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501화
108. 건반 위의 구도자(1)
콘서트홀로 들어서기 전 최지훈이 서 있기에 다가갔다.
녀석이 기척을 느끼고 돌아서고는 금방 얼굴을 구겼다.
“괜찮아?”
“보자마자 무슨 소리야.”
“너 지금……
“최고야. 가우왕 코를 납작하게 해 주기에 오늘보다 좋은 날도 없지.”
“농담하지 말고.”
“농담 안 하는 거 알잖아.”
녀석이 두 손으로 내 얼굴을 붙잡고 이리저리 돌리며 살피는데 뿌리 칠 힘이 없어 가만있었다.
“봐. 평소라면 무슨 짓이냐고 했을 텐데.”
“시끄러워.”
슬쩍 고개를 돌리니 사카모토의 제자가 시선을 피했다.
“왜 이렇게 무리했어. 응?”
최지훈은 툭타미셰바나 주변은 신경도 쓰지 않고 나를 이끌어 자리에 앉혔다.
“그럴 일이 있었어.”
“무슨 일인데.”
손짓을 하니 녀석이 귀를 가까이 했다.
“완성했어.”
자세를 바로 한 최지훈은 무슨 뜻 은지 이해 못 하는 듯하다가 눈을 크게 떴다.
“ 정말?”
아무래도 이해한 모양.
고개를 끄덕이니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흥분한 기색을 보인다.
“그럼 오늘 경합을 펼칠 피아니스트들을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때마침 밖에서 멀핀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무대로 향하려는 최지훈의 팔을 잡았다.
최선을 다하라고.
죽을 힘을 다해 네 기량을 보이라고.
그래서 당당히 베를린 필하모닉의 피아니스트임을 뽐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녀석의 표정을 보니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지금까지 봤던 얼굴 중에 가장 태 평해 보인다.
큰 무대에 오르기 전 부담감에 손을 떨거나 불안에 차 기도를 하던 어릴 적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제법인데.”
조언 대신 자랑스러운 마음을 담아 말하자 녀석이 빙그레 웃는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퍼스트 피아니스트니까.”
“좋아.”
자신감을 보이니 더 바랄 게 없다.
“아무한테도 안 져. 가우왕 씨에게 도 네게도.”
“어쭈.”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쉬어도 돼.”
“웃기지 마.”
녀석과 농담을 나누며 계단을 올랐다.
추첨 결과도 마음에 든다.
피곤한 탓에 먼저 하면 좋겠다 싶었는데 첫 번째 순서로 나서게 되었고 최지훈이 마지막.
녀석이 어떤 연주를 할지 편하게 감상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무대 앞으로 향하자 관객들이 여느 때와 같이 열렬히 환호해 주었다.
“마에스트로!”
“배도빈! 배도빈!”
“마왕님! 여기 좀 봐주세요!”
슬쩍 앞쪽을 바라보니 푸르트벵글러와 지메르만이 기대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다.
가우왕도 예나와 함께 찾아와 팔짱을 끼고 있다.
어제 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를 연주하며 막심을 큰 차이로 이겼다 고 들었는데, 그 행복을 하루 만에 짓밟는다 생각하니 그가 조금 가여워진다.
또한 어머니 아버지와 도진이가 각 자 일로 오지 못한 것과 윤희, 소소 등 일부 단원이 오늘 연주회 준비로 빠진 것도 애석한 일.
‘오늘 연주를 놓치다니 불쌍하기도 하지.’
피아노 앞에 앉아 숨을 깊게 들이 마셨다.
오늘 연주할 곡은 베를린 환상곡을 피아노 독주로 편곡한 것.
관객들이 내는 작은 소리마저 사라 지고 공기가 차분히 가라앉길 기다 리다 건반 위에 손을 얹었다.
하강하는 아르페지오.
긴 시간을 넘어 다시 눈을 떴다.
혹독한 추위는 곧 녹아내리고 멀리 타국에서 고향을 그리워한다.
고향의 음악.
이름 모를 음악가가 남긴 곡을 들 으며 향수병을 달래고 조금씩 새 고 향에 정을 붙일 즈음.
참을 수 없는 갈증으로 다시 음악을 시작했다.
운명일까.
한 첼리스트에 의해 당도한 베를린 의 악단은 내 이상과 같았다.
과감하고 엄격하면서도 풍부한 감 수성을 가진 지휘자와 각자의 위치 에서 최고 수준의 활약을 펼치는 연주자.
무대를 두르고 있는 객석.
소리가 풍부히 울리는 콘서트홀.
그들과 함께했던 반년은 그곳이 내 가 있어야 할 자리라는 걸 깨닫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노래하자.
이 벅찬 마음을 가둘 길이 없다.
소리 높여 노래해 베를린 곳곳에 이 기쁨을 전하자.
내일은 또 어떤 음악을 함께할지 생각하면 피로는 어느새 모두 잊히 고 가슴이 끓어오른다.
베를린이여, 나의 성채여.
내가 왔음을 알려라.
