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505화 (505/564)

다시 태어난 베토벤 505화

108. 건반 위의 구도자(5)

병실에서 배도빈과 함께 있던 차채은은 입을 막았다.

그가 오늘의 연주를 위해 무리했고 그 때문에 피아니스트로서의 삶을 잃을 수도 있었던 것이 떠오르며 울컥하고 말았다.

1년 이상의 공백을 둬야만 했고 이후에도 감각을 되찾기 위해 땀흘렸던 시간까지.

그 모든 것이 마침내 보상받은 듯한 기분이었다.

“언론에선 거장이란 말을 쉽게 쓰는데.”

배도빈이 입을 열었다.

“자기 영역을 갖추는 게 쉬운 일은 아니야. 평생을 쏟아도 일구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

차채은은 눈물을 닦으며 그의 말에 귀 기울였다.

“하물며 자기 영역을 확장하는 사람은 더더욱 없지.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은 모두 그런 이들이야.”

배도빈이 미소를 머금고는 고개를 저었다.

푸르트벵글러, 사카모토 료이치, 아 르투로 토스카니니, 브루노 발터 모두 각자의 확고한 세계관을 널리 확 장시킨 인물이었다.

크리스틴 지메르만, 가우왕, 막심 에바로트도 그러했으며.

니아 발그레이, 찰스 브라움.

한스 짐과 아리엘 얀스도 마찬가지.

무수히 많은 음악가 중에서 자신만 의 영역을 확보해 지금도 평생에 걸 쳐 각자의 영역을 넓혀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음악은 여러 방향에서 진보 하였고 그렇게 조금씩 원을 그려나 가, 면적을 확장시켰다.

배도빈이 음악의 발전을 한 사람이 이룰 수 없다고 말하는 이유.

이 시대의 음악은 무수히 많은 음악가가 기나긴 시간에 걸쳐 이뤄낸 산물이었고.

인류가 발전해 왔다는 증거였다.

오늘은 그 위대한 위업에 최지훈이 손을 얹은 날이었고 그를 어려서부 터 지켜보았던 배도빈에게 있어 그 자신의 새로운 발전보다도 기쁜 일이었다.

“실타래처럼 얽히는 연주라니. 듣고도 믿을 수 없어. 두 음 사이에 건반을 더 눌러 얽히게 하는데 그게 자연스럽게 들리도록 얼마나 노력했을까.”

함께했으면서도 감히 예단하지 않았다.

“지훈인 천재야.”

말을 마친 배도빈은 만족스러운 미 소를 짓고 있었다.

“ 오빠.

차채은이 슬며시 손을 뻗어 배도빈의 손등을 포개었다.

이 시대 가장 위대한 음악가.

그는 시력을 잃은 상황에서도.

자신의 기량을 온전히 보이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한 음악가의 발돋움을 기뻐하고 있었다.

최지훈과의 각별한 사이 이전에.

음악을 진정 사랑하기에 가능한 일.

차채은은 배도빈의 속내의 일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만 쉬어. 피곤하겠.”

그때.

배도빈이 침대 위로 쓰러졌다.

“오빠!”

그 모습에 깜짝 놀란 차채은이 소 리 지르자 배도빈이 벌떡 일어나 인상을 썼다.

“깜짝이야.”

“..괜찮아?”

“뭐가.”

“ 방금••••••

차채은은 방금 죽는 줄 알았다고 말하려다가 ‘죽음’을 언급하고 싶지 않아 말끝을 흐렸다.

“자려고. 너도 가 봐. 지훈이 오면 내일 보자고 해. 이젠 진짜 졸려서 못 있겠어.”

차채은이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있는 대로 인상을 쓰곤 이불을 올려주었다.

그러고는 배도빈이 정말 괜찮은지 확인하다가 이내 병실을 나섰다.

【위대한 음악가에게 대체 무슨 일이?]

【배도빈 시력 상실!]

[베를린 필하모닉 입장 소명 거부]

【배도빈은 정말 시력을 잃었나?]

[시력 상실의 원인은?】

[독일 최고 수준 의료팀 배도빈 치료에 집중]

[앙겔라 총리, “우리의 희망에게 닥친 시련. 부디 이겨내길 바란다.”】

배도빈 콩쿠르 2라운드 B조 경합 은 배도빈이 투표 대상에서 제외된 채 진행되었다.

조 1위는 총 78.4%에 해당하는 표를 획득한 최지훈이었으며 조 2위는 총 19.5%를 기록한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였다.

