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507화
109. 참을 수 없었다(2)
[새 시대의 피아니스트】
지난 4일 개막한 배도빈 콩쿠르가 어느덧 2라운드를 마치고 결승만을 남기고 있다.
단발성 이벤트라고는 하지만 배도빈 콩쿠르에 대한 관심은 최고 동시 시청자 1,700만 명이란 기록으로 짐작할 수 있다.
클래식 FM과 그라모폰을 포함한 모든 언론도 연일 배도빈 콩쿠르에 관한 기사를 내고 있으며 인터넷 커 유니티 사이트와 포럼, SNS에서는 클래식 음악 팬들의 열띤 토론이 이 어지고 있다.
배도빈 콩쿠르가 이렇게까지 관심 받을 수 있는 이유는 여럿이지만 다 섯 참가자의 역할이 지대했음은 반 박하기 어렵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악단주이자 예술감독, 작곡가, 피아니스트, 바이올리니스트 배도빈.
가장 많은 공연 수익을 올린 피아니스트 가우왕과 그와 견줄 수 있을 만큼 강한 티켓 파워를 보유한 막심 에바로트.
무관의 여제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
그리고 쇼팽 콩쿠르와 차이코프스 키 콩쿠르에서 모두 우승하고 복귀 이후 최고조의 모습을 보이는 최지훈이 바로 그들이다.
가장 먼저 두각을 드러낸 피아니스트는 모두의 예상과 같이 가우왕이었다.
최근 결혼 발표를 하며 화제를 모 은 가우왕은 2라운드에서 과감히 배도빈 피아노 소나타 가우왕(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를 한층 더 발전 시킨 연주로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하였다.
라이든샤프트에 접어들며 작곡가 배도빈의 곡을 통해 황위에 오른 그는 단단하고 정교하면서도 치명적인 자신만의 세계를 더욱 확장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가 얼마나 대단한 피아니스트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기 힘든데, 작곡가 배도빈은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비트겐슈타인이 말년에 오른손을 되찾은 듯하다.’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전쟁으로 오른손을 잃어 평생을 왼손만으로 연주했던 전설적인 피아니스트다.
그가 연주했던 곡은 양손 모두 가 진 사람조차 소화하기 어려울 정도 로 난이도가 높을 정도로 테크니션 이었다.
한 손만으로 온전한 연주를 하면서 동시에 다른 한 손으로 반주를 더한 가우왕이니 그런 그가 말년에 오른 손을 되찾은 것 같다는 배도빈의 표 현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나윤희가 차채은의 기사를 읽어주 던 중 배도빈이 혼잣말을 했다.
“결국엔 그걸로 썼네.”
“응?”
“기사용으로 필요하다 해서 말해준 거예요. 비트겐슈타인.”
“아. 원래는 뭐라 했는데?”
“미친놈이라고 했죠.”
“크읍.”
나윤희가 입을 다물어 터져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아냈다.
“그것보다 잘 어울리는 말은 없어요. 지금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으니까.”
“가우왕 씨는…… 좋아하실 것 같지만 인터뷰에 올릴 말은 아닌 거 같아.”
배도빈이 입을 샐죽이며 기사를 계 속 읽어줄 것을 청했다.
한편 막심 에바로트는 그의 대표 연주곡 크로아티안 랩소디를 연주하 며 여전한 기량을 선보였다.
빠르고 화려한 타건의 테크니션이 기도 하나 그의 강점은 애수로운 분 위기 속에서 울리는 빗소리 같은 울 림일 것이다.
그가 펼치는 관능적인 연주는 피아니스트의 표현력이 어디까지 이를 수 있는지 알 수 있게 하는 만큼 결 승에서 어떤 모습으로 반전을 이뤄 낼지 기대를 모으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 또 다른 강력한 경 쟁자가 생긴 것도 사실이다.
피아니스트 최지훈은 배도빈 콩쿠르 2라운드를 통해 가우왕, 막심 에 바로트와는 또 다른 세계를 구축했음을 과시했다.
10대 때 이미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와 차이코프스키 국제 피아노 콩쿠르를 제패한 이 천재 피아니스트는 건반과 건반 사이의 틈을 잇는 일에 도전했고 그로 인해 큰 부상을 입었으며 끝끝내 자신만의 연주법을 고안하고 말았다.
완전무결의 거장 크리스틴 지메르 만을 사사하며 견고하게 완성한 그의 연주는 그를 위해 제작된 스타인 웨이 피아노와 함께 배도빈 교향곡 1번 ‘가장 큰 희망’을 완벽히 재구성 하였다.
최지훈의 가장 큰 희망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빈 고전파의 향수를 물씬 풍기는 론도 형식을 섣불리 해석 하지 않고 고전 양식을 유지하면서 적절한 장식음을 더해 세련미를 추
가한 데 있다.
