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513화 (513/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513화

    110. 그래도 나아가리라(4)

    발표 이후 1년간 그 누구도 연주 해내지 못했던 ‘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가 연주되었음에 세계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가 여러 국 제 무대에서 얼굴을 비추긴 했어도 니나 케베리히, 최성신 등과 같은 2라운드 탈락자에 비해 부족한 것도 사실이었기에 특히나 충격적이었다.

    ㄴ 그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지?

    ㄴ 엘리자베타 무시했던 놈들 어디 갔나?

    ㄴ 진짜 했네;;

    ㄴ 실수했잖아. 프로가 연주 도중에 틀려서 처음부터 다시 연주하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이냐?

    ㄴ 넌 제발 아닥 좀.

    ㄴ 좀 감동인데. 지금까지 솔직히 엘리자베타 놀림거리밖에 안 됐잖아. 근데 오늘 연주는 뭐랄까. 한 꺼풀 벗은 느낌임.

    ㄴ 사카모토 웃으면서 손뼉 치는 모습이 대견하다고 말하는 거 같음 ㅠ

    ㄴ 맞아맞아. 눈물 살짝 고인 것까지.

    ㄴ 대단하긴 하다. 정말. 난 진짜 가우왕 말고는 저거 연주하는 사람 없을 줄 알았어.

    ㄴ 그러니까.

    배도빈과 함께 배도빈 콩쿠르를 시 청하고 있던 나윤희도 다른 시청자 들과 마찬가지로 놀라고 있었다.

    “툭타미셰바 씨 대단하다.”

    “그러게요.”

    배도빈은 기뻐했다.

    그 누구보다도 음악을 사랑하는 위 대한 음악가에게 최근 후학들의 눈 부신 성장은 큰 즐거움이었다.

    베트호펜 콩쿠르에서 아리엘 핀 얀 스와 타마키 히로시, 프란츠 페터가 보여주었던 모습과 오늘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의 약진은 앞으로 음악이 더욱 아름다워질 거라 말해주고 있었다.

    끝없는 가능성의 일각을 보았으니 배도빈으로서는 그보다 기쁜 일도 드물었다.

    그것은 사카모토 료이치와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배도빈을 알게 되었을 때의 감정과 유사했다.

    “다음은 누구예요?”

    “에바로트 씨. 엄청 준비하셨나봐.”

    “그렇겠죠. 2라운드에서 가우왕과 차이가 컸으니까.”

    “응……

    “왜 그래요?”

    “아, 의상이 조금.”

    “괜찮아요. 알고 싶지 않아요.”

    "윽."

    나윤희는 바지를 골반에 걸쳐 치골 까지 드러내고 있는 막심 에바로트를 보며 배도빈에게 이 민망한 상황을 설명하지 않아도 됨을 다행으로 여겼다.

    현장 관객들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 엄마야.”

    한이슬, 차채은과 같이 객석에 있던 정세윤 기자가 자신도 모르게 소 리 내고 말았다.

    상의 없이 바지만 입고 나온 막심 에바로트는 그의 마른 근육과 강렬 한 문신을 자랑스레 보이고 있었다.

    “저 정도면 공연음란죄 아니에요?” 차채은의 지적에 넋을 놓고 있던 한이슬이 고개를 돌렸다.

    “예술이잖아. 그렇게 닫힌 사고로 예술을 받아들이는 건 안 좋아.”

    차채은은 한이슬을 의심스럽게 보 며 예술과 외설의 차이를 공부할 필 요성을 느꼈다.

    * * *

    ‘ 훌륭하다.’

    가우왕은 그의 가장 오랜 라이벌 막심 에바로트의 연주에 집중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본인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로 생각하는 그는 니나 케베리 히와 최성신을 한참 아래로 보고, 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를 연주한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조차 가능성 있는 어린애로 여겼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피아니스트 중에는 스승 크리스틴 지메르만과 배도빈, 최지훈, 막심 에바로트만을 자 신과 동격으로 인정했다.

    투표 결과 따위 어떻게 되든 그에게는 자신의 기준이 더 중요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우승해야 했다.

    그의 자존심과 자부심뿐만이 아니라 베를린 필하모닉의 퍼스트 피아니스트 자리가 걸린 문제였고.

    ‘콩쿠르 끝나면 밥 먹자고 하셨어.’

    ‘ 누가?’

    ‘아버지, 어머니.’

