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504화 (504/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504화

    108. 건반 위의 구도자(4)

    “와……

    차채은은 입을 살짝 벌린 채 감탄 할 뿐이었다.

    엘리자베타의 연주는 꽤 많이 들었지만 오늘과 같은 느낌은 처음이었다.

    ‘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를 연주해내기 위해 1년간 두문불출했던 탓에 최근 기량이 어느 정도인지 감을 잡기 어려운 탓도 있었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괄목상대.

    러시아의 재녀가 마침내 그 재능을 만개한 듯했다.

    “사카모토가 보는 눈이 있어.”

    배도빈이 숨을 짧게 내쉬며 만족스 럽게 말했다.

    “대단하잖아.”

    차채은이 공조했다.

    “인터뷰 때 자기는 우승할 자격이

    있다고 하길래 그냥 하는 말인가 싶었는데. 진짜 어디서도 우승할 만 해.”

    배도빈도 같은 생각이었다.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는 착실히 성장하고 있었고 단지 배도빈과 최지훈의 눈에 들어오지 못했을 뿐이었다.

    사카모토 료이치, 글렌 골드, 그레 고리 소콜라브, 크리스틴 지메르만, 밀스 베레조프스키와 같은 전설들이 기라성처럼 포진해 있었고.

    미카엘 블레하츠, 막심 에바로트, 가우왕과 같은 천재 중의 천재들을

    상대로 음악을 했던 배도빈과 최지훈으로서는 엘리자베타의 성장에 신 경 쓸 이유도 겨를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오늘의 연주로 자신 이 그들과 같은 무대에 설 자격이 있음을 명백히 보였고.

    그것은 최지훈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대단해.’

    그는 크게 놀랐다.

    배도빈을 제외하고 또래는커녕 10 살 위로도 상대가 없었던 최지훈은 항상 위만 바라보았다.

    지메르만과 가우왕 무엇보다 배도

    빈만 보며 달리다 보니 어느 순간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아주 어렸을 때 경쟁했던 이들은 아득히 멀어져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으며 최지훈도 그것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위대한 음악가들이 노래하는 저곳이었고 과정 은 과정일 뿐.

    혼자라 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자신 뒤에, 아주 가까운 곳에 누군

    가 있었음을 깨닫고 만 것이다.

    ‘정말 많이 노력했구나.’

    실은.

    배도빈 콩쿠르 참가자 중 엘리자베 타 툭타미셰바의 실력을 가장 잘 알 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별친 라 발스를 듣고 가장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크리크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는 자신보다 먼저 국제 콩쿠르에서 활 동하던 사람이었고.

    제16회 쇼팽 콩쿠르에서는 강력한 경쟁자였으며.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는 이미 한참 전에 극복한 엘리자베타가 수 년 뒤, 세계적 피아니스트의 면모를 보임에.

    최지훈은 이 무대가 자신과 가우왕 만의 무대가 아님을 분명히 인지할 수 있었다.

    잠시 후.

    그의 대기실로 스태프가 찾아왔다.

    “미스터 최, 시간 되었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최지훈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 쉰 뒤 대기실을 나섰고 짐을 챙기기

    위해 돌아온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를 마주했다.

    최지훈을 항상 노려보던 엘리자베 타는 애써 그를 보지 않으려 했다.

    돌아봐 주길 바랐지만 그에게 자신 이 아무 의미 없는 사람이란 걸 깨 달은 탓.

    그 순간부터 그를 향한 경쟁 의식 이, 그녀 자신조차 인지하지 못한 연심이 모두 그를 부담스럽게 할 뿐 이란 것을 알았고.

    더 이상 그에게 다가서지 않으려는 마음이었다.

    최지훈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느낌

    으로 차가워진 엘리자베타와 지나쳤고 망설이던 말을 꺼냈다.

    “툭타미셰바 씨.”

    이제 상관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에게 불린 순간 엘리자베타의 가 슴은 터질 듯이 뛰었다.

    “……뭐야.”

    두 사람이 돌아서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지지 않을 거예요.”

