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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500화 (500/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500화

    107. 악성(10)

    그런 최지훈의 마음과 반대로.

    다닐 베레조프스키는 평소 그의 기 량을 감안했을 때 다소 아쉬움이 남는 연주를 선보였다.

    아버지의 재능을 그대로 물려받았다는 세간의 평이 무색했다.

    “이로써 배도빈 콩쿠르 2라운드 A 조 공연이 모두 마무리되었습니다. 멋진 연주를 들려주신 네 분께 감사 드리며, 실시간 투표 결과 집계가 이뤄지는 사이, 해설위원 두 분의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이자벨 멀핀이 해설위원석을 바라 보았다.

    크리스틴 지메르만이 슬쩍 입을 열었다.

    “정말 멋진 시간이었습니다. 앞으로 오늘만 같다면 더 바랄 게 없겠어요.”

    그녀는 첫 번째 연주를 맡았던 막심 에바로트에게 남겼던 메모를 보 며 말을 이었다.

    “에바로트는 과장하는 것만이 표현 의 전부가 아님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정제된 타건은 작지만 분명히 청자의 가슴에 닿았죠. 무척이나 매 력적이었습니다.”

    “확실히 그 이름에 부족함이 없었다.”

    푸르트벵글러 역시 지메르만의 의 견에 동조했다.

    “오늘은 전과 달리 피아노 소리가 더 잘 들리도록 편곡했는데, 이쪽이 좀 더 좋군. 전체적인 음량이 부족하지 않을 수 있다는 문제를 탁월히 해결했어.”

    푸르트벵글러가 다음 연주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소망사랑.”

    푸르트벵글러가 말끝을 늘이자 소 망사랑이 주먹을 쥐고 눈을 꼭 감았다.

    “단단함이 좋았어. 장식음 욕심을 부리는 것도 자신의 기량을 잘 가늠 하면서 넣어 과하지 않았다. 그러나 때론 과감해야 할 때도 있다는 걸 알아야 할 것이야.”

    푸르트벵글러가 고개를 돌렸다.

    지메르만이 미소로 화답하며 평을 이어나갔다.

    “한국에는 정말 재능 있는 연주자 가 많은 것 같네요. 부담을 느낄 자 리인데도 자기 실력을 유감없이 보 여주는 기개가 좋았습니다. 사소한 아쉬움이 몇 있지만 분명 좋은 연주였어요.”

    두 거장의 평에 김소망사랑은 더없이 기뻐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 시대 최고의 지휘자와 피아니스트에게서 장래성을 인정받으니 그 어떤 말보다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 다음은.”

    지메르만이 빙그레 웃었다.

    자랑스러운 첫 번째 제자를 평할 차례였다.

    “더욱 정진해 주길 바라여 그간 칭 찬을 아꼈지만 오늘 연주를 들으니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다고 느꼈습니다. 1년 전과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네요.”

    “괴물 같은 곡을 연주하면서 특유 의 타건이 다소 아쉬웠는데, 그 점 마저 보강했지. 완벽하다.”

    두 거장의 극찬에 카메라가 가우왕 의 얼굴을 잡았다.

    그는 당연한 일이라는 듯 거만하게 앉아 있었다.

    “다음은 다닐 베레조프스키.”

    푸르트벵글러가 참가자석에 앉아 있는 다닐을 노려보았다.

    “실망이 크다.”

    그의 말에 다닐은 눈을 감고 혀를 깨물었다. 오늘 자신의 연주가 얼마 나 꼴사나웠는지 자각하고 있던 탓 이었으며, 동시에 또다시 아버지와 비교당할 것을 직감한 탓이었다.

    아버지 밀스 베레조프스키는 푸르트벵글러와 동시대의 전설적인 피아니스트로 한때는 글렌 골드, 크리스

    틴 지메르만, 사카모토 료이치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한 인물이었다.

    그 탓에 다닐은 자신의 피나는 노 력조차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은 것으로 취급당했고.

