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503화 (503/564)

다시 태어난 베토벤 503화

108. 건반 위의 구도자(3)

배도빈은 천천히 몸을 눕힌 채 이자벨 멀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배도빈 악단주께서 남기신 말을 전달해 드리 고 경연을 이어나가겠습니다.”

이자벨 멀핀은 침을 삼켰다.

“악단주의 전언입니다. 오늘 일로 놀라신 분 그리고 참가자께 사과드 립니다. 저에 관한 이야기는 조만간 다른 장소를 빌려 전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오늘의 소동으로 다음 차례의 참가자에게 영향이 가는 일이 우려됩니다. 오늘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충분히 즐겨주셨으면 합니다.”

이자벨 멀핀이 말을 멈추었다.

ㄴ 그 지경에 뭘 신경 쓰는 거야;;

ㄴ 진짜 앞 안 보이는 거야?

ㄴ 진짠가 보네.

ㄴ 아니 다른 참가자 신경 써주는 게 대견하긴 한데…….

ㄴ 너무 어려서부터 높은 자리에 가니 애가 의젓해도 너무해졌네.

ㄴ 어떻게 신경을 안 쓰냐고오 ㅠㅠ

ㄴ 진짜 WH그룹에서 제왕학 교육이라도 받았나. 뭐 이리 침착해;;

ㄴ 그러게 너무 침착한데. 전부터 증상이 있었나?

ㄴ 도빈이 살려내라 ㅠㅠ

배도빈의 바람과 달리 채팅창과 콘서트홀 모두 진정할 수 없었다.

이 시대 최고의 음악가이자 그들의 희망에게 닥친 크나큰 시련에 동요 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멀핀 또한 그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기에 조금 더 시간을 두고 행 사를 진행했다.

“그럼 다음 순서인 나나리 수완포 티프라 씨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태국 출신의 유망한 피아니스트나 나리 수완포티프라가 무대 위에 올랐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그녀는 최선을 다했고 덕분에 콘서트홀 분위기는 다소 진정되는 듯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의 머릿속 에서 배도빈이 피아노 의자에 걸려 넘어지는 장면이 반복되었고.

특히나 최지훈의 경우에는 더욱 그 러 했다.

형제에게 닥친 시련을 믿을 수 없었으나 조금씩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걱정마저 덜 수는 없었다.

‘설마 앞으로 계속……

최지훈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야. 괜찮을 거야. 분명 괜찮을 거야.’

배도빈은 별일 아니라고 했다.

단 한 번도 거짓을 말한 적 없으니 분명 이번에도 꼭 그럴 거라 믿었다.

논리 따위 필요 없었다.

그렇게 믿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기에 애써 긍정적인 단어를 반복해 떠올렸다.

그렇게 조금 진정하자 배도빈의 연주가 떠올랐다.

‘……2악장 시작이 달라졌을 때부 터구나.’

1악장 이후 2악장이 시작되기까지 간격이 평소보다 길었음을 떠올릴 수 있었다.

‘즉훙이었던 거야. 그런 연주를. 20 분씩이나.’

최지훈은 고개를 저었다.

대체 어떤 사람이어야 그런 일이 가능한지 알 수 없었다.

단순 즉홍 연주는 프로 피아니스트 라면 어렵지 않게 가능하지만 그렇게 완벽한 구조를 이룬 곡을 20분 간 최고 수준으로 유지할 순 없었다.

오래전부터 준비한 연주라 해야 겨우 납득할 수 있는 연주를 하물며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펼치다 니.

최지훈은 본인은 물론 스승 지메르 만도 가우왕도 할 수 없는 일이라 판단했다.

기적과도 같은 음감.

견고한 이미지.

민첩한 판단력.

피아노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최지훈은 배도빈이 어떤 마음으로 오늘의 경 합에 임했는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말뿐만이 아니었다.

정말 단 한 번의 연주를 위해서 모든 것을 쏟아내지 않고서는 그런 연주가 가능할 리 없었다.

이 얼마나 미련한 생각인가.

그러나 음악가 최지훈은 도저히 그를 탓할 수 없었다.

그렇게 될 줄 알면서도 끝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그 순수함. 고귀함.