    최지훈이 평소와 같이 빙그레 웃었다. 자신을 향한 그 미소와 경쟁자 로 인지하는 듯한 말에 꼭꼭 잠갔던

    마음이 허무히 풀어지고 말았다.

    “그러든지.”

    엘리자베타는 급히 고개를 돌렸고.

    최지훈은 평소와 같이 쌀쌀맞은 그 녀를 보다가 이내 발을 돌렸다.

    ‘모두가 필사적으로 매달린 무대 야.’

    단발성의 이벤트 콩쿠르였으나.

    모든 참가자가 최선을 다했고.

    최지훈 본인 역시 그러했으며.

    망설일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쇼팽 콩쿠르와 차이코프스키 콩쿠

    르에서 우승한 피아니스트죠. 모시겠습니다. 지훈 최.”

    이자벨 멀핀의 소개와 함께 관객들 이 박수를 보냈다.

    최지훈이 무대에 오르자 그 소리에 활기가 더해졌다.

    바른 자세로 허리 숙여 인사한 그는 허리를 곧게 펴고 자연스레 그를 위해 준비된 나비 앞에 앉았다.

    그의 심호흡 소리마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루트비히홀은 적막했다.

    ‘할 수 있어요.’

    학생을 지켜보는 스승의 눈은 신뢰 로 가득했다.

    이 어수선한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강렬한 빛을 보여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밤하늘 그 어떤 별보다 찬란히 빛 나는 그의 진정성이 이제 이곳에 있는, 땅에 사는 모든 이에게 닿을 때였다.

    건반이 노래한다.

    배도빈 교향곡 1번, 가장 큰 희망 (Die meiste Hoffnung).

    배도빈의 첫 번째 교향곡을 최지훈 이 직접 편곡한, 오늘을 위해 준비 한 거대한 칼이었다.

    ‘허어.’

    연주가 시작된 순간.

    사카모토 료이치는 17년 전, 배도빈이 보여주었던 악보를 떠올릴 수 있었다.

    네 현악기의 대위적 배치와 세 박 자의 스케르초. 마지막에서는 새로 운 주제를 제시하면서도 1악장을 환 기시키는 론도 형식.

    마치 빈 고전파의 명장이 만든 듯, 고전적 구조의 교향곡은 사카모토가 보았던 어떤 현대곡보다도 완전했다.

    그 장대하고 견고한 성을 피아노로 연주할 생각을 하다니.

    사카모토 료이치는 그것이 가능할 까 의심하면서 점차 최지훈의 연주 에 빠져들었다.

    건반이 요동쳤다.

    흉악한 무리가 날뛴다.

    평화롭던 터전은 모두 불타고 사랑 하는 가족이 죽어가고 얼어붙은 손 발이 썩어 들어간다.

    절망.

    원수를 향한 분노는 차디찬 바람에 의해 조금씩 무뎌진다.

    ‘어둠의 군주께서 명하셨다.’

    ‘예언의 아이를 찾아라!’

    ‘방해하는 자는 모조리 죽여라.’

    관객들은 조금씩 알 수 없는 불안을 느낀다.

    완벽히 조율된 타건 속에서 피어나는 심상에 동화되어, 불타는 마을 한복판에 떨어진 듯하다.

    그러는 한편.

    그의 연주를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다.

    ‘과욕이다.’

    막심 에바로트는 최지훈이 욕심이 앞섰다고 판단했다.

    ‘가장 큰 희망’은 오케스트라가 연주해야만 그 웅장함과 비장함을 표

    현할 수 있는 곡.

    단 한 대의 피아노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하기 짝이 없었다.

    최선은 주 멜로디에 힘을 주며 반 주를 최대한 깔아내는 정도라 가장 큰 희망의 장점을 끌어낼 수 없었다.

    최고의 피아니스트만의 생각은 아 니었다.

    ‘무모해.’

    배도빈과 비견되는 천재 아리엘 얀 스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가장 큰 희망은 스케일과 구조의 음악이야. 어설프게 연주했다간.’

    적당히 타협을 보며 연주하면 곡이 가진 장점을 조금도 표현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무리하자니, 백여 개의 악기가 내는 완벽한 앙상블을 표현 할 길이 없었다.