    조금이라도 부족함을 보이면 아버 지에게서 물려받은 재능을 낭비하고 있다는 평을 받아와야 했다.

    오늘도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더 잘할 수 있는데.’

    부담감 때문에 본 실력을 펼치지 못했다는 생각마저 함께 드니 다닐 은 분하고 또 분했다.

    “작년 빈 필하모닉과의 협연 때보

    다도 못하지 않았나. 대체 1년 사이 에 무슨 일이 있었지?”

    다닐 베레조프스키가 고개를 들었다.

    푸르트벵글러는 여전히 강인한 눈 빛으로 그를 추궁하고 있었다.

    “ 예?”

    “어찌 작년보다 못 하냐고 물었다.”

    “그때 연주를…… 기억하십니까?”

    다닐이 되묻자 푸르트벵글러가 진 노했다.

    “내가 치매라도 걸린 줄 아느냐! 그 날렵했던 타건은 어디 가고 머저리가 여기 와 있냔 말이다!”

    다닐은 어안이 벙벙했다.

    살아 있는 전설의 지휘자 푸르트벵글러의 마 자신의 예전 연주를 기억 하고 있다니.

    더욱이 오늘의 연주와 비교하며 왜 제 실력을 내지 않았냐고 추궁하니, 자신을 알아주는 것만 같았다.

    “왜 대답이 없어!”

    “에바로트 씨와 왕 씨의 연주가 너 무 대단해서…… 부담을 느꼈습니다.”

    “간이 그렇게 작아서야 어떻게 연주자로 활동할 셈이냐. 에바로트와 가우는 신경 쓰면서 콘서트홀을 찾은 관객들은 안 보였더냐.”

    머리를 얻어맞은 듯했다.

    두 피아니스트의 기세에 눌려 관객을 생각지 못하고 말았다.

    “쯧. 못난 놈.”

    차갑고 엄하기 그지없는 말이었으나 다닐 베레조프스키에게는 너무나 따뜻했다.

    밀스 베레조프스키의 아들이 아닌.

    피아니스트 다닐 베레조프스키로서 받은 첫 평이었기 때문.

    “감사합니다.”

    그는 눈물을 훔치며 답했다.

    해설위원들이 평을 마치고 이자벨 멀핀이 마이크를 쥐었다.

    “두 분 해설위원의 말씀 잘 들었습니다. 두 분의 이야기는 추후 베를린 필하모닉 홈페이지에서 전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이자벨 멀핀은 관객들이 더는 못 기다릴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럼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오늘 투표는 총 710만 1,109분께서 참여 해 주셨습니다. 결승전에 오를 피아니스트는 과연 누구일지. 투표 결과 공개해 주시기 바랍니다.”

    멀핀의 말과 동시에 전면 스크린에 각 피아니스트의 이름과 사진 그리 고 그들이 받은 표수와 비율이 명 시 되었고.

    그 충격적인 결과에 루트비히홀과 디지털 콘서트홀 채팅창이 요동쳤다.

    배도빈 콩쿠르

    2라운드 A조 경합 결과

    ist 가우왕(79 1%, 5,616,977표)

    2nd 막심 에바로트(19.8%, 1,406,020표)

    3rd 김소망사랑(0.7%. 49,707표)

    4th 다닐 베레조프스키 (0.4%, 28.405Ä)

    * * *

    【황제, 마침내 평정하다!]

    【가우왕, 큰 격차로 라이벌을 앞서다!】

    【배도빈, 막심 에바로트를 제친 가우왕. 일인자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더욱 완벽해진 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

    【가우왕, “당연한 결과.”】

    【막심 에바로트, “그는 끝없이 발전한다. 나 역시 안주하지 않을 것.”]

    【오늘도 모습을 보이지 않은 배도빈!]

    【리파스토, “배도빈이라면 분명 칼을 갈고 있을 것이다. 현재로서는 어떤 추측도 이르다.”]

