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502화
108. 건반 위의 구도자(2)
“진정하게 생겼어!”
배도빈을 소중히 끌어안고 있던 푸르트벵글러가 호통을 쳤다.
“뭣들 하고 있어! 구급차 부르지 않고!”
“밖에 대기하고 있습니다. 혹시 몰라서……
죠엘 웨인의 말에 푸르트벵글러와 주변 사람들이 눈매를 좁혔다. 이미 예상된 일이었다는 말에 귀를 의심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병원부터 가세.”
당황한 단원들을 제치고 사카모토 가 배도빈을 일으켰다.
“잠깐만요.”
배도빈이 마이크를 달라고 작게 말 하자 이자벨 멀핀이 그에게 마이크를 건넸다.
ㄴ 대체 무슨 일이야;;;
ㄴ 도빈이 왜 저래 TTTTTT
ㄴ 아니 이게 무슨
ㄴ 쇼 아냐? 갑자기 눈이 안 보이는 게 말이 됨?
ㄴ 일단 병원부터 가 제발TTTT
ㄴ 뭐 말하려는 거 같은데?
배도빈 콩쿠르를 시청하고 있던 수 백만 명의 시청자들은 웅성이는 소 리를 향해 선 배도빈을 보며 혼란스러워했다.
배도빈은 최대한 정면을 향하려 했으나 웅성이는 소리들이 제각각이라 그 방향이 상당히 치우쳐졌고.
멀핀이 방향을 다시 잡아주자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로서는 충격 일 수밖에 없었다.
차채은은 파르르 떨리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현실을 부정했다.
‘왜? 대체 왜?’
끝없이 의문을 던질 뿐, 충격으로 인해 반응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정작 배도빈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별일 아닙니다.”
무덤덤히.
평소 그대로의 말투였다.
“오늘 참가한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이 완벽한 연주를 했고 다음 순서가 남았을 뿐입니다.”
“도빈아!”
그의 동료들은 믿을 수 없었다.
자세한 상황을 알지 못했으나 시력을 잃은 사람이, 느긋하게 관객을 상대로 할 말이 아니었다.
관객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희망에게 크나큰 시련이 닥 쳤는데 그의 말대로 별일 아니게 취급할 순 없었다.
“그러나 아쉽게 신경 쓰지 않을 수 없겠죠. 저는 이 콩쿠르에서 물러나겠습니다.”
배도빈이 고개를 숙였다.
동정이든 단순한 관심이든.
어떤 식으로든 투표에 영향이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더 이상 공정할 수 없는 이 상황을 지속하는 건 그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 일이었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가 자세를 바로할 때까지 정적이 흘렀다.
배도빈이 마이크를 내리고 말했다.
“지훈아.”
그때까지 충격으로 굳어 있던 최지훈이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는 반사적으로 무대 위로 올라섰 고 배도빈에게 다가갔다. 떨리는 손으로 형제를 붙잡자 배도빈 역시 최지훈을 끌어 잡으며 당부했다.
“따라오지 마. 너가 누군지, 어떤 음악을 하는지 들려줘. 듣고 있을 테니.”
단호한 어투.
한국말이라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그가 그의 형제에게 어떤 말을 했다는 것은 충분히 인지되었다.
“너••••••
“멀핀. 안내 부탁할게요.”
“ 네.”
“도빈아!”
배도빈은 최지훈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저 비서의 부축을 받아 밖으로 향할 뿐이었다.
‘도빈아.’
최지훈이 뒤늦게 그를 쫓았고 그의
발소리를 확인한 배도빈이 소리쳤다.
“오지 말라 했잖아!”
그를 부축하고 있던 이들은 배도빈 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최지훈이 나서고 나서야 그에게 한 말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무슨 말이야! 네가 이런데 어떻게 가만있어! 왜 이런 거야? 어? 갑자 기 왜 눈이!”
“정신 차려!”
배도빈의 외침에 최지훈이 걸음을 멈췄다.
“별일 아니야. 쉬면 나아.”
“갑자기 앞이 안 보이는데 어떻게 걱정을 안 해!”
“안 해도 돼.”
최지훈은 이 순간마저도 황당한 말을 내뱉는 배도빈을 가만 둘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남긴 말 때문에 더는 움직일 수 없었다.
“네 말대로 누구에게도 지지 마. 그런 뒤에 천천히 얘기해.”
“배도빈!”
“너랑 관객부터 생각해.”
