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517화 (517/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517화

    112. 배도빈(1)

    “후.”

    지난 20년간 최고의 첼리스트로 활동하며 베를린 필하모닉의 첼로 수석 자리를 지켰던 이승희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때일수록 힘이 되어줘야 할 텐데.’

    지금 당장은 괜찮았으나 대교향곡을 발표하거나 오케스트라 대전이 다가왔을 때를 고려해야 했다.

    ‘후임자를 찾아야 할 텐데. 누구로 해야 하지.’

    이승희가 자신의 배에 손을 얹고 고민했다.

    “무슨 생각해?”

    한스 이안이 다가왔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돼서.”

    한스는 아내 앞에 놓인 대교향곡의 총보를 보고 그녀가 무엇을 고민하는지 유추할 수 있었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고민할 일 아니야. 미안해할 일도 아니고.”

    “그렇지.”

    이승희가 시무룩하게 답하자 한스가 그녀의 어깨를 감고 볼에 입을 맞추어 위로했다.

    이승희가 한스에게 기댔다.

    “바이올린은 어때?”

    “말도 마. 다들 멘탈 나갔더라. 이런 곡을 어떻게 연주하냐고. 첼로는?”

    “마찬가지야.”

    배도빈이 베를린 필하모닉이 아니면 감히 엄두를 못 냈다고 말한 대 로 대교향곡의 난이도는 상상을 초 월했다.

    배도빈의 의지에 감화된 이들이 마 음을 굳게 먹고도 며칠째 고생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승희의 걱정이 클 수밖 에 없었다.

    ‘내가 리드해 줘야 하는데.’

    가이드는 잡아줄 수 있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첼로 솔로를 누구에게 맡겨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계속 되었다.

    ‘빌? 레논?’

    단원들을 떠올려보며 그들의 기량을 가늠해 보아도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이승희 본인조차도 얼마나 소화해 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고 오케스트라에서 솔로 파트가 얼마나 큰 부담을 짊어지는지 잘 알았기에 신중히 선택해야 했다.

    그때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이승희와 한스가 서로를 보았다.

    “누구지?”

    “올 사람 없는데.”

    한스 이안이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외시경을 통해 밖을 확인하자 익숙한 사람이 서 있었다.

    평소 무덤덤한 표정이 아니라, 한스는 의아해하며 문을 열었다.

    “왕 악장.”

    “안녕하세요. 승희 언니 보러 왔어요.”

    “그래. 들어와.”

    한스 이안이 흔쾌히 길을 터주었고 거실로 나와 있던 이승희는 왕소소를 반갑게 맞이했다.

    “무슨 일이야? 연락도 없이.”

    “미안. 시간이 없어서.”

    “시간?”

    “응.”

    왕소소가 침을 꿀꺽 삼키고 굳게 마음먹은 바를 입에 담았다.

    “첼로 좀 가르쳐 줘.”

    그녀의 말에 이승희가 잠시 멈춰 섰다. 소소의 손을 잡아 이끌어 소파에 앉힌 뒤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이승희는 왕소소가 얼마나 큰 역할을 해주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특히나 얼후는 1악장 전반에 걸쳐 연주해야 했으며, 따로 얼후 연주자 도 없었기에 그녀의 역할은 대체불가했다.

    그런 왕소소가 첼로 솔로까지 맡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임신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고 그런 상황에서 먼저 찾아와 준 마음이 고맙긴 했지만 아니 될 일.

    그래서 거절하려 했지만 소소는 이 미 마음을 굳게 먹고 있었다.

    “어차피 1악장 이후엔 분량 없어. 그리고 3악장에서 첼로 솔로 맡길 사람 필요하잖아.”

    “그래. 고민하고 있었어. 그런데 너 정말 할 수 있겠어?”

    이승희는 냉정했다.

    왕소소가 현악기 전반을 다루는 천재 중의 천재라고는 하지만 대교향 곡은 첼로만 파고 들었던 연주자들 조차 부담을 느끼는 곡이었다.

    “할 수 있을 때까지 할 거야.”

    “너도 알잖아. 벼락치기로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거.”

    “그래서 언니가 필요해. 나 정말 열심히 할게.”

    소소의 간절한 눈빛에 이승희가 고민에 빠졌다.

    “언니만큼은 못 해도 꼭 도빈이 곡 완성할게. 도와줘.”

    왕소소에게.

    배도빈은 은인이었다.

    그가 없었더라면 중국에서 나올 일 도 없었을 테고 베를린 필하모닉이 라는 공동체에서 활동하는 일도 없었을 터였다.

    만사가 귀찮고 무료했던 그녀에게 매일 새로운 음악을 접하는 일과 그 것을 함께하는 동료의 존재는 무척 이나 새로웠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왕소소는 홍콩에서의 일을 떠올리 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래야 해. 나도 도빈이 도와주고 싶어.”

