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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510화 (510/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510화

    110. 그래도 나아가리라(1)

    가우왕은 기자들을 뿌리치고 곧장 배도빈을 찾았다.

    병실 앞에서 잔뜩 끓어오른 흥분을 한 번 가라앉히고 문을 두드리자 나윤희가 대답했다.

    “ 네.”

    대체 왜 모든 일을 기자들에게 먼 저 들어야 하냐고 따지려 했으나 병 실에 들어선 순간 그럴 수 없었다.

    항상 열정적으로 활동했던 배도빈 이 침대에 기댄 채 있으니 그의 마 음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가우왕 씨.”

    나윤희가 깎던 과일을 내려놓고 반 갑게 맞이했다.

    가우왕도 그녀와 눈인사를 한 뒤 퉁명스레 물었다.

    “좀 어때.”

    “답답해요.”

    “답답한 게 낫지. 시력은 언제 돌아온대?”

    “아직인가 봐요.”

    명확히 답하지 못함에 가우왕이 혀를 차고 의자에 앉았다. 나윤희가 권한 사과를 받아먹으며 물었다.

    “넌 계속 여기 있었던 거야?”

    “아, 아뇨. 퇴근하고만.”

    “홈.”

    가우왕이 한 번 더 사과를 받아먹을 때 배도빈도 그의 안부를 물었다.

    “어떻게 됐어요.”

    “벌금이나 나오겠지.”

    배도빈이 눈썹을 꿈틀댔다.

    “그러니까 왜 사람을 때려요?”

    “넌 맨날 엉덩이 걷어차고 다니잖아.”

    “가우왕이랑 찰스 엉덩이밖에 안 찼어요.”

    그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인 사람은 그보다 훨씬 많았지만 진실을 알지 못하는 가우왕으로서는 반박할 수 없었다.

    “어쨌든.”

    배도빈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중에 자리 만들어서 상황 설명해요. 놀란 사람 많으니까.”

    가우왕이 딴청을 부렸다.

    그가 대답하지 않자 배도빈이 한 번 더 숨을 내쉬고 어르듯 말했다.

    “겸직하면 되잖아요. 겸직하면. 당신 면 세워주려고 한 일인 거 뻔히 알면서 왜 삐져 있어요?”

    “아, 그래?”

    가우왕이 반색하자 나윤희가 작게 웃었다.

    배도빈도 어이가 없어 허탈하게 웃었고 세 사람은 그때의 일을 자세하게 나누었다.

    가우왕의 말을 들으며 배도빈은 조 금도 바뀌지 않은 증오와 무지에 탄식 했다.

    그의 단골집인 슈퍼 슈바인에서 진 달래와 나윤희를 위협했던 독일인.

    베를린 대학에서 자신을 향해 눈을 찢는 행동을 보인 대학생.

    오케스트라 대전에서 동양인이 드 보르자크를 이해할 수 없을 거라 했던 밀로스 발렌슈타인.

    그리고 가우왕까지.

    찰스 브라움이 차별 받는 유학생들을 위해 대학을 설립하는 것이 결코 과한 행동이 아님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세계 최고의 음악가들조차 그런 일을 당하는데 하물며 평범한 사람들 은 대체 어떤 일을 겪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변하지 않았어.’

    각자의 삶에서 최선을 다해 필사적으로 나아가는 이들을 위해 노래했던 악성은 안타까울 뿐이었다.

    세대, 계층, 성별, 국가, 인종.

    서로에 대한 혐오로 점철되어 있었다.

    레밍턴과 그 무리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악플을 다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

    배도빈은 변하지 않는 차별과 증오 의 굴레가 끊어지길 바랐다.

    그러나 그것이 결국 이상일 뿐일지 도 모른다는 생각과 희망과 사랑을 외치는 자신의 음악이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이를 위로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계속되었다.

    배도빈이 고뇌하고 있을 때 나윤희 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다들…… 화가 나 있는 거 같아요. 조금만 여유로울 수 있어도 그 러지 않을 텐데.”

    삶이 각박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면 그들을 조금이라도 위로하 고 포용함으로써.

    마음 한 구석에 작은 여유를 남길 수 있지 않을까.

    배도빈은 그랜드 심포니에 대한 의 지를 다지며 입을 열었다.

    “지친 사람을 위해 우리가 있는 거잖아요. 더 열심히 해야겠죠.”

    배도빈의 말에 가우왕과 나윤희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물쩡 퇴원하려고 밑밥 깔지 마.”

    “가우왕 씨 말씀이 맞아. 일단 나 아야 해.”

