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518화 (518/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518화

    112. 배도빈(2)

    “조심해.”

    스칼라는 배도빈을 부축하여 인도 했다. 의식의 장소까지 가는 길은 꽤 험준해 배도빈은 몇 번이나 넘어 질 뻔했다.

    그때마다 이를 악다물고 발을 옮긴 끝에 이윽고 그가 한 번 시력을 되찾은 곳에 이를 수 있었다.

    “도착했어.”

    스칼라의 말에 배도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목소리가 울리는 것으로 동굴 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어디선가 불어드는 바람이 신비한 화음을 이루었다.

    배도빈은 그 따뜻하고 포근한 자연의 음악으로 자신이 그때 그곳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었다.

    시력을 잃고 난 뒤의 답답함이 조금은 위로받는 듯했다.

    “바이올린은?”

    “여기.”

    스칼라가 배도빈에게 그의 캐논을 넘겨주었다.

    배도빈은 그것을 소중히 챙겨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의 감정을 떠올리며 바이올린을 받쳤고 이내 바람이 이루는 화음에 맞춰 현을 켜기 시작했다.

    미친 짓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냥 헛걸음일지도 모른다 고 생각했지만 최고 수준의 의료진도 원인을 찾을 수 없었기에 배도빈 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똑— 똑—

    배도빈의 바이올린과 함께 물방울 도 자신을 내던져 하나의 연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때와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뭐가 문제야.’

    그때와 같이 어렸을 적부터 자신을 귀찮게 했던 건방진 장난이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리 애써도 어느 순간부터 그것 은 더 이상 요상한 소리를 내며 그의 시야를 가리지도 않았으며 무엇 인가를 알리지도 않았다.

    그래서 가장 강하게 반응했던 이곳 에 오면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싶었거늘.

    “빌어먹을.”

    배도빈이 캐논을 내리며 읊조렸다.

    ‘대체 그건 뭐였지.’

    그가 신의 장난으로 취급했던 것은 사실 떠올려보면 정말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막 다시 태어났을 무렵에는 기억을 가지고 200년 뒤 미래에 태어나는 말도 안 되는 상황 때문에 크게 생 각지 않았다.

    현대 문물에 놀란 배도빈에게 TV 나 핸드폰, 인터넷, 비행기 등은 ‘신 의 장난’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을 평가하는 그 건방짐에 무시 해 오긴 했지만 완전히 적응을 마친 뒤에는 그것만이 이해할 수 없는 일 로 남았다.

    “배도빈.”

    스칼라가 배도빈에게 다가왔다. 낙 담하고 있는 그에게 스칼라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그가 그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나누고 싶을 뿐이었다.

    “동상 걸렸을 때 나았던 건 뭐지.”

    배도빈의 질문에 스칼라가 무거운 마음으로 답했다.

    “할아버지가 만드신 약은 효과가 좋아. 가벼운 동상은 금방 낫게 해 줬으니까.”

    “네 하프 연주를 듣고 나은 게 아 니었다고?”

    이미 여러 번 심신을 안정시키는 정도였을 뿐이라 답했지만 스칼라는 배도빈의 심정을 이해하기에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힘 때문에 숨어 산 거 아니었어?”

    “그 오해 때문에 숨어 살았지. 우 리는 음악이 몸과 영혼을 정화한다 고 믿지만 실제로 중병이 나은 적은 없었어. 감기 같은 게 걸리면 최대 한 편히 쉴 수 있는 연주로 위로했을 뿐이야.”

    “……만약 정말 그런 힘이 있었다 면 이렇게 무기력하게 있지 않았을 거야. 타마기 때도……

    스칼라의 분함이 그의 목소리로 고 스란히 전해졌다.

    믿었던 유일한 탈출구마저 잃은 배도빈은 미간을 찡그린 채 서 있을 뿐이었다.

    더 많은 악기를 익히고 싶었다.

    더 많은 악보를 보고 싶었다.

    어머니의 그림을 계속 보고 싶었다.

