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499화 (499/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499화

    107. 악성(9)

    밤이 찾아온 도시.

    남자는 차갑게 내리는 비를 지켜보 다 그 사이로 발을 내디뎠다.

    비닐로 감싼 기타를 짊어지고 헤진 가죽 재킷 주머니에 손을 파묻고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걸었다.

    주머니 안에는 오디션에서 떨어졌다는 통보지와 월세 독촉장 그리고 지폐 몇 장이 구겨져 있다.

    남자는 집주인이 잠들 때까지 거리를 배회한다.

    그가 잠들었을 때 방으로 들어가 짧게 머물었다 이른 새벽에 나오길 반복한 지 벌써 몇 달째.

    가슴속에서 꿈틀대던 음악을 향한 열정은 이미 차디찬 비에 씻겨 내린 지 오래.

    지독한 절망과 패배감만이 그를 지배한다.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집착과도 같은 사랑에 남자는 고뇌한다.

    집주인이 잠들 때가 되었다.

    비에 젖은, 지친 몸을 이끌고 방으로 향한 남자는 새로 달린 열쇠 구 멍과 복도에 내놓인 낡은 캐리어를 볼 수 있었다.

    집주인이 남긴 쪽지가 남자의 가슴에 박혔다.

    ‘더는 못 기다려 주니 이거 보는 대로 짐 빼게.’

    캐리어 안에는 옷가지 몇 벌과 칫솔 그리고 소중하게 다뤘던 악보들 뿐.

    남자는 한숨 한 번 내쉬지 않고 주머니에 든 지폐 중 절반을 문틈 사이로 밀어 넣는다.

    밀린 월세에는 턱없이 부족했으나 그 나름의 성의.

    건물 처마에 기대어 빗줄기가 가늘 어지길 기다린 그는 새벽녘이 다가올 즈음, 다시 거리로 향한다.

    아무도 봐주지 않는 세상에서 홀로 걷는 도중에도 그의 머리와 가슴에는 음악만이 자리했다.

    아침이 밝아오고 각자의 삶을 시작 한 사람들의 눈에 남자는 그저 거지나 부랑자일 뿐.

    그 안에 비장함은 알 방도가 없다.

    광장에 이른 남자는 기타를 꺼냈다.

    기타 케이스를 열어두고 굶주린 배를 애써 무시한 채, 오디션을 위해 준비했던 자작곡을 연주한다.

    열정일 수 없다.

    사랑이라 할 수 없다.

    단지 음악을 할 수밖에 없는 남자의 연주에 한두 사람이 모여든다.

    행인들은 생을 불사른 연주라는 것 도 모른 채 동전 몇 개를 던져 넣거나 각자의 삶을 위해 그를 스친다.

    ‘ 멋있다.’

    비장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섬세한 타건.

    관능.

    차채은은 막심 에바로트의 연주를 표현하는 데 그보다 좋은 단어를 찾을 수 없었다.

    몇 분간의 짧은 연주만으로 루트비 히홀을 찾은 모든 이를 사랑하게 만 든 남자.

    그가 왜 지난 십수 년간 최고의 피아니스트라 불렸는지 알 수 있었다.

    다음 곡 또 다음 곡에서도 막심 에바로트는 관객들의 마음에 지핀 불씨를 지펴나갔다.

    그가 연주를 마치자 황홀한 기분 도취된 이들이 연심을 가득 담아 박수를 보냈다.

    “어떡해.”

    막심이 등장했을 때만 해도 그 민 망한 차림에 얼굴을 붉혔던 정세윤 기자의 얼굴이 달아올라 있었다.

    “진짜 너무 멋있지 않아?”

    “네.”

    “크로스오버가 이렇게 멋진 장르인 줄 몰랐어. 엄청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인데 화려하고 또 너무 섬세 하니까.”

    정세윤 기자의 호들갑도 충분히 이 해할 수 있었다.

    분명 모순적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서 피어나는 알 수 없는 아름다움.

