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506화
109. 참을 수 없었다(1)
“정말 괜찮아?”
“응. 아픈 것도 아닌걸.”
나윤희가 겉옷을 입으며 웃었다.
왕소소는 그런 나윤희를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배도빈 콩쿠르가 진행되고 있을 때 웃고 떠드는 밴드는 어린이를 위한 실내악 공연을 하고 있었다.
평소와 같이 즐겁고 자유로운 분위 기 속에서 30분간의 1부를 마친 뒤.
집중력이 부족한 아이들을 위해 잠 시 시간을 두고 있었는데 그때 배도빈의 병원으로 이송되었단 소식이 전해지고 말았다.
찰스 브라움, 다니엘 홀랜드, 스칼 라, 왕소소, 나카무라 료코, 프란츠 페터 모두 귀를 의심했다.
큰 충격으로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고 그나마 찰스 브라움과 다니 엘 홀랜드만이 얼마 뒤 정신을 차렸다.
‘2부 준비하자.’
‘가야겠어.’
‘멍청한 소리 하지 마. 애들은 어 쩌고.’
‘내겐 배도빈이 더 중요해!’
찰스 브라움이 대기실을 박차고 나 서려는 스칼라를 막아섰다.
소중한 친구를 잃었던 기억이 겹친 탓에 이성을 유지할 수 없었던 스칼 라는 그런 찰스를 이해할 수 없었다.
‘여기 있는 사람 모두 마찬가지야.’
‘그럼 왜 가만있어! 쓰러졌대잖아!’
‘ 관객들은.’
‘관객은 어쩌자고.’
찰스 브라움의 말에 스칼라가 아무 런 반박도 못 하고 실의에 빠졌다.
다니엘 홀랜드가 스칼라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위로했다.
나윤희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중단하면 더 힘들어할 거야.’
그녀의 말에 스칼라도 어쩔 수 없이 흥분을 억눌렀다.
그렇게 간신히 2부 연주를 위해 무대로 올랐지만 평소와 같을 수 없었다. 특유의 쾌활함과 자유분방함을 잃어, 결성 이후 최악의 분위기 속에서 간신히 연주회를 마치고 말았다.
연주를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자책과 배도빈에 대한 걱정으로 엉망 이 된 그들에게 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배도빈이 실명했단 기사를 접하고 사무국을 통해 그것이 사실임을 확 인한 탓이었다.
‘이게 뭐야? 병원 갔다며! 왜 이딴 기사가 올라오는 건데!’
‘……사실입니다. 현재 병원에서 검사 중이십니다.’
‘……뭐라고?’
‘……앞을 못 보시는 것 같습니다.’
찰스 브라움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헛소리 마!’
믿을 수 없었다.
‘누가, 어떻게 됐다고? 어!’
찰스는 소식을 전한 직원을 붙들고 앞뒤로 흔들며 대답을 촉구했다. 아 주 질 나쁜 거짓말이라고 밝히길 바 라며 소리쳤다.
‘언니!’
그때.
나카무라 료코가 비명을 지르듯 나윤희를 불렀다.
곁에 있던 왕소소가 깜짝 놀라 그녀를 부축하려 했으나 힘을 잃은 그 녀를 지탱할 순 없었다.
배도빈이 앞을 볼 수 없었던 비행기 추락 사고 직후 통화했던 기억이 떠오르며.
그에게 이상이 생겼음에 혼절하고 말았다.
너무나 큰 충격으로 상당 시간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그녀는 하루를 입원해 있었고, 그런 나윤희가 배도빈과 통화를 한 뒤에 일어서자 소소 로서는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의사도 퇴원해도 좋다는 말을 하였기에 그저 당분간 요양하길 바랄 뿐이었다.
“무리하면 안 돼.”
"응."
나윤희가 웃으며 대답했다.
얼마 뒤.
퇴원한 나윤희는 약속한 시간에 맞춰 배도빈을 찾았다. 조심스럽게 노 크를 하니 들어오란 대답이 돌아왔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쉰 뒤 문을 열었지만 배도빈의 상태를 본 순 간 목 아래가 조여왔다.
“기다렸어요.”
“미, 미안. 늦었지.”
심하게 잠긴 탓에 그녀의 목소리가 평소보다도 훨씬 떨렸다.
“괜찮으니 걱정 말아요.”
그럴 수 있을 리 없었다.
나윤희는 조심스레 그에게 다가가 앉았다.
“피, 필요한 거 없어?”
“네.”
잠시 대화가 끊겼고 나윤희는 손가 락을 꼼지락거리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때…… 후유증이라고 들었어.”
“네. 좀 쉬면 나아져요. 그보다 서 랍 안에 악보가 있을 거예요.”
“ 악보?”
나윤희가 침대 옆 서랍을 열었다.