    흙먼지를 뒤집어 쓰고도 연구에 매진하는 아버지를 계속 보고 싶었다.

    도진이가 자라는 모습도, 최지훈이 단원들과 함께 루트비히홀에서 연주 하는 모습도, 차채은이 쓴 글도 계속 보고 싶었다.

    가우왕과 찰스 브라움의 듀엣도 보고 싶었고 푸르트벵글러와 카밀라의 결혼식도 보고 싶었다.

    시간이 나면 빈 필하모닉을 지휘하는 사카모토의 모습도 보고 싶었다.

    평소처럼 소소와 맛있어 보이는 디 저트를 골라 먹으며 품평을 하고 싶었고 진달래가 짠 황당한 무대 콘셉트가 어떻게 발전하는지도 확인하고 싶었다.

    매일 산더미처럼 밀려드는 팬레터 도 읽고 싶었다.

    그리고.

    나윤희의 조심스러운 미소가 그리 웠다.

    배도빈이 주먹을 꽉 쥐고 어금니를 깨물었다.

    ‘어째서.’

    이제 다신 그 모든 행복을 누릴 수 없단 상실감이 그를 잠식해 나갔다.

    ‘어째서 또 이런 일이.’

    이런 일이 또다시 벌어질 것을 두 려워한 배도빈은 어렸을 적 한 번 쓰러진 뒤로 줄곧 세계 최고 수준의 의료진을 두고 건강을 살폈다.

    반년에 한 번 가능한 모든 검사를 받았고 또 무리해야만 했던 때를 제 외하곤 주변의 조언을 받아들여 충

    분히 쉬기도 했었다.

    푸르트벵글러의 건강을 챙길 겸 항상 그와 함께 조깅을 했고 식단 관 리에도 철저했다.

    그러나 결국 오늘과 같은 날이 도래하고 말았다.

    ‘빌어먹을.’

    다시 시작한 삶은 그에게 결손되어 있던 모든 것을 돌려주었다.

    소리를 잃은 그에게 이젠 그 누구 보다도 예민한 귀가 있었고.

    지독하게 가난했던 과거와 달리 현 재는 역사상 가장 많은 부를 누리는 음악가가 되었다.

    그러나 그보다 그를 행복하게 했던 것은 사랑.

    폭력적이었던 아버지와 그 무심함으로 어머니를 잃었다.

    진정으로 사랑했던 유일한 사람을 잃고, 그의 재능을 탐하려던 이들에 게 배신당하길 거듭하며 청력마저 잃는 과정에서 그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신경질적으로 변해갔다.

    타인을 믿을 수 없었다.

    더 이상 상처 받기 두려워 다가오는 사람을 내쳤고 작은 실수에도 민 감하게 반응했다.

    그렇게 상처받은 음악가는 그저 언젠가는 구원의 날이 올 거라는 굳은 믿음으로 노래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날이 온 것이었다.

    사랑하는 어머니, 아버지, 동생, 할 아버지, 사촌형.

    히무라 쇼우, 나카무라 이데, 사카모토 료이치, 최지훈, 차채은, 토마 스 필스, 크리스틴 노먼, 제임스 터 너, 이승희,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니아 발그레이, 케르바 슈타인, 헨리 빈프스키, 파울 리히터, 마누엘 노이 어, 카밀라 앤더슨, 이자벨 멀핀, 죠 엘 웨인, 홍승일, 차명운, 가우왕,

    찰스 브라움, 나윤희, 나카무라 료코, 왕소소, 진달래, 진칠삼, 프란츠 페터, 타마키 히로시, 스칼라, 진 마 르코.

    그는 정말 많은 사람과 교류했고.

    또 그들이 모두 각자의 영역에서 조금의 거짓도 없이 진실되게 살아 가는 모습을 보며 행복해했다.

    믿을 수 없는 인간으로 가득했던 그의 세계에 비로소 광명이 찾아든 것이었다.