세계에 내가 돌아왔음을 크게 알려라.
건반 위을 노니는 손이 가볍기 그지 없다.
‘좋아.’
만족스럽다.
이만하면 베를린에 대한 내 기분이 모두 전달되었으리라.
가우왕도 깜짝 놀라고 있을 터.
그런 생각을 하며 1악장을 마무리 했는데.
조금씩 시야가 좁아진다.
‘ 설마.’
최근 무리한 탓인지 빈혈이 나듯 어지러움과 함께 어둠이 찾아왔다.
하필 지금.
1악장은 어떻게든 마쳤지만 순간 어지러움 때문에 손을 건반에서 떼 고 말았다.
재개해야 하는데.
건반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
‘빌어먹을.’
주변은 고요하다.
착하고 순한 이들이 기침이라도 할 수 있는 짧은 간격마저 숨죽이고 연주를 기다리고 있다.
내 상태를 알게 되면 직원들이 기를 쓰고 말릴 것이 뻔한 일.
이곳을 찾은 3,500명의 관객과 디 지털 콘서트홀에 접속한 수백만 명 의 시청자를 두고.
완벽하게 진행된 이 연주의 완성을 앞두고 그럴 순 없다.
어떤 음이라도 하나만.
그것만 확인할 수 있다면 앞이 보이지 않아도 연주할 수 있다.
수천, 수만 번을 반복한 만큼 시력 따위 장애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아니.
하지만.
제길.
시간을 너무 끈 탓인지 객석 쪽에 서 동요하는 듯하다.
첫 음표는 F#.
요행을 바라며 건반을 누른 순간 D음이 울렸다.
아무도 이상함을 알지 못하게.
그대로 연주를 이어나간다.
원곡과는 전혀 다르게 시작해 버렸으나 이 정도 일은 해프닝일 뿐.
즉홍 연주는 가장 자신 있는 분야다.
쓸모 없어진 눈을 감고.
오직 몸에 각인된 감각에 의지해 건반을 탐한다.
이 연주를 듣고 있을 수백만 명의 백성에게 너희의 왕이 건재함을 알 리기 위해 더욱 과감해진다.
더. 더.
더욱 크게 알리리라.
* *
가우왕은 배도빈의 연주를 듣는 순 간 그가 한 단계 더 나아갔음을 알 수 있었다.
여전히 과격하나 노트 하나 하나의 소리가 단단히 응집되어 있었고 필 요에 따라 디테일이 더해졌다.
‘어느 틈에.’
스승 지메르만과 본인 그리고 최지훈만의 영역에 또 한 사람이 들어선 것.
그것 없이도 완벽하다 생각했던 피아니스트가 자신에게 없던 무기까지 갖추니 예사로울 수 없었다.
‘그간 방에 틀어박혀 뭘 하나 했더 니.’
자신을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들이 무례하다고 여겼던 가우왕은 자신 또한 배도빈에게 무례했음을 인정해야 했다.
완벽하다니.
이 짧은 시간 동안 또 한 번 발전 하지 않았는가.
모든 음악가가 완벽하기 위해 노력 하나, 적어도 가우왕과 배도빈은 완벽이란 단어로 가능성을 배제당하길 거부했다.
완벽해지는 순간.
완벽한 곡을 만든 순간 그 뒤에 음악을 할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은 모순적이 게도 가장 완벽에 가까우면서도 자신의 한계, 끝을 인정하지 않았다.
‘내가 십 년을 노력해서 얻은 걸 겨우 요 얼마간에 이뤘단 말이지.’
가우왕은 한쪽 입술을 들어 올리며 또 동시에 감탄하며 연주에 집중했다.
‘믿을 수 없군.’
한편 사카모토 료이치 역시 또 한 번 진일보한 배도빈의 연주를 믿을 수 없었다.
‘대체 어디까지 나아갈 셈인가, 도빈 군.’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지만 더욱 견고해진 타건은 배도빈의 가장 큰 장점이었던 선명한 심상을 강화했다.
마치 화질이 개선된 듯한 기분마저 들 정도로 그가 가진 깊은 음악성을 보다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누구 보다도 잘 아는 사카모토였기에.
배도빈이 어떤 경지에 이르렀는지, 그 상태에서 또다시 한 걸음 내디디는 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너무도 잘 아는 사카모토였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대단하네요.’
해설을 맡은 크리스틴 지메르만조 차 청력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지금껏 갖추지 못했던 것을 선보이는 연주에 그녀는 더 이상 배도빈에 게서 부족함을 발견할 수 없었다.
‘어쩌면 왕이만큼.’
그녀는 자신을 넘어선 제자를 떠올 릴 수밖에 없었다.
피아니스트가 이를 수 있는 가장 먼 곳에 홀로 이르렀다는 생각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었고.
그것은 이어지는 연주로 명백해지 고 말았다.
배도빈의 연주는 조금씩 힘을 더해 가고 있었다.
베를린의 전경을 훑는 듯.
