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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516화 (516/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516화

    111. 그래도 나아가리라(6)

    배도빈 콩쿠르가 화제 속에 막을 내리고 이틀 뒤.

    세계가 아직 여러 피아니스트의 연주에 감격해하고 또 그들의 희망을 걱정하고 있을 무렵.

    배도빈은 일주일간 충분한 휴식을 취했음에도 시력이 회복되지 않았기에 그의 전담 의료진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정밀 검사를 받았다.

    “좀 어떠십니까.”

    “좋아요. 앞이 보이기만 한다면.”

    결과지를 들고 배도빈을 찾은 빌 레밍턴 박사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소리를 들은 배도빈이 눈썹을 좁히며 결과를 묻자 레밍턴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아무 이상 없습니다. 도리어 매우 건강하십니다.”

    “좋네요.”

    “다만. ……다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치료 방향을 잡으려면 문제를 알아야 하는데 말씀 드렸다시피 안구와 신경, 몸 어디서도 문제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레밍턴 박사가 어렵게 꺼낸 말이 무책임하게 울렸다.

    함께 있던 유진희 배영준 부부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럼 밝혀내세요.”

    배도빈의 차가운 목소리에 레밍턴 박사가 조심스레 그들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과로로 인해 일시적 시 력 손실이 오고 나아지길 반복했으니 기간을 길게 두고 데이터를 수집 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며칠 쉬면 회복되던 때와 상황이 다르잖아요. 언제까지 이러고 있으란 말이에요?”

    “……안타까운 일이지만 현재로서는 영구적인 상황도 준비하셔야 할 듯합니다. 미국 남가주대학에서 전 기망막을 이용해 시력을 회복하는 방법을 진척시켰고 이미 실사례도.”

    “그만.”

    배도빈이 레밍턴 박사의 말을 끊었다.

    “잘못 들은 거 같은데. 방금 뭐라 했죠?”

    “받아들이기 힘드시겠지만 상태가 장기화될 가능성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닥쳐요.”

    배도빈의 목소리가 격앙되었다.

    지금껏 곧 괜찮아질 거라는 생각 때문에 의연하게 있던 그의 인내력 이 더는 버티지 못했다.

    “멀쩡한 눈 내버려두고 뭘 어쩌고 저째? 내가 당신과 당신 팀에게 그 딴 말이나 지껄이라고 지금까지 그 돈을 줬어?”

    “도빈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모습에 유진희의 가슴이 찢어질 듯 했다.

    어릴 때부터 그 어떤 일에도 의연 하고 믿음직스러웠던 아들이, 바로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되레 부모와 할아버지를 먼저 걱정했던 아들이 실은 너무나 힘들어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아들을 끌어안고 등을 쓸어 내렸다.

    “그럼. 괜찮을 거야. 엄마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낫게 해줄게.”

    그 목소리가 심하게 떨려서 배도빈 은 그간 걱정 끼치지 않기 위해 참 아왔던 감정을 다시금 다스렸다.

    “박사님, 잠시.”

    배영준이 침울해진 레밍턴 박사를 밖으로 불러내 이야기를 다시 이어 나갔다.

    “정말 아무 방법이 없습니까.”

    “죄송합니다.”

    “안과에서 가장 권위 있다고 알려 진 박사님이 그렇게 말하시면 안 되 지 않습니까. 치료가 안 되면 이유 라도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배영준이 답답한 마음을 최대한 억누르며 다그쳤지만 레밍턴 박사는 답을 줄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썼지만 모두 정상으로 나왔습니다. ……정 말 죄송합니다.”

    배영준이 이마를 짚고 시선을 이리 저리 옮기다 숨을 내쉬었다.

    * * *

    며칠 뒤.

    악단주가 퇴원했단 소식에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들은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겨우 만 21세. 젊다고도 할 수 없이 너무나 어린 그들의 왕이 마침내 시련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한 덕이었다.

    “도빈이 퇴원했다며?”

    “오늘 나온다고 하던데.”

    “잘 됐지. 후.”

    “그동안 너무 무리했던 거야. 우리 가 좀 더 나서서 조금이라도 덜어주 자고.”

    “아무렴.”

    그가 없는 보름간 단원들은 배도빈 이 얼마나 많은 일을 감당하고 있었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총보를 만드는 일부터 무대 환경 유지조차 확인했고 악장단과 수석 이상으로 단원들을 케어했다.

    250명이 넘는 대규모 오케스트라를 단 한 사람이 모두 확인하고 개 선하고 있었으니 그 빈자리가 크지 않을 수 없었다.

    상임 지휘자인 총감독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감독 케르바 슈타인, 부 감독 가우왕 그리고 악장단이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만.

    배도빈의 공백은 시간이 갈수록 너 무나 크게 느껴졌다.