    그것을 접한 이상 자꾸만 귓가에 아른거려 벗어날 수 없게 되는 치명 적 매력이 있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피아니스트야.”

    한이슬의 말에 정세윤과 차채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뿐만 아니라 막심 에바로트가 작정하고 펼친 공연에 모든 이가 정 신을 차리지 못했고.

    다음 차례인 김소망사랑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쳤나 봐. 정말.”

    소망사랑이 자신의 매니저이자 샛별 엔터테인먼트 3팀 하준일 대리의 팔을 붙잡고 흔들었다.

    “너무 멋있잖아. 그치. 그치.”

    “그러게.”

    “사인 받고 싶어.”

    “당장 연주해야 하면서 무슨 소리 야. 나중에 알아봐 줄 테니까 진정 좀 해.”

    “저런 연주를 듣고 어떻게 진정해. 아, 얼굴도 다시 보니 너무 잘생긴 거 같아.”

    “결혼하고 딸도 있어.”

    “그게 뭐. 피아니스트로 좋다는 말이잖아.”

    “그럼 다행이고.”

    “아, 기분 나빠졌어. 매니저란 사람이 뭐 하는 거야.”

    김소망사랑이 하준일을 탓하고 숨을 가득 들이마셨다.

    충분히 부담을 느꼈지만 2라운드에 이른 그녀는 일찍이 가우왕과 막심 에바로트를 상대로 이길 수 있을 거 라 생각지 않았다.

    하준일과 그녀의 친구들은 김소망 사랑도 홀륭한 피아니스트고 시작도 하기 전에 질 거라고 생각하는 건 좋지 않다고 했지만 그녀의 생각은 달랐다.

    누가 뭐라 해도 가우왕과 막심은 최고의 피아니스트.

    사실을 부정해 봐야 도움되는 것은 없었다.

    김소망사랑은 지금 할 수 있는 일 에 집중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소속사 대표 히무라 쇼우와 소유주 배도빈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성공할 거야.’

    이번 콩쿠르에서 비록 결승전에 오르지 못한다 해도 강한 인상을 남겨 단독 리사이틀을 가질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

    그 솔직한 마음이 통했을까.

    김소망사랑은 비록 막심 에바로트에게 홀린 관객의 마음을 돌리진 못 했으나 여러 음악가에게 괜찮은 인 상을 남길 수 있었다.

    “저 애도 대단하다. 기죽은 티가 전혀 없네.”

    한이슬의 말에 차채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연주를 해낸 거 같아요. 막 심 뒤라서 긴장할 법도 한데.”

    “강단이 있는 거지. 쟤는 체크해 두고 지켜봐야겠어.”

    차채은도 같은 생각이었다.

    만 25살의 어린 피아니스트가 거장 중의 거장 뒤에 제 실력을 온전 히 펼치는 경우는 흔치 않았기에 어 쩌면 심동혁, 남궁예건, 최성신, 손 가을, 최지훈 외에 한국에서 또다시 유망한 피아니스트가 나올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도 잠시뿐.

    “꺄아아아!”

    “사랑해요, 가우왕!”

    다음 연주자가 등장하자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헐.”

    “ 맙소사.”

    무대 위에 모습을 보인 남자는 속 이 다 비치는 망사 셔츠와 캐주얼한 재킷을 입고 있었다.

    진한 스모키 화장을 한 채 턱을 들고 관객을 업신여기는 듯한 시선을 보내며 등장부터 무대를 장악해 버리고 말았다.

    “가우왕 은근 몸 좋다.”

    “그러게요.”

    정세윤의 말에 한이슬이 고개를 끄 덕였다. 두 사람은 은근히 노출도가 높은 가우왕의 패션을 좋아하는 듯 했으나 차채은은 질색했다.

    ‘으. 징그러. 저 아저씨 저런 짓만 좀 안 했으면 좋겠는데.’

    한이슬, 정세윤과 차채은의 반응처 럼 시청자들의 반응도 갈렸다.

    ㄴ 제목에 후방주의 표시 좀.

    ㄴ 세상에 하나님.