    마침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내의 가족이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 했다.

    당당히 우승하여 최고의 피아니스트로서 인사하고 싶었다.

    가장 화려한 모습으로 인사하고 싶었다. 그들이 딸과 자신을 자랑스레 생각할 수 있도록 말이다.

    이토록 우승해야 하는 이유가 너무나 많고 명확했다.

    그래서 첫 연주를 한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와 두 번째 순서를 맡아 절정의 기량을 보여주는 막심 에바 로트에게 감사할 따름이었다.

    최고의 무대를 위한 전희를 훌륭히 했으니 고맙기까지 했다.

    ‘훌륭한 축하 무대야.’

    가우왕은 자신의 우승을 축하해 주는 듯한 연주를 편안히 듣고 있었다.

    이윽고 막심 에바로트의 연주가 끝 나고 관객들의 환호성이 그의 대기 실까지 흔들었다.

    가우왕도 기꺼이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최지훈이 무대에 오른 순간 그의 표정이 달라졌다.

    배도빈이 없는 오늘.

    자신을 위협할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오직 최지훈뿐이라고 생각했다.

    2라운드에서 보여주었던 완성된 연주법과 섬세한 구성력 그리고 알 수 없는 아우라까지.

    가우왕의 신경이 한껏 예민해져 있을 때 최지훈이 건반에 손을 얹었다.

    * * *

    막심 에바로트가 연주를 마치고 나 비가 준비되는 동안 나윤희가 배도빈의 입에 귤을 넣어주었다.

    “먹으면서 들으니까.”

    "음."

    “웃고 떠드는 밴드 공연에는 먹을 걸 들여도 되지 않을까 싶어요.”

    “아……. 냄새나지 않을까?”

    “그건 거슬리겠네요.”

    어깨를 으쓱이고 다시 한번 귤을 받아먹은 배도빈이 냄새라는 단어에 꽂혔다.

    “냄새 좋네요. 카레를 연주하면 카 레 냄새가 나게 하고 봄을 연주하면 봄 냄새가 나게 하고.”

    “아, 응. 조향사 쓰는 공연도 많다 고 들었어.”

    “카레는 아닌 거 같아요?”

    “응……

    나윤희가 배도빈의 간호인을 자처하면서 부쩍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음악 작업을 하지 못하게 된 배도빈은 그 대신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할 수 있는 여러 사업을 구상하는 데 시간을 들였고 나윤희는 좋은 상 담사가 되어주었다.

    “아, 지훈이다.”

    나윤희의 말에 배도빈이 반응했다.

    “어때요?”

    “여유 있어 보여.”

    배도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훈이도 정말 대단한 거 같아.

    나 같았으면 엄청 떨렸을 텐데.”

    “큰 무대일수록 좋잖아요.”

    “응. 좋은데 그만큼 내가 잘할 수 있을까 하고 부담도 되고.”

    배도빈은 이미 찰스 브라움과 같이 최고 수준의 바이올리니스트가 그런 부담을 가진다는 걸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녀의 성격을 알기에 굳이 나윤희의 말을 끊지 않았다.

    “또 가우왕 씨나 에바로트 씨 같은 분들이랑 경쟁하는 자리잖아. 엄청 떨릴 거야.”

    “푸르트벵글러호에서는 잘했잖아요.”

    “아, 그때는.”

    “네.”

    “티켓 때문에……

    배도빈이 잠시 간격을 두고 말했다.

    “데이비드 개릭 공연 재밌었죠.”

    “응. 재밌었어.”

    그때를 떠올린 나윤희의 목소리가 상기되었고 배도빈은 불편한 기색을 감췄다.

    “다음에 또 가요.”

    “응. 빨리 나아서 꼭.”

    나윤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배도빈을 살폈다.

    “어디 불편해?”

    “ 아뇨.”

    “지훈이 잘할 거야. 엄청 자신 있어 보여.”

    “ 당연하죠.”

    배도빈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결승 오른 사람 중에 가우왕이랑 해볼 만한 사람은 최지훈뿐이니까.”

    콩쿠르는 정말 많이 참가했지만 그 때마다 느낌이 다르다.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를 알게 되고.

    다른 사람의 연주를 통해 내게 부족한 점을 채울 수 있기 때문에 매 번 즐겁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조금 다르다.

    도빈이나 가우왕 씨, 에바로트 씨의 대단한 연주를 들어도 그들의 장점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 안 든다.