    “부족한 거 알아. 힘들 거라는 것 도 알아. 그래도 해야 해.”

    소소의 다짐은 굳건했다.

    그것을 확인하자 이승희도 마음을 다질 수 있었다.

    자신이 부담해야 할 짐을 기꺼이 넘겨 받으려는 소소에 대한 고마움 때문이라도 자신의 노하우를 모두 전수할 생각이었다.

    “나 가르칠 땐 엄해.”

    이승희의 엄포에 소소가 기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가우왕 예나왕 부부의 신혼집에서는 찰스 브라움과 가우왕이 머리를 맞대고 대교향곡의 총보를 분석하고 있었다.

    “2악장 종결부 체크했냐.”

    “첫 마디 F, 반음 올리려던 거 같은데.”

    “어.”

    두 사람은 배도빈의 평소 버릇과 취향을 고려해 악보 교정을 하고 있었다.

    연습에 들어가기 전 그에게 알려주 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탓이었다.

    ‘보기 좋잖아.’

    볼 때마다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났던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예나왕은 콧노래를 흥얼 거리며 과일을 손질했다.

    “쉬면서 해.”

    예나왕이 과일을 가져다 놓자 세 시간 넘게 쉬지도 않고 일했던 두 사람이 그제야 인상을 쓰며 어깨와 등을 폈다.

    세 사람이 과일을 나눠 먹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별일이네.”

    “ 뭐가?”

    예나왕이 오빠와 남편을 번갈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두 사람이 사이 좋게 함께 일하는 모습이 신기하다는 제스처에 찰스 브라움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일이니까.”

    예나왕이 나름 납득하곤 고개를 돌렸다.

    “자기, 악보 분석하는 건 정말 오 랜만에 보는 거 같은데.”

    “몇 번 보면 다 외우니까.”

    “그럼 지금은?”

    “……빌어먹을 꼬맹이. 교정도 못 본 모양이야. 연습하면서 고친다고는 하는데, 250명이 한 번에 연주하 는데 소리만 듣고 세세하게 조율하는 게 말이 안 되지.”

    “연습 전에 확인차 물어볼 걸 정리 하는 거야.”

    찰스 브라움이 가우왕의 말에 설명을 덧붙였다.

    “성실하네.”

    아내의 칭찬에 가우왕이 사과를 입 에 넣고 우물거렸다.

    거의 모든 악보를 하루에 완전히 외워 머릿속에서 정리하며 연주하는 그로서는 악보를 교정할 필요가 없었다.

    타인에게 보여줄 일도 없었으며 그 자신이 필요할 땐 언제든 머릿속의 악보를 꺼내 수정하면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배도빈.’

    아집으로 점철되었던 그의 세계를 확장해 준 배도빈을 위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일 이라면 무엇이든 하고자 했다.

    그가 대중과 가장 친근한 피아니스트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익힌 덕이었다.

    배도빈과의 경합을 통해 깨달았고 그의 곡과 연주를 분석하며 자신을 발전시켜 왔었다.

    그렇게 지금의 피아니스트 가우왕 이 있을 수 있었고 또한 인간 왕가 우로서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도 배도빈 덕분이었다.

    그때 배도빈이 위험을 무릅쓰고, 중국 전체를 적으로 돌릴 부담을 짊 어지고 홍콩에 오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빌어먹을 꼬맹이. 걱정이나 끼치 고.”

    가우왕이 투덜거리며 다시 펜을 잡았다. 생명의 은인을 위해서라면 무 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찰스 브라움도 곧장 악보를 살피기 시작했다.

    ‘배도빈.’

    젊은 찰스 브라움은 자신의 혈통과 배경 그리고 실력에 도취되어 살았다.

    그 시절 자신만이 최고였던 그에게 동양의 어린 천재는 흥밋거리일 뿐 이었다.

    그러나 그의 관심 표현에도 배도빈은 조금도 반응하지 않았다. 되레 최고였던 자신을 무시했고 파이어버 드에게조차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오만한 찰스 브라움은 그때부터 배도빈을 넘어서기 위해 노력했고.

    그를 감싸고 있던 세계에 의문을 던질 수 있었다.

    상류층 (Upper-class).

    영국이 아니라 동양에서, 상류층 계급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 중에서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이 있을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것을 인정한 순간부터 그는 보다 자신을 가꿔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긴 기다림 끝에 베를린 필하모닉 악장 오디션이란 무대에서 배도빈과 마주할 수 있었다.

    그에게 손을 뻗었던 영국의 여러 오케스트라와 음악가들은 경쟁국가 의 대표 악단 오디션을 보겠다는 찰스 브라움에게 실망했으나 그에게 그것은 더 이상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악장 오디션 평가가 베를린 필하모닉에 의해 결정된다고는 하나 그것 도 중요하지 않았다.

    연주를 펼치고.

    찰스 브라움 본인 스스로 배도빈을 넘어섰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는 배도빈에게 당당히 그것을 언급했다.