    ㄴ 가족끼리 보는데 민망해 죽겠다 이것들아!

    ㄴ 아닠ㅋㅋㅋㅋㅋ 피아노 경연이라곸ㅋㅋㅋㅋ 막심이랑 가우왕 대체 뭐 하는 거얔ㅋㅋㅋ

    ㄴ 막심이랑 가우왕한테 진 사람들 자괴감 쩔 듯ㅋㅋㅋ 저렇게 놀면서 하는데 못 이기면 얼마나 짜증 날까 TTTT

    ㄴ 쟤들 원래 리사이틀 저러고 햌ㅋㅋㅋㅋㅋ 의외겠지만 완전 진심인 거 얔ㅋㅋㅋ

    ㄴ 가우왕 운동 좀 하나 보네. 3대 몇 치려나.

    ㄴ 빼빼 말랐는데 운동은 무슨 운 동. 마르면 저 정도 근육은 다 드러 남.

    ㄴ 가우왕 키가 183인데 몸무게도 80임. 저렇게 말라 보이는 건다 근 육이라서 그런 거임.

    ㄴ 오늘은 무슨 연주 들려줄까.

    ㄴ 라이벌이 나왔으니까 가장 자신 있는 걸로 하겠지. 막심도 자기 히 트곡만 연주했잖아.

    ㄴ 그럼 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 나오나?

    ㄴ 그건 결승에서 해야지. 2라 운드에 막심이 있다 해도 솔직히 킴과 다닐에 질 가우왕이 아니잖아.

    ㄴ 나도 같은 생각. 확실히 우승하 려면 ‘가우왕’은 결승에서 연주하는 게 맞음.

    “어떤 곡을 연주할까요?”

    미카엘 블레하츠가 사카모토 료이치에게 물었다.

    “흐음. 아무래도 페트루슈카가 아닐까 싶네만.”

    “역시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껄껄. 저 자존심 센 남자가 얼마나 우승하고 싶겠는가. 결승에서 도빈 군을 상대로 할 비장의 카드는 남겨두고 싶겠지.”

    “같은 생각입니다.”

    시청자와 관객, 기자들뿐만 아니라 사카모토나 미카엘과 같은 음악인들 도 가우왕이 세 개의 손을 위한 소 나타를 아껴둘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발표되고 1년이 지나도록 아직까지 누구도 연주해내지 못했던 최고 난 이도 곡은 누가 뭐라 해도 가우왕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그러나.

    가우왕이 피아노 앞에 앉고 아홉 개의 건반을 힘차게 내려친 순간 모 두 그 우렁찬 포효에 기함하고 말았다.

    ‘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야.’

    ‘이걸 벌써 연주한다고?’

    ‘그럼 결승은?’

    ‘설마 더 대단한 연주가 남아 있다는 거야?’

    피아노 앞의 가우왕은 초원의 사자 와 같았다.

    맹렬한 타건으로 그려내는 사자의 위엄.

    관객들은 어느새 눈을 감고 그가 펼쳐낸 초원의 풍경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어떠냐.’

    세상 모든 사람이 그를 최고의 비 르투오소로 여겼으나.

    가우왕은 그들이 자신을 얕보고 있다고 여겼다.

    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를 연주 해낸 지도 벌써 1년. 그간 발전이 없었다고 생각하는, 감히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무례하다고 여겼다.

    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는 여전 히 많은 체력을 소모하고, 꾸준히 반복하지 않으면 실수하기 쉬운 곡 이었으나 가우왕이 그에 만족할 리 없었다.

    ‘세 개로는 부족해? 네 개라도 치겠어!’

    허튼소리가 아니었다.

    가우왕은 결승에서 연주하려고 준 비한 곡이 있었고 오늘은 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로 그간 라이벌 취급 받고 있던 막심과의 차이를 명백 히 가릴 생각이었다.

    가우왕의 연주가 절정을 향해 달려 나가고 전 세계가 다시 한번 그 기 적과도 같은 연주에 매료되었을 때.

