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511화
110. 그래도 나아가리라(2)
가우왕의 도발로 시작된 배도빈 콩쿠르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해프닝으로 끝난 베를린 필하모닉 의 가우왕 해고와 배도빈의 첫 패 배, 최지훈의 약진, 배도빈의 실명, 가우왕의 폭력 사건까지 다사다난했던 배도빈 콩쿠르는 전 세계 3억
명이 넘는 시청자를 기록하며, 오케스트라 대전 이후 가장 많은 사람이 시청하는 음악 이벤트로 자리잡고 있었다.
결승전만을 남긴 시점에서 배도빈 콩쿠르가 마지막임을 아쉬워하는 것 도 무리는 아니었다.
시청자들은 결승전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리며, 다음에도 배도빈 콩쿠르 가 이어지길 바란다는 채팅을 남기 고 있었다.
ㄴ 오늘이 마지막이라니 ㅠㅠ
ㄴ 솔직히 계속해야 함. 여러 피아니스트 연주 한 번에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진짜 없어.
ㄴ 다른 콩쿠르도 있잖아.
ㄴ 그거랑은 또 다르지. 배도빈 콩쿠르는 진짜 프로 중의 프로만 모여 서 하는 거잖아.
ㄴ 배도빈이 사퇴한 것 때문이라도 한 번 더 해야 함. 배도빈이랑 가우왕 1 대 1로 아직 결판 안 났잖아.
ㄴ 라운드 때 소름이었지.
ㄴ 맞아. 솔직히 배도빈 빠진 이상 가우왕을 이겨라 아님? 막심도 큰 차이로 졌고 최가 잘한다곤 하지만 가우왕을 이길지는 좀…….
ㄴ 가우왕이 진짜 대단하긴 해. 저 구성원 사이에서도 우승하는 게 당 연해 보이긴 하니까.
ㄴ 지메르만이 인정했잖아. 가우왕 이랑 배도빈은 자신을 넘어섰다고.
ㄴ 빨리 좀 시작해라. 현기증 난다.
ㄴ 지금 루트비히홀에 있는 사람들 너무 부럽다 ㅠㅠ
시청자들이 아쉬움과 기대를 더하 고 있을 때, 운 좋게 결승 티켓을 구한 한 학생들이 들뜬 마음으로 루트비히홀로 입장했다.
“사람 엄청 많다.”
“으아아아. 진짜야. 진짜라고. 내가 배도빈 콩쿠르 결승전을 직접 듣는 다구.”
“우리 어디야?”
“H10부터 세 칸. 저기로 가는 거 같은데?”
“너흰 안 좋아? 나만 이렇게 좋은 거야?”
“좋아. 그런데 너처럼 호들갑 떨고 싶지 않을 뿐이야.”
“씨 잉.”
“당연히 좋지. 배도빈이 안 나오는 게 좀 아쉽긴 해도 이게 어디야. 아, 저쪽인가봐.”
“팸플릿 받아가자.”
“미리 챙겼지롱!”
“감사. 어? 진짜야?”
“뭐가?”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 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라고 되어 있는데?”
“아아. 다들 그걸로 난리더라. 진짜 연주할 수 있는지, 아니면 그냥 무리하는 건지.”
“자신 있으니까 결정했겠지.”
“가우왕 말곤 아무도 공식 무대에서 연주한 적 없잖아. 막심도 최지훈도.”
“그래서 무리한 거라고 하더라. 어차피 어지간해서는 어필 안 될 테니까.”
학생들의 반응대로 여론의 관심이 가우왕, 막심 에바로트, 최지훈에게 집중되어 있을 때 엘리자베타 툭타 미셰바의 도전은 도박이었다.
그녀의 소식을 접한 최지훈조차 깜짝 놀라고 말았다.
“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
엘리자베타가 장족의 발전을 이룬 것을 확인한 그로서도 현재까지 가우왕만이 연주 가능했던 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를 선보이겠다는 소식에 의문부터 들었다.
곁에 있던 차채은이 물었다.
“근데.”
최지훈이 고개를 돌렸다.
“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가 어려운 건 알겠는데 정말 오빠나 도빈 오빠도 못 할 정도로 어려운 거야?”