객석을 지키고 있던 아리엘 얀스 역시 최지훈과 같은 생각이었다.

‘과연.’

아리엘 얀스는 작곡가의 입장에서 조금 전 배도빈의 즉훙곡에 경악했고 음악가로서는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한 인간으로서 자 신의 신념을 관찰하는 태도에 숙연 해질 수밖에 없었다.

베토벤 기념 콩쿠르에서 그는 단 한 번의 무대의 소중함을 전달했다.

말은 쉽지만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항상 간절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아리엘은 진심으로 배도빈이 무사 하길 바랐다.

“아, 미치겠네.”

아리엘이 옆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진달래의 손을 잡았다.

“괜찮을 거야.”

"응."

“반드시. 괜찮을 거야.”

“아주머니, 아저씨.”

병원을 찾은 차채은이 배영준, 유 진희 부부를 발견하곤 다가갔다.

실의에 잠겨 슬퍼하던 두 사람은 울먹이는 차채은을 발견하곤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 오빠는요?"

“푹 쉬어야 한다고 해.”

유진희의 목이 많이 잠겨 있었다.

차채은은 도대체 왜 배도빈에게 그 런 일이 생겼는지, 치료는 할 수 있는지, 언제부터 그랬는지 묻고 싶은 게 너무나 많았으나 유진희가 너무 나 슬퍼하고 있었기에 차마 물을 수 없었다.

배영준이 입을 열었다.

“잠깐 얼굴 보는 건 괜찮을 거야.”

아들과 차채은이 얼마나 가까운 사 인지 알기에 그는 배도빈의 병실을 알려주었다.

차채은이 조심스레 문을 두드리자 배도빈이 대답했다.

“네.”

조심스레 문을 열자 눈에 붕대를 감고 누워 있는 배도빈이 차채은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 광경이 믿기지 않았다.

항상 당당하고 단호하면서도 뒤에 서는 상냥했던 배도빈이 당장에라도 부러질 것처럼 보였기에 애써 참았던 눈물이 다시금 뚝뚝 떨어졌다.

“ 오빠.”

눈물 섞인 부름에 배도빈이 숨을 내쉬곤 입을 열었다.

“마침 잘 됐다. 곧 툭타미셰바 차 례야. 볼륨 좀 높여줘.”

“ 오빠아.”

차채은이 배도빈에게 다가가 그를 꽉 안았다. 배도빈은 그녀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 괜찮아.”

“끄흡으읍.”

“ 괜찮아.”

“흐으으으으읍.”

언제나 큰 나무처럼 그늘이 되어주었던 사람.

그가 앞을 볼 수 없음에 차채은은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일어날 줄 몰랐다.

“안 죽어. 볼륨 좀 키워봐.”

차채은이 벌떡 고개를 들었다.

“왜 그렇게 태평한데! 진짜 안 보이는 거야? 나을 순 있는 거야? 나 한테는 강한 척 안 해도 되잖아!”

“괜찮다니까.”

배도빈이 손을 들어 차채은의 얼굴을 더듬었다. 조심스레 눈물을 닦으며 담담한 어투로 달랬다.

“후유증이야.”

“••••••그때?”

“어. 피곤해지면 가끔 이래. 푹 쉬면 또 괜찮아지고.”

“정말이야?”

배도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괜찮지 않았다.

그러나 영영 앞을 못 보게 되는 건 아니라는 말에 그나마 다행이라 여기며 눈물을 닦아냈다.

그러면서 배도빈의 부탁대로 볼륨을 키우는데 배도빈이 중얼거렸다.

“방금 연주한 사람도 제법이더라.”

“수완포티 프라?”

“응. 정직해. 꾸미려고 노력하지 않고 곡이 가진 매력에 집중하는 게 듣기 편하더라.”

“……쉬어야 한다며. 지훈 오빠 연주 들을 거면 깨워줄게.”

“아니. 툭타미셰바 연주도 들어야 해.”

다소 주목받지 못하나 배도빈은 그 녀가 상당히 성장했다고 여겼고 또 과소평가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훈이한테 가려서 그렇지 1라운 드 때 보니 많이 발전해 있었어. 어지간히 이기고 싶었나 봐.”