놀라운 성장을 보인 엘리자베타와 피아노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최지훈의 관련한 일도 관심 받았으나 클래식 음악 팬들에게 있어 배도빈의 안위보다 중요한 일은 없었다.

ㄴ 제발 TTTT

ㄴ 도빈이한테 무슨 일 생기면 진짜 가만 안 있을 거야 ㅠㅠ

ㄴ 이유라도 알고 싶네. 멀쩡하던 애가 갑자기.

ㄴ 이러면 안 되지. 진짜 이건 아님. 도빈이가 뭘 잘못했다고 이래 ㅠㅠ

ㄴ 정말 눈 안 보이게 된 거야?

ㄴ 하 시발 진짜 개같네.

ㄴ 도빈이 나을 때까지 숨 참을 거야. 나 완전 진지함.

ㄴ 이제 고작 21살인데 대체 왜 ㅠ

ㄴ 그러니까. 음악 좀 한 사람은 오 늘 연주 들었으면 배도빈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걸.

ㄴ 무슨 영화 보는 느낌이었지 ㅠ

ㄴ 배도빈이 진짜 대단한 게 이미 음악 관련 기록은 거의 다 갈아치운 애가 이제 겨우 만 20살이라는 거임. 더군다나 오늘 연주로 아직도 발전하고 있다는 걸 증명했잖아. 그런 애한테 실명이 말이 되냐고오

ㄴ 주변 사람들도 충격이 큰 듯.

ㄴ 오늘 베를린 필하모닉 실내악팀 공연 봤어? 중간 대기 시간에 소식 들었는지 다들 표정 말이 아니더라.

ㄴ 안 그래도 찰스가 멤버들 멘탈 관리하는 거 눈에 보이더라.

ㄴ 그래서 오늘 공연 평 그리 안 줗았음…….

ㄴ 나윤희는 연주 끝나고 실신했다고 기사 났어.

ㄴ 연주 중에 진짜 넋이 나갔더라. 억지로 자리 지켰겠지.

ㄴ 지훈이 연주 마치자마자 결과 발표도 안 보고 뛰쳐 나간 것도 진짜 하…….

팬들은 그들이 받은 충격만큼이나 배도빈의 건강을 바랐다.

배도빈에 관련한 기사가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100만 건 이상 올라왔으며, 그가 하루빨리 낫길 바라는 팬들의 글은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수선한 하루가 지났다.

어제 배도빈이 곤히 잠들어 있어 어쩔 수 없이 발을 돌린 최지훈은 날이 밝자마자 병실을 찾았다.

“도빈아.”

밤새 잠을 뒤척였던 탓에 그의 목 소리가 피로하게 울렸다.

“그렇게 부르면 내가 마음 놓고 쉬겠냐.”

붕대를 감고 수액을 맞고 있으면서 도 도리어 자신을 걱정하는 형제를 접한 순간 최지훈의 가슴은 무너지 고 말았다.

조용히 다가가 그를 붙잡았다.

“이 지경에 누굴 걱정하는 거야.”

눈물 섞인 목소리에 배도빈은 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은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겨우 떨어졌다.

“좋던데.”

“••••••뭐가?”

“어제. 작곡도 공부하더니 편곡도 제법이었어.”

평소라면 너무나 기뻐했겠지만 조금도 좋지 않았다.

꼬박 하루를 걸쳐 자신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말하고 싶었고 어떤 기 분이었는지 듣고 싶었다.

배도빈이 들려준 새로운 세상에 대해 끊임없이 수다 떨고 싶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그의 건강보다 중요하진 않았다.

“눈…… 어떻게 된 거야?”

차채은에게 대강 이야기는 들었지 만 그에게 듣고 싶었다. 괜찮다는 말을 직접 듣고 싶었다.

“전에 이 주변을 세게 부딪힌 적이 있어.”

배도빈이 눈 주변을 관자놀이와 눈 사이를 가리켰다.

“그때?”

최지훈이 비행기 추락 사고를 떠올리며 물었고 배도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2주 정도 앞이 안 보였는데 점점 괜찮아지더라고. 돌아온 이후 에도 피곤해지면 가끔 이랬어.”

배도빈은 충분히 쉬면 또 괜찮아질 거라는 말을 덧붙였다.

최지훈은 형제가 그런 고통을 겪고 있었다는 것도 모른 채 지냈음을 믿을 수 없었다.

“왜. 왜 말 안 했어.”

알고 있었다.

“이렇게 질질 짤 거 아냐.”

“당연하잖아!”

걱정하는 게 당연하다.

걱정 끼치지 않으려 했다.