차채은의 질문에 최지훈이 대답하려다가 대기실에 준비된 연습용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리고 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를 연주하기 시작했는데 차채은이 의문을 가졌던 대로 너무나 완벽했다.
그러나 이내 실수가 나왔고 최지훈 은 그와 동시에 건반에서 손을 뗐다.
“뭐야. 할 수 있잖아.”
차채은이 의아해하며 말했다.
미스 터치가 없는 것이 최고지만 많은 피아니스트가 모든 연주에서 완벽한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녹음이 아니라 실연에서는 미스 터 치조차 공연의 일부로 취급받고 있었기에 큰 문제가 되진 않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최지훈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렇게 쉬운 문제는 아니야.”
최지훈이 자신이 틀렸던 부분을 다 시금 연주해 들려주었다.
“가우왕 씨가 연주해내고 나도 꽤 오래 연습했지만 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가 어려운 이유는 난이도 때 문만은 아니야.”
“그럼?”
“한 번이라도 틀리면 손이 꼬여서 진행이 안 돼.”
“ 아.”
차채은은 그제야 많은 피아니스트 가 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를 감 히 무대 위에서 연주하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연주할 분량을 감당하게 되면서 그러지 않아도 복잡한 노트를 소화해야 하는 연주자에게 단 한 번의 실수도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실수를 해도 그 뒤에 계속 이어나 갈 수 있는 거랑 연주를 중단해야 하는 건 차이가 커. 항상 완벽하게 연주해야 하니까.”
지금까지의 모든 피아노곡 중에서 가장 높은 난이도의 소나타를 실수 없이 완벽하게 연주해야 한다는 압 박감과.
항상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해야 하는 부담은 클 수밖에 없었다.
“도빈이나 나나 열 번 연주하면 여 덟, 아홉 번은 할 수 있어도 한두 번의 실수는 나올 거야.”
“그래서 안 하는 거야?”
“응. 그래서 가우왕 씨가 대단한 거고.”
차채은은 새삼 가우왕이란 피아니스트가 얼마나 대단한지 느낄 수 있었다.
그런 부담 속에서도 망설이지 않을 수 있는 그의 담대함과 자신감이 더 욱 대단해 보였다.
“그리고 사실 가우왕 씨가 아니었다면 이런 곡을 혼자 연주하려 했던 사람은 없었을 거야.”
차채은이 설명을 재촉했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무대에서 연주할 수 있어. 하지만 가우왕 씨가 없었다면 쭉 불가능했을 거란 뜻이야.”
“칠 수 있잖아.”
“가우왕 씨가 길을 알려줬으니까.”
불가능했던 일을 가능하게 바꾼 것 이었다.
“가우왕이 아니었으면 오빠도 못 했다는 말이야?”
“응. 그런 생각 가우왕 씨가 아니 면 절대 못 할 거야.”
자신이 연주할 수 없는 곡이 있을 리 없다는 확신이 없고서야 가능할 리 없었다.
‘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를 연주할 수 있는 것보다 그것을 가능하 게 한 것이 가우왕의 진가였다.
“대단한 사람이네.”
최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 의 선곡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는데 하나는 정말 실수 없이 연주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를 연주해낸다 해도 큰 의미 가 없기 때문이었다.
‘굳이 왜.’
배도빈과 최지훈이 굳이 현존하는 가장 어려운 피아노곡 ‘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에 매달리지 않았던 이유는 그것을 연주하더라도 가우왕 이 제시한 가이드라인에서 벗어날 수 없는 탓이었다.
한편.
가우왕은 팸플릿을 보곤 한쪽 입꼬 리를 들어 올렸다.
“ 얼씨구.”
엘리자베타의 선곡을 확인한 그는 가소로운 듯이 입을 씰룩였다.
“오. 드디어 기록이 깨지나?”
“크흘흘. 더 못 뻐겨서 어쩌나.”
응원차 대기실을 찾았던 피셔 디스 카우와 다니엘 홀랜드가 너스레를 떨었다.
가우왕이 코웃음을 쳤다.
“할 수 있으면 해보라지.”
“못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생각보 다 잘하던데.”
다니엘 홀랜드의 말에 가우왕이 고 개를 저었다.
“해봤자 카피일 뿐이야.”