몇몇 연주자가 형식을 파괴하는 데 집중하여 구조미를 경시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과는 대조되는 방식으로, 곡이 지닌 고유의 미학을 어떻게 재 해석해야 하는지 답안을 내놓았다고 판단한다.
절망적인 분위기 속에서 불굴의 의 지를 표현한 ‘가장 큰 희망’을 훌륭 히 소화한 그는 다소 여린 기존의 이미지조차 벗어냈으면 결승에서 어 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해 보게 된다.
배도빈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좀 길지 않아요?”
“응. 다른 사람보다 분량이 많은 거 같아.”
많은 사람을 다루는 칼럼이었기에 적당한 분량을 유지해야 할 터인데 유독 최지훈에 대한 이야기가 길었다.
“지훈이 요즘 정말 잘하니까 신경 써준 거겠지.”
“하긴. 그러네요.”
나윤희의 말에 배도빈이 어깨를 으쓱였다.
마지막으로 투혼을 보여준 배도빈 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이미 17년간 활동하며 191개 상을 수상하였고 21세기 가장 많은 음반을 판매한 음악가 배도빈은 피아니스트로서도 명성을 떨쳤는데, 의외로 그가 피아니스트로 활동했던 시기는 상당히 짧다.
3~4년 정도의 짧은(그조차 유년 시절에 한정하여) 활동만으로도 그 가 사카모토 료이치, 미카엘 블레하 츠, 크리스틴 지메르만 등과 같이 인식되는 이유는 그 강렬함 때문.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비창), 14번(월광), 17번(템페스트)과 사카모토 료이치와 공동 작업한 ‘Honor* 등 배도빈의 피아노는 발표 때마다 큰 호응을 얻었고.
이번 대회에서도 자신의 장기를 유감없이, 더욱 발전한 형태로 선보였다.
베를린 필하모닉 복귀와 함께 발표한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 ‘베를린 환 상곡’을 독주곡으로 편곡해 연주한 그는 피아노가 왜 작은 오케스트라 라고 불리는지 명확히 하였다.
특유의 빠른 손은 오케스트라가 연주해야 할 부분을 완벽히 소화해냈 으며 동시에 주 멜로디는 더욱 견고 하게 울렸다.
풍부한 종적 스케일과 박자 감각은 여전하여 마치 영화를 보는 듯 강렬 하고 연속적인 심상을 전달하고.
전보다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과 같은 타건은 영화와 같은 서사를 16K 화질로 전달해 주었다.
“비유가 이상한데.”
“흐. 난 좋은데. 듣기만 해도 막 보는 거 같거든. 채은이 글 잘 쓴다.”
배도빈은 차채은의 표현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나윤희가 칭찬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장점은 끊임 없이 변화하고 발전함에 있다.
피아니스트로서 활동을 거의 하지 않은 그가 한 번의 콩쿠르를 위해 자신을 갈고닦아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가 희망 또는 신으로 불림이 무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배도빈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 모습을 본 나윤희가 미소를 지었다.
음악을 할 때는 열 살 가까이 차이 나는 동생인데도 알 수 없는 무 게감을 느끼고 또 존경했지만 가끔 보이는 이런 모습은 귀엽게 느껴졌다.
2라운드 B조 경합 당일 우리를 충 격으로 몰아넣었던 배도빈의 실명으로 인해 그의 연주가 덜 주목받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날의 연주에 대해 크리스틴 지 메르만은 ‘저를 넘어선 피아니스트가 둘 있습니다. 한 사람은 가우왕이고 다른 한 사람은 배도빈이에요’라고 말하며 극찬했으며.
가우왕은 ‘그런 식의 연주는 상상해 본 적 없다. 그는 그 어떤 이보다 피아노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고 나는 항상 그에게 영감을 받는다’라고 밝혔다.
“가우왕이 그런 말을 했다고요?”
“그렇게 적혀 있어.”
“못 믿겠는데.”
“가우왕 씨 겉으로는 쌀쌀맞아도 속으로는 다정하시니까.”
실제로는 ‘그런데 몸 관리 안 하고 무리해대서 사퇴한 게 말이나 되냐 고. 빌어먹을 꼬맹이. 걱정 시키는 덴 아주 도가 텄어’라고 덧붙였으나 두 사람으로서는 차채은이 잘라낸 뒷말을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계속 읽을게.”
“부탁해요.”
비록 배도빈이 건강 문제로 사퇴하여 결승에서 그의 연주를 들을 수 없는 것은 분명 안타까우나, 결승에 오른 네 피아니스트가 또 어떤 연주를 들려줄지 기대하며.
끝으로 마왕이니 희망이니 신이니 해도 음악 외적으로 자기 관리는 조 금도 신경 쓰지 않는 일은 자신을 사랑하는 가족과 동료 그리고 팬들을 무시하는 처사임을 전하며 배도빈이 하루빨리 건강을 되찾길 기원 한다.
“이게.”
한참을 가만있던 배도빈이 입을 열었다.