배도빈이 죠엘 웨인에게 부탁해 가 져다두었던 그랜드 심포니의 총보가 두텁게 담겨 있었다.
“이건••••••
“완성했어요. 10년 만에.”
나윤희가 악보를 꺼냈다.
묵직한 만큼 방대한 분량이었다.
배도빈이 10년에 걸쳐 만들었다는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너무나 다양한 악기가 표기되어 있었고 나윤희는 들어보지도 못한 악 기마저 있을 정도였다.
너무나 복잡하고 정교했기에 악장 취임 이후 줄곧 배도빈을 통해 공부를 해왔던 나윤희로서도 어떻게 연주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 이런 악보는 처음이야.”
“들으면 더 대단할 거예요.”
배도빈의 말에 조금은 안도할 수 있었다.
시력을 잃었음에 실의에 빠져 있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평소와 같이 당 당하고 자신감 있어 보여 그나마 다 행이라 생각했다.
“한번 살펴봐요.”
“응.”
나윤희는 여유를 가지고 악보를 읽기 시작했고 페이지를 넘길수록 감 탄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그녀는 이렇게 정교한 악보를 본 적 없었다.
거의 모든 페이즈에 지시문이 상세 히 적혀 있었고 각 부는 이보다 완 벽한 구조를 이룰 수 없었다.
더군다나 그랜드 심포니라는 제목 답게 총 여섯 개 장으로 구성된 방 대한 교향곡은 각 장이 각각 다른 주제를 이루다 마지막 장에 이르러 하나의 멜로디로 이어졌다.
활동을 시작한 이후 잠시도 쉬지 못할 만큼 바쁜 와중에 틈틈이 공을 들여 이런 걸 만들어내다니.
나윤희는 배도빈이 항상 피곤할 수 밖에 없었던, 무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멋있어……
“그렇죠?”
배도빈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오케스트라 예선이랑 결승에 쓸 예정이에요.”
“아.”
“그리고 UN 평화의 날에도.”
"응"
나윤희는 배도빈이 자신하는 이 곡이 울리는 날을 어렴풋이 떠올리며, 이런 곡을 함께 연주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없이 기뻤다.
“그런데 일정이 좀 빡빡해요.”
제2회 오케스트라 대전 예선 날짜를 헤아린 나윤희가 아 하고 탄식했다.
“괘, 괜찮을 거야. 푹 쉬면 금방 나을 거야. 꼭.”
“그래야죠. 하지만 단원들도 준비 해야 해요. 봐서 알겠지만 쉽지 않을 거예요.”
확실히 바이올린 파트만 봐도 과연 단원들이 잘 따라올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높은 기량을 요구했다.
현재까지 가장 연주하기 어려운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평가받는 ‘불새’ 의 초연을 훌륭히 성공시켰던 나윤희조차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악기에 따라 난이도의 차이가 있긴 해도 세계 최고 수준의 연주자만으로 구성된 베를린 필하모닉이라 해 도 쉬울 리 없었다.
배도빈은 자신의 단원들이라면 분 명 해낼 거라 믿으며 조금도 타협하 지 않았지만 시간이 필요함은 충분 히 인지하고 있었다.
“최소 두 달은 필요할 거예요. 어 쩌면 그보다 오래 걸릴지도 모르고요.”
“두 달……
“그래서 최대한 서둘러야 해요. 부 탁할 일이 이건데.”
악보를 보고 있던 나윤희가 고개를 들었다.
“그거 교정을 맡아줬으면 해요.”
“내, 내가?”
배도빈은 교정자를 따로 두지 않았다. 음악에 관해서는 결벽증과 같은 완벽주의 때문에 1차 교정을 제외하
고는 모두 직접, 반복해 교정해 왔었다.
그것을 잘 아는 나윤희였기에 당황 하고 말았다.
“정확힌 도와달라는 건데. 앞이 안 보이니까 적을 수 없잖아요.”
나윤희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서 퇴원하면 연습하면서 교정 할 생각이에요. 연주하는 걸 들어보 면 수정해야 하는 곳을 찾을 수 있으니까. 그때 옆에서 제가 지시한 것들 적어 달란 말이었어요.”
연습 시간이 부족한 것도 해결할 수 있으니 배도빈으로서는 최선의
방법이었는데 나윤희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시력 회복해야 퇴원하는 거 아니야?”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순 없잖아요. 퇴원해도 쉴 순 있으니까.”
나윤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걱정 마요. 어차피.”
“아, 안 돼.”
“네?”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나을 때까지 쉬어야지.”
“그랜드 심포니는 쉬운 곡이 아니에요. 봐서 알잖아요.”
“뭐, 뭐가 그랜드 심포니야. 낫고 하면 되잖아. 조금 늦어도 괜찮잖아.”