    배도빈이 입을 내밀곤 등을 기댔다.

    여론이 레밍턴 가문의 비리와 리졸 레밍턴의 차별 발언에 대한 반발로 가우왕을 지지하고 나서며.

    배도빈의 실명과 가우왕의 폭력 사 건으로 어수선해진 분위기도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가우왕 본인 역시 배도빈 콩쿠르에 대한 의지가 확고하여 그의 법적 문 제와는 별개로 계속 참가하기로 결 정.

    기자회견을 가져 심려를 끼친 데에 사과했으며 자신의 행동에 대한 모든 법적 책임을 다하겠다는 뜻을 비 추었다.

    이게 맞지.

    ‘"이런 일 있으면 꼭 음악으로 보답하겠다 어쩌니 하는데 솔직히 난 가우왕처럼 자기 잘못한 건 법적으로 책임지겠다 하는 게 마음에 들더라.

    ㄴ ㅇㅇ. 실망한 팬들에게 하는 말이라는 건 알겠는데 잘못은 법으로 책 임 져야지.

    ㄴ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거지같은 놈하고 싸웠을 뿐임. 가우왕이 누구 랑 싸운 거랑 그 사람 연주 좋아하는 건 다른 일이지. 폭행에 대한 죗 값만 치르면.

    ㄴ 어차피 벌금 조금 나올 뿐임. 초범이고 게다가 지금 그놈 발언 때문 에 여론도 화나 있는데.

    ㄴ 여론 때문에 판결이 갈리겠냐.

    부상도 생각보다 경미하고 우발적이 고 하니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될 듯.

    ㄴ 가우왕 계속 참전하네. 배도빈 콩쿠르 망할 줄 알았는데.

    ㄴ 그러니까. 솔직히 배도빈이랑 가우왕 없으면 뭔 재미로 봐.

    ㄴ 도빈이 아직 퇴원 기사 없던데 괜찮으려나.

    ㄴ 막심이랑 최랑 툭타미셰바도 있잖아. 솔직히 난 최가 너무 대단하 던데. 진짜 복귀 이후 가우왕한테도 안 밀릴 포스임.

    ㄴ 배도빈 VS 가우왕으로 예상된 구도에서 가우왕 VS 최지훈으로 넘 어오긴 했지. 배도빈이 사퇴한 탓이 기도 하지만.

    ㄴ 아 빨리 결승 시작했으면 좋겠다.

    팬들의 바람 이상으로 결승 진출자 들은 결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우왕에게 문제가 없음이 알려지 자 라이벌 막심 에바로트는 전의를 다시 불태웠고.

    그를 목표로 했던 최지훈은 말할 것도 없었다. 결승을 위해 자신을 그 어떤 때보다 날카롭게 벼려내고 있었다.

    “그래서 결승에는 뭐 연주할 건 데?”

    차채은의 질문에 최지훈이 빙그레 웃었다.

    “쇼팽.”

    최지훈이 어려서부터 가장 친하게 대했던 음악가였다.

    쇼팽에 있어서는 최성신과 함께 젊은 피아니스트 중 가장 독보적인 위 치에 있는 만큼, 반드시 우승하겠다는 마음이 반영된 선택이었다.

    “으움. 가우왕 씨는 역시 스트라빈 스키겠지?”

    “모르겠어. 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보다 더 대단한 연주를 준비했을 텐데, 그 이상은 상상이 안 돼.”

    “혹시 손을 네 개처럼 쓴다든지?”

    “그런 게 가능해?”

    “모르니까 묻지.”

    “음…… 글쎄. 도빈이나 가우왕 씨 나 나나 기술적으로는 더 이상 어렵지 않을까 싶어.”

    “그럼?”

    “결국에 남는 건 음악성이니까. 가우왕 씨도 얼마나 감동을 주느냐에 집중할 거 같아.”

    차채은이 고개를 끄덕이며 최지훈 의 의견을 메모했다.

    “툭타미셰바는 어떨 거 같아? 제일 부족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잖아.”

    “아냐. 그 사람도 실력만으로는 크 게 차이 없어. 이번에 정말 놀랐거든 ”

    “그 정도야?”

    “응. 인식이 그런 건 아무래도 지 식에 차이 때문이니까. 조금 더 쉽게 표현하는 방법을 찾으면 정말 대 단한 피아니스트가 될 거야.”

    “피아니스트 최지훈,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를 라이벌로……

    “라이벌이라는 말한 적 없는데.”

    “이쪽이 재밌잖아.”