서로를 너무나 아꼈기에 했던 일이고 의미 없는 말싸움이었다.

“이런 일 아무것도 아니야. 죽는 거도 아니고 음악도 계속할 수 있어. 영영 못 보는 것도 아니고.”

“너 진짜.”

최지훈이 배도빈을 툭 하고 쳤다.

너무나 단단해서 도리어 안타까운 마음에 그를 탓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배도빈이 손을 들었다.

최지훈이 자신의 손을 가져다주자 그것을 붙잡고 말했다.

“가우왕도 깜짝 놀랐을 거야.”

"응?"

“나도 놀랐거든.”

“응.”

“결승에는 한술 더 뜨겠지. 같이 놀고 싶었는데 좀 아쉽긴 하다.”

함께하기에 끝없이 달릴 수 있었던 세 사람은 서로를 인정하기에 서로 의 장점을 받아들여 더욱 나아갈 수 있었다.

배도빈이 가우왕의 연주에 영감을 받았듯.

최지훈은 배도빈에게, 가우왕은 최지훈에게 또 반대로 지금껏 달려올 수 있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어렴풋이 느끼 고 있었기에.

배도빈의 아쉽다는 말에 최지훈은 결국 또 한 번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배도빈도 최지훈의 등에 손을 얹고 아쉬움을 달랠 뿐이었다.

“그럼 푹 쉬어.”

히무라가 다녀간 이후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제법 쉬었는데도 몸 상태가 안 좋은 걸 보니 아무래도 당분간은 면회도 거절해야지 싶다.

걱정되는 건 조만간 오케스트라 대전 예선에 참가해야 하는데, 그 지휘를 맡아야 한다는 점.

아직 악보 수정을 못 했는데 회복이 더딘 게 마음에 걸린다.

죠엘에게 들은 바로 연주자 외 지휘자는 예선부터 변동할 수 없는 것이 규칙이란다.

케르바 슈타인이 버티고 있고.

푸르트벵글러가 나서 준다면야 우승은 확실하지만, 최고의 무대에서 대교향곡을 지휘하고 싶기에 직접 나서야만 한다.

‘우선은 준비라도 해야겠지.’

남은 시간은 석 달.

그 안에는 시력이 회복되겠지만 악보 수정과 단원들의 연습 기간을 따 지면 빡빡하다.

다른 곡 같으면 우수한 연주진이 금방 준비하겠지만 대교향곡은 지금 껏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고 또 한 복잡하다.

세밀한 조정을 위해서라도 일찍 준비하고 싶은데, 완성한 악보를 교정 할 사람이 필요하다.

푸르트벵글러보다 적격인 사람은 없지만 내가 이 지경이 되었으니 케 르바 슈타인, 헨리 빈프스키, 니아 발그레이와 함께 당분간 바쁠 터.

음악원 설립과 밴드, 악장 역할까지 맡은 찰스 브라움도 마찬가지다.

‘페터는 이르고.’

페터는 멋진 곡을 만드는 일은 가능하지만 아직 이것저것 공부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아, 교정을 볼 수 있을까 의문이다.

역시 그녀밖에 남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윤희가 찾아오지 않았다.

여러 일에서 침착했던 그녀라면 크게 걱정할 필요 없겠지만, 당연히 찾아올 사람이 그러지 않으니 조금 의아하다.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지.’

아마 악단 내부에서 생긴 이런저런 일로 정신이 없을 터.

전화를 걸어볼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나윤희에게 전화 걸어.”

안내 음성과 함께 발신음이 들리기 시작한다. 세 번이 채 울리기 전에 나윤희가 다급히 전화를 받았다.

-도, 도빈아.

지친 목소리다.

“뭐 하고 있었어요?”

-아…… 그, 그냥. 괜찮아?

“괜찮아요. 다들 야단을 떨어서 겨우 쉬고 있어요.”

-나, 나도 갈래.

“목소리 들으니 피곤해 보이는데 일단 쉬어요. 피곤해서 자기 전에 전화해 본 거예요.”

...응.

나윤희가 힘없이 대답한다.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_응!

“내일 잠깐 보러 와줄래요?”

-응. 갈게. 필요한 건 없고?

목소리에 금방 생기가 돈다.

알 수 없는 사람.

그녀에게 단원들이 어떤지 묻고 듣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던 둣, 잠이 밀려든다.

하품을 하니 그녀가 급히 말을 끊었다.

-어, 얼른 자.

“그래야겠어요. 내일 봐요.”

내일은 눈이 나았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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