“오케스트라 대전……
“다른 걸로 참가해도 되잖아. 왜 꼭 이걸로 해야 해. 아, 안 돼.”
“사카모토의 빈이랑 아리엘의 LA 도 있으니 최대한.”
“마, 말 같지도 않은 말 하지 마. 유, 유치해. 예, 예선부터 1등 계속 하고 싶단 말이잖아.”
“당연하죠. 항상.”
“항상 아니잖아. 가, 가우왕 씨한테 도 졌잖아.”
나윤희의 지적에 배도빈이 얼굴을 꿈틀거렸다.
그의 자존심에 생긴 유일한 상처를 건든 것이었다.
“안 졌어요. 2라운드 연주 들었어요? 결승에서 만났으면 제가 이겼다 고요.”
“모, 못 나가잖아. 아, 아파서 못 나간 거, 거잖아. 그러면서 또 뭐, 뭘 한다는 거야.”
“그러니까 쉬면서 한다고요.”
“안 돼. 나 못 해.”
나윤희가 딱 잘라 말했다.
나윤희의 단호함과 그녀가 파헤친 상처에 배도빈은 단단히 화가 나버렸다.
“……됐어요. 다른 사람한테 부탁 하면 되니까.”
“안 돼. 내, 내가 뜨, 뜯어말릴 거 야. 도와주지 말라고.”
“왜 이래요? 걱정 말라고요. 쉬다 보면 낫는다니까?”
“안 돼. 안 돼.”
“의사도 말했어요. 무리하지만 않으면 회복될 거라고. 해야 할 일이 있는데 무작정 안 된다고만 하면 어 쩌자는 거예요.”
“안 돼. 하, 하지 마. 쉬어.”
배도빈이 인상을 쓰다 숨을 길게 내쉬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러고는 나윤희를 타일렀다.
“충분히 쉴 거예요. 모레 퇴원하면 기자회견 가지고 집에서 쉬면서 연 습 때만 나설 테니 걱정 말아요.”
“안 돼. 기, 기자회견도 하지 마. 퇴원도 하지 마.”
간신히 진정했던 배도빈의 눈썹이 다시 한번 꿈틀댔다.
“……좋아요. 퇴원도 안 하고 기자 회견도 안 할게요. 연습이랑 교정만 도와줘요.”
“안 돼. 안 돼.”
“……죠엘 좀 불러줘요.”
“아, 안 돼. 나한테 말해. 내, 내가 다 해줄게.”
“하기 싫다면서요. 다른 사람 부르 려는 거까지 막으면 어쩌자는 거예요. 나 진짜 화내는 거 보고 싶어요?”
“그, 그래도 안 돼. 쉬어야 해.”
나윤희의 고집에 기가 찬 배도빈이 허 하고 한탄하고 말았다.
“어머.”
유진희 배영준 부부는 내일 퇴원한다던 아들이 얌전히 병원에 누워 있는 걸 보고 안도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괜찮다, 걱정 마 라 하며 속을 뒤집어 놓았던 아들이 뚱한 표정으로 누워 있는 게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웬일이니? 얌전히 쉬고 있고.”
배도빈은 대답하지 않고 가만있다가 중얼거렸다.
“연습해야 하는데 방해하잖아요.”
부부가 서로 눈을 마주했다가 빙그레 웃었다.
“누군지 몰라도 고맙네.”
“그래. 연습은 무슨 연습이야. 몸부터 챙겨야지.”
부모마저 나윤희 편을 들고 나서니 배도빈은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서 병문안을 온 푸르트벵글러와 사카모토에게 상황을 호소하여 상황을 타개코자 했다.
“아프다더니 머리까지 돌았구나.”
“뭐라고요?”
“어느 미친놈이 그 지경이 되고도 연습 생각부터 해! 윤희 말 틀린 거 하나 없다!”
“껄껄. 도빈 군, 이번에는 자네가 졌네. 그러게 왜 매번 주변 말은 안 듣고 괜찮다고만 했는가.”
그러나 두 사람마저 배도빈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않았다.
배도빈에게 남은 방법은 그와 마찬 가지로 음악에 미쳐 있는 가우왕과 최지훈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니까 도와줘요.”
배도빈이 가우왕에게 단원들을 설 득해 달라고, 최지훈에게 악보 교정을 부탁했다.
악단 내 은근히 친분을 넓히고 있는 가우왕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리라 믿었고.
최지훈 역시 작곡을 공부하며 최근 교향곡을 편곡할 정도로 실력을 쌓았으니 괜찮은 방법이라 생각했다.
“염병하고 있네.”
“싫어.”
그러나 두 사람마저 배도빈을 상대 하지 않으니 배도빈은 뚱하게 누운 채 음악을 듣는 것 이외에는 균형 잡힌 식단과 규칙적인 생활을 유지 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