    막심 에바로트는 슬며시 웃고 있었다.

    ‘못 말리는 친구로군.’

    피아니스트의 연주는 기술적 능력만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느린 템포로 적은 수의 노트로도 충분히 멋진 연주를 펼칠 수 있었다.

    빠르다고 해서, 노트 배열이 복잡 하다 해서 뛰어난 곡이라 할 수도, 연주라 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분명 가우왕은 그러한 악조 건을 모두, 완벽히 소화하면서도 음악성을 잃지 않았다.

    도리어 세상 그 어떤 연주자보다 깊이 있는 연주를 해냈다.

    막심은 적어도 오늘 연주에 있어서 만큼은 자신이 졌다고 판단했다.

    가우왕이 연주를 마치자.

    “브라-보!”

    “브라-보!”

    객석이 떠나갈 것처럼 요동쳤다.

    미카엘 블레하츠가 혀를 내두르며 질색하고 말았다.

    “정말 언제 들어도 경이롭습니다.”

    “껄껄껄. 정말 대단한 피아니스트 일세. 나로서는 도저히 엄두가 안 나는군.”

    “선생님뿐만이 아니죠. 지메르만 씨조차 가우왕 이외에는 불가능하다 고 했으니까요.”

    “결승을 앞두고 이런 연주를 한 게 더욱 믿을 수 없네. 대체 결승에선 어떤 연주를 들려줄지.”

    “이 이상의 연주라. 상상하기 어렵네요.”

    살아 있는 전설 사카모토와 바로 전 세대의 거장 블레하츠마저도 가우왕의 연주에 놀라고 있었다.

    “가우왕!”

    “가우왕!”

    가우왕의 이름이 벌써 10분째 연호되면서 관객들은 흥분을 가라앉히 지 못했고.

    마지막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다닐 베레조프스키의 부담은 더욱 심해졌다.

    ‘제길.’

    그는 가우왕이 왜 하필 자신 앞에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곡’을 연주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분위기라면 어떤 곡을 연주하든 가우왕이 지른 불의 잠열 때문에 관객들을 감동시킬 수 없었다.

    ‘왜. 왜 하필.’

    다닐은 고개를 젓고 심호흡을 하는 등 평정심을 유지하려 해도 자꾸만 치미는 억울한 생각에 진정하지 못 했다.

    “가우왕!”

    “가우왕!”

    대기실까지 전해지는 저 열렬한 환호의 방향을 자신에게로 돌릴 자신 이 없었다.

    그는 도피하고 있었다.

    ‘그래. 누가 있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다들 이해할 거야.’

    다닐은 모두 자신이 얼마나 운이 없는지, 불쌍한지 알아줄 거라 생각 했다.

    그러는 한편.

    최지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 게 무대를 지켜보고 있었다.

    가우왕은 두 팔을 벌리고 고개를 든 채 관객들의 환호성을 만끽하고 있었다.

    ‘더 날카로워졌어.’

    너무나 복잡한 탓에 그 가우왕조차 다소 거칠었던 연주가 1년이 지난 지금, 너무나도 깔끔해져 있었다.

    ‘지금도 계속 발전하고 계신 거야.’

    최지훈은 자신이 가우왕의 자극제 역할을 했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저 어렸을 적부터 자신의 우상이었던 가우왕이 멈추지 않고 계속해 서 걸어나가고 있음에 기쁠 뿐이었다.

    ‘정말 대단해.’

    겨우 따라잡았다고 생각해도 한 걸 음 더 나아가 있는 가우왕과 배도빈을 곁에 둔 남자는 다시금 의지를 태웠다.

    ‘……하지만 저 정도라면.’

    이상했다.

    그렇게 멀게만 느껴졌던 사람인데, 분명 지금도 대단하다고 생각하는데 못 잡을 것 같진 않았다.

    ‘나도 할 수 있어.’

    그는 당장에라도 피아노 앞에 앉고 싶었다.

    다음 참가자를 끌어내서라도 그러고 싶어 안달이 난 가슴을 애써 달 래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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