    단원들은 배도빈이 짊어진 짐을 조 금이라도 그들이 가능한 함께 질 것을 다짐했다.

    “실례합니다.”

    연습실로 사무국 직원이 들어섰다.

    “보스께서 모두 대회의실로 모여달 라 하셨습니다. 지금 바로 가주시면 돼요.”

    “그래. 가자고.”

    대회의실로 모이라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직접 전달받거나 안내 방송을 통해 대회의실에 모인 단원 들이 자리했고 잠시 뒤 들어선 배도빈의 모습에 경악하고 말았다.

    “보, 보스.”

    “도빈아.”

    아무 일 없다고.

    괜찮다고 걱정 말라고 했던 배도빈이 죠엘 웨인의 도움을 받아 상석에 앉았다.

    배도빈이 입을 열었다.

    “다들 잘 지냈는지 궁금해서 불렀어요.”

    단원들은 그 태연함을 믿을 수 없었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몸을 떨며 배도빈에게 다가갔다.

    “어, 어떻게 된 게냐. 어?”

    배도빈이 아주 잠깐의 간격을 두고 입을 열었다. 그는 여전히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도리어 그 주변 사람들이 안타까울 정도로 차분했다.

    “원인을 모르겠대요. 치료 방법은 계속 찾고 있으니 걱정 말아요.”

    푸르트벵글러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쇠퇴하 던 베를린 필하모닉. 철혈의 폭군이었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마저 나이를 인지할 수밖에 없었던 무렵.

    배도빈은 희망이었다.

    자신을 뛰어넘어 베를린 필하모닉을 더욱 높은 곳으로 이끌어갈 희망 이었다.

    그랬던 탓일까.

    어린 그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바랐고 그 결과가 지금으로 이어진 것 같았다.

    “이 녀석아. 이 녀석아아아.”

    푸르트벵글러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배도빈은 자신의 건강을 전하고 싶은 것처럼 푸르트벵글러의 손을 힘 주어 쥐었다.

    괜찮다고. 괜찮다고 그를 위로했다.

    모든 사람이 충격에 빠져 침울해하 고 있자 배도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앞으로 우리 일정에 변동이 있을 겁니다. 제 눈이 낫기 전까지는 여 러분이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단원들이 당연하다는 둣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당분간 정기 연주회는 세 프와 케르바 슈타인 감독, 헨리 빈 프스키 감독대행에 의해 이뤄질 겁니다.”

    배도빈의 말에 헨리 빈프스키가 깜 짝 놀랐다. 그가 뭐라 말하기 전에 배도빈이 먼저 말을 꺼냈다.

    “헨리에겐 자격이 있어요. 오히려 조금 늦어져 미안해요. 헨리 빈프스 키 감독대행.”

    “도빈아..”

    배도빈이 이야기를 계속 전하기 위 해 손을 들어 헨리의 발언을 잠시 멈추었다.

    “실내악팀의 권한은 찰스 브라움 악장에게 부여합니다. 다만 그가 자 리를 비웠을 때는 가우왕 부감독이 맡아주세요.”

    찰스 브라움이 미간을 찡그리며 관 자놀이를 짚었고 가우왕은 입술을 깨물었다.

    “나윤희, 한스 이안, 왕소소 악장은 헨리의 빈자리가 클 거예요. 니아 발그레이 고문이 최대한 돕겠지만 지금까지 해오셨던 이상으로 힘 내 주셔야 합니다.”

    나윤희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고 한 스 이안은 결의를 다지듯 입을 앙다물었다.

    배도빈이 입장한 순간 손에 들고 있던 호빵을 내려놓은 왕소소는 그 어느때보다도 진지했다.

    “그리고 저와 모든 단원은.”

    배도빈의 말에 단원들이 깜짝 놀랐다. 이 상황에 무슨 일을 하려는 건 가 싶어 말리려는데 배도빈은 그들 의 우려를 허용하지 않았다.

    “하나의 곡을 준비할 겁니다.”

    배도빈이 죠엘 웨인을 부르자 그녀 가 비서실 직원들과 함께 각 단원들 에게 오케스트라 총보를 한 부씩 나 누어 주었다.

    그랜드 심포니라 적힌 악보는 상당 한 분량으로 쥐는 것만으로도 묵직 한 느낌을 주었다.

    대부분 배도빈이 아주 어렸을 적부 터 이 곡을 위해 작업해 왔음을 알았기에 악보를 받아든 손에 힘이 들 어갔다.

    “이 곡은.”

    배도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여러분이 아니고서는 기획할 수 없었습니다. 베를린 필하모닉이 연주한다고 상정하지 않았으면 만들 수 없었습니다.”