    “이렇게 스토리가 들어가야 재밌다 고. 그리고 솔직히 맞잖아. 오빠랑 툭타미셰바가 같이 참가한 콩쿠가 몇 개였지? 10개가 넘잖아. 라이벌이네.”

    최지훈이 지그시 바라보자 차채은 이 어쩔 수 없이 방금 남긴 메모에 줄을 그었다.

    “알았어. 최지훈, 엘리자베타 툭타 미셰바의 가능성은 열려 있다고 전해. 이 정도면 괜찮지?”

    “라이벌이라고 쓰면 안 된다고 한 적도 없는데.”

    “야!”

    날이 갈수록 놀리는 방법이 다양해 지는 탓에 또다시 속고 만 차채은이 소리를 빽 하고 질렀다.

    한편.

    베를린으로 음악 여행을 왔던 찰스 왕세자 및 의원, 유력 인사들은 호 의적일 수 없는 분위기를 피해 하나 둘씩 귀국하고 나섰다.

    브라움 부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배웅 나온 찰스 브라움이 아버지 크로프트 브라움에게 말했다.

    “잠시만요. 예나도 나온다 했어요.”

    “뭐 하러.”

    쌀쌀맞은 태도에 찰스가 한숨을 내 쉬었다.

    “그만 좀 하세요. 대체 언제까지 이러실 거예요? 예나 다 큰 성인이 고 이미 결혼까지 했어요. 평생 안 보고 사실 거예요?”

    “끄응.”

    크로프트 브라움은 앓는 소리를 낼 뿐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찰스 브라움은 그런 아버지가 너무 나 답답했으나 오랜 시간 뿌리 깊게 박힌 사상을 바꿀 수 없었기에 속상 한 마음을 달랠 뿐이었다.

    그때 예나왕이 그들을 찾았다.

    “아버지, 어머니.”

    크로프트 브라움은 딸을 보자마자 고개를 돌렸고 에리얼 브라움은 침을 삼키며 딸을 대했다.

    “……어디서 지내고 있니.”

    “호텔에서 있어요. 곧 돌아가야 하 기도 하고 아직 집을 정하지 못해서요.”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넌 자랑스러운 브라움 가문의 일 원이야. 네 힘으로 앉은 자리니 결 혼했다 해서 결코 포기하지 않았으면 하구나.”

    “네. 그럴 거예요.”

    모녀 사이에 서로에 대한 서운함과 사랑과 어색함, 애틋함이 얽히며 대 화가 돌고 있었다.

    그때 크로프트 브라움이 헛기침을 했다.

    “그래서 런던으로는 언제 올 셈이 냐.”

    “다음 주요.”

    “벌써 2주나 있어 놓고 그렇게 오 래 자리를 비우느냐.”

    “괜찮아요. 연구 들어가기 전이고.”

    가족은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의도 적으로 피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찰스 브라움이 나서려 할 때 크로프트 브라움이 지나가듯 이 중얼거렸다.

    “올 때 그놈이나 데려와라.”

    예나가 놀라 눈을 깜빡였다.

    “아버지.”

    찰스의 부름에 크로프트가 성을 냈다.

    “식사하자고 부르지 않았느냐. 식사 예절만 봐도 어떻게 교육 받았는지 아니 내 직접 확인하려는 것이 야.”

    아버지의 말에 예나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아직 모든 걸 받아들일 순 없으나 굳게 닫혔던 마음의 문이 조금이나마 열린 이상 시간이 필요할 뿐.

    “꼭 데려갈게요.”

    “크흠. 갑시다.”

    크로프트가 아내와 함께 짐을 챙겨 걷기 시작했고 예나는 부모의 뒷모습을 보며 눈물을 훔쳤다.

    찰스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 에 마음고생을 심하게 한 동생을 위 로했다.

    “그렇게 반대하시더니 무슨 바람이 불었어요?”

    게이트를 지나며 에리얼 브라움이 남편에게 물었다.

    크로프트 브라움은 온갖 모욕을 당하면서도 웃음으로 참아내며, 그러 면서 브라움 가문이 모욕당했을 때 과감히 나선 가우왕을 떠올리며 퉁 명스레 말했다.

    “무슨 소리. 인정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소.”

    그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좀 더 확인해 볼 마음이 생겼을 뿐이었다.

    ‘내 가족 건들면 그땐 이 정도로 안 끝나.’

    분명 그 방법은 과격하고 야만스러 웠으나 가문이 모욕을 당했을 때 망 설이지 않고 나서는 용기가 제법이 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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