    ㄴ 진짜 가우왕 미쳤닼ㅋㅋㅋㅋ

    ㄴ 막심 상대로 79.1 퍼센틐ㅋㅋㅋ

    ㄴ 이 정도면 진짜 정복이지.

    ㄴ 황제 타이틀 인정한다 진짜. 도라이급이네.

    ㄴ 당연한 결과랰ㅋㅋㅋ 심지어 맞는 말이라 뭐라고도 못 함ㅋㅋㅋ

    ㄴ 이게 가우왕이지. 평소엔 등신 같아도 실력으로는 아무도 못 깜.

    ㄴ 가우왕 인터뷰 진짜 멋있음.

    ㄴ 어디서 봄?

    ㄴ [링크] 여기서.

    Q. 배도빈 콩쿠르 결승에 진출했다. 소감이 어떤지.

    A. 당연한 결과.

    Q. 라이벌 막심 에바로트와 큰 격 차를 보였다. 16년 만의 재대결 결 과에 만족하는지.

    A. 의미를 두지 않는다. 사실이 확 인되었을 뿐.

    Q. 어떤 뜻인가.

    A. 이미 오래 전부터 나는 독보적 인 위치에 올라 있었다. 어느 누구 도 내 위치에 함께하고 있지 않다.

    Q. 대단한 자신감이다. B조의 배도빈, 최지훈도 마찬가지인가?

    A. 그렇다.

    Q. 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다.

    A. 1라운드에서 배도빈은 변치 않은 기량을 보였다. 그가 지휘봉을 잡지 않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어 쩔 수 없다. 분명 나도 그도 서로를 의식해 더 높은 곳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Q. 최지훈에 대해서는? 우승 후보 중 유일하게 맞상대 해보지 않았다.

    A. 지금까지 보여준 기량으로는 막심과 큰 차이 없어 보인다. 분명 장래가 기대되지만 현재로서는 그 정도 수준일 뿐.

    Q. 배도빈 콩쿠르는 피아니스트 가우왕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A. 최고의 작곡가에게 나를 중명 하는 일.

    Q. 최고의 작곡가라 하면 역시 배도빈 인가.

    A. 그렇다. 그보다 피아노를 잘 이 해하고 있는 사람은 없다. 또 나보 다 피아노를 잘 다루는 사람도 없다. 배도빈 콩쿠르는 그것을 중명하는 과정일 뿐이다.

    ㄴ ㅋ 개웃긴 게 가우왕이 ‘그’라고 하는 거 실제로는 죄다 꼬맹이라 함ㅋㅋㅋㅋ

    ㄴ 최지훈은 순딩이라 하곸ㅋㅋㅋ 막심은 심지어 그놈임 ㅋㅋㅋㅋ

    ㄴ 기자가 필사적으로 의역함ㅋㅋㅋ

    한편 가우왕의 인터뷰를 확인한 최지훈은 눈을 가늘게 뜬 채 기사 내 을 반복해 읽었다.

    배도빈과 막심 그리고 본인을 인정 하는 듯하면서도 한참 아래로 여기는데, 자극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도빈이 곡을 가장 잘 연주하는 사람은 나야.’

    그러는 한편 그는 배도빈이 가우왕의 인터뷰를 확인하면 크게 화낼 거라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괜찮으려나.’

    배도빈이 며칠째 두문불출하고 연습에 매진하고 있었고 또다시 무리 하고 있는 듯해 최지훈으로서는 걱 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가 거듭 발전했음을 두 귀와 눈으로 확인하여 내일이 기 다려지기도 했다.

    ‘같은 콩쿠르에 나선 게 얼마만이 지.’

    어릴 적으로 돌아간 듯해.

    또 과거처럼 일방적으로 바라만 보는 상황은 나올 것 같지 않다고 확 신한 탓에.

    최지훈은 형제와 함께할 내일 콩쿠르가 무척이나 기대되었다.