섬세한 연주는 조금씩 확장되었다.
광활한 대지와 눈부신 태양을 그리려는 듯 배도빈은 88개의 건반을 폭넓게 활용했다.
그러면서도 끝을 모르고 빨라졌다.
단 한 번의 미스 터치도 없이 가 장 완벽한 순간에 울리는 소리.
최지훈이 빙그레 웃었다.
정말 많은 사람이 뛰어난 기량을 보였지만 최지훈은 배도빈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연주하는 사람을 알지 못했다.
‘ 영화야.’
바이올린 같은 현악기와 달리 피아노는 연속적일 수 없었다.
한 번 건반을 누르면 소리는 한정 적이고 다른 음으로 이어질 수 없었다.
여러 장의 그림을 빠르게 보이면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처럼, 피아노 역시 여러 음을 연속적으로 연주하여 이어지는 것처럼 들 릴 뿐이었다.
배도빈은 그것을 너무나 잘 활용했다.
너무나 선명한 그림을 빠르고 느리 게 들려주며 확고한 주제를 전달하는 연주.
그것이 배도빈이 추구하는 이상적 인 음악이었다.
최지훈은 언제나 자신의 목표였던 배도빈의 연주에 다시금 감탄하며 눈을 감았다.
너무나 완벽한 연주 때문에.
최지훈도 그 누구도 그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상치 못했다.
1악장이 끝나고.
평소보다 조금 더 시간을 끈 뒤에 시작된 연주는 베를린 환상곡이 아니었다.
‘ 뭐야?’
차채은은 배도빈의 연주에 당황했다. 너무나 자연스러웠으나 연주되는 곡은 더 이상 베를린 환상곡이 아니었다.
격렬히 몸부림치는 듯한 연주.
지금까지 듣지 못한 음악이었다.
서정적인 1악장과 달리 배도빈 본 연의 모습으로 돌아간 즉흥 연주에 차채은은 연유를 알 수 없는 불길함을 느꼈다.
ㄴ 캬 이게 배도빈이짘ㅋㅋㅋ
ㄴ 베를린 환상곡이 아닌데?
ㄴ 눈 감고 있잖아?
ㄴ 심취해서 즉흥해서 연주하는 듯.
배도빈의 연주에 빠진 시청자들의 채팅도 곧 잦아들었다.
너무나 완벽한 연주였기에 베를린 환상곡이 달라졌음에도 이내 배도빈 이 펼치는 즉석 연주에 빠져들고 말았다.
‘못 말리는 녀석이라니까.’
푸르트벵글러도 가우왕도 최지훈마 저도 배도빈의 행동을 의아히 여겼 지만 이내 그 환상적 즉흥곡에 빠지고 말았다.
30 분.
길고긴 연주 끝에.
“브라-보!”
“브라-보!”
연주를 마친 마왕을 향해 만백성이 일어나 경의를 표했다.
“빌어먹을 꼬맹이.”
우승을 확신하던 가우왕은 결승전 에서 배도빈과 세 번째, 진정 승부를 가릴 것을 기대하며 박수를 보냈고.
‘역시 도빈이야.’
최지훈 또한 20분이 넘는 시간을 즉 홍 연주로 채운, 그러고도 완벽한 모 습을 보인 형제를 위해 손뼉을 쳤다.
우레와 같은 환호와 박수 소리가 루트비히홀을 가득 채우길 10분.
배도빈은 건반에서 손을 떼고 천천 히 일어났다.
“꺄아아아아!”
“마에스트로!”
“배도빈! 배도빈! 배도빈!”
그러자 그를 향한 연호가 더욱 커졌고.
콰당.
그가 의자에 걸려 넘어졌을 때는 거짓말처럼 고요해졌다.
뭐야?
ㄴ지쳤나?
ㄴ 아무리 지쳐도 눈앞에 있는 의자 에 걸려 넘어지나?
ㄴ 그러게. 엄청나긴 했어도…….
모두 당황하고 있었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위용을 과시했던 그들의 왕이 넘어졌음에.
또 손을 뻗어 앞을 가늠하고 있는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배도빈이 손을 휘저은 끝에 의자를 부여잡고 일어난 순간.
“보스!”
두 사람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이자벨 멀핀이 진행자석을 박찼고 죠엘 멀핀은 무대 뒤에서 다급히 올 라섰다.
그 갑작스러운 사태에 객석과 채팅 방이 심히 동요했고.
“도빈아!”
그의 상태를 몰랐던 푸르트벵글러 와 사카모토,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 들이 무대로 모여들었다.
“뭐야! 왜 이래! 어?”
푸르트벵글러가 배도빈을 끌어안고 소리치는 도중.
가우왕과 최지훈은 아무 행동도 하 지 못하고 굳은 채 그 상황을 지켜 보고 있었다.
“도빈아! 이 녀석아!”
“도빈 군! 도빈 군!”
푸르트벵글러와 사카모토에게 안긴 배도빈이 그들을 밀어내며 나지막이 말했다.
“진정 좀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