 들어오자 입 안이 한결 시원해졌다. 식감도 향도 만족스럽다.

    “자넨 여전히 나가 있는가.”

    할아버지가 아버지께 물으셨다.

    “복원이 끝나 요즘엔 현장에는 갈 일이 많이 없습니다.”

    “영국이 아니라 이쪽으로 알아볼 것을 그랬어.”

    “그러지 않아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내년쯤엔 가까이 올 예정입니다.”

    “그래. 가족은 함께 있어야지. 진희 너는 요즘 어떠냐.”

    “화랑 잠시 닫을까 고민 중이에요. 아무래도 남에게 맡길 수가 없어서 도빈이랑 같이 있으려면.”

    “안 돼요.”

    나 때문에 하시던 일을 접다니.

    이미 한 번 있었던 일을 반복할 순 없다.

    “죠엘이랑 윤희 누나 있으니 괜찮아요.”

    “두 사람 다 계속 함께 해줄 순 없잖니. 입원해 있을 때 윤희한테 얼 마나 미안했는지 아니.”

    “지훈이도 있고.”

    “지훈이도 마찬가지잖니. 자꾸 엄마 속상하게 할래?”

    “ 아一”

    도진이가 집어 준 도라지를 먹으며, 요즘 들어 자꾸 밀린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곡을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부터 구상했다는 말이잖아.’

    최지훈은 대교향곡을 연습할수록 감탄을 반복했다. 비록 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와 같이 빠른 타건을 요구하진 않았지만 난이도 자체는

    그와 비견할 만했다.

    물론 작업 시간이 긴 탓에 중간에 수정되었을지도 모르나 그 당시 이 미 이런 연주가 가능하다고 판단했던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완벽해야 해.’

    최지훈은 다시 한번 그에게 주어진 카덴차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배도빈의 의도가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오케스트라가 남긴 심상을 잘 받아오고 전개해 넘겨줄지 고민하고 또 고민하길 반복했다.

    그렇게 세 시간이 훌쩍 지나고 늦은 밤.

    ‘자고 있으려나.’

    최지훈이 배도빈에게 메시지를 보 내려다가 멈칫 하곤 전화를 걸었다.

    발신음이 이어지고 끊으려던 차 배도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배도빈입니다.

    “나야. 자고 있었어?”

    -아니. 오늘 연습 복기하고 있었어.

    “좀 쉬지.”

    -쉬고 있어.

    음악 생각을 단 일 분이라도 하지 않는 배도빈이니 누워서 복기하는 게 쉬는 일이었고.

    그런 상황을 이해하고 있는 최지훈 은 할 말이 없어졌다.

    -아무튼 내일부턴 방 청소 하지 말라 해야겠어.

    “왜?”

    -물건이 있던 자리를 기억하고 찾는데 치워버리면 찾질 못하잖아. 슬 리퍼가 어디 있는지 한참 헤맸어.

    최지훈이 입술을 깨물었다.

    형제가 겪고 있을 고통이 얼마나 클지 그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왜?

    “그냥 잘 있나 싶어서.”

    -오늘 종일 같이 있었으면서 뭔 소리야.

    “걱정되니까 그렇지. 아, 지금 그쪽으로 갈까? 나 있으면 슬리퍼도 다른 것도 찾아줄 수 있잖아.”

    -너까지 그러지 마. 안 그래도 다 들 난리야. 어머니까지 일 그만두신 다고 하셔서 속상한데.

    “너무 그러지 마. 어머니도 얼마나 걱정되시겠어. 도움 필요한 건 사실 이잖아.”

    -그게 싫은 거라고.

    사랑하는 만큼 돕고 싶고 짐이 되기 싫기에, 최지훈은 어머니의 마음도 배도빈도 이해할 수 있었다.

    계속 이야기해 봤자 답이 없는 이야기라 화제를 바꾸었다.

    “대교향곡 연습하고 있었는데, 이거 정말 1학년 때 구상한 거 맞아?”

    _왜?

    “난이도가 너무 높잖아.”

    -엄살 부리지 마. 네가 못 치는 곡이 어딨어.

    배도빈의 퉁명스러운 말에 최지훈의 기분이 좋아졌다.

    “그게 아니라. 그때도 이런 걸 칠 수 있다고 생각했단 뜻이잖아.”

    -그때는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

    “그럼?”

    -지금은 절대 못 하지. 저번에 들 어보니 조금 나아졌더라.

    최지훈이 잠깐 눈을 굴리다가 되물었다.

    “지금 우리 같은 말 하고 있는 거 맞지?”

    - 뭐가?

    “지금 핀트가 안 맞는 거 같아. 그러니까 이 곡, 어렸을 땐 연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지금은 못 한 다고?”

    -어. 채은이 말이야.

    “아.”

    최지훈도 배도빈만큼이나 차채은의 재능을 아까워했기에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이 복잡하고 정교한 곡을 차채은에게 맡기려 했던 것 같다고 받아들였다.

    -가우왕이 연주하는 파트가 채은 이 몫이었고 네가 받은 부분이 네 몫이었지.

    “채은이가 정말 열심히 했으면 가우왕 씨만큼 할 수 있었을까?”

    -글쎄.

    배도빈이 흐음 소리를 내며 고민하 다 입을 열었다.

    -그렇게 믿었지. 그런데 베트호펜 콩쿠르랑 이번에 지켜보면서 좀 달 라졌어.

    “어떻게?”

    -재능이 출발선을 앞당길 순 있어 도 도착선을 당기진 못하는 거 같아.

    “응?”

    -노력이 더 중요하다고. 타마키랑 툭타미셰바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더라.

    “맞아.”

    -정말 저렇게까지 재능이 없을 수 도 있나 싶었거든. 특히 타마키.

    “타마키 씨 서운하겠다.”

    -자기도 알았어. 그래서 그렇게 노 력했던 거지. 두고 봐. 타마키 히로 시 협주곡 정리되면 깜짝 놀랄 테니까.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대교향 곡도 막 들어갔잖아.”

    -오케스트라 대전 전까지만 완성하 면 되니 시간은 충분해.

    어쩔 수 없는 열정에 최지훈도 빙 그레 웃고 말았다. 설령 시력을 잃었을지라도 배도빈이 우울해하거나 좌 절하지 않고 평소와 같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했다.

    “응. 기대할게.”

    -어. 그리고.

    “응.”

    -전화 자주 해. 심심해.

    배도빈의 투정에 최지훈이 소리 내 어 웃었다.

    “내일은 채은이랑 놀러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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