    ***

    대교향곡을 쓰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날을 새버리고 말았다.

    새벽녘에 들어 쪽잠을 잤음에도 피 로가 풀리지 않아 집무실 소파에 누 워 잠을 청했는데 얼마나 지났을까.

    노크 소리와 함께 죠엘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들어와요.”

    눈을 감고 있는 채로 답했다.

    죠엘이 들어오더니 놀란 기색으로 묻는다.

    “여기서 주무셨어요?”

    “아침에 왔어요.”

    몸을 일으키는데 이곳저곳이 뻐근하다.

    요며칠 무리한 모양.

    젊은 몸이 며칠 밤을 새웠다고 이러니 푸르트벵글러에게 건강을 챙기 라고 할 명분이 없다.

    “많이 피곤해 보이세요.”

    “콩쿠르 전까지 시간 있으니 괜찮아요. 무슨 일이에요?”

    “오케스트라 대전 일정이 나와 안내해 드리려고요.”

    “ 아.”

    그러고 보니 예선 준비를 해야 할 터.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확인하려 바 로 앉았는데 죠엘이 문서를 내 책상 위에 두었다.

    “지금은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급한 일은 아니니 다음 기회에 설명해 드릴게요.”

    “그래요.”

    “콩쿠르 시작 전에 깨워드릴 테니 좀 더 주무세요. 커튼 칠까요?”

    “그래주세요.”

    죠엘이 커튼을 치고 담요를 가져다 주었다.

    덕분에 조금은 편히 누웠다.

    세심한 일 처리에 더해 이런 쪽으로도 신경 써주니 확실히 카밀라와 멀핀이 사람을 잘 뽑았다.

    “산타는 어떻게 지내요?”

    “건강하게 잘 지내요. 최근에는 상 태도 많이 호전되어서 대화도 가끔 나누고요.”

    눈을 뜨고 일어났다.

    “잘 됐네요.”

    “정말 그래요.”

    죠엘이 행복하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나를 다시 눕힌다.

    많이 피곤해 보이긴 한 듯. 누워 있는 게 더 편하기도 하여 얌전히 등을 파묻었다.

    “몰랐는데 타마키 씨가 많이 그리운 모양이에요. 타마키 씨 소나타를 계속 듣고 있어요.”

    둘이 각별했으니 그럴 만하다.

    “그럼 푹 주무세요.”

    죠엘이 방을 나섰고 고요하고 어두운 방 안에서 한 번 더 잠을 청했다.

    “보스. 보스.”

    "으음."

    죠엘의 목소리에 깼다.

    바로 방금 잠든 것 같은데 시계를 확인하니 네 시간이나 홀러 있어 내심 놀랐다.

    “아무래도 몸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신 것 같아요. 의료진에 연락할까요?”

    “아뇨. 콩쿠르 끝내고 푹 쉬면 괜찮을 거예요. 순서 추첨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까.”

    “그래도 혹시.”

    죠엘이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기 에 고개를 저었다.

    “수천 명이 찾아왔고 수백만 명이 기다리고 있어요. 잠깐 피곤할 뿐이 니 걱정 마요.”

    “……알겠습니다.”

    “씻고 바로 갈게요.”

    안쪽 샤워실로 향해 졸음을 몰아낼 겸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렸다.

    대기실로 향하니 꽤 상태가 괜찮아 져 오늘 연주할 곡을 흥얼거리며 신문을 살폈다.

    예상대로 가우왕이 1위로 진출한 모양.

    인터뷰 내용이 있기에 이번엔 또 어떤 헛소리를 했을지 확인하는데, 아주 재밌는 말을 했다.

    아무래도 날 한 수 아래로 여기는 듯하다.

    오늘 연주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은 콧대를 한 번쯤 눌러줘야겠지.

    “보스, 추첨 시작하겠습니다.”

    “ 네.”

    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다시 한번 각인시킬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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