    그렇게 행복한 삶이었기에.

    자신에게 찾아온 불행이 더욱더 크 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괴로워하는 배도빈을 지켜보는 스 칼라의 마음이 찢어지는 듯했다.

    언제나 당당하고 강인했던 그가 조 금씩 쓰러지는 것만 같아, 그를 도울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을 탓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동안 동굴 안 에서 말없이 시간을 보냈다.

    똑— 똑—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와 때때로 화음처럼 울리는 바람의 노래가 그 들을 위로하길 얼마간.

    ‘그래.’

    배도빈은 가슴속에서 요동치는 불꽃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름다운 곡을 쓰고 싶단 열망은 그 찬란함을 조금도 잃지 않고 그의 가슴을 뜨겁게 했다.

    더 이상 앞을 볼 수 없어도.

    그 어떤 시련이 닥쳐도.

    그때와 같이.

    그 어떤 것도 그 불길을 막아낼 순 없었다.

    대교향곡을 완성하고 또 그보다 더 아름다운 곡을 쓰려는 강인한 의지가 그를 일으켰다.

    “ 가자.”

    자리에서 일어난 배도빈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

    * * *

    【배도빈 칩거 일주일째. 그에게 무슨 일이?]

    【베를린 필하모닉. 디지털 콘서트홀 이용자수 소폭 감소. 배도빈 영향인가?]

    【배도빈 완전 실명 가능성]

    【침묵을 지키는 베를린 필하모닉】

    공식 입장 발표를 약속했던 배도빈 이 퇴원 후에도 아무런 행동을 보이 지 않자 그의 건강에 이상이 생겼음을 추측하는 기사가 쏟아졌다.

    클래식 음악 팬들의 불안함은 더욱 고조될 수밖에 없었다.

    ㄴ 도빈아아 ㅠㅠ

    ㄴ 배도빈 이러다가 예전처럼 활동 중단하는 거 아냐?

    ㄴ 재수 없는 소리 좀 하지 마라.  안 그래도 불안해 죽겠는데.

    ㄴ 퇴원했다며 ㅠㅠ 괜찮아져서 퇴 원한 거 아니었어?

    ㄴ 진짜 천재는 가만 안 냅두는 거 같다. 이게 대체 뭔 일이람.

    ㄴ 괜찮을 거임. 도빈이 콩쿠르 때 도 침착해 보였잖아.

    ㄴ 근데 앞 못 보면 악보는 어떻게 씀?

    ㄴ 그러게.

    ㄴ 악보 쓰는 거야 대필도 가능하고 배도빈 정도면 피아노나 다른 악기 연주하는 건 일도 아닐 테니 그걸 받아 적을 수도 있겠지.

    ㄴ 가능하다 해도 보통 일이 아닐 텐데. 다른 사람이 대신 써주는 거 랑 본인이 직접 쓰는 거랑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지.

    ㄴ 아……. 정말 너무 안타깝다. 진 짜 어렸을 때부터 너무 많은 일을 해서 더 안타까움.

    ㄴ  맞아. 솔직히 한 사람이 감당하 기엔 너무 많은 일을 했음. 도빈이 가 4살 때부터 지금까지 만든 곡이 총 61곡임.

    ㄴ 활동 기간 따지면 생각보다 안 많은데?

    ㄴ 3~4분짜리 노래랑 분량이 다르잖아. 더군다나 악단 생활도 병행했고 또 연주자로서도 활동했으니까.

    ㄴ  방금 기사 떴다. 도빈이 기자회 견연대. [링크]

    ㄴ 3일 오후 2시네. 자기 전에 볼 수 있겠다.

    팬들이 배도빈을 걱정하며 의견을 나누었고 곧 그들은 마침내 모든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었다.

    배도빈이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입 장을 밝히겠다 알리자 한국과 독일은 물론 전 세계 모든 음악 팬이 베를린 기준 3월 3일 오후 2시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그러한 요구에 부응하듯 세계 모든 유력 언론사가 배도빈의 기자회견에 참가했고.