    단원들은 배도빈의 목소리에서 알 수 없는 비장함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개선해야 할 부분이 남아 있습니다. 앞으로 이 악보는 연습실에서 완성할 생각입니다.”

    그가 악보를 완성하지 못한 이유는 너무나 명확했다.

    고집스럽게 악보를 고치고 또 고쳤던 배도빈이 스스로 완성되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악보를 보인 경우는 처음이었다.

    “눈은 잠시 제 기능을 잃었지만 귀는 그 어느 때보다 예민합니다. 여러분의 연주를 들으며 그때마다 지 시할 테니 각자의 악보를 잘 관리해 주시길 바랍니다.”

    배도빈이 잠시 간격을 두었다가 흔 들리지 않는 그들의 가슴 깊은 곳까지 스며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총 연습은 일주일 뒤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시력을 잃고도 당당하며 의연하고 굳센 태도를 보이는 어린, 아니, 자랑스러운 지휘자를 향해 단원들 역 시 마음을 굳게 먹으며 답했다.

    “네, 보스.”

    “네, 보스.”

    그들은 이미 하나로 결속되어 있었다.

    잠시 뒤.

    앞으로의 일정을 공표한 배도빈이 죠엘 웨인에게 부축받아 밖으로 나 섰고 대회의실은 250명의 단원들의 침묵으로 숙여해졌다.

    “빌어먹을.”

    마누엘 노이어가 테이블을 내려치 자 그 충격음과 그의 목소리만이 공 허히 울렸다.

    “……다들 도빈이가 어떤 심정인지 알 거라 믿어.”

    그때 케르바 슈타인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해보자. 지금까지 우리 정말 많은 걸 받았잖아.”

    “그래야죠.”

    케르바 슈타인의 말에 실의에 빠졌던 단원들의 얼굴에 의지가 차오르 기 시작했다.

    “보스…… 괜찮아지시겠죠?”

    “그럼. 우리 보스가 누구야. 우리가 더 당황하잖아. 저렇게 의지가 강하 니까 분명, 꼭 나을 거야.”

    단원들은 어수선한 분위기를 강한 결속과 의지로 이겨내며 개인 연습 에 매진했다.

    어느덧 해가 지고 퇴근 시간이 되었을 때 진 마르코는 자신을 구원해 주었던 배도빈에게 닥친 시련을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괜찮을 거야. 강하니까.’

    그러나 그의 기분이 나아질 리 없었다.

    마르코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이 럴 때야말로 오보에 수석으로서 중 심을 잡아야 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 했다.

    아버지의 꿈을 좇아 빈 필하모닉에 입단했고 마침내 성과를 거두기까지 배도빈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의 연주에 회의감을 느꼈을 때조차 베를린 필하모닉으로 올 것을, 자신의 연주를 찾을 것을 권했던 배도빈을 위해서 힘을 내야 했다.

    그는 배도빈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분명 아무도 없을 루트비히홀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배도빈을 볼 수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소리를 죽 여야만 할 것 같았다.

    ‘뭐 하는 거지?’

    배도빈은 죠엘 웨인의 손을 잡고 무대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왼쪽에 서 오른쪽으로. 다시 오른쪽에서 왼 쪽으로.

    포디움에 섰다가 다시 반입구로 향하길 반복했고 진 마르코는 비로소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하나, 둘, 셋, 넷……

    반입구에서 지휘단까지 몇 발자국을 걸어야 하는지, 최대한 보폭을 일정하게 하여 헤아리고 있는 모습 에 진 마르코가 울컥하고 말았다.

    “끄읍.”

    그 소리에 배도빈이 반응했다.

    “죠엘, 여기 누구 있어요?”

    “아••••••

    죠엘 웨인이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진 마르코가 입을 틀 어막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마르코 씨가.”

    아무도 들이지 말라 했던 배도빈의 주문을 지키지 못한 죠엘 웨인이 한 탄했다.

    그 사정을 모르는 진 마르코가 객석을 지나 배도빈에게 다가갔다.

    “도빈아, 도빈아……

    배도빈이 되레 그를 다독였다.

    “필요한 일을 할 뿐이야. 울 필요 없어.”

    “하지만……

    “ 괜찮아.”

    본인은 얼마나 힘들지.

    그의 고통과 고뇌를 가늠할 수 없었기에 진 마르코의 눈물은 멈출 줄 몰랐다.

    그러나 그의 의연함 때문이라도.

    또 그가 주변사람에게 걱정 끼치고 싶지 않음을 알기에 진 마르코는 배도빈의 말에 어렵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단원들한테는 말하지 마.”

    “끄으. 끅. ……응.”

    “울지 마.”

    “끕. 끅. 응.”

    “이 정도로 무너질 내가 아니야.”

    배도빈의 말이 마치 다짐처럼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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