배도빈이 다시 걷기 시작했고 최지훈은 더 이상 그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필사적으로 자신을 억눌렀다.
그가 돌아선 순간.
객석에 있던 가우왕이 콘서트홀을 벗어나 복도로 나왔고 최지훈과 스 쳐 지나갔다.
“배도빈!”
가우왕이 달려들자 배도빈이 고개를 저었다.
“소리 치지 마요. 고막 떨어지겠네.”
“지금 농담할 때야? 어? 대체 뭐가 문젠데!”
“시끄럽다고!”
가우왕과 단원들이 배도빈이 부축해 구급차로 인도했고, 각자의 차량으로 그를 쫓았다.
남겨진 최지훈은 눈을 감고 손목과 손가락을 스트레칭하며 놀란 가슴을 진정 시켰다.
‘안 되겠어.’
그러나 괜찮을 리 없었다.
아무리 침착해지려 해도 너무나 걱 정되어, 자꾸 나쁜 생각이 들어 가만있을 수 없었다.
배도빈을 쫓으려 일어선 순간 차가 운 목소리가 그의 목덜미를 잡았다.
“어디 가.”
엘리자베타는 평생의 벽이었던 남 자와 승부를 가리기 위해 오늘만을 기다렸다.
최지훈도 그녀도 더 이상 콩쿠르에 출전하지 않을 시기였고 설사 그러 고 싶다 해도 이제는 출전 자격 연 령에 제한되었다.
정말 마지막인데.
오늘을 놓칠 순 없었다.
“도빈이가 아픈 거 같아요. 병원에 가야 해서 중요한 일 아니면 나중에 해요.”
엘리자베타가 복도를 빠져나가려는 최지훈을 막아섰다.
최지훈은 당황하여 그녀를 보았다가 옆으로 피했지만 엘리자베타는 거듭 그를 막아섰다.
“급해요.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다음에 이야기해요.”
최지훈이 그녀를 뿌리치고 몇 걸음 내디뎠다. 점차 빨라지던 그를 엘리 자베타가 다시 불러세웠다.
“오늘 아니면 우리 승부 못 내.”
“••••••네?”
엘리자베타는 마른침을 삼키고 최지훈을 뚫어지게 보았다.
평생을 앞서 있던 남자.
마지막이라 생각했던 콩쿠르에서 부상을 입고 멋대로 떠난 그를 생각 하며 칼을 갈았다.
그런데 정작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조금도 자신을 신경 쓰지 않아 보여, 그녀의 자존심은 무참히 짓밟히 고 말았다.
그녀가 눈물을 참아내는 건.
분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만이 아주 작은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아냐.”
엘리자베타가 돌아섰다.
눈물을 삼키고 대기실로 돌아가려는 순간, 놀라서 뛰쳐나온 차채은이 최지훈을 불렀다.
“오빠!”
“채은아.”
“무슨 일이야? 도빈 오빠 왜 그러 는데?”
“모르겠어.”
엘리자베타는 뒤돌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배도빈과의 관계에서도.
차채은과의 관계에서도 비집고 들어갈 틈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라이벌로서의 관계에서도 조금도 의식되지 않는 듯했기에 참았던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다.
그녀가 서둘러 대기실로 향하자 차채은이 그제야 그녀를 확인하곤 물었다.
“툭타미셰바 아니야?”
“ 맞아.”
꺼림직한 느낌에 거듭 물었다.
“둘이 무슨 일 있었어?”
“아니.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던 거 같긴 한데……. 아, 샤리테로 간 대.”
최지훈이 핸드폰을 열어 멀핀이 보 낸 메시지를 확인했다. 조금도 망설 이지 않고 발을 옮기려 했으나 차채은이 그를 막아섰다.
“오빠 차례 남았잖아.”
“잠깐이면 괜찮아.”
차채은이 고개를 저었다.
“도빈 오빠 그 지경에서도 오빠 신경 써서 남으라 했잖아. 모르겠어?”
“겨우 완성했잖아. 재작년에 손 망 가지면서까지 완성하려 했던 거잖아. 오빠도, 오빠 팬들도 기다리고 있는 거 아니까 꼭 연주하라 한 거잖아.”
차채은이 최지훈의 손을 잡았다.
“자기 때문에 공연 망치면 도빈 오빠 성격에 어떻겠어. 미안해서라도 오빠 안 볼지도 몰라.”
“하지만.”