    피아니스트는 아니었으나 그것이 가능한 피아니스트가 있다고는 결코 생각지 않았다.

    살아 있는 전설들도 마찬가지.

    1악장이 진행됨에 따라 푸르트벵글러와 사카모토도 최지훈이 앞으로 펼쳐질 광활한 대서사시를 어떻게 표현해낼지 우려했다.

    ‘대체 어쩌려는 거지.’

    ‘지훈 군.’

    두 사람은 최지훈이 여러 문제를 생각지 못할 만큼 아둔하지 않다고 여기면서도.

    불가능한 일을 대체 어찌 해결할지 좀처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정작 최지훈은 연주에 집중하여 조 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손끝에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

    ‘듣고 있지?’

    다만 그의 형제를 찾을 뿐이었다.

    ‘괜찮은 거지?’

    지금 그를 구속하는 것은 형제를 향한 걱정뿐.

    ‘내가 지키고 있을게.’

    그는 형제가 마음 놓고 편히 쉴 수 있도록 최고의 연주를 들려줄 생 각이었다.

    자신 때문에 18개월을 기다려 주었던, 묵묵히 자리를 지켜내 주었던 형제가 안심하도록.

    그가 그랬듯이.

    그 누구도 감히 이 자리를 탐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 리라.

    1악장 뒤.

    연주가 곧장 이어졌다.

    예언의 아이를 찾기 위해 제국의 병사들이 더욱 날뛴다.

    최지훈의 손이 빨라졌다.

    빨라지고 더욱 빨라졌다.

    처음에는 그 놀라운 속주에 감탄하던 이들이 끝을 모르고 빨라지는 연주에 눈과 입, 귀를 벌리고 말았다.

    하나 하나의 실들이 모이고 얽혀 천을 이루고 그것이 또 옷을 이루 듯.

    최지훈이 손이 빠르게 움직일수록 건반이 내는 소리들이 모였다.

    ‘……말도 안 돼.’

    막심 에바로트는 팔걸이를 꽉 쥐었다. 피아노는 음이 이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현악기가 그려내는 수채화

    가 아니라 점묘화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러나 이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 거였어.’

    가우왕이 어금니를 꽉 물었다.

    최지훈을 한 번 망가뜨렸던 칼이었

    다. 너무나 빠르게 들리지만 사실 속도 자체는 가우왕이나 배도빈에게 미치지 못했다.

    단지 필요할 때 건반을 여러 번 두드리는, 손가락에 부담이 갈 수밖 에 없는 양날의 칼.

    열 개의 손가락이 모두 각각의 악 기가 되어 제 연주를 펼치고 있었다.

    가우왕이 하나의 손으로 두 개의 손 역할을 하면서 다른 한 손으로 반주를 펼친 것과는 또 다른 개념이었다.

    의욕이 앞서.

    스스로를 망가뜨렸던 연주법을.

    상식을 벗어난 통제력을 발휘해 부 담을 최소화하며 더욱 발전시킨 것 이었다.

    크리스틴 지메르만도 가우왕도 배도빈도 하지 못하는.

    최지훈만의 무기.

    그는 실타래를 뽑아 가장 아름다운 옷을 재단해 나가고 있었다.

    연주는 더욱 활기를 찾기 시작했고.

    두려움이 가득한 세상에 마침내 희망이 싹텄다.

    그 어떤 폭력과 좌절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매서운 바람 앞에서 더욱 뜨거워지는 희망.

    불굴의 정신.

    결코 멸하지 않는 강인한 마음이 건반을 타고 현을 통해 울려 루트비 히홀을 채워나갔다.

    ‘ 아아.’

    전파를 타고 세계에 울리고 있었다.

    병실에 누워 있는 마왕에게도 확실 히 전달되어.

    그는 작게 웃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연주가 끝나고.

    “브라보-!”

    “브라보-!”

    지금껏 듣지 못한, 경이로운 연주를 들려준 새 시대의 비르투오소를 향해.

    세계 만인이 전율했다.

    그 해일과도 같은 환호에 파묻힌 최지훈은 가쁜 숨을 내쉬며 그 어느 때보다도 충족감을 느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