    ‘난 네게 지지 않았어.’

    ‘그래요.’

    ‘넌 분하지도 않냐? 이런 말을 하는데.’

    ‘사실이니까요.’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내가 억지를 부리는 거라 생각하겠지만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아. 내 음악을 할 뿐이야. 오늘 네 뒤에서도 난 내 음악을 할 거야. 그러니.’

    ‘거기까지. 음악가라면 당연한 일 이에요. 무대 위에서 말하는 것도 음악가가 할 일이고. 만약 당신이 아직 내게 인정받고 싶어 그런 말을 한다면.’

    ‘이제 그럴 필요 없어요. 난 당신을 동정하지도 추잡하거나 찌질한 놈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나 반응은 그의 예상과 달랐다.

    너무나 담담했다.

    그는 자신이 찰스 브라움 본인보다 못하다는 것을 인정했고 그 목소리 에는 그 어떤 아부도 동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때부터.

    찰스 브라움은 그가 어떻게 그 어린 나이에 세계의 숱한 거장들을 제 치고 최고가 될 수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어떻게 흔들리지 않고 항상 자신의 음악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확고했기 때문에.

    스스로 자존심이 강하다고 생각했던 찰스 브라움은 지금까지 자신을 움직였던 감정이 자존심이 아니라 아집이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배도빈의 저 확고함이야말로 진정 한 자존심이고 지켜야 할 가치라 여 겼다.

    그렇게 그의 사고가 완전히 트이자 그의 파이어버드는 더욱 아름답게 노래하게 되었다.

    그를 위해서라면.

    그와 함께 음악을 할 수 있다면. 그 역시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베를린 필하모닉 전원 같은 마음이었다.

    모든 단원이 대교향곡에 매진하고 있을 때 배도빈이 스칼라를 조용히 불러들였다.

    “같이 가줘야 할 곳이 있어.”

    스칼라는 배도빈의 말을 듣는 순간 그가 어디로 가려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와 그 부족이 숨어 지냈던 장소, 그중에서도 의식의 제단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곳에서 자신의 눈이 회복되었다고 믿는 배도빈이니 무리는 아니라 생각했다.

    “••••••그래.”

    스칼라는 그것이 우연일 뿐이라 말하고 싶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기에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출발할 거야. 외부에는 치료차 나서는 걸로 될 테고 사람도 최소한으로 데리고 갈 거니 걱정 마.”

    “그런 걱정 안 해.”

    스칼라는 배도빈과 그의 아버지 배영준이 그의 부족을 위해 어떤 일을 해주었는지 빠짐없이 알고 있었다.

    테메스 부족이 빈 근처에 다시금 작은 마을을 이루고 조금씩 현대 문명에 적응해 나갈 수 있는 것 모두 배도빈과 배영준 덕이었다.

    그는 그들을 완전히 신뢰했고 또 그들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만 험준한 산을 오르는 일이 도 리어 그의 건강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 걱정되었다.

    “괜찮겠어? 평소보다 더 힘들 거야.” 스칼라가 의식적으로 눈이 안 보여 산행이 힘들 거란 말을 피했다.

    “이름 있는 의사들에게는 다 보여줬어.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지.”

    “그래.”

    스칼라가 배도빈의 손등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꼭 나을 거야.”

    그리고 그럴 수 없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애써 확신하듯 말했다.

    다음 날.

    배도빈은 비서 죠엘 웨인과 스칼라 그리고 그가 고용하고 있는 의료팀, 경호팀을 대동하고 조용히 네팔로 향했다.

    죠엘 웨인이 미리 입단속을 해둔 현지 셰르파팀과 합류한 그들은 스 칼라의 인도로, 베를린에서 출발한 지 사흘 만에 목적지에 이를 수 있었다.

    “이게 뭐지?”

    “사람이 살던 곳 같은데.”

    일행이 작은 분지 안에 있는 테메 스 마을의 전경에 놀랐고 스칼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좁았었나.’

    고작 2년 정도 떨어져 있었을 뿐 인데 세상을 알아버린 스칼라의 눈에 테메스 마을은 너무나 좁고 열악 해 보였다.

    지금도 매일매일이 새롭고.

    다양한 음악을 접하며 즐거워했던 스칼라로서는 옛 마을을 통해 자신의 시야가 얼마나 넓어졌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스칼라.”

    “아, 응.”

    스칼라가 배도빈의 목소리에 반응해 그를 부축했다.

    배도빈이 죠엘을 불렀다.

    “네, 보스.”

    “스칼라랑 다녀올 곳이 있어요. 다들 여기서 쉬고 있으라고 전달해 주세요.”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아뇨. 그럴 필요 없어요.”

    배도빈의 태도가 단호했기에 죠엘 웨인은 걱정을 애써 접어두고 스칼라의 도움을 받아 걸어가는 그의 뒷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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