“괜찮을 거야. 도빈 오빠 그렇게 약하지 않아.”
신뢰를 담은 단호한 말에 최지훈이 차채은의 손을 꼭 쥐며 부탁했다.
“도빈이 잘 부탁해. 끝나자마자 갈 게.”
“응. 걱정 마.”
죠엘에게 소식을 전해 들은 유진희 배영준 부부는 지난 비행기 추락 사 건의 악몽을 떠올리며 다급히 병실을 찾았다.
“도빈아!”
숨이 목 끝까지 차오른 탓에 제대 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으나 병실 에 있던 모두가 그 절박함을 느낄 수 있었다.
배도빈이 누운 채 고개를 돌렸다.
“어머니. 아버지.”
유진희가 아들에게 달려들어 얼굴을 쓰다듬었다. 눈에 붕대를 감고 있는 아들의 모습은 그녀를 무너뜨 리기에 충분했다.
“아아. 아아아아.”
“괜찮아요. 좀 쉬면 돼요.”
배영준이 배도빈의 비서 죠엘 웨인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도빈이가 왜.”
“그게••••••
배도빈은 망설이는 그녀에게 대신 설명해 줄 것을 청했다.
죠엘 웨인은 배도빈이 비행기 추락 사고 이후 후유증을 앓게 되었고 몸이 피로해지면 빈혈이 나는 것처럼 시력에 문제가 생기게 되었음을 전했다.
그 뒤 배도빈의 전속의 중 한 명 이 병실을 찾아 그의 상태가 원인을 찾을 수 없고, 다행히 반복 관찰한 결과 몸이 활력을 찾으면 자연스레 시력도 회복됨을 설명했다.
“다만 언제 회복될지는 좀 더 지켜 봐야 합니다. 우선 안정하며 내일까지는 상황을 지켜보도록 하죠. 걱정 되시더라도 편히 있을 수 있게 해주세요.”
전속의가 병실을 나서자 단원들이 콧물과 눈물을 함께 쏟고 있던 프란츠를 데리고 나섰다.
“몸이 이 지경인데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러나 가우왕은 얌전히 밖으로 나 서지 않았다.
“나중에 말해요. 피곤해요.”
“……빌어먹을.”
가우왕이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 섰고 사카모토 료이치가 배도빈의 손을 포개어 쥐곤 말했다.
“벌써부터 이러면 어쩌나. 부디 몸 조리 잘하게나.”
“그럴게요.”
배도빈과 사카모토는 다시는 서로를 잃고 싶지 않았으나, 반드시 그 시간이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에 더욱 애틋할 수밖에 없었다.
“내일 또 오겠네.”
“네.”
사카모토가 일어서서 배영준 유진 희 부부도 위로했다.
“씩씩하니 분명 괜찮아질 겁니다.”
부부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병실 에는 마침내 가족만이 남았다.
유진희는 아들의 손을 쥐고 머리를 쓸어 넘겼다.
“울지 마세요.”
“얘는. 엄마가 울긴 왜 우니?”
눈물이 방울 져 떨어지는 소리, 코를 훌쩍이는 소리와 같은 작은 소리 로도 알 수 있었다.
어머니가 얼마나 슬퍼해하는지.
“걱정하실 것 같아서 말 안 했어요. 의사도 관리만 잘하면 괜찮을 거라 했고.”
“이 녀석아, 지금 이게 관리를 잘 한 거야?”
배영준이 처음으로 아들을 탓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 너무나 자랑스러운 아들이 이렇게 몸을 함부로 다루는데 가슴이 타들 어가고 못 박히는 것만 같았다.
“건강해야 음악도 계속 할 거 아니 냐. 아무리 좋은 곡을 쓰고 멋진 연주를 하면 뭐 하니. 응?”
아버지의 걱정 가득한 말에 배도빈 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럴게요.”
부모가 얼마나 슬퍼하고 속상해하 는지 익히 알고 있었기에 다른 말은 굳이 꺼내지 않았다.
“저 좀 잘게요.”
“그래. 엄마랑 아빠 근처에 있을 테니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 고.”
유진희가 호출 버튼을 꼭 쥐어주었다.
“아, 나가시기 전에 방송 좀 틀어 주세요. 콩쿠르.”
배영준은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푹 자라고 하고 싶었으나 아들이 음악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번 콩쿠르를 얼마나 중히 여기는지 알았기 에 속상한 마음을 숨기고 방송을 틀 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