    그들을 인정하는 만큼 나를 인정할 수 있게 된 걸까.

    묘하게 차분하다.

    우승이 목표였던 때와 다르게 내 연주에 만족하는 게 우선이 되어버렸다.

    관객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 디지털 콘서트홀을 통해 시청 하고 있는 이들을 만족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도빈이가 콩쿠르에 관심이 없던 이 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오늘은.

    익숙한 사람과 함께 놀 생각이다.

    프레데리크 쇼팽.

    아주 어렸을 적부터 나를 피아노로 이끌었던 사람이고 나뿐만 아니라 클래식을 듣는 많은 사람에게도 친근한 음악가.

    그의 발라드는 박자를 어떻게 늘이 고 줄이는지에 따라 정말 다르게 들려 신기하다.

    이렇게 해보고.

    저렇게 해보고.

    지메르만 선생님의 연주를 들어보 고 성신 형의 연주를 들어보면 또 다르다.

    어떻게 연주하는 게 좋을까.

    그 답을 아직 찾지 못해 최근에는 무대에서 연주한 적 없었는데 이제 확신이 들었다.

    객석이 고요해지고.

    건반을 눌렀다.

    쇼팽 발라드 1번 G단조.

    쇼팽은 묵직하게 울린 소리로 관객 들을 불러모은다. 상냥하고 자애로운 목소리로 그들을 위로하고자 한다.

    그의 의지에 따라.

    건반을 누른다.

    건반에 의해 망치가 현을 치고 그 진동이 소리로, 파동이 된다.

    마치 실처럼.

    순백의 실을 자아낸다.

    물레를 돌리듯 페달을 밟아 실을 뽑아낸다.

    하얗게. 하얗게.

    손가락을 깊게 누르면 굵은 실이, 튕기듯 누르면 얇은 실을 낼 수 있다.

    바람이 분다.

    칼날 같은 바람에 관객들이 추위에 떨고 피아노의 시인은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노래한다.

    그의 노래가 끝까지 잘 전달될 수 있도록, 관객들의 마음에 털옷을 입혀주자.

    하강하는 아르페지오.

    전개부를 통해 열심히 뽑아낸 실들을 엮기 시작한다.

    재단을 하고 심지를 넣는다.

    스케일로 몸판과 소매를 잡아낸 뒤 에는 촘촘히 엮어낸다.

    노트와 노트를 엮는 재봉질은 박자 와 같다.

    이곳과 저곳은 붙이고 때로는 늘이 며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로 이어나 가야 나비도 관객도 편하게 입을 수 있다.

    그렇게 완성된 형태를 그리며 작은 부분을 잇다 보면, 건반 하나하나가 모여 하나의 곡을 이루는 것처럼 옷 이 만들어진다.

    밋밋한 부분은 두꺼운 코바늘을 이용해 패브릭얀을 뜨는 것처럼 트릴을 더한다.

    ‘좋아.’

    스웨터를 완성하자 그 포근한 기분에 들뜨고 말았다.

    “브라-보!”

    “브라-보!”

    다행히 관객들도 흰 스웨터가 마음에 든 모양이다.

    ‘훌륭해요.’

    크리스틴 지메르만은 흐뭇한 표정을 지은 채 제자의 연주를 감상했다.

    가우왕의 경이로움도 배도빈의 마 성도 훌륭했지만 최지훈은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그것은 화려하진 않지만 가장 편안 했다.

    마치 일류 디자이너가 맞춰 준 옷 처럼 작곡가의 의도를 가장 이상적 인 형태로 전달하는 듯했고 크리스 틴 지메르만이 추구하는 이상의 연주에 근접해 있었다.

    건반과 페달을 통해 피아노의 음색을 최대한 활용한 그의 연주는 그보 다 더 단아할 수 없었다.

    ‘정교하고 풍부하네요.’

    만약 평가를 해야 한다면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최지훈에게 손을 들어주고 싶었다.

    음과 음을 촘촘하게 연결해 완성한 그의 발라드는 쇼팽의 의지가 고스란히 담겨 완벽히 구성되어 있었다.

    소리가 가진 고유의 아름다움을 최 선의 형태로 다루는 연주.

    “브라-보!”

    “브라-보!”

    그녀는 기꺼이 일어나 더 이상 제 자가 아닌, 위대한 피아니스트를 향해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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