다니엘과 피셔는 가우왕의 말을 이 해할 수 없었다.
그들이 눈썹을 들어올리며 설명을 촉구하자 가우왕이 거들먹거리며 말 했다.
“빌어먹을 꼬맹이랑 순딩이가 왜 가만있는데.”
“……못 해서?”
실제로 수많은 피아니스트가 실패를 반복했고 지금까지 아무도 연주 해내지 못한 곡이었다.
그러나 가우왕의 생각은 달랐다.
“아니. 이미 길을 다 닦아 놓고 어떻게 연주해야 하는지 보여줬는데 그 녀석들이 못 할 리가. 마음만 먹었으면 이미 했지.”
“그럼?”
“말했잖아. 따라 하는 것뿐이라고.”
가우왕은 배도빈과 최지훈이 2라운 드에서 보인 그들만의 새로운 무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배도빈의 공감각적 연주와 최지훈 의 촘촘한 타건은 가우왕에게 없는 장점이었다.
“그래. 날 따라 해서 기특하게도 연주할 수 있다 해도 그런 수준으론 날 넘어설 수 없지.”
가우왕의 말에 다니엘 홀랜드가 의 문을 표했다.
“그래도 대단한 거 아니야? 널 따라 하는 거라 쉽게 말해도 그조차 해낸 사람이 없잖아.”
가우왕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대단하지. 이 몸을 쫓는 것만으로도 대단하지. 흐하하하하!”
가우왕이 호탕하게 웃기 시작하자 두 사람은 고개를 저으며 대기실을 벗어났다.
어깨가 무겁다.
가슴이 조여오고 손이 떨린다.
“할 수 있어.”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할 수 있다는 말을 반복하지만 좀처럼 진정되 지 않는다.
지난 1년간 더 이상 더할 수 없다고 자부할 만큼 열심히 했기에.
우승해야 한다고 우승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무대에 오를 때가 되니 나약해지고 만다.
“ 리자.”
어렸을 적부터 매니저 역할을 해준 리디아가 손을 잡아주었다. 고개를 드니 걱정스러운 표정을 볼 수 있었다.
“네가 오늘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잘 알아. 굳이 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를 연주해야 하는 이유는 모르지만, 그런 부담을 감내해서
라도 증명하고 싶은 게 있다는 건 알고 있어.”
“리디아……
“할 수 있어. 네가 우승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너뿐만이 아니야.”
리디아의 말에 조금 진정할 수 있었다.
실은 나도 나를 잘 모르겠다.
한 번이라도 실수하면 연주가 무산 되어 버리는 부담을 짊어지면서까지 겨우 확보한 ‘내 연주’가 아닌 ‘가우왕’을 연주하는 게 무슨 의미를 가 지고 있을까.
아니.
이제 더 이상 속이지 말자.
‘저 때문에 떠날 필요 없어요. 그 런 일 바라지 않아요.’
‘누가 뭐라 해도 지금 그 자리에 가우왕 씨보다 어울리는 사람은 없어요. 본인을 속이지 마세요.’
‘가우왕 씨가 양보하지 않아도 그 자리, 돌려받을 수 있으니까.’
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가 세상 에 처음 공개된 날, 그는 가우왕에 게 도전했다.
그 올곧은 눈빛과 맑은 목소리로 당당히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를 대한 것이다.
내가.
내가 들어야 할 말이었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였다.
그러기 위해 노력해 왔는데 그것을 TV 화면을 통해 지켜볼 수밖에 없는 현실이 나를 비참하게 했다.
그를 돌아보게 하기 위해 애썼건만 그는 항상 앞을 바라보았다.
배도빈, 가우왕.
그래. 모든 음악가가 그랬으니 어 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그만은 나를 바라봐 주길 바랐다.
이 마음이 설령 바보 같더라도, 보 상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내겐 너무 나 중요했다.
-신사숙녀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스피커를 통해 안내 방송이 흘러나 왔다.
“ 리자.”
“응.”
마른침을 삼키고 짓누르는 부담감을 밀어내며 일어났다.
해낼 수 있을까.
아니. 그래야만 해.
난 그럴 자격이 있어.
지금껏 쌓아온 노력들을 떠올리며, 그것을 용기 삼아 무대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