“분명 잘하는 사람은 맞지만.”

“앞으로 몇 년 뒤엔 더 성장해 있겠지. 그런 부류야.”

나이를 먹을수록, 수준이 오를수록 성장의 폭이 주는 게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그러나 몇몇 사람은 그러한 현상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는데 배도빈 스스로가 그러했고 최지훈, 가우왕 이 그러했다.

끝을 모르는 욕심, 갈망.

완벽해지기 위해 안주하지 못하는 이들이 끝까지 가는 법이었고 배도빈은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에게서 그러한 느낌을 받았었다.

실력의 고하를 떠나 그런 사람의 음악은 언제나 새로운 영감을 전달 해 주었다.

-세 번째 순서입니다.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 씨를 무대 위로 모시겠습니다.

티비를 통해 이자벨 멀핀의 목소리 가 전달되었다.

배도빈은 그녀를 맞이하는 소리에 사람의 목소리가 없음을 의아히 여 겼다.

“반응이 이상한데.”

“오빠가 그러고 떠났는데 누가 신나서 소리를 쳐.”

“지훈 오빠도 걱정 많이 하고 있어.”

“연주에 영향은 안 갈 거야.”

배도빈은 최지훈이 제 실력을 온전 히 펼치리라 굳게 믿었다.

그러기 위한 무대였다.

이내 박수 소리가 잦아들고 엘리자 베타 툭타미셰바가 연주를 시작했다.

그녀가 선택한 곡은 모리스 라벨이 편곡한 라 발스(La Valse).

왈츠란 뜻의 불어로 붙여진 제목과 어울리지 않는 장대함과 드라마틱한 면을 갖춘 난곡이었다.

숱한 피아니스트가 도전하지만 완 벽하게 연주해내지는 못하는 아찔한 곡을 과감히 선택했다는 점에서 엘 리자베타의 마음가짐을 알 수 있었다.

‘보여줄 거야.’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집중했다.

사고였다.

배도빈의 일은 그녀 역시 안타깝게 여겼고 세상 모든 사람이 그를 걱정 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그들의 귀에 자신의 연주가 들리지 않아도 좋았다.

단지 최지훈만이 알아주면 되었다.

네 뒤에 자기가 서 있다고.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는 달라 질 거라고 경고하고 싶었다.

태평하게 자신에게 조금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위기의식이라고는 전혀 없는 그에게 증명하고 싶었다.

낮은 음계를 통해.

사교회장에 처음 발을 내디딘 소녀 의 불안감이 표현되었다.

데뷔탕트.

가슴이 터질 듯이 뛴다.

아름다운 샹들리에.

눈부신 드레스를 입고 있는 아름다 운 숙녀와 멋진 신사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과 물 건만 모아둔 것만 같은 그곳에서 소녀는 분위기에 압도된다.

불안과 선망의 공존.

흰 드레스를 괜히 한 번 살피고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 애써 태연한 척한다.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실내악이 잔 뜩 긴장한 소녀의 귀를 간지럽히고 누군가 말을 걸어주진 않을까,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까 하는 걱정으로 가슴은 더욱 뛴다.

그런 도중 누군가 손을 내민다.

약속된 춤.

오늘을 위해 노력한 실력을 한껏 내뿜을 때가 되었다.

교사가 가르쳐 준 대로 여린 손을 얹고 사뿐히 사교회장 가운데로 향 한다.

음악이 다시금 울리고.

발을 옮긴다.

오늘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춤을 춰야 할 때.

긴장한 탓에 시야에 비치는 것을 제대로 눈에 담지 못하고 오직 파트 너의 발을 밟지 않는 데 신경을 집 중한다.

‘ 괜찮아.’

춤을 추며 조금씩 긴장이 풀리고.

파트너의 표정과 주변 사물이 눈에 들어오면서 조금씩 더 과감해진다.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거짓 미소로 굳은 얼굴이 조금씩 펴지며 신사숙녀들이 그녀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엘리자베타의 연주에 사람들의 마 음이 녹아내리듯.

자신의 진면목을 보이기 시작한 그 녀처럼 만개하는 라 발스.

연주가 끝난 순간.

관객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이 받은 감동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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