    곧 베를린 필하모닉 디지털 콘서트홀과 각국 방송국을 통해 배도빈의 모습이 공개되었다.

    선글라스를 쓰고 죠엘 웨인의 안내를 받으며 자리에 앉은 배도빈의 모습에 전 세계가 탄식했다.

    “배도빈 입니다.”

    배도빈이 입을 열었다.

    “많이 궁금해하시고 걱정하실 거라 생각해 오늘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카메라 셔터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지난번 많은 생명을 앗아간 불행한 사고로 인해 시력에 손상을 입었습니다. 이후 차도를 보였지만 컨디 션이 좋지 못한 날에는 다시 시력을 잃는 후유증을 겪고 있었습니다.”

    팬들에게 자신의 상태를 전하는 배도빈의 목소리는 그들을 위해서라도 무척이나 담담했다.

    “조심했지만 콩쿠르와 평생의 꿈을 함께하게 되면서 다시 시력을 잃었고 그때가 2라운드에 참가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배도빈이 숨을 짧게 내쉰 뒤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 방면으로 치료 방법을 찾았으나 현재로서는 원인을 파악하지 못한 상황입니다. 어쩌면 계속 앞을 보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이것으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와 베를린 필하모닉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항상 노 래할 것입니다. 이상입니다.”

    배도빈이 발언을 마치자 기자들이 앞다투어 손을 들었다.

    이자벨 멀핀이 한 기자에게 발언권을 주자 그가 다급히 물었다.

    “실명이라 하시면 완전 실명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빛이 있고 없고를 분간할 정도입니다.”

    믿을 수 없는 사실을 확인하려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은 그들을 더욱 충격으로 몰아갔다.

    또 한 명의 기자가 발언권을 얻었다.

    “아, 앞으로 활동은 어떻게 예정되어 있습니까.”

    “우선은 준비와 적응에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동안 베를린 필하모닉 은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상임 지휘자가 이끌어줄 예정입니다.”

    “어떤 준비를 하시려는지 알려주시겠습니까? 혹시 평생의 꿈이라 하셨던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까?”

    한 기자의 질문에 배도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12년에 걸쳐 만든 곡이 있습니다. 콩쿠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완성할 수 있었고 지금 전 단원과 함께 가 다듬고 있습니다.”

    배도빈은 확신에 차 있었다.

    평소와 같이 항상 그랬던 대로 의욕과 자신에 차 있었다.

    “지금껏 느껴보지 못했던 경험을 약속합니다.”

    배도빈의 당당함에 기자들은 그의 건강에 대한 질문을 잊고 새 곡에 대한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TV를 통해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차채은은 고개를 돌려 원고를 채워 나갔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 좋은 대학에 합격해야 한다, 살을 빼야 해야 한다와 같이 우리는 정말 많은 당위를 두고 살아간다.

    그러기 위한 방법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건강을 위해 살을 빼야 하는데 살을 빼려면 식단을 조절하고 운동을 해야 한다.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그 당위와 목적, 방법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 러지 못한다.

    오늘 속상한 일이 있어서, 어제 운동을 했더니 오늘 근육이 뭉쳐서, 힘들어서, 배고파서.

    당위와 목적을 먼저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지부터 확인하기 때문이다.

    상황과 조건들을 나열해 보면 세상에는 불가능한 일로 가득하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사람은 언제나 목적과 당위성을 먼저 보고 있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현 악단주이자 바흐, 베토벤, 모차르트와 함께 가장 위대한 음악가로 칭송받는 배도빈은 그가 해야 하는 일이 있으면 그 어 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았다.

    그것이 지금의 그를 만든 원동력이라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는 분명 또 기적을 일으킬 것이다. 그가 당당히 자신한 대로, 우리는 분명 지금껏 세상에 없던 새로운 곡과 감동을 받을 것이다.

    원고를 쓰던 차채은이 눈물을 닦고 다시금 키보드에 손을 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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