“지금 이게 기사로 등재되었던 말 이죠? 리드지 특집 기사로.”
"응."
“독일에서 제일 잘 팔리는 잡지의.”
“……요, 요즘엔 유럽 전부. 채, 채 은이 덕분에 한국에서도 구, 구독하는 사람이 있나 봐.”
배도빈이 입술을 씰룩였다.
결국 세상 오만 사람이 다 본다는 뜻이었다.
“후우.”
배도빈은 숨을 길게 내쉬며 안정을 찾으려 노력했다.
혹시나 그가 흥분해서 몸 상태가 나빠지진 않을까 걱정했던 나윤희는 그의 어른스러운 대처에 안도했다.
그녀는 배도빈의 손에 귤을 까 쥐 어줬고 배도빈은 심호흡을 하며 그 것을 받아먹다가.
“차채은한테 전화해.”
-알겠습니다. 차채은 님께 전화하겠습니다.
결국 차채은에게 전화를 걸어버렸다.
한편 배도빈의 열렬한 팬인 찰스 왕세자는 그를 걱정하는 한편 먼젓 번 만남에서 그가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렸다.
영국의 민족주의가 변질되고 경화 됨을 경계하고 있는 그로서는 왕실 과 관련된 인물이 배타적 언행을 자 행함이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왕세자 저하, 시간이 늦었습니다. 침소에 드시지요.”
“그래야지. 참, 내일 만찬회에 브라움 가도 초대되어 있는가.”
“그렇습니다.”
“가능하면 찰스 브라움과 예나왕도 함께 보고 싶은데. 물론 배우자도 함께.”
찰스 왕세자의 말에 그의 수행원이 잠시 머뭇거렸다.
예나왕의 배우자라 하면 가우왕이었고 왕족이 포함된 만찬 자리에서 그가 참가함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 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저하, 그 사람은.”
“방계라곤 하나 예나 역시 친계일 세. 그 아이의 배우자라면 충분히 자격이 있지.”
“하나.”
“아무 말 말고 초대하게. 부족함이 없이 대우해야 할 것이야.”
“……그리 하겠습니다.”
수행원을 내보내고 혼자 남은 찰스 왕세자는 위대한 피아니스트 가우왕 과의 만남을 기대하며.
한편으로는 이번 기회에 영국이 번 영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망령을 떨 쳐내고 화합과 협력에 힘써야 한다는 뜻을 명확히 하고자 마음먹었다.
얼마 뒤.
늦은 시간에 울린 초인종 소리에 왕 부부가 잠에서 깼다.
“으으으음.”
예나왕이 다리를 뻗어 가우왕을 밀어냈고 침대에서 떨어진 가우왕이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현관으로 향 했다.
외시경을 통해 밖을 살핀 그가 짜증스럽게 물었다.
“뉘슈.”
“크흠. 찰스 왕세자께서 서한을 보내셨습니다.”
밖에서 불편해하는 기침 소리와 의아한 말이 들려옴에 가우왕이 문을 열었다.
“뭐라고요?”
“찰스 왕세자께서 당신과 예나왕을 내일 만찬에 초대하셨습니다.”
찰스 왕세자의 수행원이 몹시 불쾌한 표정으로 동봉된 카드를 건네고 돌아갔다.
가우왕은 인상을 쓰며 그것을 살폈고 곧 침실로 향했다.
“뭐였어?”
예나왕이 잠에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찰스란 이름 쓰는 사람들은 다 맛이 간 거 같아.”
“흐.”
예나왕이 짧게 웃은 뒤 일어났다.
“뭔데.”
“내일 같이 밥 먹자는데?”
가우왕이 건네 받은 카드를 예나에 게 보여주었다.
“어…… 이건 내일 거절할게.”
“왜. 친척 아니야?”
“친척이라 해봤자 멀어. 나이 차이 도 많아서 어릴 때 몇 번 본 적밖 에 없고.”
“장인, 장모님도 오시는 거 아니야?”
“맞아.”
가우왕이 예나를 살피다가 물었고 예나는 숨을 푹 내쉬곤 고개를 끄덕였다.
예나는 그런 자리에서 만나봤자 불 편할 뿐이라 거절하는 게 좋다고 판 단했으나 가우왕의 생각은 달랐다.
“못 뵌 지 꽤 됐잖아. 이번 기회에 뵈면 되겠네.”
“안 그래도 괜찮아. 불편하기만 할 걸.”
“왕세자가 초대한 거잖아. 짜증나 도 자꾸 보면 괜찮아지니까 가자.”
“자기 이상한 데서 사교적이다? 친 구도 없으면서.”
“내가 친구가 없긴 왜 없어.”
가우왕이 다니엘 홀랜드와 피셔 디 스카우, 마누엘 노이어, 진 마르코, 배도빈 등을 언급하며 친구가 있음을 주장했으나 예나는 위로의 뜻으로 그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